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촌 권 문충공 유문 중간 서(陽村權文忠公遺文重刊序)


우리 동방의 문헌(文獻)이 상고의 초기에는 고거(考據)삼을 만한 것이 없고, 은(殷) 나라가 망하여 기자(箕子)가 조선에 이르매 시서 예악(詩書禮樂)의 가르침이 이에 비롯되었다. 경계(經界)를 바르게 하고 팔조(八條)를 시행하니, 그 치화(治化)가 마침내 밤에도 바깥문을 잠그지 않고 행려(行旅)들이 꺼림없이 들에서 자기도 하며 아낙네들은 정신(貞信)하고 음탕하지 않아 예의의 융성함이 이때보다 더한 적은 없었다.
그 후 위만(衛滿)이 간사한 꾀와 폭력으로써 갑자기 강성해지고 백제ㆍ고구려가 강한 싸움을 위주로 하여 나라를 세웠었다. 그러나 진한(辰韓)의 풍속은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이 예가 있으며 남녀가 유별하고 길 가는 자가 길을 양보하며, 맥(貊)의 풍속은 염치(廉恥)와 효제를 숭상하였다.
그 중에도 신라(新羅)는 가장 순후하여 국학(國學)을 세우고 사전(祀典 제사에 대한 전례(典禮))을 닦았다.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은 《구경훈의(九經訓義)》를 지었고, 최 학사(崔學士 최치원(崔致遠))는 문학으로 천하에 이름났으니, 신라를 군자의 나라라 일컬은 것이 그럴 만한 까닭이 있어서였다.
고려 때에는 두 백 문학(白文學)이 있어 요순(堯舜) 육경(六經)의 정치를 미루어 말한 바 있으며, 태사(太師) 최충(崔冲)은 구재(九齋)를 두어 제자를 가르쳐 예속(禮俗)을 도탑게 하였고, 정 문충공(鄭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은 오부(五部)의 학관(學館)을 건립하여 경학(經學)을 강명(講明)하였다. 그래서 이 문정공(李文靖公 이색(李穡))은 그를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 일컬었던 것이다.
본조(本朝)에 와서 권 문충공(權文忠公)이 또 경례(經禮)를 고정(考定)하여 《독서분정(讀書分程)》ㆍ《입학도설(入學圖說)》ㆍ《오경천설(五經淺說)》을 지어 육경(六經)의 깊은 뜻을 밝혔다.
우리 태조(太祖)와 태종(太宗)께서 왕업을 초창하고 통서(統緖)를 물려 줌에 있어 오로지 경술(經術)로 문명의 정치를 일으켰으니 공의 힘이 실로 컸었다. 우리 동방이 불교(佛敎)를 존신(尊信)해 온 것이 신라로부터 고려 말엽까지 무릇 1천여 년을 내려왔는데, 공이 능히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예교(禮敎)를 숭상하여 선왕(先王)의 도를 밝히고 일대의 다스림을 확정하였으니 그 공이 크다 아니 할 수 없다.
그 말은 그 글에 실려 있고 또 그 물(物)에 느끼어 음풍(吟諷)한 작품들도 다 충후(忠厚) 측달(惻怛)의 발로였다. 문장이란 본시 딴 도(道)가 아니라 하늘에 있어서는 일월(日月) 성신(星辰)이 되고 땅에 있어서는 산하(山河) 백천(百川)이 되고 물(物)에 있어서는 주기(珠璣) 화실(華實)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예악 문장이 되는 것이다.
공의 문장은 경술(經術)을 근본으로 삼고 백가(百家)를 참작하여 문채(文彩)가 특출하므로 김 문간공(金文簡公 김종직(金宗直))이 건국 초기의 문학과 사도(師道)를 논하면서 권 문충공 한 분을 추앙했던 것이다. 이때에 길주서(吉注書 길재(吉再))ㆍ김 좨주(金祭酒 김숙자(金淑滋))가 나서 각기 오경(五經)을 전수했는데 모두 양촌(陽村)에게서 나왔었다.
처음에 유문(遺文) 40권이 있었으나 시대가 멀어서 세상에 전해지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지금 그 10세손 영남 절도사(嶺南節度使) 권공 주(權公儔)가 진주 목사(晉州牧使) 남후 몽뢰(南侯夢賚)와 함께 중간을 계획하여 세상에 크게 전하게 되었다. 남후 역시 그 외손이라고 한다.
공은 공민왕(恭愍王) 원년에 태어나 우리 태종 7년에 졸(卒)하였다. 공의 세대가 지금 3백 년이 흘러 세상의 변천이 많았고 또 백년의 난리 속에 유문이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세상에 영영 묻혀버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데 하물며 크게 전함에랴. 이 또한 자손이 어질어 그렇다 아니 할 수 없다.
알봉 섭제격(閼逢攝提格 고갑자(古甲子)로 갑인(甲寅)을 말하니, 곧 조선조 현종(顯宗) 15년(1674)이다.) 삼복(三伏) 삭조(朔朝)에 후학(後學) 공암(孔巖) 허목(許穆)은 서한다.

[주D-001]경계(經界) : 농지의 구획 정리를 말한다.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경계가 바르지 못하면 정지(井地)가 균등하지 못하고 곡록(穀祿)이 공평하지 못하다.” 하였다.
[주D-002]팔조(八條) : 고조선(古朝鮮) 시대의 8조 법금(法禁)을 말한다. 8조 중 3조목이 남아 있는데 즉 살인자는 죽이고, 남을 상해하면 곡물로 배상하고, 도둑질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고 이를 면하려면 50만 전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기자(箕子)의 유제(遺制)라고 하나 고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시법(原始法)의 유형이다.
[주D-003]두 백 문학(白文學) : 고려 때의 문신 백문보(白文寶)와 유학자 백이정(白頤正)을 가리킨다. 백문보는 자(字)가 화보(和父)로 충숙왕(忠肅王) 때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일찍이 상소(上疏)하여 “마땅히 요순(堯舜) 육경(六經)의 도(道)에 따르고 공리나 화복의 말을 행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늘이 도와서 음양이 때에 순하게 되고 국운이 연장될 것입니다.” 하였다. 백이정은 보문각 학사( 寶文閣學士) 백문절(白文節)의 아들인데, 충선왕(忠宣王)을 섬겨 벼슬이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다. 이때 정주학(程朱學)이 아직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못했었는데, 이정이 충선왕을 따라 원 나라에 있으면서 배워가지고 돌아오자, 이제현(李齊賢 )ㆍ박충좌(朴忠佐) 등이 맨 먼저 사사(師事)하여, 우리나라 유학사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高麗史 列傳 卷19ㆍ卷25》

 

[자료:한국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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