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백 스물 세 번째 이야기
2012년 6월 18일 (월)
불교의 심성론(心性論)과 성리학
오늘날 성리학은 불교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성리학은 안은 불교이고 밖은 유교인, 이를테면 내불외유(內佛外儒)라는 것이다. 성리학이 불교의 영향을 받고 생겨났음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성리학은 불교를 배우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 불교에 대응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따라서 불교가 없었다면 성리학은 생겨날 수 없었겠지만 뒤집어서 말하면 불교가 없었다면 성리학은 굳이 생겨날 필요가 없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송(宋)나라 성리학자들은 대개 불교를 공부하였고, 특히 주자는 불교에 대한 조예가 매우 깊었으므로 그들의 저술에는 불교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간파해 놓은 견해들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 성리학자들은 대개 더 이상 불교를 연구할 필요를 못 느끼고, 중국의 학자들이 밝혀놓은 이론을 그대로 답습하여 불교를 배척할 뿐 자신이 불교를 공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조선시대 성리학 저술에서 불교에 대한 정밀한 이론을 발견하기 어렵다. 조선 중기 탁월한 학자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은 자신이 직접 불경을 읽은 공부의 바탕 위에서 성리학과 불교의 차이를 밝혀 놓았다.

세상에서는 불교의 심성설(心性說)은 모두 유가(儒家)의 말을 훔친 것이라 하는데 이는 꼭 그렇지는 않다. 지금 불교의 경론(經論)과 주소(注疏)들을 보면 대개 당(唐)나라 이전의 책들이다. 이때에는 정주(程朱)의 성리설(性理說)이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는데도 저들이 심성(心性)을 말한 것이 이미 이치에 가까운 말이 많고 왕왕 지극히 정미(精微)하고 딱 들어맞는 말들도 있다. 한(漢)나라 이래 선비들이 어찌 꿈엔들 이런 말을 했겠는가. 그런데 저들이 어디에서 이러한 말들을 훔쳤단 말인가.
육경(六經)의 말들은 진실로 그보다 앞선 시대에 있었다. 그러나 성명(性命)의 이치는 《주역(周易)》・《중용(中庸)》에 보이고 심학(心學)의 방도는 《대학》・《논어》・《맹자》에 갖춰져 있는데도 한(漢)・당(唐)의 선비들은 평생토록 이 책들을 읽으면서 못 보고 지나쳤거늘 저들은 곁에서 엿보고 근사한 것을 훔쳤다면 그 자체만 해도 이미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저들은 당초에 심성이 나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심성을 찾을 줄 알아 그 그림자를 대략이나마 본 뒤에 유가(儒家) 경전 중 심(心)이니 성(性)이니 하는 글자들을 가지고 맞춰서 말한 것이니 애초에 마음속에 본 바가 없고 단지 우리 유가의 말을 훔쳐서 자기들의 말을 꾸민 것은 아니다.
[世謂佛氏心性之說, 皆竊取儒家緖餘, 此未必然也. 今考其經論疏鈔, 大抵皆唐以前書. 於時, 程朱性理之說, 未出於世, 而其說心說性, 已多近理, 往往有極精微極親切處. 漢以來諸儒, 何曾夢道此等語, 而謂彼於何竊取耶? 若六經之說, 則固在其前矣. 然以性命之理, 著於易傳中庸, 心學之方, 備於大學語孟, 而漢唐諸儒, 沒身從事, 當面蹉過; 彼乃從傍窺見而竊取其近似, 已是不易. 然亦合下知得此箇物事, 是吾所自有底. 故便會尋求, 約略見其影象, 然後將經傳中心性名字說合之; 非初無所見於中, 而但竊取吾儒緖餘, 以文其說也.]

마음을 두고 “신령하고 밝아서 어둡지 않다.[靈明不昧]”, “깨어 있고 고요하다.[惺惺寂寂]”라 한 말들은 모두 불교에서 먼저 말한 것이지만 우리 유가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은 것은 그 이치가 같기 때문이다. “뭇 이치를 갖추었다.[具衆理]”, “모든 이치가 다 갖춰져 있다.[萬理咸備]”라는 말들은 불씨(佛氏)가 말하지 못했는데, 우리 유가에서만 분명히 말한 것은 같지 않은 점이 바로 여기 있기 때문이다.
[說心而曰靈明不昧, 曰惺惺寂寂, 皆佛氏之所先道, 而吾儒不嫌於言之者, 以其理同也. 曰具衆理, 曰萬理咸備, 佛氏之所未道, 而吾儒獨明言之, 則所不同者, 正在於此耳.]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주(注)에서 “시선은 단정히 한다.[端視]”는 대목을 풀이하기를 “눈이 딴 곳을 보면 마음은 다른 곳으로 가니, 본래 마음을 제어하기 위하여 우선 시선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시잠(視箴)>의 “사물이 눈앞을 가리면 마음이 옮겨가니, 밖을 제어하여 안을 안정시킨다.”는 말과 같은데 그 글이 정밀하고 긴절(緊切)하여 좋다.
[般若經註釋端視云: “目若別視, 心則異緣; 本欲制心, 且令端視,” 此視箴“蔽交於前, 其中則遷; 制之於外, 以安其內”之意, 而立語精切可喜.]


▶ <잡지> 내편이 실려 있는《농암집》(국립중앙도서관 제공)

- 김창협(金昌協 1651~1708),<잡지(雜識)> 내편(內篇),《농암집(農巖集)》

송(宋)나라 성리학자인 정이천(程伊川)은 “학자가 불교의 학설에 대해서는 음란한 음악이나 아름다운 여색을 피하듯이 멀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그 속에 빠져들게 된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러한 경계를 지켜 대개 불경을 읽지 않았다. 학문 풍토가 이렇다 보니, 불경을 갖추고 있는 집도 드물어 보려야 보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농암의 저술을 보면,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 《능엄경(楞嚴經)》 등의 불경을 읽고 그 내용을 들어서 비판해 놓았는데, 비록 성리학자의 시각에서 나온 것이지만 불교에 대한 그의 안목은 조선시대에 보기 드문 것이다. 명문가의 선비요 탁월한 성리학자였던 그가 불경을 읽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의외인데, 그의 부친 김수항(金壽恒)이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사사(賜死)되고 누이와 막내 동생이 요절하는 등 불운했던 가정사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 아우인 삼연재(三淵齋)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산사를 다니면서 면벽좌선(面壁坐禪)을 하고 승려들과 교제가 많았다는 사실도 이를 방증한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심(心)ㆍ성(性)과 같은 말들은 중국에서 불경을 번역할 때 중국의 고전에서 가져다 쓴 것이다. 중국의 문자로 인도의 글을 번역하다 보니 자연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서 성리학자들은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중국의 말을 훔쳐서 썼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 농암은 성리학이 생기기 전에 불서가 먼저 중국에 들어오고 번역되었다고 반박하였다. 또한 한(漢)ㆍ당(唐)의 선비들은 평생 유가의 경서를 읽으면서도 심성(心性)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는데 불교에서는 그 말을 가져다 쓰고 심성을 찾을 줄 알았다고 하고, 불교에서 심성에 대한 이론과 공부가 있은 다음에 심성(心性)이란 한자를 갖다 썼다고 하였다. 주자학의 나라 조선시대에 나오기 쉽지 않은 견해이다.

허령불매(虛靈不昧), 성성(惺惺)과 같은 말들은 《대학》의 명덕(明德), 경(敬)을 설명할 때에 왕왕 사용되었다. 이러한 말들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는 성리학이 불교에서 온 것이라는 주장을 펴는 학자들이 많은데, 농암은 이치가 같다면 불교와 같은 말을 사용해도 문제될 게 없다고 보았다. 당(唐)나라 때부터 유행한 선(禪)불교가 송(宋)나라 때에 와서는 지식인 사회 전반에 걸쳐 풍미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지식인들은 불교의 용어들을 일상 중에 자연스럽게 사용하였다. 그렇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성리학이 생겨났다는 말과 성리학이 불교에서 왔다는 말은 매우 다르다.

인도의 사상인 불교가 오랜 세월 중국을 휩쓸면서 중국의 전통 사상인 유교가 퇴색되고 불교는 말폐(末弊)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불교의 이론에 대응하기 위해 성리학이 생겨났던 것이니, 이를 두고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불교에 대응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불교의 사상에 대응하다 보니 자연 불교의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농암이 “《금강반야경》 주(注)에서 ‘시선은 단정히 한다.[端視]’는 대목을 풀이한 것을 정이천(程伊川)의 <시잠(視箴)>과 같은 뜻이라 하면서 표현이 좋다고 칭찬한 것에서 그가 불경을 꼼꼼히 읽고 좋은 점은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주자의 저술을 읽고 주자학을 깊이 연구한 학자로서 불경을 읽고 유교 쪽의 지나친 주장을 반박한 것은 공정하고 탁월한 안목이라 아니할 수 없지만, 농암도 어디까지나 주자학자인 만큼 불교에 대해서는 대체로 비판적이다. 그렇지만 농암의 저술에 보이는 불교에 대한 비판은 매우 예리하고 탁월하여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견해에 비해 손색이 없다.


글쓴이 :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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