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약에 병 낫고

독한 약에 병 낫고 알랑거리는 말에 다친다 [瞑眩瘳疾 脂韋成痍]
- 신흠(申欽) 조정에 임할 때 경계해야 할 일[臨朝箴]《상촌선생집》
<해설>
이 글은 조선 중기 학자 상촌(象村) 신흠(1566 ~ 1628)의 문집인 《상촌선생집》에 실린 원춘 사잠(元春四箴) 중 '조정에 임할 때 경계해야 할 일[臨朝箴]'의 일부입니다.
저자는 만물이 생동하는 봄에, 임금에게 덕을 쌓고 업을 닦으라는 뜻으로, 조정에 임할 때 경계해야 할 일[臨朝箴], 한가로이 거할 때 경계해야 할 일[燕居箴], 학문에 힘쓸 일[進學箴], 건도(乾道)를 본받을 일[體乾箴] 등 네 가지로 잠(箴)을 지어 올렸습니다.
이 글에서 저자는 신료를 모으기 위해 애써 노력하라고 하면서, '독한 약에 병이 낫고, 알랑거리는 말에 다친다'고 충언(忠言)을 올리고 있습니다. 또 '좋은 계책을 수용하고, 기쁜 마음으로 행하라'고 하면서 '사람을 잘 취해야 왕도(王道)가 열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귀에는 거슬려도 곧은 말이 일을 성공으로 이끌며 당장 듣기는 좋아도 아첨하는 말이 일을 망치니, 의견이 다른 신하도 포용해야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정책을 결정하는 지도자에게 꼭 필요한 덕목은, 귀에 대고 알랑거리는 말을 칼날 피하듯 피하고, 거슬리는 말을 보약 마시듯 기꺼이 들이키는 자세가 아니겠냐고 상촌 선생이 '2008년 대한민국'에 대고 외치는 것만 같습니다.
옮긴이 /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처음에 잘못을 하였더라도

처음에 잘못을 하였더라도 후에 과실을 고쳤다면 그 고친 것을 귀하게 여길 뿐이니 그 과실을 감출 필요가 없다 [其始也過而其終也能改 則惟其改之爲貴而其過不必掩也]
- 김창협(金昌協) [曾子受季孫之簀論] 《농암집(農巖集)》
<해설>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임종을 맞이하였습니다. 증자의 제자들이 옆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동자가 증자가 누워있는 자리의 깔개를 지적하였습니다. 그 깔개는 당대의 실권자인 계손씨가 선물한 것인데 증자의 신분에는 맞지 않는 사치스러운 물건이었던 것입니다. 증자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의 몸을 부축하라 하고는 깔개를 바꾸고서 바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일화를 두고 증자가 신분에 걸맞지 않은 깔개를 사용한 점을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서도 자신의 잘못을 고쳤던 증자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말을 바꾸기도 하고, 무언가 감추기도 하고, 새로운 거짓말을 하면서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자기편의 잘못에 대해 무조건 감싸주려고 이치에 맞지도 않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김창협은 글의 말미에서, 과실을 고치지 않고서 변명하고 감추기만 한다면 처음에는 과실이었지만 결국 악행이 되고 만다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과실이 크면 클수록 더욱더 과감히 고쳐야 할 것입니다.
글쓴이 / 이정원(한국고전번역원)

 

 

우애(友愛)에 대하여

형의 뼈는 아버지의 뼈요 아우의 살은 어머니의 살이네 [兄之骨 是父之骨 弟之肉 是母之肉]
- 최현(崔晛), 우애잠(友愛箴) 《인재집(認齋集)》
<해설>
이 글은 조선 중기 학자 인재(認齋) 최현(1563 ~ 1640)의 문집인 《인재집(認齋集)》에 실린 우애잠(友愛箴)의 일부를 번역한 것으로, 경상도에서 어떤 형제가 재판까지 걸어가며 크게 싸우자 그들을 일깨우기 위하여 저자가 써서 보여준 글입니다.
저자는 아우가 어릴 때 형이 업고 다닌 것, 아우가 숟가락을 잡지 못할 때 형이 밥을 떠먹인 것, 한 상에서 밥 먹고 끌어안고 잠든 것, 함께 울고 웃던 것들을 떠올려보게 합니다. 그러고 나서 결혼 후 제 살림을 챙기느라 사욕이 싹터 원수처럼 욕하는 사이가 되고, 결국 남보다도 못해지게 된 상황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리고 이들 형제에게 명합니다.
“마음을 너그럽게 먹어 의(義)를 높이고 재산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마음에 노여움을 담아 두지 말고 원망을 쌓아 두지 말게나.”
저자가 이 글을 써서 보여주자 형제는 감동을 받아 서로 자책하고, 결국 소송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형제는 부모가 남겨주신 가장 큰 유산이라고 합니다. 형의 손을 붙잡고 걸음마를 배우고, 밥을 떠서 아우에게 먹여주었던 그 때를 떠올리면, 덜 중요한 것들로 인해 가장 중요한 것을 잃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옮긴이 /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도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남을 꾸짖는 데에는 밝고 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용서하는 데에는 어둡다 [人雖至愚 責人則明 雖有聰明 恕己則昏]
-   이이(李珥)《율곡전서(栗谷全書)》 年譜 중에서
<해설>
조선시대 선조조 초기에 유신(儒臣) 중심의 조정 관료들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라져 분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론(黨論)이 심각해지자 율곡(栗谷) 이이는 중재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결국 조정책은 실패하고, 이이는 대사간을 사직하고 해주(海州)로 돌아갔습니다.
위 글은 이이가 해주에서 이발(李潑)에게 쓴 편지에 인용된 글입니다. 얼마 전 서인의 영수인 정철(鄭澈)이 서인을 지나치게 두둔한 일이 있었는데, 이이는 이발과 함께 정철의 마음을 돌리려고 갖은 애를 다 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발이 오히려 서인을 가혹하게 비난하므로 이발에게 아래의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이발은 동인의 중심 인물이었습니다.
“지금 그대가 심의겸(沈義謙)을 소인이라 지적하고 서인을 사당(邪黨)이라고 몰아붙이니, 심모는 그렇다치고 서인이 모두 다 나쁘겠는가. 오늘 그대가 동인을 두둔하는 것이 계함(季涵, 정철의 자)이 서인을 두둔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찌하여 계함을 책하던 것으로 자신을 책하지 않는가.”
위의 구절은 본래 중국 송나라 명신 범순인(范純仁)이 자제들을 경계한 말로, 《소학(小學)》 〈가언(嘉言)〉에 들어 있습니다. 이이는 《소학》을 '학문을 시작할 때 맨 먼저 배워야 할 책'으로 꼽았습니다. 위 편지를 쓴 것은 《소학집주(小學集註)》를 완성한 그 해였습니다.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자신을 꾸짖고, 자기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한다면 분쟁이나 반목이 생길 리가 없습니다. 속수무책인 채 낙향한 이이는 이 뜻을 유신들에게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옮긴이 / 오세옥(한국고전번역원)

 

 

물길을 거슬러

학문이란 듣자니 물을 거스르는 배와 같아 진보는 어렵고 퇴보는 쉬워 시름겹게 하네 [爲學聞如逆水舟 登難退易使人憂]
- 윤증(尹拯) 빙군의 시에 차운하다[和聘君韻]
<해설>
흐르는 물길 위에 놓여있는 배는
물길을 거슬러 힘껏 노를 저어 나아가지 않으면
바로 떠내려가 버리고 맙니다
학문도 물을 거스르는 각오로 정진하지 않으면
시대의 흐름 속에 발맞추지 못하고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학문에서뿐만 아니라
시대는 항상 변화하면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나 자신에 매몰되어 주위를 둘러보지 못한 채
지금의 모습에 안주하여 변화하지 않는다면
결국 현재의 자리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저 멀리 아래로 떠내려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옮긴이 / 이정원(한국고전번역원)

 

 

밥 먹을 때는 함께 씹고

밥 먹을 때는 함께 씹고, 잠 잘 때는 함께 꿈꾸며 앉을 때는 함께 앉고, 걸을 때는 함께 걸었다 [食與俱嚥 寢與俱夢 坐與俱坐 行與俱行]
- 이황(李滉)《퇴계선생문집》 [先府君行狀草記]에서
<해설>
위 글은 퇴계(退溪) 이황의 아버지 이식(李埴: 1463~1502)이 독서에 대해 자식들에게 남긴 유훈(遺訓)입니다. 자신은 이처럼 글을 읽는 데 있어서 한시라도 글을 마음에서 떼놓지 않았으니, 이렇게 하지 않고 여유 부리며 세월을 허송한다면 어찌 성취할 수 있겠느냐고 엄히 훈계하고 있습니다.
이식은 가풍(家風)을 이어 과거 공부보다는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탐구하는 데에 평생을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벼슬길의 영예는 얻지 못하였지만 크게 학업을 이루어 당시 학자들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유훈은 아들을 대학자로 만든 자산이 되었습니다.
옛 선비들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手不釋卷], 밥 먹는 것조차 잊으며[忘食] 글을 읽었다고 합니다. 위의 글을 읽다 보면 전심전력으로 학문에 매진하는 학자의 자세가 더욱 절실히 느껴집니다.
옮긴이 / 오세옥(한국고전번역원)

 

 

보리밥 뻣뻣하다 말하지 마라

보리밥 뻣뻣하다 말하지 마라. / 毋曰麥硬
앞마을에선 불도 못 때고 있으니. / 前村未炊
삼베옷 거칠다 말하지 마라. / 毋曰麻麤
헐벗은 저들은 그마저 없으니. / 視彼赤肌
정약용(丁若鏞) 사치를 경계하는 글[奢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해설>
이 글은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의 '사잠(奢箴)' 중 일부를 번역한 것입니다. 즐거움은 누구나 다 누리는 것이고 복(福)은 누구나 다 받는 것인데, 왜 누구는 추위에 떨고 굶주리며 누구는 비단옷에 맛있는 음식을 먹느냐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더구나 직접 짜지도 않으면서 오색영롱한 비단옷을 입고, 사냥하지도 않으면서 살진 고기를 실컷 먹어서야 되겠느냐고, 무위도식하며 사치하는 이들을 꾸짖습니다. 이어서 한 입 즐길 정도면 다른 집 열 집을 거둘 수 있고, 하루 먹는 양이면 누군가 한 달을 먹고 살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일깨워줍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기아와 질병으로 15초마다 한 명의 어린이가 죽어 가고 있고, 매년 600만 명이 결막 질환으로 시각장애인이 되고 있다고 합니다. 반면 너무 많이 먹은 게 원인이 되어 병들고 죽는 일도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만 원짜리 모기장 하나면 한 가족이 말라리아에 걸리는 것을 막을 수 있고, 2만원이면 영양실조에 걸린 어린이 30명에게 고단백 영양식을 먹일 수 있고, 5만원이면 600명의 어린이에게 실명 예방용 비타민A 캡슐을 1년간 공급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하는 것이라며 모른 척하고 살 것이 아니라, 남의 불행을 보며 자신의 처지를 다행스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쉽고도 귀한 일들에 정성을 쏟을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옮긴이 /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그릇의 크기에 따라

그릇이 큰 사람은 작게 받아들일 수 없고 / 器之大者 不可以小受
그릇이 작은 사람은 크게 받아들일 수 없다 / 器之小者 不可以大受
-  이승소(李承召) 경해당기(傾海堂記) 중에서
<해설>
이 글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이승소(李承召:1422~1484)가 홍윤성(洪允成)의 국량을 높이 평가하며 한 말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능력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미 한계에 도달한 사람이 있으며, 앞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각자의 그릇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작은 그릇을 가진 사람은 조금 채우고 나면 아무리 더 담고 싶어도 더 이상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은 담는대로 모두 받아들여 차후에 큰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다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역량도 살피지 않고 무작정 채우려고만 들지 말고 우선 그릇을 키우는 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재를 등용하는 데 있어서는 그 사람의 그릇이 어떠한지를 잘 살펴 그에 걸맞는 일을 맡겨야 할 것입니다. 그릇이 작은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면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를 낼 수 없을 것이며, 그릇이 큰 사람에게 작은 일을 맡기면 이 역시 제대로 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옮긴이 / 이정원(한국고전번역원)

 

 

이상(理想)을 드높여라

이상(理想)을 드높여라. / 志尙要激昻
송골매 하늘 높이 날아오르듯. / 意氣要奮發
기개를 떨쳐라. / 激昻則如霜鶻之橫雲霄
신마(神馬)가 재갈을 물리치듯. / 奮發則如神駒之謝銜橜
- 최창대(崔昌大) 막힘없음에 대하여[達箴]《곤륜집(昆侖集)》
<해설>
※ 위의 글은 원문의 순서를 바꾸고 내용을 축약하여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을 직역(直譯)하자면, “이상을 드높여야 하고 기개를 떨쳐야 하니, 드높이는 것은 송골매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과 같고, 떨치는 것은 신마가 재갈을 마다하는 것과 같다.”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은 조선 후기 문신 곤륜(昆侖) 최창대(1669 ~ 1720)의 ‘달잠(達箴)’ 중 일부를 번역한 글입니다. 저자는 막힘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조건으로 몇 가지를 열거하고 있는데, 위의 글은 그 첫 구절에 자리한 내용입니다. 위의 글에 이어서 저자는
봄날의 훈풍처럼 기상을 화평하게 할 것 / 휘영청 빛나는 가을 하늘 달처럼 가슴을 탁 트이게 할 것 / 박옥(璞玉)을 다루듯 품행을 갈고 닦을 것 / 명주실로 비단 짜듯 치밀하게 연구할 것 / 콸콸 흐르는 냇물 막힘없듯 재능을 발휘할 것 / 은산(銀山) 철벽(鐵壁) 꿈쩍 않듯 절조를 굳게 지킬 것 등을 이야기하고, 이 몇 가지에 능한 사람이라야 ‘막힘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곤륜 선생이 제시한 ‘달인의 조건’을 보며, 자유란 자기 완성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는 정직한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겨 봅니다.
옮긴이 /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백발은 시에 쓰이면 새롭고

백발은 미인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시에 쓰이면 새롭고
부귀는 세인들이 좋아하는 것이지만 시에 들어오면 누추하다
[白髮花林所惡而用於詩則新 富貴世情所喜而入於詩則陋]
- 이수광(李睟光)《지봉유설(芝峯類說)》
<해설>
위 글은 조선 후기의 문인 지봉(芝峯) 이수광(1563~1628)이 《지봉유설》에서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의 일화를 기술한 조목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옥봉은 유명한 시인으로 한 글자 한 구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내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작(詩作)에 전념하였기에 사람들이 더욱 귀중히 여겨 작품마다 회자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명성과는 달리 집안도 빈한하고 변변한 벼슬도 못한 탓에 옥봉의 행색은 늘 초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봉유설》에 실린 일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옥봉이 한번은 공산(公山)에 유람한 적이 있었는데, 공산현감은 유명한 시인을 환영하기 위해 온갖 준비를 갖추고 기생들도 단장시켜서 데리고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막상 당도한 인물을 보니 의관이나 외모가 아무 볼품 없는 일개 선비에 불과하였습니다. 모두 실망한 가운데 한 기생이 “지금 백공을 보니 바로 조룡대(釣龍臺)구료.” 하자, 함께 있던 사람들이 크게 웃었습니다. 조룡대는 경승지라 일컬어지던 곳인데, 실제로는 별로 볼만한 것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비유한 것입니다. 여기서 지봉은 위에 인용한 혹자의 말을 빌려 이 일화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뛰어난 시인과 그가 남긴 작품은 당대뿐 아니라 후대까지 오래오래 존경 받고 음송됩니다. 세상에서보다 시 안에서 더욱 빛나고 우대받는 단어가 또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봅니다.
옮긴이 / 오세옥(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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