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사설(星湖僿說) > 성호사설 제11권 > 인사문(人事門)
서원(書院)
우리나라의 서원은 순흥(順興)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맨 먼저 창설되었고, 풍기(豐基)의 역동서원(易東書院)이 다음으로 설립되었다. 근세에 와서는 그 조상이 조금만 이름 있는 벼슬을 하였고 그 자손이 현달(顯達)한 자들이면 서원을 세우지 않는 자가 없으니, 그 폐단이 너무 심하다 하겠다. 심지어는 공자 이하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된 이들까지도, 따로 항간(巷間)에서 향사(享祀)하면서, 주자가 창주서원(滄州書院)에서 석전(釋奠)을 행한 것으로 핑계를 삼으니, 주자의 일에 대해서는 감히 말을 할 수 없거니와 공자는 성균관과 각 군현(郡縣)에서 향사하는 것으로 충분한데, 한 고을 안에서 이곳저곳에 겹쳐서 향사하는 것은 참람하고 모독되는 일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물며 왕의 작위(爵位)로 높이어 팔일무(八佾舞)로 향사하는데, 어찌 사람마다 행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퇴계의 말에 “창주서원의 석전은 선생이 만년에 도통(道統)을 자임(自任)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예를 베풀어 의심치 않았으나, 만약 다른 사람으로서 함부로 이것을 본받으려 한다면 그것은 크게 어리석은 짓이 아니면 망령된 일이다.”고 하였다. 나의 생각에도 성탕(成湯)과 무왕(武王)은 걸(桀)과 주(紂)를 주벌(誅伐)하였고, 이윤(伊尹)은 그 임금을 내쳤으며, 순(舜)은 부모에게 고하지 않고 장가들었지만 이런 일은 오직 이들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고, 주자의 석전도 그 뜻이 이와 같다고 여겨진다.
서원(書院) :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강론하고 옛날 성현(聖賢)의 향사를 받드는 곳.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이르는데, 조선 중종(中宗) 36년에 풍기군수(豐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고려 명현 안향(安珦)을 주벽으로 모셨으며, 명종(明宗) 5년에 소수(紹修)라는 사액(賜額)이 있었다.
역동서원(易東書院) : 고려 명현 우탁(禹倬)을 주벽으로 모셨다.
문묘(文廟) :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니, 사성(四聖) 십철(十哲) 및 중국의 역대 명현과 우리나라 신라 이래의 명현 18위를 배향하였다.
창주서원(滄州書院) : 주자(朱子)가 창건한 서원인데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ㆍ명도(明道) 정호(程顥)ㆍ이천(伊川) 정이(程頤)ㆍ강절(康節) 소옹(邵雍)ㆍ횡거(橫渠) 장재(張載)ㆍ연평(延平) 이동(李侗)의 6위(位)를 배향하였다.
팔일무(八佾舞) : 옛날 천자의 무악(舞樂)의 이름이니, 종묘와 문묘의 큰 제사에 악생(樂生) 64명이 8열로 벌여서서 추는 문무(文舞) 및 무무(武舞)이다.
중국의 서원은 처음에 네 곳이 있었다. 응천부 서원(應天府書院)은 부민(府民) 조성(曹誠)이 세웠는데, 송 진종(宋眞宗)이 서원의 이름을 하사하였고,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은 남당(南唐) 승원(昇元 937~943) 연간에 세웠으며 태평(太平) 2년에는 강주 지사(江州知事) 주술(周述)이 구경(九經)을 하사하기를 청하자, 이를 허락하였다. 또 악록 서원(嶽麓書院)은 송 태조(宋太祖) 개보(開寶) 연간에 중담수(中潭守) 주형(朱泂)이 세워 이름을 하사한 것이고, 석고 서원(石鼓書院)은 당(唐) 나라 원화(元和 헌종(憲宗)의 연호. 806~820)연간에 형주(衡州) 사람 이관(李寬)이 세웠는데, 《사문유취》에 나와 있다.
그 후에 모두 퇴락되었는데, 악록 서원은 송 나라 건도(乾道 효종(孝宗)의 연호. 1165~1173) 연간에 유공(劉珙)이 중수했는데 장남헌(張南軒)의 기(記)가 있고, 석고 서원은 송 나라 순희(淳熙 효종의 연호)연간에 송약수(宋若水)가 확장했는데 회옹(晦翁 주자의 별호)의 기가 있으며, 백록동 서원은 회옹이 중수했는데 여동래(呂東萊)의 기가 있으니, 상고하면 소상히 알 수 있다.
다만 응천 서원의 전말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며, 아호 서원(鵝湖書院)이 또 하나 첨부되어 모두 다섯이었는데, 이곳은 주자와 여동래 두 선생이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 및 그의 형 육구령(陸九齡)과 함께 도를 강론한 곳이다.
이 서원은 송 나라 때에 이미 세워졌고 명 나라 때 이몽양(李夢陽)이 중건했으나, 그 후에 다시 퇴락되었는데, 명 나라 만력(萬曆 신종(神宗)의 연호. 1573~1620) 연간에 남창 태수(南昌太守) 유왈녕(劉曰寧)이 새로 중창(重創)하였고, 태복경(太僕卿) 비요년(費堯年)이 그 아들에게 명하여 보조하게 하였다.
장남헌의 악록기(嶽麓記)에, “유후(劉侯)가 이를 중수한 의도가 어찌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담화나 나누고 이록(利祿)을 위해 과거를 도모하며, 또한 언어와 문사(文辭)의 재주나 익히려고 했던 것이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로 본다면 그 때에 이미 습속의 큰 폐단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뿐이 아니라, 각기 색목을 정하여 나가고 물러가는 데도 서로 구별을 하며, 당파를 모으고 다른 당을 공격하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또 하등에 속하는 자들은 서원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부역을 회피하는 곳으로 삼아 학문을 강론하는 것은 도외시하고 있으니,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도 없다.
맨처음에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고려의 유학자 문성공(文成公) 안 향(安珦)과 안축(安軸)ㆍ안보(安輔)를 향사(享祀)했는데, 신재가 죽은 후에 또 신재를 함께 향사하였다.
신재가 또 해주에 문헌 서원(文憲書院)을 세워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을 향사하였고, 그 후에 퇴계가 풍기(豊基)에 역동 서원(易東書院)을 세워 좨주(祭酒) 우탁(禹倬)을 향사하자, 이로부터 조금만 명성이 있는 자는 반드시 서원을 세웠으며, 벼슬이 높고 자손이 번성한 자는 그 유람한 곳과 부임했던 고을마다 향사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근세에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에 그 폐단을 간곡히 말하고, 도내의 여러 서원을 열록하여 경중을 가려 훼철할 것을 청했으나, 조정에서 시행하지 않았다.
수십 년 전에 조정에서 명을 내려 한 사람을 위하여 서원을 거듭 세우는 것을 금지했으나 권문 세가의 집은 금지하지 못했으며, 또 금령이 내린 후에도 함부로 세운 자는 훼철할 것을 명했으나 또한 훼철을 모면한 자가 많았으니, 법령의 문란함이 이와 같다.
이미 고을에 향교가 있는 이상 서원은 또 필요하지 않은 것이며, 만약 향사를 폐할 수 없는 향선생(鄕先生)이 있다면 반드시 조정의 명을 기다려서 향교의 옆에 사당을 세우고 한두 사람을 향사하는 것이 옳을 것이고, 향교와 거리가 먼 곳에는 응천 서원의 규례와 같이 서재를 세우도록 하고 사람은 향사하지 않을 것이니, 이는 금령 밖에 있는 것이다.
서원(書院) : 《類選》 卷4下 人事篇6 治道門3.
남당(南唐) : 오대(五代) 열 나라 가운데 한 나라. 이변(李昪)이 금릉(金陵)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당이라 했는데, 《사기》에는 남당이라 칭함. 무릇 세 임금을 거쳐 건국한 지 39년 만에 송 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구경(九經) : 《주례》ㆍ《예기》ㆍ《의례》ㆍ《좌전》ㆍ《공양전》ㆍ《곡양전》ㆍ《시경》ㆍ《서경》ㆍ《주역》인데, 일설에는 《시경》.ㆍ《서경》ㆍ《주역》ㆍ《예기》ㆍ《춘추》ㆍ《효경》ㆍ《논어》ㆍ《맹자》ㆍ《주례》 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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