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山火賁

 

上九 白賁 无咎.

 

 

       艮  山

    

 

 

       離  火

 

 

 

 

上九 白賁 无咎.

上九(상구) : 상구는

白賁无咎(백분무구) : 희게 빛나면 허물이 없으리라.

 

白賁 : 純白하게 꾸밈. 艮卦는 山을 상징하므로 上爻는 山마루를 뜻함. 따라서 산마루에 文飾을 加한다는 말로 質朴한 상태로 돌아감을 뜻함.

 

<上九> 純白하게 꾸민다. 속세의 영욕 따위를 초탈한 속에 질박한 덕을 누리기 때문이다.허물이 있을 수없다.

 

[풀이] 상구는 비도의 극, 장식의 극치는 백색으로 돌아온다. 희게 장식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소박하고 자연스런 꾸밈이라서 허물이 없다.

 

[上陽] : 순백하게 장식한다. 지나친 화려를 버리고 순수하고 검소한 기풍을 기른다. 아무런 허물도 있을 수 없다. 마침내 군주는 그 뜻을 이룩하리라.

 

上九 白비면 无咎리라 象曰 白비无咎는 上得志也라

上九가 九三과 應이 않되여서 옆에있는 六五와 상대하는되 꾸밈이 없이 본심 그대로 꾸미니 허물이 없다.

이런 자리가 나오면 아름답게 장식하는것을 버리고  검소함을 지키면 가정이 잘 다스려진다.

비는 원래 허례 허식 사치하는 것인되,백비가 되며는 윗사람이  검소하게 하면은 아래 사람도  따라간다.

원색이다.허례 허세 과장이 없다.만사 대길이다.뜻을 얻는 자리다.다 된다.

 

[상구]무색으로 꾸몄으니 허물이 없다.

白賁 : 꾸밈이 없고 순수함(質素). 아무런 빛깔이나 색깔이 없는 無色의 상태로 청정한 사람을 말함. 白은 또한 밝다(明)는 의미도 있으니, 사람이 밝지 못하면 이와 같은 순수한 상태를 보전할 수 없는 것이다(달그림자와 같이 은연자중하는 사람, 白道).

 

上九는白賁면 无咎1리라.
【傳】上九,賁之極也,賁飾之極則失於華僞,唯能質白其賁則无過失之咎,白,素也,尙質素則不失其本眞,所謂尙質素者,非无飾也,不使華沒實耳.

[정전]상구는 비괘의 극처이다. 賁飾이 至極에 달하면 분에 넘치고(화려함) 허식으로 말미암아 실도하게 된다. 꾸밈은 오직 질박하게 하여야 과오와 허물을 짓지 않는다. 白은 꾸밈이 없는 타고난 바탕을 말하므로 질박함을 숭상한다는 것은(白賁) 그 본질을 잃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꾸밈없는 본질을 숭상한다는 말은 곧 꾸밈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고, 허식으로 인하여 본질을 상실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上九는 賁의 極이니, 賁식이 지극하면 화려하고 거짓됨에 잘못된다. 오직 그 꾸밈을 質白하게 하면 過失의 허물이 없다. 白은 흼이니, 質素를 숭상하면 본질을 잃지 않는다. 이른바 ‘質素를 숭상한다’는 것은 꾸밈이 없는 것이 아니요, 화려함이 실질을 없애지 않게 할 뿐이다.

 

【本義】賁極,反本,復於无色,善補過矣,故其象占,如此.
賁가 극에 이르러 근본으로 돌아와 无色에 돌아오니, 잘못을 잘 보충하였다. 그러므로 그 象과 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白賁无咎 上得志.

象曰(상왈) : 상에 이르기를

白賁无咎(백분무구) : '백분무구'는

上得志也(상득지야) : 위에서 뜻을 얻음이라

 

상전에서 백이 허물이 없다 함은 웃자리에 있으면서 유유히 자득(自得)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상왈]白賁无咎는 위에서 뜻을 이루었음이다.

 

象曰白憤无咎는 上得志1라.
【傳】白賁无咎,以其在上而得志也,上九,爲得志者,在上而文柔,成賁之功,六五之君,又受其賁,故雖居无位之地而實尸賁之功,爲得志也,與他卦居極者,異矣,旣在上而得志,處賁之極,將有華僞失實之咎,故戒以質素則无咎,飾不可過也.

 

[정전]白賁无咎는 上에 있으면서 뜻을 얻었기 때문이다. 상구가 뜻을 얻음이 되는 까닭은 윗자리에 있으면서 柔(육오)를 문식하는 공을 이루고, 육오인 군주는 그 문식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지위가 없는 위치이지만 실제로는 꾸밈의 공을 주장하므로 뜻을 얻는바가 되는 것이니, 타괘에서의 극에 있는 뜻과는 다르다. 윗자리에서 뜻을 얻었고 또한 비괘의 극에 처하고 있으므로 장차 화려하고 거짓된 꾸밈으로 실질을 잃어버릴 수 있는 우려가 있기 때문에 “질박하게 꾸미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고 경계한 것이니, 꾸밈을 지나치게 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 白賁无咎’는 위에 있으면서 뜻을 얻었기 때문이다. 上九가 뜻을 얻음이 되는 까닭은 위에 있으면서 柔를 文飾하여 꾸밈의 功을 이루고, 六五의 君主가 또 그 꾸밈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지위가 없는 자리에 거하였으나 실로 꾸미는 功을 주관하여 뜻을 얻음이 되는 것이니, 다른 卦의 極(終)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이미 위에 있으면서 뜻을 얻고 賁의 極에 처하였으니, 장차 화려하고 거짓되어 실질을 잃는 허물이 있을 것이므로, ‘質素( 질소; 사치하고 꾸미지 않아 순수함, 검소하고 질박함 )하면 허물이 없다’고 경계한 것이니, 꾸밈은 지나치게 해서는 안된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01권 [賁]

 

[賁]

 

彖傳曰觀乎天文。以察時變。觀乎人文。以化成天下。其所以贊賁之文明。可謂盛矣。大抵物之相雜曰文。文者五色相宣之謂也。而贊賁之要。宜莫過於色也。然而六四之皤如。上九之白賁。彼則言其未賁之義。此則戒其反素之道。而外此諸爻之言色者。只是九三之濡如而已。此亦有意於其間而然耶。

時變 ①시세(時世)의 변화(變化) ②그 때의 변사(變事)

 

단전(彖傳)에서 “천문(天文)을 관찰하여 시변(時變)을 살피고 인문(人文)을 관찰하여 천하를 화성(化成)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賁)의 문명(文明)을 대단하게 찬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물건이 서로 섞여 조화를 이룬 것을 문(文)이라고 하니 문이란 오색(五色)이 서로 밝혀 줌을 말하며, 비의 중요함을 찬양하는 것은 색깔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그러나 육사(六四)에서는 ‘파여(皤如 소박한 흰색을 뜻함)’라고 하였고 상구(上九)에서는 ‘백비(白賁 소박한 흰 바탕을 뜻함)’라고 하여 저기에서는 아직 비가 아닌 뜻으로 말하였고 여기에서는 본바탕으로 돌아가는 도리로써 경계하였으며, 그 밖의 모든 효사(爻辭) 가운데에서 색깔을 말한 것은 구삼(九三)에서 ‘유여(濡如 윤택한 광채를 뜻함)’라고 한 것뿐이니, 이것도 그 사이에 뜻이 있어서 그러한 것인가?

 

 

煕朝對。魯論曰文勝質則史。質勝文則野。文質彬彬然後君子。中庸曰衣錦尙褧。惡其文之著也。臣於此有以知賁卦之罕言色也。

賁之彖曰觀乎天文。以察時變。觀乎人文。以化成天下。賁之所以文明者。爲如何哉。

在虞則煌煌乎五采五色。繪之爲日月山龍之服。而鳳凰九苞。燦然覽輝而下者是也。

在周則八窓明堂之中。執黃琮珮蒼玉而龍旂寶鼎。輝暎於左右者是也。

於其卦爻之中。如欲摸畫得此意思。必以五色相宣之色。逐爻說去。以增煥爛底氣象而後。方可謂之賁如矣。然徒有是文。而不以質爲本。則殆異於尙褧之美。易歸於文勝之弊。故乃爲敦本尙質之論。

九三濡如之外。皆不言色。而由文反質之戒。尤眷眷於上九白賁。然則聖人作易之意其微矣。

 

罕 드물 한.㉠드물다 희소하다 그물 기, 깃발 별 이름 .

煌煌 황황(晃晃). 번쩍번쩍 밝게 빛나는 모양. 휘황하게 빛나는 모양.

繪 그림 회. ㉠그림 그리다 도면을 그리다 채색하다(彩色--) .

燦 빛날 찬.㉠빛나다 번쩍번쩍하다 찬란하다(爛ㆍ粲爛--) .

琮 옥홀 종.㉠옥홀(玉笏: 제후가 조회할 때 천자가 지니던 옥으로 만든 홀) 구멍이 있는 팔각형 옥 부신(符信: 서로 맞추어서 증거로 삼던 물건) . 珮 찰 패.

旂 기 기.㉠기 날아오르는 용과 내려오는 용을 그린 붉은 기 성(姓)의 하나. 摸 본뜰 모.ⓐ더듬다 (막) 잡다, 쥐다, 가지다 (막) 본뜨다, 베끼다 찾다, 탐색하다(探索--)  

尙褧 : 錦衣尙褧 금의상경. 비단옷을 입고 기운 옷을 덧입는다는 뜻으로, 군자()는 미덕()이 있어도 이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眷眷권권 ①(가엾게 여기어)늘 마음속에 잊지 않고 있는 모양 ②연모(戀慕)하는 모양 .眷眷不忘 가엾게 여겨 항상() 생각함을 이르는 말

 

[김희조가 대답하였다.]《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문(文)이 질(質)을 이기면 겉만 번지르르해지고 질이 문을 이기면 질박하게 되니, 문과 질이 조화가 되어야 군자답다.”라고 하였고 《중용(中庸)》 33장(章)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褧]을 덧입는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문채가 너무 드러남을 싫어해서이다.”라고 한 말이 있는데, 신은 거기에서 비괘(賁卦)에서 왜 색깔에 대해 적게 말하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비괘의 단전에 “천문(天文)을 관찰하여 시변(時變)을 살피고 인문(人文)을 관찰하여 천하를 화성(化成)한다.”라고 하였으니, 비(賁)의 문명(文明)됨이야말로 어떠한 것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우순(虞舜) 시대의 경우 빛나는 오채(五采)와 오색(五色)으로 해와 달과 산과 용 등의 모양을 수놓은 옷을 만든 것과 아홉 가지 색깔의 깃털을 가진 봉황(鳳凰)이 찬란한 빛을 드날리며 내려온 것이 그것이고,

주(周) 나라의 경우는 여덟 창문을 낸 명당(明堂)에서 행사(行事)를 할 적에 황종(黃琮)의 옥을 잡고 창옥(蒼玉)의 구슬을 차고서 용이 그려진 깃발과 보배로운 솥[鼎]이 좌우에서 화려하게 빛나도록 한 것이 그것입니다.

만약 괘효(卦爻) 중에서 획(畫)을 탐색하여 그러한 의의를 얻어 내려고 하면 반드시 서로 도와주는 오색의 색깔로 효마다 설명해 가면서 환하게 빛나는 기상이 증가되게 해야 ‘비(賁)’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겉치레의 문(文)만 있고 질(質)을 근본으로 삼지 않으면 아마도 겉옷을 걸치는 아름다운 정신과는 차이가 있어서 ‘문’이 ‘질’을 이기는 폐단으로 귀결되기 쉬우므로, “근본을 돈독히 하고 실질을 숭상한다.”고 한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구삼에서 ‘유여(濡如)’라고 한 것 외에는 모두 색깔을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문에서 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경계는 상구의 백비(白賁)에서 더욱 간곡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니 성인(聖人)이 역(易)을 만든 데에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本義曰六五敦本尙實。得賁之道。故有丘園之象。陰性吝嗇。故有束帛戔戔之象。是則以敦尙而擬乎丘園也。以吝嗇而言乎戔帛也。胡氏曰賁于丘園敦本也。束帛戔戔尙實也。是則以敦本尙實。分屬於二者。未知果不悖於朱子之意耶。

 

《본의(本義)》에서 “육오(六五)는 근본을 돈독히 하고 실질을 숭상하여 비의 도를 얻었으므로 언덕과 동산의 상이 있으며, 음의 성품은 인색하기 때문에 속백(束帛)이 잔잔(戔戔)한 상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근본을 돈독히 하고 실질을 숭상하는 것으로써 언덕과 동산에 견주고 인색한 것으로써 잔잔한 속백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호병문(胡炳文)은 “언덕과 동산에 꾸미는 것은 근본을 돈독히 하는 것이고 속백이 잔잔함은 실질을 숭상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근본을 돈독히 하는 것과 실질을 숭상하는 것을 둘로 나누어 배속한 것이다. 과연 주자의 뜻에 어긋남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崑秀對。束帛戔戔。程傳則以受人翦裁釋之。本義則以薄物淺小解之。程傳之旨。以六五之位。不能自成。而受人之賁。如束帛之戔戔而成用也。本義之旨。槩以賁極反本。安于丘園。而從儉獲吉也。

然則敦本尙實。卽指六五本質而取丘園之象也。陰性吝嗇。束帛戔戔。卽指處賁之道也。程傳本義之旨。不啻相懸。如臣愚魯。不敢妄論。而至於胡氏之說。卽推廣本義之餘意也。又以夫子與奢寧儉之訓。以明禮奢寧儉之旨。與朱子之意。恐不相悖矣。以上賁

薄物: 薄物細故 아주 자질구례하고 변변하지 못한 사물()  槩. 蓋

 

[이곤수가 대답하였다.]“속백이 잔잔하다.”에 대해 《정전》에서는 다른 사람이 재단해 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풀이하였고, 《본의》에서는 품질이 낮은 하찮은 물건으로 풀이하였습니다. 《정전》의 뜻은 대개 육오(六五)의 자리에 있는 이로서 스스로 무슨 일을 해 나갈 수 없으므로 다른 사람이 꾸며 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는 마치 묶어 두었던 비단을 재단하여 용도에 맞게 쓰는 것처럼 해야 한다는 것이고, 본의의 뜻은 대개 꾸미는 것이 지극해진 다음에는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서 언덕과 동산에 안주(安住)하며 검소함을 따라야 길(吉)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근본을 돈독히 하고 실질을 숭상한다.”고 한 것은 곧 육오가 질박함을 근본으로 하여 언덕과 동산의 상(象)을 취한 것을 가리킨 것이고 “음의 성품은 인색하여 속백이 잔잔하다.”고 한 것은 비(賁)에 대처하는 도리를 말한 것이니, 《정전》과 《본의》의 뜻은 매우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신과 같이 어리석은 자로서는 감히 함부로 논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호씨의 말은 《본의》에서 못다 한 뜻을 미루어 넓힌 것이며 또 공자(孔子)께서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한다.”고 한 교훈으로써 “예절은 사치스럽게 꾸미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한다.”고 한 뜻을 밝혔으니, 주자(朱子)의 뜻과 아마도 어긋남이 없는 듯합니다.

이상은 비괘(賁卦)이다.

 

 

 

[주D-001]우순(虞舜) …… 만든 것 : 고대 제왕이 입던 장복(章服)의 무늬에 대한 설명으로, 《서경(書經)》 익직(益稷)에 그 내용이 자세히 보인다.

[주D-002]아홉 가지 …… 내려온 것 : 《서경(書經)》 익직(益稷)에 “소소(簫韶)의 음악을 아홉 차례 연주하면 봉황이 와서 춤을 춘다.[簫韶九成 鳳凰來儀]”라고 한 데서 원용(援用)한 말이다.

[주D-003]주(周) 나라의 …… 한 것 : 이에 관한 내용은 《대대례기(大戴禮記)》 명당(明堂)과 《주례(周禮)》 춘관(春官) 등에 보인다.

 

 

 

 

 

 

 

第6章 雍也- 16

 

子曰 : [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질박함(바탕)이 문식(외관)보다 지나치면 야만스럽고 문식이 질박함보다 지나치면 문서나 작성하는 사람같이 되니 문식과 질박함이 적당히 섞인 연후에 군자가 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실질(實質)이 문식(文飾)을 압도하면 야비한 사람이고, 문식(文飾)이 실질(實質)을 압도하면 서사(書士)이고, 문식(文飾)과 실질(實質)이 섞여서 조화를 이룬 연후(然後)라야 군자(君子)다.

 

野, 野人, 言鄙吳也. 史, 掌文書, 多聞習事, 而誠或不足也. 彬彬, 猶班班, 物相雜而適均之貌. 言學者當損有餘, 補不足, 至於成德, 則不期然而然矣.

○ 楊氏曰 : [文質不可以相勝. 然質之勝文, 猶之甘可以受和, 白可以受采也. 文勝而至於滅質, 則其本亡矣. 雖有文, 將安施乎? 然則與其史也, 寧野.]

 

文質彬彬:외견()이 좋고 내용()이 충실()하여 잘 조화(調)를 이른 상태()를 이름

 

 

 

 

 

 

 

 

 

출처 : 마음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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