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백스물두 번째 이야기
2014년 5월 12일 (월)
판이 깨지면 바둑도 없다
역사는 지독하게도 반복된다. 그래서 역사를 통해서 현재와 미래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다. 식민사관의 폐해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많은 국민들은 조선조 중후기에 있었던 당쟁의 폐해를 잘 알고 있고, 또 그로 인해서 조선의 패망이 앞당겨졌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조선조의 당쟁과 거의 유사한, 아니 더 심한 대립과 갈등이 이 나라를 휩쓸고 있다. 그 당시는 소수 지배층만의 문제였지만, 이젠 전 국민이 모두 직간접적으로 당쟁의 주체로 참여하고 있다. 입버릇처럼 과거를 거울로 삼자고 하는 말은 공염불이 되어버렸다.

역사를 볼 때는 늘 뒤에서 어느 한 점을 보기 때문에 자신은 그런 오류에서 자유로울 것 같이 생각하지만, 자신이 그 역사 속 한 점의 주인공이 되면 생각처럼 처신하기가 쉽지 않아서인가?

근래에 서원과 종사(從祀, 문묘(文廟))가 모두 난잡하니, 괴이한 일입니다. 이른바 환국(換局)이라는 것은 제 생각에는 그럴 일이 없을 듯합니다.
대개 판국이라는 것이 존재한 뒤라야 저편과 이편이 서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니, 만약 판국이 깨지면 어느 곳에서 다툴 수 있겠으며, 어떤 물건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근래에 조정의 일을 보건대, 분란이 이미 극에 달하여 백성들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니, 외방의 감사(監司), 병사(兵使), 목사(牧使), 수령(守令)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서한(西漢)의 말기에는 안에서부터 어지러워져 백성들이 심하게 병들지 않았으므로 중흥(中興)을 이룰 수 있었지만, 동한(東漢)의 경우에는 위아래가 모두 어지러웠으므로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오늘날의 형세로 보면 위아래가 모두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더구나 살육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양쪽의 칼날이 서로를 향하고 있으니, 이는 옛날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이미 박두한 화를 또한 어찌하겠습니까?


近來書院與從祀。俱是亂雜。可怪。所謂換局。弟意以爲似無是事。夫局存然後彼此可以互換。若局破則何處可爭。何物可換耶。近觀朝家事。紛亂已極。全不顧念民事。外方監兵牧守剝虐方始。西漢之末亂自內而民不甚病。故中興。東漢則上下俱亂故國亡。今日之勢。將上下俱亂矣。況殺戮之心。兩劍相向。此則古之所無也。已迫頭之禍也柰何。


- 윤추(尹推, 1632∼1707), 「여나명촌서(與羅明邨書)」,『농은유고(農隱遺稿)』 제3권

선조 때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라져 형성된 당파는, 숙종 때에 이르러 극에 달한다. 인현왕후의 폐위를 둘러싸고 남인(南人)과 서인이 엎치락뒤치락 정권을 차지하는 이른바 환국(換局)이라는 것이 몇 번이나 있었다. 서인은 다시 남인에 대한 처벌 여부를 둘러싸고 강경파인 노론(老論)과 온건파인 소론(少論)으로 갈린다. 이즈음의 환국은 단순히 정권만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필연적으로 상대편의 목숨을 뺏는 핍박이 이어졌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농은(農隱) 윤추(尹推)는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자,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尹拯)의 아우이다. 당시 윤증은 아버지의 행적 기술과 관련하여 그 스승인 송시열(宋時烈)과 사제의 의리를 끊을 정도로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는 당쟁의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조정의 지배층은 백성들의 삶은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정권 탈취와 정적들의 도륙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지방의 수령들은 이런 중앙의 혼란을 틈타 자신이 다스리는 지방에서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이런 상황을 직접 목도하면서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이런 위기감을 아버지의 제자인 나양좌(羅良佐)에게 보내는 이 편지에서 토로하고 있다. 짧고 평범해 보이는 내용이지만 절실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현시대의 상황이 결코 그때와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상대에 대한 존중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토론을 통한 소통이 더 쉽게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정작 상대에 대한 무시와 편견만이 확산되고 있다. 일부는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이단이라는 종교적 맹신도와 같은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지금의 형세는 자신들의 권력 욕심을 채우기 위한 위선적인 몸짓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남의 잘못에 돌아서서 웃을 것이 아니라, 남의 장점에 박수를 쳐야 한다.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본질을 벗어나 판 자체를 깨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바둑판이 있어야 바둑을 두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글쓴이 : 권경열
  •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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