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는 재미있다. 내용도 재미있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내용에 몰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재미있다. 전국시대 일본의 감각으로 삼국지를 읽는다면 단연코 주인공은 조조이다. 위로 천자를 끼고 사방의 영웅들을 격파해 제국의 통일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조조의 활약이야말로 각지의 다이묘[大名]들을 굴복시키고 일본 열도를 제패하여 마침내 막부를 건설하는 쇼군[將軍]의 모습이다. 명청교체기 조선의 감각으로 삼국지를 읽는다면 단연코 주인공은 유비이다. 한나라 황실의 후예로서 유비가 고난의 여정을 밟으면서 끝내 중흥의 터전을 마련하고 유비의 충직한 신하 제갈량이 마침내 출사표를 던져 한나라 황실을 멸망시킨 위나라를 향해 쳐들어 가는 장면은 조선이 병자호란의 고통에 좌절하지 않고 와신상담하며 때를 기다리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에 언젠가 감행할 북벌의 전주곡이다. 어느 쪽이든 천하통일의 감각이다. 치고 나가는 한 수이다. 하지만, 1892년 김윤식이 조선사회를 위해 들려주는 삼국지의 교훈은 정반대로 천하삼분의 감각이었다. 지키는 한 수였다. 그는 당대의 역사에서 과연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옛날 사마휘(司馬徽)는 한나라 소열제(昭烈帝)에게 “유생과 속된 선비는 시무(時務)를 모릅니다. 시무를 아는 자, 훌륭한 인물이겠지요!”라고 하였다. 시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즉 어떤 때를 당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다. 병든 사람이 약을 쓸 때에는 모두 합당한 조제가 있으니 비록 신기한 처방이 있더라도 사람들마다 다 복용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소열제의 시대에 천하 대세는 열에 여덟, 아홉이 모두 조조(曹操)에게 돌아갔다. 웅거해서 천하삼분(天下三分)의 터전으로 삼을 만한 곳은 형주(荊州)와 익주(益州) 뿐이었다. 그래서, 제갈량(諸葛亮)과 방통(龐統)이 급급히 도모하기를 권하여 때를 놓칠까 근심해서 끝내 이것으로 천하의 전력(全力)에 대항할 수 있었다. 이들을 일러 시무를 아는 휼륭한 인물이었다고 할 것이다. 만약 천명에 따라 역적을 토벌하면 되었지 강약은 관계 없다고 하여 한 자 한 치의 땅도 없는데 일거에 한(漢)나라의 역적을 멸망시킬 수 있고 중원을 회복할 수 있고 동오(東吳)를 병합할 수 있다고 한다면 듣기에는 아주 좋은 말이지만 기실 부합되기 어려울 것이니 이 어찌 속된 선비의 의견이 아니겠는가. 지금 논하는 사람들은 태서(泰西)의 정치제도를 모방하는 것을 시무라고 이르고는 자기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남들만을 보고 있다. 이것은 기품과 병증을 따지지 않고 다른 사람이 경험한 약을 복용하여 확연한 효과를 얻으려는 것과 같으니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저 만난 시대가 제각각이고 나라의 국무가 제각각이다. 한 사람의 사욕을 깨뜨리고 상공업의 길을 넓혀서 사람들이 각자 자기 힘으로 먹고 살아 모두 자기 권리를 지켜 나라가 이로써 부강해지는 것, 이것은 태서의 시무이다. 법을 세우고 기강을 베풀며 사람을 골라 관직에 임명하며 병졸을 훈련하고 기계를 다스려 사방 오랑캐의 외침을 막는 것, 이것은 청(淸)나라의 시무이다. 청렴한 관리를 높이고 탐학한 관리를 내치며 백성을 구휼하기를 힘쓰며 조약을 신중히 지켜 우방에게 틈을 열어주지 않는 것, 이것은 우리나라의 시무이다. 만약 우리나라가 갑자기 청나라의 일을 본받아 병졸과 기계에 전력한다면 백성이 곤궁해지고 재정이 궁핍해져 반드시 흙이 무너지는 환난이 있을 것이다. 만약 중국이 갑자기 태서의 제도를 본받아 명분이 엄해지지 않으면 기강이 풀어져 반드시 하극상의 우환이 있을 것이다. 만약 태서 여러나라가 동양의 법규를 본받아 윗사람의 호오에 따라 정령을 시행한다면 국세가 약화되어 반드시 강한 이웃에게 병탄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무리 좋은 법이 있어도 하루아침에 지구(地球)에 통행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지금 국세를 고려하지 않고 멀리 태서가 하는 것을 사모한다면 이 어찌 한 자의 땅도 없이 조조와 칼끝을 다투려는 것과 다름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자는 시대에 따라 알맞게 조처하고 국력을 헤아려 대처하며 재정을 상하게 하지 않고 백성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그 뿌리를 굳건히 해서 가지와 이파리가 차례로 무성해지는 데 힘쓴다. 지금 이른바 시무라 하는 것은 모두 태서의 가지와 이파리이다. 그 뿌리를 굳건히 하지 않고 먼저 다른 사람의 말단을 배우면 지혜롭다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시무를 알기로는 북양대신(北洋大臣) 소전(少筌) 이공(李公:이홍장) 만한 사람이 없다. 아시아처럼 넓은 지역과 청나라처럼 큰 나라에 어찌 시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부족할까만 그 사리를 깊이 통달해 적절히 완급을 조절할 줄 알며 그 역량과 지모가 그 말한 바에 충분히 부합될 수 있으려면 훌륭한 인물이 아니면 안 된다. 그래서, 오직 이공만이 족히 여기에 해당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지만, 단지 이공을 사모할 줄만 알아 사사건건 본받고자 한다면 천진(天津)이라면 몰라도 우리나라의 오늘날 급무는 아닐 것이다. 하물며 태서의 가지와 이파리 같은 말단이랴. 『시(詩)』에서 이르기를 “동문을 나가니 여자들이 구름처럼 많도다. 비록 구름처럼 많으나 내 마음 그들에게 있지 않도다. 흰 옷에 쑥색 수건을 두른 여인이여. 애오라지 나를 즐겁게 하는도다.”라고 하였다. 『역(易)』에서 이르기를 “동쪽 이웃 마을에서 소를 잡아 성대히 제사지내는 것이 서쪽 이웃 마을에서 때에 맞추어 검소하게 제사지내고 복을 받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리는 자신을 돌이켜 요약됨을 지키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어찌 수신(修身)만 그러하겠는가. 육군(陸君) 성대(聖臺:육종윤(陸鍾允)의 자)는 평소 당세를 향한 포부가 있었다. 그 대인 의전(宜田:육용정(陸用鼎)의 호) 선생은 글을 읽고 이치를 밝히는 선비인데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의 사리를 알았다. 성대는 가훈을 받들어 익혀 고금의 시의(時宜)에 대해 대략 취사해서 본디 이미 가슴 속에 환히 알고 있는데 다시 나그네가 되어 천진에 가서 견문을 넓히려 한다. 나는 이번 여행이 공연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니 육군은 힘쓸지어다. 천진은 내가 왕년에 갔던 곳으로 북양아문(北洋衙門)의 소재지이다. 천하에서 시무를 말할 줄 아는 자가 모두 여기에 모여 있으니 육군이 가서 두드리면 반드시 내 말과 서로 들어맞는 자가 있을 것이다.
- 김윤식(金允植),〈시무설을 지어 천진에 가는 육종윤을 전송하다[時務說送陸生鍾倫遊天津]〉《운양집(雲養集)》
조선왕조의 전통은 유구하다. 김윤식이 천진으로 떠나는 육종윤을 위해 시무설을 지었던 1892년은 조선왕조가 건국한지 500주년 되는 해였다. 이 해 일본은 메이지유신 24주년 되는 해였고, 중국은 후금 건국 276주년 되는 해였으며, 베트남의 경우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들어가기 시작하였지만 최후의 왕조 완조(阮朝) 건국 90주년 되는 해였다. 여기서 확연히 볼 수 있듯 조선왕조의 유구한 역사적 전통은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14세기에 존재했던 모든 왕조가 쓰러졌지만 조선만은 남아 있었다. 1892년 조선의 정치가 김윤식이나 1392년 조선의 정치가 정도전이나 다같이 ‘조선’을 살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는 500년을 하룻밤처럼 넘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동시대적인 사람이었다.
한편으로 달라진 점도 있었다. 1892년은 조선왕조가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지 10주년 되는 해였고, 미국을 필두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서양 여러 나라와 조약을 체결하고 항구를 열었다. 열려진 항구로 서양 사람들이 조선에 들어왔다. 1886년 미국인 교사 헐버트, 길모어, 벙커 등이 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되어 서울 정동에서 신식 교육을 담당하였고, 1889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H.G.Underwood, 신랑)와 호튼(L.S.Horton, 신부)이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관서 지방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항구와 학교와 교회를 중심으로 조금씩 조금씩 서양 문화가 퍼져 나갔다.
오래된 조선과 새로운 조선이 섞여 있는 혼란한 시대에 사람들은 조선의 앞날을 근심하였다. 젊은 사람들은 마음이 급했다. 서양은 부유하고 강성하다. 청나라도 서양을 본받아 부강의 길을 찾고 있단다. 한시가 급하다. 어서 농장을 만들자. 어서 광산을 개발하자. 어서 공장을 세우자. 해외 무역을 확대하자. 신식 무기를 들여 오자. 군사들을 조련하자. 이것은 거의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 삼국지를 방불케 한다. 주인공을 조조로 잡아도 좋다. 유비로 잡아도 좋다. 맹획으로 잡아도 좋다. 열심히 부국강병을 추구하면 누구에게나 천하통일의 길은 열려 있다. 게임 삼국지에서는 조조의 시무와 유비의 시무와 맹획의 시무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는다. 어떤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취하든 언제나 동일한 부국강병의 시무이다!
그러나, 김윤식이 보기에 조선의 현실은 게임 삼국지가 가정하는 무차별적인 부국강병의 공간에 위치해 있지 않았다. 매우 평범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가 절급하게 추구한 조선의 시무는 청렴한 관리를 높이고 탐학한 관리를 내치는 것, 백성의 구휼에 노력하는 것, 조약을 신중히 지켜 우방에게 틈을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이었다. 극도로 내정이 부패해 있고 백성들이 동요되어 있던 시기, 부국강병과 같은 ‘가지와 이파리’보다 중요한 것은 민유방본의 ‘뿌리’였다. 조선의 ‘뿌리’를 외면하고 서양의 ‘가지와 이파리’에 몰입한다면 조선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적어도 김윤식이 강조한 ‘뿌리’ 중심의 시무는 그 자체로만 보면 밋밋할지 모르나 2년 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생각한다면 섬뜩한 느낌과 더불어 그것이 글자 그대로 ‘시무’였음을 부인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윤식의 설법이 천진으로 떠나는 육종윤에게는 과연 어떻게 다가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