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 그 이유 있는 반항

동호거실(衕衚居室) 134

어디서 문묵장을 찾아
죄인의 면상에다 그 허물을 기록할까?
가탁한 글 거짓된 학문으로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훔친 본보기라고

安所得文墨匠안소득문묵장
記罪過人面上기죄과인면상
以爲假文僞學이위가문위학
欺世盜名榜樣기세도명방양

- 이언진(李彦瑱, 1740~1766), 『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

해설
「동호거실」이라는 제목의 연작시 157수 가운데 134번째 작품이다. 시(詩)·서(書)·화(畵)의 재능을 겸비한데다가 일본 사행 기간 동안 ‘무쌍국사(無雙國士)’라 칭송되고 일본에서 시집(詩集)이 간행될 정도의 뛰어난 시명(詩名)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가로막는 현실로 인해 번번이 좌절을 경험한 이언진은, 기존의 사회적 규범에 대해 강력한 회의를 제기하고 이런 현실에 대한 개혁 의지를 다각도로 설파하였다. 그리고 이런 의지를 자신의 창작세계에 도입하여 스스로 실천에 옮겼는데, 위의 시에서는 성인의 글에 가탁하여 거짓된 학문을 만들고 부조리한 현실의 규범을 제정하여 세상을 속이는 무리를 잡아들여 천하에 그 죄상을 낱낱이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언진은 영조 때의 역관(譯官)으로, 본관은 강양(江陽), 자(字)는 우상(虞裳) 또는 상조(湘藻), 호는 운아(雲我)·창기(滄起)·송목관(松穆館)·담환(曇寰)·해탕(蟹蕩) 등이고,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 1708~1782)의 문하에서 수업하며 시(詩)를 익혔다. 대대로 역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지혜롭고 총명한 자질에 빼어난 문장과 정교한 글씨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아울러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는 육언시(六言詩)라는 독특한 시형(詩形)을 즐겨 사용했는데, 현재 그의 문집에는 위에서 언급한 「동호거실」 157수를 포함하여 185수의 육언시가 전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육언시는 대체로 여말(麗末)부터 간간이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조선 후기에 이르러 비판적 사대부나 중인층에 의해 주로 창작되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당대 문학사의 보편적인 흐름을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적인 문학과 미의식을 추구하고자 했던 그들의 독특한 개성(個性)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형식면에서도 당시 정격(正格)으로 굳어진 오언시(五言詩)나 칠언시(七言詩)보다 구속이 적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었다. 실제로 이언진의 육언시는 구법이 매우 특이해서 일정한 격식을 찾아보기 어렵고 평측(平仄)이나 운자(韻字)를 무시한 산문투의 시구(詩句)도 자주 보이며, 내용면에서도 기존의 한시에서 금기시 되던 속된 표현을 과감히 수용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효과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이처럼 이언진은 육언시라는 이색적인 형식에 파격적인 발상과 독창적인 내용을 담아내어, 기존 한시(漢詩)의 틀을 탈피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파격이 바로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세계를 추구하던 그의 간절한 염원의 발로이자, 가탁한 글 거짓된 학문으로 세상을 속이는 염치없는 사대부들에 대한 이유 있는 반항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글쓴이전백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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