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전(釋典)의 범문(梵文)에 대한 변증설

 

(고전간행회본 권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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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釋家)의 범문(梵文)을 유가(儒家)에서 거론해서는 안 될 것이나, 박식(博識)한 이로서는 또한 몰라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가끔 기록해 놓은 것들을 지금 대략 수록한다.
육심(陸深)의 《촉도잡초(蜀都雜抄)》에 “범문은 매우 자상하여 과일 같은 것도 다섯 가지 용어(用語)로 그 형태를 표현하였다. 예를 들면 대추[棗]나 살구[杏] 등은 핵과(核果)라 이르고, 배[梨]나 벚[柰] 등은 부과(膚果)라 이르고, 야자(椰子)나 호도(胡桃) 등은 각과(殼果)라 이르고, 솔씨[松子]나 잣씨[柏仁] 등은 회과(檜果)라 이르고, 대두(大豆)나 소두(小豆) 등은 각과(角果)라 일렀다. 상고하건대, 자서(字書)에는 겉이 공(空)하거나 거치른 껍질이 있는 것을 회과(檜果)라고 했다.” 하였다.
출가(出家)한 사람을 필추(苾蒭)라 한다. 서천축(西天竺)에 ‘필추’라는 만초(蔓草)가 있는데, 이 풀이 오덕(五德)을 갖추었으므로 출가한 사람에 비유하여 ‘필추’라 이름하였다.
비구(比丘)ㆍ비구니(比丘尼)ㆍ식차마나(式叉摩那)ㆍ사미(沙彌)ㆍ사미니(沙彌尼) 식차마나는 학법녀(學法女)로 지금의 신중[尼]인데, 머리를 기른 신중이다. 이것이 출가 오중(出家五衆)이다.
우바새(優婆塞) 불법(佛法)에 친근 승사(親近承事)하는 속인(俗人)이다.
우바이(優婆夷) 우바새처럼 불법에 친근 승사하는 속녀(俗女)이다.
바라밀(婆羅密) 도피인(到彼人)과 같은 말이다.
일체(一切) 시방(十方)과 삼세(三世)이다.
여래(如來) 본각(本覺)의 이름은 여(如)이고, 시각(始覺)의 이름은 내(來)인데, 본각과 시각이 실상은 다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합해서 여래(如來)라 한다. 이렇게 보면 중생(衆生)은 본각만 있고 시각은 없으니, 이는 불래(不來)와 같은 것이다.
보살(菩薩) 보는 보제(菩提)로 각(覺)의 뜻인데 이른바 불과(佛果)를 구(求)하는 것이고, 살은 살타(薩埵)로 유정(有情)의 뜻인데 이른바 교화된 중생이다.
마하살(摩訶薩) 마하(摩訶)는 대(大)의 뜻이다.
문수사리보살(文殊師利菩薩) 이는 묘길상(妙吉祥)의 뜻이니 신해(信解)의 지(智)를 표(表)함이요, 또한 묘덕(妙德)이라고도 하니 이는 증지(證智)를 표함이다. 그러므로 ‘문수사리’라 한다. 《범어와정(梵語訛正)》에는 만수실리(曼殊室利)라 하였다.
보현보살(普賢菩薩) 체성(體性)이 주편(周遍)한 것을 보(普)라 하고, 인연을 따라서 성덕(成德)한 것을 현(賢)이라 한다.
보안보살(普眼菩薩) 청정(淸淨)한 제법(諸法)을 넓게 보니 이는 대지보안(大智普眼)이요, 중생을 널리 제도(濟度)하여 성불(成佛)케 하니 이는 대비보안(大悲普眼)이다.
미륵보살(彌勒菩薩) 이는 자씨(慈氏)인데 자(慈)는 곧 그의 성씨(姓氏)이고 이름은 아일다(阿逸多)이다. 이는 무승(無勝)의 뜻이니, 그가 수승한 덕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의 성씨를 들어 미륵(彌勒)이라고만 일컫는다.
세존(世尊) 제10호(號)이다. 그 위에는 호가 없으니, 세상에서 높인 바가 되었다. 일체불(一切佛)이 모두 10호가 있다.
다라니(陀羅尼) 이는 총지(摠持)이다.
청량(淸涼) 모든 의혹[惑]이 마음을 불태우면 극렬한 번뇌가 일기 때문에 진여(眞如)를 좋아하면 이것이 곧 청량이다.
진여(眞如) 진(眞)은 진실한 본체(本體)요, 여(如)는 불변(不變)의 성(性)이다.
열반(涅槃) 이는 정명(正名)이니 곧 적멸(寂滅)이다.
바라밀(波羅密) 바라는 피안(彼岸)이다. 밀(密)은 구족하게 하는 말인데 이를 번역하면 도(到)이다. 만일 회문(廻文)의 순(順)으로 따진다면 이는 속(俗)에서 응당 도피안(到彼岸)이라 해야 한다. 생사(生死)를 여의는 데 피안을 기준으로 하여 번뇌의 중류(中流)를 건너 피안의 열반에 이름을 말한다. 깨닫기 전에는 8만 4천의 번뇌뿐이지만, 깨달은 후에는 8만 4천의 바라밀이 된다.
사마타(奢摩他) 이는 지(止)의 뜻이다.
가라라신(歌羅邏身) 이는 박락(薄酪)이니, 정액(精液) 그대로 어머니 태(胎)에 있을 때를 말한다. 부모의 정혈(精血)을 받은 후 7일 이전은 박락과 같다.
마니(摩尼) 이는 여의(如意)이다.
사문(沙門) 출가인(出家人)이다.
바라문(婆羅門) 집에 있는 이로 유지인(有智人)이다.
아승기(阿僧祇) 이는 무수(無數)이다.
선나(禪那) 이는 정려(靜慮)이다.
유순(由旬) 이는 40리(里)인데 일설에는 16리라고도 한다.
금강(金剛) 세 가지 뜻이 있으니, 견(堅)ㆍ이(利)ㆍ명(明)이다.
반야(般若) 역시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실상(實相)ㆍ관조(觀照)ㆍ문자(文字)이다.
겁파(劫波) 이는 시분(時分)의 뜻이니, 대겁(大劫)ㆍ소겁(小劫)ㆍ장시(長時)ㆍ단시(短時)가 느리고 빠름은 비록 다르지만 통틀어 시분이라 한다.
단함(檀含) 만행자(萬行者)는 범음(梵音)으로 단나(檀那)인데, 이는 보시(布施)의 뜻이다. 함(含)은 함섭(含攝)한다는 뜻이요, 만행은 보살(菩薩)이 때에 따라 행하는 행을 말하는데, 이 행이 꼭 만(萬)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그 큰 숫자만을 들었다.
제바반두(提婆盤豆) 이는 천친(天親)이니, 무착(無着)의 아우이다.
아승거(阿僧佉) 무착(無着)이라고도 하고 범음(梵音)으로 아승거이니, 천친(天親)의 형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 이는 능인 적묵(能仁寂黙)이다.
승가람마(僧伽藍摩) 이는 중원(衆園)의 뜻이니, 승가(僧伽)는 곧 거기에 머무르는 대중[衆]이요, 남마(藍摩)는 곧 머무를 집이다.
안타회(安陀會) 중에게 세 가지 옷이 있는데, 이는 곧 오조(五條)인 하품의(下品衣)이다.
울다라(鬱多羅) 칠조(七條)인 중품의(中品衣)이다.
승가리(僧伽梨) 이는 곧 구조(九條) 내지 십오조(十五條)인 상품의(上品衣)이다. 복전의(福田衣)라고도 하는데, 이는 수전(水田)을 상징한 것이다.
두타(頭陀) 이는 두수(抖擻)의 뜻이니, 번뇌를 씻어 없애는 것이다.
아나함(阿那含) 이는 불래(不來)인데, 또는 불환(不還)이라고도 한다.
가리(歌利) 이는 극악(極惡)이다.
실라벌(室羅筏) 이는 사위(舍衛)이다.
기원(祇洹) 기수(祇樹)와 같은 말이다.
파악포마(破惡怖魔) 대비구(大比丘)이다.
벽지(辟支) 이는 독각(獨覺)이다.
무학(無學) 이는 나한(羅漢)이다.
초심(初心) 초학(初學)이니, 즉 배우는 사람이다.
가릉빈가(迦陵頻伽) 선금(仙禽)이다. 이 새는 소리가 매우 곱기로 유명한데, 불음(佛音)도 이와 같다.
문수(文殊) 이는 묘덕(妙德)이다.
찰제리(刹帝利) 이는 왕족(王族)이다.
전타라(旃陀羅) 이는 살자(殺者)이다.
마등가(摩登伽) 이는 기녀(妓女)이다.
바비가라(婆毗迦羅) 이는 황발(黃髮)이니, 외도(外道)이다.
사마타(奢摩他) 이는 지(止)의 뜻이다.
삼마발제(三摩鉢提) 이는 관(觀)이다.
삼마제(三摩提) 삼마지(三摩地)라고도 하고 삼매(三昧)라고도 하는데, 이는 정(定)이다.
도라면(兜羅綿) 빛은 서리[霜]처럼 희고 질은 부드러운데, 불수(佛手)의 부드러움도 이와 같다.
진제(眞際) 진심(眞心)이며, 실제(實際)이다.
미려거(彌戾車) 이는 낙구예인(樂垢穢人)이다.
업종자(業種者) 전도(顚倒)며, 망혹(妄惑)이다.
아인과(亞人果) 한 가지에 세 개씩 달린다.
청정안(淸淨眼) 확연 조료(廓然照了)이다.
가전연비라지자(迦旃延毗羅胝子) 미경(迷境)에 집착된 외도(外道)이다.
기바(耆婆) 이는 장수천신(長壽天神)이다.
말가리(末伽梨) 곧 가전비라(迦旃毗羅)의 무리이다.
암마라(菴摩羅) 아나율(阿那律)은 염부제(閻浮提)의 과일을 마치 장중(掌中)의 암마라과(菴摩羅果)처럼 보았다.
나율(那律) 이는 무루 나한(無漏羅漢)이다
범지(梵志) 외도(外道)의 통칭이다.
투회(投灰) 고행(苦行)하는 외도(外道)이다.
대다라니(大陁羅尼) 곧 수릉 정관(首楞正觀)이다.
비사(毗舍) 상고(商賈)이다.
수타(首陀) 농부(農夫)이다.
파라타(頗羅墮) 이근(利根)이다.
전타라(旃陁羅) 괴회(魁膾)이다.
암라식(菴羅識) 만법(萬法)을 환히 비추어 분별이 없으므로 대원경지(大圓鏡智)라 한다.
암마라(菴摩羅) 이는 무구(無垢)이다.
아비달마장(阿毗達摩藏) 이는 무비법(無比法)이다.
열반승(涅槃僧) 중의 내의(內衣)이다.
바니사타(婆尼沙陀) 진성(塵性)을 말한다.
약왕(藥王)ㆍ약상(藥上) 두 법왕자(法王子)인데, 그들이 말하기를 “나는 무량겁(無量劫)토록 세상의 양의(良醫)가 될 것이다. 입 속에는 무릇 10만 8천 종류나 되는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초목(草木)ㆍ금석(金石)이 들어 있다.” 하였다.
아나율(阿那律) 이는 무탐(無貪)이다.
주리반특가(周利槃特迦) 이는 계도(繼道)이다.
교범발제(憍梵鉢提) 이는 우시(牛呵)이다.
필릉가바차(畢陵伽婆蹉) 이는 여습(餘習)의 뜻이다.
부당왕찰(浮幢王刹) 세계(世界)의 바다 밖에 있는 모든 향수해(香水海)의 통호(通號)이다.
대세지(大勢至) 지혜(智慧)의 빛으로 일체(一切)를 두루 비추어, 삼도(三塗)를 떠나서 무상력(無上力)을 얻게 하므로, 대세지라고 한다.
관음(觀音) 관세음(觀世音)이란 원오 원응(圓悟圓應)의 호이다. 소리[音]에다 관(觀)이라고 한 것은 관지(觀智)로 비추어 보는 것이요, 이식(耳識)으로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석(帝釋) 제석이 도리천주(忉利天主)가 되어 삼십삼천(三十三天)을 통솔한다.
사천왕(四天王) 제석 밑에서 신하 노릇을 하면서 세계(世界)를 거느린다.
사천태자(四天太子) 곧 나타(那吒)의 유인데, 모두가 능히 귀신(鬼神)을 구사(驅使)한다고 한다.
금륜(金輪)ㆍ속산(粟散) 모두 인왕(人王)인데, 속산은 곧 작은 나라의 임금이다.
거사(居士) 은거(隱居)하면서 뜻을 구하고, 의(義)를 행하여 도를 깨친 이의 칭호이다.
아전저가(阿顚底迦) 이는 무선심(無善心)이다.
삭가라(爍迦羅) 이는 금강(金剛)이니, 견고하여 파괴되지 않는다.
모다라(母陀羅) 인계(印契)의 뜻인데, 묘인(妙印)이 있다.
야율(耶律) 즉 삼장(三藏) 중, 대승(大乘)ㆍ소승(小乘)의 계(戒)에 대한 통칭이다.
소승(小乘) 품법(稟法)으로 계(戒)를 삼아 그 말(末)만을 대강 다스리는 것이다.
대승(大乘) 섭심(攝心)으로 계를 삼아 그 본(本)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열사(熱沙) 만일 음탕한 생각을 단절시키지 않고 선정(禪定)을 닦으려는 자는, 마치 사석(沙石)으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천백겁(千百劫)을 경과해도 다만 열사(熱沙)일 뿐인 것이다.
파순(波旬) 마(魔)의 이름이다.
비판(裨販) 불법(佛法)에 붙어서 탐(貪)하여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마하실달다반달라(摩訶悉怛多般怛囉) 이는 대백산개(大白傘蓋)이니, 곧 장심(藏心)이다. 사계(沙界)를 널리 비추는 것을 대(大)라 하고, 몸에 망혹(妄惑)을 끊는 것을 백(白)이라 하고, 일체(一切)를 덮어주는 것을 산개(傘蓋)라 한다.
남지가(藍地迦) 청면금강(靑面金剛)이다.
군다리(軍茶利) 금강(金剛)의 다른 호칭이다.
비구지(毗俱胝) 또한 대신변자(大神變者)이다.
빈나야가(頻那夜迦) 저두(猪頭)와 상비(象鼻) 두 사자(使者)이다.
장자(長者) 천축(天竺)에서는 거부(巨富)를 장자(長者)라 한다.
다라니(陀羅尼) 이는 총지(摠持)이니, 곧 혜성(慧性)이다.
색건타(塞犍陀) 이는 온(蘊)이다.
발라폐사(鉢羅吠奢) 이는 십이입(十二入)의 입(入)이다.
찰제리(刹帝利) 《명의집(明意集)》에 “이는 전주(田主)이니, 세간대지(世間大地)의 주인으로 곧 왕종(王種)이다.” 하였다.
나율(那律) 곧 아누루타(阿㝹樓駄)인데, 이는 무탐(無貪), 또는 여의(如意)의 뜻이다.
손타라(孫陀羅) 사랑스럽고 예쁜 아내의 이름이다.
우루빈라(優樓頻螺) 이는 목과(木瓜)이니, 가슴팍이 불룩 튀어나와 마치 목과와 같기 때문인데, 마치 지금의 구흉(龜胸)과 같다.
가야(伽耶) 곧 상두산(象頭山)이다.
약차(藥叉)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땅에 있고 하나는 허공에 있고 하나는 하늘에 있다.
나찰(羅刹) 가외(可畏)이다.
구반다(鳩槃茶) 염매귀(厭魅鬼)이다.
비사차(毗舍遮) 담정귀(噉精鬼)이다.
부단나(富單那) 열병귀(熱病鬼)이다.
마혜수라(魔醯首羅) 《화엄경(華嚴經)》에 의하면, 십지보살천(十地菩薩天)의 이름인데, 그는 일념(一念)으로 삼천세계(三千世界)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숫자를 알므로, 용왕(龍王)이 비를 내릴 때면 마혜수라가 떨어지는 빗방울 숫자를 죄다 분별하여 헤아린다고 한다.
실리라(室利羅) 일명은 설리라(設利羅)이고 또는 사리(舍利)라고도 한다.
사리(舍利) 이는 골신(骨身)이다.
굴순포(屈旬布) 이는 면포(綿布)이다.
찬리채(鑽籬菜) 이는 닭[鷄]이다.
수준화(水浚花) 이는 물고기[魚]이다.
이니(伊尼) 이는 사슴[鹿]의 이름이다.
향적반(香積飯) 이는 밥[飯]이다.
향적주(香積廚) 이는 포주(庖廚)이다.
삼매(三昧) 이는 정사(正思)이다. 이를테면, 정(定)에 들었을 때 소연경(所緣境)에서 생각을 바르게 하기 때문에 정사(正思)ㆍ등지(等持)라 한다. 우리나라 원효 법사(元曉法師)가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의 논석(論釋)을 지었는데, 그 초석제목(初釋題目) 가운데 “삼매는 정사이다.” 하였다.
이제 일찍이 보았던 것을 대략 초(鈔)하였는데, 범문(梵文)은 곧 서축(西竺)의 방언(方言)이다. 불서(佛書)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에 중국의 자음(字音)으로 그것을 번역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음절(音切)은 또 중국의 것과 다르니, 그 음에 서축(西竺)의 말이 어찌 다 담길 수 있겠는가. 범서(梵書)는 특히 음에 장점이 있으므로, 동양(東洋)과 서양(西洋)은 어문(語文)의 세계가 판이한 데다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도 다시 구별이 있으니, 그 뜻만 알고 넘어갈 뿐, 그 음은 논하지 않는 것이 옳겠다.
또 불가(佛家)의 어류(語類)를 해석해 놓은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일월(日月) 인도(印度)이다.
일신(日神) 소리야(蘇利耶)이다.
월신(月神) 소마(蘇摩)이다.
화성(火星) 앙아라가(盎哦羅迦)이다.
수성(水星) 부타(部陀)이다.
목성(木星) 물리하파피저(勿哩訶婆跛底)이다.
토성(土星) 사내이선절라(沙乃以宣折囉)이다.
금성(金星) 수갈라(戍羯羅)이다.
일조(日照) 지바하라(地婆訶羅)이다.
화(火) 시기(尸棄)이다.
양염(陽炎) 마리지(摩利支)이다.
불열(不熱) 다사타(茶闍它)이다.
무열(無熱) 아나바달다(阿那婆達多)이다.
맹풍(猛風) 비람신(毗嵐迅)이다.
염해(鹽海) 바갈라(婆竭羅)이다.
수(水) 아가(阿迦)이다.
석(石) 아습마(阿濕麽)이다.
지(池) 하라태(賀邏駄)이다.
주(洲) 제(提)이다.
임(林) 바나(婆那)이다.
안(岸) 다라(多羅)인데, 구명(舊名)은 식다(息多)이다.
지동(地動) 차라(遮囉)이다.
회수(灰水) 차라바니(差羅波尼)이다.
본성(本性) 마등가(魔登迦)이다.
심(心) 질다야(質多耶)이다.
육단심(肉團心) 흘리타야(紇利陀耶)이다.
의(意) 말나(末那)이다.
대슬(大膝) 구치라(拘絺羅)이다.
장대(長大) 지율가(地㗚伽)이다.
부모(父母) 오바제집(鄔婆弟鏶)이다.
부(夫) 바제(婆弟)이다.
부(婦) 바리야(婆利耶)이다.
조부(祖父) 왕사리다(王闍梨多)이다.
동자(童子) 구마라(拘摩羅)이다.
효(孝) 보제류지각(菩提流支覺)이다.
장부(丈夫) 포사(逋沙)이다.
거사(居士) 가라월(迦羅越)이다.
역사(力士) 바리한(婆里旱)이다.
석녀(石女) 선제라(扇提羅)이다.
청정사녀(淸淨士女) 우바새(優婆塞)와 우바이(優婆夷)이다.
중생(衆生) 복호선나(僕呼繕那)이다.
노(奴) 태색가(駄索迦)이다.
걸사(乞士) 비구(比丘)이다.
소사(小師) 탁갈라(鐸曷攞)이다.
제자(弟子) 선려(宣驪)이다.
교(敎) 아함(阿含), 또는 본문급다(本門笈多)라고 한다.
신학(新學) 아이이(阿夷怡)이다.
애(愛) 갈타사(羯吒斯)이다.
지(智) 야나(若那)이다.
지(智) 다가초근(多伽稍根)이다.
의(義) 아시(阿施)이다.
언어(言語) 화타(和陀)이다.
야행(夜行) 자리(遮梨)이다.
환래(喚來) 화야(火夜)이다.
간(慳) 말차라(末差羅)이다.
후(厚) 가나(伽那)이다.
문신(文身) 편선나(便善那)이다.
명(名) 나마(那摩)이다.
품(品) 발거(跋渠)이다.
희(喜) 도라(都羅)이다.
환희(歡喜) 아난(阿難)이다.
환희(歡喜) 난타(難陀)이다.
무지(無知) 마하라(摩訶羅)이다.
와(訛) 갈살(喝薩)이다.
선재(善哉) 바도(婆度)이다.
기재(奇哉) 하호(河呼)이다.
기특(奇特) 하사리이(何奢理貳)이다.
무간의(無慳義) 사비함라(四毗含羅)이다.
치(癡) 모하(慕何)이다.
진에(嗔恚) 제필사(提鞸沙)이다.
심입(深入) 니연저(尼延底)이다.
견래(遣來) 아나(阿那)이다.
견거(遣去) 입식반나(入息般那)이다.
일왕래(一往來) 사다함(斯陀含)이다.
불래(不來) 아나함(阿那含)이다.
무진의(無盡意) 아차말(阿差末)이다.
부동(不動) 두로(頭盧)이다.
구(救) 다라(多羅)이다.
공로(功勞) 나로(那勞)이다.
두수(抖數) 두타(頭陀)이다.
무단정(無端正) 천악신(天樂神) 아수라(阿修羅)이다.
인욕(忍辱) 찬제(羼提)이다.
능활(能活) 기바(耆婆)이다.
견고(堅固) 발건제(鉢犍提)이다.
무유(無有) 니리야(泥犁耶)이다.
무간(無間) 아비(阿鼻)이다.
악(惡) 가리(歌利)이다.
화열(和悅) 바사닉(波斯匿)이다.
무우(無憂) 아육(阿育)이다.
전승(戰勝) 기아(祇阿)이다.
대술(大術) 마하마야(摩訶摩耶)이다.
선치(善治) 비내야(毗奈耶)이다.
인연(因緣) 니타나(尼陀那)이다.
비유(譬喩) 아바타야(阿波陀耶)이다.
미증유(未曾有) 아부달마(阿浮達摩)이다.
불가왕(不可往) 준가(駿迦)이다.
우란(盂蘭) 도현(倒懸)이다.
바나(婆拏) 구도현(救倒懸)이다.
비바사(鼻婆沙) 종종설(種種說)이다.
협장(篋藏) 비륵(毗勒)이다.
분별론(分別論) 비바사바제(毗婆闍婆提)이다.
청량(淸涼) 시라(尸羅)이다.
도피안(度彼岸) 바라밀(波羅密)이다.
사념처(四念處) 비발나사(毗跋那斯)이다.
여의(如意) 마노시야(摩奴是若)이다.
역(力) 바라(婆羅)이다.
원(願) 니저(尼底)이다.
유괴(有愧) 저가(底伽)이다.
찬탄(讚歎) 패닉(唄匿)이다.
성음(聲音) 바사니(婆闍尼), 또는 바바림(婆婆啉)이다.
변재(辨才) 발저바(鉢底婆)이다.
아례(我禮) 화남(和南)이다.
예배(禮拜) 나모실갈라(那謨悉羯羅)이다.
비(悲) 가루나(迦樓那)이다.
심(尋) 비달가(毗怛伽)이다.
사(伺) 비자라(比遮羅)이다.
재시(財施) 달친(達嚫)이다.
타(他) 소위(所謂)이다.
이염(爾焰) 소지(所知)이다.
구(垢) 마라(摩羅)이다.
제일의(弟一義) 바라말타(波羅末陀)이다.
박(縛) 바타(婆陀)이다.
욕(欲) 아라가(阿羅伽)이다.
서(書) 이거(離佉)이다.
구(句) 파타(波陀)이다.
순숙(純熟) 구담(瞿曇)이다.
불휴식(不休息) 건타하제(乾陀訶提)이다.
호현(好賢) 수발타라(須跋陀羅)이다.
정거(淨居) 수타라(首陀羅)이다.
정행(淨行) 바라문(婆羅門)이다.
자각동중생(自覺同衆生) 보살(菩薩), 또는 보제살타(菩提薩埵)이다.
정식(靜息) 염마(琰魔)이다.
지혜(知慧) 반야(般若)이다.
정려(靜慮) 타연나(駄演那)이다.
무동(無動) 아촉(阿閦)이다.
신영(身影) 빈바장자(頻婆長者)이다.
무상(無常) 살가나살(薩迦那薩)이다.
분리(分難) 아라밀(阿羅密)이다.
이합(離合) 살삼마사(殺三摩娑)이다.
사유(思惟) 말제희(末提希)이다.
원(院) 나마(羅摩)이다.
소사(小舍) 구타가(拘吒迦)이다.
주(柱) 곧 번(幡)이다.
향실(香室) 건타구지(犍陀俱胝)이다.
단(壇) 만다라(滿茶邏)이다.
의복(衣服) 진월(震越)이다.
내의(內衣) 사륵(舍勒)이다.
고의(蠱衣) 교사야(憍奢耶)인데, 명주 옷이다.
세면의(細綿衣) 자린타(遮隣陀)이다.
마의(麻衣) 추마(芻摩)이다.
군(裙) 니박사나(泥縛些那)이다.
엄액(掩掖) 승기지(僧祇支)이다.
금대(金帶) 미하(彌訶)이다.
사화(屣鞾) 함박(函縛)이다.
대세포(大細布) 굴순(屈㫬)이다.
목면(木綿) 섬바(睒婆)이다.
겁구(刦具) 가바라(迦婆羅)인데, 즉 목면(木綿)이다.
세면(細綿) 도라면(兜羅綿)이다.
세포(細布) 두구라(頭鳩羅)이다.
견(絹) 나바타(那波吒)이다.
주(酒) 미번(味飜)이다.
정식(正食) 포사니(蒲闍尼)이다.
부정식(不正食) 거사니(佉闍尼)이다.
오담식(五噉食) 반자포선니(半者蒲善尼)이다.
오작식(五嚼食) 반자가단니(半者珂但尼)이다.
정식물(叮食物) 거타니(佉陀尼)이다.
자자식(自恣食) 발화라(鉢和羅)이다.
능후(能嗅) 가라니(迦羅尼)ㆍ갈라나(羯羅拏)이다.
능상(能嘗) 지야시흘박(砥若時吃縛)이다.
초(麨) 단발나(但鉢那)이다.
맥(麥) 가사착(迦師錯)이다.
걸식(乞食) 분위(分衛)이다.
곡(斛) 거리(佉梨)이다.
단(篅) 바하(婆訶)이다.
수이십곡(受二十斛) 마투(摩偸), 또는 재(宰)이다.
인(印) 우단나(優檀那)이다.
곡구(曲鉤) 바리(婆利)이다.
경(磬) 건치(犍稚), 또는 종(鐘) 이름이다.
주(籌) 사라(舍羅)이다.
병(甁) 군지(軍持)이다.
자와(瓷瓦) 치가(稚迦)이다.
노수(瀘水) 살라벌나(薩羅伐拏)이다.
응기(應器) 발다라(鉢多羅)이니, 곧 발(鉢)이다.
철발(鐵鉢) 건속잔(犍俗琖)이다.
연등(燃燈) 제원갈(提洹竭)이다.
백산개(白傘蓋) 살달다(薩怛多), 또는 반달라(般怛羅)이다.
금고(金鼓) 밀사아(密奢兒)이다.
간(竿) 자변지(刺變胝)이다.
당(幢) 탈사(脫闍)이다.
잡색(雜色) 만다라(曼陀羅)이다.
색(色) 구란타(俱蘭吒)이다.
금색(金色) 이니연(伊尼延)이다.
묘색(妙色) 소루바(蘇樓婆)이다.
청색(靑色) 니라(尼羅)이다.
적색(赤色) 아라나(阿羅那)이다.
황색(黃色) 건타라(犍陀羅)이다.
백색(白色) 노혜저가(盧醯咀迦), 또는 맹사야간숙리(虻沙夜間叔離)이다.
자색(紫色) 나차(羅差)이다.
흑색(黑色) 흘리변나흑(訖里變拏黑), 또는 가다(迦茶)이다.
창색(蒼色) 빙가라(氷伽羅)이다.
소색(素色) 수다라(修多羅)이다.
흑광(黑光) 가타라(迦陀羅)이다.
화색(華色) 야수타라(耶輸陀羅)이다.
향(香) 건타라야(乾陀羅耶)이다.
곽향(藿香) 가취(迦臭)이다.
소합(蘇合) 돌로슬검(咄嚕瑟劍)이다.
훈육(薰陸) 군두로(君杜嚕)이다.
모향(茅香) 재바(灾婆)이다.
용뇌(龍腦) 갈포라(羯布羅)이다.
백교(白膠) 살사라바(薩闍羅婆)이다.
사향(麝香) 모모사바하(莫莫娑婆訶)이다.
운향(芸香) 다게라(多揭羅)이다.
침향(沈香) 아가로(阿烥嚧)이다.
안식(安息) 졸구라(拙具羅)이다.
울금(鬱金) 다구마(茶炬磨)이다.
제호(醍醐) 우류만타(優留曼陀)이다.
이구(離垢) 전단(旃檀)이다.
금(金) 소대라(蘇代羅)이다.
은(銀) 아로파(阿路巴)이다.
산호(珊瑚) 발파사복라(鉢擺娑福羅)이다.
호박(琥珀) 아습마게바(阿濕摩揭婆)이다.
거거(車璖) 모바락게랍바(牟婆洛揭柆婆)이다.
마노(瑪瑙) 마라가례(摩羅伽隷)이다.
이구(離垢) 마니주석(摩尼珠石)이다.
적색주(赤色珠) 발마라가(鉢摩羅迦)이다.
적보(赤寶) 견숙가(甄叔迦)이다.
영락(瓔珞) 길전라(吉田羅)이다.
동철(銅鐵) 정용(淨用)이다.
보계(寶髻) 염나시기(罽那尸棄)이다.
대보(大寶) 포체란라(袍體蘭羅)이다.
보적(寶積) 자나가라(刺那伽羅)이다.
육(六) 사(沙)이다.
십만(十萬) 낙문(洛文)이다.
백억(百億) 구지(具胝)이다.
만억(萬億) 나유타(那由他)이다.
무앙수(無央數) 아승기(阿僧祇)이다.
화수(花樹) 아수가무우(阿輸伽無憂)이다.
수(樹) 파력(婆力)이다.
경목(梗木) 가리라고(軻梨羅苦)이다.
한림(寒林) 타(它)이다.
양지(陽枝) 필탁법작(韠鐸法嚼)이다.
초목심(草木心) 우율타(汙栗駄)이다.
화(花) 유변바(有變婆)이다.
천화(天花) 불파제(弗把提)이다.
내화(柰花) 말리(末利)이다.
황백색화(黃白色花) 우발라(優鉢羅)이다.
백련(白蓮) 분타리(分它利)이다.
청련(靑蓮) 구발라(漚鉢羅)이다.
적련(赤蓮) 발특마(鉢特摩)이다.
황련(黃蓮) 구모타(枸某陀)이다.
황백향화(黃白香花) 첨박(瞻搏)을 첨복(瞻蔔)이라 한다.
과(果) 바라(頗羅)이다.
내(柰) 암라(菴羅)이다.
호도(胡桃) 파라사(播羅師)이다.
시(柹) 진두가(鎭頭伽)이다.
율(栗) 독가(篤伽)이다.
이(李) 거릉가(居迦)이다.
사자(獅子) 승가피(僧伽彼)이다.
상(象) 가야(迦耶)이다.
우(牛) 구마제(瞿摩帝)이다.
독자(犢子) 바차부라(婆蹉富羅)이다.
야우(野牛) 실가라(悉伽羅)이다.
미후(彌猴) 마사타(摩斯佗)이다.
토(兔) 사사가(舍舍伽)이다.
서(犀) 갈가(竭伽)이다.
마(馬) 아습바(阿濕婆)이다.
생조명(生鳥鳴) 아습박구(阿濕縛窶)이다.
마이(馬耳) 액온박나(額溫縛拏)이다.
녹(鹿) 리가라(密利伽羅)이다.
묘성안(妙聲雁) 가릉빈가(伽陵頻伽)이다.
야응(夜鷹) 시나(嘶那)이다.
앵무(鸚鵡) 조타(臊陀)이다.
안(雁) 승바(僧婆)이다.
치(雉) 가빈사라(伽頻闍羅)이다.
계(鷄) 구구타(鳩鳩咜)이다.
계족(鷄足) 굴굴타파니(屈屈咜播尼)이다.
원앙(鴛鴦) 작가라바(斫伽邏婆)이다.
백설(百舌) 사라(舍羅)이다.
합(鴿) 가포덕가(伽布德伽)이다.
공작(孔雀) 마전라(摩田羅)이다.
치(鴟) 아리야(阿利耶)이다.
취(鷲) 고율타(姑栗陀)이다.
취족(鷲足) 기사굴(耆闍崛)이다.
조(鵰) 게라사(揭羅闍)이다.
용(龍) 나야(那耶)이다.
용맹(龍猛) 나갈가수나(那曷伽樹那)이다.
교(蛟) 궁비라(宮毗羅)이다.
규(虯) 숙숙라(叔叔羅)이다.
귀(龜) 비라나(毗羅拏), 또는 갈차바(羯車婆)이다.
경(鯨) 마갈(摩竭)이다.
악(鰐) 실수마라(失水摩羅)이다.
역귀(疫鬼) 나리련(羅利連)이다.
화신(火神) 악초니(惡初尼)이다.
풍신(風神) 바유(婆庾)이다.
초적(草賊) 주리(朱利)이다.
사약(蛇藥) 균부살지(菌裒殺地)이다.
황병(黃病) 사가마라(闍迦摩羅)이다.
풍병(風病) 산야사폐(珊若娑廢)이다.
불가치병(不可治病) 아살사(阿薩闍)이다.
생(生) 흘나(仡那)이다.
생사(生死) 말라남(末剌諵)이다.
무량수(無量壽) 무량타(無量陀)이다.
동수(童壽) 구마라습바(鳩摩羅什婆)이다.
방분(方墳) 솔도(窣堵), 또는 원총(圓塚)이다.
총(塚) 사마사나(舍摩奢那)이다.
신자(身子) 사리불(舍利弗), 또는 일추자(日鶖子)이다.
수주(數珠) 발색모(鉢塞莫)이다.
석장(錫杖) 극기라(隙棄羅)이다.
거예(去穢) 가사(袈娑)이다.
중숙의(中宿衣) 안타회(安陀會)이다.
단좌구(壇坐具) 한 폭(幅)의 첩(氎)으로 만든 니사(尼師)이다.
공덕의(功德衣) 가치나(伽絺那)이다.
이는 다 불경(佛經)에 인하여 분문유휘(分門類彙)한 것인데, 그 대강만을 기록했을 뿐이다. 내전(內典)을 읽으면서 이것을 가져 가려운 곳을 긁는다면, 혹 모르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단서(異端書)를 어찌 굳이 알려고 할 필요야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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