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군을 부로 승격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보감 제39권 > 현종조 1

 

효종대왕 10년(기해) 5월 4일(갑자)에 효종대왕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여 그로부터 6일 후인 9일(기사)에 왕세자가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를 대왕대비로, 왕비 장씨(張氏)를 왕대비로 각각 높이고, 빈궁 김씨(金氏)를 책봉하여 왕비로 삼은 다음 종묘에 고하고, 하례를 받고, 교서를 반포하고, 대사면을 행하였다.
상은 효종의 적자로서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고 2~3세 때에 말과 행동이 벌써 법도가 있었다. 갑신년(1644, 인조 22)에 본국으로 돌아와 인조(仁祖)를 배알하고 응대하는 것이 마치 성인(成人)과 같았었다. 요ㆍ순(堯舜)과 걸ㆍ주(桀紂)의 일에 대하여 묻자, 상은 그 동안 읽었던 《사략(史略)》에 있는 내용들을 들어 성군이었고, 폭군이었음을 매우 상세하게 입증하였으므로 인조가 아주 기특하게 여겼었다. 기축년(1649, 인조 27)에 왕세손에 책봉되고, 신묘년(1651, 효종 2)에 왕세자 책봉을 받았는데 총명하기 이를 데 없어 한 번 보고 들은 것이면 잊어버리지 않았다. 《맹자(孟子)》를 읽을 때 효종이 외어보라고 하자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전편을 다 외웠으며, 어려서부터 성장하도록까지 어버이 곁을 떠날 줄을 몰랐다. 어버이가 혹시라도 편찮아 보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곁에 앉아 시중하면서, 물러가서 쉬라고 하여도 물러가지를 않았었다. 상사 때에도 몸부림치며 슬퍼하는 모습에 뭇 신하들이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였었고, 즉위함에 있어서도 대신과 삼사(三司)가 누차에 걸쳐 청했으나 끝까지 듣지 않다가 자전(慈殿)이 유지를 내려 권고하자 그제서야 비로소 즉위했었다.
○ 대상(大喪) 이튿날 대사헌 이응시(李應蓍)와 대사간 이상진(李尙眞) 등이 상차하여 주자(朱子)의 군신복의(君臣服議)대로 따를 것을 청했는데 그 복의란, 임금은 옛 상복(喪服)을 만들어 입고 신하를 대하고, 신하들은 베로 만든 복두(幞頭)ㆍ공복(公服)ㆍ혁대(革帶) 차림으로 조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예조에 내려 대신(大臣)ㆍ유신(儒臣)과 상의하도록 하였는데, 유신 송시열ㆍ송준길 등은 당연히 주자 학설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대신 이경석(李景奭)ㆍ정태화(鄭太和) 등은 주장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그 논의를 했을 때 고 상신(相臣) 박순(朴淳)이 당시 예관(禮官)으로서 난색을 보여 고치지 않았었고, 고 유신 김집(金集)이 그 논의를 했을 때도 고 상신 김상헌(金尙憲)이 역시 난색을 보였었는데, 그 이유는 국조 전래의 예를 금방 고칠 수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여, 대신들 논의대로 할 것을 명하였다.
○ 그때 자의대비(慈懿大妃)가 대행대왕을 위해 입을 복제가 《오례의(五禮儀)》에는,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1년복을 입는다고만 되어 있고 맏아들과 지차 아들 그리고 전중(傳重)의 구별에 관하여는 언급이 없었으므로 원상(院相)인 정태화가 합문(閤門) 밖에 앉아서 이조 판서 송시열을 오게 하여 쪽지 하나를 그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윤휴(尹鑴)의 말을 듣고 이렇게 써 보냈습니다.”

했는데, 내용은 《의례(儀禮)》의 "맏아들을 위하여는 3년복을 입는다.”는 조항의 주석에 맏아들이 죽고 지차 아들이 승중(承重)을 하면 승중한 그도 맏아들이라고 한다고 한 그 설을 적어 놓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시열이 이르기를,

“《의례》주소에 그 말이 과연 있기는 하나 그 아래에 보면 또 ‘서자(庶子)는 맏아들을 위해 3년복을 입을 수 없다.’라는 조항이 있고, 그 조항의 주석에는 또 4종류의 학설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도 저도 다 주석인데 그렇다면 어느 건 취하고 어느 건 버릴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자, 태화가 그 네 종류란 과연 무엇무엇이냐고 물었다. 시열이 대답하기를,

“하나는 정이불체(正而不體)라는 것인데 그것은 맏손자가 승중한 경우를 말한 것이고, 두 번째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서자를 후계자로 세운 경우를 말한 것이며, 그 다음은 정체부득전중(正體不得傳重)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맏아들이 불치의 병에 걸렸을 경우를 말한 것이고, 끝으로 전중비정체(傳重非正體)라는 것인데 그것은 서손(庶孫)이 후계자가 된 경우를 말한 것입니다.”

하니, 태화가 손을 내저으며 쉬쉬하고는 다시 묻기를,

“그럼 시왕(時王) 제도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하였다. 시열이 대답하기를,

“《대명률(大明律)》이나 국제(國制)나 다 맏아들 지차 아들 따지지 않고 일률적으로 부장기(不杖朞)로 되어 있고 그것은 《상례비요(喪禮備要)》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니, 태화가 이르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경석 등 여러 대신들도 모두 기년복을 입는 것이 옳다고 하여 드디어 그 논의를 따르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윤휴는 또, 내종(內宗)은 모두 참최(斬衰)를 입는다고 한 설을 입증 자료로 내놓았다. 이에 시열이 또 말하기를,

“내종이 임금을 위해 모두 참최를 입는 것은 임금과 개인적으로 동종 사이라 하여 감히 임금을 그냥 동종으로만 대우할 수 없기 때문에 비록 원래는 시마(緦麻)를 입어야 할 친척이라도 부녀들은 모두 당연히 참최를 입는 것이지만 지금 대행대왕으로 말하면 대비와의 사이에 감히 자식으로 칭할 수 없고 신(臣)으로 칭해야 할 처지여서 그 사이에는 군신(君臣)의 의리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대왕대비가 도리어 신하가 임금을 위해 입는 복을 입을 것인가.”

하였으나, 윤휴는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고 제왕(帝王)의 집과 개인 사가와는 사체가 다른 것이라고 하면서 다시 의논을 올리고 시열과 맞섰던 것이다.
○ 영의정 정태화가, 상이 이미 왕위에 올라 있으므로 전례에 따라 원상(院相) 제도를 혁파할 것을 청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아직은 정신이 혼미하여 모든 업무를 살필 수가 없으니 공제(公除) 때까지는 그대로 두라.”

하여, 태화가 다시 청하기를,

“그러면 지난 기축년에 했던 대로 좌상 심지원(沈之源)과 원상 일을 함께 보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그 전에 대행대왕이 각 도에다 암행어사를 보냈었는데, 지금 와서 예조가 국상으로 인하여 그들을 소환하였다. 이에 경기 어사(京畿御史) 안후설(安後說)과 강원도 어사 이정(李程) 등이 일을 끝마치지 못하고 분곡(奔哭)했는데, 사헌부가 아뢰기를,

“명령을 받들고 나갔던 자가 국상을 당할 경우 반드시 맡은 바 일을 마치고 나서 빈궁(殯宮)에 와 복명하는 것이 예(禮)인 것인데 지금 각 도로 암행 임무를 띠고 갔던 신하들은 선왕의 명령을 민간에다 버려버린 셈이어서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예조의 당상관을 추고하도록 하고, 아직 돌아오지 아니한 어사들은 일을 다 마치고 와서 복명하도록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 6월. 청풍군(淸風郡)을 부(府)로 승격시켰다. 왕비의 성향(姓鄕)이기 때문이었다.
○ 대사헌 송준길이 상차하기를,

“제왕의 효도는 필부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슬픔과 감정을 되도록 억제하여 성인(聖人)이 예를 제정한 본의에 위배됨이 없도록 하소서. 명종이 승하하신 후 장례 이전에 선조께서 강연에 납시어 《예기(禮記)》 상례편(喪禮篇)을 익히셨는데 상중에 있으면서 장례 이전에는 상례를 읽고 장례를 마치고는 제례(祭禮)를 읽는 것이 바로 예경(禮經)에도 있는 말입니다. 옛날 제도대로 궤전(饋奠) 여가에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나와서 강의도 하고 토론도 하게 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잘 살펴 행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제왕이 왕위를 이어받은 초기에는 모든 신하들로 하여금 바른말을 하게 하고 또 현명하고 준수한 인재를 초치하여 새로운 치화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예로부터 행해져 온 규례를 준수하시고 유능한 선비들을 다방면으로 초치하여 각별한 예우를 하실 것이며, 오지 않은 자는 오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시고, 이미 와 있는 자들은 길게 잡아 둘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소서. 인심 향배와 하늘이 어떻게 하실 것인가가 모두 지금 결정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 시점에서 스스로 두려워하고 근면하지 않는대서야 될 일이겠습니까. 생각 하나도 신중히 하시고, 궁궐 내부의 규율을 엄히 하여 사사로운 통로를 막으시고,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일체가 되도록 하며, 모든 신하들의 출척 진퇴는 그 전부를 공의에 의하여 하소서. 사정에 치우쳐 사람을 억양하거나 자질구레한 일까지 다 참견하여 상대를 제압하려는 생각을 마음 속에 끼워두지 마시어 우리 대행대왕께서 편안한 길을 물려주신 그 지극하신 뜻을 이어받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옛날 강석(講席)에서 있었던 말들을 지금 비록 그대로 실천해 보려고 하지만 어디 그리 잘 되는가. 지금 한 말도 모두가 지성에서 나온 말로 내 마땅히 감격한 마음으로 가슴 깊이 간직하리라. 계빈(啓殯) 이전까지는 예서를 익힌다고 예문에도 그리 기록이 되었지만 아직은 슬픔을 가누기가 어려우니 경은 그 점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하고, 곧 승지 김수항(金壽恒)에게 명해 어질고 준수한 인재를 초빙한다는 내용의 유지를 내리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수항이, 전 찬선(贊善) 권시(權諰), 전 진선(進善) 윤선거(尹宣擧)를 우선 부르고 그 다음으로 초야에 묻혀 있는 인재들도 차근차근 찾아내어 오게 하겠다고 청하자,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 성균관 좨주는 품질(品秩)에 구애받지 말도록 명했다. 그때 이조 판서 송시열에게 좨주를 겸임시킬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해조가 아뢰어왔으므로 그 문제를 대신들과 논의하도록 하였는데, 대신들이, 의정(議政)이 그대로 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고, 정2품이 그대로 대사성(大司成)을 겸임하기도 하는데 더구나 이 좨주라는 직은 계속 있어왔던 일반직이 아니라 그만한 인물이 있어서 새로 둔 직인만큼 품질에 구애될 것은 없을 듯하다고 하여 그 말대로 한 것이었다.
○ 집의(執義) 이유태(李惟泰)가 소를 올려 돌아가겠다고 고하자,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 타일러 들어오게 하도록 하고 이어 본도에 명해 유태의 노모에게 먹을거리를 대주라고 하였다.
○ 7월. 가뭄이 심해 기우제를 올렸다. 국가 제도상 가을에는 기우제를 올리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때 와서 특별 명령으로 올렸던 것이다.
○ 송시열을 이조 판서 직에서 해임시켰다가 금방 다시 제수하였다. 그때 경성 판관(鏡城判官) 홍여하(洪汝河)가 선왕조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상소하면서, 국경 방어가 허술한 점, 형상(刑賞)이 맞지 않은 점, 시비(是非)가 공평하지 못한 점 등을 들어 말하고 또 이르기를,

“이후원(李厚源)은 논의를 하면 한쪽 편만 드는 것이 주장이고, 일처리는 남보다 유별나게 하려고만 합니다. 홍우원(洪宇遠)의 상소 내용은 비록 걸맞잖은 비유를 끌어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임금 사랑하는 충성심에서 한 말인 만큼 당연히 따뜻한 유지를 내리고 옛날과 똑같이 대우했어야 했는데 이조가 후보자 추천을 하면서 절반 이상은 사를 썼던 것입니다. 그리고 춘방(春坊)의 기구 증설 같은 것은 원래 보도(輔導)를 목적으로 한 것인데 나이 젊은 음관(蔭官)을 대뜸 자의(諮議) 물망에 올려놓아 보기에만 좋을 뿐이지 실지로 주는 효과는 없어 그야말로 현자를 우대하고 청렴한 기풍을 조장하는 길이 아닌 것입니다.
붕당(朋黨)의 화는 그것이 오늘날 병근이 되고 있어 학술이 분열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여서 가정(嘉靖)ㆍ융경(隆慶) 이래로 1백년 가까이 사론(士論)이 팽팽히 맞서 있지만 그러나 그 영향이 조정에까지 미쳐간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 각기 기치를 내세운 것은 순수한 의견 차이 때문이었지만 실지 내심은 명예나 이해관계를 다투고 있어 다르다 같다를 암암리에 조종을 하고 또 아주 터놓고 배제도 하고 응원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박한 무리들은 용기를 뽐내며 먼저 기어오르고, 한쪽만 아는 꽉 막힌 무리들은 죽어도 제 것만 옳다고 하고 있습니다.”

했는데, 그 내용은 시열을 두고 한 말이었던 것이다. 승지 유계(兪棨)는, 그의 상소 내용이 이미 승하하신 성상과 관계있는 것들로서 오늘에 와서는 별로 맞지 않는다 하여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지의 여부를 품신하였다. 상은 그것을 정태화와 논의하여 표현의 어구들을 수정해서 올리게 하고서는 그 일이 선왕조에 있었던 일이라 하여 그에게 죄를 가하지는 않았다. 이에 시열이 강연에 나와서 전직(銓職)을 그만두겠다고 간곡히 청하였고 상은 그를 갖은 방법으로 위로하고 타일렀으나 시열이 계속 사양했기 때문에 상은 우선 그의 마음을 편케 해준다는 뜻에서 그를 이조 판서에서 해임시키고 아직은 후임자를 내세우지 말도록 명했다가 지금 와서 다시 추천하게 하여 그를 다시 임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열은 끝내 사양하고 말았다.
○ 10월. 효종대왕을 영릉(寧陵)에 장례하였다. 그 전에 윤선도(尹善道)가, 수원부(水原府) 자리가 내룡[龍]으로 해서도 최상이요, 풍수(風水)로서도 대단히 큰 천재일우의 자리라고 하여 새 능을 수원에다 모시기로 결정하고 이미 석물 일까지 시작했는데, 이경석(李景奭)ㆍ이시백(李時白)ㆍ원두표(元斗杓)ㆍ이후원(李厚源)ㆍ이해(李澥)ㆍ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 등 모두가, 수원은 바로 경기의 관문이요 요충지인데다 고을과 마을을 옮겨야 하는 폐단이 있고 또 장래 오환(五患)의 염려도 있는 곳인 반면 건원릉(健元陵) 왼편 산등성이 건좌(乾坐)는 바로 태조(太祖)가 신승(神僧)인 무학(無學)과 함께 직접 정한 자리로서 명(明) 나라 만세산(萬歲山)처럼 꾸미려고 했던 자리이기 때문에 바닥이 우선 너무 좋고 일하기에도 편리하다고 하면서 혹은 차자 혹은 상소로 계속 쟁집하였다. 그리하여 상이 드디어 경석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건원릉 왼편 산등성이에다 새 능자리를 정했던 것이다.
○ 하교하기를,

“비록 예문(禮文)에는 없는 일이지만 이제 겨우 반우(返虞)를 하여 보통 때와는 다르지 않은가. 예라는 것도 인정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일진대 내 대내에서 혼전(魂殿)에 문안을 올리고 싶은데 이후 제사 모실 때면 조곡(朝哭)하는 예와 같이 문안을 올리면 어떨지, 정원은 그것을 대신과 유신들에게 물어보라.”

하여, 좌참찬 송시열이 의견을 제시하기를,

“장례 이후에는 조석곡(朝夕哭)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기록이 《오례의(五禮儀)》에는 나와있는 곳이 없습니다. 따라서 비록 행례(行禮)하는 날이 아니더라도 소상(小祥) 이전까지는 장례 이전과 같이 하더라도 무방할 것입니다. 다만 명칭을 문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 논의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 경기 지역이 흉년인데다 능역(陵役)까지 치뤘다 하여 봄ㆍ가을 대동미 및 세두(稅豆)를 면제하였다. 이조 참의 조복양(趙復陽)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관리로서 형을 남용하여 살인을 한 자는 세초(歲抄)에 써넣지 말도록 명하였다. 판의금부사 이시방(李時昉)이 말하기를,

“《대전(大典)》에 의하면 형을 남용한 관리는 장일백(杖一百) 도삼년(徒三年)으로 되어 있고, 형을 남용하여 살인까지 한 자에게는 장일백에 영불서용(永不敍用)을 적용하고 있어 살인을 한 죄가 형을 남용한 죄보다 도리어 가볍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하자, 영의정 정태화가 이르기를,

“《대전》에서 말한 영불서용은 그것이 금고(禁錮)로 일생을 마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도배(徒配)보다는 중한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그 법 적용을 받은 자도 으레 세초나 사령(赦令) 또는 서계(書啓)에 의하여 다시 서용이
되고 있는 까닭에 오히려 경중(輕重)이 거꾸로 된 것입니다.”

하였기 때문에, 상이 그 명령을 하였던 것이다.
○ 북도(北道)가 흉년이어서 도년(徒年)ㆍ원찬(遠竄)에 처해 있는 자들을 모두 다른 곳으로 배소를 옮기도록 했는데 그 수가 1백 13명에 달했다. 그러나 전가실변(全家實邊)에 처한 자 및 역적 모의에 연좌된 자들은 이 수에 들지 않았다.
○ 내수사에서 무명베 1천 필을 병조로 보내어 그것으로 어린애가 장정으로 등록되어 군포(軍布)가 징수 안 된 그 수량을 채워넣게 하였다. 그 전에 이조 판서 송준길이 말하기를,

“선왕께서 군병(軍兵)들 원성과 괴로운 정황을 고려하여 아직 어린애 또는 도망갔거나 죽고 없는 자들에 대해서는 군포 징수를 면제하도록 하려 했으나 미처 실현을 못 보았던 것입니다. 지금 각 아문에는 비축된 것이 전혀 없어 달리 수량을 채워넣을 길은 없고 오직 내수사가 있는데 내수사는 그 자체가 옛 선왕들의 대공지정(大公至正)한 제도가 아니라 하여 종전부터 유신들이 모두 그 아문을 혁파할 것을 청해 왔던 터였습니다. 그러나 조종조에서 만든 제도를 갑자기 없앤다는 것도 사실상 어려운 일이니 상께서 요량껏 떼내어 이쪽의 탕감된 숫자를 보충하게 하시면 그것만으로도 백성들 마음에 위안을 주는 하나의 큰 계기가 될 것입니다.”

했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후 이렇게 명하였던 것이다.
○ 11월. 상이 정원과 전조(銓曹)에 명하여 대행대왕 발인 때 지방에 있던 조관(朝官) 및 사대부들로서 올라왔던 자들을 모두 적어서 아뢰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송준길이 아뢰기를,

“전 교리(校理) 이수인(李壽仁)은 조용히 물러가 자기 본분을 지키는 사람으로 세상이 칭하는 자이고, 사업(司業) 윤선거(尹宣擧)ㆍ윤원거(尹元擧)는 다 실직(實職)이 있는 자들이며, 전 좌랑 신석번(申碩蕃)ㆍ최휘지(崔徽之)는 선왕조 때 직출육품(直出六品)했던 자들이고, 전 자의(諮議) 이상(李翔)ㆍ송기후(宋基厚)는 일찍이 선발되어 강직(講職)을 제수받은 자들이며, 전 세마(洗馬) 김만영(金萬榮) 역시 자의 물망에 올랐던 자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신석번ㆍ이상은 더욱 두드러진 자들입니다.”

하였고, 정원에서는 말하기를,

“전 부제학 윤문거(尹文擧)는 선왕조 시절부터 누차 소명(召命)을 내렸던 자입니다. 이 새로운 치화(治化)의 날을 당하여 어진 선비들을 예우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이므로 당연히 오지 않은 자는 타일러 오게 하고, 이미 와 있는 자는 편안하게 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여,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 도타운 유지를 내렸던 것이다.
○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호위청(扈衛廳)을 둔 것은 처음 인조가 반정한 후 시절이 위태위태할 때 훈신(勳臣)을 대장(大將)으로 삼아 각기 군관을 거느리고 대궐 안을 입직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까지 그대로 존속이 되고 있어 군제(軍制)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이 1년 동안 반료(頒料)만 3천여 석이 나가고 있습니다. 국가 경비를 줄이는 의미에서라도 없애는 것이 좋습니다.”

하여, 상이, 여러 대신들과 논의해 보도록 명했는데 의견 일치가 되지 않아 결국 혁파하지 않았다.
○ 12월. 좌참찬 송시열이 소를 올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금년 5월 5일 중사(中使)가 대내의 뜻으로 유지를 전해 오기를, 날씨가 너무 더워 뜻밖의 일이 생길 염려가 있으므로 오늘 중으로 소렴(小殮)을 했으면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대답하기를, ‘예가 원래 그렇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궁(梓宮)이 여유가 있어 다른 염려는 절대 없을 것입니다.’ 했었고 6일에 소렴이 끝나갈 무렵 신이 또 예서(禮書)의 소렴조(小殮條)에 ‘시신을 묶을 때 완전히 묶어버리지 않고 얼굴도 가리지 않는다. 그 이유는 효자로서 자기 어버이가 혹시라도 다시 소생할까를 기다리는 뜻이고 또 때로 그 얼굴을 더 보고 싶어서인 것이다.’ 한 예문이 있으므로 마땅히 그 예문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런데 곡반(哭班)에 나가자마자 대신 이하 모두가 결국 대내의 유지라고 하면서 그것들을 다 바꿔버렸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행하게도 일이 처음 마음먹었던 바와 달리 되고 말았는데 그것이 사람이 잘못해서 그리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한 사실로 드러났는데도 결국 재궁을 판자 둘을 붙여 다시 짜야 하게까지 되었던바 그 일로 조야(朝野)가 발칵 뒤집혀 그 잘못을 모두 신에게로 돌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산릉 자리도 그것을 정할 때 뭇 사람들은 모두 수원(水原)이 천재일우의 길지라고 했었는데 신이 감히 이론을 제기하여 이미 정해진 일을 흐트러놓았다고 사람들이 가면 갈수록 야단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성상께서 편찮으셨을 때도 감히 뭇 사람들의 주장을 어기고, 태의(太醫)는 당연히 죽을 죄를 진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그 사람을 시켜 약을 써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그 후 그가 쓴 약으로 하여 시원한 효과를 보셨기 때문에 논자들은 신더러 군부(君父)의 병을 대수롭잖게 여긴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씩이나 큰 죄를 짓고서 지금까지 목숨이 붙어 있는 것만도 요행인데 더구나 공론을 무시한 채 직명을 띠고 그대로 버젓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하였는데, 이에 대해, 상이 답하기를,

“부모상을 당하여 습렴(襲殮)하는 과정에 흠집이 없게 하고, 좋은 자리를 잡아 의관(衣冠)을 간직해 두는 곳으로 삼고 싶은 심정은 사람마다 같을 것이다. 내 비록 불민하지만 그렇다고 속임수를 쓰는 자들보다 못하기야 하겠는가. 그리고 목재를 붙여 쓴 일은 그것이 만약 미진한 점이었다면 내가 왜 경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은 양 보아 넘겨버리고 지금까지 아무 말 않고 있겠는가. 또 수원이 국릉(國陵) 자리로 맞지 않다고 한 것도 경 한 사람만 그랬던 것이 아닐뿐더러 지금의 능자리가 거기만 못지 않지 않은가. 사방에서 별 소리를 다해도 듣지 않으면 그뿐인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문제로 말하면 내 마음에 더욱 미안한 점이 있다. 누가 뭐래도 그 문제라면 내가 대놓고 면박을 할 것이다. 경이 그 때문에 돌아가려고 하는 그러한 인물이라면 내가 경에게 뭘 바랄 것인가. 경은 사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생각하고 돌아갈 생각을 빨리 그만두라.”

하였다. 시열이 성문 밖을 나갔을 때, 상이 사관을 보내 다시 들어오도록 타이르고, 또 수찰(手札)을 내려 승지 오정위(吳挺緯)로 하여금 가서 타이르게 했는데 그때 시열의 서계(書啓) 내에,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정위가 두 번 세 번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이때 시열은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열기를,

“사람들이 나더러, 《춘추(春秋)》의 법으로 치면 무장(無將)이고, 한(漢) 나라 법으로 치면 부도(不道)라고 한답니다.”

하였다. 정위가 돌아와 그 말을 상께 아뢰자 상은 또 사관을 보내 어찰을 내리고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이에 시열이 대답하기를,

“들리는 바에 의하면 사람들이 신더러 전하를 전일한 마음으로 섬기지 않는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남의 신하된 자로서 더할 수 없는 죄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수찰을 내려 만류하시고 지금 또 사관을 보내 묻기까지 하셨기 때문에 신으로서는 그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튿날이 되어 제신들이 너도 나도, 그 놀라운 유언(流言)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그러한 말을 만든 사람을 만약 호되게 징계하지 않으면 현자와의 통로가 이로부터 두절되고 말 것이다. 그 누가 조정에 있으려고 할 것인가. 나라 형세가 이렇게도 위태위태한 이때 초야에 묻혀 있는 인재들을 맞아들이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오히려 조정에 있던 현자가 이러한 꼴을 당하고 물러간다면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였다.
○ 상이 경덕궁(慶德宮)으로 자리를 옮겼다. 예조가 대왕대비의 연여(輦輿)와 기타 의물(儀物)에 관해 대신과 유신들 의견을 물을 것을 청했는데, 대신들은, 대왕대비는 현재 기복(朞服)을 입고 있어 삼년상(三年喪)과는 구별이 있으므로 연여와 의물들 색을 모두 검정색으로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반면 송시열은 주장하기를,

“대왕대비가 안에 있을 때는 최마(衰麻)를 입으면서 밖에 나올 때는 검정색 의물을 쓴다면 그것은 매우 의의 없는 일일 것 같습니다. 대체로 오복(五服)의 복인들이 상차(喪次)에서는 소복을 하고 다른 곳에서는 검정색을 입는 것이 원래 후세에 와서 잘못된 제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압굴(壓屈)을 당하기 때문에 정자(程子)도, 슬픔을 무릅쓰고 정상적인 일을 하는 것을 금치 않는다고 하였지만, 임금인 경우는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춘추(春秋)의 법에도 임금에게는 출행이라는 말이 없는데 그 이유는 아무리 작은 고을이라도 본래 궁궐 안과 다름이 없는 것으로 치기 때문에 나라 안이면 어디를 가거나 궁중과 똑같이 자신의 할 일을 다할 수 있고 그리하여 왕은 안과 밖이 따로 없다는 뜻을 나타낸 것입니다. 지금 대왕대비로 말하더라도 선왕의 복을 입고 있으면서 안에 있을 때 다르고 밖에 나갈 때 다르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 춘추의 법에 어긋나는 일일 것입니다.”

하여, 시열의 주장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 날씨가 춥다 하여 상이 의복 얇은 군사들에게 유의(襦衣)를 공급하도록 명했는데 해당자가 1백 10명이었고 또 승지에게 명해 죄가 가벼운 죄수들은 석방하도록 하였다.
○ 탄일(誕日)에 토산물 진상하는 것을 그만두도록 명했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위에 오르신 초기에 백성들 사정을 고려하시어 어공(御供)을 줄이시고 두 자전(慈殿)을 제외한 모든 토산물 진상분을 다 그만두도록 하신 데 대해 그 일을 보고 듣는 자 누구인들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명년 탄일은 여느 절일(節日)과는 달라 웃어른께 잔치 올리는 일을 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했으나, 상은 흉년이어서 백성들이 고달플 것이라 하여 끝까지 불허했다.
○ 관서(關西)의 관향곡 모곡(耗穀) 분으로 유랑민들을 진구하고, 해서(海西)의 오두 세미(五斗稅米)를 견감하고 대신 본도의 공곡(公穀)을 경창(京倉)으로 수송했다가 가을에 가서 받아들인 쌀로 그 공곡을 상환하도록 명했다. 예조 판서 홍명하(洪命夏)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단천(端川)의 세은(稅銀) 1천 냥을 영원히 징수하지 않기로 하였다. 함경도 도신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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