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 역설강령(易說綱領) ①

▣ 역설강령(易說綱領) ①


程子曰 上天之載 無聲無臭하니 其體則謂之易이요 其理則謂之道요 其用則謂之神이라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상천(上天)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니, 그 체(體)는 역(易)이라 이르고 그 이치는 도(道)라 이르고 그 용(用)은 신(神)이라 이른다.”


○ 陰陽闔闢이 便是易이니 一闔一闢을 謂之變이니라


음(陰)·양(陽)이 닫히고 열림이 곧 역(易)이니, 한번 열리고 한번 닫힘을 변(變)이라 이른다.


○ 命之曰易이면 便有理하니 若安排定이면 則更有甚理리오 天地陰陽之變이 便如二扇磨하여 升降盈虛剛柔가 初未嘗停息하니 陽常盈하고 陰常虧라 故로 便不齊하니 譬如磨旣行이면 齒都不齊요 旣不齊면 便生出萬變이라 故로 物之不齊는 物之情也어늘 而莊周는 强要齊物이나 然而物終不齊也라 堯夫有言 泥空終是著(착)이요 齊物到頭爭이라하니라


명명하여 역(易)이라 하였으면 곧 이치가 있는 것이니, 만약 안배하여 정한다면 다시 무슨 이치가 있겠는가. 천지(天地) 음양(陰陽)의 변화는 곧 두 짝의 맷돌과 같아서 승(升)·강(降)과 영허(盈虛)와 강유(剛柔)가 애당초 일찍이 멈추거나 쉰 적이 없으니, 양(陽)은 항상 가득차고 음(陰)은 항상 부족하다. 그러므로 똑같지 않으니, 비유하면 맷돌이 이미 돌면 이〔齒〕가 모두 똑같이 맞지 않고, 이미 똑같이 맞지 않으면 곧 만 가지 변화를 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물건이 똑같지 않음은 물건의 실정(實情)인데 장주(莊周)는 억지로 물건을 똑같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물건은 끝내 똑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요부(堯夫)[소강절(邵康節)]가 말씀하기를 “공(空)에 빠지면 끝내 집착하게 되고, 물건을 똑같게 하려 하면 이르는 곳마다 다투게 된다.” 하였다.


○ 易中엔 只言反復往來上下하니라


역(易) 가운데에는 다만 반복하고 오고감과 오르내림을 말하였다.


○ 作易者 自天地幽明으로 至于昆蟲草木微細히 無不合하니라


역(易)을 지은 것은 천지(天地)의 유명(幽明)으로부터 곤충과 초목의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부합되지 않음이 없다.


○ 聖人之道는 如河圖洛書 其始는 止於 上에 便出義러니 後之人이 旣重卦하고 又繫辭하나 求之에 未必得其理니라


성인(聖人)의 도(道)는 비유하면 하도(河圖)·낙서(洛書)가 처음에는 다만 획 위에서 곧 뜻을 내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괘(卦)를 거듭하고 말을 달았으나 구함에 반드시 그 이치를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 因見賣兎者하시고 曰 聖人이 見河圖洛書而 八卦라 然何必圖書리오 只看此兎라도 亦可作八卦하니 數便此中可起라 古聖人이 只取神物之至著者耳시니 只如樹木에도 亦可見數니라


토끼를 파는 자를 보시고는 말씀하였다.

“성인(聖人)이 하도(河圖)·낙서(洛書)를 보고 팔괘(八卦)를 그었다. 그러나 하필 하도(河圖)·낙서(洛書) 뿐이겠는가. 다만 이 토끼만 보고도 팔괘(八卦)를 만들 수 있으니, 수(數)가 곧 이 가운데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옛 성인(聖人)이 다만 지극히 드러난 신물(神物)을 취하셨을 뿐이니, 다만 수목(樹木) 같은 것에서도 수(數)를 볼 수 있다.”


○ 張 中이 問易之義 本起於數잇가 曰 謂義起於數則非也라 有理而後有象하고 有象而後有數하니 易은 因象以知數하니 得其義하면 則象數在其中矣라 必欲窮象之隱微하고 盡數之毫忽인댄 乃尋流逐末이라 術家之所尙이요 非儒者之所務也니 管輅, 郭璞之學이 是也니라 又曰 理无形也라 故로 因象以明理하고 理見乎辭矣니 則可由辭以觀象이라 故로 曰得其義하면 則象數在其中矣라하니라


장굉중(張 中)이 “역(易)의 뜻이 본래 수(數)에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의(義)[의의(意義)]가 수(數)에서 생겼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이치가 있은 뒤에 상(象)이 있고 상(象)이 있은 뒤에 수(數)가 있으니, 역(易)은 상(象)으로 인하여 수(數)를 아는 것이니, 그 의(義)를 알면 상(象)·수(數)는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반드시 상(象)의 은미함을 다하고 수(數)의 세미함을 다하고자 한다면 이는 바로 말류(末流)를 찾고 지엽을 좇는 것이니, 술가(術家)에서 숭상하는 것이요 유가(儒家)에서 힘쓰는 것이 아닌 바, 관로(管輅)와 곽박(郭璞)의 학문이 이러한 것이다.”

또 말씀하였다.

“이치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상(象)으로 인하여 이치를 밝혔으며, 이치는 말에 나타나니, 말로 인하여 상(象)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의(義)을 알면 상(象)·수(數)가 그 가운데에 있다고 한 것이다.”


○ 謂堯夫曰 知易數爲知天가 知易理爲知天가하시니 堯夫云 還須知易理爲知天이라하니라


요부(堯夫)에게 말하기를 “역(易)의 수(數)를 아는 것을 하늘을 안다고 하는가? 역(易)의 이(理)를 아는 것을 하늘을 안다고 하는가?” 하니, 요부(堯夫)는 “모름지기 역(易)의 이(理)를 알아야 하늘을 안다고 한다.” 하였다.


○ 尹焞이 問 易乾坤二卦면 斯可矣니잇가 曰 聖人이 設六十四卦, 三百八十四爻로되 後世에 尙不能了하니 乾坤二卦로 豈能盡也리오 旣而(오)曰 子以爲何人分上事오 對曰 聖人分上事니이다 曰 若聖人分上事면 則乾坤二卦亦不須니 況六十四卦乎아


윤순(尹焞)이 “역(易)은 건(乾)·곤(坤) 두 괘(卦)면 됩니까?”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성인(聖人)이 64괘(卦)와 384효(爻)를 만들어 놓았는데도 후세에서는 오히려 다 알지 못하니, 건(乾)·곤(坤) 두 괘(卦)로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윽고 말씀하기를 “자네는 어떤 사람의 신분에 해당하는 일을 물은 것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성인(聖人)의 신분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만약 성인(聖人)의 신분에 해당하는 일이라면 건(乾)·곤(坤) 두 괘(卦)도 필요 없으니, 하물며 64괘(卦)이겠는가.”


○ 看易엔 且要知時라 凡六爻 人人有用하여 聖人은 自有聖人用하고 賢人은 自有賢人用하고 衆人은 自有衆人用하고 學者는 自有學者用하고 君有君用하고 臣有臣用하여 无所不通이니라


역(易)을 볼 때에는 우선 때를 알아야 한다. 무릇 여섯 효(爻)는 사람마다 용도가 있어서 성인(聖人)은 성인(聖人)의 용도가 있고 현인(賢人)은 현인(賢人)의 용도가 있고 중인(衆人)은 중인(衆人)의 용도가 있고 배우는 자는 배우는 자의 용도가 있고 군주는 군주의 용도가 있고 신하는 신하의 용도가 있어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 觀易에 須看時然後에 觀逐爻之才니라 一爻之間에 常包函(含)數意어늘 聖人이 常取其重者而爲之辭로되 亦有易中에 言之已多일새 取其未嘗言者하니 亦不必重事라 又有且言其時하고 不及其爻之才하니 皆臨時參考라 須先看卦라야 乃看得繫辭니라


역(易)을 볼 때에는 모름지기 때를 보아야 하고 그런 뒤에는 효(爻)마다의 재질을 보아야 한다. 한 효(爻)의 사이에는 항상 몇 가지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성인(聖人)은 항상 그중에 중요한 것을 취하여 말씀하였으나, 또 《주역(周易)》 가운데에 말한 것이 이미 많으므로 일찍이 말하지 않은 것을 취한 경우가 있으니, 또한 반드시 중요한 일은 아니다. 또 우선 그 때만 말하고 효(爻)의 재질을 언급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모두 때에 따라 참고하여야 한다. 모름지기 먼저 괘(卦)를 보아야 괘(卦)에 붙인 말을 알 수가 있다.


○ 大抵卦爻始立에 義旣具하니 卽聖人이 別起義以錯綜之라 如春秋時已前엔 旣已立例러니 到近後來하여는 書得全別一般事라 便書得別有意思하니 若依前例觀之하면 殊失之也니라


대저 괘(卦)·효(爻)가 처음 섬에 의(義)가 이미 갖추어져 있으니, 성인(聖人)이 별도로 의(義)를 일으켜서 착종(錯綜)[이리저리 종합함]하였다. 예를 들면 춘추시대(春秋時代) 이전에 이미 예(例)를 세워 놓았었는데, 근래에 이르러서는 글이 완전히 일반(一般)[일종(一種)]의 일과 달라져서 글을 씀에 별도의 뜻이 있으니, 만약 이전의 예(例)에 의거하여 보면 자못 뜻을 잃게 된다.


○ 凡看書에 各有門庭하니 詩, 易, 春秋는 不可逐句看이요 尙書, 論語는 可以逐句看이라 聖人用意深處 全在繫辭요 詩書는 乃格言이니라


무릇 책을 볼 때에는 각각 문정(門庭)이 있으니, 《시경(詩經)》·《역경(易經)》·《춘추(春秋)》는 글귀마다 하나하나 볼 수 없고, 《상서(尙書)》와 《논어(論語)》는 글귀마다 하나하나 볼 수 있다. 성인(聖人)이 뜻을 씀이 깊은 부분은 완전히 〈계사전(繫辭傳)〉에 있고, 《시경(詩經)》와 《서경(書經)》은 바로 격언(格言)이다.


○ 古之學者 皆有傳授하니 如聖人作經은 本欲明道나 今人이 若不先明義理하면 不可治經이니 蓋不得傳授之意云爾라 如繫辭는 本欲明易이나 若不先求卦義하면 則看繫辭不得이니라


옛날의 배우는 자들은 모두 전수(傳授)함이 있었으니, 성인(聖人)이 경(經)을 지은 것은 본래 도(道)를 밝히고자 해서이나, 지금 사람들이 만약 먼저 의리(義理)를 밝게 알지 못하면 경(經)을 다룰 수가 없으니, 전수(傳授)한 뜻을 알지 못하게 된다. 〈계사전(繫辭傳)〉은 본래 역(易)을 밝히고자 한 것이나, 만약 먼저 괘(卦)의 뜻을 찾지 않는다면 계사(繫辭)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 易學은 後來에 曾子, 子夏煞到上面也시니라


역학(易學)은 후래에 증자(曾子)와 자하(子夏)가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 由孟子하면 可以觀易이니라


맹자(孟子)를 따르면 역(易)을 볼 수 있다.


○ 今時人은 看易에 皆不識得易是何物이요 只就上穿鑿이라 若念得不熟與인댄 就上添一德이라도 亦不覺多하고 就上減一德이라도 亦不覺少하리니 譬如不識此 子하면 若減一隻脚이라도 不覺是少하고 添一隻脚이라도 亦不知是多하나니 若識則自添減不得也니라


지금 세상 사람들은 역(易)을 볼 때에 모두 역(易)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그 위에 나아가 천착(穿鑿)한다. 만약 생각함이 익숙하지 못하다면 그 위에 한 덕(德)을 더하더라도 많아짐을 깨닫지 못하고, 그 위에 한 덕(德)을 감하더라도 적어짐을 깨닫지 못할 것이니, 비유하면 이 책상子〕을 모르면 만약 한 짝의 다리를 줄이더라도 이것이 적어졌음을 깨닫지 못하고, 한 짝의 다리를 더하더라도 이것이 많아졌음을 모르는 것과 같으니, 만약 안다면 스스로 더하거나 빼지 못할 것이다.


○ 易은 須是默識心通이니 只窮文義하면 徒費力이니라


역(易)은 모름지기 묵묵히 알고 마음으로 통하여야 하니, 다만 글뜻만을 연구한다면 한갓 힘만 허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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