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집_언행록2_유편(類編)

사양하고 받음

 

선생은 사양하고 받음에 있어서 아주 엄하여, 진실로 바른 도리가 아니면 비록 조그만 것이라도 남에게서 받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주ㆍ현의 관가에서 교제의 예로써 보내오는 것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그때 한 관리가 있었는데, 자못 염치가 없는 사람으로, 자주 찾아와 뵙고, 혹 때로는 물건을 보내기도 했는데 선생은 그것도 받았다. 제자 조목(趙穆)이 그것을 보고 매우 불쾌해하였다. 비록 내가 미처 물어보지는 못하였으나, 생각해 보면 선생은 구차히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맹자의 각지불공장(却之不恭章)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김성일-
선생은, 친한 방백 수령으로부터 혹 보내오는 선물이 있으면, 반드시 의로써 헤아려 받기도 하고 사양하기도 했지만, 박절하게 하지는 않았다. -김부륜-
주부(州府)에서 혹 보내오는 선물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찰방공에게 보내고, 다음에 이웃이나 친척, 또 와서 배우는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한번도 집에 쌓아 두지는 않았다. 서울에 있을 때는 봉록으로 들어오는 것이 쓰기에 넉넉하기 때문에, 그 나머지는 모두 친구를 두루 돌봐 주되, 반드시 친소(親疎)와 빈부(貧富)를 헤아려서 한번도 정의(情宜)를 상한 적이 없었다. -김성일-
선생이 일찍이 월란사(月瀾寺)에 있을 때에 소어(樔魚)를 보내 준 사람이 있었다. 선생은 이웃 노인들에게 나누어 보낸 뒤에 비로소 맛을 보았다. -이덕홍-
그 자제들이 내의원(內醫院)에게 약을 구하려 하자, 선생이 이르기를,

“옳지 않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이것은 다른 물건과 다른데 구한들 무엇이 해롭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의리상 온당치 않다. 결코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국필-
을축년(1565, 명종20) 겨울에 윤복(尹復)이 안동 부사가 되어 와서 뵈올 때, 선생이 나가서 접대하였다. 윤복이 예단을 드렸는데, 선생이 별생각 없이 펴 보지 않았다. 윤복이 하직하고 간 뒤에 들어가 보니 그것은 노루 고기였다. 이날은 마침 선생 집에 제사가 있었으므로, 선생은 곧 편지와 함께 돌려보냈다. 제삿날에 고기를 받는다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12월 24일 (성종의 기일(忌日)) 에 조사경(趙士敬)이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왔지만, 역시 그 고기는 받지 않았다. -우성전-
묻기를,

“안동 부사가 보낸 어육(魚肉)을 선생님께서는 제삿날이라고 해서 받지 않았지만, 저희들 생각으로는, 그것을 받아 두시기가 미안하면 이웃 마을의 친구들이나 친척에게 나누어 주어서 선물 보낸 사람의 성의를 받아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는데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어육의 선물이 마침 제삿날에 왔는데, 그것을 돌려보내는 것이 핑계에 가까운 듯하다고 공이 책망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때 부사는 내 집에 제사가 있는 줄 모르고 어육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성의를 베풀려고 했는데, 내가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제삿날이라 해서 사절하고, 그 어육만을 기일을 무릅쓰고 받는다면 옳겠는가. 받는 것이 이미 옳지 않다면 집에 두나 남에게 주나 다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렇게 처리한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
묻기를,

“선생님께서는 의성(義城)에서 보내온 선물에서 마른고기는 물리치고 필묵(筆墨)은 받으셨습니다. 만일 그것이 의로운 것이라면 모두 받아야 할 것이요, 의롭지 않은 것이라면 모두 받지 않아야 할 것인데, 어째서 그 크고 작은 것을 가려서 받았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내 일찍이, 주자가 조자직(趙子直)의 선물에서 인삼과 부자(附子)는 받고 봉록을 쪼게 보낸 것은 물리쳤으며, 또 어떤 사람의 선물에서는 강게[江蟹]는 받고 베[布]는 물리친 것을 보았다. 이는 그 당시 조공(趙公)이나 어떤 사람은 다 잘못이 있었지만, 그 허물이 절교할 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에 가벼운 물건은 받아서 절교하지 않는 뜻을 보이고, 중한 물건은 물리쳐 그 사람의 잘못을 깨우친 것이다. 내가 사양하고 받은 것은 굳이 논할 것도 없지만, 그때 그렇게 한 것은 약간의 곡절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였다. -이국필-
한번은 내가 선생을 계상(溪上)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 이희(李憙) 이 선생에게 꿩을 보냈다. 그날은 마침 선생의 어머니의 제삿날이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뒷날 선생이 이르기를,

“전날 아무개의 꿩을 받지 않은 것은, 다만 제삿날에 그것을 받는 것이 마음에 편치 않아서만이 아니었다. 내가 항상 내 집의 제삿날이라 하여 손님에게 소찬(素饌)을 대접해서 마음이 늘 편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어육을 갖추어 대접하고자 하면 손님들이 미안해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제 그 사람이 가지고 온 물건은 비록 받아 둔다고 하나, 익히지도 않고 제물로 바치는 것은 더욱 마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감히 받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김수-
병인년(1530, 중종25)에 임금의 부르심을 받고 가다가 예천에 이르러 병으로 사양하는 글을 올리고는 안동의 산사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부중(府中)에서 올리는 물건을 모두 물리쳐 받지 않았고, 다만 산승(山僧)에게 밥을 짓게 하였는데 쓸쓸하기가 마치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그 아들 준이 그때 안기 찰방(安奇察訪)으로 있으면서, 가서 모실 적에도 역시 그 하인들을 물리쳤으니, 그것은 번거로움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우성전-
처음에 안동 부사가 되었을 때의 일이다. 안동에 사는 어떤 사람이 혼인에 관련한 일 때문에 뵙고 하례 드린 뒤 겸하여 고기 선물을 선생에게 올렸다. 선생은 사양하다 마지못하여 두고 가라고 이르고는, 그 사람이 간 뒤에 곧 사람을 시켜 돌려보냈다. -김부륜-
선생이 처음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을 때, 조송강(趙松岡 조사수(趙士秀))이 비단옷 당상복(堂上服) 을 보내왔으나 선생은 받지 않았다. -김부륜-
무진년(1568, 선조1) 8월 10일에 성균관에서 석전(釋奠)을 지낸 뒤에 고기와 술을 보내왔다. 선생은 재상의 집에 으레 보내는 물건인 줄로 알았다가, 뒤에 들으니, 선생이 대제학 지춘추관사라 해서 보내온 것이었다. 그때 선생이 막 대제학을 물러났기 때문에 그것을 받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하여 받지 않았다. -이안도-
이덕홍이 묻기를,

“공자는 친구의 선물이라면 거마(車馬)까지도 사양하지 않았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그것은 의리로 주는 것이라 사양할 길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면 선생님은 어찌하여 김이정(金而精 김취려(金就礪))이 주는 노새를 받지 않았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옛날 사람은 부모가 계시면 남에게 선물로 거마(車馬)를 주지 않았으니, 그것은 백성들에게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그 사람에게 부모가 계시는데 내가 어떻게 그것을 받겠는가.”

하였다. -이덕홍-
여러 제자들이 한번은 선생을 모시고 계당(溪堂)에서 술상을 벌였다. 벽오공(碧梧公 이문량(李文樑))이 김이정에게 술잔을 권했더니, 이정이 굳이 사양하였다. 선생이 엄한 음성으로 이르기를,

“사양도 또한 도가 있는 것이다. 만일 친구 같으면 모르지만, 만일 손위 어른이라면 그 명령을 순순히 좇아 감히 굳이 사양하지 못하는 것이니, 오직 편치 않다는 뜻을 보이면 된다.”

하였다. 김이정이 서울에서 처음 왔기 때문에 벽오공이 양보한 것이다. 본주(本註)이다. -이덕홍-
묻기를,

“어떤 사람이 구청(求請)의 구(求) 자에는 악만 있고 선은 없다고 했으니 그렇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대체로 말하면 그 어떤 사람의 말이 대단히 좋은 말이다. 세상의 많은 불미한 일이 다 이 한 글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무릇 사람이 몸을 욕되게 하고 절개를 잃으며 과오를 범하는 것이 모두 여기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만일 선비로서 뜻을 유지하고 절개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이 어떤 사람의 말을 제1의 원칙으로 삼아서 항상 스스로 격려한다면, 거의 타락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와 나의 사이의 정의에 경중(輕重)과 후박(厚薄)이 있고, 또 구하는 일과 처해 있을 때에 있어서 의리와 곡절(曲折)이 또한 여러 갈래가 있을 것이니, 그런 상황에서는 오직 크게 정신을 가다듬어 의를 좇고 이(利)를 좇지 않는다면, 죄와 욕을 받는 데까지 이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
권공 질(權公礩)은 선생의 장인이다. 그 집이 서울 서소문 안에 있었다. 선생에게 물건을 보내고자 한 적이 있었는데, 선생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뒷날에도 선생이 혹시 서울에 가더라도 항상 다른 곳에서 묵고 한번도 그 집에서는 지내지 않았다. -김성일-

[주D-001]각지불공장(却之不恭章) : 《맹자》 〈만장 하(萬章下)〉의 감문교제하심야장(敢問交際何心也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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