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는 불교의 심성설(心性說)은 모두 유가(儒家)의 말을 훔친 것이라 하는데 이는 꼭 그렇지는 않다. 지금 불교의 경론(經論)과 주소(注疏)들을 보면 대개 당(唐)나라 이전의 책들이다. 이때에는 정주(程朱)의 성리설(性理說)이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는데도 저들이 심성(心性)을 말한 것이 이미 이치에 가까운 말이 많고 왕왕 지극히 정미(精微)하고 딱 들어맞는 말들도 있다. 한(漢)나라 이래 선비들이 어찌 꿈엔들 이런 말을 했겠는가. 그런데 저들이 어디에서 이러한 말들을 훔쳤단 말인가. 육경(六經)의 말들은 진실로 그보다 앞선 시대에 있었다. 그러나 성명(性命)의 이치는 《주역(周易)》・《중용(中庸)》에 보이고 심학(心學)의 방도는 《대학》・《논어》・《맹자》에 갖춰져 있는데도 한(漢)・당(唐)의 선비들은 평생토록 이 책들을 읽으면서 못 보고 지나쳤거늘 저들은 곁에서 엿보고 근사한 것을 훔쳤다면 그 자체만 해도 이미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저들은 당초에 심성이 나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심성을 찾을 줄 알아 그 그림자를 대략이나마 본 뒤에 유가(儒家) 경전 중 심(心)이니 성(性)이니 하는 글자들을 가지고 맞춰서 말한 것이니 애초에 마음속에 본 바가 없고 단지 우리 유가의 말을 훔쳐서 자기들의 말을 꾸민 것은 아니다. [世謂佛氏心性之說, 皆竊取儒家緖餘, 此未必然也. 今考其經論疏鈔, 大抵皆唐以前書. 於時, 程朱性理之說, 未出於世, 而其說心說性, 已多近理, 往往有極精微極親切處. 漢以來諸儒, 何曾夢道此等語, 而謂彼於何竊取耶? 若六經之說, 則固在其前矣. 然以性命之理, 著於易傳中庸, 心學之方, 備於大學語孟, 而漢唐諸儒, 沒身從事, 當面蹉過; 彼乃從傍窺見而竊取其近似, 已是不易. 然亦合下知得此箇物事, 是吾所自有底. 故便會尋求, 約略見其影象, 然後將經傳中心性名字說合之; 非初無所見於中, 而但竊取吾儒緖餘, 以文其說也.]
마음을 두고 “신령하고 밝아서 어둡지 않다.[靈明不昧]”, “깨어 있고 고요하다.[惺惺寂寂]”라 한 말들은 모두 불교에서 먼저 말한 것이지만 우리 유가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은 것은 그 이치가 같기 때문이다. “뭇 이치를 갖추었다.[具衆理]”, “모든 이치가 다 갖춰져 있다.[萬理咸備]”라는 말들은 불씨(佛氏)가 말하지 못했는데, 우리 유가에서만 분명히 말한 것은 같지 않은 점이 바로 여기 있기 때문이다. [說心而曰靈明不昧, 曰惺惺寂寂, 皆佛氏之所先道, 而吾儒不嫌於言之者, 以其理同也. 曰具衆理, 曰萬理咸備, 佛氏之所未道, 而吾儒獨明言之, 則所不同者, 正在於此耳.]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주(注)에서 “시선은 단정히 한다.[端視]”는 대목을 풀이하기를 “눈이 딴 곳을 보면 마음은 다른 곳으로 가니, 본래 마음을 제어하기 위하여 우선 시선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시잠(視箴)>의 “사물이 눈앞을 가리면 마음이 옮겨가니, 밖을 제어하여 안을 안정시킨다.”는 말과 같은데 그 글이 정밀하고 긴절(緊切)하여 좋다. [般若經註釋端視云: “目若別視, 心則異緣; 本欲制心, 且令端視,” 此視箴“蔽交於前, 其中則遷; 制之於外, 以安其內”之意, 而立語精切可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