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백서른한 번째 이야기
2014년 7월 14일 (월)
유수원의 경제 이론
우리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돈이다. 아무리 검소하고 청빈한 사람이라도 석기 시대나 청동기 시대처럼 자급자족이나 물물 교환으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돈은 상상 이상의 위력을 가진다. 개인의 경제력이 능력과 동일시되고, 국가의 경제력이 곧 국력으로 직결된다.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하여 돈 앞에서는 예의염치조차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생겨난 돈이 도리어 사람을 지배하는 듯한 형국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화폐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숙종 때인 1678년이다.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로 화폐의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동전인 상평통보를 법화(法貨)로 채택하고, 화폐 제도가 정착되도록 적극적인 정책을 펴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18세기에 이르러 부유층에서 거액의 돈을 집안에 쌓아 두어 시중에 돈이 돌지 않는 전황(錢荒, 돈 가뭄) 현상이 발생하였다.

우리나라는 상업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돈[錢貨]이 부자들의 수중에 많이 들어가 있는데, 이 폐단을 해결해서 돈이 저절로 돌게 해야 화폐 제도가 시행될 수 있다. 지금 논의하는 사람들이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부상대고(富商大賈)가 돈을 많이 쌓아 두지 못하게 해야 한다.”라고 말하지만, 이는 참으로 우스운 주장이다. 부상이 돈을 쌓아 두고 말고는 그들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진시황(秦始皇)이라 한들 어찌 위협적인 금령을 만들어 막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부자들이 돈을 쌓아 두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명예를 좋아하고 실질적이지 못하여 사인(士人)이 귀한 줄만 알고 공(工)ㆍ상(商)을 천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익을 추구하는 무리라도 겉으로는 장사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므로 부득이 돈을 많이 쌓아 놓고서 은밀히 이익을 도모하여, 이자놀이나 방납(防納)을 하면서도 감히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떳떳하게 장사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기막히게 값싼 물건을 만나지 않는 한 끝내 투자하려 하지 않고, 돈을 깊숙한 곳에 쌓아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토지를 구입하고 종을 사들이려고 한다. 이것은 외형적으로는 장사꾼이라는 이름을 싫어하는 듯해도, 남몰래 영리를 추구하여 스스로 심성(心性)을 무너뜨리는 점에서는 도리어 행상(行商)이나 좌상(坐商)의 당당함보다 못한 것이다.
나라의 풍속이 이렇기 때문에 소자본을 출자하는 사람이 극히 적으니, 소상인들이 어디에서 돈을 얻어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겠는가. 소상인이 적으면 물건이 도회지에 많이 모일 수 없다. 그러므로 부상(富商)도 뜻대로 물건을 사들여 이익을 볼 수 없으니, 시장이 이와 같고도 돈이 묶여 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이런 풍속을 변화시켜 사람들이 상공업에 종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된다면, 수천, 수백 냥의 돈을 출자하여 동업자를 모으고 가게를 내어 장사할 사람이 지금보다 백배 이상으로 많아질 것이며, 궁벽한 시골에서도 돈을 물처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찌 돈을 깊이 쌓아 두는 폐단을 염려할 필요가 있겠는가.

我國商販不盛, 故錢貨多滯於富室, 必須疏通此弊, 使之自然流布, 然後錢法可行也. 今之議者, 至曰“設爲禁令, 使富商大賈, 不得多錮錢貨”云, 此實可笑之論也. 富商之錮錢與否, 只在渠心, 雖秦始皇, 安能威督設禁, 使之勿錮乎?
究其本, 則我國之人, 好名無實, 徒知士人之可貴, 賤汚工商. 故雖牟利之輩, 外恥商賈之事, 不得不貯蓄錢貨, 暗中財利, 或月利或防納, 而不敢爛用興販於衆目所視之地. 若不巧値價賤之物, 則終不肯販買翻轉, 深藏伺便, 以爲求田買僕之計. 此雖外似厭避商賈之名, 而其所以暗地營利, 自壞其心術, 則反不如行商坐賈之光明痛快也.
由其國俗如此, 故多出子錢者甚少, 唯彼手業小販之流, 何所得錢, 而廣行商販乎? 小販不多, 則物種不能廣集於都會之地. 故富商亦無以任意翻轉, 以規利殖, 商販如此, 則泉貨能不壅滯乎? 若使此俗一變, 不恥工商, 則損出累千百金, 募集同夥, 設肆行販者, 必然百倍於今日, 而窮鄕僻邑, 無不用錢如水矣. 尙安有錮錢之慮乎?

- 유수원(柳壽垣, 1694~1755), 「돈의 폐단을 논하다[論錢弊]」, 『우서(迂書)』

 


18세기의 전황(錢荒)은 화폐 제도의 근간을 흔들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 시중에 돈이 귀해질수록 그 가치가 상승하여 백성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부족한 만큼의 돈을 더 주조하여 유통시키기에는 국가 재정도 녹록지 않았고 그 타당성에 대한 의견도 갈렸다. 화폐 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의견도 있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화폐 무용론을 제기하며 곡물이나 포목 같은 실물화폐 사용을 주장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은 농업에 기반을 둔 전통사회에서 ‘말리(末利)’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상공업을 억제하려 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중상주의(重商主義) 실학자 유수원은 사회 개혁론을 제시한 책 『우서』에서 윗글과 같은 주장을 폈다. 즉 적극적으로 상공업을 진흥시켜 누구나 자유롭게 장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개편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양반을 중시하고 공ㆍ상을 천시하는 신분 제도 때문에 체면을 중시하는 부유한 양반들이 장사를 하지 못하고, 거액의 돈을 깊이 쌓아 둔 채 남몰래 고리대금업이나 투기를 일삼는 데서 전황이 발생했다는 분석이었다.

화폐 사용을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던 18세기 중반으로부터 3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 화폐의 효용성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돈 없이 사는 것이 불가능해진 지금에 와서는 과거 화폐 제도 도입이 그토록 큰 쟁점이 되었던 것이 도리어 재미있게 생각되기도 한다. 당시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했던 사람들, 그리고 서로 다른 경제관을 가졌던 유수원ㆍ이익 같은 학자들이 현대와 같은 자본주의 경제 구조를 상상이나 했을지.

결과론적으로 세상은 유수원이 주장한 상공업 중심 사회로 변모해 왔다. 그리고 지금은 오히려 서비스업의 비중이 과도하게 높은 산업 구조를 우려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돈이 극소수의 사람에게 집중되는 현상은 300년 전과 다를 게 없다. 5년간 44조나 발행되었다는 5만 원권 지폐는 어디론가 사라져 제대로 유통되지 않고, 마늘밭과 가정집 베란다에서 어마어마한 돈뭉치가 발견되기도 한다. 부의 편중화, 자본의 쏠림 현상, 극심한 빈부 격차는 오히려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대기업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은 여전하고, 대형 유통업체의 골목상권 진출로 소상인과 전통시장이 몸살을 앓고 있다.

경기 침체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요즈음 자영업 종사자들의 고충은 상상 이상이라고 한다. 학교 앞 문방구, 점심시간에 가끔 들렀던 식당, 반찬거리를 샀던 채소 가게 등 갑자기 문을 닫는 상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여전히 동네 골목에는 치킨집, 분식점, 과일 가게가 새로 들어선다. 서민들에게 생존의 문제는 너무도 절박하다. 생계형 자영업자가 포화 상태에 달한 지금, 정책 당국이나 경제 전문가들이 제시할 해결책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글쓴이 : 조순희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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