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구호(舊號) 고사(故事)에 대한 변증설

(고전간행회본 권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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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를 배척하여 멀리할 경우에는 구이(九夷)니 육부(六部)니 하고, 예우(禮遇)하여 가까이할 경우에는 군자국(君子國)이니 예의방(禮義邦)이니 소중화(小中華)니 하며, 통틀어 말할 경우에는 조선(朝鮮)ㆍ삼한(三韓)ㆍ해동(海東)ㆍ좌해(左海)ㆍ대동(大東)ㆍ청구(靑丘)ㆍ접역(鰈域)ㆍ진단(震檀)ㆍ근화향(槿花鄕)이라 한다. 이는 모두 일반적으로 부르던 고사(故事)인데, 그 근원을 깊이 상고해보면 속사(俗士)들이 알지 못하는 것도 많기 때문에 차례로 그 이유를 인거(引據)해서 변증하여 환히 알 수 있는 자료로 만들고자 한다.
구이(九夷) : 우리나라가 맨 처음에는 구이만 있고 군장(君長)이 없었다. 뒤에 단군(檀君)이 나라를 세우긴 했지만 구이라 칭한 것이다.
육부(六部) : 우리나라가 맨 처음에는 한수(漢水)로 한계를 삼아 한수의 서쪽은 조선(朝鮮), 한수의 남쪽에는 육부가 있어 산곡(山谷)의 여기저기 나누어 웅거하였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군자국(君子國) : 《산해경(山海經)》에,

“해동(海東)에 군자국이 있는데, 이 나라 사람들은 의관(衣冠)을 갖추고 허리에 칼을 찼으며, 서로 양보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다. 또 이 나라에는 근화(槿花)가 있는데, 이 꽃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든다.”

하였고, 또 《고금기(古今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군자국(君子國)은 지방(地方)이 1천 리이고 무궁화 나무가 많다.”

상고하건대, 당 현종(唐玄宗)이 서촉(西蜀)에 몽진(蒙塵)하였을 때 신라(新羅)의 사신(使臣)이 험한 길을 어렵게 걸어서 행재소(行在所)까지 당도하자, 현종이 친히 시(詩)를 지어 하사하면서 신라를 군자국이라 호칭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의방(禮義邦)ㆍ소중화(小中華) : 양(梁) 나라 때 우리 사신(使臣)이 양 나라에 가서 조회할 적에 양 무제(梁武帝)가 후경(侯景)에게 구핍(驅逼)을 받아 조시(朝市)가 온통 황폐해져서 잡초가 우거졌으므로 사자(使者)가 그것을 보고 울자, 후경이 그를 구집(拘執)해 두고 그 이유를 물으니 사자가 답하기를,

“옛날의 융성했던 시대만 못하기에 울었습니다.”

하므로, 후경이 그를 의(義)롭게 여겨 석방해 주었다. 당 희종(唐僖宗) 2년, 신라(新羅)의 사신 김직량(金直諒)이 입조(入朝)하였을 때 마침 황소(黃巢)의 난(亂)을 만나 길이 막혀서 초주(楚州)에 정박(碇泊)해 있다가, 황제(皇帝)가 서촉(西蜀)에 몽진(蒙塵)해 있음을 알고 나서 곧장 고 태위감(高太尉監 희종(僖宗) 때의 절도사(節度使) 고변(高騈)을 가리킴)의 주선에 의해 서천(西川)에 당도하게 되어 사명(使命)을 마치고 돌아왔던 등의 일로 인하여 중국(中國)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예의방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高麗) 공양왕(恭讓王) 때 박초(朴礎)의 소(疏)에,

“당(唐) 나라에서는 우리나라를 군자의 나라라 하고, 송(宋) 나라에서는 문물(文物)ㆍ예악(禮樂)이 융성한 나라라 하여, 우리나라 사신이 묵는 관(館)을 소중화관(小中華館)이라 하였기 때문에 후세에 우리나라를 예의방이니 소중화니 한 것입니다.”

하였다.
조선(朝鮮) : 삼대(三代) 때부터 이미 조선이라는 칭호가 있었으니, 곧 연(燕)의 접경(接境)이다. 《산해경(山海經)》 해내북경(海內北經)에,

“조선은 열양(洌陽 대동강(大同江)의 북부(北部) 지방)의 동쪽인 바다의 북쪽이요, 산(山)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열양은 연(燕)에 소속되었다.”

하였는데, 그 주(注)에,

“조선은 옛날의 낙랑현(樂浪縣)으로 기자(箕子)가 봉(封)해진 곳이다.”

하였고, 《산해경》 해내경(海內經)에는,

“동해(東海)의 안[內], 북해(北海)의 한 귀퉁이에 조선이란 이름을 가진 나라가 있다.”

하였는데, 그 주에는,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樂浪郡)이다.”

하였다. 《사기(史記)》에는,

“해가 뜨는 동녘 밖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조선이라고 한다.”

하였는데, 그 색은(索隱)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산수(汕水)가 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삼한(三韓) : 마한(馬韓)ㆍ진한(辰韓)ㆍ변한(卞韓)이 차례로 육부(六部)의 땅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삼한이라 한 것이다.
해동(海東) : 조선(朝鮮)이 요해(遼海 발해(渤海)를 가리킴)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좌해(左海) : 동해(東海)는 천지(天池)의 왼쪽에 있고, 조선은 또 동해의 왼쪽에 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대동(大東) : 《모시(毛詩)》의 ‘소동(小東)ㆍ대동에 …… ’ 한 주에,

“소동ㆍ대동은 동방의 크고 작은 제후(諸侯)의 나라이다.”

한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청구(靑丘) : 《산해경》의 해외동경(海外東經)에,

“청구국(靑丘國) 사람들은 오곡(五穀)을 먹고 명주옷을 입었으며, 그곳에 있는 여우는 발이 네 개에 꼬리 아홉 개가 달렸다.”

하였고, 또,

“조양(朝陽)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하였다. 《산해경》의 대황동경(大荒東經)의,

“대황(大荒) 가운데 청구(靑丘)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의 여우는 꼬리가 아홉 개이다.”

한 주에,

“그 여우는 태평 세대이면 나와서 상서(祥瑞)가 된다.”

하였다. 《해내십주기(海內十洲記)》에는,

“장주(長洲)의 일명(一名)이 청구(靑丘)인데, 남해(南海)의 동남쪽에 있다. 지방(地方)은 5천 리이고 이곳에 자부궁(紫府宮 신선이 거처하는 집)이 있는데 천진(天眞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신(神)의 칭호)과 선녀(仙女)가 여기에서 노닌다.”

하였다. 《급총주서(汲冢周書)》 왕회해(王會解)의,

“청구(靑丘)에 있는 여우는 꼬리가 아홉 개다.”

한 주에,

“청구는 동해(東海)의 지명(地名)이다.”

하였다.
접역(鰈域) : 한(漢) 나라 허신(許愼)의 《설문(說文)》에,

“접(鰈)은 접어(鯜魚)인데 낙랑 번국(樂浪藩國)에서 생산된다.”

하였고, 《집운(集韻)》에는,

“접(鯜)은 혹은 접(鰈)으로도 쓴다.”

하였으며, 《이아(爾雅)》석지(釋地)에는,

“동방(東方)에 비목어(比目魚 넙치)가 있는데, 눈을 나란히 하지 않으면 가지 못한다.”

하였으니, 바로 이 고기를 말한 것이다.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의 《유설(類說)》에는 가좌어(加佐魚)를 접(鰈)이라고 하였으나, 광어(廣魚)ㆍ설어(舌魚) 같은 종류는 모두 접(鰈)이다. 청(淸) 나라 왕사진(王士禛)의 《향조필기(香祖筆記)》에,

“정강성(鄭康成 강성은 정현(鄭玄)의 자)의 《상서중후(尙書中侯)》 주(注)에 ‘비목어(比目魚)는 일명(一名) 동접(東鰈)이다.’ 하였는데, 《감주집(紺珠集)》에 나타나 있다.”

하였고, 이백약(李百藥)의 황덕송(皇德頌)에는,

“귀서(龜書)ㆍ용갑(龍匣)ㆍ하도(河圖)가 장차 동접(東鰈)ㆍ서겸(西鶼)에 노닐 것이다.”

하였으므로 ‘亭載佇’ 이로 인해 접역(鰈域)이란 호칭을 쓰게 되었다.
진단(震檀) : 우리나라가 진방(震方 동방(東方)을 가리킴)에 있고, 또 단군(檀君)이 맨 처음 동방의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근화향(槿花鄕) : 여기에 대한 말은 위에 나타나 있다. 또 참고하건대, 고려(高麗) 시대의 표사(表詞)에서 본국(本國)을 근화향이라 칭하였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이는 대략 고사(故事)가 될 만한 것들을 취하여 해설 변증하였다.

후경(侯景) : 양 무제(梁武帝) 때 사람으로 일찍이 하남왕(河南王)에 봉해졌었는데, 뒤에 반(反)하여 양 무제를 몰아내고 간문제(簡文帝)를 옹립하였다가, 뒤에 다시 간문제를 시해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한제(漢帝)라 자칭하였다.
亭載佇 : 원문의 이 세 글자는 문리가 통하지 않음은 물론, 어느 물명(物名)에 해당되는지도 자세하지 않으므로 우선 번역에서 제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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