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백스물여섯 번째 이야기
2014년 6월 9일 (월)
백구(白鷗)와의 맹세
사회는 기본적으로 시끄러운 곳이다. 늘 남들과 경쟁하며 살아야 하고, 속한 조직에서 보직이라도 맡을라치면 알게 모르게 중압감에 시달려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그곳을 벗어나려고 한다.

옛사람들이 자연을 벗하며 지내는 은자의 삶을 동경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그런 그들의 곁에 갈매기, 즉 백구(白鷗)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물을 읊을 때는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모두 갈매기에 가탁하여 그 한적한 아취와 표일(飄逸)한 자태를 표현하였다. 당장 대가(大家)를 들어서 말해보더라도, 『두보집(杜甫集)』 중에서 볼 수 있다.
내가 박복파(朴伏波)를 따라서 누선(樓船)을 타고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갈 때, 갈매기가 날다가 내려앉는 것을 보면 늘 선박을 정박하는 물가나 군사를 쉬게 하는 곳이었다. 그 새는 씻지 않아도 희고, 염색하지 않아도 탁하였으며, 그 정신과 태도는 무심한 뜬구름과 같아서, 멀리서 관찰할 수는 있어도 새장에 가둬둘 수는 없다.
오랫동안 자세히 관찰해보았더니, 그들이 배에 접근하는 까닭은 오직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가? 무릇 누선에 탄 군사들은 물고기를 잡는 자도 있고, 사냥을 하는 자도 있어서, 그 새나 짐승, 물고기, 자라의 비늘과 껍질, 간과 콩팥 등을 모두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마음속으로 그 의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다, 또 금수가 목숨을 잃는 것은 대개 곡식을 탐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무부(武夫)로부터 탄환을 구해 쏘아 맞히려고 하면서, 그 상태를 살펴보았다. 내가 탄환을 얻어서 가지고 있게 되자, 그때부터 갈매기도 감히 배에 접근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기미를 알아서였으리라.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좋지 않은 안색을 보고 훌쩍 날아올라 빙빙 돌면서 살피다가 위험이 가시면 내려앉는다.”라고 하였으니, 갈매기를 이르는 말이리라.
그것을 본 뒤에야, 시인, 묵객들이 반드시 시에다 넣어 읊을 적에 나름대로 취한 바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아, 세상의 이익을 탐하고 부귀를 탐하는 자들은 형법에 저촉되면서도 깨닫지를 못하니, 사람이면서 새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에 글을 지어서 사례하노니, 그 내용은 이러하다.
새 중에 갈매기가 있으니, 구름보다 희네. 드넓은 바다를 날아다녀 길들이기 어렵다네. 나쁜 기색을 보고 날아올라 화살을 멀리 피하니, 너는 나면서부터 기미를 앎이 신령하기도 하구나. 내가 부끄러워 탄환을 버렸거니, 네가 다가와주지 않아 마음이 외롭구나. 세상 사람들 웃음 속에 칼이 있으니, 백구를 버리고 누구와 함께하리. 더구나 쉬파리들이 천지에 가득하니, 나의 마음을 누가 밝게 알아주리. 초연히 강호에서 끝내 너와 함께 짝이 되리라.


古今諷物。詩人墨客。皆假其鷗。以况其閑適之趣。飄逸之態。姑擧大家而言之。如老杜集中可見已。予從朴伏波。乘樓船。遵海而南。則鷗之翔集。每於泊船之灣休師之次。其爲鳥也。不浴而白。不染而濁。其精神態度。漠然如浮雲之無心。可遠觀而不可籠也。旣久而熟視之。其所以近船者。惟飮啄是求焉耳。何以言之。凡師于樓船者。有漁者。有獵者。其鳥獸魚鼈鱗甲肝腎。皆得而食之故也。遂於心不屑其所爲。且以爲凡禽獸之失身者。盖爲稻粱謀也。於是從武夫。索彈丸欲射之。以觀其狀焉。自予得彈丸而有之。鷗亦不敢近船。意者其知幾乎。語有之曰。色斯擧矣。翔而後集。鷗之謂矣。予然後知詩人墨客。必播詠於詩而有所取也。嗚呼。世之貪利祿饕富貴者。觸刑辟而不知。可以人而不如鳥乎。作文以謝之。其辭曰。
鳥有鷗兮白於雲。沒浩蕩兮難乎馴。色斯擧兮遠矰繳。爾之生兮知幾其神。我且愧兮棄彈丸。莫往來兮心惸惸。世之人兮咲中有刀。捨白鷗兮吾誰與行。矧蒼蠅之滿天地兮。我衷孰明。飄飄江海兮。終與爾同盟。


- 정이오(鄭以吾, 1347∼1434), 「사백구문(謝白鷗文)」,『동문선(東文選)』 제56권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가 세종 즉위년(1418년)에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가 되어 복파장군(伏波將軍) 박덕공(朴德公)과 함께 남쪽 지방을 다닐 적에 갈매기를 보며 느낀 바를 서술한 글이다.

바닷가에서 날아다니며 유유자적하는 이미지로 인해 갈매기는 예로부터 문사(文士)들이나 화가들의 단골 소재였다. 여백을 적절히 채워주는 회화적 요소로는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선비나 세상을 등지고 사는 은자(隱者)들은 갈매기를 벗으로 인정하였다.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준다고 여겨서이다. 이런 정서는 다음과 같은 『열자(列子)』의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옛날 바닷가에 살던 어떤 사람이 매일 갈매기와 어울려 놀았는데, 갈매기들은 전혀 거리낌이 없이 그에게 다가왔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완상을 하고 싶다며 갈매기를 한 마리 잡아오라고 명했다. 이튿날 그 사람이 바닷가로 나가자 갈매기들은 공중에서 맴돌 뿐 다가오지 않았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하는 「백구사(白鷗詞)」라는 노래에,

“백구야 펄펄 나지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로다.”

라고 한 것도 이처럼 기미에 밝은 갈매기의 속성을 재치있게 노래한 것이다.

한갓 미물에 불과하지만 이렇듯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벗이다 보니, 혹여 조정에 벼슬하러 나갈 일이 생기면 갈매기에게 곧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다. 그게 갈매기와의 약속, 즉 ‘백구맹(白鷗盟)’으로, 옛사람들의 시문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어이다.

만약 오래도록 벼슬을 버리지 못한다면, 사람과의 약속을 어긴 것처럼 늘 미안해하였다. 심지어 갈매기가 자신을 비웃는다고 여기기도 하였다. 고려 때 유숙(柳淑)이 지은 「벽란도(碧瀾渡)」라는 시에서 그런 마음을 절실히 읽을 수 있다.


강호의 기약을 저버린 지 오래 久負江湖約
풍진 속에서 어느덧 스무 해를 보냈네 風塵二十年
갈매기도 나를 비웃는 듯 白鷗如欲笑
누대 앞으로 다가와 끼룩끼룩대네 故故近樓前

한갓 미물에 불과할 수도 있는 갈매기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감정이입을 위한 하나의 설정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백구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건 분명 행복한 일이다. 적어도 무언가를 탐하다가 욕을 보는 일은 없을 터이니 말이다.



글쓴이 : 권경열
  •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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