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전옥서(典獄署)의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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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실록 기사는 감찰 박진경이 전옥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전옥서를 형조 옆으로 옮길 것을 건의한 내용이다. 전옥서는 형조의 옥수(獄囚)를 관장하는 종6품의 아문이다. 종친부, 의정부, 사헌부, 한성부 등 몇몇 직수아문(直囚衙門)이 있었지만 대부분 죄수는 모두 전옥서에 수감되었다.
당시 전옥서는 재판하는 과정에서 미결수를 구류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기결수가 형기를 채우는 현대의 감옥과는 같지 않다. 즉, 전옥서 죄수들은 판결이 날 때까지 심리 장소인 형조와 구류 장소인 전옥서를 왕복해야 했다. 전옥서는 중부 서린방(瑞麟坊)에 위치하였는데 현재 종로구 서린동 종각역 부근에 표지석(사진 왼쪽)이 있고, 형조는 현재 세종문화회관 앞 보도에 그 터를 알리는 표지석(사진 오른쪽)이 있다.
죄수를 심리하는 곳인 형조와 장을 맞아 제대로 걸음을 걷기도 힘든 죄수를 데리고 가서 수감시켜야 하는 전옥서는 제법 거리가 있는 셈이다. 두 곳을 왕복하는 사이에 가족들은 죄수를 따라다니며 심문에 대처해야 할 방도를 일러주거나, 옥바라지를 위해 부유한 자를 무고하여 끌어들이라고 코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감찰 박진경은 전옥서를 형조의 뒷담 아래로 옮겨 설치하고, 거기에 원래 살고 있던 백성들은 전옥서 자리에 옮겨 살게 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답변은 부정적이었다. 이유는 전옥서를 옮겨 다시 짓는 것이 일단 용이하지 않다는 것, 즉 전옥서 건물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새 자재를 가지고 지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이 되었고, 살던 주민들을 옮겨야 하는데 백성들이 감옥이 있던 자리에 가서 살려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또 전옥서에는 형조 죄인만이 아니라 의금부, 육조, 종부시, 사헌부 등의 죄인들도 수금되기 때문에 전옥서가 형조와 멀다고 하여 옮겨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전옥서와 형조를 왕래할 때 말이 누설될 수 있다는 문제는 감시를 좀 더 엄중히 하는 방향으로 해결하면 된다고 보았다. (『연산군일기 9년 2월 19일』)
중종 15년, 전옥서 근처에 불이 나서 집들이 잇달아 연소된 사건이 있자 잠시 죄인을 형조에 옮겨 두었다가 다음날 다시 전옥서에 수감하는 경우는 있었으나(『중종실록(中宗實錄) 15년 2월 21일』) 전옥서 자체의 이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 3년 뒤, 전옥서와 형조가 떨어져 있는 구조를 이용해 죄인이 탈옥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죄인 고윤량이 전옥서로부터 형조로 압송되어 갈 때에 사위인 자가 고윤량을 빼내어 도망치도록 한 것으로, 죄인의 수송 과정에서 말이 누설되는 것 정도가 아니라 탈옥도 가능했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훗날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도 전옥서와 형조의 위치 문제로 말미암는 폐단에 대해 지적하였다. 전옥서가 형조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죄수를 전옥서에 수감하고 있다가 좌죄(坐罪)할 때 형조로 보내고 끝나면 다시 데리고 와서 수감하는 일을 매일 반복해야 했으며, 죄수들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판결이 지체되고, 하루 정도 심문하면 될 일을 수십 일에 이르기도 하는 등 그 폐단이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전옥서를 형조 안에 두어 형조가 직접 관리하도록 하고 전옥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반계수록 16, 직관제도 하(下), 전옥서』) 역시 문제점 제기에서 그쳤다.
전옥서는 청사, 서리 장방, 사령청(使令廳), 상직방(上直房), 군사수직방(軍士守直房), 남옥(男獄)과 여옥(女獄)의 옥사(獄舍) 등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옥과 여옥은 중종 13년에 담장이 둘러졌는데, 남옥과 여옥이 구분되어 있기는 했으나 죄수를 구별하지 않고 같이 수용하면서 중죄인들이 서로 간음하는 폐단이 생기고 옥중에서 아기를 낳는 일도 있어서 담을 쌓아 분리, 수용하였다.(『중종실록 13년 1월 6일』) 전옥서의 환경이 열악하다는 점에 대해선 너무나 많은 기록이 있다.
이처럼 전옥서가 협소하고 수인들이 많아서 칸을 늘리는 것이 필요했으나 당시 위정자들은 감옥을 확장하는 것이 왕의 선정(善政)에 누(累)가 되는 일이고 옥방(獄房)을 늘리는 것은 백성들을 형벌로 몰아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저 때에 맞추어 죄수를 판결하여 내보냄으로써 감옥을 비게 하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 보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재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체옥(滯獄), 즉 판결이 지체되어 미결수가 감옥에 오래 갇혀 있으면서 기결수와 다름없게 되는 것이었다.
옥에 수감되는 죄수들은 늘어났고 굶주림과 추위로 죽는 일도 많았으며, 옥중에서 자살하는 사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은 개선되지 않고, 위치의 문제점도 계속 노출되면서 전옥서는 고종(高宗) 31년(1894), 감옥서(監獄署)로 바뀔 때까지 현재 자리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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