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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石室)을 둘로 하는 합장(合葬) 형태의 동릉이실(同陵異室)로 조성하고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세조(世祖) 대에 천장(遷葬)의 논의를 하고 결국 예종(睿宗) 1년(1469년)에 경기도 여주(驪州)로 천장(遷葬)하여 단릉(單陵)의 합장(合葬) 형태로 만들었는데, 세조(世祖)의 광릉(光陵) 제도를 따라 석실(石室)과 병풍석(屛風石)은 쓰지 않았습니다. 세우지 않았던 일로 인한 것입니다. 장씨(仁宣王后張氏)를 모신 영릉(寧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역대 임금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자세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수록된 방대한 치적을 살펴보면 다른 실록에서는 볼 수 없는 '지(志)'의 수록을 통해 당대의 완비된 문물(文物) 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의례(儀禮)에 관한 {오례(五禮)}, 아악(雅樂)에 관한 {악(樂)}, 역사 인문을 망라한 지리서인 {지리지(地理志)}, 천문(天文)에 관한 {칠정산(七政算)} 내외편 등 당시의 다양한 분야의 연구 업적이 얼마나 방대한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원, 영응대군의 8남과 정소, 정의공주의 2녀를 두었습니다. 수많은 치적을 이룬 성군(聖君)으로 일컫는 세종과는 달리 왕비 소헌왕후는 영의정을 지낸 부친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이 태종에 의해 사사(賜死)되는 비운을 겪고, 세종 14년[1432년]에야 왕비로 개봉(改封)됩니다. 또한 자신 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등 다소 불우한 일생을 마쳤습니다.[세종 28년] 성리학(性理學)의 영향으로 원찰(願刹)제도가 사라져 본래의 신륵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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