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학목명 : 경학(經學)
☀ 주제어 : 유학/주자학/예학/실학/송시열
☀ 성격 : 사상.유학
☀ 시대 : 통일신라/고려/조선
☀ 정의
유교 경서(經書)의 뜻을 해석하거나 천술(闡述)하는 학문. 경서에 관한 학문적 작업의 전부를 포함하는 하나의 학문분야의 명칭이다.
☀ 유래
처음에는 '경'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논어≫나 ≪맹자≫에서도 보통명사를 그대로 고유명사화 하여 ≪시(詩)》 또는 ≪서(書)≫라고만 불렀으며, ≪시경≫이나 ≪서경≫으로는 부르지 않았다. 경서의 호칭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 ≪서경≫의 경우 고대에는 ≪서≫라고만 하다가, 한나라 때부터 ≪상서(尙書)≫라 하였고, 명나라 이후로 ≪서경(書經)≫이란 칭호가 확정되었다. 모든 경서에 '경'자를 붙인 것은 아니지만, 경서를 '경'으로 통칭하는 것은 ≪장자(莊子)≫의 천운(天運)편에서의 일이다. 유가 가운데에서 '경'으로 부른 것은 역시 전국시대 말기에 나온 순자(荀子)가 처음으로 생각된다. 전국시대에도 도가•법가•묵가의 학문에 대립한 유(儒), 즉 유학만 있었지 경학이란 일컬음까지는 없었다. 문헌 위에 '경학'이라는 두 글자가 나타난 것으로 오래된 것은 ≪한서(漢書)≫ 유림전(儒林傳)이다. 구양생(歐陽生)으로부터 ≪상서≫, 즉 ≪서경≫의 학(學)을 받고, 또 공안국(孔安國)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한 예관(禮官)이 "무제(武帝)를 처음 만났을 때 경학을 말했다."고 한 것을 보면 '경학'이라는 일컬음이 문헌에 정착한 것은 전한(前漢) 무제시대이다. 이는 경서의 개념 자체가 이 시대에 성립된 것과 관련된다.
☀ 발전
(1) 중국경학의 흐름 진나라 때 분서갱유로 ≪악경(樂經)≫이 망실되어 전한 초에 오경(五經)의 일컬음이 있다가 후한 이후로는 '경'의 영역이 점차 확대되어 왔다. 흔히 진시황시대를 경학의 공백시대로 보기 쉬우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진시황은 '박사관(博士官)'이라고 일컫는 학술교육담당기관을 중앙에 설치하는 한편, 유학을 포함한 백가(百家)의 문헌을 적극적으로 수집하였다. 이렇게 확보한 막대한 장서가 뒤에 학술상 대단히 쓸모가 있게 되어 진나라 때에 학문을 비록 지배층의 독점물로 하였을 망정 학문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전한 초에 금문상서(今文尙書) 29편을 전수한 복생(伏生)은 본래 진의 박사였다. 후한 반고(班固)의 ≪백호통(白虎通)≫에는 ≪역(易)≫•≪서(書)≫•≪시(詩)≫•≪예(禮)≫•≪악(樂)≫을 오경이라고 일컫고 있었으나, 당(唐)의 서견(徐堅) 등이 극찬한 ≪초학기(初學記)≫에는 진화 뒤로 ≪악경≫은 없어져 ≪시≫•≪서≫•≪역≫•≪춘추(春秋)≫•≪예기(禮記)≫의 5종을 총칭하여 오경이라 하고 있다. 이것이 지금 오경이라 부르는 것과 일치한다. 이 가운데 ≪예≫는 전한 무제 때에는 ≪의례(儀禮)≫를 일컬었던 것이 후세에 와서는 ≪예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으며, ≪춘추≫는 ≪공양전(公羊傳)≫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뒤에 ≪좌씨전(左氏傳)≫으로 바뀌었다.
전한 무제 이후 선제(宣帝) 때에는 학자들에게 명하여 오경의 내용을 강론하게 하였다고 한다. 오경 이외에 삼경•사경•칠경•구경•십경•십일경•십이경•십삼경•십사경•십칠경•이십일경 등의 통칭이 있으나,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것으로는 삼경(시•서•역)과 구경과 십삼경이 있다. 구경은 몇 가지 이설이 있는데, 그 중 당나라 육덕명(陸德明)의≪경전석문서록(經典釋文序錄)≫에 따르면 ≪역≫•≪서≫•≪시≫•≪주례(周禮)≫•≪의례≫•≪예기≫•≪춘추≫•≪효경(孝經)≫•≪논어≫의 아홉가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역≫•≪서≫•≪시≫에 삼례(三禮: 주례•의례•예기)와 춘추삼전(春秋三傳: 좌씨전•공양전•곡량전)을 합해 구경이라 하는 것이 통설이다. 청나라의 피석서(皮錫瑞)는 ≪경학역사(經學繹史)≫에서 "당 때에 삼례와 삼전을 나누고 여기에 ≪역≫•≪서≫•≪시≫를 합하여 구경으로 삼고, 송 때에 여기에 ≪논어≫•≪효경≫•≪맹자≫•≪이아(爾雅)≫를 보태어 십삼경을 삼았다."고 하였거니와 십삼경은 이른바 경의 총칭으로 ≪역경(易經)≫•≪상서, 서경≫•≪모시(毛詩), 시경≫•≪춘추좌씨전≫•≪춘추공양전≫•≪춘추곡량전≫•≪주례≫•≪의례≫•≪예기≫•≪효경≫•≪논어≫•≪맹자≫•≪이아≫의 13종을 말한다.
경에 대한 1차 주석으로서의 주(注)와 2차 주석으로서의 소(疏 : 正義 라고도 함)를 합한 것이 주소(注疏)인데, 한•진(晉) 때에는 주가, 당•송 때에는 소가 성행하였다. 경학에는 숙명처럼 붙어다니는 난제가 있다. 그것은 금문학(今文學)과 고문학(古文學)의 다툼이다. 행정능률 향상을 위해 진대에 만들어지고 한대에 개량된 간체문자(簡體文字), 즉 예서(隸書)가 금문이고 그 이전의 구체문자(舊體文字)가 고문인데, 경학 성립의 시기에는 같은 경서에 금문과 고문의 두 계통이 병존하고 있었다. 진대 박사관이나 한대 오경박사 계통의 관학이 주로 간체문자 계통이고, 분서(焚書)를 면한 민간 계통이 주로 구체문자의 계통이었다. 자체의 차이는 먼저 해석의 차이를 낳고 나아가 학파의 대립으로 번지고, 드디어는 정치세력까지 껴안은 항쟁으로 확대되어 경학은 내란시대에 돌입하게까지 된다. 전한 무제가 인가한 오경박사는 물론 금문파이었는데, 그 뒤로부터 2백년 가까이 미치는 고문파의 반격은 정치면에서 신(新)이라는 독자적인 정권의 수립을 가져올 정도로 금문파와 대등한 지위를 차지하기까지에 이른다. 그리고 금문파와 고문파의 화해조건도 서서히 정비되어가고 있었다. 후한 정현(鄭玄)의 오경 전반에 걸친 방대한 주석작업이 오경의 무류성과 자기 완결성에대한 보증의 작업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같이 경학사상 유례 없는 큰 업적을 남긴 정현은, 첫째로 경은 말할 것도 없고 이 경에 대한 보완적 성격을 가지는 전(傳)까지를 포함하는 경학의 모든 근본 문헌에 대하여 뛰어난 문자학에 근거한 종합적 해석을 확립하였으며, 둘째로는 독특한 '예(禮)'의 관념을 축으로 하는 경학 전 영역의 체계화에 힘썼다. 경학이 곧 사상의 체계이고 철학체계이었듯이 경학의 기대되는 국가에의 공헌도는 여기에서 비약적으로 상승되었다. 이것은 금문파와 고문파의 화해조건이 서서히 성숙되어온 결과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정현의 학문적인 넓은 시야 속에서 금문학•고문학의 후유증 없는 합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뒤로 노장(老莊)과 불교 등의 유행으로 유교의 지위가 위협받는 경우에라도, 유교는 그때마다 시대의 상황을 스스로 오경의 해석학 속에서 도입하여 그것으로 경서의 권위를 지켜 나왔다. 예를 들어 당초(唐初)의 공영달(孔穎達) 등이 지은 흠정(欽定)의 주석서 ≪오경정의(五經正義)≫에는 육조시대의 노불(老佛) 유행기의 영향인듯한 해석이 보이고도 있으며,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注)≫는 오경 중심으로부터 사서 중심으로의 획기적인 전환을 이룬 저술이기도 하거니와, 그 속에는 노•불을 받아들여 지양한 새로운 철학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신유학(新儒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철학적으로 면모를 일신한 송대 이후의 성리학 등을 거쳐 청대의 사상사학(思想史學)의 전반적 연구의 발전은 경학의 독자성 확보란 면에서 여러가지로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 것만은 틀림없다. 오경은 흔히 ≪역≫•≪서≫•≪예기≫•≪춘추≫ 또는 ≪시≫•≪서≫•≪역≫•≪예기≫•≪춘추≫의 순서로 일컫는 것이 상례이지만, 우리나라 이이(李珥)의≪격몽요결 (擊蒙要訣)≫ <독서장>에 보이는 순서에 따르면 ≪시경≫•≪예기≫•≪서경≫•≪역경≫•≪춘추≫의 순으로 되어 있다.
(2) 한국경학의 흐름조선 초기 권근(權近)의 학문 속에는 오경 중심의 경학과 사서 중심의 이학(理學)의 공존현상을 볼 수 있는데, 권근을 분수령으로 하여 그 이전의 경학이 오경 중심인 데 비하여, 그 이후 경학은 사서 중심의 이학의 테두리 속에서 이루어졌다. 성리학 전성기의 경학의 주제는 주로 사서, 그 중에서도 특히 ≪대학≫을 중심으로 한 것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내려와서는 이른바 실학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경학의 연구범위는 다시 크게 확대되기에 이른다. 청대의 사상사학과 고증학이 실학자들의 경학연구에 크게 참고가 되었다.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고구려에서 처음으로 태학(太學)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한 것은 소수림왕 2년(372)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태학제도가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태학제도가 박사(博士, 교수)를 두고 경사(經史)를 교수하며, 특히 오경으로써 중요과목을 삼고 있었으니 고구려의 태학제도의 면모를 추정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한사군을 통해 한족(漢族)의 문화에 크게 자극되어서인지, 고구려 사람들이 서적을 좋아하고 시골 벽지에도 경당(扃堂)을 세워 자제들의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유교가 이미 오경 중심으로 경학화, 한학화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경우에는 ≪일본서기(日本書記)≫ 계체천황(繼體天皇) 7년의 기록과 10년의 기록, 그리고 흠명천황(欽明天皇) 15년의 기록 등을 미루어보아 백제의 오경박사의 제도가 있어 이 시기 유학의 중심이 오경연구에 있었다고 짐작된다.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문화적 후진성을 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6세기초 이전의 신라는 선진(先秦)시대의 학술이나 고유문화의 바탕 위에 있었던 것 같고, 그뒤 순장 풍속을 금하고 율령과 관제를 갖춘 것을 보면 한대 문화는 6세기초 이후에 들어온 것 같다. 신라에 국학을 둔 것은 앞에서도 삼국통일 이후인 신문왕 2년의 일이다. 이는 입당유학생(入唐留學生)이 처음 출국한 해(640)보다 40년이나 뒤이다. 따라서 신라 국학의 운영은 자연히 당의 제도를 모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교과과목으로는 역시 경서와 ≪문선(文選)≫이 주가 되었고, 산학(算學)•삼사(三史)•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가 그 다음이 되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3과(科)로 분류되어 각기 그 진로도 달라졌다. ① 갑 : ≪예기≫•≪주역≫•≪논어≫•≪효경≫ ②을 : ≪좌전≫•≪모시≫•≪논어≫•≪효경≫ ③ 병: ≪상서≫•≪문선≫•≪논어≫•≪효경≫으로서 3과에 있어 ≪논어≫와 ≪효경≫은 공통과목이며 각 과에 따라 중점을 달리하고 있다. 중국 당제의 경우에는 대경(大經)•중경(中經)•소경(小經) 등으로 구분하여, ① 대경 : ≪예기≫•≪춘추좌씨전≫ ② 중경 : ≪시경≫•≪주역≫•≪의례≫ ③ 소경 : ≪주례≫•≪상서≫•≪춘추공양전≫•≪춘추곡량전≫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과 약간 다르다. 788년(원성왕4)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두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정교(政敎)면에서 확립된 고려 유학의 토대 위에서 교학(敎學)면에서의 고려 유학을 대성한 사람이 최충(崔冲)이다. 최충이 학도들을 모아 구경(九經)과 삼사(三史)를 가르쳤다는 기록이 ≪고려사≫ <열전(列傳)>에 보이는데, 그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의 재명(齋名)을 통해 진학과정이나 교과내용을 유추한다면, 최충이 이미 오경 이외에 ≪예기≫ 속의 ≪대학≫과 ≪중용≫을 빼내어 ≪논어≫•≪맹자≫와 함께 묶어 사서로 확정, 명명하기 훨씬 전의 일이어서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본격적인 존경(尊經)과 강론풍(講論風)은 예종 때 관학이 성하게 되면서 일어났다. 구재학당의 교과내용은 그러한 학풍을 여는 실마리가 되었다. 고려 중기는 유학 중에서도 특히 경학의 최전성기이었다. 즉 예종•인종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려 유학의 학풍은 존경적인 경향으로 발전하여 그에 따른 강론변의(講論辨義)의 진지한 학풍이 성행하였다. 강경의 내용은 주로 ≪주역≫•≪서경≫•≪시경≫•≪예기≫ 등이었는데, 가장 많이 다루어진 것은 ≪서경≫으로 22강(講)이고, 그 다음이 ≪예기≫ 11강, ≪주역≫ 9강,≪시경≫ 5강의 순이다. 예종•인종•의종 3대의 약 40년에 걸쳐 성행되었던 존경강학의 학풍은 당시의 학문수준을 높여 많은 저술이 나오도록 하였으니, 이때 저술된 책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윤언이(尹彦頤)의 ≪역해(易解)≫, 최윤의(崔允儀)의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 김인존(金仁存)의 ≪논어신의(論語新義)≫ 등이 특히 유명하지만, 이들 중 ≪삼국사기≫만이 현존한다.
조선 초기조선 초기의 권근은 조선 유학의 터전을 닦았고 학문탐구의 신 기원을 연 선구적인 학자이다. 그의 경학연구 범위는 오경과 사서를 아울렀으며, 그의 학문취향은 분석과 종합을 함께 갖추고 있으며 저술 또한 방대하다. 문집 외에도 ≪입학도설(入學圖說)≫•≪시서춘추천견록(詩書春秋淺見錄)≫•≪주역천견록(周易淺見錄)≫•≪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동국사략(東國史略)≫•≪오경구결(五經口訣)≫이 있다. 특히 권근의 ≪입학도설≫은 이황(李滉)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 영향을 미쳤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황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이언적(李彦迪)은 사림파 사상의 이론적 체계화를 달성한 최초의 철학자로서 조한보(曺漢輔)와의 사이에 벌어진'무극태극론변(無極太極論辨)'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경학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는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이 있다.
조선 중기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의 조선사회는 국가의 지도이념인 성리학적 사상체계에 대한 회의가 시작된 하나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윤휴(尹鑴)와 박세당(朴世堂)은 이 시기에 학문적으로 이채를 발하여 단조롭던 당시의 학계를 진동하고, 드디어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누명을 쓰기에 이르른 학자들이다. 이 두 학자에 의해 17세기의 이른바 자주적 학풍은 태동되었던 것이다. 윤휴는 그의 ≪독서기(讀書記)≫ 속에서 ≪중용≫•≪대학≫•≪효경≫•≪시경≫•≪서경≫•≪주례≫•≪예기≫•≪춘추≫ 등의 경서에 대한 연구를 포괄하고 있는데, 혹은 서차(序次)를 분석하고 혹은 장구를 주해하고 혹은 실오(失誤)를 고증하는 등 그 견해가 매우 독창적이고 자주적이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중용≫과 ≪대학≫의 두 경서에 대해 특히 주력하였다. 박세당은 농서(農書)인 ≪색경(穡經)≫을 저술하기도 하고, ≪노자≫의 주석서 ≪신주도덕경(新注道德經)≫과 ≪장자≫의 주석서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注解刪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도가철학의 주해는 둘 다 당시 물의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세당의 대표적 저서인 일명 ≪통설(通說)≫이라 불리는 ≪사변록(思辨錄)≫이 당시의 학계와 정계의 일대 문제로 된 것보다는 심하게 배척되지 않았다. 박세당은 41세 이후부터 관직에의 뜻을 버리고 수락산(水落山) 아래 석천동(石泉洞)에 자주 퇴거하면서 경학연구에 몰두하였는데, 그 연구결과가 52세부터 65세 사이에 나왔다. ≪사변록≫은 이 기간에 나온 그의 저서 중 대표적인 것이다. 송익필(宋翼弼)의 문하에서 예학을 전수받고 뒤에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예론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김집(金集)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한 사람이 곧 김장생(金長生)이다. 김장생은 문하에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의 학자를 배출,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를 이룩하여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기도 하였는데, 그에게는 ≪경서변의(經書辨疑)≫라고 하는 경학연구의 저서가 있다. 그가 71세 때 완성을 본 이 ≪경서변의≫는 1666년에 단행본으로 초간된 바 있는데, ≪소학≫•≪대학≫•≪논어≫•≪맹자≫•≪중용≫•≪서경≫•≪주역≫•≪예기≫ 등 경서 전반에 걸쳐 난해처에 이르러 제가중설(諸家衆說)을 원용하여 그 장단점을 취사선택한 경학연구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18세기로 접어들어서는 김원행(金元行)의 경학연구가 눈에 뜨이는데, 그는 1722년 신임사화에 종조부 김창집(金昌集)이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사사되고 일가가 모두 유배되자 어머니의 배소에 따라가 있으면서 ≪맹자≫와 이이•송시열의 저서를 탐독, 1725년 할아버지가 신원된 뒤에도 시골에 파묻혀 학문에만 힘썼다. 당시 성리학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이간(李柬)의 낙론(洛論)을 지지하고 한원진의 호론(湖論)을 반대하기도 한 그에게는 ≪독서잡록(讀書雜錄)≫•≪중용문답(中庸問答)≫•≪중용강설(中庸講說)≫•≪미호강의(渼湖講義)≫•≪미상경의(渼上經義)≫ 등의 경학연구의 단행본이 있다. 여기 서명의 나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원행의 경학은 무엇보다도 ≪중용≫ 위주라는 특색을 지닌다.
조선 후기 실학의 조(祖)로 일컬어지는 이익(李瀷)에게는 ≪역≫•≪서≫•≪시≫•≪논어≫•≪맹자≫ 등에 질서(疾書)한 저술이 있는데, 예를 들어 ≪맹자질서≫ 하나만 보더라도 이익은 명나라의 호광(胡廣) 등이 찬한 ≪사서대전(四書大全)≫에 대한 비판을 질서 자작의 한 동기로 삼고 있어 언뜻 보기에는 호광의 무리가 주자의 뜻을 정확하게 발전시키지 못한 점만을 비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서문을 읽어가면서 저절로 이해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익의 고구적(考究的)이고 비판적인 태도가 주자설에 대한 이견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당시 집권층의 독경주의적(讀經主義的) 맹종과 고루성에의 비판으로까지 연장되고 있으며, 그것을 발판으로 주자설 자체에 대한 회의에로의 길까지 조심스레 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성해응(成海應)은 영조•정조 시대의 실학자로서 경학에 정통하였는데, 그는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정신으로 한학(漢學)과 송학(宋學)을 절충하여 이를 경학연구의 기본적인 태도로 삼았다. 따라서 그의 경학연구의 대상은 사서와 오경을 구분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 정약용(丁若鏞)에 이르기까지의 조선 사상계는 약간의 반주자학적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체로 주자학에 덮어버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주자학의 조선'이 안고 있는 독특한 과제와 사상적으로 경학적으로 대처한 학자가 바로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성론(性論)>에서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성(性)을 기호(嗜好)로 해석하는 등 다채롭고 독자적인 견해를 많이 제시하였다. 이것은 그가 당시의 국내외 경학연구의 모든 업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집대성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결과이다. 근세의 성리학자들도 상당한 경학의 업적을 남기고 있다. 예컨대, 이원조(李源祚)는 ≪성경(性經)≫을 지었고, 이진상(李震相)은 ≪춘추집전≫과 ≪춘추익전≫을 지어 ≪춘추≫ 연구를 체계화하였다. 곽종석(郭鍾錫)은 ≪다전경의문답(茶田經義問答)≫을, 김황(金榥)은 ≪경학십도(經學十圖)≫를 저술하여 경학의 체계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