학봉전집(鶴峯全集) > 학봉속집 제5권 > 잡저(雜著)

퇴계 선생(退溪先生) 언행록(言行錄)

 

 

선생께서는 온계리(溫溪里)에 있는 집에서 태어나셨는데, 대부인(大夫人)이 꿈속에서 공자(孔子)가 문 앞에 있는 것을 보고 선생을 낳았다. - 전해오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 믿을 수는 없으나, 우선은 여기에 기록해 두어 참고하는 데 대비하였다.

선생께서는 6, 7세 때 이미 어른을 공경하는 예의를 알아 어른들 앞에서는 한 번도 오만하게 군 적이 없었다. 깊이 잠든 한밤중에라도 어른이 부르면 깨어나서 반드시 예라고 대답하고 매우 삼갔다.

선생께서 8세 때 중형(仲兄) 이징(李澄)이 칼에 손을 베였는데, 선생께서 통곡을 하였다. 이에 모부인(母夫人)이 말하기를, “손을 베인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어째서 우느냐?”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저렇게 피가 나는데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선생께서 12세 때 숙부인 송재공(松齋公) 이우(李堣)에게 《논어(論語)》를 배우다가 ‘제자(弟子)가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밖에 나가면 우애한다’는 장(章)에 이르러서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경계하기를, “사람의 자식된 자로서의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하였다. 그리고는 그 뒤부터 잠시도 이 말을 잊지 않고 몸소 실천하였다. 어느 날 《논어》 가운데 나오는 ‘이(理)’ 자를 보고 송재공에게 묻기를, “모든 일의 옳은 것이 이(理)입니까?” 하니, 송재공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네가 벌써 글 뜻을 깨우쳤구나.” 하였다. 송재공이 매번 말하기를, “돌아가신 형님께는 이런 아들이 있으니, 돌아가셨으나 돌아가지 않으신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대헌공(大憲公) 이해(李瀣)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는 기남자(奇男子)이다.” 하면서, 선생을 두고 이르기를, “문호(門戶)를 세울 자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젊었을 적에 숙부이신 송재공(松齋公)을 따라 안동(安東)에 갔었는데, - 이때 송재공이 부사(府使)로 있었다. - 어느 날 들판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사냥을 하면서 놀다가 술에 취하여 말에서 떨어졌다. 술에서 깨어난 다음에 나 자신을 통렬하게 질책하면서 경계하여 반성하는 마음을 잠시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척연(惕然)하여 마치 어제 일 같기만 하다.” 하였다.

선생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송재공께서는 학문을 권면함이 매우 엄격하였으나, 이를 말과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셨다. 일찍이 《논어》를 배송(背誦)하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는데도 칭찬하는 말씀이 한마디도 없으셨다. 내가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은 모두 송재공께서 가르치고 독려하신 덕분이다.” 하였다.

18, 9세 때 계당(溪塘)을 두고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슬 띤 풀 무성하게 물가를 둘러 있고 / 露草夭夭繞水涯
작은 못은 맑고 맑아 티끌 한 점 없구나 / 小塘淸活淨無沙
지나가는 구름과 새 본디 관계 있건만 / 雲飛鳥過元相管
제비 가끔 수면을 차 물결 일까 두려웁네 / 只怕時時燕蹴波

하였다. 또 감회(感懷)을 읊은 시가 있는데, 그 시에,

초당에서 만권서를 혼자서 즐기며 / 獨愛林廬萬卷書
한결같은 심사가 십 년을 넘었구나 / 一般心事十年餘
요즘에는 내 마음이 한데 모인 듯하여서 / 邇來似與源頭會
나의 마음 모두 잡고 허공을 바라보네 / 都把吾心看太虛

하였다.

20세 때 《주역(周易)》을 읽고 그 뜻을 강구하였는데, 잠자는 것과 밥 먹는 것을 잊어버리기까지 하였다. 심기(心氣)가 이로 인해 손상되어 그 뒤로는 항상 병을 앓았다.

진사(進士) 허찬(許瓚)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처갓집이 자못 부유하였으나 살찐 말을 타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항상 삐쩍 마른 말을 타고 다녔다.

23세 때 여러 벗들과 영천(榮川)의 의원(醫院)에 모여서 공부하였는데, 상사(上舍) 박승건(朴承健)이 막 《소학(小學)》을 읽고 있다가 선생의 동정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하기를, “공은 전에 《소학》을 읽었습니까?” 하니, 선생이 안 읽었다고 답하였다.

거자(擧子)로 있었을 때 일찍이 군(郡)의 향교(鄕校)에 가서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의관을 반드시 정제하였고 언동(言動)을 반드시 신중하게 하였다. 사람들을 접할 때에는 비록 의젓한 체하지 않아도 저절로 범접하기 어려운 숙연한 기색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공경하면서도 사랑하였다.

처음 태학(太學)에 유학하였을 적에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겪은 뒤라서 사습(士習)이 경박하여 선생의 행동거지가 법도가 있는 것을 보고는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이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무자년(1528, 중종 23) 봄에 사마시(司馬試) 복시(覆試)에 응시하였다가 출방(出榜)을 기다리지 않고 시골로 돌아왔다. 한강(漢江)을 건너기 전에 발표가 나 합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남행길을 계속하면서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32세 때 서울에서 시골로 돌아왔다. 오는 도중에 촌사(村舍)에 묵었는데, 곁에서 도적의 변고가 있어 동행하였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어찌할 줄 몰랐으나, 선생께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33세 때 성균관에 있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이 안자(顔子)라고 칭하였다. 가을에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과 동행하여 여주(驪州)에 도착하였다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뵙고 비로소 정인군자(正人君子)의 논에 대해 들었다.

어려서부터 일찍이 제멋대로 하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서는 반드시 잠자리 옷과 이부자리를 개었으며, 대부인(大夫人)께 문안 인사를 드렸다. 형수를 봄에 있어서는 하루에 여러 차례를 만나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절하면서 공경을 다하였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반드시 해정(楷正)하게 썼는데, 과문(科文)이나 잡서(雜書) 따위를 베낄 때에도 흘려 쓰는 법이 드물었으며, 남에게 써 달라고 부탁한 일이 없었으니, 이는 대개 남들이 쓴 어지러운 글씨를 싫어해서였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기는 하였으나, 계발(啓發)해 줄 스승이나 벗이 없었다. 그래서 수십 년 간을 헤매면서도 어디로 들어가서 어디부터 공부해야 할지를 알 수가 없어 헛되이 마음과 생각만 허비하고 말았다. 그래도 탐색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고 밤새도록 고요히 앉아 있으면서 잠을 자지 않다가 결국에는 마음의 병을 얻어 여러 해 동안이나 배우는 일을 폐지하였다. 그때 만약 스승이나 벗을 얻어서 미로(迷路)를 헤쳐 나갈 길을 지시받았더라면, 어찌 이처럼 헛되이 심력(心力)만 허비하고 늙도록까지 아무 소득이 없는 지경에야 이르렀겠는가.” 하였다. - 이것이 비록 스스로 겸양하여 하신 말씀이기는 하지만, 선생께서 이룩한 학문은 초연히 홀로 얻은 것이며, 스승이나 벗을 말미암지 않은 것임을 역시 알 수가 있다.
선생께서 일찍이 서울에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얻었다. 이때부터 문을 닫고 들어앉아 그 책을 읽었는데, 한여름이 다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다. 이에 어떤 사람이 더위에 몸을 상할 염려가 있다고 경계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책을 읽노라면 문득 가슴속에서 서늘한 기운이 일어나 저절로 더위를 잊는데, 무슨 병이 나겠는가.” 하였다. 《주자전서》를 다 읽고 난 다음에는 마침내 중요한 대목만 뽑아 내어 한 질을 만들었는데, 지금 인쇄하여 간행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가 바로 그 책이다.

선생의 집에 《주자전서》 사본(寫本) 한 질이 있었는데, 책이 몹시 낡아 글자의 획이 거의 떨어져 나간 상태였는바, 이는 많이 읽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역시 삼절(三絶)의 공부를 상상하여 알 수가 있다. 그 이후에 사람들이 이 책을 많이 간행해 냈는데, 새 책을 얻을 적마다 반드시 대조하여 고치고 표시하였다. 그리고 한 번 죽 읽고 나면 장장(章章)마다 두루 꿰뚫어서 이해하고 구절구절마다 환하고 익숙해서, 수용(收用)함이 마치 손에 잡은 것인 듯, 발로 밟은 것인 듯, 귀로 들은 것인 듯, 눈으로 본 것인 듯이 하였다. 그래서 일상 생활에서의 말과 행동, 남의 것을 사양하거나 받거나 취하거나 주거나 하는 일 및 세상에 나가 벼슬하거나 물러나 조용히 사는 일 등에 대한 의리가 이 책의 내용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혹시 누가 어렵고 의심나는 것을 물어 오면 반드시 이 책을 인용하여 대답하였는데, 역시 사정(事情)에 합당하지 않거나 도리(道理)에 마땅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것은 바로 몸소 경험하고 실천해서 마음으로 두루 통달하여 깨달은 소치이지, 책에만 의존하거나 귀로 듣고 입으로 옮기는 것만으로는 능히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니 선생과 같은 분은 글을 잘 읽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선생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성학(聖學)은 사서(四書)에 지나지 않는다. 선비로서 배움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놔 두고서 어느 책을 가지고서 하겠는가. 오늘날의 사람들이 글을 읽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막힘 없이 외워서 과거 시험이나 통과하는 것을 일신의 업으로 삼을 뿐, 몸과 마음을 닦는 데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있는데, 거기에 빠져든 지가 이미 오래 되어서 계발(啓發)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 책의 경우에는 그러한 폐단이 이미 없으니, 이 책을 읽게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감발(感發)하여 흥기(興起)하게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초학자(初學者)들을 이끌어 줌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 책으로 하는 것이다.” 하였다. - 이 이하에서 ‘이 책’이라고 한 것은 바로 《주자서절요》를 가리킨다.

또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학문하는 방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방법을 알게 되면 반드시 감발하고 흥기할 것이니, 바깥으로만 치달리는 마음이 조금은 사그라들 것이다. 이를 좇아 공부하여 오랫동안 해서 익숙해진 다음에 다시 사서(四書)를 본다면, 성현의 말씀이 한마디 한마디가 맛이 있어서 자신의 신상(身上)에 받아들여 수용할 만한 곳이 있게 될 것이다.”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여기에 ‘이 책을 안 읽어도 사람이고, 이 책을 읽어도 사람이다.[未讀是書猶是人 旣讀是書猶是人]’라고 한 이 두 구절을 깊이 경계해야 마땅하다.” 하였다.

선생께서는 책에 있어서 읽어 보지 않은 책이 없었으나,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마음을 두어서 장장마다 익숙하고 구절구절마다 통달하였으므로, 강론할 때에는 친절하고 적당하기가 마치 당신 자신의 말을 외우는 것 같았다. 말년에는 주서(朱書)에만 전념하였는데, 평생에 힘을 얻은 것이 대체로 모두 이 책에서 나온 것이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평생토록 좋아한 바가 없었으나, 오직 책에서만은 참으로 좋아할 만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였다.

선생께서는 성현(聖賢)을 존경하고 사모하여 마치 그분들의 신명(神明)이 위에 있는 것처럼 공경하였으며, 글을 대해 읽을 적에는 반드시 이름자를 바로 읽지 않고 그냥 ‘아무개[某]’라고만 읽었는데, 일찍이 이를 범한 적이 없었다.

선생께서는 글을 읽을 적에는 단정히 앉아서 우렁차게 읽었으며, 글자마다 그 뜻을 찾고 구절마다 그 의미를 탐구하였다. 일찍이 대충대충 읽는 법이 없어서, 비록 한 자 한 획의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으며, 어(魚)를 노(魯)로 쓴다든지 시(豕)를 해(亥)로 쓴다든지 하는 것과 같은 잘못들을 기필코 찾아 내어 바로잡고야 말았다. 그러나 본디 있는 글자를 도려 내어 고치지 않고 반드시 책 머리에다 두주(頭註)를 달기를, ‘아무 글자는 아마도 아무 글자가 되어야 할 듯하다.’ 하였으니, 정밀하고 조심스럽게 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상사(上舍) 조목(趙穆)이 일찍이 《심경부주(心經附註)》를 교정할 적에 자획이 잘못된 것을 곧바로 도려 내어 고치고, 깎아 내어서는 안 되는 주각(註脚)을 곧바로 깎아 내고 보충하였는데, 선생께서 나무라시기를, “선유(先儒)가 쓴 글을 어찌 자기 생각만으로 이처럼 거침없이 취하고 버린단 말인가. 그래 금근거(金根車)의 꾸지람을 생각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역학계몽(易學啓蒙)》과 같은 책은 처음 배우는 자들에게는 절실하지 않은 듯한데,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참으로 그렇다. 그러나 배우는 자들이 역시 먼저 알지 않아서는 안 된다. 선유(先儒)가 이에 대해서 한 말이 있다.” 하였다.

신유년(1561, 명종 16) 겨울에 선생께서 도산(陶山)의 완락재(玩樂齋)에 계셨는데, 닭이 울면 일어나서 반드시 글을 한 차례 우렁차게 외우셨다. 이에 자세히 들어보니, 바로 《심경부주(心經附註)》였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찍이 문원(聞遠) 금난수(琴蘭秀)의 집에 간 일이 었었는데, 산길이 험하여 갈 적에는 고삐를 잡고 조심조심 몰면서 계속 마음을 놓지 않았다. 그런데 돌아올 적에는 술에 약간 취하여 갈 때 길이 험하였던 것을 깜박 잊고 마치 탄탄대로를 가듯 마음을 놓고 왔다. 그러니 마음을 긴장하고 놓아 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몹시 두려워해야 한다.”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마음을 간직하기가 가장 어렵다. 일찍이 내가 직접 경험해 보았는바, 한 걸음을 걷는 사이에도 마음이 한 걸음을 걷는 데 있기가 어려웠다.” 하였다.

거처는 반드시 정돈되고 고요하였으며, 궤안(几案)은 반드시 맑고 깨끗하였으며, 방 안에는 책이 가득하였으나 항상 정연하여 어지러운 법이 없었다. 새벽녘에 일어나서는 반드시 향을 피우고 정좌(靜坐)하였으며, 종일토록 글을 읽으면서도 일찍이 게으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선생께서는 연세가 더욱 많아지고 병이 더욱 깊어져도 학문을 진보시키기에 더욱 힘썼으며, 도(道)를 떠맡음이 더욱 중해졌다. 이에 엄숙히 삼가고 보호하여 기르는 공부를 깊숙이 홀로 있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에 있으면서 더욱더 엄하게 하였다. 평소에는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서 의관을 차렸으며, 종일토록 글을 읽거나 혹은 향을 피우고 정좌(靜坐)하였는데, 항상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마치 해가 처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선생께서는 젊어서부터 타고난 자품(資稟)이 도(道)에 가까워 맑고 따뜻하며 독실하고 순수하였다. 이에 마음을 쓰거나 일을 행하는 것이 한결같이 도의(道義)에서 나와 일찍이 혈기(血氣)의 충동을 받는 일이 없었다.

선생께서는 겸허(謙虛)로 덕을 삼아서 털끝만큼도 자만하거나 뽐내는 마음이 없었다. 도(道)를 보아 이미 밝았으나 아직도 보지 못한 것처럼 이를 바라보았으며, 덕이 이미 높았으나 부족한 듯하여 마치 아무것도 얻음이 없는 것 같았다. 보다 높은 경지를 지향하는 마음은 죽을 때까지 한결같아서 항상 마음먹기를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가 이르지 못할지언정 한 가지를 잘하는 것으로 이름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다. 일찍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자부심이 지나친 자를 보면 매우 그르게 여기면서 반드시 거론하여 경계로 삼았다.

선생께서는 따스하고 공손하며 단정하고 조용하여 성난 모습이나 거친 기색을 몸에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이에 멀리서 바라보면 엄연하여 존경할 만한 풍도가 있었으며, 가까이서 대하면 따스하여 사랑할 만한 너그러운 덕성이 있었다.

평이(平易)하고 명백(明白)함은 선생의 학문이며, 정대(正大)하고 광명(光明)함은 선생의 도(道)이며, 바람처럼 훈훈하고 구름처럼 상서로움은 선생의 덕(德)이며, 포백(布帛)이나 숙속(菽粟)처럼 평범하면서도 절실한 것은 선생의 문장(文章)이다. 마음씨는 맑고 탁 트이어 가을달이나 얼음 항아리와 같았으며, 기상은 따뜻하고 순수하여 정금(精金)이나 미옥(美玉)과 같았다. 묵중하기는 산악과 같았으며, 깊고 고요하기는 연못과 같았다. 이에 바라보면 곧 덕성을 이룬 군자임을 알 수가 있었다.

선생께서는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할 때의 행동과 언어에 있어서 각기 거기에 따르는 절도가 있었다. 만약 누가 묻지 않아야 할 것을 묻거나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을 말하면 반드시 정색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의 학문은 일상 생활에서의 거동이나 말에 공력을 썼는데, 평이하고 명백하여 지나치게 고원(高遠)한 일이 없었으며, 동용(動容)과 주선(周旋)이 모두 예에 맞아 저절로 남들이 따를 수 없는 묘한 점이 있었다.

선생께서는 충양(充養)함이 이미 지극하여 일을 만나면 여유롭게 대처하였다. 아무리 급박한 경우에 처해서도 정신과 뜻이 한가롭고 안정되어 어지럽거나 서두르는 기상이 전혀 없었다.

선생께서는 담박하여 사욕(私欲)이 없었는데, 이런 마음을 항상 만물 위에 폈으므로 천지 사이에서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선생의 학문은 사욕(私欲)이 하나도 없고 천리(天理)가 날로 밝아져서 나와 상대 사이에 피차의 경계를 볼 수가 없었다. 그 마음은 곧장 천지 만물과 더불어 위와 아래에서 함께 유행하여 각기 거기에 따르는 신묘한 작용을 얻음이 있었다. 그러니 선생과 같은 분은 거의 ‘나가 없는[無我]’ 경지라고 하겠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릴 적부터 병이 많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로는 전혀 벼슬에 나갈 생각이 없었으며, 오직 어버이를 모시고 병조리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다가 중형(仲兄)께서 간곡히 권하므로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 과거 시험을 볼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몇 달 동안 노력해 보았으나 거치적거리는 일이 많고 오랫동안 시끄러운 속에서 지내노라니 정신이 어지러워서 밤중에 일어나 생각해 보매 감당해 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마침 얼마 안 지나서 과거에 합격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오늘날까지 온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서 과거에 합격하기를 도모하는 일은 결단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록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는 하였지만 애당초 합격하고 낙방하는 데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아, 24세 때 잇달아서 세 차례나 과거 시험에 낙방하였지만 낙담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시골집에 있는데 홀연히 어떤 사람이 와서 이서방(李書房)이라고 부르기에 나는 나를 부르는 것이라 생각하고 천천히 살펴보니, 바로 늙은 종을 부르는 소리였다. 이에 내가 탄식하여 이르기를, ‘내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서 이런 욕을 당하는 것이다.’ 하고는, 잠깐 동안이나마 과거 시험에 합격하는 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과거 시험이 사람을 동요하게 하는 것이 몹시 두려워할 만하니, 그대들은 경계하라.” 하였다.

임금의 명이 문 앞에 이르면 반드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급히 관디[冠帶]를 갖추고 문밖으로 나가서 공경스럽게 맞이하여, 책상 위에 받들어 모시고 섬돌을 내려가서 네 번 절한 다음 다시 당(堂)으로 올라와 꿇어앉아서 읽었으며, 또다시 섬돌 아래로 내려가 네 번 절하였다.

선생께서는 관청의 문을 들어갈 때 반드시 공수(拱手)하고 종종걸음으로 들어갔으며, 일찍이 느릿느릿 걸어서 들어간 적이 없었다. 일찍이 삼전(三殿)에 숙배(肅拜)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공손하고 사뿐하게 하였으며, 피곤해하거나 권태로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소명(召命)이 내려졌을 때에는 비록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고 있을 적에도 항상 편안히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였으며, 밤낮없이 근심하고 걱정하면서 다음 명이 내려지기를 기다렸다. 만약 윤허를 받지 못하면 아픈 몸을 이끌고서라도 길을 나섰으며, 길을 가면서도 사장(辭狀)을 올려서 기어코 체차된 다음에야 그만두었다.

매번 벼슬에 제수하는 명이 있을 적마다 반드시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배우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평생을 헛된 이름 탓에 이렇게 되기에 이르렀으니, 내가 누구를 속이겠는가? 하늘을 속이겠는가?” 하였다.

도산(道山)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던 날에는 동료들이 모두 구속에서 풀려난 기분으로 검속함이 없이 매일같이 술 마시고 시 읊는 것으로 소일하였으나, 선생께서는 홀로 하루 종일 단정하게 앉아 있거나 혹은 문을 닫고 들어앉아 글을 읽었다. 비록 때때로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서 놀기도 하였으나, 역시 지나치게 놀이에 빠져드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 이에 동료들이 모두 그 지기(志氣)와 조행(操行)을 고상하게 여겨 존경하였으며, 자기들과 다르게 처신한다고 시기하지도 않았다.

조정에서 벼슬하고 있을 적에는 조용히 자신을 지키고, 권신(權臣)의 집에는 발길을 끊었으니, 비록 잘 아는 사이라 하더라도 일찍이 번거롭게 왕래하는 일이 없었다. 선생과 더불어 종유(從遊)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때의 명망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선생께서 접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을 지향하는 선비들이었다.

을사년의 변란에 선생께서 이미 죄적(罪籍)에 들어 있었는데, 이원록(李元祿) - 이기(李芑)의 조카이며, 이행(李荇)의 아들이다. - 이 힘써 신구(伸救)하였으므로 이기가 도리어 대죄(待罪)하고서 풀어 주었다. 이는 대개 선생께서 수행하심이 단아하고 깨끗하여 전혀 흠이 없었으므로 소인배들이 제아무리 흠을 찾아 내려고 해도 찾아 낼 수가 없어서였다. 그리고 하늘이 이분을 낸 것은 필시 우연한 것이 아니니, 간사한 도적들이 어찌 해칠 수 있었겠는가.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임백령(林百齡)이 이기(李芑)에게 이르기를, “이황이 언행을 조심하여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니, 만약 이 사람을 죄준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앞서 죄를 받은 자들이 모두 억울하게 죄를 받았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이기가 관직을 삭탈하지 말라고 다시 청하였다.

정미년(1547, 명종 2) 가을에 선생께서 병으로 인해 물러나서 향리에 있었는데,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되었다.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다가 배가 양근(楊根)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壁書事件)에 대해서 들었다. 도성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옥당(玉堂)의 서리(胥吏)가 조보(朝報)를 가지고 와서 보여 주는 것을 보니, 큰 화란이 일어나 한때의 명류(名流)들이 모두 죽거나 귀양가거나 하였다. 선생께서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지경에 빠져 마지못해 직무에 임하면서 외직(外職)을 청해 나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럴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는데, 얼마 안 지나서 봉성군(鳳城君)의 옥사(獄事)가 또 일어났다. 선생께서는 이미 봉성군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고 있다가 이어 단양 군수(丹陽郡守)가 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옥당이 차자(箚子)를 올릴 적에 선생께서는 옥당의 직책을 띠고 있었으므로 선생의 이름이 두 개의 차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혹 이것을 가지고 의심하였다. - 이에 대해서 선생께서 물음에 답한 것이 이정(而精) 김취려(金就礪)에게 있어서 상고할 수가 있다.

단양 군수로 있으면서는 청렴하고 부지런하며 성실하고 미덥게 하면서 간절하고 측은한 마음으로 백성들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누가 고을을 가장 잘 다스렸는가를 물으면 반드시 선생께서 제일 잘 다스렸다고 말한다. 군수로 나갈 때 진복창(陳復昌)이 남응룡(南應龍)의 집에 와서 전송하면서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경연(經筵)의 일이 긴급하니 이황이 외직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는 외직으로 나가는 것을 진복창이 저지할까 두려워하여 그 다음 날 즉시 출발하였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복창이 과연 임금께 아뢰었는데, 임금이 답하기를, “이미 성명(成命)이 내려졌으며 고을 또한 잔폐하니, 마땅히 근신(近臣)을 파견하여 소생시키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고을에 부임한 뒤에는 진복창이 사신(使臣)으로 오가면서 여러 차례 시(詩)와 서찰을 보내었으나, 선생께서는 한 번도 답하지 않았다. 진복창이 이로 인해 유감을 품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그가 패몰되었으므로 선생께서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시사(時事)가 일변하자 선생께서는 도를 행할 뜻이 없어 외직인 단양 군수(丹陽郡守)로 나갔는데, 이는 대개 장차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로 돌아가려는 생각에서였다. 공무(公務)를 보는 여가에는 오직 서사(書史)로써 스스로 즐겼으며, 때로는 혼자서 구담(龜潭)이나 석문(石門) 같은 곳을 찾아가서 하루 종일 노닐다가 돌아왔다.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올 적에는 행장이 쓸쓸하여 단지 괴석(怪石) 두 개만 싣고 돌아왔다. 풍기 군수(豐基郡守)로 옮겨 가서는 학교(學校)를 부흥시키는 데 뜻을 두었다. 무릉(武陵) 주신재(周愼齋)가 일찍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하였는데,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선생께서는 방백(方伯)에게 글을 올려 조정에 전달하도록 하였는데, 서원(書院)에 사액(賜額)하고 서적을 반급(頒給)하는 일이 대개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가로운 틈이 있는 날에는 서원에 가서 제생(諸生)들과 더불어 열심히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반드시 옛사람들이 한 위기(爲己)의 학문에 대하여 반복하여 친절하게 일러 주었으며, 과거 공부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록 금하지 않았으나, 권면하지는 않았다.

고을을 다스리는 일은, 일체를 쉽고 조용하게 하여 요란스럽게 하지 않는 것을 숭상하였다.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는 것은 비록 매우 가볍고 간략하게 하였으나, 백성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늘리거나 줄이는 일이 없었다. 도리를 어기면서 명예를 구하는 일을 하지 않았으므로 고을살이를 하는 동안에 혁혁한 명성은 없었다. 이에 사람들은 선생의 정사가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만 못하다고 하였다. 이는 대개 신재 주세붕은 정사를 함에 있어서 자못 술수를 써서 고을 백성들의 마음이 쏠리도록 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그를 칭송하였으나, 선생께서는 지성스럽기만 하고 꾸밈이 없이 한결같이 정도(正道)로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하루의 계획은 부족하나 일 년의 계획은 여유가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어찌 선생에 대해 경중(輕重)을 논하겠는가. 아전과 백성들을 대함에 있어서 한결같이 성신(誠信)으로만 하여 백성들이 자신을 속일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지 않은 것이다.

풍기 군수로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에는 행장이 쓸쓸하여 오직 서적 몇 바리뿐이었으며, 서책을 담았던 짐짝은 집에 도착하는 즉시 도로 내주었는데, 하는 일이 대개 이와 같았다.

감사공(監司公)께서 마침내 큰 화에 걸려 벼슬을 하지 않고 집에 계시면서부터는 더욱더 세상일에 뜻이 없었다. 선생께서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고, 선부인(先夫人)께서는 가난하게 살았다. 선생께서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한 것은 실로 봉양(奉養)의 편의를 위한 계책에서였다. 그런데 마침 장인(丈人)의 죄에 연좌되어 직접 백성을 다스리는 관직에는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얼마 안 지나서 대부인(大夫人)께서 세상을 떠나자, 선생께서는 매번 육아(蓼莪)와 풍수(風樹)의 감회에 젖어들었으며, 문인(門人)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하다가 부모를 봉양하는 일에 대해 말이 미치면 반드시 몸을 움츠리면서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였다.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음식의 좋고 나쁨을 가지고 선비를 기르는 일을 잘하고 못하는 것으로 삼아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비난하는 의논이 들끓었다. 이에 관원들이 유생들에게 칭찬을 듣기 위하여 음식을 풍성하게 마련해 대접하다가 창고가 탕진되고 전복(典僕)들마저 지탱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는데, 선생께서는 이를 매우 비루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 이에 대사성(大司成)이 되자 오로지 예의(禮義)로써 선비를 기르고, 잘 먹이는 데 대해서는 힘을 쓰지 않았다. 그러자 관중(館中)의 사람들이 모두 괴이쩍게 여기면서 화를 내었다. 선생께서는 사습(士習)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았다.

무오년(1558, 명종 13)에 조정에 나아가기에 다섯 가지 마땅치 않은 점에 대해서 상소를 올렸는데, 그 상소에 이르기를, “어리석은 제가 직위를 훔쳐서 차지하고 있으니 마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병으로 인해 직무를 폐기한 채 하는 일 없이 녹봉만 받아먹고 있으니 마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헛된 명예를 가지고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있으니 마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른 줄을 알면서도 염치를 무릅쓰고 나아가니 마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도 못하면서 물러나지 않고 있으니 마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다섯 가지의 마땅치 못한 점이 있는데도 조정에 나아간다면, 신하 된 자의 의리에 있어서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이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의(義) 자를 성취하고자 해서일 뿐입니다.” 하니, 임금께서 답하시기를, “지금 상소의 내용을 보니, 전후로 물러나게 해 주기를 요청한 일에 대해 기술하면서 다섯 가지 마땅치 않은 점에 대해 진술하기까지 하였다. 굳게 고집을 부리면서 나오지 않고 있으니, 아무리 인재를 얻어서 다스림을 이룩하고 싶더라도 어찌 그 뜻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내가 실로 덕이 없고 어리석어 함께 일할 만하지 못한 탓에 도를 지키고 의를 지킨 채 지내면서 결단코 조정에 나와 나를 보필해 줄 뜻이 없으니, 내가 몹시 부끄럽다. 나의 뜻을 잘 알기 바란다.” 하였다.

무오년에 부름을 받아 부임하였다. 그때는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잡고 있으면서 한창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을 때였다. 이에 어떤 사관(史官)이 선생의 출처(出處)를 가지고 기롱하였다. 이는 대개 선생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당초에 명종의 소명(召命)이 여러 차례 내려졌는데도 굳게 사양한 것은 바로 나갈 만한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징소(徵召)하는 명이 점차 준절하여 심지어는 ‘내가 함께 일을 할 만한 임금이 못 된다’는 하교까지 있었다. 선생께서는 그 말을 듣고 놀라서 억지로 대궐에 나아갔던 것이지, 선생의 본심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대사성, 공조 참판 등에 제수되었지만 일찍이 직임을 맡을 생각이 없어, 서울에 있는 다섯 달 동안에 산직(散職)에만 있었던 것이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초야에 있으면서 조정의 직함을 가지고 있는 것을 온당치 못하게 생각하여 여러 해 동안 글을 올려서 사퇴하였는데, 을축년(1565, 명종 20)에 명묘(明廟)께서 비로소 윤허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는 임금의 은혜가 감격스러워 기쁜 기색을 얼굴에 나타내면서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제서야 비로소 임금께서 놓아 준 몸이 되었다.” 하였다. 그리고는 여덟 수의 시를 지어서 그 기쁨을 표하였다.
병인년(1566, 명종 21) 1월 26일에 소명을 받고서 출발하였는데, 영천(榮川)에 도착해서 글을 올려 면직시켜 주기를 요청하고는 풍기(豐基)에서 명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상께서 의원(醫員)을 파견하여 증세를 물었다. 2월 13일에 예천(醴泉)에 도착해서 다시 사직장을 올렸는데, 15일에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26일에 안동(安東) 땅 학가산(鶴駕山)의 광흥사(廣興寺)에 도착해서 세 번째 사직장을 올렸다. 3월 7일에 봉정사(鳳停寺)에 도착하였으며, 14일에 네 번째 사직장을 올리고는 명이 내려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16일에 대제학(大提學)에 제수되었으며, 7월 9일에 글을 올려서 소명(召命)을 사양하면서 치사(致仕)시켜 주기를 요청하였다.

병인년 봄에 나 성일이 계남(溪南)의 서재(書齋)에 있을 적에 교지(敎旨)가 내려져 부름을 받았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자네는 돌아가게. 내가 지금 병으로 사퇴하고서 어떻게 감히 남들과 더불어 강론하겠는가.” 하였다.

어제(御題)를 ‘현인을 불렀으나 오지 않는 데 대한 탄식, 근체시[招賢不至歎 近體]’라고 내고 독서당(讀書堂)으로 하여금 지어서 올리게 하였다.

금상(今上)께서 즉위한 첫해에 예조 판서를 사임하면서 미처 정고(呈告)하기도 전에 시골로 돌아오자,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하였다. 그때 대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등 여러 어진 사람들이 조정에 많이 있었는데, 경연 석상에서 매번 선생의 도덕과 행실이 정자(程子)나 주자(朱子)에 비해 못지 않다고 극진히 아뢰어, 먼저 불러 써서 도를 행하고 시대를 구제하는 바탕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선생께서는 그 말을 듣고 즐거워하지 않고 있었는데, 하루는 문인(門人)이 고하기를, “고봉 등 여러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선생님을 재상 자리에 앉혀야만 우리 유학의 도가 행해질 수 있다고 여겨, 면대를 요청해서 아뢰어야 마땅하다고들 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는 깜짝 놀라 벗들에게 고하지도 않고 훌쩍 떠나 남쪽으로 갔으니, 대개 선생의 뜻은 혐의를 멀리 피하고자 한 것이요 이유도 없이 급히 떠난 것이 아니었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벼슬을 하는 것은 도를 행하기 위해서이지, 녹봉을 받아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였다. 그러므로 벼슬자리에 있었던 40년 동안에 네 조정을 역임하였는데도 벼슬자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과 오래 있고 바로 떠나는 것을 한결같이 의(義)에 따라서 하여, 의에 있어서 온당치 못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몸을 거두어서 물러났는데, 이와 같이 한 것이 전후로 일곱 차례였다. 어떤 사람들은 선생께서 본디 벼슬할 마음이 적었다고 하는데, 이는 선생에 대해서 잘 안 것이 아니다. 통정대부(通政大夫)에서부터 숭품(崇品)에 이르기까지는 거친 관직이 더욱 드물었는데, 모두 사양하여 사퇴할 수 없게 된 다음에야 받아들였으니, 이는 본디 선생의 마음이 아니었다.

선생께서는 50세가 되도록 아직 집이 없었다. 처음에는 하봉(霞峯)에 집터를 잡았다가 중간에 죽곡(竹谷)으로 옮겼으며, 끝내는 퇴계(退溪) 가에 집터를 잡았다. 집 서쪽 시냇가에 정사(精舍)를 짓고는 한서(寒棲)라고 이름하였고, 샘물을 이끌어 대어 못을 만들고는 광영(光影)이라고 이름하였으며, 매화와 버들을 심고 세 갈래로 길을 내었다. 앞에는 탄금석(彈琴石)이 있고, 동쪽에는 고등암(古藤巖)이 있는데, 산과 물이 맑고 깨끗하여 완연히 하나의 별세계를 이루었다. 병진년(1556, 명종 11)에 나 성일이 처음으로 그곳에 가서 전배(展拜)하였는데, 선생께서는 방 안에 책을 가득 쌓아 놓고 향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그런 자세로 평생을 마칠 것만 같아서 사람들이 벼슬하는 사람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 하명동(霞明洞)이 낙천(洛川)에서 가까웠는데, 낙천은 관금(官禁)이 미치는 바여서 자손들이 거처하기에는 마땅치 않은 곳이라고 여겨 계상(溪上)으로 옮긴 것이다.

선생의 성품은 환하게 뚫린 것을 좋아하고 앞이 가로막힌 것을 싫어하였다. 이에 심지어는 나무와 같은 따위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모두 베어 버리도록 하여 앞을 가리지 못하게 하였다.
선생께서는 본디 검소함을 숭상하여 세수할 때에는 질그릇을 쓰고, 부들자리에 앉았으며, 베옷에 끈으로 된 띠를 매고 칡으로 엮은 신발에 대지팡이를 짚어 담박하게 지내었다. 계상(溪上)의 집이 겨우 십여 가(架)로, 모진 추위와 무더운 장맛비를 사람들이 견뎌 내지 못하였는데도 그곳에 여유롭게 거처하였다. 영천 군수(永川郡守) 허시(許時)가 언젠가 한 번 찾아뵙고는 몹시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처럼 누추한데 어떻게 견디십니까?” 하니, 선생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습관이 된 지 이미 오래 되어서인지 불편한 걸 못 느끼겠다.” 하였다.

선생의 전실(前室)인 허 부인(許夫人)의 전장(田莊)이 영천군(榮川郡)에 꽤 많이 있었는데, 계상(溪上)에는 겨우 척박한 땅 몇 마지기만 있었다. 그런데도 끝내 그쪽으로 가서 살지 않았으며, 집이 몹시 궁박하였는데도 편안하게 지내었다.

권질(權礩)은 선생의 장인(丈人)이다. 그의 집이 서울 서소문(西小門) 안에 있었는데, 일찍이 그 집을 선생께 주려고 하였다. 선생께서는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그 뒤에 서울에 들어가면 언제나 다른 곳에서 임시로 거처하고 그 집에는 거처한 적이 없었다.

김취려(金就礪)가 복건(幅巾)과 심의(深衣)를 만들어 보내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복건은 승(僧)들이 쓰는 두건과 같아서 쓰기에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하고는, 심의를 입고 정자관(程子冠)을 썼다. 말년에 재계하며 거처할 적에도 이렇게 하였는데, 손님이 오면 평상복으로 갈아 입었다.

선생께서는 손님을 대하여 음식을 먹을 때 수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음식의 예절은, 비록[雖] 여름철이더라도 포건(脯乾)뿐이었으며, 매 끼니마다 반찬이 두서너 가지에 불과하였으니, 건장한 사람일지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바였다. 그런데도 선생께서는 고량진미를 먹는 것처럼 달게 잡수셨다. - 일찍이 도산(陶山)에서 선생을 모시고 식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상 위에는 단지 가지 잎, 무 나물, 미역뿐이었으며, 더 이상은 없었다.

선생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참말로 복이 박한 사람인가보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흡사 기분에 체한 것만 같아서 속이 편치가 않고, 담박한 음식을 먹어야만 속이 편안하다.” 하였다.

선생께서는 술을 마시되 일찍이 취하도록 마신 적이 없었고, 약간 얼근한 정도에서 그쳤다. 손님을 접대할 적에는 상대의 주량에 따라서 권하였으며, 그의 기분에 맞도록 하였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화려하고 요란한 가운데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흔들리기가 아주 쉽다. 내가 일찍이 이에 대해 힘을 써서 흔들리는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언젠가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있을 적에 노래를 부르는 기생들이 앞에 가득한 것을 보고는 한편으로 기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문득 느낀 적이 있었다. 이에 비록 통렬하게 욕망을 억눌러서 겨우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것을 면하기는 하였지만, 그 기미는 바로 삶과 죽음이 갈리는 곳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관서(關西)는 본디 번화한 곳이라고 일컬어졌는데, 그 때문에 선비들이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자가 전후로 잇달았다. 선생께서 일찍이 자문점마(咨文點馬)가 되어 일 때문에 의주(義州)에 한 달 간 머물렀는데, 여색(女色)을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 평양(平壤)을 지나올 적에는 감사가 이름난 기생을 곱게 꾸며서 잠자리에 들여보냈으나, 끝내 돌아보지도 않았다.

동지(同知) 권응정(權應挺)이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있을 적에 일찍이 기생과 악공(樂工)을 싣고 선생의 서당 앞을 지난 일이 있었는데, 선생이 시를 지어 이를 풍자하였다. 그러자 그 뒤로는 권응정이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선생께서는 비록 언어와 문자에 있어서도 일찍이 희롱하는 말이나 외설스러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태진(太眞)이 임공도사(臨邛道士)를 보내어 당(唐) 나라 현종(玄宗)에게 알리려고 한 시(詩)를 지어 과시(課試)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는 찌를 붙여서 말씀하시기를, “태진의 일은 백낙천(白樂天)이 처음으로 옳지 못한 일을 만들어 내었고, 어무적(魚無跡)이 극도로 꾸며서 수식한 것이다. 대장부의 입에서 어찌 음란하고 추잡한 말을 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께서는 늘 고요함을 지켜서 단촐하게 살면서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비들이 모이는 조촐한 술자리나 마을의 잔치 모임 같은 데는 가끔 참여하였다. 친척들에게 길흉사(吉凶事)나 경조사(慶弔事)가 있을 경우에는 가까우면 반드시 직접 가고 멀면 반드시 사람을 보내어 예를 차렸는데, 늙어서도 이를 폐하지 않았다.

생일날에는 술과 음식을 차리지 않았으며, 자손들에게 술잔을 올려 헌수(獻壽)하지 못하게 하였고, 하루 종일 쓸쓸하게 보내었다.

찰방공(察訪公)이 집에 찾아오면 문밖에 나가 맞아들였다. 자리에 앉을 적에는 손님과 주인의 자리를 구별하지 않고 한 자리에 차례를 따라 앉았는데, 공경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얼굴 밖으로 넘쳐흘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 사람들로 하여금 효제(孝悌)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게 하였다.

찰방공이 문에 들어서면 항상 선생에게 앞자리를 사양하였는데, 선생께서는 움츠린 채 몸 둘 곳을 몰라 하였으며, 몸을 굽히고 서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하루는 문생(門生)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옛사람들은 형을 섬기기를 엄한 아버지를 섬기듯이 하여 출입할 적이면 부축하고 거처함에 봉양하여 자제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겨우 형님이 한 분뿐인데도 자제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으니, 한탄스럽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형제간에 잘못이 있을 경우에 서로 말해 주어도 괜찮습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처신하기가 아주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다만 마땅히 나의 성의를 다하여 형제들이 감동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라야 비로소 서로 간의 의(義)에 있어서 해가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만약 서로 간에 성의가 미덥지 못한데도 대뜸 말을 하여 힐책할 경우에는 서로 사이가 벌어지지 않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형제간에 기쁘고 즐겁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이 때문이다.” 하였다.

자손들을 훈계하여 가르침에 있어서는 반드시 먼저 《효경(孝經)》ㆍ《소학(小學)》 같은 책들을 가르쳤으며, 어느 정도 문리가 통한 다음에야 사서(四書)를 가르쳤는데, 정연한 순서가 있어서 일찍이 단계를 뛰어넘는 법이 없었다. 자손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심하게 꾸짖지 않고 거듭거듭 타이르고 훈계해서 스스로 감동하여 깨닫도록 하였다. 비록 종들을 대해서도 역시 일찍이 괴팍하게 화를 내어[怪怒] 꾸짖은 적이 없었다. 이에 집안 안팎이 즐겁고 화목하여 소리를 높이고 얼굴을 변하는 일이 없어도 모든 일이 저절로 다스려졌다.

벗이 죽었을 경우에는 아무리 멀더라도 반드시 자제를 보내어 제문(祭文)을 싸 가지고 가서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친구의 허물을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정색하고서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손님을 대하여 식사를 할 적에는 반드시 집안의 형편에 따라서 하였는데, 아무리 귀한 손님이 찾아와도 역시 성찬(盛饌)을 차리지 않았으며, 아무리 지체가 낮고 어린 자라도 역시 소홀하게 대접하지 않았다.

손님이 찾아오면 항상 술과 음식을 내어 대접하였는데, 반드시 미리 집사람에게 이를 장만하도록 하였으며, 손님을 대하여서 장만하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선생께서는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적에도 만약 존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반드시 당상관의 관복(冠服)을 차려 입되, 다만 모자를 쓰지 않고 품대(品帶)를 띠지 않았다. 맞이하고 전송할 적에는 반드시 대문 바깥까지 나가서 하였고, 당에 오르내리거나 읍하여 절을 함에 있어서는 법도에 아주 잘 맞아 조금도 틀림이 없게 하였다.

선생께서는 사람을 대할 적에 희로(喜怒)의 기색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영천 군수(榮川郡守) 이명(李銘)이 본디 패만스러웠는데, 일찍이 선생을 찾아뵈온 일이 있었다. 그런데 거만하고 무례하여 함부로 떠들어대었으며, 병풍 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글씨와 그림을 평하였다. 그런데도 선생께서는 그가 말하는 대로 따라서 답하였다. 이에 선생을 모시고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불쾌한 기색을 내보였으나, 선생께서는 그런 기미를 조금도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셨다.

선생께서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 매우 너그러웠다. 그리하여 참으로 큰 잘못이 없는 자에 대해서는 일찍이 끊어 버린 적이 없이 모두 용납하여 가르쳐서 스스로 허물을 고쳐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녹사(錄事) 양성의(梁成義)란 자가 본현의 현감(縣監)이 되었을 적에 사인(士人)들이 모두 그의 사람됨을 천하게 여겼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백성과 주쉬(主倅)로서의 예를 다하였으며, 시간이 오래 될수록 더욱더 공경하였다. 그런데도 양성의가 도리어 자기가 이곳의 수령이라는 지위를 뽐내었다. 그가 일찍이 이곳에 있는 어량(魚梁)을 찾아왔다가 심부름꾼을 보내어 선생을 청하였는데, 말투가 몹시 거만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는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봉화(奉化)를 시켜 가 보게 하였다. 이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괴이쩍게 여기면서 분개하였으나, 선생께서는 끝내 그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다.

이감(李戡)이 패몰하기 전에 경상도 방백(方伯)으로 있으면서 서당으로 찾아오자 선생께서 그를 만나 보았다. 그 뒤에 이감의 당파인 이량(李樑)이 사림(士林)들을 모함하자, 선생께서는 당 위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곳이 아무개가 그날 앉았던 곳이다. 지척에서 마주 보았는데, 어찌 그의 악함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알았겠는가.” 하면서, 오래도록 탄식하였다.

선생께서는 물품을 주고받는 즈음에 있어서 아주 엄격하여, 의로운 것이 아니면 단 한 개라도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받지 않았다. 그리고 고을의 수령이 교제(交際)의 예로 물품을 보내 오면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당시에 자못 청렴하지 못한 어떤 관원이 있어서 선생을 자주 찾아와 뵈면서 가끔 물품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역시 그것을 받았으므로 문인(門人) 조목(趙穆)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내가 그 당시에 비록 물어 보지는 않았으나, 나의 생각으로 헤아려 보면 선생께서는 결코 구차히 받은 것이 아니다. 《맹자(孟子)》의 각지불공장(卻之不恭章)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물품을 보내 올 경우에는 비록 의롭지 못한 물품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많은 것을 사양하고 조금만 받았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꿩 두 마리를 보내 오자 한 마리만 받고 한 마리는 되돌려주었으니, 다른 것에 대해서도 대개 이와 같이 하였다.

고을에서 물품을 보내 오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먼저 찰방공(察訪公)께 보내고, 다음에는 이웃과 친척들 및 와서 배우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일찍이 집에 남겨 둔 적이 없었다. 서울에 있을 적에는 들어오는 봉록(俸祿)이 쓰기에 넉넉하였으므로 나머지는 모두 친구들을 도와주었는데, 반드시 친소(親疏)와 빈부(貧富)를 가늠해 도와주어서 서로 간의 정의(情誼)를 상한 적이 없었다.

기사년(1569, 선조 2)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올 적에 임금께서 본도에 명하여 쌀과 콩을 매우 넉넉하게 제급(題給)해 주도록 하였는데,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향리의 친척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도산정사(陶山精舍) 아래에 어량(魚梁)이 있었는데, 관금(官禁)이 매우 심하여 사람들이 사사로이 고기를 잡을 수가 없었다. 선생께서는 매양 더운 여름철이 되면 반드시 계사(溪舍)에 거처하였는데, 일찍이 이곳에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그 말을 듣고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어쩌면 그리도 소심한가. 내가 스스로 고기를 잡지 않는다면 비록 관청의 어량이 있다 한들 무엇이 혐의쩍으며, 피할 게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남명의 경우에는 마땅히 그렇게 할 것이고, 나의 경우에는 마땅히 이렇게 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으로써 유하혜(柳下惠)의 할 수 있는 것을 배우는 것도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선생께서는 향리에 살 적에 부역이나 세금을 반드시 하호(下戶)보다 먼저 바쳤으며, 일찍이 이를 체납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아전들도 선생의 집이 높은 벼슬을 하는 집이란 것을 몰랐다. 일찍이 선생께서 시냇가에 나가 앉아 있었는데, 아전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올해 잣나무 숲을 지키는 것은 나으리 댁에서 해야 합니다.” 하니, 선생이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향약(鄕約)의 조목을 만들어서 시행하려고 하다가 그것을 꺼리는 자가 있어서 시행하지 못하였다.

마을 사람 가운데 학문에 뜻을 둔 자가 품관(品官)의 반열을 따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가 있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을은 부형과 종족이 사는 곳이다. 항렬을 따르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가문(家門)의 지체가 미미한 자가 윗자리에 있을 경우 실로 닭의 머리가 되지 못하고 소의 꼬리가 되는 수치가 있습니다.”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을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나이이다. 비록 아랫자리에 있다고 한들 예에 있어서나 의리에 있어서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문하의 제자들을 대하기를 마치 친구를 대하듯이 하여 비록 젊은 사람이라도 일찍이 이름을 놔 두고 너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맞이하고 전송할 적에는 잘 주선하고 공손함을 다해 공경을 표하였으며, 자리에 좌정하면 반드시 먼저 부형의 안부를 물었다.

나 성일이 《대학(大學)》을 읽다가 이(理)니 기(氣)니 하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는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배우지 않았으므로 이처럼 담벼락을 마주한 것처럼 꽉 막히는 것이다.” 하고는, 곧바로 그것을 읽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태극도설》 가운데 ‘군자는 닦아서 길하고 소인은 어겨서 흉하다.[君子修之吉 小人悖之凶]’라고 한 두 구절은 배우는 자가 가장 힘써서 공부해야 할 대목이다. 닦는 것이나 어기는 것은 단지 공경하고 방종하는 사이에 있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는 대개 배우는 자는 먼저 그 근본을 알지 않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태극도설》, 서명(西銘), 《역학계몽(易學啓蒙)》 등의 글로써 가르친 것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그 말을 듣고는 ‘손으로는 쓸고 물 뿌리는 일도 할 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의 오묘함을 말한다’고 비난하자, 선생께서는 편지를 보내어 이를 반박하였다. 문하생인 이덕홍(李德弘)이 처음 학문에 뜻을 두었을 적에 일찍이 《역학계몽》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사서(四書)를 읽으라. 그것은 급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우성전(禹性傳)과 유성룡(柳成龍)이 주자서(朱子書)가 《심경(心經)》만큼 절실하고 긴요하지 않다고 하는데, 이 말이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찍이 다 읽어 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반드시 오랫동안 침잠(沈潛)하여 충분히 읽어서 자세하게 음미해 본 다음에야 비로소 그 친절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학문을 함에 있어서 어찌 번거로운 것을 싫어해서 간략하게 줄여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경계(警戒)하는 말을 써서 좌우에 걸어 놓고 이를 보면서 성찰(省察)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옛사람은 세숫대야나 밥사발, 방석, 지팡이 따위에도 모두 명(銘)을 새겼다. 그러나 마음에 경계하고 반성하는 실제가 없다면 잠계(箴誡)를 쓴 글귀가 벽에 가득하다 한들 보아도 보이지 않을 것인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학문하기를 만약 횡거(橫渠) 장재(張載)처럼 하여 낮에는 노력함이 있고 밤에는 얻음이 있으며, 말에는 교훈이 있고 행동에는 법도가 있으며, 잠깐 사이에도 이를 보존함이 있고 잠시 사이에도 이를 기름이 있게 한다면, 이 마음이 항상 보존되어 달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굳이 좌우에 써 붙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주자(朱子)는 항상 배우는 자들에게 평이하고 명백한 것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이른바 평이하고 명백한 것이란 바로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것과 같이 평소에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다. 공자(孔子)께서 번지(樊遲)에게 고하기를, ‘거처(居處)하는 데는 공손하고, 일에는 공경하며, 남들과의 교제에는 성실하라.’ 한 것과 같은 것들이 모두 평이하고 명백한 것들이다.” 하였다.

내가 글을 읽는 방법에 대하여 여쭙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단지 익숙하도록 읽는 것이다. 무릇 글을 읽는 사람이 비록 글의 뜻은 이해하더라도 익숙하지 못하면 읽은 뒤에 곧바로 잊어버려서 마음속에 간직할 수가 없다. 반드시 이미 배운 것을 다시 충분하게 복습하는 공력을 들인 다음에야 바야흐로 마음속에 간직할 수가 있어서 흠씬 젖어드는 맛이 있는 법이다.”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글을 읽는 요결(要訣)은, 반드시 성현의 말과 행동을 마음에 새기고 침잠하여 묵묵히 완미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함양(涵養)되어 학문이 진보하는 성과가 있는 것이다. 만약 대충대충 읽고 대강대강 말해 버리고 말 경우, 이는 말 마디나 외우고 귀로 듣고 입으로 옮기는 말습(末習)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비록 천 편의 글을 외우고 머리가 희도록 경전(經典)을 떠들어 댄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낮에 읽은 것을 반드시 밤에 생각하고 풀어보아야 한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경재잠(敬齋箴)에 이(貳)를 이(二)로 하지 말고 삼(參)을 삼(三)으로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二)와 이(貳), 삼(三)과 삼(參)의 뜻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이(二)와 삼(三)은 성수(成數)이고, 이(貳)와 삼(參)은 그 수를 이루어 주는 개념이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삼천양지(參天兩地)’라 하였고,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사람이 둘씩 앉고 둘씩 섰거든 거기에 가서 셋이 되게 하지 말라.[離坐離立 毋往參焉]’고 하였으며, 《논어(論語)》에는 ‘거듭 잘못하지 않았다.[不貳過]’ 하였는데, 이들 삼(參)이나 이(貳) 자가 역시 이런 뜻이다.” 하였다.

다른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쳤으며, 혹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한 공부를 하러 오는 자가 있어도 굳이 사양하지는 않았으나, 권하지도 않았다. 어떤 선비가 왔을 때 마침 과거 시험을 칠 때였는데, 그 선비가 머물러 있으면서 과문(科文)을 익히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무릇 학업을 익힘에 있어서는 각자 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 것인데, 과문을 익히고자 한다면 이곳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병인년(1566, 명종 21)에 나 성일이 장차 성균관에 들어가려 하면서 여쭙기를, “거기에 가서 어진 대부(大夫)를 찾아서 섬기고, 어진 선비를 찾아서 사귀고자 합니다. 서울에는 당연히 어질고 현명한 자들이 많을 것인데, 이들을 찾아보고 공부에 도움을 얻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지금 다만 고요함을 지키라.”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과목(科目)에 견제를 당하여 학문하는 일에 전념하지 못하니, 과거 공부를 그만두려고 합니다.”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뜻은 대단히 좋지만,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옛날에 송(宋) 나라의 채백정(蔡伯靜) 형제가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마침내 가업(家業)을 전수하여 세상의 대유(大儒)가 되었는데, 그와 같이 된다면 좋은 일이다. 비록 과거 공부를 그만두더라도 만약 그 실상이 없다면 무슨 일을 성취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채씨(蔡氏)의 행장(行狀)을 가져와 내보이면서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능히 이처럼 공부할 수 있겠는가? 한 통을 베껴 써서 항상 보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과거 공부가 진척이 없으니 비록 성균관에 있더라도 도움이 없을 것이기에 이곳에 남아서 수업하고자 합니다.”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부형이 계신데 어찌 그대 마음대로 한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내가 이미 허락을 받았다고 말씀드리자, 선생께서 서면(書面)으로 이르시기를, “이곳에 있는 사우(士友)들이 대부분 참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도 낮은 벼슬 한 자리 얻는 것을 요행으로 여기니, 몹시 뜻에 차지 않는다. 그대가 이미 과거 공부를 중단하고, 또 독서에 전념하겠다고 하니, 어른께 허락받은 것을 깊이 치하하는 바이다.” 하였다.

선생께서 유중엄(柳仲淹)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눈앞에 있는 벗들을 보면 뚜렷한 진보를 보이는 자가 없고, 또 일찍이 이 일을 믿어 지향하지도 않는다. 이 어찌 내가 하는 일이 별로 믿을 만하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몹시 걱정스럽고 두렵구나.” 하였다.

다른 사람이 질문을 할 경우에는 아무리 쉬운 말이라도 반드시 잠깐 틈을 두었다가 대답하였으며, 일찍이 곧바로 대답한 적이 없었다.

선생께서는 배우는 자들과 강론하다가 의심나는 곳에 이르면 당신의 견해를 주장하지 않고 반드시 중론(衆論)을 널리 채택하였다. 비록 장구(章句)나 따지는 하찮은 선비의 말이라도 역시 유의하여 듣고 마음을 비워서 이해하였으며, 거듭 참고하고 수정하여 끝내는 바른 데로 귀결시킨 다음에야 그만두었다. 논변(論辨)할 즈음에는 기운이 화기롭고 말씀이 시원스러웠으며, 이치가 밝고 의리가 정대하여 비록 온갖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더라도 뒤섞이지 않았다. 대화를 나눌 적에는 반드시 상대방의 말이 다 끝난 다음에 천천히 한마디 말로 이를 분석하여 가리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것이 옳다고 하지 않고 단지 ‘내 견해는 이러한데 어떤지 모르겠다.’고만 하였다.

배우는 자가 물으면서 가르침을 청하면 자질의 얕고 깊음에 따라 가르쳐 주었다. 만약 깨닫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거듭해서 자세히 설명하여 깨우쳐 준 다음에야 그쳤다. 가르치고 이끌어 주는 일을 싫어하지 않았으며 게을리 하지 않아 비록 병이 있어도 강론(講論)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이미 중한 병이 들었는데도 학생들과 강론하기를 평소와 다름없이 하였다. 학생들은 오래 지난 뒤에야 이를 깨달았으니, 강론을 거둔 지 며칠 만에 병세가 이미 위독해졌다.

내가 ‘이(理)’ 자의 뜻에 대하여 여쭙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을 알기가 어려운 것 같지만 사실은 쉽다. 만약 선유(先儒)의 ‘배를 만들어 물 위를 다니고 수레를 만들어 땅 위를 다닌다.’는 말을 자세히 생각해 보면 그 나머지는 모두 추측하여 알 수가 있다. 무릇 배는 당연히 물 위를 가야 하고, 수레는 당연히 땅 위를 가야 하는바, 이것이 이(理)이다. 배이면서 땅 위를 가고 수레이면서 물 위를 간다면, 이것은 이(理)가 아니다. 임금은 마땅히 어질어야 하고, 신하는 마땅히 공경하여야 하며, 아비는 마땅히 사랑하여야 하고, 자식은 마땅히 효도하여야 한다. 이것이 이이다. 임금이면서 어질지 않고, 신하이면서 공경하지 않으며, 아비이면서 사랑하지 않고, 자식이면서 효도하지 않으면, 이것은 이가 아니다. 무릇 천하에 당연히 행해야 하는 것이 이이며, 당연히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가 아닌 것이다. 이것으로[此] 추측해 나가면 이(理)의 실체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사물에는 크고 작음이 있지만 이(理)에는 크고 작음이 없다. 아무리 밖으로 나가 보아도 그 바깥이 없는 것이 이이다. 아무리 안으로 들어가 보아도 그 안이 없는 것이 이이다. 방향도 없고 형체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충만해 있으며, 거기마다 하나의 태극(太極)을 갖추고 있다. 이에 남거나 모자라는 것을 볼 수가 없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사람이 일원(一元)의 기(氣)를 똑같이 받았는데도 기질(氣質)이 같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태어날 적에는 비록 일원의 기를 똑같이 받았다고는 하지만, 일원의 기 자체가 또한 균일하지 않다. 대개 일원에서 나뉘어 음양(陰陽)이 되니, 그 기는 본디부터 청탁(淸濁)의 구분이 있다. 그리고 음양이 또 나뉘어 오행(五行)이 되니, 그 기가 혹 상생(相生)하거나 상극(相克)하기도 하고, 혹 순행(順行)하거나 역행(逆行)하기도 하고, 혹 상승하거나 하강하기도 하고, 혹 떠나가거나 되돌아오기도 하고, 혹 오거나 가기도 하고, 혹 열리거나 닫히기도 하고, 혹 왕성하거나 쇠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엉키어 뒤섞이거나 전도되어 엉클어져서, 순후하고 경박하고 맑고 탁함이 가지각색으로 되어 균일하지가 않은 것이다. 사람이 이 기(氣)를 품부받아서 태어났으니, 그 기질이 같지 않은 것이 뭐가 괴이하겠는가. 선유(先儒)가 이른 바 ‘이리저리 옮겨져 오늘까지 이르렀다.’고 한 것은 바로 이오(二五)가 균일하지 못한 곳을 지목하여 말한 것이다. 동방삭(東方朔)은 말하기를, ‘하늘은 사람이 추워하는 것 때문에 겨울 추위를 그치게 하지 않으며, 땅은 사람이 고생하는 것 때문에 땅의 넓이를 축소시키지 않으며, 군자(君子)는 소인(小人)이 떠들어 대는 것 때문에 행하는 것을 바꾸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 말을 마땅히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동짓날에 김취려(金就礪)가 여쭙기를, “오늘은 일양(一陽)이 처음으로 움직이는 날이니, 바로 하늘의 마음이 만물을 낳는 시초가 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초목의 뿌리들이 모두 오늘부터 돋아나려고 꿈틀거리는 것입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풍상(風霜)이 휘몰아친 뒤끝이라서 나뭇가지들이 앙상하여 아직 싹이 돋아나려는 생기는 드러나지 않지만, 돋아나는 이치는 이미 오늘부터 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일양(一陽)이 다시 돌아오니 하찮은 풀 한 포기까지도 모두 살아나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靈長)인데 오늘을 맞아 애연(藹然)히 일어나려는 뜻이 유독 없겠습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형기(形氣)의 구속을 받아 천지의 조화(造化)와 서로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감응(感應)하고 소장(消長)하는 이치는 실로 천지와 더불어 서로 유통(流通)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은 구일(姤日)이나 복일(復日)에 관문(關門)을 닫고 몸을 가리는 경계가 있어, 이로써 부드러운 도를 단절하여[以絶柔道] 미연에 방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이날에 유독 애연(藹然)히 일어나려는 단서가 없을 수 있겠는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무릇 잠깐 사이라도 선단(善端)의 싹이 움직이면 모두 양기(陽氣)가 회복되는 날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욕심(欲心)이 있어서 그 선단을 확충하는 공을 이루지 못한다. 이에 선단이 겨우 싹트자마자 온갖 욕심이 마구 몰려들어 비로소 천지의 조화와는 서로 크게 동떨어지게 되고 마니, 슬프구나.”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생각이 번거로워지는 까닭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이(理)와 기(氣)가 모여서[會] 마음이 되었다. 그래서 이(理)가 주재(主宰)가 되어 기(氣)를 거느리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생각이 통일되어 저절로 잡념이 끼어들 틈이 없게 된다. 그러나 이(理)가 주재하지 못하여 기(氣)가 이기게 되면 마음이 어지러워져서 흔들림이 끝이 없게 되는 법이다. 그리하여 사특하고 망녕된 온갖 생각이 자꾸만 몰려들어서 마치 수차(水車)가 빙글빙글 돌듯이 잠시도 붙어 있지 못하고 자꾸만 도는 것이다.” 하고, 또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잡념이 없을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잡념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 요체는 단지 공경[敬]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공경하면 마음이 문득 통일되고, 마음이 통일되면 잡념은 저절로 가라앉는다.” 하였다.

내가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정좌(靜坐)의 설에 대해 여쭙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좌를 한 다음에야 몸과 마음이 수렴(收斂)되어 도리(道理)가 바야흐로 멈추어서 정박할 곳이 있게 되는 법이다. 만약 육신이 흐트러져서 방만하여 검속(檢束)함이 없다면 심신이 혼란해져서 도리가 다시는 정착하여 머무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연평 이동이 예장(豫章) 주희(朱熹)를 대하여 종일토록 정좌하고 있다가 집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정좌만 하고 있다가 육체의 구속으로 인하여 병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이 어릴 적부터 전혀 검속을 받는 일이 없다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정좌해서 수렴하려고 한다면 어찌 구속에 따른 병이 생기지 않겠는가. 모름지기 굳게 고통을 참고 이를 풀어 주는 일이 없이 하면서 오래도록 수련을 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구속에 따른 병이 없어질 것이다. 만약 구속당하는 것은 싫어하면서 저절로 그러하게 되기를 기다린다면, 이것은 곧 온몸이 모두 마음의 명령에 따라 공손하고 편안한 성현(聖賢)이나 가능한 일로서, 처음 배우는 자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개 구속에 따른 병이 생기는 것은 실로 공경스런 마음을 간직하는 공부가 지극하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는 것으로, 편안함과 방자함을 날마다 추구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마음이 만약 항상 깨어 있어서 게으르고 방종함이 없다면, 몸의 모든 부분이 저절로 수검(收檢)되어서 마음의 명령을 따르게 될 것이다.”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학문을 하는 도리는 반드시 전일(專一)한 마음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서 한 다음에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약 제멋대로 들락날락하는 마음을 가지고 배우다가 말다가 한다면, 학문을 어떻게 이루겠는가.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등공(滕珙)에게 고하기를, ‘전일하게 오래도록 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두세 번만 중단해도 실패한다.’ 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연평 이동이 배우는 자들에게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아직 발하기 전의 기상(氣象)을 살펴보도록 하였는데, 대개 연평의 학문은 모두 이 점에 주안점이 있다.” 하였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연평의 학문은 환하고 시원스런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그 기상이 얼음항아리나 가을달과 같았던 것이다.”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연평 이동이 말한 묵묵히 앉아서 마음을 맑히고 천리(天理)를 체인(體認)하였다는 설은 배우는 자들이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방법에 있어서 가장 긴요한 것이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소리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鳶飛魚躍]’는 것이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되, 미리 기대하지도 말고 잊어버리지도 말고 조장(助長)하지도 말라.’는 것과 더불어 같은 뜻이라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소리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것은, 화육(化育)이 유행(流行)하여 위와 아래에 밝게 드러나 보이는 것이 모두 이(理)의 신묘한 작용이 아님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이(理)는 쉼이 없기 때문에 저절로 유행(流行)하여 한 순간도 중단되는 일이 없다. 사람 역시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르되, 미리 기대하거나 잊어버리거나 조장하려는 병통을 없게 한다면, 본체(本體)가 드러나고 묘용(妙用)이 행해지는 것 역시 한 순간도 중단됨이 없게 되는 것으로, 그 모습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하였다.

최응룡(崔應龍)이 여쭙기를, “형서(邢恕)는 사문(師門)에 죄를 지었는데도 오히려 제자의 반열에 들어가 있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후세의 학자들을 경계하려는 까닭에서이다. 화숙(和叔) 형서가 두 정자(程子)를 매우 오랫동안 따르면서 배웠는데, 한 생각의 삿됨으로 인해 문득 색성소인(索性小人)이 되었던 것이니, 학자들이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말을 하다가 명리(名利)에만 빠져서 골몰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말이 미쳤을 때, 거듭 한탄하고 애석해하면서 좌중의 사람들에게 공수(拱手)하고 말씀하시기를, “우리들은 모름지기 이와 같은 명리의 마음을 맹렬히 반성하여 소인(小人)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의 언로(言路)가 넓지 못한 것은 완석(完席)의 제도 때문이며, 사관(史官)이 직무를 저버리는 것은 조사(曹司)가 있기 때문이다. 간관(諫官)은 임금의 이목(耳目)이 되어 각자 자신이 듣고 본 바를 논계해야 하는데, 반드시 완석을 만들어서 모두의 의견을 모은 다음에야 비로소 아뢰며, 의견이 합치되지 않을 경우에는 비록 정론(正論)이 있더라도 아뢰지 못하니, 그에 따른 해악(害惡)이 어찌 크지 않겠는가. 옛날에는 아래로 백공(百工)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자 자신이 맡은 소임에 대해 간할 수가 있었다. 그때에 어찌 완석이라는 제도가 있었겠는가. 사관(史官)이 8명이나 되는 것은 사실(史實)의 기록을 중시해서이다. 그러니 각자 자신의 직책을 다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 많은 인원들이 아무런 하는 일 없이 녹봉(祿俸)이나 타 먹으면서 하번(下番)에게만 내맡기고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소견이 반드시 다 옳을 수는 없는 것인데도 직필(直筆)한 것이 때때로 상급자의 뜻과 맞지 않을 경우에는 삭제당하고 만다. 만대토록 영구히 사실을 전하여야 할 역사 기록이 매우 엉성하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하였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일찍이 실록청(實錄廳)에 들어갔다가 시정기(時政記)를 보았더니, 실제로 조보(朝報)의 내용과 다른 것이 거의 없었다.” 하였다.

나 성일이 여쭙기를, “벼슬하는 자가 조급하게 승진하려는 마음이 있을 경우에는 아비와 임금을 시해하는 일조차도 모두 이로 말미암아서 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렇다. 일찍이 벼슬길에 나가는 세상 사람들을 보건대, 마치 개미가 누린내를 좋아하여 몰리듯이 벼슬을 얻지 못할까 걱정하고 벼슬을 잃을까 걱정하는 태도를 말투나 얼굴에 나타내기까지 하였는바, 몹시 비루한 행동이다. 내 평생에 역임한 벼슬자리가 많지만, 일찍이 내가 바라서 얻은 벼슬자리는 없었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벼슬하는 자가 의리에 있어서 마땅히 물러나야 할 경우라면, 임금이 아무리 붙잡더라도 사퇴하는 상소를 올리고 명을 기다리지 않은 채 곧바로 떠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송(宋) 나라의 두범(杜範)이 이종(理宗) 때 참정(參政)이 되었는데, 자신의 말을 써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소를 올리고 물러나기를 요청하므로 황제가 간곡하게 만류하였다. 그런데도 두범은 오히려 강력하게 요청하여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황제가 성문을 닫도록 명하여 두범을 내보내지 말도록 하였으니, 이는 대개 두범이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지레 떠나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범순인(范純仁)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돌아올 때 휘종(徽宗)이 중도에서 사람을 보내 불렀다. 그러자 범순인은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곧장 시골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또 원(元) 나라의 오징(吳澄)은 도성을 떠나던 날 황제에게 청하지도 않고 곧장 떠났으므로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뒤쫓았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이런 것들로 본다면 옛사람들도 역시 임금의 명을 기다리지 않고 떠나가는 일이 있었다.” 하였다.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옛날에는 치사(致仕)하는 예(禮)가 있었는데, 이는 염치(廉恥)를 숭상하고 절의(節義)를 면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송 나라 때와 같은 경우에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되기도 전에 물러나는 것을 허락하여 그 뜻을 이루어 주었으니,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서 예가 있었다고 하겠다. 후세에는 이러한 길이 꽉 막히어서 한번 공명(功名)의 굴레에 얽혀들기만 하면 다시는 허락을 받아 물러날 길이 없게 되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부형(父兄)이 고을의 수령으로 나갈 적에 자제(子弟)들이 따라가는 것은 의리에 있어서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국법으로 헤아려 본다면 처자(妻子)는 데리고 갈 수 있으나 이미 출가한 딸은 데리고 갈 수 없으니, 자제는 따라가지 않는 것이 옳다. 다만 옛일을 가지고 헤아려 보면, 송(宋) 나라의 이우직(李友直)이 연산(鉛山)을 맡아 나가 있을 적에 연평(延平) 이동(李侗) 선생이 역시 왕래하였으며, 때로는 부인과 함께 가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자식을 따라가는 것도 괜찮은데, 하물며 자제이겠는가. 그러나 옛날과 지금은 시대가 다르고 중국과 우리나라는 군현(郡縣)의 제도가 크게 다르다. 중국의 경우는 군현을 맡은 자에게는 모두 월봉(月俸)이 있어서 부모를 봉양하고 자녀를 거느리고 친척까지 도와준다고 해도 별로 해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는 월봉의 제도가 없어서 관가의 물품을 사용(私用)으로 쓰고 있으니, 자제들을 많이 거느리고 가서 관사(官舍)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 어찌 의리에 있어서 합당하겠는가. 자제들이 부모를 찾아뵙는 일로 왕래하더라도 오랫동안 지체하여 머물면서 폐해를 끼쳐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세속(世俗)에서 친상(親喪)을 당하여 고위(考位)와 비위(妣位)를 함께 제사 지내었는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길(吉)을 끌어당겨 흉(凶)함으로 나아가는 것은 전혀 예가 아니다.”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여묘살이를 하는 제도는 후대에 나온 것으로, 장사를 마치면 반혼(返魂)하는 것이 예이다. 다만 집에서는 내외와 남녀의 구별을 분명히 할 수가 없으니, 상사(喪事)나 제사(祭祀)에 있어서 근엄하게 하지 못해 끝내는 온당치 못한 일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다.”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옛날 사람 가운데 상을 당하여 병이 나서 계집종으로 하여금 탕약(湯藥)을 올리게 하였다가, 삼가지 않았다는 이름을 얻어 평생토록 세상에서 쓰이지 못하고 불우하게 된 사람이 있다. 그러니 혐의로움의 구별을 엄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김취려(金就礪)가 여쭙기를, “내상(內喪)에 사내종으로 제복(祭僕)을 삼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예가 아니다. 계집종으로 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그러나 여소(廬所)에서 계집종을 데리고 있는 것은 또한 온당치 못하다. 그러니 자제로 집사(執事)를 삼아서 진설(陳設) 등 여러 가지 일을 자제가 하도록 하는 것이 예에 합당할 듯하다. 일찍이 종묘(宗廟)의 제향(祭享)을 보았는데, 대축(大祝)이 군(君)의 주독(主櫝)을 열고, 내관(內官)이 소군(小君)의 주독을 열었으니, 이 역시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하였다.

말씀하시기를, “요즈음 사람들은 내상(內喪)을 조문할 때 친척이 아닌 경우에도 곧장 영좌(靈座) 앞으로 나아가 절하는데, 이것은 예가 아니다. 살아 있을 때 서로 통가(通家)하여 당(堂) 위를 드나든 사이가 아니라면 내외(內外)를 구별하는 예는 엄격하여 절대로 문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어찌 죽은 사람이라고 해서 갑자기 부인의 도리를 폐하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는 상례(喪禮)의 기강이 허물어져서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세속(世俗)에는 장송(葬送)이나 상제(祥祭)를 치르는 날에 상가(喪家)에서 반드시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조문객들에게 대접하는 것이 관례인데, 무지한 조문객은 술에 취해 추태를 보이기도 하고 혹 밤을 새우기도 한다. 이는 참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대들은 이에 대처할 방도를 강구하라.” 하였으며, 돌아가시는 날에 이르러서도 유명(遺命)을 남겨 이를 금지시키면서, ‘만약 형세상 어쩔 수 없을 경우에는 먼 곳에 음식을 차려 대접하라.’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아내가 죽었을 때 아들이 없고 또 뒤를 이을 만한 사람도 없을 경우, 그 신주(神主)나 축문(祝文)의 제사(題辭)는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신주에는 당연히 ‘고실모씨운운(故室某氏云云)’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 주자(朱子)의 문인이 일찍이 이에 대하여 물었을 때, 주 선생이 말하기를, ‘마땅히 망실(亡室)로 써야 한다.’고 운운하였는데, 나의 생각에는 ‘망(亡)’ 자는 박절한 듯하여 차마 죽게 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나타내는 뜻이 아닌 듯하니, ‘고(故)’ 자로 쓰는 것이 무방할 듯하다. 축문에서 고하는 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만 고유(告由)하는 자는 남편의 이름을 써야 하며, ‘부(夫)’ 자는 쓸 필요가 없다. ‘감소고(敢昭告)’도 역시 ‘근고(謹告)’로 고쳐서 쓰고 ‘감소(敢昭)’ 두 글자는 빼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역월(易月)의 제도는 비록 조부모나 형제의 상에도 기월(期月) 이외에는 복을 입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어서 관직에 있는 자는 모두 길관(吉冠)을 쓰고서 종사(從仕)하는데, 그 유래가 오래 되어 갑자기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국사(國事)를 당해서는 참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만, 사관(四館)이 제진(齊進)하는 등의 연회는 사적인 모임입니다. 이런 경우 상급자가 시왕(時王)의 제도라 하면서 연회에 참석하기를 강요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송 나라의 자약(子約) 여조검(呂祖儉)이 그의 형인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의 상을 위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상복을 입는 것을 조정에서 허락하였는데, 군자(君子)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미담(美談)으로 여기고 있다. 만약 복을 계속해서 입으려고 한다면 마땅히 이렇게 해야만 자신의 뜻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요,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단지 풍습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왕(時王)의 제도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예에 있어서는 양쪽이 다 옳은 경우가 없고, 일에 있어서는 양쪽이 다 편한 경우가 없다. 관직에 있는 자가 만약 자기의 뜻을 실행하고자 할 경우에는 일에 방해되는 것이 많아서 끝내 옳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유중엄(柳仲淹)이 남의 양자로 들어간 뒤에 본생(本生)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기년복(朞年服)이 지난 뒤에도 차마 최복(衰服)을 벗지 못하고 굳이 삼년(三年)을 마치려고 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 몹시 그르게 여기면서 말씀하시기를, “선왕(先王)이 만든 예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 어찌 자신의 기분에 따라서 곧장 행할 수 있겠는가. 이미 남의 양자로 들어갔으면서 또다시 사친(私親)을 돌아보고자 한다면, 이것은 근본이 둘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남의 재산을 이롭게 여겨 앞다투어 계후(繼後)가 되려고 하다가, 이미 그의 후사(後嗣)가 되고 나서는 살아 계실 때 섬기고 돌아가셨을 때 장사 지내는 등의 일은 도리어 친부모를 중시하여 양부모를 하찮게 보고 있다. 풍속이 야박하고 나쁘기가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하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윤의정(尹義貞)이란 사람이 황장목(黃腸木)을 베어서 관(棺)을 만들어 친상(親喪)을 치렀다. 이에 대해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친상을 후하게 치르고 싶더라도 어찌 금목(禁木)을 베어서 쓴단 말인가.” 하면서, ‘시어머니의 것을 헐어서 며느리에게 준다.’고 한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꾸짖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기제(忌祭) 때 항상 고위(考位)와 비위(妣位)를 함께 제사 지내는데, 이는 전혀 예가 아니다. 고위의 제사에 비위를 함께 제사 지내는 것은 그런대로 괜찮겠지만, 비위의 제사에 고위의 제사를 함께 지내는 것은, 어찌 감히 높은 이를 끌어당기는 의리가 있단 말인가. 우리 가문에서도 역시 일찍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내가 종자(宗子)가 아니므로 마음대로 고칠 수가 없어서 단지 내가 죽은 뒤에는 이런 풍습을 따르지 말도록 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절사(節祀)와 시향(時享)에는 아무리 춥거나 덥더라도 병이 없는 한 반드시 몸소 가서 주독(主櫝)을 받들고 제물을 올렸으며, 남을 시켜 대신하는 일이 없었다. 혹 철 따라 나는 음식물이나 색다른 맛의 음식물을 얻으면 말리거나 절여 두었다가 절사를 만나 제사를 올릴 때 천신(薦新)하였다. 대개 선생께서 지차(之次)라서 가묘(家廟)에서 천헌(薦獻)하는 예를 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였던 것이다.

내가 여쭙기를, “제물(祭物)을 오른쪽부터 진설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신도(神道)는 오른쪽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왼쪽은 양(陽)이고 오른쪽은 음(陰)이다. 오른쪽을 숭상하는 이유는, 신도는 음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제례(祭禮)에 대하여 《오례의(五禮儀)》를 상고해 보니, 제찬(祭饌)의 그릇 수가 경대부(卿大夫)로부터 사서인(士庶人)에 이르기까지 각자 규정이 있는데, 규정된 숫자를 절대로 넘을 수가 없는 것입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사 지내는 사람의 이름과 직위에 등급이 있으니, 제사 지내는 예도 역시 그 등급을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다만 《오례의》 가운데에는 역시 따르기에 어려운 것이 있다. 찬품(饌品)의 숫자에 있어서 포육(脯肉), 식혜, 과일의 경우는 지나치게 많고 어육(魚肉)으로 만든 반찬은 아주 적은데, 민가에서 어육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어서 오히려 준비하기가 쉽지만, 포육, 식혜, 과일의 경우는 어찌 항상 많은 양을 마련해 둘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그 규정대로 모두 다 따를 필요는 없고, 집안 형편에 맞추어서 지내는 것도 무방할 듯하다. 다만 지나치게 참람스럽게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수(祭需)의 그릇 수도 지나치게 번거로이 해서는 안 된다. 번거로우면 모독하게 되고, 또 정결하게 할 수도 없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주자가 일찍이 소목(昭穆)의 제도가 오랫동안 폐지된 것을 한탄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례(家禮)》를 만들 때에는 도리어 시속(時俗)의 예를 따랐으니, 이는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시왕(時王)의 제도를 어찌 가벼이 고칠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예란 것은 세상에서 두루 행해지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행하지 않는다면 쓸데없이 글로만 만들어 놓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제자들에게 답한 편지를 보면 고례(古禮)가 회복되지 못하는 것을 깊이 탄식하면서도 끝에 가서는 말하기를, ‘어찌 조정에 건의해서 하나하나 잘못된 것을 시정하는 것만큼 시원스럽기야 하겠는가.’ 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선생께서는 속절(俗節)에 묘제(墓祭)를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나, 역시 풍습을 따라서 성묘하였으며, 가묘(家廟)에는 제사를 올리지 않았다. 이것은 대개 주자(朱子)가 경부(敬夫) 장식(張栻)에게 답한 속절에 관한 한 구절의 뜻이었다.

기일(忌日)에는 술상을 차리지 않았으며, 고기를 받지 않았다. 비록 제사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외침(外寢)에서 재계하면서 하루를 보내었다. 사람을 대접함에 있어서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하루는 손님이 찾아왔는데, 술상을 차리려고 하다가 그 사람에게 기고(忌故)가 있는 것을 알고는 곧바로 중지시키고 오직 차만 대접하였다. 어느 하루는 이웃 고을에서 노루고기를 보내 왔는데, 마침 기일을 만났으므로 도로 돌려보냈다.

선생께서 부인(夫人)의 기일(忌日)을 당하였을 때 감사(監司)가 찾아왔다. 선생께서는 기일이라는 말을 하지 않고 평소처럼 주육(酒肉)을 갖춘 상을 차렸는데, 다만 들여온 상을 보니 손님과 주인의 상에 차린 반찬이 서로 달랐다. 감사가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같이 소식(素食)을 하였다.

일찍이 선생 부인의 기일(忌日)에 나 성일이 선생을 모시고 식사를 한 일이 있었는데,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기일에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이웃을 초청해서 먹기도 하는데, 이는 전혀 예가 아니다. 오늘은 그대가 마침 곁에 있기 때문에 불러서 함께 먹는 것이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 돌아가신 달이 윤달일 경우에는 돌아가신 해의 윤달을 다시 만나면 그 윤달에 제사를 지냅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윤달은 정식적인 달[正月]이 아니다.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항상 정식적인 달에 지내는데, 유독 그해에만 돌아가신 해의 윤달에 제사 지내는 것은 온당치 않을 듯하다. 제사는 보통 달[常月]에 지내고 윤달의 돌아가신 날에는 재계(齋戒)하고 소식(素食)하되, 제사는 지내지 않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다.

선생께서는 간혹 재궁(齋宮)에서 기제(忌祭)를 지내었다. 누군가가 선생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예입니까?” 하고 묻자, 선생께서 대답하시기를, “사당에서 제사 지내는 것이 예이다. 그러나 만약 종가(宗家)에 혹 유고(有故)가 있거나 또는 친속이 소원(疏遠)할 경우에는 집에서 제사 지내면 방해되는 것이 많다. 재궁은 바로 묘소(墓所)이므로 불사(佛寺)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자손들이 여기에 모여서 제사 지내는 것도 무방하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장자(長子)는 아내의 친부모를 제사 지낼 수 없으나, 중자(衆子)로서 남의 사위가 된 자는 사당을 세워서 제사 지낼 수 있습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장자로서 남의 외동딸의 사위가 되면 크게 방해되어서 매우 난처한 일이 있을 것이다. 대개 처가쪽에 후사(後嗣)가 없고 양자를 들여 뒤를 이을 만한 사람도 없다면 당연히 내가 제사를 모셔야 하는데, 자신은 종사(宗祀)를 받들고 있어서 양쪽을 다 지낼 수는 없는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이 같은 사당에 모시고서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근본이 둘이 되게 하는 심한 경우인바, 말할 것도 못 된다. 비록 따로 사당을 세우더라도 근본을 둘이 되게 하는 잘못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니 대처하기가 역시 어렵지 않겠는가. 다만 불행하게도 이런 경우를 당하였다면, 처족(妻族) 가운데에서 가까운 자를 택해 노비를 나누어 주어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선생의 가묘(家廟)가 온계리(溫溪里)에 있는데, 종자(宗子)가 후사가 없었으므로 조카인 진사 이완(李完)이 당연히 이어받아서 제사 지내어야 했다. 그런데 이완이 이미 다른 곳에 가서 살고 있었다. 이에 선생께서 거듭 깨우쳐 주자, 이완이 그의 아들 이종도(李宗道)로 하여금 다시 온계리로 돌아가 살면서 종사(宗祀)를 받들게 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는 기뻐하며 재력(財力)을 내어서 집안 살림을 돌보아 주었는데, 편안히 살도록 도와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종가(宗家)가 세월이 오래 되어 퇴락하였으므로 이종도가 수리하고자 하였으나 집이 가난하여 재목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그러자 선생께서는 묘소의 나무를 베어다 쓰게 하였다. 어떤 이가 묘소의 나무를 베어서 쓰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묘소의 나무를 베어서 사사로이 쓴다면 참으로 옳지 않지만, 선산(先山)의 나무를 베어서 선조의 묘궁(廟宮)을 지어 선조의 제사를 모신다면, 이것은 아버지의 사업을 아들이 계승하여 이루는 것 가운데 아주 큰일이다. 그런데 무슨 안 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묘전(墓田)이 많지 않아서 종자(宗子)가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그러던 차에 마침 묘소 곁에 있는 밭을 팔려는 자가 있었는데, 토질이 자못 비옥하였으므로 집안 사람들이 앞다투어 사려고 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는 규약(規約)을 만들어서 반드시 종자로 하여금 그것을 사게 하였는데, 족질(族姪) 아무개가 마침내 가문의 규약을 어기고 그 밭을 샀다. 선생께서는 자신의 덕이 박한 탓에 집안 사람들에게 말이 미더움을 받지 못하는 데 대해 상심하여 여러 날 동안 슬픈 기색으로 지냈다. 그 사람이 나중에 알현하고자 하자, 선생께서는 거절하고 만나 보지 않았다.

내가 여쭙기를, “아내의 언니가 과부가 되었는데 의탁할 곳이 없는 데다가 따로 살 만한 집도 없다면 같은 집에 사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의리에 있어서 타당하지 못한 듯하다. 지금 사람들이 비록 아내의 자매를 지친(至親)이라 하여 안팎의 구별이 없기는 하나, 구양공(歐陽公)은 두 번이나 설씨(薛氏)의 집에 장가들었고,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은 거듭해서 한무구(韓無咎)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고례(古禮)가 이와 같으니 지금 지친으로 대하여 같은 집에 사는 것이 어찌 혐의쩍음을 분별하는 도리이겠는가. 만약 의탁할 곳이 없다면 마땅히 집을 지어 주어 살게 하고 살림살이를 돌보아 주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인하여 말씀하시기를, “혐의를 받을 만한 일에는 조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옛날에 구양공이 의탁할 곳이 없는 친척의 딸을 거두어 길러서 장성한 뒤에 시집을 보냈는데, 또 과부가 되었으므로 다시 데려다가 한 집에서 살게 해 주었다. 그러자 공을 꺼리는 자가 공이 남녀 간에 분별하는 도리를 닦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며, 견식 있는 자들도 모두 의심하였다. 이에 구양공이 상소를 올려 억울함을 밝히고 나서야 비로소 혐의를 벗을 수가 있었다. 이 역시 혐의스러운 일을 제대로 가리지 못한 잘못인 것이다.” 하였다.

중국에서는 문묘(文廟)의 추숭(追崇)한 호(號)를 버리고 ‘선성선사(先聖先師)’로 개제(改題)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이 제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성인(聖人)의 덕이 비록 봉증(封贈)에 따라서 더해지고 덜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 호로 높인 것은 세대가 이미 오래 되었고, 정자(程子)나 주자(朱子) 같은 대유(大儒)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지워 버리는 것은 실로 온당치 못한 일이다. 지금 이 거조(擧措)를 어찌 가벼이 의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의 종사(從祀)하는 전례(典禮) 가운데에는 이해하지 못할 점이 많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과 같은 경우는 한갓 문장만을 숭상하였으며 불교(佛敎)에 깊이 빠져들었으니, 그의 문집(文集) 중에 나오는 불소(佛疏) 등의 작품을 볼 적마다 미워하면서 통렬하게 끊어 버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를 문묘에 향사(享祀)한다는 것은 어찌 선성(先聖)을 심하게 모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한탄스럽고 한탄스럽다.”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 사현(四賢)의 경우는 비록 공덕(功德)이 있으나 문묘(文廟)에 종사하기까지 하는 것은 가벼이 의논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 당시에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종사하기를 청하였는데, 선생께서 그 말을 듣고서는 끝내 옳게 여기지 않으셨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곡서원(川谷書院)의 이천 선생(伊川先生) 제문(祭文) 가운데 ‘혁(赫)’ 자와 ‘훤(喧)’ 자 두 글자는 온당치 못하니, 마땅히 아래에 있는 ‘정(正)’ 자와 ‘대(大)’ 자로 고쳐야 한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화상찬(畫像贊)에 ‘전야대성(展也大成)’이라 하고, 시호(諡號)에 ‘정공(正公)’이라 한 곳의 ‘정’ 자와 ‘대’ 자를 더욱더 드러내어 쓴 것이다.

김부필(金富弼)이 여쭙기를, “역동서원(易東書院)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두 분 선생을 모시어 제사 지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두 분 선생은 모두 역학(易學)에 공이 있는 분이고, 이왕 이름을 역동(易東)으로 하였으니, 사당을 세워서 제사를 모시고 좨주(祭酒) 우탁(禹倬)을 배향(配享)하는 것은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 다만 서원의 제반 일들이 초라하기 짝이 없어서 이미 학전(學田)도 없는 데다가 전복(典僕)마저 얼마 안 된다. 그런데 경솔하게 이런 중한 예를 세웠다가 마침내 설만해진다면, 높이 모시려고 하다가 도리어 홀대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좨주 우탁만 모시는 것이 아마도 더 편할 것이다.” 하였다.

김부필이 여쭙기를, “서원(書院)의 학전(學田)에서 들어오는 수입이 부족하니 곡식을 저축해서 이자를 늘렸으면 합니다.”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자를 늘린다는 ‘식리(息利)’ 두 글자는 선비가 입에 올릴 말이 아니다.” 하였다.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립하였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서원의 사당에 배향(配享)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해주(海州)의 문헌(文憲)도 이와 같이 하고자 하였으나 물의(物議)가 몹시 들끓어서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러니 시비가 정해지기를 기다려서 그렇게 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가 세워 놓은 사당인데 자기를 거기에 배향한다면 그의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하였다. 대개 주세붕은 이기(李芑)의 집 문에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있어서 그의 처신에 크게 낭패스러운 점이 있었으니, 선생께서 하신 이 말씀은 실로 은미한 뜻이 있다.

노재(魯齋) 허형(許衡)의 출처(出處)에 대해서 여쭙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경산(瓊山) 구준(丘濬)의 무리가, 모두 원(元) 나라를 받든 잘못을 들어서 비난했지만, 그 당시는 오랑캐가 중화(中華)를 주장하여서 천리(天理)와 이륜(彝倫) 및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이 거의 다 끊어지고 사라지려고 하였는바, 하늘이 노재를 낸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노재가 만약 독선(獨善)한 채 세상일에 대해 잊었더라면, 천리를 누가 밝히고 이륜을 누가 바로잡았겠는가. 천하가 끝내는 오랑캐의 나라로 되어 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노재가 세상을 위하여 나간 것은 의(義)를 해치는 것 같지는 않은 듯한데, 성현이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논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명(明) 나라의 학자들에게는 모두 총령(蔥嶺)의 맛이 나는데, 유독 문청공(文淸公) 설선(薛瑄)만은 참으로 성현의 종지(宗旨)를 얻었다.” 하고, 또 말씀하시기를, “문청공의 학문은 평생토록 공부한 것이 모두 경(敬) 자 하나에 있다.” 하였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학문에 몸담은 사람이 아니어서 종신토록 종사한 일이 그저 문장에 있었을 뿐이다. 그의 문집을 보면 이를 잘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학문은 이미 저술이 없고 또한 징험할 만한 문헌도 없어서 그 조예의 깊고 얕음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지금 천곡서원(川谷書院)에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제사를 받들면서 한훤당을 배향(配享)하는데, ‘배(配)’ 자의 뜻은 가볍게 다룰 것이 아니다. 문선왕(文宣王)의 사당 안에는 단지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만을 배향하고, 그 나머지 제자들은 공문십철(孔門十哲)에 해당하는 사람일지라도 모두 전 안에서 종사(從祀)한다고 칭하였으며, 정자나 주자 같은 대현도 오히려 문묘의 동쪽과 서쪽 열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종사한다고 칭하였다. 이것으로 살펴보면 ‘배(配)’ 자와 ‘종(從)’ 자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한훤당의 학문이 비록 문묘에 들어가기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할지라도 그저 종사(從祀)라고만 칭하고 배향(配享)이라고 칭하지 않는 것이 옳다. 이런 내용으로 원중(院中)에 통문하라.” 하고, 또 말씀하시기를, “한훤당의 학문이 실천에 비록 돈독하기는 하였지만, 도문학(道問學)의 공부에는 미진한 점이 있다.” 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추강냉화(秋江冷話)》를 펴 보시고는 탄식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징험할 만한 문헌이 없어서 옛사람들의 언행과 사업이 민멸되어 전해지지 않으니, 이와 같은 글은 역시 쉽지가 않다.” 하였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는 타고난 자질이 참으로 아름다웠으나 학문의 힘이 충실하지 못하여 시행한 바가 적당한 곳을 지나침을 면치 못하였으므로 끝내는 일을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만약 학문의 힘이 이미 충실해지고 덕의 그릇이 성취된 뒤에 출사하여 세상 일을 담당하였더라면, 성취한 바를 어찌 쉽게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요순(堯舜) 시대 같은 임금과 백성들에게 비록 군자의 뜻을 편다고 하더라도, 때와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서야 어찌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기묘년의 실패는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그 당시에 정암 조광조는 이미 그 일이 실패하였음을 깨닫고서 자못 스스로 조절하고 억제하였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도리어 그르다고 하면서 창끝을 되돌려 서로 찌르려고 하기까지 하였으니, 정암으로서도 대개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일찍이 중종조(中宗朝) 때 알성(謁聖)하면서 정암을 바라보았는데, 걸음걸이가 차분하고 위의(威儀)를 본받을 만하였으니, 한 번 보고서도 그의 사람됨을 알 수가 있었다.”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조원기(趙元紀)나 조광림(趙廣臨)은 모두 착한 사람이니, 정암 조광조가 배운 가학(家學)의 연원(淵源)이 역시 우연한 것이 아니다. 우리 동방에 도학(道學)을 한 선비가 없지는 않으나, 징험할 만한 문헌이 없어서 조예의 깊고 얕음을 살펴볼 곳이 없다. 좨주(祭酒) 우탁(禹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는 시대가 멀지만,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나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같은 여러 유학자들에 이르러서는 풍문을 전해 들을 수 있는 가까운 세상의 사람인데도 역시 찾아낼 수가 없으니, 몹시 한탄스럽다. 징험하여 밝힐 수 있는 것으로 말하면, 근대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학문이 아주 바르다. 그가 저술한 글을 보노라면 모두 가슴속에서 흘러 나와 이(理)는 밝고 의(義)는 발라서 혼연히 하늘이 이룬 것 같으니, 조예가 깊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회재 이언적이 귀양가 있을 때 일찍이 진수팔규(進修八規)를 기초하여 올리려고 하다가 올리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의 서자(庶子)인 이전인(李全仁)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서 올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시기란 가한 시기가 있고 불가한 시기가 있으며, 일이란 적절한 경우가 있고 부적절한 경우가 있다. 지금은 시기로 보나 일로 보나 모두 적절치 않다. 혹시라도 이로 인해 사단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벽장 안에 깊숙이 감추어 두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 것이다.” 하였다. 이는 대개 그 당시에는 윤원형(尹元衡)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이고, 명종께서도 아직 의심이 다 풀리지 않았을 때였으므로, 비록 유소(遺疏)를 올린다고 하더라도 득이 될 리는 없고, 혹 의외의 환란을 불러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므로 선생께서 힘껏 말린 것이다.

선생의 학문은 한결같이 주자(朱子)를 목표로 하였는바, 육학(陸學)을 높이 떠받드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몹시 배척하여 통렬히 끊어 버렸다.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곤지기(困知記)》를 존중하여 믿는 것이 매우 심하였다. 선생께서는 정암(整庵) 나흠순(羅欽順)의 학문에 대해, ‘이단을 물리친다고 하면서 겉으로는 배척하고 속으로는 도왔으며, 왼쪽으로는 막고 오른쪽으로는 끌어 내었으니, 실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죄인이다.’라고 여겼다. 이에 소재와 힘껏 논변하였는데, 소재가 끝내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유독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만이 선생과 더불어 합심하여 곤지기발(困知記跋)을 지어 그의 학문을 내쳤는데, 선생께서 보시고는 말씀하시기를, “이 의논이 아주 명쾌하다. 이렇게 하기는 참으로 쉽지 않다.” 하였다.

선생께서는 이단(異端)에 대하여 마치 음탕한 음악이나 아름다운 여색과 같이 여겨 엄하게 끊어 버리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경(佛經)을 보고서 삿됨이 숨어 있는 곳을 알아보고자 하였는데, 마치 물을 건너는 것과 같아서 처음에는 물의 얕고 깊음을 시험해 보고자 하다가 끝내는 빠져 버리는 염려가 있을까 두려웠다. 학자는 다만 마땅히 성현의 글을 읽어서 끝까지 알아 내고 그것을 믿어야지, 이단의 문자와 같은 것은 전혀 알지 못해도 무방하다.” 하였다.

선생께서 어렸을 적에 청량산(淸涼山)을 유람하고서 백운암기(白雲菴記)를 지었는데, 절의 중이 암자의 벽에 이를 새겨 놓았다. 선생께서 말년에 그 사실을 듣고는 즉시 제거하게 하였다. 산승(山僧)이 와서 시를 지어 주기를 청하면 비록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단지 연하(煙霞)와 수석(水石)의 경치만을 써 주었을 뿐, 불가(佛家)의 말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말년에는 짓는 것조차도 역시 드물었다.

처음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지었을 적에 노복들을 시켜 지키려고 하다가 그 불결함을 싫어하여 산승(山僧)을 시켜 농운정사(隴雲精舍)에 별도로 거처하면서 지키게 하였다. 이는 대개 주 부자(朱夫子)가 도사(道士)를 시켜서 운곡초당(雲谷草堂)을 지키게 하였던 것과 같은 뜻이다.

을축년(1565, 명종 20) 여름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승하하자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보우(普雨)를 목 벨 것을 청하여 공관(空館)하기까지 하였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영남(嶺南)의 유생들이 온 도내에 통문(通文)을 돌린 다음 대궐에 나아가 상소하게 되었다. 그러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역적을 쳐서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보우를 처벌하는 것은 이미 그의 죄에 합당한 죄목(罪目)이 아니다. 그리고 온 도내에 통문을 돌려 서로 이끌고 대궐에 나아가는 것도 또한 온편한 일이 아니다. 대개 사람이란 각자 자신의 소견이 있는 법인데, 어찌 구차하게 동조한단 말인가. 만약 이 일이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같은 데에서 나온 일이라면 통문을 돌리지 않더라도 반드시 모두 호응할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아무리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타일러도 호응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말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스스로 상소를 올리는 것이 옳은 일이다. 어찌 온 도내에 통문을 돌려서 서로 이끌고 대궐로 나아갈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예안(禮安)과 안동(安東)의 선비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듣고 대궐로 나아가지 않았다. 또 말씀하시기를, “통문을 돌려 상소를 올리는 것은 유자(儒者)가 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유생들이 보우(普雨)를 주벌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원수를 갚고 역적을 토벌한다는 내용으로 말을 만들었는데,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초야에서 올리는 말은 으레 과격한 법이다. 그러나 반드시 죄목이 실제의 죄에 합당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사특한 마음을 억누르고 임금의 뜻을 돌릴 수 있다. 지금 보우의 죄는 요사한 말로 임금을 속였고, 나라를 좀먹고 백성들을 해쳤으며, 이교(異敎)를 날로 치성해지게 하고 오도(吾道)를 날로 쇠해지게 한 데 있으니, 그 죄가 참으로 주벌할 만하다. 그러나 시역(弑逆)의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그의 죄에 합당한 죄목이 아니다. 그러므로 말이 격렬하면 격렬할수록 임금의 귀는 더욱더 멀어져서, 임금의 뜻을 돌리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보우 역시도 그 죄에 승복하지 않고 변명을 늘어놓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내가 여쭙기를, “유생들이 공관(空館)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언론(言論)의 책임을 맡은 자는 임금에게 간하다가 듣지 않으면 떠나는 것이 옳다. 벼슬을 하지 않는 선비는 본디 언론을 맡은 책임이 없으니, 상소를 올려서 논열(論列)하는 것은 그들의 직분이 아니다. 만약 일이 종사(宗社)의 존망에 관계되고 오도(吾道)의 성쇠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의리상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경우에는 역시 상소를 올려 논열할 수가 있다. 그러나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는 임금에게 달린 일이다. 그러니 어찌 반드시 들어주어서 허락해 줄 것을 기필해서야 되겠는가. 요즈음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무슨 일만 있으면 반드시 상소를 올리고, 들어주지 않으면 또 서로를 이끌고 공관을 하며, 공관을 해도 들어주지 않으면 또 서로 이끌고 학관에 모여들고 있는데, 떠날 때는 남보다 먼저 나가지 못할까 걱정하고, 모여들 때는 남보다 뒤처질까 걱정한다. 떠날 때도 정당한 도리로 한 것이 아닌데, 모여들 때도 또한 명분이 없다.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옛날의 군자는 나라의 대사(大事)를 당하였을 경우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상소를 올려 항론(抗論)하였으며, 임금이 들어주지 않으면 결연히 떠나 버려 죽을 때까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 자도 있었으니, 이것은 귀한 일이다. 공관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옳은지 나는 모르겠다.” 하였다. 또 여쭙기를, “공관하는 것은 언제부터 생긴 것입니까?”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역사책에 보이는 것으로 말하면 아마도 송 나라 때의 권당(捲堂)에서 비롯된 듯하다.” 하고, 또 말씀하시기를, “공관하는 것은 그 형세가 마치 임금에게 강요하는 것 같다.” 하였다.

경오년(1570, 선조 3) 11월 9일에 시향(時享)을 지내는 일로 온계리(溫溪里)에 가서 종가(宗家)에서 재숙(齋宿)하다가 처음 감기에 걸렸다. 제사를 지낼 때 주독(主櫝)을 받들고 전(奠)을 올리는 것을 몸소 스스로 하였는데, 이어 기운이 불평하였다. 제사를 지내기 전에 자제들이 고하기를, “기후가 불평하시면 제사에 참여하지 마십시오.” 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제 늙었다.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으니 마땅히 온 힘을 다해 제사를 지내겠다.” 하였다. 11일에 온계리의 동회(洞會)에 나아가서는 말씀하시기를, “기운이 몹시 불평하나, 내가 만약 오지 않으면 가형(家兄)께서 무료하실 것 같아서 왔다.” 하였다. 12일에 불평한 기운이 그대로였는데, 자제들로 하여금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써서 명언(明彦) 기대승(奇大升)과 자중(子中) 정유일(鄭惟一)에게 부치게 하였다.

 

 

삼절(三絶)의 공부 : 위편삼절(韋編三絶)의 고사로, 책이 다 떨어질 때까지 부지런히 읽는 것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말년에 《주역(周易)》을 좋아하여 많이 읽은 탓에 그 책을 엮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떨어졌다고 한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도리(道理) : 원문에는 ‘도의(道義)’로 되어 있는데, 소주(小註)에, “초본(草本)에는 ‘도리(道理)’로 되어 있다.” 하였다. 번역은 초본을 따랐다.
금근거(金根車)의 꾸지람 : 글자를 경솔하게 잘못 고치는 것을 말한다. 금근거는 황제가 타는 황금으로 장식한 수레이다. 한퇴지(韓退之)의 아들 한창(韓昶)이 우둔하고 용렬하였는데, 집현전(集賢殿)의 교리(校理)가 되었다. 사전(史傳)에 ‘금근거(金根車)’란 말이 있자 한창은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고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반드시 금은거(金銀車)일 것이다.” 하고는 ‘근(根)’ 자를 모두 ‘은(銀)’ 자로 고쳤다고 한다. 《尙書故實》
삼전(三殿) : 왕대비전(王大妃殿), 대전(大殿), 중궁전(中宮殿)을 말한다.
도산(道山) : 명종조 때 독서당(讀書堂)이 있었던 두모포(豆毛浦)에 있는 산 이름인 듯하다. 세종 8년(1426)에 사가독서 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하였는데, 이때에는 집이나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그 뒤 성종 때 마포(麻浦)의 한강 가에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을 개설하였고, 중종 때에는 동대문 근처의 정업원(淨業院)을 독서당으로 만들었다가 중종 12년(1517)에 두모포의 정자를 고쳐서 독서당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고 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한강의 별영(別營)을 독서당으로 삼았다.
을사년의 변란 : 명종 즉위년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를 가리킨다. 명종의 외숙이자 소윤(小尹)의 거두인 윤원형(尹元衡)과 인종의 외숙이자 대윤(大尹)의 거두인 윤임(尹任)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것을 계기로 윤원형이 그의 일파인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등과 함께 음모를 꾸며 윤임과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죽이고 많은 명사(名士)들을 축출한 사건을 말한다.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壁書事件) : 명종 2년에 정언각(鄭彦愨)과 이노(李櫓)가 양재역에 붙어 있던 벽서(壁書) 한 장을 가지고 와 아뢰었는데, 그 안에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있고, 간신인 이기 등은 아래에서 권력을 농락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 있었다. 그러자 윤원형 등은 윤임의 잔당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증거라고 하면서 봉성군(鳳城君) 등을 처형한 사건을 말한다. 《燃藜室記述 卷10 明宗朝故事本末》
봉성군(鳳城君)의 옥사(獄事) : 봉성군은 중종의 서자로, 희빈(煕嬪) 홍씨(洪氏)의 소생이며, 대윤인 윤임의 조카이다. 을사사화 때 윤임이 봉성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획책하였다는 모략을 받아 대윤이 몰락하였는데, 그 뒤 명종 2년에 양재역 벽서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윤원형 일파가 사론(邪論)이 아직도 남아 있는 증거라고 하면서 봉성군과 이약빙(李若氷), 송인수(宋麟壽) 등을 처형하였다.
무릉(武陵) 주신재(周愼齋) : 무릉이나 신재는 모두 주세붕(周世鵬)의 호이다.
하루의 …… 것 : 먼저는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뒤에 보면 이로운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에, “우리가 경상초가 한 일을 헤아려 보면 하루하루 한 것을 보면 별 것이 아닌데도 일 년을 두고 헤아려 보면 남음이 있다.” 하였다.
육아(蓼莪)와 풍수(風樹)의 감회 : 부모가 살아 계실 때 잘 봉양하지 못한 데 대한 후회를 말한다. 육아는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으로, 효자가 부모를 끝까지 봉양하지 못한 데 대한 슬픔을 읊은 시이며, 풍수는 《한시외전(韓詩外傳)》 제9권의 “나무는 고요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려고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也]”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정자관(程子冠) : 말총으로 짜거나 떠서 만든 유생(儒生)들이 쓰는 관으로, 위가 터지고 세 봉우리가 지게 하여 두 층으로 만들었다.
비록[雖] : 이 부분의 소주에, “초본에는 ‘수(雖)’ 자가 없다.” 하였다.
자문점마(咨文點馬) : 중국에 사신이 갈 때 자문(咨文)과 함께 보낼 말을 점고하는 직책인데, 불법으로 가지고 가는 물품도 아울러 점검하였다.
태진(太眞)이 …… 시(詩) : 백낙천(白樂天)이 지은 장한가(長恨歌)를 말한다. 태진(太眞)은 양 귀비(楊貴妃)를 가리킨다. 양 귀비가 죽은 뒤 현종(玄宗)이 몹시 그리워하자 임공(臨邛) 땅에 사는 도사가 하늘 나라로 가 양 귀비를 만나 그리워하는 현종의 마음을 전하였다. 그러자 양 귀비가 현종에 대한 사랑을 그 도사를 통하여 현종에게 전하였다.
찰방공(察訪公) : 이황의 다섯째 형님이다.
괴팍하게 화를 내어[怪怒] : 이 부분의 소주에, “어떤 본에는 ‘거가(遽加)’로 되어 있다.” 하였다.
봉화(奉化) : 봉화 현감(奉化縣監)을 지낸, 이황의 아들 이준(李寯)을 가리킨다.
각지불공장(卻之不恭章) :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 “높은 사람이 주는 물품을 ‘이것을 받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하고 따져 본 다음에 받는다면, 그것은 공손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물리치지 않는 것이다.” 하니, 만장이 “그런 이유를 붙여서 물리치지 말고 단지 마음속으로만 ‘이런 물품은 백성들한테서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다.’ 하면서 겉으로는 다른 적당한 말로 거절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자, 맹자가 “사귐은 도리로 하는 것이요, 대함은 예로써 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공자(孔子)도 받으셨다.” 하였다.
내가 …… 것 : 노(魯) 나라에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밤에 집이 무너지자 이웃에 사는 홀아비의 집으로 달려갔으나, 홀아비가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러자 과부가 “그대는 왜 유하혜처럼 하지 않는가?” 하자, 홀아비가 “유하혜는 그래도 되지만 나는 안 된다. 장차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유하혜가 할 수 있는 것을 배우려고 한다.”고 한 고사를 가리킨다.
하호(下戶) : 조선 시대 연호법(煙戶法) 등급의 하나이다. 곧 서울에서는 호주가 전ㆍ현직 5ㆍ6품인 벼슬아치의 집이 이에 해당하고, 지방에서는 농토가 5결(結)이 되고 식구가 5인 이상인 집이 이에 해당한다.
성수(成數) : 정수(整數)로, 자연수(自然數)를 말한다.
이것으로[此] : 원문의 소주에, “초본에는 ‘이차(以此)’로 되어 있다.” 하였다.
이오(二五) : 이(二)는 음양(陰陽)을, 오(五)는 오행(五行)을 가리킨다.
동방삭(東方朔)은 …… 것이다 : 이 부분의 두주(頭註)에, “동방삭 이하가 초본(草本)에는 별도로 한 조항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구일(姤日)이나 복일(復日) : 구일은 《주역(周易)》 구괘(姤卦)에 해당하는 5월의 하지일(夏至日)을 말하는데, 이때부터 음기(陰氣)가 싹트기 시작한다. 복일은 복괘(復卦)에 해당하는 11월의 동지일(冬至日)을 말하는데, 이때부터 양기(陽氣)가 싹트기 시작한다.
이로써 부드러운 도를 단절하여[以絶柔道] : 이 부분의 원문 소주에, “초본(草本)에는 앞에 ‘소(所)’ 자가 있다.” 하였다.
모여서[會] : 이 부분의 소주에, “초본에는 ‘합(合)’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수검(收檢) : 이 부분이 원문에는 ‘수검(收撿)’으로 되어 있는데, 두주(頭註)에, “‘검(撿)’은 아마도 ‘검(檢)’일 듯하다.” 하였다. 번역은 두주를 따랐다.
색성소인(索性小人) : 성격이 깐깐하여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완석(完席) : 사헌부의 관원들이 좌기(坐起)할 때 죽 둘러앉는 자리로, 어떤 일에 대해 논계할 경우 여기에서 의논이 완전히 결정된 다음에야 비로소 아뢰었다.
조사(曹司) : 갓 벼슬에 제수되어 일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막 사관(史官)으로 임명된 사람을 가리킨다.
소군(小君) : 신하가 임금의 아내, 즉 왕비(王妃)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역월(易月)의 제도 : 날로써 달을 대신하는 제도로, 임금이 죽었을 경우 후사(後嗣)가 된 자가 본디 삼년상(三年喪)을 입어야 하나, 정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36일 동안만 상복을 입는 것을 말한다.
기월(期月) : 1주년을 말한다.
계후(繼後)가 되려고 하다가 : 이 부분의 원문은 ‘욕계위후(欲繼爲後)’인데, 소주에, “초본에는 ‘욕위계후(欲爲繼後)’로 되어 있다.” 하였다. 번역은 초본을 따랐다.
황장목(黃腸木) : 나무의 결이 좋고 오래 묵어서 누런색의 속이 든 고급 관재(棺材)로 쓰이는 소나무를 말한다. 누런색의 단단한 속 부분을 황장(黃腸)이라 하고, 흰색의 무른 바깥 부분을 백변(白邊)이라 하는데, 이 황장목에 대해서는 함부로 벌채하지 못하도록 하는 금법(禁法)이 있었다.
시어머니의 …… 준다 : 처음에 제강(齊姜)의 시어머니 목강(穆姜)이 품질이 좋은 노(櫓)나무를 골라서 자기 관을 만들어 두었다. 그런데 제강이 먼저 죽자 계문자(季文子)가 그 관을 가져다가 장사를 지냈다. 이에 대해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예가 아니다. 시어머니의 것을 헐어서 며느리의 것을 만들어 주는 것은 더할 수 없는 배반 행위이다.”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 2年》
개제(改題) : 봉사손(奉祀孫)이 죽었을 경우, 다음 봉사손의 대수(代數)에 맞추어 신주(神主)를 다시 쓰는 것을 말한다.
사현(四賢) :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가리킨다. 선조(宣祖) 원년(1568)에 태학생 홍인헌(洪仁憲)이 상소를 올려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고, 선조 3년에 대사간 백인걸(白仁傑)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 사현(四賢)을 종사하기를 청하였다.
문헌(文憲) : 이 부분의 두주(頭註)에, “살펴보건대, 문헌(文憲)은 서원(書院)의 이름이다.” 하였다.
총령(蔥嶺) : 중앙 아시아 남동쪽 지방으로, 히말라야ㆍ카로코룸ㆍ곤륜 산맥이 모이는 대산계(大山系)와 고원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불교가 처음 중국으로 유입될 때 이 길을 경유했으므로 불교(佛敎)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공문십철(孔門十哲) : 공자의 제자 가운데 10명의 뛰어난 현인으로, 안회(顔回),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계로(季路), 자유(子游), 자하(子夏)를 가리킨다.
육학(陸學) : 남송(南宋)의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이 제창한 학문을 말한다. 육구연은 ‘심즉리(心卽理)’의 주관적 유심론(主觀的唯心論)을 주창하여 주자(朱子)의 ‘성즉리(性卽理)’와 천리인욕설(天理人欲說)에 대항하였는데, 이때부터 유학은 주(朱)와 육(陸)의 두 학파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뒤에 육학은 왕양명(王陽明)에게 계승되어 양명학(陽明學)으로 발전하였다.
공관(空館) : 성균관의 유생들이 불만 사항이 있을 때 이를 관철하기 위하여 일제히 관을 비우고 나와 버리는 일을 말한다. 권당(捲堂)이라고도 한다.

성호사설(星湖僿說) > 성호사설 제11권 > 인사문(人事門) 

 

서원(書院)

 

우리나라의 서원은 순흥(順興)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맨 먼저 창설되었고, 풍기(豐基)의 역동서원(易東書院)이 다음으로 설립되었다. 근세에 와서는 그 조상이 조금만 이름 있는 벼슬을 하였고 그 자손이 현달(顯達)한 자들이면 서원을 세우지 않는 자가 없으니, 그 폐단이 너무 심하다 하겠다. 심지어는 공자 이하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이들까지도, 따로 항간(巷間)에서 향사(享祀)하면서, 주자가 창주서원(滄州書院)에서 석전(釋奠)을 행한 것으로 핑계를 삼으니, 주자의 일에 대해서는 감히 말을 할 수 없거니와 공자는 성균관과 각 군현(郡縣)에서 향사하는 것으로 충분한데, 한 고을 안에서 이곳저곳에 겹쳐서 향사하는 것은 참람하고 모독되는 일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물며 왕의 작위(爵位)로 높이어 팔일무(八佾舞)로 향사하는데, 어찌 사람마다 행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퇴계의 말에 “창주서원의 석전은 선생이 만년에 도통(道統)을 자임(自任)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예를 베풀어 의심치 않았으나, 만약 다른 사람으로서 함부로 이것을 본받으려 한다면 그것은 크게 어리석은 짓이 아니면 망령된 일이다.”고 하였다. 나의 생각에도 성탕(成湯)과 무왕(武王)은 걸(桀)과 주(紂)를 주벌(誅伐)하였고, 이윤(伊尹)은 그 임금을 내쳤으며, 순(舜)은 부모에게 고하지 않고 장가들었지만 이런 일은 오직 이들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고, 주자의 석전도 그 뜻이 이와 같다고 여겨진다.

서원(書院) :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강론하고 옛날 성현(聖賢)의 향사를 받드는 곳.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이르는데, 조선 중종(中宗) 36년에 풍기군수(豐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고려 명현 안향(安珦)을 주벽으로 모셨으며, 명종(明宗) 5년에 소수(紹修)라는 사액(賜額)이 있었다.
역동서원(易東書院) : 고려 명현 우탁(禹倬)을 주벽으로 모셨다.
문묘(文廟) :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니, 사성(四聖) 십철(十哲) 및 중국의 역대 명현과 우리나라 신라 이래의 명현 18위를 배향하였다.
창주서원(滄州書院) : 주자(朱子)가 창건한 서원인데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ㆍ명도(明道) 정호(程顥)ㆍ이천(伊川) 정이(程頤)ㆍ강절(康節) 소옹(邵雍)ㆍ횡거(橫渠) 장재(張載)ㆍ연평(延平) 이동(李侗)의 6위(位)를 배향하였다.
팔일무(八佾舞) : 옛날 천자의 무악(舞樂)의 이름이니, 종묘와 문묘의 큰 제사에 악생(樂生) 64명이 8열로 벌여서서 추는 문무(文舞) 및 무무(武舞)이다.

 

 

 

중국의 서원은 처음에 네 곳이 있었다. 응천부 서원(應天府書院)은 부민(府民) 조성(曹誠)이 세웠는데, 송 진종(宋眞宗)이 서원의 이름을 하사하였고,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은 남당(南唐) 승원(昇元 937~943) 연간에 세웠으며 태평(太平) 2년에는 강주 지사(江州知事) 주술(周述)이 구경(九經)을 하사하기를 청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또 악록 서원(嶽麓書院)은 송 태조(宋太祖) 개보(開寶) 연간에 중담수(中潭守) 주형(朱泂)이 세워 이름을 하사한 것이고, 석고 서원(石鼓書院)은 당(唐) 나라 원화(元和 헌종(憲宗)의 연호. 806~820)연간에 형주(衡州) 사람 이관(李寬)이 세웠는데, 《사문유취》에 나와 있다.
그 후에 모두 퇴락되었는데, 악록 서원은 송 나라 건도(乾道 효종(孝宗)의 연호. 1165~1173) 연간에 유공(劉珙)이 중수했는데 장남헌(張南軒)의 기(記)가 있고, 석고 서원은 송 나라 순희(淳熙 효종의 연호)연간에 송약수(宋若水)가 확장했는데 회옹(晦翁 주자의 별호)의 기가 있으며, 백록동 서원은 회옹이 중수했는데 여동래(呂東萊)의 기가 있으니, 상고하면 소상히 알 수 있다.
다만 응천 서원의 전말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며, 아호 서원(鵝湖書院)이 또 하나 첨부되어 모두 다섯이었는데, 이곳은 주자와 여동래 두 선생이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 및 그의 형 육구령(陸九齡)과 함께 도를 강론한 곳이다.
이 서원은 송 나라 때에 이미 세워졌고 명 나라 때 이몽양(李夢陽)이 중건했으나, 그 후에 다시 퇴락되었는데, 명 나라 만력(萬曆 신종(神宗)의 연호. 1573~1620) 연간에 남창 태수(南昌太守) 유왈녕(劉曰寧)이 새로 중창(重創)하였고, 태복경(太僕卿) 비요년(費堯年)이 그 아들에게 명하여 보조하게 하였다.
장남헌의 악록기(嶽麓記)에, “유후(劉侯)가 이를 중수한 의도가 어찌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담화나 나누고 이록(利祿)을 위해 과거를 도모하며, 또한 언어와 문사(文辭)의 재주나 익히려고 했던 것이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로 본다면 그 때에 이미 습속의 큰 폐단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뿐이 아니라, 각기 색목을 정하여 나가고 물러가는 데도 서로 구별을 하며, 당파를 모으고 다른 당을 공격하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또 하등에 속하는 자들은 서원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부역을 회피하는 곳으로 삼아 학문을 강론하는 것은 도외시하고 있으니,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도 없다.
맨처음에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고려의 유학자 문성공(文成公) 안 향(安珦)과 안축(安軸)ㆍ안보(安輔)를 향사(享祀)했는데, 신재가 죽은 후에 또 신재를 함께 향사하였다.
신재가 또 해주에 문헌 서원(文憲書院)을 세워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을 향사하였고, 그 후에 퇴계가 풍기(豊基)에 역동 서원(易東書院)을 세워 좨주(祭酒) 우탁(禹倬)을 향사하자, 이로부터 조금만 명성이 있는 자는 반드시 서원을 세웠으며, 벼슬이 높고 자손이 번성한 자는 그 유람한 곳과 부임했던 고을마다 향사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근세에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에 그 폐단을 간곡히 말하고, 도내의 여러 서원을 열록하여 경중을 가려 훼철할 것을 청했으나, 조정에서 시행하지 않았다.
수십 년 전에 조정에서 명을 내려 한 사람을 위하여 서원을 거듭 세우는 것을 금지했으나 권문 세가의 집은 금지하지 못했으며, 또 금령이 내린 후에도 함부로 세운 자는 훼철할 것을 명했으나 또한 훼철을 모면한 자가 많았으니, 법령의 문란함이 이와 같다.
이미 고을에 향교가 있는 이상 서원은 또 필요하지 않은 것이며, 만약 향사를 폐할 수 없는 향선생(鄕先生)이 있다면 반드시 조정의 명을 기다려서 향교의 옆에 사당을 세우고 한두 사람을 향사하는 것이 옳을 것이고, 향교와 거리가 먼 곳에는 응천 서원의 규례와 같이 서재를 세우도록 하고 사람은 향사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금령 밖에 있는 것이다.

서원(書院) : 《類選》 卷4下 人事篇6 治道門3.
남당(南唐) : 오대(五代) 열 나라 가운데 한 나라. 이변(李昪)이 금릉(金陵)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당이라 했는데, 《사기》에는 남당이라 칭함. 무릇 세 임금을 거쳐 건국한 지 39년 만에 송 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구경(九經) : 《주례》ㆍ《예기》ㆍ《의례》ㆍ《좌전》ㆍ《공양전》ㆍ《곡양전》ㆍ《시경》ㆍ《서경》ㆍ《주역》인데, 일설에는 《시경》.ㆍ《서경》ㆍ《주역》ㆍ《예기》ㆍ《춘추》ㆍ《효경》ㆍ《논어》ㆍ《맹자》ㆍ《주례》 라고도 한다.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다산시문집 제5권 > 시(詩) >

 

다시 백련사에서 놀다[再游白蓮寺]

 

지팡이 끝에 딸그락딱딱 소리 내는 돌무더기 / 筇枝鏗戛石叢叢
오솔길 가로질러 소매 가득 부는 바람 / 徑路斜吹滿袖風
꾸부정한 물가 샘은 홈대 속을 흘러내리고 / 曲碕泉出連筒內
어지러운 대밭 속으로 소원의 문이 났네 / 小院門開亂竹中
수저에 감긴 물파래 푸르러서 그냥 좋고 / 水髮繞匙憐滑緣
장막에 비친 동백꽃 아직 몇 송이 남았어라 / 山茶照帳惜殘紅
너희들은 벗이 있어 참으로 부럽구나 / 汝曹有友眞堪羨
역동을 묻는 사람 지금은 세상에 없단다 / 今世無人問易東

역동(易東) : 주역(周易)이 동으로 감. 한(漢)의 정관(丁寬)이 전하(田何)에게서 역(易)을 배웠는데, 그가 학문이 성취된 후 전하를 하직하고 동으로 돌아가자 전하가 말하기를, “역이 이제 동으로 가버렸다." 하였음. 《漢書 丁寬傳》

 고봉집(高峯集) > 논사록 하권 >윤6월 7일

 

상이 문정전(文政殿)에서 소대(召對)하고, 《논어》〈양화(陽貨)〉 편의 “공자가 무성에 가서〔子之武城〕”부터 “그가 반드시 고칠 수 없음을 알았다.〔知其必不能改也〕”까지 강하였다. 선생이 글을 대하여 아뢰기를,

“예악(禮樂)을 잠시라도 몸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악이 차례를 잃으면 만사가 전도됩니다. 고례(古禮)와 고악(古樂)을 지금 다시 볼 수는 없으나, 그 마음을 배우고 그 소리를 찾아볼 수는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10실(室)밖에 안 되는 작은 고을도 예악을 가르치면 사람들이 서로 읍(揖)하고 양보하게 됩니다. 근래 20년 전만 해도 한 도(道)의 책임을 맡은 자가 혹 알성(謁聖)하는 예를 행하였는데, 을묘왜변(乙卯倭變)이 난 뒤로는 군기(軍器)의 적간(摘奸)에만 전념하여 다시는 유학을 흥기시키고 권장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마음을 다한다고 하는 자들도 겨우 서원이나 보수하고 유생들의 음식을 공급하는 데 불과할 뿐 선한 데로 나아가게끔 교도한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훌륭한 치도를 이룩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교화가 있은 뒤에야 사람들이 보고 감동하는 아름다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는 하나 가르치지 않으면 성취시킬 수가 없습니다. 전조(前朝) 공민왕 때에 이색(李穡)이 선비들을 모아 가르쳤기 때문에 충신과 의사들이 많이 나왔는데, 근래에는 흥기하는 선비를 보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에 유념하시어 인재가 없다고 하지 마시고 오래도록 성심껏 시행하신다면 교화가 점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조의 이색은 선한 사람인가?”

하니, 선생이 나아가 대답하기를,

“이색에 대한 인물 평가는 매우 많으나 대체로 범상하지는 않습니다. 이색은 젊었을 때 중원에 들어가서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원나라에서 벼슬하였는데, 박학하고 재질이 뛰어난 인물로서 그의 학문은 문장(文章)을 위주로 하였으나 예문(禮文)과 유자(儒者)의 학문에도 견해가 훌륭하여 교회(敎誨)하는 일에 무척이나 공력을 들였습니다. 정몽주(鄭夢周)가 전적으로 이색에게서 배운 것은 아니지만 또한 그로부터 장려ㆍ권면되어 흥기함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고려가 망할 무렵 유배되어 외지에 있었는데, 태조가 즉위한 다음 즉시 명하여 석방하고는 불러 보고 예우하며 또 그로 하여금 벼슬하도록 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그대로 죽었습니다. 단 고려 시대에는 불교를 숭상했고 이 사람의 문장이 무척 뛰어났기 때문에 사찰(寺刹)의 기문(記文)과 불경(佛經)의 서문(序文) 같은 것이 모두 이 사람의 손에서 나왔으므로 연소한 유자(儒者)들이 그가 불교를 숭상했다 하여 헐뜯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비록 학문한 사람은 아니나 기절이 매우 높으니, 실로 우리나라 학문의 원류(源流)라 할 것입니다.”

하고, 윤근수(尹根壽)와 정탁(鄭琢) 등도 이색이 대절(大節)을 훼손하지 않았던 의리를 개진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아뢴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우리 조정을 섬기지 않은 그 의사(意思)는 무척 고결합니다. 그런데 입조(立朝)했을 때에 천 길 암벽이 우뚝 서 있는 것 같은 기상이 없고 시속(時俗)에 부침(浮沈)한 병통이 없지 않아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이 때문에 그를 과소평가했지만, 과연 그 논평이 공적(公的)인 측면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따져 본다면 그의 장단점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윤근수가 아뢰기를,

“어제 경연 석상에서 전교하신 말씀을 삼가 듣건대 지극히 황공합니다.-어제 윤근수가 경연 석상에서 우리나라의 인심(人心)이 본시 중국만 못하다고 논했는데, 어제 그런 의논은 바르지 못하여 폐단이 있다고 하는 상의 하교가 있었으므로 윤근수가 이처럼 아뢴 것이다.- 소신의 의중으로는 20여 년 동안 사람들이 윤원형(尹元衡)의 포악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마디도 말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마음속으로만 분개하고 개탄했다고 여겼기 때문에 아뢰었던 것인데, 그 말을 생각해 보니 과연 폐단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내가 말했던 것은 저번에 아뢴 것이 뒷날 폐단이 없지 않겠기에 그 실수를 바로잡아 주려고 한 것이지 비난하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일시적으로 편벽되게 아뢰었던 것에 대해 상께서 이처럼 유념하시고 기억해 주시니, 모든 일에 생각을 더하신다면 성상의 학문이 갈수록 고명해질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학문은 기자(箕子) 때의 일은 서적이 없어 상고하기 어렵고, 삼국 시대에는 천품은 비록 순수하고 아름다웠지만 학문의 공이 없었으며, 고려 때에는 학문을 하긴 했지만 단지 사장학(詞章學)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 우탁(禹倬)과 정몽주(鄭夢周) 이후로 비로소 성리학(性理學)을 알게 되었고, 급기야 우리 세종조에 이르러 예악과 문물이 찬란하게 일신(一新)되었습니다.
동방의 학문이 전해진 순서로 말한다면, 정몽주가 동방 이학(理學)의 비조(鼻祖)로, 길재(吉再)는 정몽주에게 배웠고, 김숙자(金叔滋)는 길재에게 배웠으며, 김종직(金宗直)은 김숙자에게 배웠고, 김굉필(金宏弼)은 김종직에게 배웠으며, 조광조(趙光祖)는 김굉필에게 배웠으니 본래 원류(源流)가 있습니다. 그 이후로 유사(儒士)들이 성현의 학문을 하고자 하게 되었으니, 상께서 교화를 주장하실 수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복고(復古)할 수 있는 기회라 하겠습니다. 학문에 힘쓰는 사람들이 비록 많지 않은 듯하나 지금 의논을 들어 보면 학문을 아는 장자(長者)들이 기묘년에 비해 많다고들 합니다.”

하고, 윤근수가 아뢰기를,

“기묘년 이후로 사람들이 선(善)을 향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대개 조광조가 쏟은 공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고, 선생이 아뢰기를,

“근래 여항(閭巷)의 하천배(下賤輩)까지도 상례(喪禮)를 닦아 거행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더러 청상과부가 개가(改嫁)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모두 기묘년의 사림들이 진작시킨 효과입니다. 다만 조광조는 나이가 38세에 그쳤고 당시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술을 하여 후세에 전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학문의 깊이는 알 수 없지만 그가 한 일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두 흠앙(欽仰)하고 있습니다.”

하고, 윤근수가 아뢰기를,

“소신이 전해 들으니, 하루는 명종께서 전교하시기를 ‘여항에서 마땅히 《소학》을 읽어야 한다.’ 하시자, 윤개(尹漑)가 정승으로 있다가 이 전교를 듣고 찬양하였다 합니다. 그러자 윤원형(尹元衡)이 ‘사람은 마땅히 마음속으로 선을 하여야 한다. 기묘년에 《소학》을 숭상하였으나 신사년에 난리가 났고 을사년에 또 난역(亂逆)이 생겼으니 《소학》은 난역의 글이다.’ 하였는데, 윤개가 이 말을 듣고 벌벌 떨었다 하니 윤원형의 심술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윤원형이 국가에 죄를 지은 것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데, 이제 이 말은 내가 정말 모르고 있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선현들을 모두 비방하였는바 그는 참으로 만세(萬世)에 죄를 지은 자이다.”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한탁주(韓侂冑)는 주자(朱子)를 위학(僞學)이라고 비난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윤원형이 당시에 저지른 일을 보면 이 정도는 실로 심상한 일로서 괴이하게 여길 것도 못 됩니다. 윤원형의 악행에 대해서는 어제 대략 아뢰었습니다. 윤원로(尹元老)와 윤원형은 바로 형제간인데 모두 간사하고 악독하였습니다. 명종이 즉위 하신 초년에 곧바로 윤원로를 축출하였기 때문에 윤원로가 공신에 끼지 못해 윤원형을 원망하였습니다. 이에 윤원형은 윤춘년(尹春年)을 사주하여 소장을 올리게 하여 그를 쫓아내고는 죽였습니다. 윤원로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그를 죽인 자는 윤원형이었습니다. 지친(至親)인 형제간에도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겁내는 것이 어찌 다함이 있었겠습니까. 자고로 윤원형보다 더한 소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날 유생이 상소하여 ‘바야흐로 위세가 천지를 진동하던 때였다.’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았기 때문에 감히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전교가 지극하십니다.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은 뒷일의 귀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윤원형 같은 소인은 진실로 드물지만 아무리 소소한 소인이라도 틈을 타 들어온다면 또한 성치(聖治)에 누가 될 것입니다. 사욕을 극복하고 선을 따라 어진 선비들을 가까이하소서. 그러면 세상이 좋아질 것입니다.”

하고, 윤근수가 아뢰기를,

“을사년에 죄를 받은 사람 중에 권벌(權橃)과 이언적(李彦迪)은 이미 표창과 증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또 송인수(宋麟壽)란 사람이 있는데, 그는 바로 선인군자(善人君子)였습니다. 종사한 학문의 깊이는 알 수 없지만 일가의 효행이 탁월하였는데,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조정에서 벼슬하다가 원흉들에게 거슬려 죄를 받고 죽었습니다. 이 사람의 훌륭함은 권벌이나 이언적과 같은 수준에서 논해야 합니다.”

하고, 선생이 아뢰기를,

“처음에는 그를 부박(浮薄)한 무리의 영수라 하여 파직하였고, 뒤에는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으로 인하여 사약을 내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상께서 이미 신원(伸冤)해 주셨습니다만 이 사람의 훌륭함에 대해 상께서 잘 아시지 못하여 사림에서 원통하게 여기는 것이 매우 우려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회맹문(會盟文)에는 모반했다고 적기까지 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송인수는 일생 동안 기묘년의 여러 현인들을 흠모하였습니다. 계묘년(1543, 중종38)과 갑진년(1544)에는 전라 감사가 되어서 《소학》을 읽을 것을 권면하고 후생들을 이끌어 주었으니, 그 당시 《소학》을 읽게 된 것은 모두 송인수의 공로입니다.
오늘 낮에 천둥이 쳤는데 이것이 아무리 현재의 절기에 있을 수 있는 현상이라 하더라도 성상의 분부에 미안하게 여기셨으니, 지극하다고 할 만합니다. 여름철이 비록 천둥이 치고 비가 오는 때라고는 하나, 장마가 너무 지나쳐서 호남과 영남에 수재가 극히 참혹합니다. 봄에는 한해(旱害)가 있었고 여름에는 수해가 있어서 벼와 곡식이 상했으니,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해 살겠습니까. 이것은 천지의 나쁜 기운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니, 상께서 각별히 살피고 유념하셔야 합니다. 군주의 한 생각이 천지의 조화를 도와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용》에 이르기를 ‘중화(中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찾고 만물이 잘 길러진다.’ 하였습니다.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정밀하게 하고 단속하여 내 마음이 바루어져 천지의 마음도 바루어지고 내 기운이 순해져 천지의 기운도 순하게 되면, 비 오고 볕 나는 것이 때에 맞아서 천지가 제자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삼대(三代)의 융성하던 시기에는 새와 짐승, 어류에 이르기까지 모두 잘 자랐으니, 천지의 기운이 화(和)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효과를 이룬 것입니다. 당 태종 때에 수재와 한해가 있었어도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았는데, 이는 군주가 걱정하고 부지런히 힘써서 백성들을 위무(慰撫)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내는 풍년이 들어 쌀 한 말에 3전(錢) 하는 효과를 거두었으니, 그가 인의(仁義)를 진심으로 행하지 않고 겉으로만 행하였다고는 하나 이 또한 위징(魏徵)이 선정을 행하도록 권면한 소치입니다.
즉위하시고 나서 봄ㆍ여름의 교체기에는 비와 바람이 순조로워서 대풍(大豊)의 경사를 기대하게 하더니, 가을에 들어서면서 풍재(風災)가 끊이지 않아 밭농사는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논농사는 그래도 조금 수확할 수 있어 아사(餓死)할 우려는 간신히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봄부터 강우량이 제대로 맞지 않더니 여름이 되면서 더욱 심해져 민생에 대한 일이 지극히 어렵고 괴롭게 되었으니, 각별히 살피고 유념하시어 미진한 일이 있거든 수성(修省)하는 데 극진히 힘써서 천심을 되돌리셔야 할 것입니다. 하늘이 만민을 내었으나 스스로 다스릴 수 없기에 임금을 세워 만민의 주인이 되게 하였고, 임금은 또 혼자서 다스릴 수 없기에 수령과 근심을 나눠 가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수령이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여 백성에게 원망이 있게 되면 임금이 반드시 벌을 주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성실하지 못하여 유리(流離)하여 살 곳이 없게 만든다면 천심이 어찌 진노하지 않겠습니까. 억조창생 위에 군림하고 있는 군주로서는 다른 것은 두려워할 게 없으나 황천(皇天)이 위에서 환히 살펴보고 계시니, 한 생각이라도 잘못될 때마다 상제가 진노할 것을 두려워하신다면 천심이 기뻐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지당하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소신이 우연히 생각난 것을 계달했는데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시니 감격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성상께서 한가로울 때에도 조금도 중단하지 않으신다면 덕이 성인과 동등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우탁(禹倬) : 1263~1342. 고려 말 정주학(程朱學) 수용 초기의 유학자로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보(卓甫), 호는 백운(白雲) 또는 단암(丹巖),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성균 좨주(成均祭酒)로 치사(致仕)한 뒤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경사(經史)에 통달하였고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세상에서 ‘역동 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길재(吉再) : 1353~1419.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후학의 교육에 힘써 그의 문하에서 김숙자(金叔滋)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로 그 학통이 이어졌다.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인동(仁同)의 오산서원(吳山書院)에 향사되었고, 이색ㆍ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다. 저서에 《야은집》이 있고, 언행록인 《야은 언행 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전한다.
김숙자(金叔滋) : 1389~1456.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16세기에 사림에 의하여 확립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아들 종직(宗直)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다. 선산의 낙봉서원(洛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윤개(尹漑) : 1494~1566.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옥(汝沃), 호는 회재(晦齋) 또는 서파(西坡)이다.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명나라와의 외교 활동에 이바지하였다. 윤원형(尹元衡)에게 가담하여 추성위사홍제보익 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으나, 선조 초에 녹훈이 삭탈되었다.
신사년에……생겼으니 : 신사년의 난리는 1521년(중종16)에 일어난 신사무옥(辛巳誣獄)을 가리킨다. 기묘사화 이후 심정(沈貞), 남곤(南袞) 등이 세력을 떨치자 안당(安瑭)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이 이정숙(李正叔) 등과 함께 남곤과 심정이 사림을 해치고 국정을 망친다 하여 제거할 것을 모의하였다. 이때 함께 있던 송사련(宋祀連)이 안처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작성한 조객록(弔客錄)을 가지고 고변(告變)하여 대신을 모해하려 한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안씨 일족과 이약빙(李若氷) 등 수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을사년의 난역은 을사사화를 가리킨다.
한탁주(韓侂冑) : ?~1207. 하남성(河南省) 안양(安陽) 사람으로 한기(韓琦)의 증손이다. 영종(寧宗) 옹립에 공을 세우고 외척으로서 정계에 등장하였다. 우승상 조여우(趙如愚)와 대립하여 그를 지방으로 유배 보내고, 조여우가 추천한 주자와 그 학파를 위학(僞學)으로 몰아 추방함으로써 ‘경원(慶元)의 당금(黨禁)’을 일으켰다. 이후 14년간 정권을 자의로 전단하였으며, 권세 확장을 위하여 금(金)나라 정벌군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문책을 받고 사미원(史彌遠)에게 살해당하였다. 그 수급(首級)은 금나라로 보내졌다.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 : 1547년(명종2)에 정언각(鄭彦慤)이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양재역에서 “여주(女主 : 문정왕후)가 집권하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권력을 남용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한심하지 않은가.”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고 이기, 윤인경(尹仁鏡), 정순붕(鄭順朋) 등에게 알리자, 반대파들의 소행으로 몰아 사림을 대거 숙청하고 권력을 독점한 사건이다.

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二

易東書院記 

 

書院之制。近作於東方。而嶺南州郡之建置者。比諸道諸邑。爲最先而居多焉。凡有前賢留蹤播芬之地。莫不競慕而爭效之。蓋崇德表賢。樂育人材。固人心之所同願。而王政之所宜嘉尙者也。吾禮爲縣。雖壤地褊小。山川秀異。人物蔚030_454b 然。文獻之稱。粤自古昔。縣校之外。依山林卽閒曠。創置儒館。以講道肄業。安可無也。矧夫麗朝禹祭酒先生晩年退居。實在玆土。而至今子孫猶存焉。若稽史傳所載。先生之忠義大節。旣足以動天地撼山岳。而經學之明。進退之正。有大過人者。則爲後學師範。可以廟食百世者。非先生而誰哉。故一鄕雅論。久有意於祠院之作。輒以事力之不逮而難之。嘉靖癸亥間。苞山郭侯趪。來莅玆邑。能以淸儉明恕爲治。不數年而邑境大安。公私裕足。於是。生員金君富弼,趙君穆,030_454c 琴君應夾,琴君蘭秀謀於衆曰。吾鄕祠院。不作則已。作則今其時哉。不可失也。乃同辭以白侯。侯樂與之籌畫措置。凡需費工力。或專或助。期可以事成矣。諸君退。又與鄕之父老羣彦。恊心商度。各出財力有差。得地於縣東北距先生舊居十有餘里。其水爲鼇潭。實洛江上流。發源於太白。經淸涼而南注。至此而成潭。山之自東屛來者。蜿蟺西迤。臨潭而止。爰有丘陵。依山俯水。奧衍宏敞。自成形勢。若遠若近。峯巒川澤。控揖環帶。考卜定基之所。無以易此也。經始於丁卯030_454d 二月。是年秋。祠及堂齋。以次而成。僉意屬滉以命之名。滉敢僭率而請之。其祠曰尙賢。正堂曰明敎。左右翼室曰精一也。直方也。東西兩齋曰四勿也。三省也。門之大者曰入道。而總之以書院之號。侯於是。撥寺社田之當還官者及置他田畝若干結。良賤若干名以屬之。又多出布穀以付之。然後乃去。其有未訖之功。又得今縣宰東萊鄭侯惟一,監司密陽朴公啓賢。方致意拳拳。鄕난001自願納田者。自金君以下又七人焉。嗟夫。以吾鄕之事力。書院之功費。苟非郭侯030_455a 之善政。鄕人之美風。繼之以賢侯賢使。烏能辦此擧。而無躓於前後哉。抑賢祠之所以立。學館之所以闢。其本意與實事。誠不偶然。不知吾輩一鄕之人士。以及遠近之來遊者。當何修何務。而可以無忝於斯乎哉。竊嘗惟念。祭酒先生。生當麗氏之末。胡元制命。六合霧塞。天下之無道極矣。上距程朱之世。且一二百年之久而後。其書始至于東。譬如積陰之下。陽德闖發而將亨。其能闡揚昭揭。使其道大行於世。責在吾儒之徒。而其見於史者。僅有白頤正等數人。其所爲030_455b 止於云云。滅裂可知矣。而於先生則史稱之曰。某通經史。尤深於易學。程傳初來。無能知者。某閉門參究而得其旨。敎授生徒。義理之學始行。則先生之學。其有以脫去世習之陋。而有發於龍門之餘韻者矣。旣云通經史義理之學行。則因程易而達諸經。業廣而功懋。又可見矣。夫易者。斯文之宗祖。而程氏之傳。發先儒之所未發。先生乃能有得於其書之始東。而講授乎此地。其可使泯沒無傳。而不爲之紹述也耶。此易東之名所以表院。而吾儕後學之所當勉焉者也。030_455c 雖然。學亦多端。而歸則一致。故明乎五敎。唐虞三代之所同然也。而精一執中。舜禹傳心之法也。敬義直方。周孔體易之學也。四勿三省。又顔氏曾氏所以爲仁之功。入道之實也。道之大原。出於天而具於人心者。知非豐而愚非嗇。聖賢之言。諭諸人而布在方策者。昔始至而今悉備。人病不求耳。求則無不知之理。人病不踐耳。踐則皆可行之道。由切琢而致磋磨。入門墻而覩堂奧。習悅而朋樂。雨化而莪長。濟濟乎其遊息。亹亹乎其成立。居則懷仁而抱義。出則尊主而030_455d 庇民焉。所謂本意與實事者。於是乎可得而言矣。其或不幸而不出乎此。所處者猥。凡所慕者鄙末。甘退産而讓別人。好巡山而摘醋梨。惟記誦是力。纂組是工。汲汲焉遑遑焉。惟科擧利祿之爲謀。由是而得其志。則決性命之正。以饕富貴。由是而失其圖。則㧻禮義之防。以疾貧賤。以言乎其人。則進退皆跲。以言乎斯院。則本實俱喪。斯不亦可羞之極。可畏之甚乎。孔子謂子夏曰。汝爲君子儒。無爲小人儒。君子儒爲己。前之所稱是也。小人儒爲人。後之所云是也。以子夏030_456a 之賢。聖人猶發此戒。餘人當何如哉。故孟子曰。術不可不愼也。凡我入院之士。欲爲君子儒乎。欲爲小人儒乎。於是而能知其所擇。則其庶乎可免矣。名旣定。諸君又責滉以記文。滉雖老且病。爲鄕人而獲覩盛事。不欲其苟辭。略난002挭槩如此。其他則趙君之錄詳之矣。隆慶二年戊辰孟夏旣望。眞城李滉。記。

030_456b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二

 

[난-001]士 : 一本。士下有之字。
[난-002]道 : 一本。道下有其字。
 


 

退溪先生文集卷之五續內集

 

易東書院。示諸君。三首

 

儒館經營洛水邊。幸同今日會群賢。初來易道乾坤闢。

漸賁文猷日月懸。好待後人能契發。恭聞此學在精專。

莫將外慕相撓奪。無價明珠得自淵。
麗季程朱敎始東。只今諸說滿區中。當年首發公徵史。

繼世眞傳孰任躬。主敬龍門千聖法。明倫鹿洞一原功。

吾儕講習非他緖。切戒尋常事捉風。
一粟吾生海外身。可憐賢聖未同辰。若非雲谷千言鑑。

何異蘧廬一宿人。入眼山光靑似染。滿庭草色翠如勻。

與君共此閒中樂。珍重相看日日新。

  형태서지
권수제  만오선생문집(晩悟先生文集)
판심제  만오선생문집(晩悟先生文集)
간종  활자본(木活字)
간행년  1927년 간행
권책  10권 5책
행자  10행 18자
규격  19.7×17.5(cm)
어미  上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古819.5-Si61m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속 18
 저자
성명  신달도(申達道)
생년  1576년(선조 9)
몰년  1631년(인조 9)
 형보(亨甫)
 만오(晩悟)
본관  아주(鵝洲)
특기사항  조목(趙穆), 장현광(張顯光)의 문인
 가계도
 申元祿
 
 申伈
 監察
 蔣崙의 女
 
 申仡
 
 順天朴氏
 朴倫의 女
 申適道
 察訪
 尹淳의 女
 
 申達道
 
 全州李氏
 德信正 李鸞壽의 女
 申在
 監察
 沈의 女
 
 申圭
 佐郞
 李碩望의 女
 
 權晌의 女
 
 申堥
 
 李廷相의 女
 
 女
 
 尹以觀
 
 女
 
 朴忠基
 
 女
 
 丁瑜
 
 申悅道
 掌令, 懶齋
 金浤의 女
 
 女
 
 金有燁
 
 女
 
 任乃重
 主簿
 女
 
 朴宗敬
 僉知

기사전거 : 行狀(申悅道 撰), 申元祿墓誌(崔晛 撰, 訒齋集 卷12), 申仡行狀(申達道 撰), 鵝洲申氏直長公派世譜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선조 9 1576 병자 萬曆 4 1 8월 20일, 義城縣 陶巖里에서 태어나다.
선조 13 1580 경진 萬曆 8 5 족형 鼎峰 申弘道에게 「十九史」를 배우다.
선조 24 1591 신묘 萬曆 19 16 長川書院에서 독서하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17 4월, 倭亂이 발발하자 부친을 모시고 黃鶴山으로 피란하다. ○ 6월, 왜적이 沙村에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淸凉山으로 향하다. ○ 9월, 황학산 城洞으로 돌아오다.
선조 29 1596 병신 萬曆 24 21 7월, 陶山書院에서 月川 趙穆을 뵙다. ○ 苟全 金中淸과 易東書院에서 禮書를 공부하다.
선조 30 1597 정유 萬曆 25 22 7월, 부친을 모시고 성동에 다시 들어가다. ○ 靑松 涑谷에 가서 旅軒 張顯光을 뵙다.
선조 32 1599 기해 萬曆 27 24 2월, 全州李氏 李鸞壽의 딸과 혼인하다.
선조 34 1601 신축 萬曆 29 26 봄, 仙巖에 書塾을 짓고 ‘無忝’이라 편액하다.
선조 36 1603 계묘 萬曆 31 28 7월, 義城 縣令으로 온 장현광이 방문하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29 3월, 西厓 柳成龍을 뵙다. ○ 9월, 月波亭에 올라 朴敦復, 崔喆 등과 重陽會를 가지다. ○ 高敬履가 五賢에서 晦齋 李彦迪을 빼버리고 成渾을 넣자 변무하는 상소를 가지고 상경하다.
선조 38 1605 을사 萬曆 33 30 8월, 향시에 합격하다.
선조 39 1606 병오 萬曆 34 31 2월, 梧里 李元翼을 뵙다. ○ 11월, 조목을 곡하다.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32 2월, 別試 初試에 장원하다. ○ 3월, 安東 府使 寒岡 鄭逑를 뵙다. ○ 10월, 부친의 명으로 不知巖으로 장현광을 스승의 예로 찾아뵙다.
광해군 1 1609 기유 萬曆 37 34 4월, 장남 申在가 태어나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35 윤3월, 생원 회시에 합격하다. ○ 5월, 유성룡의 手簡書後를 짓다.
광해군 3 1611 신해 萬曆 39 36 1월, 차남 申圭가 태어나다. ○ 7월, 鄭仁弘을 성토하기 위해 상경하는 부친을 모시다.
광해군 4 1612 임자 萬曆 40 37 5월, 蘆谷에서 정구를 뵙다.
광해군 5 1613 계축 萬曆 41 38 4월, 訒齋 崔晛을 뵙다. ○ 9월, 鏡城 判官으로 부임하는 石潭 李潤雨를 전송하다.
광해군 6 1614 갑인 萬曆 42 39 1월, 「鶴峯集」을 교정하다. ○ 4월, 모친상을 당하다. ○ 6월, 부친상을 당하다.
광해군 9 1617 정사 萬曆 45 42 金城山 아래 蔚馬里로 거처를 옮기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43 3월, 黃鶴山에 薇山精舍가 완성되다.
광해군 11 1619 기미 萬曆 47 44 5월, 장현광을 뵙고 ‘理氣分合’을 논하다.
광해군 12 1620 경신 泰昌 1 45 1월, 정구를 곡하다. ○ 3월, 金誠一의 「言行錄」을 勘定하다.
광해군 13 1621 신유 天啓 1 46 陶山書院 尙德祠을 배알하고 月川書堂을 거쳐 梅園 金光繼, 溪巖 金坽을 만나고 돌아오다.
인조 1 1623 계해 天啓 3 48 1월, 〈自警箴〉을 짓다. ○ 6월, 明政殿 庭試에 장원하다. ○ 성균관 전적이 되다. ○ 10월, 成歡道 察訪이 되다.
인조 2 1624 갑자 天啓 4 49 李适의 난으로 仁祖가 公州로 幸行하자 경계에서 맞이하다. ○ 5월, 상소하여 驛의 폐단 6가지를 아뢰다. ○ 10월, 全州府 判官이 되다.
인조 3 1625 을축 天啓 5 50 5월, 관직을 버리고 서울집으로 돌아와 「冠禮儀節」을 찬정하다.
인조 4 1626 병인 天啓 6 51 4월, 倉谷에서 장현광을 뵙다. ○ 윤6월, 형조 정랑이 되다. ○ 9월, 예조 정랑이 되다. ○ 11월, 사간원 정언이 되다. 상소하여 時弊 10조와 修省의 도리를 아뢰다.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52 2월, 강원도 순찰사로 부임하는 동생 申悅道를 전송하다. ○ 5월, 지평이 되다. ○ 7월, 식솔들을 거느리고 남으로 내려오다. 禾谷에 晩悟齋를 짓다.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53 1월, 예조 정랑이 되다. ○ 2월, 德陵과 安陵의 奉審使에 차임되다. 봉심을 마치고 會寧에 유배 중인 崔晛을 찾아뵙다. ○ 3월, 咸興 樂民樓, 安邊 駕鶴樓를 유람하다. ○ 복명하여 關北의 실상을 아뢰다. 세자시강원 문학이 되다. ○ 7월, 지평이 되다. 冬至使 書狀官으로 북경에 가는 동생 申悅道를 弘濟院에서 전송하다. ○ 8월, 시강원 필선이 되다. ○ 12월, 사헌부 장령이 되다.
인조 7 1629 기사 崇禎 2 54 6월, 장령이 되다. ○ 8월, 李貴의 교만 방자함을 아뢰다. ○ 10월, 헌납이 되다. ○ 11월, 사직하고 남으로 내려와 蒼石 李埈을 만나다.
인조 8 1630 경오 崇禎 3 55 3월, 장령이 되다. ○ 桐溪 鄭蘊을 변론하고 피혐하다. ○ 5월, 장악원 정이 되다. ○ 9월, 都堂錄에 들다.
인조 9 1631 신미 崇禎 4 56 3월, 장령이 되다. ○ 5월, 군자감 정, 홍문관 수찬이 되다. ○ 阿峴으로 거처를 옮기다. ○ 6월 14일, 阿峴 寓舍에서 졸하다. ○ 7월, 義城 陶巖里에 빈소를 마련하다. ○ 12월, 梧桐山에 장사 지내다.
인조 24 1646 병술 順治 3 8월, 도승지로 추증되다.
1927 정묘 후손 申鴻基 등이 활자로 문집을 인행하다.

기사전거 : 年譜ㆍ行狀(申悅道 撰), 墓碣銘(李玄逸 撰)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유문은 사후 약 300여 년 동안 간행되지 못하고 초고 상태로 전해져 왔다. 동생 申悅道가 1653년에 행장, 1656년에 묘지를 짓고 연보를 편차해 두었고, 증손 申生濂이 李玄逸에게 묘갈명을 받은 일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후손들이 저자의 문집을 간행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후손 申鴻基와 申錫基 등이 가장초고를 바탕으로 수집 편차하여 1927년에 慶北 義城郡 召文面 道境洞에 있던 申錫基의 塾舍에서 활자로 문집을 인행하였다.《초간본》 이 본은 규장각(古819.5-Si61m),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939), 국사편찬위원회(D3B-113),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장서각(D3B-506),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93년에 14세손 申大源이 초간본을 대본으로 국역한 「晩悟文集」을 간행하였다.
본서의 저본은 후손 申鴻基가 1927년에 활자로 인행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본 영인 저본 중 권8의 제4판은 卷次가 ‘七’로, 권10의 제29판은 板次가 ‘三十九’로 오기되어 있으며, 권10의 제50판은 권차가 누락되어 있다.

기사전거 : 墓碣銘(李玄逸 撰)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10권 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과 발문은 없다. 권수에 총목이 있고 권마다 목록이 실려 있다.
권1은 시(118)이다. 경광을 읊은 시, 차운시, 회고시, 만시 등이 고루 섞여 있다. 〈城洞卽事〉는 임진왜란 때 피란했던 黃鶴山 성동에서의 일을 읊은 것이다. 〈敬次月川先生下示韻〉은 1596년 도산서원에 갔을 때 趙穆이 心學의 요체를 알려 주며 지어 준 시를 차운한 것으로 배움의 기쁨을 나타낸 것이다. 〈送李從事征西〉는 1618년 명나라에서 구원을 요청하자, 姜弘立의 막하로 출전하는 李民寏을 전송하는 시이다. 〈思歸〉는 全州 判官으로 재직할 때 지은 것으로 객지에서의 쓸쓸한 심정을 읊은 것이다. 〈江都記事十八首〉는 정묘호란때 인조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란 갔을 때 지은 것으로 전쟁의 상황과 전쟁에 대한 저자의 생각 등을 읊은 것이다. 만시는 柳成龍, 朴而章, 李民宬, 金奉祖 등에 대한 것이다.
권2~3은 疏(13), 箚(1)이다. 권2에는 〈陳時弊十條疏〉만 실려 있는데 1626년에 올린 것으로 어진 이를 등용할 것, 守令을 잘 택할 것, 인심을 수습할 것, 풍속을 후히 할 것, 諫諍의 길을 열어 놓을 것, 庶獄을 신중히 할 것, 貢賦를 균등하게 할 것 등 10조목에 대해 의견을 진술한 것이다. 권3은 지평ㆍ문학ㆍ필선ㆍ장령 등을 사직하는 상소와 여러 상황에 대한 소회를 아뢴 것 등이다. 〈寇退後陳所懷疏〉는 정묘호란이 끝나고 소회를 아뢴 두 건의 상소로, 서약을 맺은 것은 종묘사직의 수치이고 백성들의 씻기 힘든 울분이니 대소 신료들이 힘을 다하여 自彊策을 세워야 한다고 한 것이다. 〈請賑西路饑民疏〉는 1628년에 德陵과 安陵을 봉심하고 나서 西路의 굶주린 백성들이 關北으로 유입되는 상황을 아뢰고 구제해 주기를 청한 것이다. 〈伸救司諫尹煌箚〉는 화친은 일국의 굴욕이라고 하다가 삭탈관직되어 유배된 윤황을 변론한 것으로 三司에서 연명으로 올린 것이다.
권4~5는 啓(44), 公緘(1), 呈文(2)이다. 계는 주화론을 주장한 崔鳴吉을 律文대로 처분할 것, 윤황을 체차하라는 명을 거두어 줄 것, 적을 막지 못한 도원수 張晩을 遠竄할 것, 諸宮家의 魚鹽船稅 등을 혁파할 것, 羅萬甲을 원찬하라는 명을 거두어 줄 것, 張維를 羅州 牧使에 보임하라는 명을 거두어 줄 것, 豐呈宴에 妓樂을 보내지 말 것, 地主를 무고한 竹山의 軍民들을 처벌할 것 등을 아뢴 것이다. 권5의 〈椵島奉使時聞見啓〉는 1627년에 접반사 元鐸과 椵島에 들어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도로에서 보고 들은 것을 날짜별로 적어 아뢴 것이다. 공함은 사헌부의 추고에 대해 자신을 변론한 것이다. 정문은 毛文龍에게 보내는 것으로, 적에게 붙어 침학을 행하는 변방의 백성들을 살육할 때 선량한 백성을 보호해 줄 것을 청한 것이다.
권6은 書(35)이다. 조목, 장현광, 정경세, 이호민 등과의 편지이다. 1605년에 올린 〈上月川先生〉은 조목에게 누누이 가르침을 주고 장려해 주는 것을 고마워하며 道를 궁구하는 데 힘쓰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한 것이다. 1623년에 올린 〈上旅軒先生〉은 장현광의 理氣說이 李滉의 定論과 부합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한 것이다. 1629년에 올린 〈上鄭愚伏〉은 世道를 바로하려면 우선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 어진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1623년에 올린 〈上李五峯〉은 李好閔에게 기강을 바로 세우고, 光海朝 때의 죄인을 엄히 다스리고, 오랑캐를 막을 계책을 세울 것을 청한 것이다. 〈答崔訒齋〉는 최현에게 보낸 것으로 「학봉집」의 교정에 참여해 달라는 청을 승낙한 것이다. 〈與黃大進〉은 黃宗海에게 보낸 것으로, 竹林書院에 鄭逑와 金馹孫을 追享할 때는 세대보다 道學이 우선하므로 정구를 먼저 모시는 것이 마땅할 것 같지만 장현광에게 여쭈어 처리하라는 내용이다. 〈與洪副學〉은 洪瑞鳳에게 보낸 것으로 號牌法의 시행 시기를 잘 살펴서 하라고 한 것이다.
권7은 雜著(4)이다. 〈南山問目〉은 아우 申悅道와 함께 남산에 머무르고 있는 장현광을 찾아가 경전을 논의한 것, 장현광의 저술인 「易學圖說」을 보고 理氣에 대해 논의한 것, 「心經」을 강론하며 四端七情論에 대해 논의한 것 등이다. 〈牓諭境內文〉은 전주 판관으로 재직시 풍습을 교화하기 위해 붙인 방문으로 呂氏鄕約에 의거하여 미풍을 회복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江都日錄〉은 정묘호란의 전말을 기록한 일기로, 호란 초기 조정에서 강화도로 피란 여부를 논의한 것, 1월 17일 적군이 義州를 침입했다는 평안 감사 尹暄의 장계 등을 날짜별로 기록하였다.
권8은 序(5), 記(2), 跋(1), 箴(2), 表(1), 箋(5), 哀辭(1), 告辭(2), 祭文(5), 墓誌(1), 行狀(3)이다. 서의 〈送金孝仲越北幕序〉는 함경도로 가는 金榮祖를 전송한 것이고, 〈送金孝徵遊淸凉山序〉는 淸凉山으로 유람을 떠나는 金應祖를 배웅하며 지은 것으로, 이황의 자취와 정대한 가르침을 받으라는 내용이다. 〈送許仲開之任蓬萊郡序〉는 高城 郡守로 부임하는 許啓를 전송하며 지은 것으로 金剛山이 있는 곳으로 부임하니 신선의 자취를 볼 수 있겠다며 부러워하는 내용이다. 〈懶齋記〉는 동생 申悅道의 당호인 ‘懶齋’에 붙인 것으로 ‘懶’ 字의 진실된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成歡郵館重創記〉는 성환도 찰방으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관사를 중창하고 지은 것이다. 〈力學箴〉은 9세에 지은 것으로, 하늘이 준 人性은 聖賢과 다를 것이 없으니 그들의 자취를 따르겠다는 내용이다. 〈本朝請由海路入貢表〉는 淸이 만주 지역을 점령하였으니 바닷길로 입공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本朝訓鍊都監進金應河忠烈錄箋〉은 훈련도감에서 봉진한 김응하의 「충렬록」을 진언하며 올린 것으로, 醫巫閭를 회복하려다 전사한 김응하의 충절을 기린 것이다. 〈金而和哀辭〉는 장현광의 문인이었던 金中淸의 죽음을 애도한 글이다. 〈焚黃告辭〉는 세자시강원 좌필선이 되었을 때 부친에게 좌승지가 증직되고 모친에게 숙부인의 칭호가 내려지자 이를 고하는 것이다. 제문은 趙穆, 鄭復享, 申弘道 등에 대한 것이다. 이어 백부 申伈의 묘지, 부친과 족형 申弘道의 행장, 司空精의 실기가 실려 있다.
권9는 동생 申悅道가 편차한 年譜이다. 1656년에 지은 간략한 後識가 첨부되어 있다.
권10은 附錄으로 申悅道가 1653년에 지은 行狀, 李玄逸이 지은 墓碣銘, 申悅道가 1656년에 지은 墓誌, 金尙琦ㆍ崔晛ㆍ李民寏 등이 지은 祭文 8편, 張顯光ㆍ李好閔ㆍ金堉ㆍ李埈ㆍ尹煌 등이 지은 挽章 52편이다.
끝 부분에 1927년에 申鴻基가 발행자가 되어 慶北 義城郡 召文面 申錫基의 塾舍에서 발행한다는 刊記가 붙어 있다.

필자 : 김은정(金恩庭)

  형태서지
권수제  성재선생문집(惺齋先生文集)
판심제  성재선생문집(惺齋先生文集)
간종  활자본(木活字)
간행년  1909년 간행
권책  4권 2책
행자  10행 18자
규격  21.2×17.8(cm)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古3428-719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속 4
 저자
성명  금난수(琴蘭秀)
생년  1530년(중종 25)
몰년  1604년(선조 37)
 문원(聞遠)
 성재(惺齋), 고산주인(孤山主人)
본관  봉화(奉化)
특기사항  이황(李滉)의 문인. 조목(趙穆), 김수일(金守一), 구봉령(具鳳齡) 등과 교유
 가계도
 琴致韶
 僉知
 琴憲
 僉知
 英陽南氏
 敎授 南軾의 女
 琴蘭秀
 
 橫城趙氏
 參判 趙大春의 女
 琴憬
 奉事
 李命弘의 女
 
 李進迪의 女
 
 琴
 府使
 安恪의 女
 
 琴愷
 牧使
 李安道의 女
 
 高尙顔의 女
 
 琴恪
 早卒
 女
 
 李光郁
 
 側室
 
 琴㥠
 
 琴惲
 
 琴憙
 參奉
 女
 
 具純
 
 女
 
 孫義亨
 
 女
 
 李寅
 
 女
 
 李澄
 
 女
 
 金從咸
 

기사전거 : 墓碣銘(柳根 撰), 遺事(琴書述 撰), 奉化琴氏世譜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중종 25 1530 경인 嘉靖 9 1 2월 13일, 禮安縣 淨羅里에서 태어나다.
중종 36 1541 신축 嘉靖 20 12 靑溪 金璡에게 수학하다.
명종 1 1546 병오 嘉靖 25 17 1월, 모친상을 당하다.
명종 4 1549 기유 嘉靖 28 20 겨울, 具鳳齡 등과 淸凉山 上仙庵에서 독서하다.
명종 5 1550 경술 嘉靖 29 21 橫城趙氏 趙大春의 딸과 혼인하다. ○ 趙穆의 권유로 李滉의 문하에서 수업하다.
명종 7 1552 임자 嘉靖 31 23 11월, 조목, 구봉령 등과 玄沙寺에서 修契하다.
명종 8 1553 계축 嘉靖 32 24 10월, 장남 琴憬이 태어나다.
명종 9 1554 갑인 嘉靖 33 25 봄, 惺惺齋를 짓자 이황이 扁額을 써 주다.
명종 10 1555 을묘 嘉靖 34 26 여름, 조목과 성성재에서 글을 읽다.
명종 11 1556 병진 嘉靖 35 27 4월, 조목과 月蘭庵에서 독서하고, 「朱子書節要」를 繕寫하다.
명종 12 1557 정사 嘉靖 36 28 8월, 차남 琴이 태어나다.
명종 13 1558 무오 嘉靖 37 29 4월, 易東書院 터로 鰲潭을 추천하여 이황을 모시고 보러 가다. ○ 가을, 普賢庵에서 李德弘과 머물다.
명종 14 1559 기미 嘉靖 38 30 봄, 이덕홍이 성성재에서 한 달간 유숙하다.
명종 15 1560 경신 嘉靖 39 31 11월, 星州에서 黃俊良과 吳健을 만나다.
명종 16 1561 신유 嘉靖 40 32 鄭琢과 矗石樓를 유람하다. ○ 4월, 雷龍堂에서 曺植을 뵙다. ○ 가을, 생원시에 합격하다.
명종 17 1562 임술 嘉靖 41 33 4월, 3남 琴愷가 태어나다.
명종 19 1564 갑자 嘉靖 43 35 가을, 日洞精舍(孤山亭)를 짓다.
선조 1 1568 무진 隆慶 2 39 1월, 鄭逑가 찾아오다.
선조 3 1570 경오 隆慶 4 41 12월, 이황을 곡하다.
선조 4 1571 신미 隆慶 5 42 1월, 4남 琴恪이 태어나다. ○ 6월, 易東書院에서 퇴계의 문집을 裒集하다.
선조 5 1572 임신 隆慶 6 43 4월, 金富弼 등과 浮石寺를 유람하다.
선조 7 1574 갑술 萬曆 2 45 〈退溪先生易名私議〉를 짓다.
선조 8 1575 을해 萬曆 3 46 5월, 부친상을 당하다.
선조 10 1577 정축 萬曆 5 48 8월, 일동정사로 柳夢鼎이 찾아오다. ○ 10월, 김부필을 곡하다.
선조 12 1579 기묘 萬曆 7 50 4월, 遺逸로 齊陵 參奉이 되다. ○ 8월, 강화도를 유람하다.
선조 13 1580 경진 萬曆 8 51 2월, 박연폭포를 유람하고 崧陽書院의 鄭夢周 사당에 참배하다.
선조 14 1581 신사 萬曆 9 52 11월, 集慶殿 參奉이 되다.
선조 15 1582 임오 萬曆 10 53 8월, 鮑石亭과 利見臺를 유람하다. ○ 겨울, 玉山書院에서 李彦迪의 글을 講討하다.
선조 16 1583 계미 萬曆 11 54 2월, 敬陵 參奉이 되다. ○ 李珥가 찾아오다. ○ 7월, 金誠一과 東西 分黨에 관한 館學儒疏를 논하다.
선조 17 1584 갑신 萬曆 12 55 〈讀花潭集辨〉을 짓다. ○ 8월, 李安道를 곡하다.
선조 18 1585 을유 萬曆 13 56 2월, 金宇顒이 찾아오다. ○ 12월, 長興庫 奉事가 되다.
선조 19 1586 병술 萬曆 14 57 7월, 具鳳齡을 곡하다.
선조 20 1587 정해 萬曆 15 58 12월, 長興庫 直長이 되다.
선조 21 1588 무자 萬曆 16 59 8월, 4남 琴恪이 죽다.
선조 22 1589 기축 萬曆 17 60 6월, 掌隷院 司評이 되다.
선조 23 1590 경인 萬曆 18 61 3월, 통신사 김성일을 전별하다. ○ 4월, 사직하고 귀향하다.
선조 25 1592 임진 萬曆 20 63 왜란이 일어나자 金垓와 함께 鄕兵을 모으다.
선조 26 1593 계사 萬曆 21 64 4월, 김성일을 곡하다. ○ 6월, 守城將이 되다. ○ 8월, 安東에서 體察使 柳成龍을 만나다.
선조 27 1594 갑오 萬曆 22 65 申之悌와 청량산 산성을 살펴보고 수축하게 하다.
선조 29 1596 병신 萬曆 24 67 星州 判官과 翊衛司 翊衛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선조 30 1597 정유 萬曆 25 68 장남 琴憬을 郭再佑가 있는 火旺山城으로 보내다. ○ 4월, 天淵臺에서 체찰사 李元翼을 만나다. ○ 守城將이 되다.
선조 31 1598 무술 萬曆 26 69 鄕約을 講修하여 민심을 수습하다. ○ 韓浚謙이 찾아오다.
선조 32 1599 기해 萬曆 27 70 3월, 奉化 縣監이 되어 향약을 시행하다.
선조 33 1600 경자 萬曆 28 71 玉淵亭에서 柳成龍을 만나다. ○ 5월, 도산에서 「퇴계집」 간행을 고하다. ○ 8월, 사직하고 귀향하다.
선조 37 1604 갑진 萬曆 32 75 2월 13일, 졸하다. ○ 8월, 白雲山에 장사 지내다.
선조 38 1605 을사 萬曆 33 宣武 原從功臣에 추록되고, 左承旨에 추증되다.
숙종 35 1709 기축 康熙 48 禮安 東溪祠에 봉안되다.
순종 3 1909 기유 隆熙 3 10대손 琴鼎基 등이 활자로 문집을 인행하다.

기사전거 : 年譜, 墓碣銘(柳根 撰), 遺事(琴書述 撰), 本集內容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禮安 출신의 학자로 손위 처남인 月川 趙穆의 권유로 退溪 李滉의 문하에 들었고 이황과는 姻戚 관계에 있다. 學行을 겸한 청빈한 선비이자 자연을 완상하는 감성을 아우른 인물로 임진왜란 때에는 守城將으로서 향병을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는 등 국난 극복에 앞장서는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저자의 시문은 사후 200여 년이 지나도록 간행되지 못하다가, 8대손 琴詩述(1783~1851)과 琴書述(1791~1872) 형제 대에 이르러 「퇴계집」 등 여러 문집에서 저자의 시문을 수집 정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0대손 琴鼎基와 琴岱基가 저자의 시문을 다시 수집하고, 연보 및 부록 등을 증보 합편하여 1909년에 활자로 문집을 인행하였다.《초간본》 이 본은 규장각(古3428-719), 국립중앙도서관(우촌古3648-文11-3),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晩松D1-A1896)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0대손 琴鼎基 등이 1909년에 활자로 인행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며, 영인 저본의 권2는 板次 ‘二’가 중복되어 있으며, 권4의 제3판은 卷次가 ‘二’로 誤記되어 있다.

기사전거 : 序(金道和 撰), 跋(李晩燾ㆍ琴鼎基 撰), 墓碣銘(柳根 撰), 遺事(琴書述 撰)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4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두에는 1908년에 金道和가 지은 서문과 목록이 있다.
권1은 詩 90題로 시체와 관계없이 저작 연대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1553년에 「心經」을 읽고 이황에게 올린 칠언시를 시작으로 金守一, 裵三益 등과 교유한 시, 두류산과 가야산을 유람하면서 쓴 시, 日洞精舍를 소재로 한 시, 통신사 金誠一을 전송하는 送詩 등으로 대부분 師友간의 贈答詩이다.
권2는 書(23)와 잡저(10)이다. 서는 이황과 조목, 金就礪, 김성일, 金富倫, 南致利에게 보낸 것이다. 〈上退溪先生問目〉은 상례와 제례에 관해 질의하고 답한 것이고, 조목에게는 살가운 내용 등이 담긴 12편이 있는데 그중 〈答趙士敬〉은 기축옥사에 연루된 지인들에 대해 염려하는 편지이다. 잡저는 識(5), 辨(2), 議(1) 등인데, 〈讀花潭集辨〉은 서경덕의 理氣說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退溪先生易名私議〉는 이황의 시호로 文, 元, 正 세 자 가운데 ‘文’이 가장 합당하다는 의견이며, 〈族契入議後識〉와 〈洞中鄕約小識〉에 붙인 조목은 奉化에서 시행한 향약의 규정이다.
권3은 記(3), 銘(2), 祭文(2), 年譜이다. 〈普賢菴壁上……〉은 淸凉山에서 정양하며 학문의 깊이를 다진 인연을 기록하였고, 〈陶山書堂營建記事〉는 1574년에 창건한 도산서원의 건축 기록이다. 명은 좌우명과 유성룡의 玉淵亭에 대한 것이다. 제문은 이황을 애도한 것인데 동문들과 연명으로 쓴 것이 1편 더 있다. 말미에 부록으로 연보가 있다.
권4는 부록으로 柳根이 지은 묘갈명, 8대손 琴書述이 지은 遺事와 봉안문, 상량문, 고유문 각 1편과 挽詞 7편, 〈孤山亭題詠〉, 〈日洞山水記〉가 수록되어 있다. 〈고산정제영〉은 이황, 李文樑, 조목 등이 저자에게 贈遺한 시 49제이다. 고산정은 일동정사의 異稱으로 自號를 ‘孤山主人’이라 할 만큼 저자가 애정을 기울인 곳이다. 〈일동산수기〉는 요절한 4남 琴恪이 16세에 지은 것으로 일동정사 주변을 묘사하고 스승 許篈에게 記文을 청하는 글이다.
권미에는 1909년에 李晩燾와 10대손 琴鼎基가 지은 跋이 있다.

필자 : 이미실(李美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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