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춘천에는 의암호가 있다. 춘천 출신 의병장 유인석의 아호 의암을 기린 것이다. 호수 의암은 잔잔하다. 하지만, 의병장 의암은 역동적이다. 시대의 격류와 씨름하며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건너고 또 건넜다.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유교를 재건하기 위해. 그는 처음 제천에서 복수보형(復讎保形)의 깃발을 올렸다. 때는 을미년,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포고된 바로 그 때, 그는 김평묵(金平黙)과 유중교(柳重敎)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 화서학파의 중심 인물이 되어 14년 전 위정척사운동의 불꽃을 기억하며 다시 힘을 모아 거병하였다. 일진일퇴 공방을 벌이며 세를 확장했으나 끝내 제천성을 잃은 그는 서북으로 달려 압록강을 건넜다. 회인(懷仁)에서 중국 관원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는 비극을 겪었으나 좌절하지 않고 통화(通化)에 정착하여 한인 교민 사회에 유교를 부식하였다. 오늘날 글로벌과 디아스포라의 감각에서 보면 그는 초창기 해외 한국 유교의 지도자였다.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압록강을 건너 양서 지방을 순회하며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화서학파의 결집력을 다졌다. 유인석의 제천의병이 대의를 밝힌 이야기 『소의신편(昭義新編)』이 출간되어 대한제국에서 그의 명망을 높였다.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07년의 고종퇴위는 그를 다시 해외로 내보냈다. 이번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그는 다시 항일의 깃발을 올렸다.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이 결성되었고 그는 도총재로서 전국 동포에게 엄숙한 역사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1896년의 제천과 1910년의 블라디보스토크, 그 곳엔 다같이 의병이 있었고 의병의 최고 지도자는 유인석이었다.
우리나라는 독립을 회복할 수 있을까? 유인석의 기대는 그의 생전에 경험으로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는 그 기대를 평생 버린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지향하는 미래였으며 그의 기대는 결코 그의 경험에 압도되지 않았다. 그럼,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 1905년 입동이 지난 어느 초겨울 한밤중에 일어난 을사늑약은 끊임 없이 역사의 트라우마가 되어 후인들을 괴롭히고 있지만 그는 독립을 잃은 이 때가 도리어 독립을 회복할 적기라고 보고 있었다. 중국에 가자. 원세개를 설득하자.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지쳐 있다. 한중연합군이 일본과 싸우면 된다. 청군이 들어오고 의병이 일어나면 된다. 물론 이 미래는 끝내 실현되지 않았지만 많은 유학자들이 유인석의 이와 같은 기대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기대는 개인적인 기대를 넘어선 집단적인 기대였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당시 호서 산림 송병선(宋秉璿)의 문인으로 경상도 삼가 지역의 유학자였던 권명희(權命熙)는 노사학파의 정재규(鄭載圭)와 만나 의병 항쟁을 논의하였다. 논의의 내용은 이렇다. ‘민영익(閔泳翊)이 상해에서 10만 대군을 길렀고 원세개 휘하에 40만 중국군이 있으며, 이용익이 민영익과 연계해서 시베리아에 갔다. 청일전쟁에서 청군이 패배한 원인이 청군을 도울 조선의 의병이 없었기 때문인데 이번에는 꼭 청군의 진입과 의병의 내응으로 일을 성사시켜야 하니 유인석과 합심하여 동서에서 기각지세를 만들고 청병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유인석의 기대나 권명희의 기대나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유인석이 자신을 대신할 밀사로 백경원(白景源)을 선택했듯 권명희 역시 중국에 떠날 밀사를 생각하고 있었고 특히 밀사의 손에 쥐어줄 공신력 있는 편지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 경우 율곡의 봉사손으로 명망 있는 이종문(李種文)의 편지가 유력하게 고려되고 있었다.
하지만, 원세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중국군은 오지 않았다. 이듬해 의병이 일어났고, 최익현은 태인에서 민종식은 홍주에서 거병했지만 그것은 한국의 의병이었지 한중 연합군은 아니었다. 한중연합군이 일본과 싸워 승리한다는 기대는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미래로 흘러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쉽사리 꺾이지 않았다. 20세기 전반 중국에서 활동한 한국 독립운동의 깊은 내면에는 한중연대가 숨쉬고 있었다. 1909년 하얼빈의 총소리와 1932년 상해의 폭탄은 한중연대의식의 중요한 에너지가 되었다. ‘1905년, 한중연합군이 일본과 싸워 승리’하였다는 진술은 반사실이지만, 그 역사적 반사실의 이면에는 20세기 전반 한국독립운동의 어떤 정신적 원천의 하나를 읽어 내는 힌트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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