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백서른일곱 번째 이야기
2014년 8월 25일 (월)
대숲 속에서 군자를 생각하다

나의 고향은 문경새재 아래에 있는 충북 연풍이라는 깊은 산골이다. 그곳에는 날씨가 추운 탓에 사군자(四君子) 가운데 국화만 있을 뿐 매화와 난초와 대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야생으로 자라는 대나무는 볼 수가 없다. 어려서 낚시를 할 때면 대나무가 없어 도리깨나무라고 하는 것으로 조잡하게 낚싯대를 만들어 피라미를 낚았다. 그때의 소원이 쭉 뻗은 대나무로 된 낚싯대를 하나 가지는 것이었다.

내가 대나무 숲을 처음 본 것은 대학에 들어가 익산의 미륵사지 쪽으로 고적 답사를 가면서였다. 늘 대나무를 보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별 거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남쪽 지방의 시골 마을 곳곳마다 있는 울창하게 우거진 대나무 숲은 경탄의 대상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대나무만 보면 좋았다. 특히 울창하게 자란 대나무 숲을 보면 좋았다. 지금도 대나무 숲만 보면 대숲 속에서 이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그 속에 묻혀서 대나무를 닮은 삶을 살고 싶다.

대나무는 다섯 가지 덕(德)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속이 텅 비어 통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재질이 아주 단단한 것이고, 세 번째는 줄기가 아주 굳센 것이고, 네 번째는 마디를 없앨 수 없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푸른 색깔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대나무는 또 두 가지 복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오래 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종족이 무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대나무를 보고 취하는 점이 있는데, 이는 서로 간에 비슷한 점이 있어서이다.
비슷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군자는 마음을 비운다. 그러므로 『주역』에 이르기를 ‘아름다움을 속에 감추고 있어 이치에 통달한다.[黃中通理]’고 하였다. 군자는 스스로 강해지려고 한다. 그러므로 『서경』에 이르기를 ‘깊이 잠긴 이는 굳건함으로 다스린다.[沈潛剛克]’고 하였다. 군자는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경』에 이르기를 ‘그 곧기가 화살과 같다.[其直如矢]’고 하였다. 군자는 법도를 뛰어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용』에 이르기를 ‘발하면 모두 절도에 맞다.[發而皆中節]’고 하였다. 군자는 구차스러운 태도를 짓지 않는다. 그러므로 『춘추』에 이르기를, ‘의로운 모습이 얼굴빛에 나타난다.[義形于色]’고 하였다. 이것은 대나무가 군자와 비슷한 점이다.
이 때문에 군자에게 이런 덕이 있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사랑하고 좋아하며, 노래를 불러 찬탄하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저 기수의 후미진 곳을 보니, 푸른 대나무가 아름답도다.[瞻彼淇澳 菉竹猗猗]’라고 하였다. 또 좋아하는 마음을 그칠 수가 없고, 사랑하여서 잊지 못하며, 영탄하고서도 부족하여 송축하며 기도하였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군자께선 만년토록 후손을 편안히 기를 것이다.[君子萬年 保艾爾後]’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문왕의 자손들이 본손과 지손 모두 백 대를 전할 것이다.[文王孫子 本支百世]’라고 하였다. 만년을 살면 아주 오래도록 사는 것이고, 본손과 지손이 있으면 종족이 아주 번성한 것이다. 이것이 군자가 대나무와 비슷한 점이다.
무릇 군자의 덕이 있은 다음에야 대나무에 비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대나무의 덕이 있은 연후에야 군자라고 칭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군자가 대나무에서 취함이 있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우리 집 뜰에 대나무가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대한다. 이에 붓을 적셔 대나무에 대한 설을 짓는다.

竹有爲德者五。一通中。二剛材。三體直。四節不可滅。五色不可改。有二福。長生一也。茂族二也。故君子有取乎竹者。以其似之也。其似之也如何。君子虛心。故曰黃中通理。君子自強。故曰。沈潛剛克。君子不倚。故曰其直如矢。君子不踰閑。故曰。發而皆中節。君子不苟容。故曰。義形于色。此竹之似君子也。是故。君子有是德。則人必愛悅而詠歎之。其詩曰。瞻彼淇澳。菉竹猗猗。悅之而不能已。愛之而不能忘。詠歎之不足。則誦禱之。其詩曰。君子萬年。保艾爾後。又曰。文王孫子。本支百世。萬年則生斯長矣。本支則族斯茂矣。此君子之似竹也。夫有君子之德。然後可以比竹。有竹之福。然後可以稱君子。君子之有取也亦宜。庭有竹。朝暮對焉。於是筆之爲竹說。

- 김조순 (金祖淳 1765~1832), 「죽설(竹說)」, 『풍고집(楓皐集)』


▶이정(李霆)의 풍죽도
『우리 그림 백가지』에서 인용 ,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 정조 때 대제학을 지낼 정도로 문장에 뛰어났으며, 그림에도 뛰어나 특히 대나무를 잘 그리기로 이름이 났던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이 지은 「죽설」이라는 짤막한 글이다. 김조순은 이 글에서 주역, 서경, 시경, 중용, 춘추에 나오는 구절을 따다가 대나무가 지닌 다섯 가지의 특성을 군자가 지녀야 할 다섯 가지 덕과 비교하여 말하였다. 대나무는 속이 비고, 재질이 단단하고, 줄기가 곧고, 마디가 있고, 색깔이 푸르다. 이것은 군자가 지녀야 할 다섯 가지 덕인 통(通), 강(剛), 직(直), 절(節), 의(義)와 통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군자답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동양의 지식인들은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인간상을 군자로 보았다. 유교 경전을 보면 군자에 대한 말이 숱하게 나온다. 특히 공자는 군자에 관해 많은 말을 했다. 군자란 어떠한 사람을 말하는가? 군자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군자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군자와 대비되는 소인(小人)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면 된다. 소인은 도량이 좁고, 덕이 없으며, 간사한 사람이다. 공익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며, 인의(仁義)를 모르고 재리(財利)만 밝히는 사람이 소인이다.

군자는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학식과 덕행이 높기만 해서는 안 된다.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기 위하여 끊임없이 지덕(知德)을 수양해야만 한다. 그래야 군자다. 군자는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높은 직위에 있다고 해서 다 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덕을 겸비하지 못하고 만민을 사랑하지 않으면 군자가 아니다. 군자는 두려워하는 것이 있는 사람이다. 천명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군자이다.

높은 직위에 있지 않고 곤궁한 처지에 있다고 해서 군자가 못 되는 것도 아니다. 비록 곤궁한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일신의 영달을 이루기 위하여 아등바등하지 않으면서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수양해 나가면 군자인 것이다. 어떤 처지에 처하든 사사로운 이익보다는 공적인 이익을 우선시하면서, 근면 성실한 자세로 참되게 살면 군자인 것이다.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에서 중용(中庸)과 조화(調和)의 삶을 살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수양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군자다.


내게 차군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뜨락의 한 모퉁이에 대를 심었네.
나는 그저 삼익이나 이루고 싶지,
굳이 대숲 이루고픈 마음은 없네.
풍상 쳐서 부러져도 변치 않다가,
비이슬에 씻기면 또 도로 살아나,
굳센 절개 갈수록 더 굳건하리니,
장차 너를 힘입기를 내 바라누나.

此君不可無
爲種一庭隅
祗欲成三益
何煩敵萬夫
風霜摧不變
雨露洗還蘇
勁節應彌固
將願賴爾扶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대나무를 심으면서 자신도 대나무의 굳센 절개를 닮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읊은 시이다. 이 시에 나오는 ‘차군(此君)’은 대나무를 가리킨다. 옛날에 왕휘지(王徽之)가 집에 대나무를 심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하루라도 이 분[此君]이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심은 것이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삼익(三益)’이란 말은 세 가지 유익한 벗으로, 매화와 수석과 대나무를 가리킨다. 소동파(蘇東坡)가 “매화는 차갑지만 빼어나고, 대나무는 깡마르지만 오래 살고, 수석은 못생겼지만 아름다움이 있으니, 이는 세 가지 유익한 벗이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얼마 전에 나의 선조이신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유적지로 담양에 있는 식영정(息影亭)과 송강정(松江亭)을 둘러보고 올라오는 길에 녹죽원이란 곳을 들렀다. 온통 쭉쭉 뻗은 대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휴양지이다. 편안하게 거닐면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그 대숲 길을 거닐면서, 군자의 모습을 생각해 보고, 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이미 높은 학식과 덕행은 닦지 못하였으며, 높은 지위에 오를 가망은 더더욱 없다. 그러니 공자가 말한 군자가 되기는 아예 그른 것이다. 다만 현재의 내가 처한 위치에서 나 자신을 수양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삶만은 내가 좀 더 힘을 쓰면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그리 살면 남은 나의 삶이 저 대나무에 크게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대숲 속을 거닐면서 가졌던 그때의 마음가짐을 다시금 다짐해 본다.



글쓴이 : 정선용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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