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집 제25권

제발(題跋)

 

題李同甫兄弟海山酬唱錄後

 

이동보(李同甫) 형제의 《해산수창록(海山酬唱錄)》의 뒤에 쓰다.

 

동보가 멀리 부양(斧壤 평강(平康)의 딴 이름)으로부터 돌아와서는 나에게 들러 이 책을 꺼내 보여 주었는데, 형제가 함께 여행하면서 번갈아 가며 시를 읊은 그 흥취가 물씬 배어나 좋았다. 나도 지난 늦봄에 아우 자익(子益)과 함께 배를 타고 구도(龜島)를 유람하고 선암(仙巖), 운암(雲巖)을 구경한 다음, 의림(義林)의 여러 명승지를 돌면서 번갈아 가며 읊은 시편이 꽤 있는데, 이제 이 《수창록》을 보니 그 일이 참으로 흡사하다. 《수창록》에 나오는 아름다운 바다와 산들은 모두 나와 자익이 일찍이 거쳐 갔던 곳인데, 동보는 돌아올 때 또 노 한 자루로 단구(丹丘 단양(丹陽))의 물길을 거슬러 유람하며 돌아왔다고 하니, 일이 더욱 비슷하다. 다만 낙보(樂甫)는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산수를 즐기는 경지가 한 수 낮다고 아니할 수 없다. 낙보가 보내온 편지에 피차를 비교하는 말이 있는 듯하기에 이러한 뜻으로 회답하는 바이다. 산수에 대해서까지 남보다 우위에 서려는 마음이 없지 않으니, 이 점이 또 우습다.
무진년 여름에 한벽루(寒碧樓) 주인이 소연재(翛然齋) 안에서 쓰다.

‘허리에 돈 30만 꾸러미를 둘러차고 학을 타고서 양주 고을의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다[腰纏三十萬 騎鶴上揚州]’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참으로 어리석은 듯하다. 그러나 동보의 《수창록》을 보건대 군수의 부절을 찬 채로 산과 바다를 드나들며 이처럼 마음껏 구경하였으니, 이 세상에 세속의 부귀와 신선 세계의 초연함을 모두 다 누리는 이가 없지 않다는 것을 알겠다. 그러나 천상에 문자를 모르는 신선은 없을 것이지만, 그저 허리에 둘러찬 돈이 많은 것만 좋아하고 시를 읊는 흥취를 모르는 자들은 아무리 학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해도 속티를 벗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수창록》의 150편은 돈 30만 꾸러미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또 쓰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한벽루에 앉아 이 책을 읽노라니 매우 흥취 있는 일이다. 또 무슨 말을 쓰겠는가. 그러나 속세에 묻혀 사는 이 나라 사람들이 이 책을 얻어 한번 읽는다면 온몸에 맑은 바람이 일어날 것이니, 더욱 좋은 일일 것이다. 동보는 부디 이 책을 아껴 감춰 두지 말기를 바란다. 또 쓰다.

이동보(李同甫) …… 쓰다 : 작자의 나이 38세 때인 1688년(숙종14)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재직 시에 쓴 작품이다. 《해산창수록》은 강원도 평강 현감(平康縣監)으로 있던 이희조(李喜朝)가 이해 5월에 그의 아우 이하조(李賀朝)를 대동하고 사창(社倉)의 곡물을 풀어 통천(通川), 흡곡(歙谷), 안변(安邊), 고성(高城) 등지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보름 동안 각 고을을 순행하던 길에 금강산의 여러 명승지와 동해의 총석(叢石)을 두루 유람하였는데, 이때 그의 아우와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아 엮은 기행시집이다. 이희조는 70수, 이하조는 83수로 도합 153수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芝村集 卷19 海山唱酬錄序》
허리에 …… 싶다 : ‘30만’이 《상운소설》에는 ‘10만 관(貫)’으로 되어 있다. 어떤 네 명의 나그네가 함께 지내면서 각기 소원을 말하였는데, 한 사람은 양주 자사(揚州刺史)가 되고 싶다 하고, 한 사람은 학을 타고 천상으로 올라가고 싶다 하고, 한 사람은 재물을 많이 지니고 싶다 하였다. 그런데 맨 나중의 한 사람은 이들의 소원을 다 취해 자기는 허리에 돈 10만 꾸러미를 둘러차고 양주 고을의 하늘로 올라가고 싶다고 하였다 한다. 성취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욕망을 말할 때 흔히 인용된다. 《說郛 卷46下 商芸小說》

 

 

農巖集卷之二十五

題跋

題李同甫兄弟海山酬唱錄後

 

同甫自斧壤遠來過我。出此卷相示。其伯仲聯袂塤篪。迭唱興致。翩翩可樂也。暮春者。余亦與家弟子益。同舟游龜島。歷觀仙巖雲巖。以及義林諸勝。頗有酬和篇什。今觀此錄。甚矣。其事之相似也。凡錄中海山佳處。皆吾與子益所嘗經行。而同甫之來也。又能以一棹溯丹丘而歸。此又足以相當。獨樂甫於此。不能不輸一籌也。樂甫書來。似有較量彼此之語。故輒以是復焉。於山水也。亦不能無欲上人之心。此又可以一笑也。戊辰夏季。寒碧主人。書于翛然齋中。
腰纏三十萬。騎鶴上揚州。此語絶似癡。然觀同甫此錄。能身佩郡符而出入海嶽。極意縱覽如此。知世間未嘗無揚州鶴也。然天上無不識字神仙。彼但知腰纏之樂。而不識歌詠之適者。雖騎鶴上天。亦不免於俗也。然則此錄百五十篇。其賢於三十萬錢多矣。又書。
雨中坐寒碧樓讀此卷。大是趣事。亦甚著題。然使東華塵土中人。得此一讀。令其九竅生淸風。尤爲快事。同甫幸勿祕惜此卷也。又書。

 

 

 

 

 

농암집 제3권

시(詩)

月夜。女兒輩登寒碧樓。久不下。余方坐翛然齋。不覺起興隨至。眞所謂老子於此。興復不淺也。

 

달밤에 딸들이 한벽루(寒碧樓)에 올라가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았다. 나는 소연재(翛然齋)에 앉아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흥이 나서 뒤따라가 한벽루에 이르렀으니, 진정 이른바 “내 이 늙은이가 이런 곳에서는 흥이 물씬 일어난다.”고 한 경우라 하겠다.

 

명월 아래 웃음소리 떠들썩하니 / 月明笑語喧
누각 위 아이들이 놀고 있구나 / 樓頭兒女游
얼음 녹은 푸른 강 봄날 같은데 / 綠江渙如春
청둥오리 한 쌍이 물위에 둥둥 / 花鴨一雙浮
주렴 걷고 어울려 바라보면서 / 卷簾相指似
추운데도 누각을 아니 내려와 / 夜寒不下樓
늙은 몸 바야흐로 혼자 앉아서 / 老子方獨坐
빈 배만 마주하고 시를 읊노라 / 微吟對虛舟

두 번째
별세계라 한적한 여기 이곳은 / 洞天此窈窕
사계절 맑은 기운 간직하였네 / 淸眞蘊四時
이곳에 저 옛날의 옥부자 신선 / 何年玉斧子
영지 캐는 이 몸을 기다렸겠지 / 期我采玄芝
허나 백학 밤 깊어도 오지를 않아 / 白鶴夜不來
누구를 기다리듯 앉아 있는데 / 高樓坐待誰
서른 여섯 늘어선 누각의 난간 / 闌干三十六
달빛 아래 그림자만 어수선하네 / 明月空參差

세 번째

밤안개 자욱한 금병산 보소 / 錦屛凝夜煙
그림자 깊은 강 빠져 들어가 / 綠影淪江深
흐르는 물결 함께 가지 않으니 / 波流不俱逝
도사의 속마음과 흡사하여라 / 一似靜者心
초라한 복건 하나 머리에 쓰고 / 蕭然一幅巾
사방을 둘러보며 누굴 찾는지 / 四顧誰招尋
구름 가의 밝은 달 저게 내 촛불 / 雲月皎我燭
바람결 물소리는 나의 거문고 / 風瀨鳴我琴

내 이 …… 일어난다 : 진(晉)나라 태위(太尉) 유량(庾亮)이 무창(武昌)에 있을 때, 어느 날씨 좋은 가을밤 은호(殷浩)와 왕호지(王胡之) 등 젊은이들에게 남루(南樓)에 올라가 놀도록 하고 혼자 남아 있다가 자기도 흥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따라가 그들에게 한 말이다. 《晉書 卷73 庾亮列傳》

옥부자(玉斧子) : 옥부는 전설상의 신선 허훼(許翽)의 어릴 적 이름으로, 신선을 뜻한다.

농암집 제3권

시(詩)

子益將登舟。賦得寒碧樓前一樹梨。與洪生和之。

자익이 배에 오르기 전에 한벽루(寒碧樓) 앞의 배나무 한 그루를 읊었는데, 홍생(洪生)과 함께 그에 화답하다.

 

 

한벽루라 누각 앞에 한 그루 버드나무 / 寒碧樓前一株柳
금병산의 안개를 천 가지가 얽어맸네 / 千條綰盡錦屛煙
봄바람아 부질없이 왜 저리 길러냈나 / 春風長得空如許
가는 사람 탄 배를 잡아매지 못할 것을 / 不繫歸人下瀨船

금병산(錦屛山)의 …… 얽어맸네 : 버드나무 잎이 다 자라 무성한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농암집 제3권

시(詩)

凝淸閣。又得壺字。[응청각에서 또 ‘호(壺)’ 자 운을 얻어 짓다.]

 

한벽루라 누각 위에 한 병 술 앞에 놓고 / 寒碧樓頭酒一壺
술 마시는 높은 흥취 봄 강물이 있음이라 / 含杯高興在春湖
강변에 두루 핀 꽃 하양 땅의 오얏이요 / 岸花開徧河陽李
모래 위 나는 물새 섭현 고을 오리로세 / 沙鳥飛依葉縣鳧
주렴 아래 방울 둬도 관아의 공무 없고 / 簾下掣鈴無簿牒
수령 함께 휘호(揮毫)하는 선비들도 많다네 / 席前揮筆盛文儒
이다음 지금 이 일 쓸쓸히 추억하며 / 異時此事空相憶
금병산(錦屛山) 외로이 지는 해를 마주하리 / 閒對屛山落日孤

하양(河陽) 땅의 오얏 : 진(晉)나라 반악(潘岳)이 하양 현령(河陽縣令)으로 있을 때 온 고을에 복사나무와 오얏나무를 심어 봄바람이 불어올 때면 곳곳에 꽃이 만발하였다 한다. 《白孔六帖》
섭현(葉縣) 고을 오리 :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도술을 지닌 왕교(王喬)가 섭현 영(葉縣令)을 지내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언제나 조정에 와서 명제를 알현하였다. 그가 먼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자주 오고 또 수레도 타지 않았으므로, 이를 이상하게 여긴 명제가 비밀리에 태사(太史)에게 그 진상을 알아보라고 명했는데, 태사가, 그가 오는 시기에 한 쌍의 들오리가 동남방에서 날아온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들오리가 다시 날아오는 때를 기다렸다가 그물로 덮쳤는데, 그물 속에는 몇 해 전에 황제가 상서대(尙書臺) 관원들에게 하사한 가죽신 한 짝만 있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82上 方術列傳 王喬》 작자가 현재 물오리가 노는 남한강 상류 청풍부에서 왕교처럼 한적한 벼슬살이를 한다는 뜻에서 인용한 것이다.
주렴 …… 없고 : 당(唐)나라 때 지방 관청에서 문밖에 쇠방울을 매달아 두고 수령에게 보고할 일이 있으면 방울을 잡아당겨 울림으로써 사람이 수령을 불러내는 것을 대신하였다 한다. 곧 지금 청풍부에 공무가 한가함을 말한 것이다.


 

농암집 제3권

시(詩)

寒碧樓月夜。聞笛聲在船。賦得一律。

달밤에 배 안에서 한벽루(寒碧樓)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감상하며 율시 한 수를 짓다.

 

 

누 위의 피리소리 격이 높은데 / 樓上吹初好
배 안에서 듣노라니 더욱 시원해 / 舟中度更寒
텅 빈 강 그 울림이 자연스럽고 / 江空易成響
먼 안개 아스라이 끝이 없는 듯 / 煙遠似無端
맑은 소리 강변의 풍혈에 닿고 / 淸籟連風穴
흐르는 음 월탄까지 울려 퍼진다 / 流音溯月灘
뜻이 통한 아양곡 여기 있으니 / 峨洋今在此
거문고 굳이 애써 탈 것이 없네 / 綠綺未須彈

농암집 제3권

시(詩)

側岸有垂楊。拂波蔭船。[강기슭에 물결을 스치는 수양버들이 있어 지나가는 배를 덮었다.]

 

기슭 누운 수양버들 금빛으로 단장하고 / 臥岸垂楊黃嚲金
긴긴 가지 나날이 강 빛 함께 푸르러 가 / 長條日與綠江深
뱃머리에 펼쳐진 봄빛 지금 이러하니 / 舟前春色今如此
한벽루 어귀에도 봄을 막지 못하리라 / 寒碧樓頭恐不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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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 가흥(可興)을 지나는데 강물이 맑디맑아 내 마음을 기쁘게 하다.

 

머나먼 길 급하게 달려오자니 / 汩汩赴脩塗
불안해 객의 시름 쌓이더니만 / 搖搖積旅思
골짝 강에 홀연히 정신 깨이어 / 峽江忽寤懷
한가로이 말고삐 늦춰 잡는다 / 聊以緩長轡
구불구불 길 하나 이어졌지만 / 綿延雖一路
굽이마다 느낀 정취 다르고말고 / 回轉每殊致
울퉁불퉁 기암괴석 여기 또 저기 / 磊磊奇石見
반짝반짝 흰 모래 덮이었는데 / 炯炯素沙被
깊은 물엔 비단 무늬 펼쳐져 있고 / 縠文布淵淪
빠른 여울 화살보다 한층 더 빨라 / 竹箭讓湍駛
구름 태양 번갈아 서로 비추니 / 雲日遞相照
시시각각 변화하는 경치로구나 / 景氣多變異
뉘 알았으리 사행길 고달픔 속에 / 不謂原隰勞
강변의 은자 흥취 함께 누릴 줄 / 兼領滄洲事
평소부터 이런 정취 좋아했기에 / 平生篤斯好
감탄하며 깊은 마음 쏟아낸다네 / 喟焉注深寄
물길을 거스르며 어디 향하나 / 溯洄終何向
청풍 고을 한벽루(寒碧樓) 그곳이라오 / 碧樓在延跂

]가흥(可興) : 충청북도 중원군(中原郡) 가금면(可金面)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가흥창(可興倉)은 조창(漕倉)이 있던 곳으로, 경상도 북부의 여러 고을과 충청도 일원의 전세(田稅)를 이곳에 모아 남한강(南漢江)의 수로를 이용하여 서울로 수송하였는데, 덕흥창(德興倉), 경원창(慶原倉)이라고도 한다.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기묘록 보유 하권(己卯錄補遺 卷下)

 

최운 전(崔澐傳)

 

최운(崔澐)은 □□생으로 자(字)는 운지(澐之)이다. 대대로 전의(全義)에 살았으며 일찍이 충암(冲庵 김정(金淨))과 같이 공부하였다. 무인년에 그 고을에서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별과(別科)로 보관(補官)되었는데, 천목(薦目)에는, 지조와 행실이 바르고, 학식과 재행(才行)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제(下第)하여 황간 현감(黃澗縣監)이 되었다. 정사를 대범하게 다스리고 송사(訟事)는 사리에 맞으니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따랐으며, 임금은 옷감 한 벌을 내려 격려하였다. 12월에 파직되어 고향에 근신하고 있었는데 경진년에 이신(李信)의 고사(告辭)에, “김 대사성(金大司成 김식(金湜))이 망명 중에 있을 때, ‘나를 받아줄 사람은 최운과 영해 부사(寧海府使) 이윤검(李允儉)뿐이다.’ 말한 바 있다.” 하였으므로, 체포되어 추국을 받고 전 가족이 강계(江界)로 추방되어 죽었다. 죄가 풀리자 그의 아내가 뼈를 가지고 돌아와 고향에 장사지냈다. 공이 일찍이 청풍(淸風) 한벽루(寒碧樓)에서 벗을 보내는 시를 지었는데,

 

머나먼 타관 길에 / 萬里關河路
나그네의 외로운 모습이여 / 羈危隻影微
바람은 성긴 버들 언덕에 많고 / 風多疎柳岸
낙엽은 늦은 산 석양빛에 떨어진다 / 葉落晩山暉
내 마음 산수에 쏠려 있고 / 山水情都在
저 일은 존망이 다 틀렸네 / 存亡事已違
고향이 이제 멀지 않으니 / 故園今不遠
행여나 더디 돌아갈까 저어하노라 / 錯莫欲遲歸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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