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의 무덤에 올린 제문
생각건대 우리나라 / 惟我東土
땅 외지고 무지하여 / 地偏以荒
선비라도 학문 몰라 / 士不知學
오직 문장 치중타가 / 惟騁詞章
한훤당 나오시고 / 寒暄有作
정암이 뒤를 이어 / 繼則靜庵
비로소 도 일으키니 / 始以道倡
사문의 본보기였네 / 斯文指南
거룩할사 우리 선생 / 猗歟先生
삼광 오악 정기 받아 / 稟精光嶽
선현 일찍 사모하여 / 夙慕前修
뜻 굳고 공부 전일 / 功專志確
명성이 완전하고 / 明誠兩盡
경의를 함께 지켜 / 敬義夾持
체와 용 다 갖추고 / 體用俱備
행여 아니 빠뜨리니 / 莫之或遺
주자께서 남긴 법을 / 雲谷塗轍
선생이 계승하여 / 先生是嗣
후생들이 그에 의지 / 後死有賴
길이 도를 전해 가리 / 百代不墜
이 몸 소생 정구는 / 逑也小生
문하 일찍 들어가 / 幸早及門
많은 교훈 받았으니 / 提掖之厚
감히 은혜 잊으리까 / 敢忘隆恩
다만 자질 우매하여 / 惟其魯莽
늙도록 공 못 이뤄 / 白首無憑
지난 평생 반성할 제 / 顧省平生
부끄럽고 서글프네 / 慚悼何勝
해묵은 풀 보노라니 / 披省宿草
선생 모습 뵙는 듯 / 如奉儀形
잔 올려 정성 바치니 / 一酌薦誠
부디 흠향하소서 / 庶格冥冥
[주D-001]삼광 오악(三光五嶽) : 삼광은 해와 달, 오성(五星)이고, 오악은 태산(泰山), 화산(華山), 형산(衡山), 항산(恒山), 숭산(嵩山) 등 중국의 다섯 명산이다.
[주D-002]명성(明誠)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1장의 “성을 통해 밝아지는 것을 성이라 하고 명을 통해 진실해지는 것을 교라 한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에서 나온 말로, 《중용》의 중요한 철학 명제 가운데 하나이다. 성(誠)을 통해 밝아진다는 것은 천도(天道)를 가리키는 말로, 진실하고 완전한 성(性)을 타고난 성인이 그 성을 통해 천하의 도리를 환히 알게 된다는 것이고, 명을 통해 진실해진다는 것은 인도(人道)를 가리키는 말로, 배워서 아는 현인이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 먼저 어느 것이 선인가를 환히 안 다음에 자신의 선한 본성을 더욱 원만하게 구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D-003]경의(敬義) :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의 “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에서 나온 말로, 송나라 정이(程頤)와 주희(朱熹)가 도덕을 수양하는 이상적인 방법으로 제시한 명제이다. 경(敬)은 내면의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정(靜)이며 체(體)에 속하고 의(義)는 올바른 도리를 따라 행하는 것으로 동(動)이며 용(用)에 속하는데, 내외가 결합하고 동정이 유기적으로 함양되어야 도덕을 완전하게 수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속 국가
한국
소속 국가 부속정보
조선
죽은 곳
죽은 때
1620(광해군 12).
직업
문신·학자
태어난 곳
태어난 때
1543(중종 38)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경학(經學)을 비롯해 여러 분야에 통달했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뛰어났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제자가 배출되어 영남 남인학파의 한 줄기를 이루었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아버지는 사중(思中)이다.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이다. 성주이씨(星州李氏)와 혼인하여 성주에 정착했다. 7세 때 〈논어〉·〈대학〉을 배워 뜻을 통했으며, 12세 때 그의 종이모부이며 조식(曺植)의 고제자였던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밑에서 공부했다. 1563년(명종 18)에 이황(李滉)·조식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64년 상경하여 과거장까지 갔다가 시험에 응하지 않고 돌아와 그뒤로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1573년(선조 6) 예빈시참봉에 이어 1578년 사포서주부, 그뒤 삼가·의흥·지례 등지의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에 부임했고, 이때 베푼 선정으로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이듬해 지평이 되고 동복현감을 거쳐 1585년 교정청(校正廳)의 교정랑(校正郞)으로서 〈경서훈해 經書訓解〉를 교정했다. 1591년 통천군수가 되었는데,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 군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뒤 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충주목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608년(광해군 즉위)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사람을 모두 용서하라고 상소한 뒤 고향에 돌아갔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기 위해 상소를 했다. 고향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유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경학을 비롯해 산수·병진(兵陣)·의약·풍수·역사·천문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면에 정통했으며, 특히 예학에 뛰어났다. 그는 전통적인 영남학풍을 계승했는데, 그의 〈심경발휘 心經發揮〉는 이황의 〈심경후론 心經後論〉을 수정·보완한 것으로 〈심경〉을 중요시한 이황의 학문을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오선생예설분류 五先生禮說分類〉는 정호(程顥)·정이(程)·장재(張載)·사마광(司馬光)·주희(朱熹)의 예설을 분류한 것으로 예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예를 통하여 이웃과 사회, 그리고 국가생활을 이롭게 한다는 도덕지상주의적 태도를 보여준다. 〈예기상례분류 禮記喪禮分類〉·〈가례집람보주 家禮集覽補註〉·〈오복연혁도 五服沿革圖〉·〈심의제도 深衣制度〉 등도 예학에 관한 저술들이다. 이밖에 역사서로 고금의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정치의 득실과 그 요체를 밝힌 〈고금충모 古今忠謨〉·〈고금치란제요 古今治亂提要〉 등이 있으며, 〈고금인물지 古今人物志〉·〈고금명신록 古今名臣錄〉 등과 같은 전기류도 있다. 안과 의서인 〈의안집방 醫眼集方〉과 산아와 육아에 관한 〈광사속집 廣嗣續集〉도 저술했다. 수령을 맡을 때마다 그 고장의 산천·물산·고적·인정·풍속 등을 조사·수집하여 7종의 읍지를 간행했는데, 그중 〈함주지 咸州誌〉가 남아 있다.
그밖의 저서로 〈한강집〉·〈성현풍 聖賢風〉·〈태극문변 太極問辨〉·〈수사언인록 洙泗言仁錄〉·〈무이지 武夷志〉·〈곡산동암지 谷山洞庵志〉·〈와룡지 臥龍志〉·〈역대기년 歷代紀年〉·〈고문회수 古文會粹〉·〈경현속록 景賢續錄〉·〈관의 冠儀〉·〈혼의 婚儀〉·〈장의 葬儀〉·〈계의 稧儀〉·〈갱장록 羹墻錄〉 등이 있다.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성주 동강서원(東岡書院)·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 관산서원(冠山書院), 성천 학령서원(鶴翎書院), 통천 경덕사(景德祠) 등에 제향되었다. 제자로는 이후경(李厚慶)·서사원(徐思遠)·황종해(黃宗海)·허목(許穆) 등이 있는데 이들은 김성일(金誠一)·유성룡(柳成龍)·장현광(張顯光)의 문하와 함께 영남 남인학파를 이루었다. 한편 그의 사상 가운데 경세론 분야는 허목 등 근기학파(近畿學派)에 속한 학자에게 계승되어,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정약용(丁若鏞) 등에 의해서 더욱 심화·발전되었다.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잘 썼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다음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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