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의 유학을 하는 자들은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친다’는 말을 입에 올려 과격하게 말하지만 마음먹은 근원과 일을 시행한 실제를 따져보면 갓을 발에 신고 신을 머리에 쓰는 지경으로 점차 흐르지 않은 자가 거의 드물다. 내 한 몸으로 말하면 천리가 중화이고 인욕이 이적이며, 학술로 말하면 하늘에 근본을 두는 것이 중화이고 마음에 근본을 두는 것이 이적이다. 마음 씀씀이로는 의리를 추구하는 마음이 중화가 되고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이적이 되며, 일 처리로는 공적인 처리가 중화가 되고 사적인 처리가 이적이 된다. 공자가 『춘추』를 저술하고 나서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치는 대의가 비로소 만세에 해와 별처럼 밝아졌으니, 이후로 유학자라 하는 사람치고 누가 중화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치는 것을 우리 유문(儒門)의 일대 절목으로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종종 자신의 마음속 중화와 이적을 분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결국 이적을 높이고 중화를 물리치는 지경이 되는 자도 있다. 만일 세간의 중화를 높이고 세간의 이적을 물리치려거든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 경계를 명확히 꿰뚫어 주인으로 삼거나 종으로 삼거나 해야 할 것이다.
世之從學者, 纔接人, 輒以尊華攘夷, 騰口劇談, 而究其立心之原·行事之實, 則不駸駸然流入於履冠戴屨者幾希. 蓋以一身言之, 天理華也, 人欲夷也; 以學術言之, 本天華也, 本心夷也. 用心則義爲華而利爲夷也, 處事則公爲華而私爲夷也. 夫子作『春秋』, 而尊攘大義始日星于萬世, 自是厥後, 以儒稱者, 孰不以尊攘爲斯文一大節目? 往往不能致辨於自心中華·夷, 故其所云爲, 亦有爲尊夷攘華之歸者矣. 如欲尊攘世間之華·夷, 當先自自心中, 明破其界分, 而主之奴之也.
- 박수(朴銖, 1864~1918), 『중당유고(中堂遺稿)』2권, 「화평서실기(華坪書室記)」 | |
|
‘존화양이는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중화는 무엇을 말하고 오랑캐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사실 역사에서 중화와 오랑캐를 고정된 개념으로 보기는 어렵다. 존화양이의 출발은 공자가 『춘추』에서 천명한 존주론(尊周論)에서 시작된다. 천자의 나라 주나라를 높이는 것이 춘추대의(春秋大義)이니, 기본적으로 중화는 중국을 의미한다. 즉 지리적 또는 혈통적 범주를 바탕에 지니고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었던 당시에도 오로지 지리나 혈통만으로 중화의 개념을 규정하지는 않았다. 중화의 롤모델인 주나라는 예와 인륜을 근간으로 하여 제도와 문화를 완벽하게 이룬 나라라는 상징성이 있었다. 따라서 지리적·혈통적 조건을 갖추었다고 무조건 중화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나라가 이룬 제도와 문화를 갖추어 예를 지키고 인륜을 유지하여야 중화로 인정되었다. 공자 역시 중화를 실현할 현군(賢君)이 없는 세상을 한탄하여 구이(九夷)로 가서 중화의 꿈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나라 또한 이러한 의식을 근거로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중화의 개념이 어떻든 우리나라에서 존화양이는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면 존화양이는 우리나라의 국제관계에 있어서 대외정책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들의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원나라를 배척하자.”는 친명배원(親明排元) 정책을 시작으로, 유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국제정세에 따라 중화와 이적의 개념을 변화시키고 대상을 바꾸면서 존화양이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조선 후기의 숭명배청(崇明排淸)과 북벌론(北伐論), 말기의 존왕양이(尊王攘夷)와 위정척사(衛正斥邪)가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나라가 망하는 위기의 시대, 구한말에는 존화양이의 신념이 강화되어 구국운동의 명분이 되고 외세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어주었다. 개항 이후 서양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신분제도도 무너지고 실용과 능률을 점점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존화양이라는 대의적 명분론이 전근대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사대주의의 발로라는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의 전통을 보전하고 정신을 지켜내는 긍정적인 역할을 충실히 해낸 것도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대체로 우리가 알고 있는 존화양이의 실체이다. 중화와 이적의 개념과 대상이 외적 객체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글에서 저자 박수는 존화양이의 의미를 내적 주체로 심층화하고 내면화하여 중화와 이적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박수는 중화를 중국이나 문화에 국한하지 않고 바로 내 안의 천리이며 의리이며 하늘을 근본으로 하는 학문이며 공적인 일 처리라고 하고, 또 이적을 중국을 위협하는 세력이나 예와 인륜을 저버리는 반문화에 그치지 않고 내 안의 욕심이며 이익을 쫓는 마음이며 마음을 근본으로 하는 학문이며 사적인 일 처리라고 하여 존화양이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우리나라에서 존화양이의 이론이 변화하고 발전해온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만큼 존화양이를 단순히 사대주의적 발상으로 치부하여 비판만 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선조들의 깊은 고뇌와 사려가 담긴 글을 발굴하고 번역하는 것이야말로 너무나도 중요한 일임을 새삼 절감한다.
* 『논어』「자한(子罕)」제13장에 “공자께서 구이에서 살고자 하시니, 어떤 사람이 ‘누추한 곳인데 어찌 하시렵니까?’ 하자, 공자께서 ‘군자가 산다면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 하셨다.[子欲居九夷, 或曰陋, 如之何, 子曰君子居之, 何陋之有]”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군자가 거처하는 곳이 바로 중화임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
글쓴이선종순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전주분원 전문위원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