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명(한자) 주자학(朱子學)
소표제 정의/개설/전래와 수용/내용 및 특징/ 한국 성리학의 특징과 위치/평가
주제어 유교철학
성격1 사상
성격2 유학
시대 조선
주창자 정몽주(鄭夢周)/안향(安珦)/서경덕(徐敬德)/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이(李珥)/권상하(權尙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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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성명(性命)과 의리(義理)를 탐구하는 유교철학.
개설 유학을 선진(先秦) 유학, 한당(漢唐), 훈고(訓詁) 유학 등으로 세분할 경우 바로 송•명시대(宋明時代)의 유학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곧 성리학이다. 시대사상의 명칭으로는 송명유학(宋明儒學)•송학(宋學)•명학(明學)이라는 용어로 불린다.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학자와 경향에 따라서도 이것은 또 다양한 명칭을 갖는다. 정주학(程朱學)•주자학(朱子學)양명학(陽明學)•이학(理學)•도학(道學)•심학(心學)•신유학(新儒學) 등의 명칭이 그것이다. 정호(程顥)•정이(程이頤) 형제와 주희(朱憙)•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이 이 학문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고, 이들은 또 나름대로 이(理) 또는 심(心)에 더 치중하는 방식을 취했다. 다만 이중에서 송학•정주학•주자학•이학과 송대의 도학이 한 계통이고, 명학•육왕학•양명학•심학이 전자에 대립하여 일어난 계통으로 분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적으로 정주계의 이학이 크게 발달하고 육왕계의 심학은 별로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부분 '성리학'이라고 하면 전자를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같은 정주계의 이학이면서도 한국에서는 용어의 사용에 있어 이학이라는 용어보다는 성리학이라는 용어를 더 즐겨 사용하여 왔다. 이러한 사실도 중국과 조금 다른 점이다. 성리학에서는 본체론적 형이상학을 매우 깊이 파고드는 성향이 강하여, 천명(天命)•태극(太極)•천리(天理)•성명(性命)•의리(義理)•이(理)•기(氣)•음양(陰陽)•심(心)•성(性)•정(情)•인심(人心)•도심(道心)•사단(四端)•칠정(七情) 등을 자주 논한다. 그리고 성의(誠意)•정심(正心)•존심(存心)•양성(養性)•계구(戒懼)•성찰(省察)•신독(愼獨) 등의 방법으로 일신의 수양을 수도승 못지 않게 철저히 한다. 이러한 경향은 과거 공자(孔子)가 취했던 일상적 생활에 관한 실제적 학문을 중요시하여 형이상학적 문제를 기피하던 태도와 달라진 것이고, 수양 역시 공자•맹자(孟子) 시대 이상으로 철저히 한다는 뜻에서 공자가 말한'위기(爲己)'의 표현을 성리학에서 자주 쓰게 되었다. 아무튼 이 모두가 불교와 대항하던 성리학자들이 불교에는 연기(緣起)•법계(法界) 등의 깊은 형이상학과 참선(參禪)같은 철저한 수행이 있음을 깨닫고, 그러한 것이 유학에도 갖추어져 있음을 과시하고자 하던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성리학이 신유학으로 지칭될 만큼, 이전 유학의 경향과 달라졌다는 판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불교와 대립하여 불교의 철학이나 수양에 맞설 유학의 형이상학적 이론과 수기(修己)의 이론이 유학경전 중에도 특히 ≪논어≫•≪맹자≫•≪중용≫•≪대학≫에 많이 담겨 있기 때문에, 성리학자들은 이 네 경전을 유학의 가장 주요한 기본경전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른바'사서(四書)'라는 명칭이 이러한 시각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전래와 수용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전하여지기 시작한 때를 확실히 단언하기는 어렵다. 성리학의 형성을 어디까지에서 끊어 살펴야 하느냐도 불분명하지만, 남송의 주자학 이전 북송 성리학의 경우에는 그 전래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잘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주자학으로서의 성리학의 도입은 충렬왕 때(13세기 후반)부터라고 추정된다. 안향(安珦)은 자신의 호를 회헌(晦軒)이라 하여 주희(호:晦庵)에 대한 존모의 뜻을 표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였다. 거의 같은 무렵 백이정(白頤正)도 역시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도(元都)에 10년간 머물다 돌아오는 길에 성리학관계 서적을 많이 구해왔으며, 권부(權溥) 등은 주희의 ≪사서집주≫등을 전파함은 물론, 나아가 과거에서까지 그것을 채택하게 함으로써 성리학의 도입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뒤이어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으로 이어지는 학자들의 출현기에는 성리학의 이해가 피상적 섭취의 차원을 넘은 전문적 연구의 수준에 오르게 된다. 따라서 다른 한편 성리학을 당시 통치술의 학문적•사상적 토대로 이용하여, 그것을 명실공히 수용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내용 및 특징 (1) 양반사회의 통치이념화 성리학의 한국적 변용 내지 발달은 조선조 성립 이후의 일이다. 사상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초 성리학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역시 역성혁명의 주체인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의 활동이다. 정도전은 조선의 기틀을 확립하려는 시각에서 문화정책을 입안하면서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철저히 불교를 배척하였다. 정도전은 사원과 승려의 폐해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불교신앙의 허구와 미신성 및 불교이론 자체의 부당성에 근거하여 척불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의 <불씨잡변(佛氏雜辨)>•<심기리편(心氣理篇)> 등이 그러한 저술이다. 정도전이 불교를 배척한 이유는 많지만, 그 중에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불교의 멸륜(滅倫)•해국(害國) 성향에 있다. 사회생활을 소홀히 함으로써 유교적인 윤리를 지키지 않고, 국가기강마저 유교보다 소홀히 한다는 것이 배척되어야 할 불교의 폐해라는 것이다. 그런 만큼 불교보다 더 사회윤리를 강화하고, 그리하여 국가에 이로움을 주는 것이 유학이요, 그 중에도 특히 성리학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외 위와 같은 생각은 성리학이 조선의 새 통치원리여야 한다는 신념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그의 이같은 노력으로 성리학은 양반 사대부 중심의 조선사회의 통치이념으로서의 관학(官學)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권근은 ≪입학도설( 入學圖說)≫•≪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등의 저술을 통하여 이와 다른 면모를 보였다. 그는 불교와 같은 타 사상과의 대립의식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대립에 별로 큰 정력을 소비하지 않았다. 비교적 순수한 성리학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리하여 그러한 연구에 큰 업적을 쌓았다.
(2) 의리실천의 도학적 경향 조선조가 기틀을 완전히 잡은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말까지의 기간은 성리학사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사림파(士林派) 학자들의 활동이 크게 돋보인 시기이다. 이른바 사화기(士禍期)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의 많은 사화를 겪으며, 사림파 학자들은 15세기 중엽부터 약 1세기간 성리학 특유의 의리의 실천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한국성리학은 일종의 실천성리학으로서의 도학의 특색을 이 시기에 뚜렷이 지니게 되었다. 사림파 학자들이 성리학의 드높은 의리관을 실천에 옮기려는 경향을 흔히 사림파정신이라 부르지만, 이것은 그 나름의 연원을 가진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육신생육신이 출현하여 드높였던 절의정신에 접목된 것이며, 또 더 나아가서는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보듯이 길재(吉再)가 보존한 고려적 절의를 토양으로 하여 자라난 것이다. 따라서 사림파 학자들이 당시 체질화한 성리학의 규범은 도덕적 규범의 성격이 강한 것이지만, 동시에 정치적 성격을 지닌 규범이기도 하다. 여말 조선초부터 ≪주자가례≫•≪삼강행실도≫•≪오륜도≫가 정책적으로 널리 간행, 반포되고 적극 시행토록 장려되었으며, 이때에 와서는 ≪소학≫이 정책시행 이전에 학자들에게 자아•자발적으로 중요시되었던 사실들도 이 때문이다. ≪소학≫은 당시 사림파 학자들에 의해 철저히 학습, 실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김굉필(金宏弼)남효온(南孝溫) 등이 특히 그런 학자로서 손꼽힐 수 있다. 김굉필은 일찍이 그의 스승인 김종직에게서 ≪소학≫의 중요성을 가르침받았다고 전해지는데, 노년에 이르기까지 실로 일생에 걸쳐 자신을'소학동자(小學童子)'로 지칭하며, 한시도 그것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한다. 한편 조광조(趙光祖)가 이상정치 의미의 지치(至治)를 다시 새롭게 표방하면서 각 방면의 정치적 개혁을 꾀한 것은 성리학적 의리의 정치적 합의를 사림파에서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김굉필의 문하생인 조광조의 이상적 정치는 도(道), 즉 정(正)과 선(善)에 의한 정치를 강조하면서 구체적으로 의리(義利)•공사(公私)의 변별의식을 고취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상정치는 어디까지나 의와 공에 입각한 것으로서 지배층의 사리사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공에 입각한 정치는 무엇보다도 애민(愛民)•위민(爲民)•이민(利民)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정몽주-길재-김숙자(金叔滋)-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의 학통관(學統觀)은 실제 학문의 전수관계나 학문의 업적만으로 설정되고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리학이 지닌 도학적 측면인'의리구현'을 기준으로 설정되고 인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후 조선조에서 수많은 청백리는 물론 애국충절의 학사(學士)•의사(義士)•열사(烈士)가 기라성같이 속출한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다.
(3) 심성 위주의 이론탐구 성리학의 의리실천 차원이 아닌 그 이론적 탐구가 한국적 특색을 독특하게 띨 만큼 본격화한 것도 16세기의 일이다. 16세기의 이른바 사림파 특히 후기사림파 학자들이 또한 성리학 이론탐구의 주역이었다. 특히 이황(李滉)이이(李珥)가 당시의 대표적 학자이다. 그리고 이들이 남긴'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이기해석론'이 당시의 대표적인 이론탐구이었다. 물론 이들에 앞서 서경덕(徐敬德)이라든가 이언적(李彦迪)과 같은 학자들이 성리학 탐구를 매우 높은 수준에서 행하였다. 그러나 질과 양 및 역사적 의미에 이어서 이황•이이 등의 사단칠정론에 비교할 수가 없으므로, 그런 점에서 그것들에 대한 언급은 생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황 등에게도 사단칠정론 외에 우주론에 해당하는 태극설 등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간과해야 하는 것과 같다. 당시의 사단칠정론이란 정지운(鄭之雲)이 그의 <천명도(天命圖)>에 대하여 이황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해 각각'이에서 발(發於理)'하고'기에서 발(發於氣)'한 것이라고 한 해석이 발단이 되었다. 이것을 후에 이황이 사단칠정을 각기'이의 발(理之發)•기의 발(氣之發)'이라고 수정하였다가 기대승(奇大升)과의 논변끝에 사단은'이가 발함에 기가 따른 것(理發而氣隨之)', 칠정은'기가 발함에 이가 탄 것(氣發而理乘之)'이라 해석하였는데, 그뒤 이이가 사단칠정 어느 경우나 모두'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氣發理乘一途)'이라고 한 해석과 이 해석들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는 내용이 곧 사칠론의 핵심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해석형식 자체이기도 하지만, 해석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라 할 수 있다. 해석형식의 수정이 나오게 된 연유가 그 타당성 검토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실로 이 해석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는 이황•기대승 사이에서만도 8년여의 세월에 걸쳐 진행되었거니와, 그뒤 이이와 성혼(成渾)간에 행해진 논변을 비롯하여 학계에서 행해진 검토는 무려 300여년에 걸친 것이었다. 이토록 오랜기간 이 문제를 다룬 학자의 수효는 실로 그뒤의 한국성리학자 거의 전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다. 그리하여 학계는 마침내 이 문제연구를 둘러싸고 학파까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퇴계학파•율곡학파, 또는 주리파(主理派)주기파(主氣派)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4) 예학적 변용과 구현 16세기 말엽 이후 약 1세기 반의 기간은 실상 예학시대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시기였다.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300∼3,000여 종의 온갖 예에 관한 것들을 성리학자들이 연구하면서 어김없이 실천할 것을 역설하고, 그 실천여부를 기준으로 인간 개인을 군자•소인으로 분별, 평가함은 물론, 복상문제(服喪問題) 또는 예송(禮訟)형식이 당쟁까지 전개된 시기가 이때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예가 이토록 중요시된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임진왜란과, 두 차례에 걸친 호란 등으로 하여 사회질서가 문란하여졌던 것을 들 수 있다. 예가 사회질서 수립을 목적으로 안출된 것이고 보면, 이같은 정치•사회적 여건에서는 예를 중요시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원인은 성리학의 학문적 성격 자체에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성리학은 원래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예와 같은 관련을 가지고 발흥한 것이다. 즉 불교의 윤리의식의 박약함을 강조하고 그 근거까지 밝히는 것이 성리학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성리학자들이 중요시하는 예학을 성리학의 형식주의적 객관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성리학이 수용기로 접어들면서부터 특히 조선에서의 관학화 이후로는 예의 인식과 실천이 정책적 차원에서 고취되었던 것이다. 그 고취의 초두에 해당하는 것이 여말부터 이루어진 ≪가례≫시행의 적극적 권장이었다. 그뒤 조선초에는 ≪삼강행실도≫•≪국조오례의≫등이 간행되어, 일종의 국민윤리로서의 성격을 띠고 그 내용의 시행이 역설되었다. 이어서 향교향약의 제도를 이용한 오륜적 예와 미풍양속 지향의 예에 대한 교육이 널리 파급되었다. 그 결과 중종대에는 서민계층에서도 오륜적 예의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17세기 당시 대표적 예학자인 정구(鄭逑)김장생(金長生) 등이 내놓은 저술들은 사실 과거에 보지 못했던 종류의 내용이다. 정구의 ≪오선생예설분류≫나 김장생의 ≪의례문해≫를 통해 한 집안이나 한 나라에 있어서의 계통 통서를 바로하는 일이 예로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는 의식이 이때에 팽배해진다.
(5) 인물성동이론 사단칠정의 논변이 이황•이이 이래 100여 년을 끌어 18세기에 이르렀을 무렵, 성리학계는 또하나의 문제를 둘러싸고 격론을 벌이게 된다. 다름아닌 '인물성 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원래 권상하(權尙夏)의 문인들(일명 江門八學士)사이에서 발단되었다. 그 문인 중 특히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논변화되었다. 문제의 내용은 글자 그대로 인성과 물성이 같은가 다른가를 따지는 것인데, 이간은 서로 같다고 주장한 반면, 한원진은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각각 그 이유를 제시하고 상대를 공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논변을 전개할 당시 동료학자 중 대체로 호서(湖西)의 학자들은 다르다는 주장에 동조한 반면, 낙하(洛下)의 학자들은 같다는 주장에 동조하여, 양편으로 대립, 대결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그리하여 뒷날 이것이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양측 주장의 이면에 실은 한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을 존중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인간을 주축으로 한 동론(同論)에서는 그 본성을 선천적으로 구비한 것임을 주장하여 본성의 절대시를 꾀하고 있다. 본성의 절대시 또는 동물성으로부터의 인간본성의 보호를 노리는 식의 본성존중의 의도가 양측에 공존한다. 이렇게 보면 이 논변은 본성 존중의 의도를 단지 이기의 입장을 달리함으로써 서로 다른 주장으로 나타낸 것으로 이해된다.
(6) 위정척사운동 16세기 말 이황•이이 이후 본격적인 편향을 보이던 주리설과 주기설의 성리학의 두 경향은 18∼19세기에는 유리(唯理)•유기(唯氣)의 이기설을 낳게 된다. 물론 일부의 학설은 극단적인 편향을 기피하여 절충•중도적 성격의 이기설로 이루어진 것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기론에 있어서 극단적인 편향을 보이는 것들이 나타나, 조선조 말기에 오면 모든 것을 오직 이 하나로 풀이하려는 이론이 나오게 되었는가 하면, 반대로 기 하나로 풀이하려는 이론이 나오게 되었다. 우주의 모든 현상을 이일분수(理一分殊)로 혹은 기일분수(氣一分殊)로 설명하는 기정진(奇正鎭)•임성주(任聖周)의 이론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러한 성리학의 극단적 편향, 그 중에도 유리론의 편향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것 역시 한국성리학의 한 특색으로 기록되어야 할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리학이 19세기의 격변, 격동을 맞이하여서는 실제적인 대응책을 안출하는 데 있어서는 사실상 무기력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성리학의 현실극복능력에 회의를 갖는 학자들이 늘어나면서, 성리학의 위와 같은 철학적 탐구들은 공리•공론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한가지 조선 말기 성리학의 현실대응이 반드시 무기력했다거나 전무했다고 할 수 없음에 유의해야 한다. 천주교를 비롯한 서구의 문물이 유입되고 특히 제국주의로 무장한 서구의 위협 및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그에 대응한 성리학계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그 움직임이 곧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으로 불리는 것이다. 한말의 이항로(李恒老)•기정진•이진상(李震相)•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유인석(柳麟錫) 등의 학자들은 다시 천주교의 우주관•인생관 및 윤리관에 대립하면서, 흔들리는 국기(國基)를 공고히 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유교의 삼강오륜식 예의식과 전혀 다른 천주교의 사상을 오랑캐 또는 금수의 사상이라고 배척하는 동시에, 서구와 일본의 세력을 적대시하여 쇄국과 주전(主戰)과 척화(斥和)로써 대항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사고는 의병의 정신적 기초를 닦은 결과가 되었고, 직접 목숨을 바쳐 의병장으로까지 활약하였다.
한국 성리학의 특징과 위치 (1) 정주학 절대우위의 특징 한국성리학의 특징으로서 무엇보다 먼저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정주계 성리학이 거의 일변도로 석권하였다는 점이다. 육왕계의 심학은 비록 15세기 말엽부터 전하여 어느 정도 전파되었지만, 그 발달 정도나 세력은 정주계와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였다.
(2) 주지주의(主知主義)의 경향 정주학과 육왕학과의 차이는 대체로 전자가 주지주의의 경향이 강한 데 비하여, 후자는 주정주의(主情主義)의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국성리학의 특징이 정주학 절대우위라는 것은 곧 한국성리학에 주지주의의 경향이 그만큼 두드러짐을 의미한다. 사실 사단칠정론이라든지, 인물성동이론같은 것은 이미 밝힌 대로 학파의 형성을 가져올 정도의 많은 학자들이 200∼300년여에 걸쳐 그 타당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그런 만큼 이것들은 중국이나 일본의 성리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심오하고 풍부한 내용의 이론을 담게 되었다.
(3) 예 절대시의 풍토 사실 한국의 성리학은'예론탐구와 그 실현'을 위하여 발전되어 온 과정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예사상에 투철하였다. 성리학의 한국화란 따지고 보면 정몽주의 ≪주자가례≫의 실천 및 권근의 ≪예기천견록≫의 저술로부터 시작되어, 정구•김장생•박세채(朴世采) 등의 예론에서 그 연구의 절정을 이룬다. 한편 윤휴(尹鑴)송시열(宋時烈) 등의 예송에 의한 당쟁에서 예 실현을 향한 열의의 극치를 보게 된다. 일본의 경우는 비교조차 할 필요없는 형편이고, 중국에서나 이와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겠는데, 그것도 이토록 목숨을 걸 정도로 심각히 종교화된'예 숭상의 사조'에는 미치지 못한다.
(4) 명분론적 사고의 팽배 예가 명분에 입각한 합리적 사고의 산물이라면, 이러한 예 숭상의 풍토에서 명분론적 합리주의정신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명분론적 합리주의의 사고는 경험사실과 관계없는 순전한 합리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고 보면 과거 우리의 사고방식이 합리적인 성질을 갖는 것도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사실성 내지 과학성을 결여한 것인지, 또 얼마나 실리•실용•실증의 정신을 결여한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대외관계에 있어 때로 상당한 세력을 떨쳤던 모화사대주의자(慕華事大主義者)들의 주체의식의 상실현상은 그 좋은 실례가 된다. 그러한 주체의식의 상실현상은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명분론의 사고방식에 무비판적으로 몰두 맹종한 나머지, 그 배후에 가려진 춘추존양적(春秋存攘的) 한족(漢族) 중심의 사고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결과라 할 것이다. 이밖에도 한국성리학의 특징과 위치에는 주리론(主理論)이 보수성과 인존정신(人尊精神)의 지향이 있다.
평가 이상과 같은 입장에서 보면, 오늘에 살릴 수 있는 한국성리학의 장점들 역시 이런 특징들 속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것은 곧 여러 장점들, 특히 그 장점이 오늘에 살려 좋다고 생각되는 특징들로 정하여질 것이다. 그러한 장점으로 판정되는 특징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국성리학의 위치가 더 높은 자리에 위치할 수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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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창자 김정희(金正喜)/정약용(丁若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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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중국 송•명(宋明)의 유학자들이 공리공론을 일삼은 데 반발하여 생겨난 청나라 때의 대표적 학풍.
성립배경 청나라 초의 학자들은 양명학의 폐단과 명나라의 멸망에 자극되어 경세(經世)를 위해서 실사(實事)에 즉(卽)하여 옳은 것을 구하는 것, 즉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용으로 하는 실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그 학문적 배경으로서 송•명 이학자들의 연구방법을 배척하고, 한•당나라의 훈고학(訓詁學)을 계승하여 실증적인 연구방법을 채택하였는데, 그 실증적인 연구방법이 발전하여 청대의 고증학이 되었다. 그 주류는 경학을 중심으로 하여 절강(浙江)의 서쪽에서 일어난 이른바 절서학파(浙西學派)였으며, 그 개조는 고염무(顧炎武)였다. 고염무의 학문연구 방법의 특징으로는 귀창(貴創)•박증(博證)•치용(致用)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귀창'이란 창의성을 중히 여긴다는 말이며, 박증이란 어떤 일을 논할 때 반드시 널리 증거를 찾아 확인하는 과학적 연구방법이고, 치용이란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것으로서 공리공론을 일삼는 태도에서 탈피하여 행사와 관련된 학문을 함으로써 학문과 사회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려는 학적 태도인 것이다. 이후 절서학파는 호위(胡渭)•염약거(閻若璩)에 의하여 크게 발전하였으며, 건륭(乾隆)•가경(嘉慶)시대에 이르러 혜동(惠棟)•전대흔(錢大昕)을 중심으로 한 오파(吳派)와 대진(戴震)•단옥재(段玉裁)•왕염손(王念孫)•왕인지(王引之)를 중심으로 한 환파(晥派)로 나누어지면서, 고증학의 전성기를 맞아 일대의 학계를 풍미하게 되었다. 한편 사학(史學)을 중심으로 하는 절동학파(浙東學派)는 황종희(黃宗羲)에서 비롯되어 만사동(萬斯同)•전조망(全祖望)을 거쳐 장학성(章學誠)에 이르지만, 고증이 그 본령은 아니었다. 이러한 고증학도 어디까지나 문헌연구방법에 있어서의 문헌의 고증에 치우친 나머지 사상적인 면에 있어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전래 중국에서 고증학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대는 조선 후기에 해당되는데,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창업 이래 지속되어왔던 정치적•경제적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역사적 시대상에 민감한 학자들은 정치적•경제적 대응책을 모색하게 되었고, 그 결과 각 분야에서 실학자들의 학문적 집대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른바 경세치용파로 일컬어지는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정약용(丁若鏞)의 ≪경세유표(經世遺表)≫, 이용후생파로 일컬어지는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議)≫,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와같이 정치적•경제적 대응책을 모색하던 실학자들은 그들의 학문적 기반이 되는 유교경전에 대한 전통적인 연구방법, 즉 주자학적 연구방법과 다른 새로운 연구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청조의 고증학이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 고증학을 이어받아 대성한 학자로는 김정희(金正喜)와 정약용을 들 수 있다. 김정희는 24세 때 중국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고증학의 대가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게 되었고, 수 차례에 걸친 교유 끝에 그들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옹방강은 금석학과 서학(書學)의 대가였는데, 김정희가 후일 금석학에 몰두하게 된 것은 이에 영향받은 바가 컸을 것이다. 이익의 경세치용파에 근거하면서 천주교 및 이용후생파의 농공기술의 혁신과 중상이론을 흡수하고 경세치용학을 완성하여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정약용 역시 실학의 부동하고 확고한 논리적 근거를 구축하기 위하여 모든 경전이나 경학에 대한 새로운 연구방법을 모색한 나머지, 청나라의 고증학적인 연구방법에 기울게 되었다. 정약용은 강진으로 귀양갔다가 47세 때 다산(茶山)으로 옮기면서부터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10년간, 한위(漢魏)로부터 명청(明淸)까지의 경전에 대한 주석들을 모으고 이를 참조하여 그의 경학을 완성하였다. 김정희와 정약용 이후 한국의 고증학은 학파를 형성하는 단계에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이진상(李震相)기정진(奇正鎭)이항로(李恒老)임성주(林聖周) 등에 의하여 성리학이 재연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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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목명 : 경학(經學)

☀ 주제어 : 유학/주자학/예학/실학/송시열

☀ 성격 : 사상.유학

☀ 시대 : 통일신라/고려/조선

☀ 정의

유교 경서(經書)의 뜻을 해석하거나 천술(闡述)하는 학문. 경서에 관한 학문적 작업의 전부를 포함하는 하나의 학문분야의 명칭이다.



☀ 유래

처음에는 '경'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논어≫나 ≪맹자≫에서도 보통명사를 그대로 고유명사화 하여 ≪시(詩)》 또는 ≪서(書)≫라고만 불렀으며, ≪시경≫이나 ≪서경≫으로는 부르지 않았다. 경서의 호칭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다. ≪서경≫의 경우 고대에는 ≪서≫라고만 하다가, 한나라 때부터 ≪상서(尙書)≫라 하였고, 명나라 이후로 ≪서경(書經)≫이란 칭호가 확정되었다. 모든 경서에 '경'자를 붙인 것은 아니지만, 경서를 '경'으로 통칭하는 것은 ≪장자(莊子)≫의 천운(天運)편에서의 일이다. 유가 가운데에서 '경'으로 부른 것은 역시 전국시대 말기에 나온 순자(荀子)가 처음으로 생각된다. 전국시대에도 도가•법가•묵가의 학문에 대립한 유(儒), 즉 유학만 있었지 경학이란 일컬음까지는 없었다. 문헌 위에 '경학'이라는 두 글자가 나타난 것으로 오래된 것은 ≪한서(漢書)≫ 유림전(儒林傳)이다. 구양생(歐陽生)으로부터 ≪상서≫, 즉 ≪서경≫의 학(學)을 받고, 또 공안국(孔安國)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한 예관(禮官)이 "무제(武帝)를 처음 만났을 때 경학을 말했다."고 한 것을 보면 '경학'이라는 일컬음이 문헌에 정착한 것은 전한(前漢) 무제시대이다. 이는 경서의 개념 자체가 이 시대에 성립된 것과 관련된다.


☀ 발전

(1) 중국경학의 흐름 진나라 때 분서갱유로 ≪악경(樂經)≫이 망실되어 전한 초에 오경(五經)의 일컬음이 있다가 후한 이후로는 '경'의 영역이 점차 확대되어 왔다. 흔히 진시황시대를 경학의 공백시대로 보기 쉬우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진시황은 '박사관(博士官)'이라고 일컫는 학술교육담당기관을 중앙에 설치하는 한편, 유학을 포함한 백가(百家)의 문헌을 적극적으로 수집하였다. 이렇게 확보한 막대한 장서가 뒤에 학술상 대단히 쓸모가 있게 되어 진나라 때에 학문을 비록 지배층의 독점물로 하였을 망정 학문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전한 초에 금문상서(今文尙書) 29편을 전수한 복생(伏生)은 본래 진의 박사였다. 후한 반고(班固)의 ≪백호통(白虎通)≫에는 ≪역(易)≫•≪서(書)≫•≪시(詩)≫•≪예(禮)≫•≪악(樂)≫을 오경이라고 일컫고 있었으나, 당(唐)의 서견(徐堅) 등이 극찬한 ≪초학기(初學記)≫에는 진화 뒤로 ≪악경≫은 없어져 ≪시≫•≪서≫•≪역≫•≪춘추(春秋)≫•≪예기(禮記)≫의 5종을 총칭하여 오경이라 하고 있다. 이것이 지금 오경이라 부르는 것과 일치한다. 이 가운데 ≪예≫는 전한 무제 때에는 ≪의례(儀禮)≫를 일컬었던 것이 후세에 와서는 ≪예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되었으며, ≪춘추≫는 ≪공양전(公羊傳)≫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뒤에 ≪좌씨전(左氏傳)≫으로 바뀌었다.

전한 무제 이후 선제(宣帝) 때에는 학자들에게 명하여 오경의 내용을 강론하게 하였다고 한다. 오경 이외에 삼경•사경•칠경•구경•십경•십일경•십이경•십삼경•십사경•십칠경•이십일경 등의 통칭이 있으나,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것으로는 삼경(시•서•역)과 구경과 십삼경이 있다. 구경은 몇 가지 이설이 있는데, 그 중 당나라 육덕명(陸德明)의≪경전석문서록(經典釋文序錄)≫에 따르면 ≪역≫•≪서≫•≪시≫•≪주례(周禮)≫•≪의례≫•≪예기≫•≪춘추≫•≪효경(孝經)≫•≪논어≫의 아홉가지를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역≫•≪서≫•≪시≫에 삼례(三禮: 주례•의례•예기)와 춘추삼전(春秋三傳: 좌씨전•공양전•곡량전)을 합해 구경이라 하는 것이 통설이다. 청나라의 피석서(皮錫瑞)는 ≪경학역사(經學繹史)≫에서 "당 때에 삼례와 삼전을 나누고 여기에 ≪역≫•≪서≫•≪시≫를 합하여 구경으로 삼고, 송 때에 여기에 ≪논어≫•≪효경≫•≪맹자≫•≪이아(爾雅)≫를 보태어 십삼경을 삼았다."고 하였거니와 십삼경은 이른바 경의 총칭으로 ≪역경(易經)≫•≪상서, 서경≫•≪모시(毛詩), 시경≫•≪춘추좌씨전≫•≪춘추공양전≫•≪춘추곡량전≫•≪주례≫•≪의례≫•≪예기≫•≪효경≫•≪논어≫•≪맹자≫•≪이아≫의 13종을 말한다.

경에 대한 1차 주석으로서의 주(注)와 2차 주석으로서의 소(疏 : 正義 라고도 함)를 합한 것이 주소(注疏)인데, 한•진(晉) 때에는 주가, 당•송 때에는 소가 성행하였다. 경학에는 숙명처럼 붙어다니는 난제가 있다. 그것은 금문학(今文學)과 고문학(古文學)의 다툼이다. 행정능률 향상을 위해 진대에 만들어지고 한대에 개량된 간체문자(簡體文字), 즉 예서(隸書)가 금문이고 그 이전의 구체문자(舊體文字)가 고문인데, 경학 성립의 시기에는 같은 경서에 금문과 고문의 두 계통이 병존하고 있었다. 진대 박사관이나 한대 오경박사 계통의 관학이 주로 간체문자 계통이고, 분서(焚書)를 면한 민간 계통이 주로 구체문자의 계통이었다. 자체의 차이는 먼저 해석의 차이를 낳고 나아가 학파의 대립으로 번지고, 드디어는 정치세력까지 껴안은 항쟁으로 확대되어 경학은 내란시대에 돌입하게까지 된다. 전한 무제가 인가한 오경박사는 물론 금문파이었는데, 그 뒤로부터 2백년 가까이 미치는 고문파의 반격은 정치면에서 신(新)이라는 독자적인 정권의 수립을 가져올 정도로 금문파와 대등한 지위를 차지하기까지에 이른다. 그리고 금문파와 고문파의 화해조건도 서서히 정비되어가고 있었다. 후한 정현(鄭玄)의 오경 전반에 걸친 방대한 주석작업이 오경의 무류성과 자기 완결성에대한 보증의 작업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같이 경학사상 유례 없는 큰 업적을 남긴 정현은, 첫째로 경은 말할 것도 없고 이 경에 대한 보완적 성격을 가지는 전(傳)까지를 포함하는 경학의 모든 근본 문헌에 대하여 뛰어난 문자학에 근거한 종합적 해석을 확립하였으며, 둘째로는 독특한 '예(禮)'의 관념을 축으로 하는 경학 전 영역의 체계화에 힘썼다. 경학이 곧 사상의 체계이고 철학체계이었듯이 경학의 기대되는 국가에의 공헌도는 여기에서 비약적으로 상승되었다. 이것은 금문파와 고문파의 화해조건이 서서히 성숙되어온 결과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정현의 학문적인 넓은 시야 속에서 금문학•고문학의 후유증 없는 합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뒤로 노장(老莊)과 불교 등의 유행으로 유교의 지위가 위협받는 경우에라도, 유교는 그때마다 시대의 상황을 스스로 오경의 해석학 속에서 도입하여 그것으로 경서의 권위를 지켜 나왔다. 예를 들어 당초(唐初)의 공영달(孔穎達) 등이 지은 흠정(欽定)의 주석서 ≪오경정의(五經正義)≫에는 육조시대의 노불(老佛) 유행기의 영향인듯한 해석이 보이고도 있으며,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注)≫는 오경 중심으로부터 사서 중심으로의 획기적인 전환을 이룬 저술이기도 하거니와, 그 속에는 노•불을 받아들여 지양한 새로운 철학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신유학(新儒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철학적으로 면모를 일신한 송대 이후의 성리학 등을 거쳐 청대의 사상사학(思想史學)의 전반적 연구의 발전은 경학의 독자성 확보란 면에서 여러가지로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 것만은 틀림없다. 오경은 흔히 ≪역≫•≪서≫•≪예기≫•≪춘추≫ 또는 ≪시≫•≪서≫•≪역≫•≪예기≫•≪춘추≫의 순서로 일컫는 것이 상례이지만, 우리나라 이이(李珥)의≪격몽요결 (擊蒙要訣)≫ <독서장>에 보이는 순서에 따르면 ≪시경≫•≪예기≫•≪서경≫•≪역경≫•≪춘추≫의 순으로 되어 있다.

(2) 한국경학의 흐름조선 초기 권근(權近)의 학문 속에는 오경 중심의 경학과 사서 중심의 이학(理學)의 공존현상을 볼 수 있는데, 권근을 분수령으로 하여 그 이전의 경학이 오경 중심인 데 비하여, 그 이후 경학은 사서 중심의 이학의 테두리 속에서 이루어졌다. 성리학 전성기의 경학의 주제는 주로 사서, 그 중에서도 특히 ≪대학≫을 중심으로 한 것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내려와서는 이른바 실학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경학의 연구범위는 다시 크게 확대되기에 이른다. 청대의 사상사학과 고증학이 실학자들의 경학연구에 크게 참고가 되었다.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고구려에서 처음으로 태학(太學)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한 것은 소수림왕 2년(372)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태학제도가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태학제도가 박사(博士, 교수)를 두고 경사(經史)를 교수하며, 특히 오경으로써 중요과목을 삼고 있었으니 고구려의 태학제도의 면모를 추정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한사군을 통해 한족(漢族)의 문화에 크게 자극되어서인지, 고구려 사람들이 서적을 좋아하고 시골 벽지에도 경당(扃堂)을 세워 자제들의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유교가 이미 오경 중심으로 경학화, 한학화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경우에는 ≪일본서기(日本書記)≫ 계체천황(繼體天皇) 7년의 기록과 10년의 기록, 그리고 흠명천황(欽明天皇) 15년의 기록 등을 미루어보아 백제의 오경박사의 제도가 있어 이 시기 유학의 중심이 오경연구에 있었다고 짐작된다.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문화적 후진성을 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6세기초 이전의 신라는 선진(先秦)시대의 학술이나 고유문화의 바탕 위에 있었던 것 같고, 그뒤 순장 풍속을 금하고 율령과 관제를 갖춘 것을 보면 한대 문화는 6세기초 이후에 들어온 것 같다. 신라에 국학을 둔 것은 앞에서도 삼국통일 이후인 신문왕 2년의 일이다. 이는 입당유학생(入唐留學生)이 처음 출국한 해(640)보다 40년이나 뒤이다. 따라서 신라 국학의 운영은 자연히 당의 제도를 모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교과과목으로는 역시 경서와 ≪문선(文選)≫이 주가 되었고, 산학(算學)•삼사(三史)•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가 그 다음이 되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3과(科)로 분류되어 각기 그 진로도 달라졌다. ① 갑 : ≪예기≫•≪주역≫•≪논어≫•≪효경≫ ②을 : ≪좌전≫•≪모시≫•≪논어≫•≪효경≫ ③ 병: ≪상서≫•≪문선≫•≪논어≫•≪효경≫으로서 3과에 있어 ≪논어≫와 ≪효경≫은 공통과목이며 각 과에 따라 중점을 달리하고 있다. 중국 당제의 경우에는 대경(大經)•중경(中經)•소경(小經) 등으로 구분하여, ① 대경 : ≪예기≫•≪춘추좌씨전≫ ② 중경 : ≪시경≫•≪주역≫•≪의례≫ ③ 소경 : ≪주례≫•≪상서≫•≪춘추공양전≫•≪춘추곡량전≫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과 약간 다르다. 788년(원성왕4)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두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정교(政敎)면에서 확립된 고려 유학의 토대 위에서 교학(敎學)면에서의 고려 유학을 대성한 사람이 최충(崔冲)이다. 최충이 학도들을 모아 구경(九經)과 삼사(三史)를 가르쳤다는 기록이 ≪고려사≫ <열전(列傳)>에 보이는데, 그의 구재학당(九齋學堂)의 재명(齋名)을 통해 진학과정이나 교과내용을 유추한다면, 최충이 이미 오경 이외에 ≪예기≫ 속의 ≪대학≫과 ≪중용≫을 빼내어 ≪논어≫•≪맹자≫와 함께 묶어 사서로 확정, 명명하기 훨씬 전의 일이어서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본격적인 존경(尊經)과 강론풍(講論風)은 예종 때 관학이 성하게 되면서 일어났다. 구재학당의 교과내용은 그러한 학풍을 여는 실마리가 되었다. 고려 중기는 유학 중에서도 특히 경학의 최전성기이었다. 즉 예종•인종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려 유학의 학풍은 존경적인 경향으로 발전하여 그에 따른 강론변의(講論辨義)의 진지한 학풍이 성행하였다. 강경의 내용은 주로 ≪주역≫•≪서경≫•≪시경≫•≪예기≫ 등이었는데, 가장 많이 다루어진 것은 ≪서경≫으로 22강(講)이고, 그 다음이 ≪예기≫ 11강, ≪주역≫ 9강,≪시경≫ 5강의 순이다. 예종•인종•의종 3대의 약 40년에 걸쳐 성행되었던 존경강학의 학풍은 당시의 학문수준을 높여 많은 저술이 나오도록 하였으니, 이때 저술된 책들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윤언이(尹彦頤)의 ≪역해(易解)≫, 최윤의(崔允儀)의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 김인존(金仁存)의 ≪논어신의(論語新義)≫ 등이 특히 유명하지만, 이들 중 ≪삼국사기≫만이 현존한다.

조선 초기조선 초기의 권근은 조선 유학의 터전을 닦았고 학문탐구의 신 기원을 연 선구적인 학자이다. 그의 경학연구 범위는 오경과 사서를 아울렀으며, 그의 학문취향은 분석과 종합을 함께 갖추고 있으며 저술 또한 방대하다. 문집 외에도 ≪입학도설(入學圖說)≫•≪시서춘추천견록(詩書春秋淺見錄)≫•≪주역천견록(周易淺見錄)≫•≪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동국사략(東國史略)≫•≪오경구결(五經口訣)≫이 있다. 특히 권근의 ≪입학도설≫은 이황(李滉)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 영향을 미쳤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황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이언적(李彦迪)은 사림파 사상의 이론적 체계화를 달성한 최초의 철학자로서 조한보(曺漢輔)와의 사이에 벌어진'무극태극론변(無極太極論辨)'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경학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는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이 있다.

조선 중기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의 조선사회는 국가의 지도이념인 성리학적 사상체계에 대한 회의가 시작된 하나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윤휴(尹鑴)와 박세당(朴世堂)은 이 시기에 학문적으로 이채를 발하여 단조롭던 당시의 학계를 진동하고, 드디어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누명을 쓰기에 이르른 학자들이다. 이 두 학자에 의해 17세기의 이른바 자주적 학풍은 태동되었던 것이다. 윤휴는 그의 ≪독서기(讀書記)≫ 속에서 ≪중용≫•≪대학≫•≪효경≫•≪시경≫•≪서경≫•≪주례≫•≪예기≫•≪춘추≫ 등의 경서에 대한 연구를 포괄하고 있는데, 혹은 서차(序次)를 분석하고 혹은 장구를 주해하고 혹은 실오(失誤)를 고증하는 등 그 견해가 매우 독창적이고 자주적이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중용≫과 ≪대학≫의 두 경서에 대해 특히 주력하였다. 박세당은 농서(農書)인 ≪색경(穡經)≫을 저술하기도 하고, ≪노자≫의 주석서 ≪신주도덕경(新注道德經)≫과 ≪장자≫의 주석서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注解刪補)≫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도가철학의 주해는 둘 다 당시 물의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세당의 대표적 저서인 일명 ≪통설(通說)≫이라 불리는 ≪사변록(思辨錄)≫이 당시의 학계와 정계의 일대 문제로 된 것보다는 심하게 배척되지 않았다. 박세당은 41세 이후부터 관직에의 뜻을 버리고 수락산(水落山) 아래 석천동(石泉洞)에 자주 퇴거하면서 경학연구에 몰두하였는데, 그 연구결과가 52세부터 65세 사이에 나왔다. ≪사변록≫은 이 기간에 나온 그의 저서 중 대표적인 것이다. 송익필(宋翼弼)의 문하에서 예학을 전수받고 뒤에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예론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김집(金集)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한 사람이 곧 김장생(金長生)이다. 김장생은 문하에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의 학자를 배출,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를 이룩하여 조선 유학계에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기도 하였는데, 그에게는 ≪경서변의(經書辨疑)≫라고 하는 경학연구의 저서가 있다. 그가 71세 때 완성을 본 이 ≪경서변의≫는 1666년에 단행본으로 초간된 바 있는데, ≪소학≫•≪대학≫•≪논어≫•≪맹자≫•≪중용≫•≪서경≫•≪주역≫•≪예기≫ 등 경서 전반에 걸쳐 난해처에 이르러 제가중설(諸家衆說)을 원용하여 그 장단점을 취사선택한 경학연구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18세기로 접어들어서는 김원행(金元行)의 경학연구가 눈에 뜨이는데, 그는 1722년 신임사화에 종조부 김창집(金昌集)이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사사되고 일가가 모두 유배되자 어머니의 배소에 따라가 있으면서 ≪맹자≫와 이이•송시열의 저서를 탐독, 1725년 할아버지가 신원된 뒤에도 시골에 파묻혀 학문에만 힘썼다. 당시 성리학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이간(李柬)의 낙론(洛論)을 지지하고 한원진의 호론(湖論)을 반대하기도 한 그에게는 ≪독서잡록(讀書雜錄)≫•≪중용문답(中庸問答)≫•≪중용강설(中庸講說)≫•≪미호강의(渼湖講義)≫•≪미상경의(渼上經義)≫ 등의 경학연구의 단행본이 있다. 여기 서명의 나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원행의 경학은 무엇보다도 ≪중용≫ 위주라는 특색을 지닌다.

조선 후기 실학의 조(祖)로 일컬어지는 이익(李瀷)에게는 ≪역≫•≪서≫•≪시≫•≪논어≫•≪맹자≫ 등에 질서(疾書)한 저술이 있는데, 예를 들어 ≪맹자질서≫ 하나만 보더라도 이익은 명나라의 호광(胡廣) 등이 찬한 ≪사서대전(四書大全)≫에 대한 비판을 질서 자작의 한 동기로 삼고 있어 언뜻 보기에는 호광의 무리가 주자의 뜻을 정확하게 발전시키지 못한 점만을 비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서문을 읽어가면서 저절로 이해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익의 고구적(考究的)이고 비판적인 태도가 주자설에 대한 이견을 추호도 용납하지 않는 당시 집권층의 독경주의적(讀經主義的) 맹종과 고루성에의 비판으로까지 연장되고 있으며, 그것을 발판으로 주자설 자체에 대한 회의에로의 길까지 조심스레 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성해응(成海應)영조•정조 시대의 실학자로서 경학에 정통하였는데, 그는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정신으로 한학(漢學)과 송학(宋學)을 절충하여 이를 경학연구의 기본적인 태도로 삼았다. 따라서 그의 경학연구의 대상은 사서와 오경을 구분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 정약용(丁若鏞)에 이르기까지의 조선 사상계는 약간의 반주자학적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체로 주자학에 덮어버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주자학의 조선'이 안고 있는 독특한 과제와 사상적으로 경학적으로 대처한 학자가 바로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성론(性論)>에서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성(性)을 기호(嗜好)로 해석하는 등 다채롭고 독자적인 견해를 많이 제시하였다. 이것은 그가 당시의 국내외 경학연구의 모든 업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집대성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결과이다. 근세의 성리학자들도 상당한 경학의 업적을 남기고 있다. 예컨대, 이원조(李源祚)는 ≪성경(性經)≫을 지었고, 이진상(李震相)은 ≪춘추집전≫과 ≪춘추익전≫을 지어 ≪춘추≫ 연구를 체계화하였다. 곽종석(郭鍾錫)은 ≪다전경의문답(茶田經義問答)≫을, 김황(金榥)은 ≪경학십도(經學十圖)≫를 저술하여 경학의 체계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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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명(한자) 강화학파(江華學派)
소표제 정의/형성/특징/의의
주제어 양명학/실학/정제두
성격1 사상
성격2 유학
시대 조선
주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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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 정제두(鄭齊斗)가 당시 주자학(朱子學)의 권위주의적인 학풍에 대하여 대안으로 선택한 양명학(陽明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강화도를 중심으로 학풍을 펼친 데서 연유한 조선의 양명학파.
형성 명나라의 왕수인(王守仁)에 의하여 주창된 유학의 한 계통인 양명학은 송나라의 육구연(陸九淵)의 심학(心學)을 계승한 것이다. 당시 왕수인은 송나라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주자학의 주지주의적(主知主義的)인 학풍을 비판하고 주자학과 대립되는 심학을 창안하였다. 이 양명학이 조선에 유입된 것은 이미 왕수인이 살아 있을 때인 1521년(중종 16)보다 앞선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주자학을 건국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에서 양명학은 이단시 되어 주류에 들지 못하고 주변에서 연구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조부터 정조 연간에 생존했던 정제두에 이르러 하나의 학파로 독자적인 형성을 보게 된다. 정제두는 조선의 주자학이 학문을 연구하는 데 소홀하고 영달과 공리로 흐르는 경향을 비판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노론소론 등 파당싸움을 배격한 것이다. 정제두에 의해 형성된 강화학파는 그의 자손과 제자들에게 이어져 이후 200년간 계속되었다.
특징 정제두는 양명학이 가지고 있는 이론적인 특징을 그대로 이어서 주자학처럼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의거하지 않고 일원론적(一元論的)인 사유를 기반으로 하였다. 하늘〔天〕과 사람〔人〕은 심성(心性)에서 벗어나지 않는 본래 일원(一元)이므로, 주자학처럼 물리(物理)를 강조하여 그 본원(本源)을 잃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런 일원론적 사유는 이기(理氣)와 성정(性情),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지(知)와 행(行), 심(心)과 이(理) 등을 서로 상즉(相卽)하는 관계로 보며, 그 모든 것은 심체(心體)의 작용이 아닌 것이 없다는 심즉리(心卽理)를 표방한다. 이기가 일원적인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이는 마음〔心〕의 이, 마음의 기(氣)가 되어 심(心)에 의하여 두 가지가 통일되고 있다. 그런데 정제두 자신은 왕양명의 사후 분파된 양명좌파(陽明左派)와 양명우파(陽明右派) 가운데 매우 혁명적인 사상으로 흐른 좌파와는 달리 오히려 봉건적 신분주의를 옹호하는 정통적이며 보수적인 우파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러나 강화학파의 학문경향은 그보다 자유스러워서 이긍익(李肯翊)의 주체적 사관은 이 양명우파의 영향을 받은 반면, 이광려(李匡呂)•이충익(李忠翊)•이건창(李建昌) 등 공안파(公安派)의 성령문학(性靈文學)은 양명좌파인 이지(李贄)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 이광사(李匡師)의 정음(正音) 연구나, 강화학파인들의 실학자들과 교유는 조선 후기 실학(實學)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의의 양명학은 주자학의 주지주의적 엄격함을 비판하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성정에 중심을 두면서 그 실천을 강조한 만큼, 강화학파의 창안자인 정제두와 그 학파 역시 이런 특징과 유사하다. 그러나 강화학파는 정제두 중심의 가학(家學)으로 학파를 형성하였기 때문에 주자학의 권위에 대해서 표면으로 나서지 못하고 그 정신만 이어졌다. 강화학파의 사상은 어느 정도 내재적인 근대적 사상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에 영향을 끼쳤고 조선혼(朝鮮魂)을 고취한 정인보(鄭寅普)의 국학(國學)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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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명(한자) 성리학(性理學)
소표제 정의/개설/전래와 수용/내용 및 특징/ 한국 성리학의 특징과 위치/평가
주제어 유교철학
성격1 사상
성격2 유학
시대 조선
주창자 정몽주(鄭夢周)/안향(安珦)/서경덕(徐敬德)/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이(李珥)/권상하(權尙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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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성명(性命)과 의리(義理)를 탐구하는 유교철학.
개설 유학을 선진(先秦) 유학, 한당(漢唐), 훈고(訓詁) 유학 등으로 세분할 경우 바로 송•명시대(宋明時代)의 유학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곧 성리학이다. 시대사상의 명칭으로는 송명유학(宋明儒學)•송학(宋學)•명학(明學)이라는 용어로 불린다.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학자와 경향에 따라서도 이것은 또 다양한 명칭을 갖는다. 정주학(程朱學)•주자학(朱子學)양명학(陽明學)•이학(理學)•도학(道學)•심학(心學)•신유학(新儒學) 등의 명칭이 그것이다. 정호(程顥)•정이(程이頤) 형제와 주희(朱憙)•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이 이 학문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고, 이들은 또 나름대로 이(理) 또는 심(心)에 더 치중하는 방식을 취했다. 다만 이중에서 송학•정주학•주자학•이학과 송대의 도학이 한 계통이고, 명학•육왕학•양명학•심학이 전자에 대립하여 일어난 계통으로 분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적으로 정주계의 이학이 크게 발달하고 육왕계의 심학은 별로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부분 '성리학'이라고 하면 전자를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같은 정주계의 이학이면서도 한국에서는 용어의 사용에 있어 이학이라는 용어보다는 성리학이라는 용어를 더 즐겨 사용하여 왔다. 이러한 사실도 중국과 조금 다른 점이다. 성리학에서는 본체론적 형이상학을 매우 깊이 파고드는 성향이 강하여, 천명(天命)•태극(太極)•천리(天理)•성명(性命)•의리(義理)•이(理)•기(氣)•음양(陰陽)•심(心)•성(性)•정(情)•인심(人心)•도심(道心)•사단(四端)•칠정(七情) 등을 자주 논한다. 그리고 성의(誠意)•정심(正心)•존심(存心)•양성(養性)•계구(戒懼)•성찰(省察)•신독(愼獨) 등의 방법으로 일신의 수양을 수도승 못지 않게 철저히 한다. 이러한 경향은 과거 공자(孔子)가 취했던 일상적 생활에 관한 실제적 학문을 중요시하여 형이상학적 문제를 기피하던 태도와 달라진 것이고, 수양 역시 공자•맹자(孟子) 시대 이상으로 철저히 한다는 뜻에서 공자가 말한'위기(爲己)'의 표현을 성리학에서 자주 쓰게 되었다. 아무튼 이 모두가 불교와 대항하던 성리학자들이 불교에는 연기(緣起)•법계(法界) 등의 깊은 형이상학과 참선(參禪)같은 철저한 수행이 있음을 깨닫고, 그러한 것이 유학에도 갖추어져 있음을 과시하고자 하던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성리학이 신유학으로 지칭될 만큼, 이전 유학의 경향과 달라졌다는 판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불교와 대립하여 불교의 철학이나 수양에 맞설 유학의 형이상학적 이론과 수기(修己)의 이론이 유학경전 중에도 특히 ≪논어≫•≪맹자≫•≪중용≫•≪대학≫에 많이 담겨 있기 때문에, 성리학자들은 이 네 경전을 유학의 가장 주요한 기본경전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른바'사서(四書)'라는 명칭이 이러한 시각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전래와 수용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전하여지기 시작한 때를 확실히 단언하기는 어렵다. 성리학의 형성을 어디까지에서 끊어 살펴야 하느냐도 불분명하지만, 남송의 주자학 이전 북송 성리학의 경우에는 그 전래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잘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주자학으로서의 성리학의 도입은 충렬왕 때(13세기 후반)부터라고 추정된다. 안향(安珦)은 자신의 호를 회헌(晦軒)이라 하여 주희(호:晦庵)에 대한 존모의 뜻을 표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였다. 거의 같은 무렵 백이정(白頤正)도 역시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도(元都)에 10년간 머물다 돌아오는 길에 성리학관계 서적을 많이 구해왔으며, 권부(權溥) 등은 주희의 ≪사서집주≫등을 전파함은 물론, 나아가 과거에서까지 그것을 채택하게 함으로써 성리학의 도입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뒤이어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으로 이어지는 학자들의 출현기에는 성리학의 이해가 피상적 섭취의 차원을 넘은 전문적 연구의 수준에 오르게 된다. 따라서 다른 한편 성리학을 당시 통치술의 학문적•사상적 토대로 이용하여, 그것을 명실공히 수용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내용 및 특징 (1) 양반사회의 통치이념화 성리학의 한국적 변용 내지 발달은 조선조 성립 이후의 일이다. 사상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초 성리학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역시 역성혁명의 주체인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의 활동이다. 정도전은 조선의 기틀을 확립하려는 시각에서 문화정책을 입안하면서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철저히 불교를 배척하였다. 정도전은 사원과 승려의 폐해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불교신앙의 허구와 미신성 및 불교이론 자체의 부당성에 근거하여 척불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의 <불씨잡변(佛氏雜辨)>•<심기리편(心氣理篇)> 등이 그러한 저술이다. 정도전이 불교를 배척한 이유는 많지만, 그 중에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불교의 멸륜(滅倫)•해국(害國) 성향에 있다. 사회생활을 소홀히 함으로써 유교적인 윤리를 지키지 않고, 국가기강마저 유교보다 소홀히 한다는 것이 배척되어야 할 불교의 폐해라는 것이다. 그런 만큼 불교보다 더 사회윤리를 강화하고, 그리하여 국가에 이로움을 주는 것이 유학이요, 그 중에도 특히 성리학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외 위와 같은 생각은 성리학이 조선의 새 통치원리여야 한다는 신념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그의 이같은 노력으로 성리학은 양반 사대부 중심의 조선사회의 통치이념으로서의 관학(官學)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권근은 ≪입학도설( 入學圖說)≫•≪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등의 저술을 통하여 이와 다른 면모를 보였다. 그는 불교와 같은 타 사상과의 대립의식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대립에 별로 큰 정력을 소비하지 않았다. 비교적 순수한 성리학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리하여 그러한 연구에 큰 업적을 쌓았다.
(2) 의리실천의 도학적 경향 조선조가 기틀을 완전히 잡은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말까지의 기간은 성리학사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사림파(士林派) 학자들의 활동이 크게 돋보인 시기이다. 이른바 사화기(士禍期)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의 많은 사화를 겪으며, 사림파 학자들은 15세기 중엽부터 약 1세기간 성리학 특유의 의리의 실천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한국성리학은 일종의 실천성리학으로서의 도학의 특색을 이 시기에 뚜렷이 지니게 되었다. 사림파 학자들이 성리학의 드높은 의리관을 실천에 옮기려는 경향을 흔히 사림파정신이라 부르지만, 이것은 그 나름의 연원을 가진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육신생육신이 출현하여 드높였던 절의정신에 접목된 것이며, 또 더 나아가서는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보듯이 길재(吉再)가 보존한 고려적 절의를 토양으로 하여 자라난 것이다. 따라서 사림파 학자들이 당시 체질화한 성리학의 규범은 도덕적 규범의 성격이 강한 것이지만, 동시에 정치적 성격을 지닌 규범이기도 하다. 여말 조선초부터 ≪주자가례≫•≪삼강행실도≫•≪오륜도≫가 정책적으로 널리 간행, 반포되고 적극 시행토록 장려되었으며, 이때에 와서는 ≪소학≫이 정책시행 이전에 학자들에게 자아•자발적으로 중요시되었던 사실들도 이 때문이다. ≪소학≫은 당시 사림파 학자들에 의해 철저히 학습, 실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김굉필(金宏弼)남효온(南孝溫) 등이 특히 그런 학자로서 손꼽힐 수 있다. 김굉필은 일찍이 그의 스승인 김종직에게서 ≪소학≫의 중요성을 가르침받았다고 전해지는데, 노년에 이르기까지 실로 일생에 걸쳐 자신을'소학동자(小學童子)'로 지칭하며, 한시도 그것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한다. 한편 조광조(趙光祖)가 이상정치 의미의 지치(至治)를 다시 새롭게 표방하면서 각 방면의 정치적 개혁을 꾀한 것은 성리학적 의리의 정치적 합의를 사림파에서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김굉필의 문하생인 조광조의 이상적 정치는 도(道), 즉 정(正)과 선(善)에 의한 정치를 강조하면서 구체적으로 의리(義利)•공사(公私)의 변별의식을 고취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상정치는 어디까지나 의와 공에 입각한 것으로서 지배층의 사리사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공에 입각한 정치는 무엇보다도 애민(愛民)•위민(爲民)•이민(利民)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정몽주-길재-김숙자(金叔滋)-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의 학통관(學統觀)은 실제 학문의 전수관계나 학문의 업적만으로 설정되고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리학이 지닌 도학적 측면인'의리구현'을 기준으로 설정되고 인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후 조선조에서 수많은 청백리는 물론 애국충절의 학사(學士)•의사(義士)•열사(烈士)가 기라성같이 속출한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다.
(3) 심성 위주의 이론탐구 성리학의 의리실천 차원이 아닌 그 이론적 탐구가 한국적 특색을 독특하게 띨 만큼 본격화한 것도 16세기의 일이다. 16세기의 이른바 사림파 특히 후기사림파 학자들이 또한 성리학 이론탐구의 주역이었다. 특히 이황(李滉)이이(李珥)가 당시의 대표적 학자이다. 그리고 이들이 남긴'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이기해석론'이 당시의 대표적인 이론탐구이었다. 물론 이들에 앞서 서경덕(徐敬德)이라든가 이언적(李彦迪)과 같은 학자들이 성리학 탐구를 매우 높은 수준에서 행하였다. 그러나 질과 양 및 역사적 의미에 이어서 이황•이이 등의 사단칠정론에 비교할 수가 없으므로, 그런 점에서 그것들에 대한 언급은 생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황 등에게도 사단칠정론 외에 우주론에 해당하는 태극설 등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간과해야 하는 것과 같다. 당시의 사단칠정론이란 정지운(鄭之雲)이 그의 <천명도(天命圖)>에 대하여 이황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해 각각'이에서 발(發於理)'하고'기에서 발(發於氣)'한 것이라고 한 해석이 발단이 되었다. 이것을 후에 이황이 사단칠정을 각기'이의 발(理之發)•기의 발(氣之發)'이라고 수정하였다가 기대승(奇大升)과의 논변끝에 사단은'이가 발함에 기가 따른 것(理發而氣隨之)', 칠정은'기가 발함에 이가 탄 것(氣發而理乘之)'이라 해석하였는데, 그뒤 이이가 사단칠정 어느 경우나 모두'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氣發理乘一途)'이라고 한 해석과 이 해석들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는 내용이 곧 사칠론의 핵심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해석형식 자체이기도 하지만, 해석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라 할 수 있다. 해석형식의 수정이 나오게 된 연유가 그 타당성 검토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실로 이 해석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는 이황•기대승 사이에서만도 8년여의 세월에 걸쳐 진행되었거니와, 그뒤 이이와 성혼(成渾)간에 행해진 논변을 비롯하여 학계에서 행해진 검토는 무려 300여년에 걸친 것이었다. 이토록 오랜기간 이 문제를 다룬 학자의 수효는 실로 그뒤의 한국성리학자 거의 전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다. 그리하여 학계는 마침내 이 문제연구를 둘러싸고 학파까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퇴계학파•율곡학파, 또는 주리파(主理派)주기파(主氣派)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4) 예학적 변용과 구현 16세기 말엽 이후 약 1세기 반의 기간은 실상 예학시대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시기였다.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300∼3,000여 종의 온갖 예에 관한 것들을 성리학자들이 연구하면서 어김없이 실천할 것을 역설하고, 그 실천여부를 기준으로 인간 개인을 군자•소인으로 분별, 평가함은 물론, 복상문제(服喪問題) 또는 예송(禮訟)형식이 당쟁까지 전개된 시기가 이때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예가 이토록 중요시된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임진왜란과, 두 차례에 걸친 호란 등으로 하여 사회질서가 문란하여졌던 것을 들 수 있다. 예가 사회질서 수립을 목적으로 안출된 것이고 보면, 이같은 정치•사회적 여건에서는 예를 중요시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원인은 성리학의 학문적 성격 자체에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성리학은 원래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예와 같은 관련을 가지고 발흥한 것이다. 즉 불교의 윤리의식의 박약함을 강조하고 그 근거까지 밝히는 것이 성리학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성리학자들이 중요시하는 예학을 성리학의 형식주의적 객관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성리학이 수용기로 접어들면서부터 특히 조선에서의 관학화 이후로는 예의 인식과 실천이 정책적 차원에서 고취되었던 것이다. 그 고취의 초두에 해당하는 것이 여말부터 이루어진 ≪가례≫시행의 적극적 권장이었다. 그뒤 조선초에는 ≪삼강행실도≫•≪국조오례의≫등이 간행되어, 일종의 국민윤리로서의 성격을 띠고 그 내용의 시행이 역설되었다. 이어서 향교향약의 제도를 이용한 오륜적 예와 미풍양속 지향의 예에 대한 교육이 널리 파급되었다. 그 결과 중종대에는 서민계층에서도 오륜적 예의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17세기 당시 대표적 예학자인 정구(鄭逑)김장생(金長生) 등이 내놓은 저술들은 사실 과거에 보지 못했던 종류의 내용이다. 정구의 ≪오선생예설분류≫나 김장생의 ≪의례문해≫를 통해 한 집안이나 한 나라에 있어서의 계통 통서를 바로하는 일이 예로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는 의식이 이때에 팽배해진다.
(5) 인물성동이론 사단칠정의 논변이 이황•이이 이래 100여 년을 끌어 18세기에 이르렀을 무렵, 성리학계는 또하나의 문제를 둘러싸고 격론을 벌이게 된다. 다름아닌 '인물성 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원래 권상하(權尙夏)의 문인들(일명 江門八學士)사이에서 발단되었다. 그 문인 중 특히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논변화되었다. 문제의 내용은 글자 그대로 인성과 물성이 같은가 다른가를 따지는 것인데, 이간은 서로 같다고 주장한 반면, 한원진은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각각 그 이유를 제시하고 상대를 공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논변을 전개할 당시 동료학자 중 대체로 호서(湖西)의 학자들은 다르다는 주장에 동조한 반면, 낙하(洛下)의 학자들은 같다는 주장에 동조하여, 양편으로 대립, 대결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그리하여 뒷날 이것이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양측 주장의 이면에 실은 한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을 존중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인간을 주축으로 한 동론(同論)에서는 그 본성을 선천적으로 구비한 것임을 주장하여 본성의 절대시를 꾀하고 있다. 본성의 절대시 또는 동물성으로부터의 인간본성의 보호를 노리는 식의 본성존중의 의도가 양측에 공존한다. 이렇게 보면 이 논변은 본성 존중의 의도를 단지 이기의 입장을 달리함으로써 서로 다른 주장으로 나타낸 것으로 이해된다.
(6) 위정척사운동 16세기 말 이황•이이 이후 본격적인 편향을 보이던 주리설과 주기설의 성리학의 두 경향은 18∼19세기에는 유리(唯理)•유기(唯氣)의 이기설을 낳게 된다. 물론 일부의 학설은 극단적인 편향을 기피하여 절충•중도적 성격의 이기설로 이루어진 것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기론에 있어서 극단적인 편향을 보이는 것들이 나타나, 조선조 말기에 오면 모든 것을 오직 이 하나로 풀이하려는 이론이 나오게 되었는가 하면, 반대로 기 하나로 풀이하려는 이론이 나오게 되었다. 우주의 모든 현상을 이일분수(理一分殊)로 혹은 기일분수(氣一分殊)로 설명하는 기정진(奇正鎭)•임성주(任聖周)의 이론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러한 성리학의 극단적 편향, 그 중에도 유리론의 편향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것 역시 한국성리학의 한 특색으로 기록되어야 할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리학이 19세기의 격변, 격동을 맞이하여서는 실제적인 대응책을 안출하는 데 있어서는 사실상 무기력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성리학의 현실극복능력에 회의를 갖는 학자들이 늘어나면서, 성리학의 위와 같은 철학적 탐구들은 공리•공론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한가지 조선 말기 성리학의 현실대응이 반드시 무기력했다거나 전무했다고 할 수 없음에 유의해야 한다. 천주교를 비롯한 서구의 문물이 유입되고 특히 제국주의로 무장한 서구의 위협 및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그에 대응한 성리학계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그 움직임이 곧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으로 불리는 것이다. 한말의 이항로(李恒老)•기정진•이진상(李震相)•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유인석(柳麟錫) 등의 학자들은 다시 천주교의 우주관•인생관 및 윤리관에 대립하면서, 흔들리는 국기(國基)를 공고히 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유교의 삼강오륜식 예의식과 전혀 다른 천주교의 사상을 오랑캐 또는 금수의 사상이라고 배척하는 동시에, 서구와 일본의 세력을 적대시하여 쇄국과 주전(主戰)과 척화(斥和)로써 대항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사고는 의병의 정신적 기초를 닦은 결과가 되었고, 직접 목숨을 바쳐 의병장으로까지 활약하였다.
한국 성리학의 특징과 위치 (1) 정주학 절대우위의 특징 한국성리학의 특징으로서 무엇보다 먼저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정주계 성리학이 거의 일변도로 석권하였다는 점이다. 육왕계의 심학은 비록 15세기 말엽부터 전하여 어느 정도 전파되었지만, 그 발달 정도나 세력은 정주계와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였다.
(2) 주지주의(主知主義)의 경향 정주학과 육왕학과의 차이는 대체로 전자가 주지주의의 경향이 강한 데 비하여, 후자는 주정주의(主情主義)의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국성리학의 특징이 정주학 절대우위라는 것은 곧 한국성리학에 주지주의의 경향이 그만큼 두드러짐을 의미한다. 사실 사단칠정론이라든지, 인물성동이론같은 것은 이미 밝힌 대로 학파의 형성을 가져올 정도의 많은 학자들이 200∼300년여에 걸쳐 그 타당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그런 만큼 이것들은 중국이나 일본의 성리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심오하고 풍부한 내용의 이론을 담게 되었다.
(3) 예 절대시의 풍토 사실 한국의 성리학은'예론탐구와 그 실현'을 위하여 발전되어 온 과정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예사상에 투철하였다. 성리학의 한국화란 따지고 보면 정몽주의 ≪주자가례≫의 실천 및 권근의 ≪예기천견록≫의 저술로부터 시작되어, 정구•김장생•박세채(朴世采) 등의 예론에서 그 연구의 절정을 이룬다. 한편 윤휴(尹鑴)송시열(宋時烈) 등의 예송에 의한 당쟁에서 예 실현을 향한 열의의 극치를 보게 된다. 일본의 경우는 비교조차 할 필요없는 형편이고, 중국에서나 이와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겠는데, 그것도 이토록 목숨을 걸 정도로 심각히 종교화된'예 숭상의 사조'에는 미치지 못한다.
(4) 명분론적 사고의 팽배 예가 명분에 입각한 합리적 사고의 산물이라면, 이러한 예 숭상의 풍토에서 명분론적 합리주의정신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명분론적 합리주의의 사고는 경험사실과 관계없는 순전한 합리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고 보면 과거 우리의 사고방식이 합리적인 성질을 갖는 것도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사실성 내지 과학성을 결여한 것인지, 또 얼마나 실리•실용•실증의 정신을 결여한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대외관계에 있어 때로 상당한 세력을 떨쳤던 모화사대주의자(慕華事大主義者)들의 주체의식의 상실현상은 그 좋은 실례가 된다. 그러한 주체의식의 상실현상은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명분론의 사고방식에 무비판적으로 몰두 맹종한 나머지, 그 배후에 가려진 춘추존양적(春秋存攘的) 한족(漢族) 중심의 사고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결과라 할 것이다. 이밖에도 한국성리학의 특징과 위치에는 주리론(主理論)이 보수성과 인존정신(人尊精神)의 지향이 있다.
평가 이상과 같은 입장에서 보면, 오늘에 살릴 수 있는 한국성리학의 장점들 역시 이런 특징들 속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것은 곧 여러 장점들, 특히 그 장점이 오늘에 살려 좋다고 생각되는 특징들로 정하여질 것이다. 그러한 장점으로 판정되는 특징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국성리학의 위치가 더 높은 자리에 위치할 수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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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명(한자) 이용후생(利用厚生)
소표제 정의/내용/발전단계
주제어 북학파/실학/홍대용/박제가/박지원
성격1 사상
성격2 유학
시대 근대
주창자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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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북학파(北學派) 사상가들이 강조한 실학이념.
내용 백성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이롭게 쓰이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실천적인 학문의 내용이라는 뜻이다. 원래 이 말은 ≪서경≫의 대우모(大禹謨) 편에 보인다. '이용'이란 백성의 쓰임에 편리한 것으로 공작기계나 유통수단 등을 의미하며, '후생'은 의식 등의 재물을 풍부하게 하여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유학은 구체적 현실에서 경세제민(經世濟民)을 통해 백성의 삶을 풍요롭고 바람직하게 만드는 것을 정치의 이상으로 삼기 때문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못지 않게 경제적인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다. 공자가 교육에 앞서 백성의 경제력을 말한 것이나, 맹자가 백성에게 항산(恒産)을 마련해 주는 것을 왕도정치 실현의 기반으로 지적한 것은 모두 그 실례이다. 후대로 오면서 유학의 관심이 윤리적•도덕적인 정덕(正德)의 측면에 기울면서, 덕본재말(德本財末)•중의경리(重義輕利) 등의 논의가 나와 재물이나 이익을 경시하는듯한 흐름이 생겨났다. 유학의 이러한 경향은 특히 성리학에 이르러 극대화되었는데,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인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기풍은 계속 유지되었다. 의리와 명분을 중시한 성리학이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그런대로 생동감을 갖추고 있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더 이상 현실지도이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형해화(形骸化)하여갔다. 여기에서 성리학을 대신하여 구체적인 민생의 고통과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실학사상이 대두된다. 이 실학의 흐름은 그 사상적인 경향에 따라 시대별로 보통 세 단계로 구분된다.
발전단계 제1단계는 이수광(李睟光)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으로 대표되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파이다. 제2단계는 18세기 후반 청나라의 문물에 대한 견식을 통하여 서구문화에까지 눈을 뜨게 된 홍대용•박지원•박제가•이덕무(李德懋) 등 이른바 북학파로 불리는 이용후생학파이다. 제3단계는 19세기 초반 중국 고증학의 영향 아래 일어난 정약용(丁若鏞)김정희(金正喜) 등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파이다. 이 중 이용후생학파에는 앞의 여러 학자 외에 이중환(李重煥)이나 유수원(柳壽垣) 및 정약용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이용후생의 실천을 통하여 부국안민(富國安民)을 이룩하는 것이 그 시대의 급선무임을 주장하고, 구체적으로 그 이용후생의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들이 제시한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봉건적 신분질서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을 타파하여 능력에 따른 신분의 재편성, 보통교육의 확대 등 사회개혁을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였다. 둘째 봉건지배계급인 사(士)의 타성적인 계급의식을 타파하고 공상(工商)으로서의 전환을 통하여 상(商)을 중심으로 한 국가경제체제를 확립, 부국을 지향하였다. 국내적 경제유통을 위한 용거(用車)•용선(用船)과 도로망의 정비 등을 제시하고, 국부(國富)의 증진을 위한 외국과의 교역을 강조하였다. 셋째 사회개혁과 국민경제를 통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을 실천하기 위하여서는 먼저 농업•공업•방직•군사•의료•천문•수학 등 각 분야에서 선진적 기술의 습득이 필수적임을 주장하였다. 기술은 역사의 변천에 따라 진보한다는 의식과 청나라의 문물제도를 통하여 서양의 기술을 직접 체험하여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다면 비록 그 법이 이적(夷狄)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성인이 그것을 선택할 것"이라 하여 중국과 서양의 선진적 기술에 대하여 적극적인 수용의 자세를 보였다. 넷째 청나라와 서구의 문물을 선진적인 것으로 보고 적극 수용하여 북학파로 불리고 스스로도 자처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모화론자(慕華論者)들과는 달리 강렬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이익•안정복(安鼎福) 이래 실학사상의 전통이기도 하지만, 갖가지 현실적 문제를 안고 있던 당시 사회에 대한 비판과, 그로 인하여 고통받는 민중에 대한 애정이 민족적 주체의식으로 발현된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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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명(한자)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소표제 정의/내용/한국적 특징
주제어 성리학/이기론
성격1 사상
성격2 유학
시대 조선
주창자 주희(朱憙)/이황(李滉)/이이(李珥)/서경덕(徐敬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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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성리학이기론에서 모든 존재의 생성과 변화를 이와 기의 두 요소의 결합으로 보는 이론.
내용 중국사상사에 있어 세계와 현실존재에 대한 해명은 노장사상(老莊思想)의 자연적 세계관과 후기 음양오행으로 대표되는 기적 세계관(氣的世界觀)이라는 하나의 흐름이 있고, 선진(先秦)에 있어서의 천(天)과 ≪주역≫에서의 태극을 세계의 근원자로 보는 두 흐름이 있다. 성리학의 이기론은 불교의 이사론(理事論)의 영향 아래에서 이 두 흐름을 종합한 것이기에 처음부터 강한 이원론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기이원론은 주돈이(周敦頤)와 정이(程頤)를 거쳐 주희(朱憙)에 이르러 완성된 것이다. 다만 성리학의 이기이원론은 서양의 이원론이 신과 세계, 정신과 육체 등 상호 대립적인 두 요소로 이루어진 것임에 비하여, 이기의 두 요소는 상대적인 동시에 상수적(相須的)인 것으로 본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성리학에 있어서 이는 존재가 존재이게 하는 소이연(所以然)의 원리이며, 동시에 변화 속에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게 하는 존재의 본질(性)이다. 이에 비하여 기는 소이연의 이가 존재화하는 데 갖추어야 할 터전이며, 동시에 현실 존재의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구성요소이다. 그러나 이처럼 서로 달리 규정되는 이와 기는 현실존재에 있어서는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와 기의 관계를 '하나이면서 둘이며, 둘이면서 하나(一而二 二而一)'라고 표현하며, 그 하나임을 불리(不離)라 하고, 그 둘임을 부잡(不雜)이라 한다. 다만 성리학의 이기론은 단순히 존재세계에 대한 해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존재에 대한 해명을 위하여 제기된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가치체계를 근거지어주기 위하여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많은 논리적인 문제가 파생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기관계에 있어서 생성론적인 선후(先後)의 문제와 가치론적인 경중(輕重)의 문제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순수한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기의 관계는 그들이 현실존재 속에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불상리(不相離)이다. 한편 이선기후(理先氣後)와 이중기경(理重氣輕)을 내세워 이기의 불상잡(不相雜)을 강조함에는 강한 가치론적인 시각이 표출된다. 이렇게 보면 주희에 의하여 확립된 이기이원론은 사실상 이(理) 우위를 전제한 이기이원론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주자학의 강한 이념성의 근거가 있고, 동시에 후기 성리학이 관념성과 공소성으로 흘러 기학파(氣學派)의 반격을 받게 된 이유가 있다.
한국적 특징 한국성리학의 흐름에서도 초기에 있어서는 주희의 이와 같은 이 우위적 이기이원론이 주류를 이룬다. 초기 성리학 형성에 큰 공헌을 한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의 이선기후의 입장이나, 이황(李滉)의 이존기비(理存氣卑)의 주장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기에 대한 이의 능동성과 주재성(主宰性)을 강조한 이황의 이원론적인 시각은 그 뒤 이현일(李玄逸)•이진상(李震相) 등 영남학파로 이어져 이일원론으로 전개되었다. 한편 이와 같은 가치론적인 흐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이기의 불리(不離)를 강조하는 학자로서 이이(李珥)를 들 수 있다. 그는 보통 서경덕(徐敬德)의 기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이기론은 존재론과 가치론을 함께 아우르는 주자학의 이중적 성격을 나름대로 계승한 것이다. "이와 기는 혼연하여 틈이 없어서 원래 서로 떠나지 않았으니, 두 가지 존재[二物]라 할 수 없다."라고 하여 이기이원론을 거부하며, "이의 근원도 하나일 뿐이요 기의 근원도 하나일 뿐이라 서로 떠날 수 없으니, 이와 기는 하나이다."라고 하여 이기일원론의 입장을 확인하고 있다. 그는 특히 이와 기의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을 '이기지묘(理氣之妙)'라는 개념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기를 '발동하는 것(發者)'이고 이는 '발동하는 까닭(所以發者)'이라고 보고, '기가 없는 이는 발동할 수 없고(不能發), 이가 없이는 발동이 없다(無所發)라' 하여 어느 한쪽이 결여될 수 없는 통일체로 인식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이기론은 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을 거쳐 기호학파에 정통적으로 계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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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명(한자) 예학(禮學)
소표제 정의/개념/전개/한국의 예학
주제어 유학/삼례
성격1 사상
성격2 유학
시대 조선
주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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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예(禮)의 본질과 의의, 내용의 옳고 그름을 탐구하는 유학의 한 분야.
개념 오늘날에 있어서 예의 의미는'대인관계에 있어서의 바람직한 행위'라는 극히 좁은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예의 본래의 의미는 아주 넓고 포괄적인 것으로서 예는 유교문화를 통칭하는 것이고 동시에 유교문화의 내용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는 발생사적으로 보아 유교, 나아가서는 중국사상의 시원(始源)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라는 한 문자 자체가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예는 포괄적인 호칭이고 이를 세분화하여 표현할 때 삼례(三禮)라고 한다. 즉≪주례(周禮)≫•≪의례(儀禮)≫•≪예기(禮記)≫가 그것이다. ≪주례≫는 고대에 있어서 국가의 조직•제도를 규정한 것으로 세속의례에 있어서 국가생활의 부분을 정리한 것이고, ≪의례≫는 관(冠)•혼(婚)•상(喪)•제(祭)를 중심으로 신성시 된 여러 가지 의식을 기록한 것으로서 신성의례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예기≫는 예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으로서 인간생활에 있어서의 윤리적 생활원리를 기록한 것이다. 춘추시대에 공자가 인(仁)을 내세워 유교사상을 내면적으로 심화시켰으나, 그것은 결국 예에 대한 내면적인 의미부여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인간의 최고의 덕인 인을 '자기를 이겨서 예로 돌아오는 것(克己復禮)'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고, 사회에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 질서가 곧 예이다. 유교사상은 인간사회와 현실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인간적인 노력으로 질서를 지켜가고자 하는 사상이다.
전개 예 사상은 공자에 의하여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고, 이를 순자(荀子)가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순자계통의 학자들에 의하여 크게 연구, 전승되었다. 특히 한대(漢代)에 이르러 유교를 관학(官學)으로 삼고 유교적 원리로서 통치이념을 삼음으로써 고대로부터 전래해온 예제(禮制)를 정비하여 앞에서 말한 삼례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후대로 내려와 예는 주로 오례(五禮)로 분류, 정리되었다. 즉 길례(吉禮)•흉례(凶禮)•군례(軍禮)•빈례(賓禮)•가례(嘉禮)이다. 길례는 모든 제사에 관한 의식절차이고, 흉례는 사람을 장사지내는 의식절차, 군례는 군사와 관련된 의식절차이며, 빈례는 외교적인 의식절차이고, 가례는 혼인과 관련된 의식절차이다. 중국사상사는 유교가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따라서 유교적 생활규범인 예는 중국사를 일관하여 중국문화의 외형적 근간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예학 삼국시대까지는 문헌이 부족하여 예학이 어떤 형태로 전래되고 생활화되었던가를 알 길이 없다. 고려에 있어서는 비록 완전한 형태로 전하지는 못하였지만, 오례의(五禮儀)가 국가통치의 중요한 전례(典禮)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예가 국가통치의 기본적인 전례임은 물론이고, 국민일반의 생활의 준칙이 되었으므로 예학도 그 이전에 비하여 두드러진 발달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유학으로써 관학(官學)을 삼았는데, 유학 가운데 있어서도 특히 주자학을 숭상하여 주자의 이기철학(理氣哲學)을 형이상학적 원리로 삼고, 주자가 편찬한 ≪소학≫과 ≪가례≫를 행위의 준칙으로써 삼았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예학은 ≪가례(家禮)≫를 중심한 예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권근(權近)의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은 예경(禮經) 자체에 대한 연구, 즉 원전에 대한 비판 또는 재구성을 시도하는 연구로서, 조선시대 예학연구에 있어서는 한 예외적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권근이 생존한 시대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고려말에서 조선의 건국 초기에 걸쳐 주자학을 숭상하였으나 주자학이 아직 그 독존적(獨存的) 권위를 굳히기 이전이었으므로 ≪가례≫ 이전의 예경에 대한 관심이 깊었고, 또 이에 대한 연구가 자유로웠던 것이라고 짐작된다. 정구(鄭逑)의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도 ≪가례≫의 절대적 권위에 얽매이지 않은 예의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그 서문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이미 ≪가례≫는 집집마다 비치되고 사람마다 익히는 예서이기는 하나, 오선생의 예설을 새로이 수집함은 ≪가례≫를 보완하려 한다고 하였으니 그의 예학의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家禮輯覽)≫•≪상례비요(喪禮備要)≫•≪의례문해(儀禮問解)≫에 이르러 ≪가례≫의 권위가 절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술은 ≪가례≫를 주석하고, 해설하고, 부연함으로써≪가례≫를 완성한 것이다. 김장생에 이르러 확립된 ≪가례≫의 권위는 그 뒤 변함없이 조선조 예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유계(兪棨)의 ≪가례원류(家禮源流)≫, 이형상(李衡祥)의 ≪가례편고(家禮便考)≫•≪가례부록(家禮附錄)≫•≪가례혹문(家禮或問)≫, 이의조(李宜朝)의 ≪가례증해(家禮增解)≫등 예에 대한 저술이 모두 ≪가례≫를 근간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저술 가운데는 시대의 변천에 따른 내용적 변화가 깃들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즉 ≪가례≫를 근간으로 하되, 변례(變禮)에 대한 연구가 자세하게 전개되었다. 인간의 생활양상은 다양한 생활 가운데서 ≪가례≫에 대한 규정된 예의 적용만으로는 흡족할 수가 없고 자연히 예외적인 경우에 적용하여야 할 변태적인 예, 즉 변례가 모색되고 연구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례는 자연 예의 정신을 체득한 학자들에 의하여 모색되고 규정되어야만 하였다. 그러므로 후대로 내려오면서 예의 연구는 ≪가례≫를 중심으로 하되 우리나라 예학자들의 견해가 많이 수록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의 현실적 적용에 있어 공개적으로 논쟁을 거듭하였던 이른바 예송(禮訟)은 당쟁과 결부됨으로써 학문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그러한 가운데 있어서도 예의 이론적 연마를 가져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왕통(王統)을 중시하느냐 적통(適統)을 중시하느냐의 문제를 철저히 규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크게 보면, 조선시대의 유학이 주자학으로 한정되었듯이 조선시대의 예학도 주자적 예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가례≫를 중심으로 맴도는 데 그쳤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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