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집_언행록 6_부록

언행 통술(言行通述) [정유일(鄭惟一)]

 

문인(門人) 정유일(鄭惟一) 지음

선생은 총명하고 지혜롭기가 남보다 뛰어났고 타고난 자질은 도에 가까워,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무겁기가 어른과 같았다. 일찍부터 과거의 업을 익혀 애쓰지 않고도 잘 해내니, 글을 잘한다는 칭찬이 날로 높아 갔지만, 선생은 그것을 함정을 보듯 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그것이 사람이 되는 길은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이에 비로소 성현의 학문에서 그것을 구하였다.
비록 이름 난 스승을 만나지 못했으나, 혼자 생각하기를, ‘도는 6경에 있고, 그 근본은 본래부터 내 몸에 갖추어져 있으며, 도에 들어가는 길은 옛 선비들의 논설이 맑은 하늘의 해와 같이 환하다.’ 하였다. 이에 분연히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하는 데에 힘을 썼다. 분발하여 먹는 것조차 잊으면서 조금도 쉬지 않고 애쓰는 동안에, 그만 너무 지나치게 고심한 결과 드디어 심병을 얻게 되었다. 오랫동안 병을 요양한 뒤에는 공부에 더욱 힘을 썼으니, 경의(敬義)를 함께 가지고 지행(知行)을 아울러 나아가게 하여 안팎이 일치되고 본말(本末)을 겸하여 일으켰다.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하는 동안에 큰 근본을 환하게 통찰하여 마음으로 통하고 정신에 합하여 큰 근본을 세우니, 도가 높고 덕도 높아서 사도(斯道)의 정통이 여기에 있었다.
그가 공부한 차례를 보면, 옛 선비들의 학설에 의지하여 성현의 본뜻을 연구하고, 성현의 말에 의지하여 천지의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되 삼가 생각하고 밝게 분별해서, 알지 못하는 것은 그냥 두지 않았다. 한 가지의 일, 한 가지 물건의 작은 데서부터 천지 만물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연구하되, 그 깊이를 다하도록 연구하고 그 정밀함을 다하도록 분석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기필코 환히 관철하여 알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평이(平易)하고 비근하며 명백하고 진실한 것을 표준으로 삼아서, 한 번도 고요하고 아득한 생각이나 깊고 허망한 논의는 하지 않았다. 그 생각해서 얻은 것은 한갓 빈말에만 붙여 두지 않고, 반드시 그것을 돌이켜 몸소 행하였던 것이다. 곧 내 몸과 마음과 성정에다가 몸소 경험하는 실행의 공을 더하여, 한 치를 얻으면 한 치를 지키고, 한 자를 얻으면 한 자를 지켰다. 고요하게 마음을 보존하고 성품을 기르는[存養] 것은 날로 더욱 치밀해지고, 움직여 살피는 것은 날로 더욱 자세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간직한 것은 순진하고 단단하면서 깊고 두터우며, 바깥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온순하고 넉넉하면서도 곧고 굳세었다. 대개 가까운 공을 서두르지 않고 조그만 공을 꾀하지 않았으니, 오직 멀고 큰 것으로써 스스로를 기약하고, 쌓고 되풀이하는 것으로써 공을 삼았다. 그러므로 ‘처음은 어려우나 뒤에는 거둔다.’라거나, ‘아주 잊지도 말고 급히 허덕이지도 말라.’라거나 ‘이치를 바르게 하고 도를 밝힌다.’라는 말은, 학자들을 위하여 언제나 친절히 말씀하던 것이었다.
그의 볼만한 행동으로는, 몸가짐에 매우 엄하여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다. 어릴 때 여러 친구와 더불어 모여서 과거의 문장을 익혔는데 함께 생활하는 것이 매우 경건하여 온종일 단정히 앉아 있으면, 같이 교유하던 선비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다. 그래서 비록 저희들끼리는 서로 장난치며 놀다가도, 선생이 오는 것을 보면 모두 얼굴을 거두고 바로 앉았다. 뒷날 옥당에 있을 때에도, 동료들은 혹 곁에서 시시덕거리면서 장난을 치고 있었으나, 선생이 잠자코 한마디 말도 없이 혼자서 책을 읽으면, 동료들은 모두 부끄러워 장난을 그쳤다. 보통 때에는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바르게 하고 서재로 나가 서적을 좌우에 두고 책을 읽기도 하고 혹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정신이 피로하고 기운이 지치면, 팔짱을 끼고 고요히 앉거나 혹은 눈을 감고 조금 쉬었을 뿐이며, 한 번도 자리에 드러눕지는 않았다. 그는 천성이 간결하고 잠잠하여, 손을 대해서도 온종일 쓸데없는 이야기나 잡담을 하는 일이 없었다. 남과 말할 때에는 반드시 생각한 뒤에 말을 하였고, 비록 갑작스럽고 급할 때에도, 일찍이 한 번도 말을 빨리 하거나 조급한 기색이 없었다. 그 가슴속은 불평이 없어 시원하고, 그 운치는 맑고도 원대하여, 얼른 보기에는 사람 일에 등한한 것 같았으나, 이치를 따지는 치밀함이나 절목을 세우는 자세함에는 아주 작은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비록 어지러이 시끄럽고 난잡한 속에 있더라도 자기 몸을 더욱 엄하게 지키고 단속하며, 비록 어두운 방이나 남이 보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자기 몸을 처하기를 더욱 공손히 하고 삼갔다. 생각을 낼 때에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지극히 살피고, 사물에 응대할 때에는 아무리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반드시 그 마땅함을 찾았다. 한 번 수작할 때에도 마음을 놓는 적이 없었고, 한 번 음식을 들 때에도 몸을 함부로 하는 적이 없었다. 앉으면 반드시 단정히 하고 곧아서 조금도 기울거나 기대는 일이 없었으며, 걸을 때에는 반드시 편안하고 천천히 하여 조금도 바삐 여겨서 급하게 하지 않았다. 손은 함부로 놀리지 않고 눈은 거만스럽게 보지 않았다. 번거롭고 시끄러운 일에 괴롭게 시달려도 게으른 듯한 얼굴을 보지 못하였고, 남을 돌보는 일이 복잡하고 답답하여도 짜증을 내는 기색을 보지 못하였다. 귀한 재상의 몸이 되었어도 입는 옷은 수수한 것을 편히 여기고, 먹는 음식은 지극히 소담하였다. 의를 행하려 할 때에는 마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자 하는 듯하면서도 오직 얻지 못할까 걱정하고, 이(利)에 대해서는 마치 끓는 물이나 불을 밟는 듯하면서도 오직 멀리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남의 비방을 들을 때에는 조금도 변명하는 일이 없었고, 착하지 않은 일이 내 몸에 오더라도 곧 그대로 받아 주었다. 책밖에는 달리 좋아하는 것이 없어서, 어떠한 바깥 물건에도 한 번도 그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었다. 주량은 본래부터 좀 넉넉하였지만 중년 이후로는 아주 끊어 종신토록 크게 취하는 일이 없었으니, 그가 정한 굳센 힘은 가는 곳마다 보이는 것이 이러하였다.
기운은 엄숙하고 바르고 성실하며, 마음은 비고 밝고 탁 트여, 남과의 사이에 간격을 두지 않고, 별달리 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남에게 너그러워도 법이 있었고, 남과 화락하게 지내도 함부로 섞이지는 않았다. 엄하면서도 사납지는 않았고, 간결하면서도 거만하지는 않았다. 옛것을 좋아하되 너무 얽매이지 않았고, 세상을 따르되 구차하게 동조하지 않았다. 순수하고도 온화하여 좋은 금이나 아름다운 옥과 같았고, 광명하고도 정대하여 맑은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았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스스로를 범인과 같이 생각하고, 스스로 처하기를 한사(寒士)와 같이 하여, 항상 그 모자라는 것만 알고 넉넉한 것은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날마다 끝없이 나아가, 마침내 무거운 짐을 지고 그 끝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사람을 대접하는 데 있어서는, 귀하고 천하다든지 어질고 어리석다는 데 구별이 없어서, 그 예를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아무리 허술한 손님이 오더라도 반드시 뜰에 내려가 맞이하여, 한 번도 덕이나 지위가 높다 하여 스스로 거만해하지 않았다. 사람을 사귈 때에는 처음에는 담담했으나 오랠수록 더욱 미더웠기 때문에, 누구라도 진정으로 심복하였고, 마음으로 즐거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사람을 함부로 사귀지 않았으니, 그가 서울에 있을 때에는 공무 이외에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비록 동지들이라도 자주 서로 따라 놀지 않았다. 그는 세상 사람이 항상 명예나 이익이나 호화로운 것을 따르는 것을 보기를, 마치 도둑을 피하듯이 하고 당장 더럽혀지는 듯이 여겼다.
그는 집에 있어서도 집안일에는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집안사람에게는 오직 절용하기를 훈계하였고, 하인들에게는 농사일에 부지런하기를 신칙할 뿐이었다. 가법은 매우 엄하여 가정의 안팎은 모두 엄숙하고 화락하고 즐거워하였으며, 하인들에게는 엄하면서도 은혜로웠다. 그 중형인 찰방공은 선생보다 몇 해 위였지만, 선생은 그를 섬기기를 마치 아버지와 같이 하여 늙도록 변하지 않았다. 자제들에게 혹 잘못이 있어도 일찍이 엄하게 견책을 가하는 일이 없이, 불평스런 기색만 약간 보였다. 그래서 간단히 경계하는 말이 있을 뿐이었기 때문에, 집안사람들은 일찍이 그가 기뻐하거나 성내는 기색을 본 적이 없었고 또 화를 내어 꾸짖는 소리를 들은 일이 없었으니, 그것은 천성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일가끼리 화목하게 지내고 불쌍한 이를 두루 도와주되,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는 그 얼굴빛을 따르고 마음을 맞추어 사랑과 공경을 지극히 하였건마는, 그래도 오히려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 하여 한평생 한으로 삼았고, 조상의 제사는 더욱 두터이 하였다. 그 종질이 농사를 따라 갔기 때문에 오랫동안 종가를 비웠으므로, 그 집이 또한 허물어졌다. 선생은 사람을 시켜 수리하게 하고 자기 자산을 내어 도와주었다. 그리고 다시 일가들과 의논하여 경영하고, 계획을 정해서 먼 장래를 도모하였으며, 계획이 다 이루어지자 조카와 손자를 시켜 그 집에 살면서 제사를 받들게 하고, 제사 때에는 병이 아니면 한 번도 참례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제계할 때에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였고, 제사 때에는 반드시 공경을 다하였다. 고조ㆍ증조의 묘소가 영가(永嘉 안동의 고호)에 있는데, 가끔 친히 가서 제물을 드렸다. 벼슬에 있을 때에는 이름만 빛날 행동은 억지로 하지 않았고, 이치로 마땅히 할 일이면 용기를 내어 바로 나아가 꺾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고을의 수령으로 재직할 때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위주로 하되 성심으로써 실행하였으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은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으니, 비록 벼슬에서 물러나 여러 해가 되었어도 그 마음은 조정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조정에서 하는 일이 이치에 맞으면 그 기쁨은 말에도 나타났고, 조정의 하는 일이 마땅하지 못하면 그 걱정은 얼굴에 나타났었다. 언제나 근본을 북돋아 기르고, 사림을 붙들어 세우는 것을 당장의 급한 일로 삼았다.
무진년(1568, 선조1)에 조정에 들어갔을 때에는,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임금의 뜻을 짐작하고는, 먼저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여섯 조목의 소를 올리고 〈서명(西銘)〉을 강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성학십도》를 올려 삼가 근원을 맑게 하고 근본을 바르게 하는 것을 제일로 삼았으니, 임금께서도 마음을 비워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평소 선생의 학문이 실행을 보게 되는 듯하더니, 얼마 안 되어 하직하고 돌아갔다. 선생은 본래부터 벼슬에 뜻이 적었을 뿐 아니라, 또 그 당시의 일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을 보고, 계묘년(1543, 중종38)에 비로소 물러갈 마음을 먹었던 것이니, 이때 선생의 나이는 43세였다. 이로부터는 한결같이 물러갈 생각뿐이어서, 몇 번이나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나 언제나 조정에 오래 있지 않았다. 늙어서 나라의 부름이 잦을수록 선생의 사절은 더욱 굳었다. 그래서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아래로는 초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어나기를 몹시 권하였으나, 선생의 뜻을 돌리지는 못하였다. 선생의 나아가고 머무름은 마음속에서 결정하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도 남의 권면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떠나는 것도 남의 힘으로 잡아 두지 못하였다. 오직 의로써 마땅한가를 보아서 내 마음의 편안한 것을 구할 뿐이었다. 그는 산수를 좋아하였다. 중년에 퇴계(退溪) 가로 옮긴 것은, 그 골짜기가 그윽하고 숲이 짙으며, 물이 맑고 돌이 조촐한 것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늙어서는 도산 밑 낙동강[洛水]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책을 쌓아두고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고는 그 호를 도옹(陶翁)이라 고치니, 대개 거기서 일생을 마치려고 한 것이었다. 명종이 그 소식을 듣고, 가만히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을 시켜 찾아가 그 그림을 그려 오게 하였다. 그의 사양하고 받는 것이나 가지고 버리는 것은 오직 의로써 결정하였다. 그러나 세상을 놀라게 한다거나 남보다 별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사람이 예로써 선물을 주면 반드시 그것을 받았고, 받은 것은 반드시 구차한 이웃이나 일가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정에서 여러 번 쌀이나 콩을 내린 일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것을 곧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한 번도 집에 쌓아 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집 안에 쓸 것이 자주 떨어져 가끔 꾸어다 이었지만, 선생은 혹 모르기도 하였다. 손님이 오면 귀하고 천한 것을 따지지 않고 인정과 정성을 다하였다.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먼저 지향하는 뜻을 살펴보고 그 재목에 따라 학문을 가르치되, 먼저 뜻을 세우게 하고 자기 수양을 위한 공부를 하게 하였으며 혼자 있을 때에 삼가고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을 공부하게 하였다. 배우는 자가 도에 뜻을 두어 정성되고 독실한 것을 보면 기뻐하여 더 나아가게 하도록 힘쓰고, 학문을 향하는 마음이 게으르고 풀어지는 것을 보면 걱정하여 격려해 주되 부지런하고 간절하게 이끌어 주고 부축해 주기를 한결같이 정성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듣는 사람도 모두 감동하여 기운을 떨쳐 일어나기를 마음먹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은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서니 남에게 바랄 것이 없는 것 같았지만 겸손하여 남에게 묻기를 좋아하되 미리 자기 의견을 주장하지 않았으니, 자기를 버리기에는 용맹스럽고 남을 따르기를 즐기었다. 남의 한 가지 착한 일을 들으면 마치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기뻐하였고, 자기에게 조그만 실수라도 있으면, 아무리 무지한 사람의 말이라도 그 자리에서 이내 고쳤다. 학자들이 의심을 가지고 물으러 왔을 때에는 그것이 비록 아무것도 아니더라도 한 번도 더럽다고 버리지 않고, 반드시 꼼꼼히 파고 캐어서 거듭거듭 타일러 가르치며, 오직 깨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혹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여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을 가라앉혀 다시 생각해서 천천히 그 옳고 그른 것을 결정하게 하였다.
그리고 남과 의논할 때에는 정신은 여유가 있고 기운은 안정되어 가장 당연한 것을 위해서, 남과 자기의 구별을 차리지 않았으니, 일찍이 한 번도 자기의 장점으로 남의 단점을 가벼이 여기거나, 자기의 옳은 것으로 남의 그른 것을 끊어 말하지 않았다. 더욱이 물격(物格)이나 무극(無極)의 해석에 이르러서는, 기명언(奇明彦)과 그 밖의 여러 사람들과 여러 해를 두고 논변하다가, 세상을 떠나기 두어 달 전에 명언의 글로 말미암아 비로소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드디어 여러 사람의 학설을 좇아 정론으로서 결정을 지었으니, 그의 자기 의견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경(經)ㆍ전(傳)ㆍ자(子)ㆍ사(史)를 널리 보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어려서부터 《사서》ㆍ《오경》에 힘을 썼고, 그중에서 《사서》와 《역경》에 더욱 마음을 썼다. 그래서 가끔 그것을 통째로 외어 틀림이 없었고, 혹은 한밤중에 일어나 앉아 《중용》과 《대학》, 《심경》등의 책을 소리 내어 외기도 하였다. 선생은 항상, “경서의 해석을 너무 천착하여 틀림이 많아 도리어 경서의 본뜻을 잃었기 때문에, 뒤에 오는 학자들을 오도하는 것이 많다.”라고 하고, 이에 그 잘게 따지는 것을 바로잡고 틀린 곳을 고치어, 경서의 본래의 뜻으로 돌려놓고 성현의 본뜻을 다시 찾을 뿐 아니라, 또한 그로 말미암아 학자들로 하여금 속된 선비들의 잘못된 학설에 의혹되지 않게 하였다. 또 수학도 이치 밖의 글이 아니라 해서, 계축년(1553, 명종8) 이후로는 아울러 공부하였다. 그리고 주자의 《계몽(啓蒙)》은 수학의 종조인데, 모를 곳이 많다 하여 여러 해를 읽고 연구해서 그 근본을 환히 알았다. 그래서 곧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지어 그 뜻을 분석하고 설명하여 남김이 없었고, 늙어서는 이 《계몽》으로 학자들을 많이 가르쳤다.
선생은 평생토록 주자의 글에 가장 깊이 힘을 썼으나, 주자가 학문을 논한 긴하고 중요한 말은 친구들과 문답한 글에 많이 있는데, 배우는 자들은 대체로 그것이 많고 산만한 것을 걱정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그중에서 가장 친절하고 긴요한 것을 뽑아 간략하게 책을 만들고, 거기에 간단한 주해를 붙였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주자의 글을 유익하게 쓸 줄을 알게 되었다. 또 주자의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은 정자 문인에게 그쳤는데, 주자 이하로부터 송의 말년과 원ㆍ명 때에 이르기까지 도학 하는 선비가 적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것을 계속해서 모은 사람이 없었으며, 또 《사전(史傳)》에 기록되어 있는 것도 너무 간략하거나 빠진 것이 많아서, 진실로 뒤에 오는 학자들을 위해 불행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말이나 행실로서 여러 책에 흩어져 있는 것을 모아 《이학통록(理學通錄)》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직 그 원고가 다 되기 전에, 명나라 유학자 사탁(謝鐸)이 지은 《이락속록(伊洛續錄)》을 보고는, 그것은 너무 성기고 간략하여 불완전하다 하여 끝내 자기 책을 만들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자 이후의 여러 학자들의 학술을 참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선생은 시 짓기를 좋아하여 도연명과 두보의 시를 즐겨 보았으나, 늙어서는 주자의 시를 더욱 좋아하였다. 그의 시는 처음에는 매우 맑고 화려하였으나, 뒤에 와서는 화려한 것은 깎아 버리고, 오로지 전실(典實)하고 장중하며 담박한 데로 돌아가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또 그의 문장은 6경을 근본으로 하고 옛글을 참고로 하여, 화(華)와 실(實)을 모두 겸하고 문(文)과 질(質)이 모두 알맞아, 웅혼(雄渾)하면서도 전아(典雅)하고 청건(淸健 청신하고 강건함)하면서도 화평(和平)하였으니, 그 돌아간 곳을 따져 보면 순수하게 한결같이 바른 것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 그 필법에 있어서는 처음에는 진법(晉法)을 본받다가, 뒤에는 또 여러 가지 체를 취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굳세고 건실하며 방정하고 엄한 것을 주로 삼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글씨 한 자만 얻어도 마치 많은 금을 얻은 듯 보배롭게 여겼다. 그의 시문의 아름다움과 서법의 묘함은, 온 세상이 모두 스승으로 본받았으니, 여기에서 “덕이 있으면 반드시 말이 있고, 두루 통한 재주는 능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따위는 선생에게 있어서는 여사(餘事)로 한 것이니, 그것이 어찌 선생의 인격의 경중에 관계되겠는가.
처음에 선생은 자신의 덕과 재주를 깊이 감추고 학문을 가지고 가볍게 남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에 있어서는 아무도 그의 학식을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혹은 시인이라 보기도 하고, 혹은 세속 밖의 사람이라 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바르게 배운 것이나, 참되게 얻은 것이나, 또 남모르게 날로 빛나는 충실한 속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가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히 있게 된 뒤로, 나이가 많을수록 덕이 더욱 높아지고, 마음가짐이 더욱 높이 밝아지며, 도를 행함이 더욱 친절해지고, 스스로 얻은 것이 날로 깊어져서 그를 따라 노는 사람이 많아지자, 그제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동방에 참다운 선비가 난 줄 알아서, 아는 이나 모르는 이나 모두 퇴계 선생이라 일컬었다.
선생은 고향에 있을 때에는 그저 신실하여 남과 별다른 것이 없었다. 고을 사람으로서 착한 사람은 그의 도를 사모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은 그의 의를 두려워하여, 무슨 일을 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선생이 어떻게 생각할까 염려하였고, 어떤 의문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그에게 물어 결정을 지었다. 그를 공경하기는 신명같이 하였고, 그를 믿기는 시귀(蓍龜)와 같이 여겨, 조정에서 벼슬하는 어진 이나 시골의 베옷 입은 선비로서 의심되고 어려운 것을 편지로 질문하는 사람이 잇따랐다. 그리고 성심으로 공경하고 심복함을 끝까지 게을리하지 않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대개 무슨 의논이 있을 때에, 선생의 의견이라면 사람들은 모두 미더워해서 딴소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선생이 돌아갔다는 소문을 듣자, 멀리서나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서 자못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비록 선생의 얼굴을 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여러 날 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리고 태학의 여러 학생과 사방의 많은 선비들이 다투어 와서 조상[吊奠]을 드리니, 사람을 감동시킨 큰 덕을 또한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생은 우리나라의 학문이 끊어진 뒤에 나서 스승을 따라 배운 것도 없고, 오직 초연히 홀로 터득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과 정밀한 깊은 소견과 크고 굳센 절개와 높고 밝은 학문으로 도가 한몸에 쌓여, 말은 백대에 끼치고 공은 선성(先聖)에까지 빛나며, 은택은 후학에 흘러내리니, 동방에서 그런 이를 구한다면 오직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주D-001]진법(晉法) : 동진의 왕희지(王羲之)의 서법을 가리킨다.
[주D-002]시귀(蓍龜) : 점을 칠 때 사용하는 시초(蓍草)와 귀갑(龜甲)을 말한다. 고대에 나라에 중대한 일이 있으면 시초점과 거북점을 쳐서 그 길흉을 판단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매우 공경하고 중요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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