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명(한자) 주자학(朱子學)
소표제 정의/개설/전래와 수용/내용 및 특징/ 한국 성리학의 특징과 위치/평가
주제어 유교철학
성격1 사상
성격2 유학
시대 조선
주창자 정몽주(鄭夢周)/안향(安珦)/서경덕(徐敬德)/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이(李珥)/권상하(權尙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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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성명(性命)과 의리(義理)를 탐구하는 유교철학.
개설 유학을 선진(先秦) 유학, 한당(漢唐), 훈고(訓詁) 유학 등으로 세분할 경우 바로 송•명시대(宋明時代)의 유학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곧 성리학이다. 시대사상의 명칭으로는 송명유학(宋明儒學)•송학(宋學)•명학(明學)이라는 용어로 불린다.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학자와 경향에 따라서도 이것은 또 다양한 명칭을 갖는다. 정주학(程朱學)•주자학(朱子學)양명학(陽明學)•이학(理學)•도학(道學)•심학(心學)•신유학(新儒學) 등의 명칭이 그것이다. 정호(程顥)•정이(程이頤) 형제와 주희(朱憙)•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이 이 학문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고, 이들은 또 나름대로 이(理) 또는 심(心)에 더 치중하는 방식을 취했다. 다만 이중에서 송학•정주학•주자학•이학과 송대의 도학이 한 계통이고, 명학•육왕학•양명학•심학이 전자에 대립하여 일어난 계통으로 분별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적으로 정주계의 이학이 크게 발달하고 육왕계의 심학은 별로 발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부분 '성리학'이라고 하면 전자를 가리키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같은 정주계의 이학이면서도 한국에서는 용어의 사용에 있어 이학이라는 용어보다는 성리학이라는 용어를 더 즐겨 사용하여 왔다. 이러한 사실도 중국과 조금 다른 점이다. 성리학에서는 본체론적 형이상학을 매우 깊이 파고드는 성향이 강하여, 천명(天命)•태극(太極)•천리(天理)•성명(性命)•의리(義理)•이(理)•기(氣)•음양(陰陽)•심(心)•성(性)•정(情)•인심(人心)•도심(道心)•사단(四端)•칠정(七情) 등을 자주 논한다. 그리고 성의(誠意)•정심(正心)•존심(存心)•양성(養性)•계구(戒懼)•성찰(省察)•신독(愼獨) 등의 방법으로 일신의 수양을 수도승 못지 않게 철저히 한다. 이러한 경향은 과거 공자(孔子)가 취했던 일상적 생활에 관한 실제적 학문을 중요시하여 형이상학적 문제를 기피하던 태도와 달라진 것이고, 수양 역시 공자•맹자(孟子) 시대 이상으로 철저히 한다는 뜻에서 공자가 말한'위기(爲己)'의 표현을 성리학에서 자주 쓰게 되었다. 아무튼 이 모두가 불교와 대항하던 성리학자들이 불교에는 연기(緣起)•법계(法界) 등의 깊은 형이상학과 참선(參禪)같은 철저한 수행이 있음을 깨닫고, 그러한 것이 유학에도 갖추어져 있음을 과시하고자 하던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성리학이 신유학으로 지칭될 만큼, 이전 유학의 경향과 달라졌다는 판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불교와 대립하여 불교의 철학이나 수양에 맞설 유학의 형이상학적 이론과 수기(修己)의 이론이 유학경전 중에도 특히 ≪논어≫•≪맹자≫•≪중용≫•≪대학≫에 많이 담겨 있기 때문에, 성리학자들은 이 네 경전을 유학의 가장 주요한 기본경전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이른바'사서(四書)'라는 명칭이 이러한 시각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전래와 수용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전하여지기 시작한 때를 확실히 단언하기는 어렵다. 성리학의 형성을 어디까지에서 끊어 살펴야 하느냐도 불분명하지만, 남송의 주자학 이전 북송 성리학의 경우에는 그 전래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잘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주자학으로서의 성리학의 도입은 충렬왕 때(13세기 후반)부터라고 추정된다. 안향(安珦)은 자신의 호를 회헌(晦軒)이라 하여 주희(호:晦庵)에 대한 존모의 뜻을 표하면서 성리학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였다. 거의 같은 무렵 백이정(白頤正)도 역시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도(元都)에 10년간 머물다 돌아오는 길에 성리학관계 서적을 많이 구해왔으며, 권부(權溥) 등은 주희의 ≪사서집주≫등을 전파함은 물론, 나아가 과거에서까지 그것을 채택하게 함으로써 성리학의 도입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뒤이어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으로 이어지는 학자들의 출현기에는 성리학의 이해가 피상적 섭취의 차원을 넘은 전문적 연구의 수준에 오르게 된다. 따라서 다른 한편 성리학을 당시 통치술의 학문적•사상적 토대로 이용하여, 그것을 명실공히 수용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내용 및 특징 (1) 양반사회의 통치이념화 성리학의 한국적 변용 내지 발달은 조선조 성립 이후의 일이다. 사상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초 성리학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역시 역성혁명의 주체인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의 활동이다. 정도전은 조선의 기틀을 확립하려는 시각에서 문화정책을 입안하면서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철저히 불교를 배척하였다. 정도전은 사원과 승려의 폐해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불교신앙의 허구와 미신성 및 불교이론 자체의 부당성에 근거하여 척불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의 <불씨잡변(佛氏雜辨)>•<심기리편(心氣理篇)> 등이 그러한 저술이다. 정도전이 불교를 배척한 이유는 많지만, 그 중에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불교의 멸륜(滅倫)•해국(害國) 성향에 있다. 사회생활을 소홀히 함으로써 유교적인 윤리를 지키지 않고, 국가기강마저 유교보다 소홀히 한다는 것이 배척되어야 할 불교의 폐해라는 것이다. 그런 만큼 불교보다 더 사회윤리를 강화하고, 그리하여 국가에 이로움을 주는 것이 유학이요, 그 중에도 특히 성리학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외 위와 같은 생각은 성리학이 조선의 새 통치원리여야 한다는 신념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그의 이같은 노력으로 성리학은 양반 사대부 중심의 조선사회의 통치이념으로서의 관학(官學)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권근은 ≪입학도설( 入學圖說)≫•≪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등의 저술을 통하여 이와 다른 면모를 보였다. 그는 불교와 같은 타 사상과의 대립의식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대립에 별로 큰 정력을 소비하지 않았다. 비교적 순수한 성리학의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고, 그리하여 그러한 연구에 큰 업적을 쌓았다.
(2) 의리실천의 도학적 경향 조선조가 기틀을 완전히 잡은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말까지의 기간은 성리학사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사림파(士林派) 학자들의 활동이 크게 돋보인 시기이다. 이른바 사화기(士禍期)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의 많은 사화를 겪으며, 사림파 학자들은 15세기 중엽부터 약 1세기간 성리학 특유의 의리의 실천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한국성리학은 일종의 실천성리학으로서의 도학의 특색을 이 시기에 뚜렷이 지니게 되었다. 사림파 학자들이 성리학의 드높은 의리관을 실천에 옮기려는 경향을 흔히 사림파정신이라 부르지만, 이것은 그 나름의 연원을 가진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육신생육신이 출현하여 드높였던 절의정신에 접목된 것이며, 또 더 나아가서는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보듯이 길재(吉再)가 보존한 고려적 절의를 토양으로 하여 자라난 것이다. 따라서 사림파 학자들이 당시 체질화한 성리학의 규범은 도덕적 규범의 성격이 강한 것이지만, 동시에 정치적 성격을 지닌 규범이기도 하다. 여말 조선초부터 ≪주자가례≫•≪삼강행실도≫•≪오륜도≫가 정책적으로 널리 간행, 반포되고 적극 시행토록 장려되었으며, 이때에 와서는 ≪소학≫이 정책시행 이전에 학자들에게 자아•자발적으로 중요시되었던 사실들도 이 때문이다. ≪소학≫은 당시 사림파 학자들에 의해 철저히 학습, 실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김굉필(金宏弼)남효온(南孝溫) 등이 특히 그런 학자로서 손꼽힐 수 있다. 김굉필은 일찍이 그의 스승인 김종직에게서 ≪소학≫의 중요성을 가르침받았다고 전해지는데, 노년에 이르기까지 실로 일생에 걸쳐 자신을'소학동자(小學童子)'로 지칭하며, 한시도 그것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한다. 한편 조광조(趙光祖)가 이상정치 의미의 지치(至治)를 다시 새롭게 표방하면서 각 방면의 정치적 개혁을 꾀한 것은 성리학적 의리의 정치적 합의를 사림파에서 실현하기 위한 노력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김굉필의 문하생인 조광조의 이상적 정치는 도(道), 즉 정(正)과 선(善)에 의한 정치를 강조하면서 구체적으로 의리(義利)•공사(公私)의 변별의식을 고취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상정치는 어디까지나 의와 공에 입각한 것으로서 지배층의 사리사욕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공에 입각한 정치는 무엇보다도 애민(愛民)•위민(爲民)•이민(利民)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정몽주-길재-김숙자(金叔滋)-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의 학통관(學統觀)은 실제 학문의 전수관계나 학문의 업적만으로 설정되고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성리학이 지닌 도학적 측면인'의리구현'을 기준으로 설정되고 인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후 조선조에서 수많은 청백리는 물론 애국충절의 학사(學士)•의사(義士)•열사(烈士)가 기라성같이 속출한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할 수 있다.
(3) 심성 위주의 이론탐구 성리학의 의리실천 차원이 아닌 그 이론적 탐구가 한국적 특색을 독특하게 띨 만큼 본격화한 것도 16세기의 일이다. 16세기의 이른바 사림파 특히 후기사림파 학자들이 또한 성리학 이론탐구의 주역이었다. 특히 이황(李滉)이이(李珥)가 당시의 대표적 학자이다. 그리고 이들이 남긴'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이기해석론'이 당시의 대표적인 이론탐구이었다. 물론 이들에 앞서 서경덕(徐敬德)이라든가 이언적(李彦迪)과 같은 학자들이 성리학 탐구를 매우 높은 수준에서 행하였다. 그러나 질과 양 및 역사적 의미에 이어서 이황•이이 등의 사단칠정론에 비교할 수가 없으므로, 그런 점에서 그것들에 대한 언급은 생략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황 등에게도 사단칠정론 외에 우주론에 해당하는 태극설 등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간과해야 하는 것과 같다. 당시의 사단칠정론이란 정지운(鄭之雲)이 그의 <천명도(天命圖)>에 대하여 이황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해 각각'이에서 발(發於理)'하고'기에서 발(發於氣)'한 것이라고 한 해석이 발단이 되었다. 이것을 후에 이황이 사단칠정을 각기'이의 발(理之發)•기의 발(氣之發)'이라고 수정하였다가 기대승(奇大升)과의 논변끝에 사단은'이가 발함에 기가 따른 것(理發而氣隨之)', 칠정은'기가 발함에 이가 탄 것(氣發而理乘之)'이라 해석하였는데, 그뒤 이이가 사단칠정 어느 경우나 모두'기가 발함에 이가 타는 것(氣發理乘一途)'이라고 한 해석과 이 해석들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는 내용이 곧 사칠론의 핵심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해석형식 자체이기도 하지만, 해석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라 할 수 있다. 해석형식의 수정이 나오게 된 연유가 그 타당성 검토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실로 이 해석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는 이황•기대승 사이에서만도 8년여의 세월에 걸쳐 진행되었거니와, 그뒤 이이와 성혼(成渾)간에 행해진 논변을 비롯하여 학계에서 행해진 검토는 무려 300여년에 걸친 것이었다. 이토록 오랜기간 이 문제를 다룬 학자의 수효는 실로 그뒤의 한국성리학자 거의 전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다. 그리하여 학계는 마침내 이 문제연구를 둘러싸고 학파까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퇴계학파•율곡학파, 또는 주리파(主理派)주기파(主氣派)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4) 예학적 변용과 구현 16세기 말엽 이후 약 1세기 반의 기간은 실상 예학시대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시기였다.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300∼3,000여 종의 온갖 예에 관한 것들을 성리학자들이 연구하면서 어김없이 실천할 것을 역설하고, 그 실천여부를 기준으로 인간 개인을 군자•소인으로 분별, 평가함은 물론, 복상문제(服喪問題) 또는 예송(禮訟)형식이 당쟁까지 전개된 시기가 이때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예가 이토록 중요시된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임진왜란과, 두 차례에 걸친 호란 등으로 하여 사회질서가 문란하여졌던 것을 들 수 있다. 예가 사회질서 수립을 목적으로 안출된 것이고 보면, 이같은 정치•사회적 여건에서는 예를 중요시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원인은 성리학의 학문적 성격 자체에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성리학은 원래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예와 같은 관련을 가지고 발흥한 것이다. 즉 불교의 윤리의식의 박약함을 강조하고 그 근거까지 밝히는 것이 성리학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성리학자들이 중요시하는 예학을 성리학의 형식주의적 객관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성리학이 수용기로 접어들면서부터 특히 조선에서의 관학화 이후로는 예의 인식과 실천이 정책적 차원에서 고취되었던 것이다. 그 고취의 초두에 해당하는 것이 여말부터 이루어진 ≪가례≫시행의 적극적 권장이었다. 그뒤 조선초에는 ≪삼강행실도≫•≪국조오례의≫등이 간행되어, 일종의 국민윤리로서의 성격을 띠고 그 내용의 시행이 역설되었다. 이어서 향교향약의 제도를 이용한 오륜적 예와 미풍양속 지향의 예에 대한 교육이 널리 파급되었다. 그 결과 중종대에는 서민계층에서도 오륜적 예의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17세기 당시 대표적 예학자인 정구(鄭逑)김장생(金長生) 등이 내놓은 저술들은 사실 과거에 보지 못했던 종류의 내용이다. 정구의 ≪오선생예설분류≫나 김장생의 ≪의례문해≫를 통해 한 집안이나 한 나라에 있어서의 계통 통서를 바로하는 일이 예로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는 의식이 이때에 팽배해진다.
(5) 인물성동이론 사단칠정의 논변이 이황•이이 이래 100여 년을 끌어 18세기에 이르렀을 무렵, 성리학계는 또하나의 문제를 둘러싸고 격론을 벌이게 된다. 다름아닌 '인물성 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원래 권상하(權尙夏)의 문인들(일명 江門八學士)사이에서 발단되었다. 그 문인 중 특히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논변화되었다. 문제의 내용은 글자 그대로 인성과 물성이 같은가 다른가를 따지는 것인데, 이간은 서로 같다고 주장한 반면, 한원진은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각각 그 이유를 제시하고 상대를 공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논변을 전개할 당시 동료학자 중 대체로 호서(湖西)의 학자들은 다르다는 주장에 동조한 반면, 낙하(洛下)의 학자들은 같다는 주장에 동조하여, 양편으로 대립, 대결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그리하여 뒷날 이것이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양측 주장의 이면에 실은 한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을 존중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인간을 주축으로 한 동론(同論)에서는 그 본성을 선천적으로 구비한 것임을 주장하여 본성의 절대시를 꾀하고 있다. 본성의 절대시 또는 동물성으로부터의 인간본성의 보호를 노리는 식의 본성존중의 의도가 양측에 공존한다. 이렇게 보면 이 논변은 본성 존중의 의도를 단지 이기의 입장을 달리함으로써 서로 다른 주장으로 나타낸 것으로 이해된다.
(6) 위정척사운동 16세기 말 이황•이이 이후 본격적인 편향을 보이던 주리설과 주기설의 성리학의 두 경향은 18∼19세기에는 유리(唯理)•유기(唯氣)의 이기설을 낳게 된다. 물론 일부의 학설은 극단적인 편향을 기피하여 절충•중도적 성격의 이기설로 이루어진 것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기론에 있어서 극단적인 편향을 보이는 것들이 나타나, 조선조 말기에 오면 모든 것을 오직 이 하나로 풀이하려는 이론이 나오게 되었는가 하면, 반대로 기 하나로 풀이하려는 이론이 나오게 되었다. 우주의 모든 현상을 이일분수(理一分殊)로 혹은 기일분수(氣一分殊)로 설명하는 기정진(奇正鎭)•임성주(任聖周)의 이론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러한 성리학의 극단적 편향, 그 중에도 유리론의 편향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것 역시 한국성리학의 한 특색으로 기록되어야 할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리학이 19세기의 격변, 격동을 맞이하여서는 실제적인 대응책을 안출하는 데 있어서는 사실상 무기력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성리학의 현실극복능력에 회의를 갖는 학자들이 늘어나면서, 성리학의 위와 같은 철학적 탐구들은 공리•공론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한가지 조선 말기 성리학의 현실대응이 반드시 무기력했다거나 전무했다고 할 수 없음에 유의해야 한다. 천주교를 비롯한 서구의 문물이 유입되고 특히 제국주의로 무장한 서구의 위협 및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그에 대응한 성리학계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그 움직임이 곧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으로 불리는 것이다. 한말의 이항로(李恒老)•기정진•이진상(李震相)•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유인석(柳麟錫) 등의 학자들은 다시 천주교의 우주관•인생관 및 윤리관에 대립하면서, 흔들리는 국기(國基)를 공고히 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유교의 삼강오륜식 예의식과 전혀 다른 천주교의 사상을 오랑캐 또는 금수의 사상이라고 배척하는 동시에, 서구와 일본의 세력을 적대시하여 쇄국과 주전(主戰)과 척화(斥和)로써 대항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사고는 의병의 정신적 기초를 닦은 결과가 되었고, 직접 목숨을 바쳐 의병장으로까지 활약하였다.
한국 성리학의 특징과 위치 (1) 정주학 절대우위의 특징 한국성리학의 특징으로서 무엇보다 먼저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정주계 성리학이 거의 일변도로 석권하였다는 점이다. 육왕계의 심학은 비록 15세기 말엽부터 전하여 어느 정도 전파되었지만, 그 발달 정도나 세력은 정주계와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였다.
(2) 주지주의(主知主義)의 경향 정주학과 육왕학과의 차이는 대체로 전자가 주지주의의 경향이 강한 데 비하여, 후자는 주정주의(主情主義)의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국성리학의 특징이 정주학 절대우위라는 것은 곧 한국성리학에 주지주의의 경향이 그만큼 두드러짐을 의미한다. 사실 사단칠정론이라든지, 인물성동이론같은 것은 이미 밝힌 대로 학파의 형성을 가져올 정도의 많은 학자들이 200∼300년여에 걸쳐 그 타당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그런 만큼 이것들은 중국이나 일본의 성리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심오하고 풍부한 내용의 이론을 담게 되었다.
(3) 예 절대시의 풍토 사실 한국의 성리학은'예론탐구와 그 실현'을 위하여 발전되어 온 과정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예사상에 투철하였다. 성리학의 한국화란 따지고 보면 정몽주의 ≪주자가례≫의 실천 및 권근의 ≪예기천견록≫의 저술로부터 시작되어, 정구•김장생•박세채(朴世采) 등의 예론에서 그 연구의 절정을 이룬다. 한편 윤휴(尹鑴)송시열(宋時烈) 등의 예송에 의한 당쟁에서 예 실현을 향한 열의의 극치를 보게 된다. 일본의 경우는 비교조차 할 필요없는 형편이고, 중국에서나 이와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겠는데, 그것도 이토록 목숨을 걸 정도로 심각히 종교화된'예 숭상의 사조'에는 미치지 못한다.
(4) 명분론적 사고의 팽배 예가 명분에 입각한 합리적 사고의 산물이라면, 이러한 예 숭상의 풍토에서 명분론적 합리주의정신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명분론적 합리주의의 사고는 경험사실과 관계없는 순전한 합리주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고 보면 과거 우리의 사고방식이 합리적인 성질을 갖는 것도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사실성 내지 과학성을 결여한 것인지, 또 얼마나 실리•실용•실증의 정신을 결여한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대외관계에 있어 때로 상당한 세력을 떨쳤던 모화사대주의자(慕華事大主義者)들의 주체의식의 상실현상은 그 좋은 실례가 된다. 그러한 주체의식의 상실현상은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명분론의 사고방식에 무비판적으로 몰두 맹종한 나머지, 그 배후에 가려진 춘추존양적(春秋存攘的) 한족(漢族) 중심의 사고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결과라 할 것이다. 이밖에도 한국성리학의 특징과 위치에는 주리론(主理論)이 보수성과 인존정신(人尊精神)의 지향이 있다.
평가 이상과 같은 입장에서 보면, 오늘에 살릴 수 있는 한국성리학의 장점들 역시 이런 특징들 속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것은 곧 여러 장점들, 특히 그 장점이 오늘에 살려 좋다고 생각되는 특징들로 정하여질 것이다. 그러한 장점으로 판정되는 특징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국성리학의 위치가 더 높은 자리에 위치할 수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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