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펑펑 오는 날 산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종이솜을 넣은 얇은 이불은 썰렁하니 온기가 없고 불등도 어둑어둑한데 사미승은 추위에 일어나기 싫어서인지 밤새 종 한번 치지 않는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시인은 새벽이 되자 방문을 나서며 다시 사미승의 눈치를 본다. 잠 없는 손이 괜스레 댓바람부터 문을 열어 찬바람 들이치게 한다고 성내지나 않을까. 하지만 그가 짜증을 내든 말든 절 앞에 있는 눈 쌓인 소나무의 장관을 구경해야겠다.
시는 이다음 펼쳐질 설경의 장관은 정작 보여주지 않고, 눈 내리는 산사에서 밤새 뒤척이는 시인의 소심한 마음 한 자락만 펼쳐놓았다. 하지만 이 이상 무슨 말을 더 하랴. 시인은 아무 말이 없지만 독자에게는 벌써 산사의 설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방문을 열자마자 달빛보다 더 환한 눈빛에 눈이 부시고 매서운 바람은 코끝을 스치며 밤사이 내린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찢어지는 가지의 파열음이 귀를 때린다. 여기는 희노애락의 어떤 감정도 스며들지 못하는 순백의 세계이다. 생가지가 찢기는 처절한 아픔도 무채색의 눈 속에 묻혀 무감각해진다. 그리고 그에 따라 애증도 무뎌진다.
올해가 가기 전에 작은 절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그리고 그곳에 해묵은 감정의 찌끼를 놓고 와야겠다. 나의 가지가 부러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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