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복(淸福)은 아무한테나 그저 오는 게 아니다. 맑은 시냇물보다 맑았던 고인(古人)의 삶, 이제 옛날 얘기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러한 삶을 오늘날 와유(臥遊)1)하듯이 구경이라도 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 날은 눈길을 마주친 채 말을 잊었는데2) 지금 또 붓을 쥐고 말을 잊을 줄 생각이나 했겠소. 나의 그리워하는 마음을 공은 상상할 수 있을 테지요.
원융(元戎)3)이 다시 서찰을 보내면서 선물까지 함께 보내 왔으니, 감사한 마음 이루 형언할 수 있겠소. 내 수명은 원융이 추산(推算)해 준 것이 너무 기니, 늙어서도 죽지 않는다면4) 어찌 한 사람 도적이 됨을 면할 수 있겠소. 종전에는 국문(國門)의 도적이 되었는데 이후에 또 조화의 도적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소.
일찍이 시를 짓기를,
빈손으로 돌아오매 무엇을 먹을거나 白手歸來何物食 십리에 흐르는 시냇물 먹고도 남는 것을 銀河十里喫猶餘
하였으니, 이제부터 다시 10년을 더 이 시냇물을 마신다면 또 산수의 도적이 되겠구려. 다 손뼉을 치며 웃을 일이오. 공을 만나 한바탕 시원하게 웃지 못하는 것이 아쉽소.
마침 손님이 왔기에 대략 써서 답장을 올리오.
1) 와유(臥遊) : 직접 가서 산천을 유람하지 못하여 방 안에 산수화를 벽에 걸어 놓고 누워서 구경하는 것이다. 중국 남조(南朝) 송(宋)나라 종병(宗炳)이 평소 명산대천을 유람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늙어서 병이 들자 자기가 유람하였던 산수를 벽에 그림으로 그려 두고 누워서 구경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宋書 卷93 隱逸列傳 宗炳》 2) 눈길을……잊었는데 : 만나서 서로 눈길만 마주치고도 마음이 통했음을 뜻한다. 공자(孔子)가 초(楚)나라의 현인(賢人) 온백설자(溫伯雪子)를 만나보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자로(子路)가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그 사람은 눈길만 마주쳐도 거기에 도가 있으니, 말을 할 필요가 없다.[若夫人者 目擊而道存矣 亦不可以容聲矣]” 한 데서 온 말이다. 《莊子 田子方》 3) 원융(元戎) : 주장(主將), 장수를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당시 권응인(權應仁)이 가서 잠시 머물던 수영(水營)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가리킨다. 4) 늙어서도 죽지 않는다면 : 공자(孔子)의 친구 원양(原壤)이란 사람이 태만한 자세로 걸터앉아 공자를 기다리니, 공자가 “어려서는 공손하지 못하고, 장성해서는 칭찬할 만한 일이 없고, 늙어서도 죽지 않는 것이 바로 도적이다.” 하고, 짚고 있던 지팡이로 그의 정강이를 두드렸다.[原壤夷俟 子曰幼而不孫弟 長而無述焉 老而不死 是爲賊 以杖叩其脛]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論語 憲問》
<원문> 當日目擊忘言。豈意今復執毫忘書耶。此箇懷想。公可想矣。元戎更寄手字。隨以貺遺。曷敢攸謝耶。命驗所示太長。老而不死。寧免一賊乎。從前盗名不細。曾作國門之賊。安知此後更作造化之賊乎。曾有詩曰。白手歸來何物食。銀河十里喫猶餘。從今更喫十年。則又作山水賊矣。俱可拍手拍手。恨不對公一場笑破。適客到。草草謹復。
- 조식(曺植),〈권 학관에게 답한 편지[答權學官書]〉,《남명집(南冥集)》 <해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은 동갑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낙동강을 경계로 삼아 영남을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누었는데, 퇴계는 좌도에서, 남명은 우도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다.
퇴계가 매사에 근엄하고 신중했던 반면 남명은 준절(峻截)하고 호방한 성품이었다. 그래서인지 두 분은 벼슬길에서 물러나는 자세도 그 인품만큼이나 퍽 대조적이었다. 퇴계가 종종 벼슬길에 나아가긴 했으나 늘 신양(身恙)을 이유로 사퇴하고 시종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보였다면, 남명은 산림처사(山林處士)로서의 드높은 기상을 세워 아예 벼슬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 글은 남명이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5)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글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이 편지 전에 남명이 권응인에게 보낸 편지6)를 먼저 보아야 한다.
권응인이 어느 수영(水營)에 가서 며칠 머물 예정이었는데, 그 수영의 수사(水使 : 水軍節度使)가 사람의 운명을 추산하는 명리(命理)에 밝은 사람이었던가 보다. 그래서 남명이 자기의 오주(五柱)7)를 권응인에게 주어서 수군절도사에게 수명을 추산해 보게 했는데, 수사로부터 온 편지에서 남명의 수명을 매우 길다고 했다. 도학자(道學者)인 남명이 사주팔자를 잘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수명을 물었다는 것은 퍽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남명이 오래 살고 싶은 욕망에서 자신의 수명을 알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었다. 남명은 당시 나이 일흔이라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자손이 없으니, 자신이 죽으면 운구(運柩)하는 것이 큰일이므로 자신의 수명을 미리 알아서 선영 곁에 돌아가 여생을 마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남명은 자신의 수명이 길다고 한 수사의 편지를 받고도 수사에게 다시 물어서 실제 수명을 바로 알려달라고 권응인에게 당부하면서 ‘일흔 나이에 무슨 미련이 남았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이 편지가 있고 2년쯤 뒤, 남명은 선영 곁에 이주하지 못한 채 자신이 머물던 덕산(德山)의 산천재(山天齋)에서 72세의 나이로 운명하고 만다.
남명은 65세 때인 1565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에 제수되어 소명(召命)을 받고 대궐에 들어가 사은숙배(謝恩肅拜)하였다. 그러나 이내 사임하고 자신이 은거하던 덕산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국문(國門 : 도성의 문)의 도적’이란 자기 허명이 잘못 알려져 이 때 벼슬을 받고 도성에 들어갔었다고 해서 한 말이다. ‘조화의 도적’이란 천지의 조화를 훔쳐서 자신의 천수(天壽)보다 오래 사는 것을 말한다. 즉 허명으로 벼슬을 받은 것은 나라의 도적이요 무능한 몸으로 오래 사는 것은 천지 조화의 도적이라는 것이다. 남명의 고결한 인품이 호방한 해학(諧謔)으로 드러나 있다.
인용한 시에서 ‘십리에 흐르는 시냇물[銀河十里]’은 산천재 앞을 흐르는 시냇물을 가리킨다. 이 시는 제목이 덕산복거(德山卜居)인 것으로 보아 남명이 61세 때 처음 덕산에 와서 집을 짓고 살 때 지은 것이리라. 여기에는 앞부분인 다음 두 구가 생략되었다.
봄 산 어느 곳엔들 방초가 없으랴만 春山底處無芳草 단지 하늘 높이 솟은 천왕봉이 좋아서라네 只愛天王近帝居
지리산 천왕봉의 드높은 기상이 좋아서 천왕봉이 잘 보이는 덕산에 와서 살면서 산천재 앞을 흐르는 시냇물만 먹어도 마음이 넉넉했던 남명은 세상의 부정한 유혹에 일절 타협하지 않으며 산림처사로서의 기개를 드높여 천왕봉을 꼭 닮은 삶을 살았다.
수사가 추산한 남명의 나이가 80세쯤 되었던가 보다. 그래서 남명은 이제 호탕하게 너털웃음을 웃으며, 농담한다. 늙어서 아무 하는 일도 없이 죽지 않는다면 천지의 조화를 훔치는 도적이 될 것이요 시냇물을 10년 쯤 더 마시고 산다면 산수(山水)를 훔치는 도적이 되지 않겠느냐고.
욕심 많은 사람을 비유한 양주학(楊州鶴)이란 고사가 있다. 옛날에 몇 사람이 모여 자기 소원을 말하였다. 한 사람은 풍광이 수려한 양주(楊州) 고을의 원님이 되고 싶다 하고, 한 사람은 재물이 많기를 바란다 하고, 한 사람은 학을 타고 신선이 되어 하늘을 날았으면 좋겠다 하자, 한 사람이 썩 나서서 말하였다. “허리에 십만 냥의 돈꿰미를 두르고서 학을 타고 양주 고을을 날고 싶다.[腰纏十萬貫 騎鶴上楊州]”고.
양주학도 무색해진 오늘날 산수의 도적 얘기를 꺼냈으니,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 것은 아닐까.
5) 권응인(權應仁, 1517~?) : 자는 사원(士元)이고 호는 송계(松溪)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경상북도 성주(星州)에 거주하였다. 감사(監司)를 역임한 권수암(權水庵) 희맹(希孟)의 서자(庶子)로 태어났고 시를 잘 짓기로 당대에 이름났으며, 퇴계와 남명 두 문하에 모두 출입하였다. 문집은 『송계집(松溪集)』 7권 3책이 전한다. 6) 《남명집(南冥集)》〈보유(補遺)〉에 여학관권응인서(與學官權應仁書)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7) 오주(五柱) : 사주(四柱)에 분주(分柱), 즉 태어난 시(時)를 12등분한 분(分)을 추가한 것으로 사주보다 더욱 자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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