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집_언행록 6_부록

숭종헌의(崇終獻議)

 

융경(隆慶) 경오년(1570, 선조3) 12월 26일 석강(夕講)에서 홍성민(洪聖民)이 아뢰기를,

“요사이 나라가 불행하여 큰 선비가 세상을 떠나자, 유림들이 조상함은 물론이요, 성상께서도 못내 슬퍼하였사옵니다. 그래서 부고를 듣던 날 영의정으로 추증하시니, 온 나라가 모두 감격하였사옵니다. 이 사람은 동방의 종사(宗師)로서 학문을 집대성한 사람이옵니다. 그가 경연에서 아뢴 바는 모두 임금을 바르게 하는 말이니 낱낱이 그것을 추념하여 힘써 행하오면, 이 사람은 비록 죽었으나 그 도는 행하여지는 것이옵니다.”

하였다. 정탁(鄭琢)이 아뢰기를,

“우리 동방에 학문하는 사람이 간혹 있기는 하였지마는, 그 조예의 정밀하고 깊음과 그 실천하는 데 순수하고 굳음에 있어서는 오직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이옵니다. 그리고 그 나아가고 물러남이나, 사양하고 받음은 다 윗사람의 모범이 될 만하였사옵니다. 다만 밝은 임금을 만났으나, 병으로 물러간 뒤로는 여러 번 불러도 오지 않았사옵니다. 그러하오나 성상과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일찍이 잠깐도 잊은 적이 없었사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가 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 특히 의원을 보냈으나, 미처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그 슬픔과 한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하였다. 정탁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대신을 대우하심이 극진하시어 모자람이 없다 하겠사오나, 반드시 그 도를 실행한 뒤에야 비로소 어진 이를 대우하는 도리를 다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당후일기》-
만력(萬曆) 계유년(1573, 선조6) 9월 24일에 임금이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

“이황이 지은 책은 말 한마디, 글자 한 자가 모두 뒷세상에 전할 만한 것이다. 혹 그것이 흩어져 없어지면 반드시 후회가 될 것이니, 교서관으로 하여금 인출(印出)하게 하라.”

하였다. 조목(趙穆)이 사직하면서 올린 글에 “신의 스승 이황은 평생을 학문에 힘써서, 그 공부는 늙어 가면서 더욱 독실하였사옵니다. 그래서 염(濂)ㆍ낙(洛) 이후의 모든 선비들의 바른 전통을 깊이 깨달아 얻었으니, 그 시문이나 논변에 드러낸 것은 모두 사람의 마음을 착하게 하고, 세상의 도를 부지하며, 앞 성인을 이어받고 뒷 백성을 깨우칠 만하였습니다. 그러하오나 그분이 돌아간 뒤에는 그 글이 많이 흩어지고 없어졌사옵니다. 그 손자 안도(安道)가 그것들을 모아보려 하였으나 그 일을 마치기도 전에 또 일찍 죽고, 그 본집에는 그 일을 맡아할 다른 자손이 없어서 그 글은 아직도 묻혀 있는 채 세상에 전하지 않고 있사옵니다. 그러하여 신은 매우 안타깝게 여겨 고을의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그것을 교정하고 정서하여 둘까 하옵니다. 신이 만일 성은을 입어 체직이 된다면 죽기 전에 이 일을 마칠까 하나이다.……” 하였다. -유희춘-
11월 24일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증 영의정 이황은 믿음이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과 어렵게 나아가고 쉽게 물러나는 절개는 옛사람에게서 구해 보아도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 것이옵니다. 또 의리를 떨쳐 나타내고 사문의 도를 도와 일으킨 공은 실로 우리 동방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옵니다. 그 행장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시호가 내리기를 바라는 공론은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옵니다. 청하옵건대, 속히 시행하라고 명을 내리시어 세도(世道)를 격려하소서.”

하였다. -유희춘-
26일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증 영의정 이황은 믿음이 독실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이(理)에는 밝고 의(義)에는 정(精)하여, 그것이 안으로 쌓이면 덕행이 되고 밖으로 나타나면 사업이 되어, 사문(斯文)을 붙들어 세우고 우리의 도를 유지한 공은 실로 우리 동방에 일찍 없었던 일이옵니다. 그를 표창해 높이는 일은 마땅히 성상의 뜻으로써 스스로 결정하여야 할 것이온데, 공론이 일어난 뒤에 도리어 떳떳한 법에 어김이 있다고 핑계 대고 지금까지 주저하고 있사옵니다. 대개 사람의 시호를 논할 때에 반드시 그 행장을 기다리는 것은, 그 사람의 처신과 행사의 자취를 참고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하오나 이황의 도덕의 성대한 바는 밝기가 해와 별과 같거늘, 그런데도 꼭 행장을 기다려서 하려 하시옵니까.”

하였다. 그리고 그날 사간원(司諫院)에서 아뢰기를,

“이황은 백대(百代) 뒤에 났더라도 자질의 빼어남은 세상에 드물 것이며, 끊어진 학문을 인도하여 밝혀 사문(斯文)을 붙들어 세웠으니, 우리 동방에 뛰어난 분으로서, 근대의 여러 선비들이 미칠 바가 아니옵니다.”

하였다. -유희춘-
그날 조강(朝講)에서 대사헌 노진(盧禛)이 아뢰기를,

“이황의 시호를 내리는 일에 있어서, 옛날 법으로 말하오면, 비록 그 행장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황의 도덕은 성상께서도 잘 아시는 바이오니, 특별히 격식 밖의 법을 행하신 뒤에라야, 모든 사람을 격려하여 권하심이 될 것이옵니다.”

하였다. 우상(右相) 노수신(盧守愼)이 나아와 아뢰기를,

“성상의 마음은 매양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시지마는,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사옵니다.”

하였다. 노진이 다시 아뢰기를,

“성상의 생각은 옛날 법을 가벼이 고치고자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진실로 어려워하고 삼가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성상께서 행하시는 일을 꼭 낱낱이 이렇게 하고자 하시면, 사방이 교화를 입어 감화되는 아름다운 모습을 오늘에 볼 수가 없을 것이옵니다.”

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이이(李珥)가 아뢰기를,

“성상의 전교가 비록 마땅하긴 합니다만 명현(名賢)의 행장은 경솔히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 주자 문하에 뛰어난 제자가 적지 않았지만 2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행장이 나온 일이 있었사옵니다. 그러니 이제 만일 공론을 받아들여 시호를 내린다고 한들 그것이 무엇이 잘못이겠습니까. 옛날에는 시호를 반드시 장사 때에 주었는데, 지금 3년이 지나도록 오래되었으니, 그 때문에 급해서 서두르는 것이옵니다. 이제 이미 행장을 짓는 사람이 없고 보면 마땅히 대간의 공론에 의하여 시호를 내려야 하는데도 성상께서 이처럼 어렵게 여기고 계십니다.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에 적지 않게 관계가 되는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받아들여 주옵소서.”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조정기(趙廷機)가 아뢰기를,

“언관들이 시호를 내리기를 여러 번 청하옵는데, 성상께서는 옛 법을 굳이 지키시어 어진 이를 높이는 뜻이 전혀 없으시니, 매우 온당치 않은 일이옵니다.”

하였다. 검토관(檢討官) 김우옹(金宇顒)이 아뢰기를,

“비록 행장은 없으나 박순(朴淳)이 지은 묘지(墓誌)가 있사오니, 거기에 의거하여 시호를 주옵소서.”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뒷날의 폐단이 있을까 두렵다 하시는데, 신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이제 이황이 어진 바는 성상께서도 친히 아시는 바이면서도 오히려 이처럼 어렵게 여기시니, 유림들이 모두 실망하고 있사옵니다. 신은 생각하옵건대, 유림들의 실망은 나라의 큰 걱정이옵니다.”

하였다. 또 정언(正言) 김성일(金誠一)이 아뢰기를,

“국법에 반드시 행장을 기다려서 시호를 주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씨와 행실이 환하게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이황과 같은 경우는 그 도덕과 의리를 행한 것이나, 나가고 머무름의 큰 절개는 푸른 하늘의 해와 같아서, 저 종들까지도 다 우러러볼 수 있는데, 어찌 행장을 기다린 뒤라야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고 하겠사옵니까. 그 지문(誌文)을 꼭 보아야 하겠다는 것은, 그 사람됨을 아직 다 알지 못한 곳이 있다는 말씀 같사온데, 이는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대현(大賢)의 대우를 어찌 통상적인 규례로 할 수 있사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아무리 시호를 주고자 한들 행장이 없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하셨다. 이이가 아뢰기를,

“황이 앞장서서 도학을 밝힌 뒤로, 학자들이 비로소 유학의 본체를 알게 되었으니, 그 공이 가장 크다 할 것이옵니다. 정몽주와 같은 이를 비록 이학(理學)의 조(祖)라고 하지마는 《포은집》을 보면, 의심할 만한 것이 없지도 않사옵니다. 그러하오나 이황의 문집 같은 것은 비록 《이학유편(理學類編)》에 넣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사옵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소신의 일을 아뢰오면, 나라의 법은 오직 돌아가 부모를 뵈옵는 것만을 허하지마는, 신은 지난번에 외조모가 양육해 주신 은혜를 위하여 상소를 올려 가서 뵈옵기를 청하였더니, 역시 허락하셨사옵니다. 신처럼 낮고 모자라는 사람에게도 통상의 규례에 얽매이지 않는 은혜로운 명이 있었사온데, 하물며 황과 같은 대현(大賢)에 있어서이겠사옵니까. 또 오늘의 이 일로써 선비들의 기상이 저상(沮喪)될 것이오니, 만일 이렇게 될 줄을 알았더라면 당초부터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이 일은 다만 한 번 명령만 하오면 될 것이온데, 무엇이 그처럼 어려운지 신은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하였다. 수신(守愼)이 아뢰기를,

“만일 이러다가 그만두오면, 황은 끝내 시호가 없는 사람이 될 것이옵니다.”

하였고, 우옹(宇顒)이 아뢰기를,

“진정 행장이 없다고 하시어 시호를 주지 않으신다면, 시사(時事)를 알 수 있사옵니다.”

하였으며, 이이는 아뢰기를,

“주상께서는 통상의 규례를 예로 들어 이르시지마는, 신은 나라의 큰 일이 잘못될까 걱정되옵니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성세장(成世章)이 아뢰기를,

“옛사람이 행장으로써 시호를 청한 것이 오래되었습니다마는, 그 행장이란 다만 한 집에서 지은 말로서, 그 글은 사실보다 지나친 것인데도 오히려 그것에 의거하여 시호를 주는데, 하물며 한 나라의 공론으로서 그 자손들이 꾸민 말과는 그 고하의 차이가 현저한 데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세상에 비상한 사람이 있으면 그 대우도 마땅히 격식을 벗어나서 해야 할 것이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이 뜻을 참작해 주옵소서.”

하였고, 수신이 아뢰기를,

“신이 듣자오니, 황의 집 자손들은 시호를 청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오니, 만일 특별히 내리는 명령이 없사오면, 아마 시호를 주실 날이 없을까 하옵니다. 그 자손들로서는 그 유언을 받들어 이미 감히 청하지 않사온데, 성상께서 특별한 명령을 내리시면, 그것은 위와 아래가 모두 체통을 세웠다고 할 수 있겠사옵니다.”

하였다. -《당후일기》-
30일 주강(晝講)에서 김우옹(金宇顒)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명하여 이황에게 시호를 내리신 것은 참으로 훌륭한 뜻이옵니다. 황이 일찍이 올린 《성학십도》에서 그 학문의 공을 볼 수 있사옵니다. 성상께서도 한가한 때에 특별히 그것을 보시고 거기에 힘을 쓰시오면, 그 사람은 비록 없어졌사오나 그 도는 행하여질 것이오니, 얼마나 크게 다행한 일이겠사옵니까.”

하였다. -김우옹의 경연기사-
만력(萬曆) 경술년 광해군 2년 에 관학생과 팔도에 유생ㆍ대간과 정부에서 차례로 글을 올려 다섯 현신의 종사(從祀)를 청하였다. 그리고 6월 1일에는 양사에서 합계(合啓)를 올려 아뢰기를,

“신들이 다섯 현인 종사의 일을 대궐 문 앞에 엎드려 호소하온 지 이미 한 달이 넘었사옵니다. 그래도 아직 허락하지 않으시니,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사옵니다. 선조 때부터 관학생과 유생들이 진심을 토로하여 연이어 소장을 올린 지가 이미 몇 해나 되었사옵니까. 대개 도학은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같아서, 하루도 밝지 않으면 나라의 정신과 명맥을 붙들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왕은 도학을 마땅히 높일 것과 공의(公議)를 막기 어려움을 깊이 아시어, 뒷날을 기다리라는 하교를 내리셨고, 성상께서도 또한 3년 안에 유생들의 상소에 대답하시기를, ‘상하간에 성의가 이미 통하였으므로, 선왕이 미처 하시지 못한 법을 오늘에 거의 거행하게 되었다.’ 하시었사옵니다. 그래서 높고 낮은 관리들은 서로 경사롭게 여겨 목을 빼어 기다렸사옵니다. 그러나 성상의 비답(批答)은 한결같이 굳게 거절하시는 내용이니 신들은 삼가 의심되는 바가 있사옵니다. 그 종사하고 안 하는 것이, 다섯 현신의 학문과 공덕에야 본래부터 손해나 이익 됨이 없겠지만, 그들을 높이고 보답하는 일이 모든 사람이 새롭게 주목해 보는 오늘에도 아직 시행되지 않고 있으니, 어찌 밝은 시대의 하나의 큰 흠이 아니겠사옵니까. 존숭하는 일을 잘하고 못하는 것은 사문(斯文)의 성쇠에 관계되는 일이라 더욱더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없사옵니다. 청하옵건대, 선정신(先正臣)인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廸)ㆍ이황(李滉) 등을 아울러 문묘에 종사하도록 명령하시어, 여망에 답하여 주옵소서.”

하였다. 답하기를,

“대신들과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7월 16일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다섯 현인들의 성묘(聖廟 문묘) 종사를 대신들에게 물었더니,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은 말하기를, ‘신은 전날 성상께서 물으셨을 때 이미 다 아뢰었기 때문에, 오직 성상께서 결단하여 행하시는 것만 남았습니다. 상께서 재결하소서.’ 하였사옵고,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은 말하기를, ‘우리 동방의 도학에 있어서는 신라 때부터 고려 이후로 그러한 사람을 보기 드물었사온데, 우리 성조에 이르러 비로소 다섯 현신이 나와 염(濂)ㆍ낙(洛)ㆍ관(關)ㆍ민(閩)이 끼친 사업을 이 세상에 크게 밝혔으니, 그들을 존경해 높이고 그 공을 보답하는 일을, 마땅히 제때와 의논해서 시행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까지 끌어온 것은 실로 이 성세(聖世)에 그 법을 누락한 것이옵니다. 이 때문에 선비들의 여론은 날로 격렬해지고, 온 나라의 여론도 다 같이 이를 말하고 있사옵니다. 오직 밝으신 성상께서 결연히 행하시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사옵니다. 또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은 말하기를, ‘다섯 신(臣)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탑전(榻前)에서 마침 성상의 물으심을 받들어 이미 다 아뢴 바이옵니다. 이제는 선비들의 의논도 이미 다 정해졌고, 온 나라의 여론도 이미 한결같은데, 아직 실행되지 않은 것은 오직 성상의 한 말씀뿐이옵니다.’ 하였사옵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윤승훈(尹承勳)과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한응인(韓應寅)도 말하기를, ‘다섯 현신 종사의 일에 대하여서는 선비들의 의논이 이미 정해져 있고, 나라의 여론도 한결같사오니, 오직 성상께서 결단을 내려 행하시는 데 있을 뿐이옵니다.’ 하였사옵고,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조정의 크고 작은 의논에 어찌 흑백의 차이가 없겠사옵니까마는, 다섯 현신의 종사에 있어서야 어느 누가 이의 있는 사람이 있겠사옵니까. 선조 대왕은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정성이 극진하셔서, 특히 유신들에게 《유선록(儒先錄)》을 짓도록 명하여 항상 그것을 보고 살피어 크게 칭찬을 하셨으니, 네 현신이 사후에 대우를 받은 것이 지극하였다 하겠사옵니다. 그리고 이황에 있어서는, 선조(先朝) 때에 존경과 신임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지금 살아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직접 보았고, 그 뒤에 난 말학(末學)으로서는 비록 그 실행과 학문이 얼마나 깊은가를 헤아려 알 수가 없지마는, 그의 몸을 단속하고 도를 행한 법과 글을 쓰고 말을 한 뜻을 살펴본다면, 그 순수하여 한결같이 바른 데서 나온 것임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현신들의 그 도덕의 아름다움과 학문의 공으로써도 종사의 반열에 참여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이라야 비로소 종사될는지 알 수 없겠사옵니다.’ 하였사옵니다. 기자헌(奇自獻)은 금부에서 죄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감히 의견을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대신들의 뜻이 이러하옵기에 감히 아뢰옵니다.”

하였다. 이에 전교하기를,

“헌의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또 아뢰기를,

“다섯 현신의 종사에 대하여, 헌의한 대로 시행하라고 판하하시어, 온 나라 백성들이 여러 해를 두고 바라던 일이, 비로소 성상께서 왕위를 이은 초기에 이루어졌사오니, 안팎이 서로 경하하고 사기가 백배나 더하였사옵니다. 이것은 실로 세도(世道)를 붙들어 세우고, 지극한 다스림을 회복하는 하나의 큰 기회이옵니다. 신들이 예를 관장하는 관사에서 직임을 수행하다가, 마침 세상에 드문 좋은 일을 만나오니, 즐겁고 감격스러운 마음 표현할 길이 없사옵니다. 종사(從祀)의 의식은 마땅히 지금 속히 거행해야 하겠지만, 그 절목에 있어서 참고할 만한 전례가 없사옵니다. 마땅히 따로이 제문을 만들고 예관을 보내어 그 집 사당에 제사하게 하고, 또 문묘에 제사를 베풀어 고유(告由)하고, 위패를 만들어 동서 양쪽의 결채에 나누어 배치하는 것이 좋을 듯하온데,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떠하올까 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윤허한다.”

하였다. 그래서 예조에서 아뢰기를,

“대신들과 의논하였더니, 완평부원군 이원익(李元翼), 좌의정 이항복(李恒福), 우의정 심희수(沈喜壽)는 말하기를,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야 하고, 또 성묘(聖廟)에 아뢰는 것도 그렇게 해야 하나, 종사 같은 큰 예에 있어서는 옛날에 반드시 참고할 만한 글이 있었을 것이오니, 널리 그것을 참고하여 행하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하였사옵고, 영의정 이덕형(李德馨), 영중추부사 윤승훈(尹承勳), 청평부원군 한응인(韓應寅) 등은, ‘이런 성대한 예식에 있어서 제관을 보내어 제사하고 아뢰는 것이 마땅하오니, 오직 예조에서 성인의 예법을 널리 참고해서 처리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이 행사는 유교의 큰일로서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기회이온데, 양쪽 월랑[廡]에 종사하는 반열에 있는 마융(馬融)이나 두예(杜預) 같은 이들은 중종 때 바로잡아 출향(黜享)하기로 한 사람들이옵니다. 그런데도 옛날의 잘못을 그대로 따라, 아직도 처치하지 못하온 것은 참으로 예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그러므로 중종의 법을 본받아 여러 사람의 이목(耳目)을 한 번 새롭게 하려면, 지금이 또한 그 기회일 것이오니, 예조를 시켜 잘 살피시어 행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나이다. 대신들의 의견이 이러하옵기에 감히 아뢰옵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알았다. 유신들로 하여금 성인의 법을 널리 참고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주C-001]숭종헌의(崇終獻議) : 숭종은 죽은 이를 추숭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구체적인 방법은 임금이 치제(致祭)하거나 시호를 내리는 것, 문묘에 종사하는 것 등이다. 헌의는 신하들이 자신의 의견을 임금에게 아뢰는 것이다. 이 글에는 이황에 대한 제반 추숭과 관련한 신하들의 헌의가 실려 있다.
[주D-001]이학유편(理學類編) : 명나라 장구소(張九韶)가 주돈이(周敦頤)ㆍ정호(程顥) 형제 이하 몇 명이 논설한 성리학 관련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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