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백 스무 번째 이야기
2012년 5월 28일 (월)
서당 교육과 경제ㆍ법률
나라도 잃고 할 일도 잃어야 했던 일제강점기의 선비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평생을 공부한 한문은 이미 세상에 쓸모가 없어졌고 한문을 버리고 공맹(孔孟)을 욕해야 개명한 선각자로 취급받던 그 시절에도, 그들은 변화하는 세상을 외면한 채 농부는 농사를 지어야 하고 매미는 하염없이 울어야 하듯이 그저 한문을 읽고 후세에 누가 읽어줄지도 모를 한문을 지었다. 오직 구학(舊學)만을 고집했던 그들은 대개 당시에도 외로웠고 역사에서도 후한 평가를 받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문은 글종자[文種]인들 이을 수 있었을까.

보내온 편지를 읽어보니 우리 동방의 학문은 체(體)만 있고 용(用)이 없어서 서양의 학문에 모멸을 당한다고 개탄하시고 저로 하여금 후학들을 인도할 때 경술(經術)을 뿌리로 삼고 경제와 법률을 함께 공부하게 하라고 하시니, 여기서 우리 존장(尊丈)께서 세상 풍파를 오래 겪었는데도 결국 세상에 대한 걱정을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비록 연로하셨어도 가슴 속에 열정은 아직도 왕성하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저 경제와 법률은 애초에 경술의 범위 밖에 있지 않지만 그 본말과 조목은 구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서경(書經)》 〈주관(周官)〉과 〈입정(立政)〉에 열거된 것이 이 일인데, 《주례(周禮)》에서는 육덕(六德)과 육행(六行)을 근본으로 삼아 놓고 육예(六藝)로써 뒤를 이은 것1)이 이러한 경우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이는 오직 성인이 세상에 나와서 인륜 기강이 밝아지고 정치 제도가 펼쳐진 뒤에라야 이를 말할 수 있습니다. 보잘것없고 용렬한 저 같은 자가 어찌 남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 천하가 극히 혼란한 것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중고(中古) 이래로 우리나라의 풍속이 경술을 중시하고 공맹(孔孟)을 존숭하였으나 사실은 한갓 헛된 형식만 남았을 뿐 진리는 없어졌으니,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지금 서양의 오랑캐들이 건너와서 세상의 질서가 뒤집혀 세상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육경(六經)은 지금 시세(時勢)에 맞지 않고 공자는 서양의 철인보다 못하다고들 하니, 비록 진(秦)나라 때와 같은 분서(焚書)는 없지만 옛 전적(典籍)들이 불타버린 지는 오랜 셈입니다.
이러한 때에 시속(時俗)에 전혀 어두운 한두 젊은이들이 이 적막한 산골로 나를 찾아와서 주공(周公), 공자(孔子)의 글을 읽어 사람의 도리를 조금이라도 아니, 그 정상이 불쌍하고 그 형세가 매우 외롭다 하겠습니다. 게다가 다른 공부까지 하게 한다면 다른 공부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이고 우리 구학(舊學)은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버리는 것이니, 뉘라서 온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버리고 많은 사람들이 버리는 것을 기꺼이 하려들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필경 경제와 법률은 제 자리를 차지하고 경술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터이니, 이것이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제 소견이 이와 같은데 우리 존장께서는 다시 무슨 말씀으로 저를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1)《주례(周禮)》에서는…것 : 육덕(六德)은 여섯 가지 덕으로 지혜로움[智], 어짊[仁], 밝음[聖], 의로움[義], 충성스러움[忠], 온화함[和]이며, 육행(六行)은 여섯 가지 행실로 효도[孝], 우애[友], 동성(同姓) 간에 화목함[睦], 이성(異姓) 간에 화목함[婣], 이웃 간에 신실함[任], 서로 구휼함[恤]이다. 육예(六藝)는 여섯 가지 기예로 예(禮), 음악[樂], 활쏘기[射], 말몰기[御], 글[書], 산수[數]이다. 중국 주(周)나라 때에는 교육을 담당한 대사도(大司徒)가 각 지방에 이 세 가지를 가르쳐서 잘하는 사람을 예우하여 등용하였다. 《周禮 地官 大司徒》

[竊讀來諭, 慨吾東學問之有體無用, 不免見侮於彼敎, 欲使謙引進後學, 而根以經術, 兼治經濟法律. 此見吾丈涉世旣久而不果於忘世, 雖甚衰暮而胸中之勃勃依然故在耳. 大抵經濟法律, 初不在於經術範圍之外, 而其本末科條, 不能無別. 如周官立政所臚列者皆是物, 而其六德六行爲其本焉, 繼之以六藝者此也. 雖然此惟聖人旣作, 倫紀明而治具張, 然後可以語此耳. 如謙輩孱劣, 何足以有及人者乎? 抑又思之, 天下之極於亂, 非由於一朝一夕也. 自中古以來, 國俗重經術而存孔孟, 然其實則徒存虛文, 眞理則亡, 其弊有不可勝言者. 況今洋海震蕩, 冠屨倒置, 世之人, 一辭以爲六經無當於時勢, 孔子有愧於西哲, 雖無秦火之烈, 而古籍之入於煨燼則久矣. 於是而有一二少年之全昧時俗者, 相從於寂寞之濱, 誦習周孔, 粗辨人倫; 其情地可矜, 其形勢甚孤. 若又使之兼治它業, 則它業者擧世所趨, 而舊學者衆所同棄; 人情孰肯捨其擧世之趨而甘爲衆棄哉! 畢竟經濟法律, 遽有其席, 而經術爲弁髦; 此非可慮者乎? 鄙見如此, 未知吾丈將復何以敎之?]

▶ 단원 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 중 서당(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하겸진(河謙鎭 1870~1946),〈허장 희계에게 답함(答許丈羲契)〉,《회봉집(晦峯集)》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이 성산(性山) 허혁(許爀 1851~1939)에게 보낸 답서(答書)이다. 하겸진은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수제자이며, 도학자요 문장가로 영남에서 이름난 학자이다. 허혁은 유명한 학자인 방산(舫山) 허훈(許薰)의 아우로 허겸(許蒹), 허환(許煥), 허노(許魯)란 이름으로도 불리며, 만주로 망명하여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성산이 보낸 편지에서 ‘우리 동방의 학문은 체(體)만 있고 용(用)이 없어서 서양의 학문에 모멸을 당한다.’고 한 것은 이른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과 같은 취지이다. 즉 동양에는 도(道)만 있을 뿐이니, 도를 실현할 도구인 경제, 법률, 과학 등은 서양의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회봉은 정치, 경제가 사실은 유가(儒家) 경서의 학문 안에 들어있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오래도록 이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생긴 폐해가 더 크다고 지적하고, 지금 세상은 진시황(秦始皇)이 분서(焚書)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개탄하였다. 바깥세상의 변화를 외면하고 내면의 도학사상(道學思想)에 더욱 침잠함으로써 자기 삶의 명분을 찾았다고 생각된다. 당시의 현실에서 구학(舊學)을 공부한 학자로서 사회적인 명망이 있던 그로서는 이 밖에 다른 길을 갈래야 갈 수도 없었으리라.

세상 돌아가는 실정에 어둔 젊은이들 몇 명을 서당에 앉혀놓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한문을 가르치던 대학자 회봉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신학문은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구학은 세상 사람들이 다 버리는 것이니 서당에서 신학문을 가르치면 구학은 아예 설 땅이 없어질 것이라 개탄한 그의 말에서 당시 선비들의 절망적인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이제 한문을 비판하던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우리의 고전과 옛 기록들을 해독하기 위해 오히려 한문을 아는 학자들이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불과 2,30년 전과 비교해 봐도 참으로 격세지감이 든다.

인문학은 시의(時宜)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유교에 훈고학(訓詁學), 성리학(性理學), 양명학(陽明學), 고증학(考證學)이 각각 그 시대의 요구에 부응했듯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 인문학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회봉의 시대는 유교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멸절(滅絶)되던, 유교 역사상 가장 참혹한 법란(法難?)의 시기였다. 시의에 맞는 길을 모색하기는커녕 한문을 이어갈 글종자라도 끊어지지 않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회봉은 국권을 잃은 암울한 현실에 몸으로 부딪쳐 선열(先烈)이 되지도 못하였고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로 자처하지도 않았다. 그저 구학을 공부한 학자로서 자기가 할 일을 분명히 알고 그 일을 묵묵히 하는 한편 파리장서사건 및 제2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는 등 지식인으로서 당면한 책임을 피하지 않았다. 회봉과 같이 조용히 자기 삶을 충실히 살아간 학자들의 삶에서 자기 삶의 좌표가 흔들리면서 무턱대고 현실에 뛰어드는 오늘날 지식인들이 배울 점은 많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들이 남긴 글종자가 오늘날 한문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음에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는 지식인의 현실참여가 필요하고 돋보이는 시대가 많았다. 그래서 지금도 속없는 많은 지식인들이 덩달아 남의 말을 되뇌어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막연히 현실에 참여하는 양 한다. 지식인이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되겠지만 아무나 선각자가 되려고 해서도 곤란하지 않겠는가.


글쓴이 :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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