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전서 제132권 고식(故寔) 5
주자대전(朱子大全) 4 갑인년(1794)에 문신 김계온(金啓溫), 이홍겸(李弘謙)을 선발하였다
정 참정에게 보낸 차자[與鄭參政箚]에, “시론(時論)이 크게 변하여 충성스럽고 어진 이들이 분주해졌기에, 서둘러 소장을 짓고자 하나 국가에 누만 보태고 이익 없이 분란만 일으킬까 염려된다.” 하였는데, 신 김계온(金啓溫)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주자가 을묘년에 작성해 놓은 소장(疏章)을 불태웠던 사실을 두고, 담론하는 자들이 단지 연보(年譜)에 의거하여, ‘점을 쳐서 돈괘(遯卦)를 만났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다’ 하는 것은 아마도 선생의 본의가 아닐 듯합니다. 가만히 상고해 보면, 당일의 시세(時勢)는 선생을 향모(向慕)하였지만, 간신배들에게 고혹(蠱惑)된 영종(寧宗)의 마음은 한두 마디 말로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선생의 상소가 올라가면 영종의 과실만 더욱 드러나 한갓 화란(禍亂)만 격발시킬 뿐이었을 것입니다. 정 참정에게 보낸 차자는 곧 선생의 고심(苦心)이 담긴 것이니, 반드시 돈미(遯尾)의 상(象)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삼가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정 참정에게 보낸 차자 중 ‘이익 없이 분란만 일으킬까 염려된다’는 말씀은 과연 주자의 고심을 표출한 것이니, 점을 쳐서 돈괘(遯卦)를 만났기 때문에 소장을 불태웠다느니 하는 것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주자의 이 말은 근자의 폐단을 절실히 지적하였습니다. 대개 지나치게 겁이 많아 움츠리는 이가 아니면 곧 너무 유약(柔弱)한 병통이 있으니, 집에 있는 이나 조정에 선 이나 모두 다 이러한 규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원만함을 좋아하고 방정함을 싫어하는 것이 자연스런 습관으로 굳어져 겉으로 부드러운 낯빛을 꾸미는 쇠미한 기풍이 날로 더욱 심해지는 실정입니다. 그리하여 인재를 채용함은 비록 넓으나 충직한 진언이 들리지 않으며 신민(臣民)을 개도(開導)함은 이에 지성스러우나 누적된 습속은 교화되기 어렵습니다. 화합하지 않고 통솔되지 않는 것은 진실로 뭇 신민들이 못나서이겠지만, 통솔하고 개도하는 것은 실로 성상께서 더욱 면려하시기에 달려 있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러한 문제의 해답을 자신에게 돌이켜 구하여 정령(政令)을 시행하는 즈음에 인재를 널리 포용하는 덕을 더욱 넓히고 교도(敎導)하는 방도에 더욱 힘쓰소서.
네가 말한 ‘집에 있는 이나 조정에 선 이나 모두 다 원만함을 좋아하고 방정함을 싫어하여, 겉으로 부드러운 낯빛을 꾸미는 쇠미한 기풍이 날로 더욱 심해지는 실정이므로, 충직한 진언이 들리지 않고 누적된 습속은 교화되기 어려우니, 인재를 널리 포용하는 덕을 더욱 넓히고 교도하는 방도에 더욱 힘쓰라’는 것은 고식(故寔)의 체례(體例)를 매우 잘 얻었으니, 어찌 진부한 말로 간주하여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돌아보건대 오늘날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그 이유가 오로지 성심(誠心)으로 간언(諫言)하지 못하는 데 있을 뿐이다. 만약 간언하는 사람이 많다면 사대부 간의 풍습이 곧 고쳐지지 않을 이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취렴하는 신하가 재용을 절감하여 백성을 여유롭게 할 줄을 능히 알아 백성을 해치는 데 이르지 않는다면 이는 곧 취렴이 아닙니다. 이미 취렴할 마음을 먹었다면 필시 재용을 절약하여 백성을 여유롭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학》에 이르기를, “취렴하는 신하를 둘진댄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는 두는 편이 낫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즉 어떠한 도로 이들을 부려야 취렴하는 신하로 하여금 백성을 해치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우러러 질문을 올립니다.
백리해(百里奚)는 우(虞) 나라에서는 어리석었으나 진(秦) 나라에서는 지혜로웠고, 봉덕이(封德彝)는 수(隋) 나라에서는 아첨하였으나 당(唐) 나라에서는 충성스러웠으니, 인재의 성취는 역시 임금이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취렴하는 신하는 그들의 뜻은 비록 취해서 안 되겠지만 그들의 재능은 반드시 쓸 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 그들의 뜻을 억눌러 조금이라도 날뛰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재능을 알아서 쓸 만한 자리에 임명한다면, 양신(良臣)이 되게 할 수 있고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신하가 되게 할 수 있다. 게다가 하늘이 재품(才品)을 냄에 그 누구도 진실로 선(善)하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유독 취렴하는 신하라고 해서 애초부터 천부적 구속을 받아 성품을 변화시킬 수 없을 리가 있겠는가.
대저 임금이 인재를 씀에는 아무리 작은 국량의 재능이라도 원래부터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며, 한 자가 썩고 한 치가 좋은 재질이라도 오히려 모두 거두어들여서 인재를 포용하고 도야하는 반열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법이다. 그러한즉 어떤 사람인들 버리겠으며, 어떤 인재인들 쓸 수 없겠는가. 만약 가르쳐도 따르지 않고 이끌어도 나를 따르지 않으면, 이에 죄를 주고 물리치며 황량한 변방으로 내친다. 그리하여 이들이 능히 개과천선하면 다시 기용(起用)하고 개과천선하지 못하면 그만이다. 혹 우매하고 완둔(頑鈍)하여 개과천선할 줄 모르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서 개과천선하려 하지 않으면 이는 난신(亂臣)이요 적신(賊臣)이라, 아무리 천지(天地)와도 같은 임금의 살리기 좋아하는 덕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 가차 없이 처벌하여도 아까울 바 없는 것이다.
대저 주자가 취렴하는 신하에 대하여 무슨 아까울 게 있어서 이러한 말을 했겠는가. 단지 임금이 인재를 쓰는 도리가 당연히 이와 같아야 함을 말했을 뿐이니, 크도다, 주자의 말씀이여.
주자가 갑오년에 궁관(宮觀)의 자급을 고친 데 배명(拜命)한 것은, 그 은미한 뜻을 발명(發明)한 이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선생이 이 직책을 사양한 것은 대개 물러나길 구하다가 도리어 나아가게 됨이 의리상 미안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선생이 이 직책을 배명한 것은 바로 그다음 해에 있었으며 이에 남헌(南軒)이 깊이 의아하게 생각하기까지 하였은즉, 당시 선생이 남헌에게 답한 것은 어떠한 내용이었는지 모르겠거니와 당시 문하의 제현(諸賢)은 필시 강석(講席)에서 들은 바가 있을 것입니다.
출처(出處)가 어찌 일정하리요, 오직 의리를 따를 뿐이다. 도가 행해질 수 있음을 보고 출사(出仕)하는 경우도 있고, 임금이 예로써 대우함을 보고 출사하는 경우도 있고, 임금이 현인을 대우하는 예(禮)를 보고 출사하는 경우도 있으니, 성인(聖人)은 때에 따라 의(義)를 제정하여 결코 일정한 규례를 둔 적이 없다. 이것이 이른바 ‘군자가 하는 바를 소인은 진실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니, 이러한 이치를 강구(講究)하고 또 강구하여 전날 받은 것과 오늘날 받지 않은 것이 모두 옳다는 것을 안 뒤에야 비로소 이러한 의리에 대해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노래도 성인이 들으면 지극한 이치가 담겨 있고, 목동과 나무꾼의 말도 군자가 택하면 훌륭한 계책이 들어 있는 법입니다.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즉위하신 이래로 진언(進言)을 구함을 우선하셨으니, 목전의 일로써만 말하더라도 신 등과 같이 지식과 학문이 천박한 자들 역시 글을 통하여 규간(規諫)을 바치도록 허락함으로써 이언(邇言)을 살피는 데 일조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에 신 등은 비록 재능이 없고 학식이 없지만 어찌 감히 품은 생각을 반드시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하나의 선(善)과 한 조각 장점이라도 다 채택하여, 쓸 만한 것은 쓰고 행할 만한 것은 행하여 한갓 한바탕의 형식적인 일이 됨이 없도록 하시면, 선한 말과 좋은 계책이 장차 잇따라 이를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실질로써 해야지 형식으로써 해서는 안 된다는 감계(鑑戒)에 더욱 유념하소서.
송(宋) 나라의 한무구(韓無咎)와 진 문충(眞文忠)의 고사를 보면, 말마다 개직(凱直)하고 명백하여, 옛일을 끌어와 오늘날을 비추고 앞일로 말미암아 뒷날의 법칙을 삼는 것이 《시경》의 칠월편(七月篇)과 권아편(卷阿篇)의 유의(遺意)가 아님이 없다. 진실로 너희들이 책사(策士)의 말투를 털어 버리고 능히 송 나라 선비들의 아름다운 전례를 따르기만 한다면 좌우(座右)의 잠명(箴銘)과 전상(殿上)의 첩(帖)을 너희 말고 누구에게 구하겠는가.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이 나뉘는 곳이 바로 ‘기(幾)’ 자 위에 있으며, 천리와 인욕의 분변을 또한 일찍이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장횡거(張橫渠)가 단지 ‘예(豫)’ 자를 말하였던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지금은 세상이 청명(淸明)하게 잘 다스려져 비록 두려울 만한 기미[幾]가 없다 하더라도 ‘예(豫)’ 자에는 오히려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터인데, 하물며 그러한 기미가 없지 않음에이겠습니까. 유희와 일락(逸樂)에 빠진 폐단은 모든 일이 무너질 기미이며, 편벽되고 방탕한 말은 정학(正學)이 점점 쇠미해질 조짐입니다. 그리고 대각(臺閣)에 벼슬아치들이 서로 규간(規諫)함이 없는즉 언로(言路)가 장차 폐색될 조짐이 아니겠으며, 주목(州牧)에 탐학한 관원을 징계하는 정사(政事)가 없은즉 민생이 점차 곤궁해질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폐단들을 바로잡는 방법은 오직 ‘예(豫)’, 즉 미리 대비하는 것일 뿐이니, 모든 일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을 때에 미리 진작하고 면려하며, 정학(正學)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을 때에 미리 장려하고 부식(扶植)하여, 성조(聖朝)에 궐실(闕失)이 없다 여기지 말고 미리 언로를 넓힐 방도를 생각하고, 민정(民政)이 다소 안정되었다 여기지 말고 미리 민생을 구제할 계책을 강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천하의 모든 일이 미리 하지 않고 제대로 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진부한 말이라 할 것이 아니니, 절로 나의 뜻에 묘하게 계합(契合)됨이 있구나.
주자가 사람을 가르치는 법문(法門)은 모두 차서(次序)에 따랐으니, 일찍이 엽등(獵等)하여 함부로 나아가게 한 적이 없었으며, 독서함에 있어 범범히 박람하는 것을 더욱 경계하였습니다. 그런데 위응중에게 보낸 편지[與魏應仲書]에서는 권계(勸戒)가 더욱 자상하되, 하루 읽는 독서량이 《예기》와 《좌전(左傳)》이 1백 번씩이고, 《맹자》가 2, 30번이고, 게다가 사서(史書) 몇 장을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예기》와 《좌전》은 아마도 초학자에게 그리 급한 책이 아닌데 또 《맹자》까지 아울러 읽게 했은즉, 비록 그 자수(字數)를 간약(簡約)히 하고 그 음독(音讀)을 정밀히 한다 하더라도 너무 호한(浩瀚)함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이는 주자가 평소 사람들에게 가르치던 독서의 차서와는 아마도 서로 부합되지 않는 듯합니다. 신은 이에 감히 의심을 품고서 스스로 숨길 수 없습니다.
주자가 사람들에게 가르치던 독서법(讀書法)은 마치 사람이 걸음을 옮김에 따라 풍수(風水)의 경치가 바뀌는 것과 같아, 일찍이 한 가지만 고집한 말은 없다. 대개 그 인품과 재분(才分)이 어떠한가에 따랐으니, 이는 마치 풍수가(風水家)가 급한 곳에서는 느슨함을 취하고 느슨한 곳에서는 급함을 취하는 수단과도 같다 하겠다. 위응중(魏應仲)은 친구의 어린 아들로, 그가 처음 수학(受學)할 때에 먼저 《예기》 곡례(曲禮)와 내칙(內則) 등 편을 읽어 검신(檢身)과 궁행(躬行)의 방도를 알게 하는 한편 《맹자》의 굉박(宏博)함과 《좌전》의 기정(奇正)함으로써 보익(輔翼)하여 근본 기반을 삼았으니, 이는 장자(長子)를 반경헌(潘景憲)의 집으로 보내 그곳에 유숙하면서 여 성공(呂成公)에게 수학(受學)하게 할 때, 간간이 과거 문자(科擧文字)를 공부하게 했던 의도와 동일하다.
의심 없는 곳에서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독서의 중요한 방법이지만, 뭇 학설들이 모두 쏟아져 나온 뒤에는 주자도 ‘더 의심할 바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주자의 《장구(章句)》와 《혹문(或問)》 등의 책들이 마치 정밀한 저울로 저울질해 낸 것처럼 정확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따라서 오늘날 선비들은 오직 이러한 주자의 저서들에 공부를 쏟으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런데 억지로 의심을 일으킨즉, 주자 이후 제현(諸賢)의 설(說)에 나아가 자구(字句)의 분합(分合)과 이동(異同)을 고찰 비교하는 데 불과할 뿐이요, 만약 문득 애초에 의심할 나위 없다고 여긴다면 또한 의심 없는 곳에서 의심을 구하는 뜻이 아닐 것이니, 어떻게 하면 당연히 의심해야 할 곳에서 의심하여 한갓 입과 귀로 외우고 지껄이는 공부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우러러 여쭙니다.
조정 신료들이 날마다 대전(大殿) 섬돌을 오르면서도 번번이 굽이 돌고 오르내릴 때마다 주저하고 두려워하면서 인도(引導)를 맡은 사도(司導)에게 묻는 것은 어째서인가? 정중하고 신중하여 감히 자기가 안다고 하여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네가 독서하면서 의심할 줄 모르는 것은 이와 상반되어 그러한 것이다. 글자에는 글자의 뜻을 알고 구절에는 구절의 뜻을 알아, 알기를 그치지 않아 의심하는 데 이르고 의심하기를 그치지 않아 풀리기에 이르고 풀기를 그치지 않아 책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융통성 있게 보는 것과 국집(局執)하여 보는 것 역시 저마다 그렇게 해야 할 때가 있으니, 오직 잠심(潛心)하여 이치를 완색하기에 달려 있을 뿐이다.
주자의 이 편지 중 ‘민사를 가까이하지 않아 실제 일을 만나면 아득히 어쩔 줄 모른다’는 대목은 오늘날 신진(新進)들의 절실한 폐단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관리(官吏)의 일을 마치 달갑지 않은 듯이 봅니다. 그리고 오직 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나온 사람은 대개 처음 출신(出身)했을 때로부터 재부(財富)와 갑병(甲兵) 등의 일에는 망연히 유의(留意)하지 않으며, 혹 한 번도 지방관을 거치지 않은 채 바로 방백(方伯)에 오르기도 하고, 혹 작은 읍도 맡아보지 않은 채 먼저 큰 고을을 맡게 되어, 일을 만나면 생경(生梗)하여 도처에 장애가 생기게 됩니다. 근자의 법에 주자의 이러한 취지를 따라 처음 벼슬길에 오른 사람에게 주군(州郡)을 맡도록 한 것은 진실로 인재를 성취시키고자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전곡(錢穀)을 맡아 처리하는 자리에 특별히 문임(文任)인 낭관(郞官)을 정원으로 설정해 둔 것은 구례(舊例)가 그러하였는데, 법이 야박해짐에 따라 관직도 따라서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옛 규례(規例)를 굽어 따라서, 문신들을 이러한 지방관의 벼슬에 섞어 넣어 관리의 일을 익혀 알도록 하소서.
한(漢) 나라의 구경(九卿)은 모두 이천석(二千石)으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일찍이 청환(淸宦)과 미직(美職)에 특별히 정원을 마련해 두는 법이 있겠는가. 문벌(門閥)의 높고 낮음은 대개 오랑캐 풍속에서 나온 것인데, 관직은 사람에 따라서 선택하고 관리(官吏)는 세상에 따라 낮아지니, 네 말이 과연 채택할 만한 점이 있다.
근세 학자의 병폐는 오직 한담과 잡서에 있을 뿐입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한담의 병폐는 작고 잡서의 폐해가 더욱 크니, 오늘날 이른바 한 경전으로 시험 보여 선비를 뽑는 법은 대개 옛날 전문(專門)의 유의(遺意)인데 다만 구두(口讀)를 우선하고 문의(文義)를 뒤로한 까닭에 참 인재가 진작되지 않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연소한 학생을 정선(精選), 그 액수(額數)를 정한 다음 삼경(三經)과 사서(四書)를 막론하고 한 부(部)를 주어 매달 열흘과 그믐마다 근면했는가 태만했는가 성적을 매겨 상벌(賞罰)을 내리며, 비록 출사(出仕)한 뒤일지라도 자기가 강습한 책을 전경(專經)과 초계(抄啓)의 진강(進講)에 써서 종신토록 그 한 책을 전공하게 한다면 그 실효가 파급되어 어찌 잡서를 금하는 데 일조(一助)가 되지 않겠습니까.
근래에 육예(六藝)를 너는 어디에서 보았는가. 이른바 예(禮)는 홍려(鴻臚)의 관리 몫이고, 이른바 악(樂)은 이원(梨園)의 악공(樂工) 몫이고, 이른바 사(射)는 군영(軍營)의 장교 몫이고, 이른바 어(御)는 태복(太僕)의 하례(下隷) 몫이고, 이른바 서(書)는 서사(書寫)의 관원 몫이고, 이른바 수(數)는 계사(計士)의 무리 몫이다. 따라서 예복(禮服)을 갖추어 입은 묘당(廟堂)의 벼슬아치와 도포를 걸친 임천(林泉)의 선비들이 일찍이 조두(俎豆)를 알고 간척(干戚)을 익히며 과녁을 맞추고 화란(和鑾)을 울리며 성음(聲音)을 연구하고 구고(句股)를 분변한 적이 있겠는가. 육예를 이미 옛날대로 회복할 수 없는데, 전경(專經)인들 어찌 옛것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
시문(時文) 중에 조금 실용(實用)에 관계되어 치교(治敎)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오직 대책(對策)이 그런대로 낫습니다. 그러나 선비들의 기풍이 옛날 같지 않아 남의 문구(文句)나 표절하고 쓸데없이 군더더기 말이나 하는 것이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실질이 없는 허투의 문장을 감히 지나치게 늘어놓지 말라’고 연전에 칙령(勅令)을 내렸는데도, 겨우 한 번의 과거만 지나면 다시 예전대로 돌아가고 마는 실정입니다. 지금 그 명칭을 따라 그 실질을 회복하고자 한즉 의당 먼저 과거 방식을 타파하여, 시무에 긴요하고 치도(治道)에 보탬이 되는 것을 취하는 한편 주사(主司)가 문제를 낼 때도 의당 근자의 규례를 떨쳐 버리고 오로지 실용(實用)을 추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상(聖上)께서 친히 주관하시는 대책 시험으로 말하자면, 그 체모가 더욱 중대하기 때문에 위로는 임금의 덕과 아래로는 현재의 정사(政事)에 이르기까지 말하지 못할 것이 없는데도, 근자의 대책에는 거침없이 능란한 직언으로 답안을 작성해 낸 선비가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으니, 어찌 정식(程式)에 구애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성명(聖明)께서는 한바탕 변화시킬 방도를 속히 도모하소서.
과장(科場)의 문장은 마치 술 취한 사람이 저잣거리에서 다투는 것과 같다고, 주자가 일찍이 포씨(包氏)를 꾸짖은 적이 있다. 과거의 각 체식(體式) 중 대책(對策)이 요무(要務)이지만, 허다한 절차에 모두 투식이 있어 실질에 힘쓰는 정사(政事)가 아주 아니니, 응당 유념하겠다.
정자가 일찍이 주무숙(周茂叔)에게 수학할 때, 주무숙이 매양 중니(仲尼)와 안자(顔子)가 즐긴 것은 무엇인가 찾아보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이에 대해 “만약 그들이 한 공부를 배우면 곧 그들이 즐긴 곳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그들이 한 공부를 배우고자 한다면 먼저 안자는 어떠한 공부에 힘썼는가를 알아 그대로 따라 한 뒤에야 비로소 진보하여 성현이 참으로 즐긴 곳을 알 수 있겠습니까?
주자(周子)는 즐긴 바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지 않고 단지 그곳을 찾도록 하였고, 주자는 또 ‘그들이 한 공부를 배우면 곧 그들이 즐긴 곳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은즉 이 두 선생이 활을 당기기만 하고 쏘지 않을 것처럼 말하여, 후학으로 하여금 그 이치를 찾도록 하였으니, 그 지성과 고심을 미루어 알 만하다. 내가 너에게 역시 그렇게 말하노니, 우선 《논어》 가운데 공자와 안자의 문답을 항상 생각하여 실제로 그 이치를 터득하기를 기약함이 옳을 것이다.
근자에 문관(文官)인 수령으로 하여금 민폐(民弊)를 진달하게 한 것은 진실로 백성의 고충을 자세히 살피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비록 묘당(廟堂)에서 복주(覆奏)할 때 과연 사세(事勢)를 참작하여 일일이 채택 시행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조정에 보고될 수 없었던 백성들의 고통과 병폐가 아마도 다 뜻대로 풀려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고을 백성들이 문관 수령을 만난 경우는 진실로 다행히 고통에서 소생하겠지만, 문신이 수령이 된 이는 열에 두셋이 채 안 되는즉, 이외에는 자기들만 소외받는다는 탄식이 없다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비록 시종관(侍從官)으로 있다가 수령이 된 자가 아닐지라도 급히 제거해야 할 백성의 병폐가 있으면 묘당에 와서 보고하도록 허락하여, 채택 시행할 만한 것은 지체 없이 품처(稟處)하는 것이 모든 백성에게 한결같이 인애(仁愛)를 베푸는 정사(政事)에 합당할 듯합니다.
문관 수령이 상소(上疏)를 올리고 음직(蔭職) 수령이 농서(農書)를 보는 것이 곧 조정이 모든 백성에게 한결같이 인애를 베푸는 뜻이다.
첩경은 학자가 중시할 바가 아니며, 책을 외우는 공부의 폐단은 혹 구이지학(口耳之學)에 빠져 들게 됩니다. 게다가 의리는 논하지 않고 단지 외우려고만 한다면 그 외운 것에 반드시 깊이 내용을 음미한 맛이 없을 것입니다. 신은 이 점에 대해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책은 반드시 외워야 한다는 장횡거의 주장은 반드시 이러한 내용은 아닐 것이다. 어찌 입으로 능히 책을 외우면서 마음으로 그 뜻을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너의 말은 큰 망발(妄發)이다. 이에 너에 대해 느껴지는 것이 있구나. 네가 예전에 역시 재분(才分)이 뛰어남으로 해서 책을 깊이 음미해 읽으려 하지 않았으니, 매양 주연(胄筵)에서 서로 토론할 때 너의 뜻을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대개 지금 네가 말한 바와 매우 비슷하였다. 그러한즉 이제는 그러한 태도를 본받지 말고 나의 말을 따라야 할 것이니, 책을 읽기를 반드시 농숙(濃熟)하게 하고, 농숙하게 하고는 또 깊이 이치를 탐색해야 한다.
노장(老莊)의 설은 실로 잡서(雜書) 중에서도 심한 것인데, 이제 염락(濂洛)의 글들과 더불어 함께 시험 문제에 들 수 있도록 허락하였으니, 감히 알지 못할 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매양 식년(式年)의 시험 과목에 드는 책에다 시무(時務)에 관한 글까지 겸하는 것은 박잡(博雜)하여 전일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지나 않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의아해하는 바입니다.
주자가 공거의(貢擧議)에서 이를테면 순자, 양웅, 왕통, 한유, 노자, 장자 등을 제자(諸子)의 연수를 나누어 치르는 사과시(四科試)의 논제(論題)에 넣은 것은, 네가 혹 이단(異端)을 물리침이 부족하다고 의아해하는 것이 비록 그럴듯도 하지만, 이러한 너의 생각은 기실 위 단락에서 말한 책을 대강 보는 병폐에서 연유한 것이다. 만약 다시 본문의 본의(本義)를 자세히 본다면 절로 환히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제자(諸子)가 이단이기 때문에 논제로 내어 그 그릇됨을 분변케 한 것이니, 주자의 공거(貢擧)에 관한 논의가 역시 매우 진절(眞切)하고 정당(精當)하지 않은가.
네가 또 과거 과목에 드는 책이 너무 많은 것을 어렵다고 여겼다. 그러나 천하의 선비들로 하여금 각각 3년마다 그 3, 4분의 1을 공통 과목으로 하고, 《주역》, 《서경》, 《시경》을 한 과목으로 삼아 자년(子年)과 오년(午年)에 시험을 실시하고, 삼례(三禮)를 한 과목으로 삼아 묘년(卯年)에 시험을 실시하고, 《춘추》 및 그 삼전(三傳)을 한 과목으로 삼아 유년(酉年)에 시험을 실시하되, 연분(年分)은 모두 성시(省試)를 경계로 삼고 의(義)를 각각 두 편씩 짓게 한다. 그리고 또 여러 경(經)들의 시험을 실시해야 할 때, 자년(子年)에는 《역경》과 함께 대학의(大學義) 및 순양론(荀揚論)을 시험 보이고, 오년(午年)에는 《서경》과 함께 논어의(論語義) 및 왕한론(王韓論)을 시험 보이고, 묘년(卯年)에는 삼례(三禮)와 함께 중용의(中庸義) 및 노장론(老莊論)을 시험 보이고, 유년(酉年)에는 《춘추》 삼전(三傳)과 함께 맹자의(孟子義) 및 본조(本朝)의 제가(諸家)의 글을 시험 보인다. 그리하여, 각각 당해(當該) 식년에는 사론(史論)을 함께 제출하고, 또 그 뒤 자년인 식년에는 《시경》을 시험 보이고, 오년인 식년에는 《역경》을 시험 보이고, 또 그 뒤 자년과 오년인 식년에는 《서경》과 《시경》을 시험 보이고, 또 그 뒤 자년과 오년인 식년에는 처음 자년과 오년의 경우처럼 하여, 이와 같이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시작하도록 하면, 여기에 지극한 이치가 들어 있다 이를 만하다. 사서(四書)와 제자(諸子) 및 사전(史傳)은 따로 논(論)을 출제하되 각각 원래의 정식(定式)대로 규례(規例)에 의거하여 시험 보이며, 그 밖에는 또 이로써 해를 나누기를, 경(經)과 제자(諸子)를 시험 보이는 법과 같이 한다.
그리고, 여러 사서(史書)와 시무(時務)에 대한 책문(策文)을 시험 보일 때에는, 《좌전(左傳)》, 《국어(國語)》,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를 한 과목으로 삼고,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남북사(南北史)》를 한 과목으로 삼고, 《신당서(新唐書)》, 《구당서(舊唐書)》, 《오대사(五代史)》를 한 과목으로 삼고, 《통감(通鑑)》을 한 과목으로 삼아, 모두 네 과목이 되니, 이것이 이른바 제사책(諸史策)이다. 율력(律曆)과 지리(地理)를 한 과목으로 삼고, 통례(通禮)와 신의(新儀)를 한 과목으로 삼고, 병법(兵法)과 형통(刑統)과 칙령(勅令)을 한 과목으로 삼고, 통전(通典)을 한 과목으로 삼아, 모두 네 과목이 되니, 이것이 이른바 시무책(時務策)이다. 자년인 식년에는 제사책 한 과목과 시무책 한 과목, 각 한 편씩을 먼저 시험 보이고, 오년, 묘년, 유년인 식년에는 순차적으로 시험 보인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박잡(博雜)한 점이 있다고 말하는가. 옛날의 선비는 오늘날의 선비에 비할 바가 아니니, 공부에 힘을 씀이 어렵지 않을 뿐만이 아니다. 비록 옛날만 못한 오늘날의 선비라 하더라도 4년 동안 공부하게 한다면, 경전과 서책 각각 한 질씩을 읽는 것이 오히려 무슨 어려울 게 있겠으며, 제자 및 사서(史書) 역시 다 섭렵하지 못했다는 탄식이 없을 것이다. 그러한즉 너의 의구심은 지나치다 하겠다. 선비가 통달하지 않은 경전이 없고 익히지 않은 사서가 없고서, 당세에 쓰이지 못한다는 것은 들어 보지 못했다.
육경의 뒤에는 오직 《주서(朱書)》가 경전과 서로 표리(表裏)가 됩니다. 그러나 《주서》에는 초년(初年) 설(說)과 만년(晩年) 설의 구별, 동일한 부분과 상이한 부분의 구분에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이 혹 숨겨져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고, 심지어 자구(字句)가 나뉘고 합하는 곳에도 문리(文理)가 뒤엉켜 알 수 없는 데가 있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의의차록(疑義箚錄)》이 비록 책으로 완성되긴 하였지만 소루(疏漏)하고 오류가 많아 아직도 미비한 점이 많은 실정이니, 지금 뭇 전적(典籍)들을 크게 구비하는 이때, 독서하는 선비들에게 나누어 명하여 전주(箋註)의 일을 맡겨서, 이를 정리하여 다시 책으로 만들어 전부(全部)를 하나로 통괄(統括)한 신서(新書)와 병행하게 하면, 후학에게 아름다운 은택을 끼치는 데 도움이 어찌 이보다 큰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날 윤음(綸音)에서 《주서》를 전공한 선비를 특별히 찾았던 것이다.
오늘날은 육 선공의 시대와의 거리가 수백 년이 넘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그 주의(奏議)를 읽어 보면 이따금 현 시국의 폐단에 절실히 맞곤 하여 흡사 육 선공을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듯합니다. 이 책을 요약하여 선집(選集)하고 내용에 권점(圈點)을 친 것은 곧 우리 성상(聖上)께서 친히 정리하신 것으로, 장차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치교(治敎)에 시행코자 한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일찍이 육 선공의 주의를 강독하여 경연(經筵) 석상(席上)에서 문답한 내용이 기주(記注)에 갖추어 실려 있다 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한가하신 여가에 경학(經學)에 밝은 선비를 불러들여 《육선공주의》의 선집(選集)을 가지고 글을 통하여 토론하여, 한편으로는 옛일을 조술(祖述)하고, 한편으로는 오늘날을 감계(鑑戒)하소서.
내가 주자에 대해서는 평생토록 경앙(景仰)하였고, 육 선공에 대해서는 먼 시대를 사이에 두고 마음이 서로 계합(契合)하였으니, 그러기에 그 저서(著書)를 존숭하고 그 주의(奏議)를 선집하였다. 이는 장차 나 자신에게 징험하고 실용(實用)에 시행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너희가 입을 열면 문득 《주서》와 《육선공주의》를 말하니, 과연 내가 존숭하고 선집한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가. 만약 마음에 얻음이 없는 채 오직 임금이 좋아한다고 하여 따라서 좋아한다면 나의 본의(本意)가 아닐 것이다.
이 두 마디 말은 실로 학자가 내외(內外)를 아울러 닦는 방법입니다. 선유(先儒)가 ‘경(敬)’을 말한 대목에는, “한결같이 하기를 주장한다.[主一]”느니, “몸과 마음을 거두어들인다.[收斂]”느니, “늘 깨어 있는다.[惺惺]”느니, “‘외(畏)’ 자가 경(敬)의 뜻에 가깝다.[畏爲近]”느니 하였고, 치지(致知)를 말한 대목에는, “혹은 독서한다.”느니, “혹은 인물을 논한다.”느니, “혹은 일에 처하여 그 시비를 가린다.”느니 하였으니, 이러한 핵심적인 대목들 중 어느 것이 가장 요긴한 말이겠습니까?
밖으로는 위의를 엄숙히 잘 갖추고 안으로는 마음이 환히 깨어 있다면, 이것이 안팎을 아울러 닦는 방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굳이 실제로 착수하고 힘을 쓰는 편이하고 간단한 방법을 다시 찾는다면 앉을 때는 거만하게 다리를 뻗지 않고 말할 때는 비속(卑俗)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 하겠으니, 이렇게 모름지기 범용(凡庸)한 일상 가운데서 몸가짐을 가다듬으면 마음속이 이미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아 고요한 명경지수(明鏡止水) 같은 본체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옛날에 벼슬하는 자는 아직 벼슬하기 전에 학문이 이미 넉넉하고 벼슬하여서는 그 학문한 바를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과거로 인재를 뽑으면서부터 요행히 시문(時文)을 잘 하여 과거를 절취(竊取)하곤 하는데, 그 실상을 가만히 고찰해 보면 텅텅 비어 아무것도 취할 점이 없으니, 이것이 선유(先儒)가 이른바 ‘불행’이란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급제한 사람은 이미 과거(科擧)의 누가 자기 신심(身心)을 해침이 없으니, 긴 여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면 자신이 없이 벼슬길에 오르는 경우가 없고, 경전에 통하는 실질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초계(抄啓)는 곧 옛날의 사가(賜暇)이고, 오늘날의 강제(講製)는 곧 옛날의 월과(月課)이다. 인재를 배양하고 작성(作成)하는 것은 바로 내가 고심하는 부분인데, 몇 해 동안 이렇게 문신을 선발하여 토론해 왔지만 아직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으니, 너의 이 말은 너의 마음에 유독 부끄러움이 없는가.
우리 국조(國朝)가 혜민(惠民)과 전의(典醫)의 관원을 설치한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제도입니다. 예전에 선대의 조정 때 어떤 이가 이러한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자, 선대왕(先大王)께서 “너는 그 양을 아끼는가? 나는 그 예(禮)를 아낀다. 뒷날 그 명칭으로 인하여 그 옛 제도를 회복할 자가 있을 줄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교(下敎)하셨으니, 성대하도다. 성언(聖言)이시여. 그 사의(辭意)가 지극히 간절합니다. 이러한 제도를 다시 정비하여 시행하는 책임은 실로 오늘날에 있으며, 경향(京鄕)의 백성들이 지난봄의 질병을 겪자마자 다행히 올가을 다소간의 풍년을 만났으나, 묵은 포흠과 새 세금이 겹쳐 큰 병고를 겪은 뒤 과도한 노고로 다시 발병하게 될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이 점 현재 더욱 백성을 보살피고 아껴 주어야 할 바이니, 아울러 유의하소서.
백성을 보기를 다친 자를 보듯이 하고 뭇사람들과 함께 태평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왕자(王者)의 마음이니, 어찌 유독 올해만 그러하겠는가. 이러한 일을 적의(適宜)하게 무마하는 데는 유사(有司)가 있다.
사창법(社倉法)은 백세를 두고 행할 만합니다만, 그러나 곡식을 출납하고 이윤을 거두는 것을 이미 그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맡게 하였은즉 현(縣)의 관원들은 곡식을 사들이고 파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동리의 군자들로서는 이러한 일을 제대로 맡아 처리할 수 없을 터이니, 적임자를 얻지 못하면 또 반드시 사욕을 따르다 흐지부지되고 말 우려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시행되게 하고, 또한 적임자를 얻지 못하는 폐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화성(華城)의 환곡(還穀) 출납에 있어, 특별히 그 모곡(耗穀)을 없애게 하여, 대략 사창의 유의(遺意)를 쓴 바 있다. 법은 고금이 없으니, 오직 어떻게 행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일찍이 듣건대, 동쪽 산협의 여러 고을들은 가을 추수 때 관리들이 전답을 검사하지 않고 농부가 전답 머리에서 낱알을 잡고 세었다 하니, 옛날의 풍속이 여전히 금화(金華)의 향리 사람들 손에 전해짐을 볼 수 있었다. 어찌 다시 문밖에 와서 세금을 독촉하는 관리가 있겠는가.
후설의 직임은 다른 자리에 비해 더욱 긴절하여 조석으로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면서 날마다 용안(龍顔)을 우러러 뵙고 일에 따라 규간(規諫)을 하니, 이러한 일들은 이목의 직임을 맡은 신하가 미처 보고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책임이 도리어 중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한갓 격례(格例)만 익숙한 것을 유능하다 할 뿐 유윤(惟允)의 뜻은 역시 빠뜨리고 없는 실정입니다. 의당 정직하고 학문을 갖춘 선비를 뽑되 통의(通擬)의 한계를 높이어 왕명(王命) 출납의 권한을 줌으로써, 임금의 궐실을 보필하게 할 수 있도록 하소서.
후설의 직임은 지위는 임금에 가깝고 책임은 매우 중하므로 그 등용의 길을 다소 넓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으며, 내가 등극(登極)한 이후로 이 직임을 받은 자 역시 그리 많이 손꼽을 수 없다. 따라서 단지 적임자를 얻지 못할까 걱정할 일이지, 어찌 배의(排擬)를 제한함으로써 구속할 수 있겠는가.
문학과 정사(政事)는 두 갈래가 아니니, 근래에 문관(文官)인 수령을 차견(差遣)한 것은 진실로 성상의 의도를 우러러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열성조(列聖朝)의 성세(盛世)에 순량(順良)한 지방관을 포숭(褒崇)하고 장려하여, 음직(蔭職)에 많이 발탁하여 초선(抄選)이 아닌데도 풍헌(風憲)을 맡기고 훈구(勳舊)가 아닌데도 전형(銓衡)을 맡기어, 오직 재능에 따라 인재를 취했으니, 대개 한(漢) 나라 때 이천석(二千石), 즉 군수(郡守)가 구경(九卿)에 이르렀던 유의(遺意)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음직으로 벼슬한 관리로서 당상관(堂上官)의 자리에 오른 자는 역시 매우 보기 드문 실정입니다. 게다가 임기 연수(年數)를 제한하는 법을 두어 옥죔으로써 온축한 재능을 펼 수 없게 하니, 옛날의 제도가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경술(經術)의 자리에 역시 이러한 사람들을 임용하여 장려하고 권면하는 한 방도로 삼으소서.
오늘날 음직으로 벼슬에 오르는 것은 옛날에는 없던 법이여서 내가 일체 혁파하고 싶으나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한 나라 때의 순량한 이천석 지방관에 비기다니, 네 말이 우활(迂闊)하구나.
주자의 평생 정력은 모두 육경 위에서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서(禮書)는 몹시 고된 공력을 들였지만 오히려 탈고(脫稿)하지 못했고, 《서경》은 요전(堯典), 순전(舜典), 대우모(大禹謨), 고요모(皐陶謨)를 손수 정리하였지만 미처 편집하지는 못했습니다. 반면에 《초사집주(楚辭集註)》와 《한문고이(韓文考異)》는 모두 평소 공력을 들인 것들인데, 이러한 저서들은 《서경》이나 예서에 비하면 절로 선후와 경중의 구분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參同契)》 같은 것은 아무래도 도교(道敎)의 수양가(修養家)의 설을 담은 것일 뿐인즉,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선생의 의리로 이 책들에 정성을 쏟아 심지어 채계통(蔡季通)과 더불어 정정(訂正)하느라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도리어 무슨 까닭입니까?
주자가 편집 정정한 경사자집(經史子集)은 저마다 그럴 만한 소이연(所以然)의 은미한 뜻과 소당연(所當然)의 지극한 이치가 있다. 《초사(楚辭)》와 《참동계》도 역시 은미한 뜻이 담긴 것으로 여기에는 지극한 이치가 들어 있으니, 단지 존숭하여 믿으면 그만이다. 어찌 달리 따질 것이 있겠는가.
자양(紫陽 주자)의 《강목》은 곧 공자의 《춘추》인데, 도연명(陶淵明)을 진(晉) 나라의 처사(處士)로 우뚝이 드러내고, 양웅(揚雄)을 망대부(莽大夫)라 특별히 일컬은 것은 실로 의리를 정밀히 파헤친 대목으로 그 얼마나 명쾌합니까. 그러나 한 고조(漢高祖)가 회대(淮代)를 친 것에 대해 ‘정토(征討)’라고 쓰지 않고, 고력사(高力士)가 장군이 됨에 ‘환(宦)’ 자를 덧붙이지 않았으며, 당 헌종(唐憲宗)이 부처의 사리[佛骨]를 맞아들인 것을 특별히 써서 게재하고, 한 명제(漢明帝)가 천축(天竺)과 통교한 것은 크게 쓰지 않았으며, 형가(荊軻)가 비수를 품은 것과 장량(張良)이 철퇴를 휘두르게 한 것은 모두 의기(義氣)로 한 일인데도, 장량에 대해서는 포장 허여하고 형가에 대해서는 도적이라 일컬었습니다.
무릇 이 몇 조목은 모두 신이 일찍이 강구(講究)하였으나 해답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강목》은 확정되지 못한 책일 뿐 아니라 또한 주자가 찬집(纂輯)한 것이 아니며, 《소학(小學)》 역시 마찬가지이니 등백도(鄧伯道)의 고사는 더욱이 주자의 정론(正論)이 있음에랴. 이것이 이 두 책을 앞으로 주자의 저서 일체를 모아 편집하는데 같이 편입시키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시(詩)란 사람의 마음이 사물에 감응하여 말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바른 사람은 그 감응한 바가 바르지 않음이 없어 그 말이 모두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시험 삼아 주자의 시로써 보면, 감흥편(感興篇)은 천리(天理)의 근원을 관찰한 것이고, 인술시(仁術詩)는 본연(本然)의 덕을 비유한 것이며, 역상(易象)의 이치는 ‘만호천문(萬戶千門)’의 시편에서 징험할 수 있고, 심체(心體)의 허명(虛明)함은 ‘반묘방당(半畝方塘)’이란 시구에서 볼 수 있은즉, 평소의 작품들이 학문의 전체 대용(全體大用)이 아님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앞의 두 시가 초년(初年)과 만년(晩年)의 구분이 있다 하여, 뭉뚱그려 학문의 시종을 이루는 것이라 간주하는 것은 편벽되어 완전치 못한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러하다.
송(宋) 나라의 정견은 곧 우리나라의 신포(身布)입니다. 송 나라의 정견은 매 장정당 명주 3척(尺) 5촌(寸)과 돈 71문(文)인데도 주자는 오히려 너무 부담이 무겁다고 하였은즉, 매 장정당 40척의 베를 내게 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는 너무도 과중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유랑하는 장정이 많아 이른바 베를 내는 장정이란 자가 으레 병들고 노쇠한 백성들뿐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이미 썩은 백골과 강보에 싸인 아기 역시 횡포한 징수(徵收)를 면치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신포가 편리한 호포(戶布)만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만약 아직 미처 시행할 겨를이 없었던 법을 거행하여 시험 삼아 조정 신료들의 가호(家戶)로부터 한번 명령을 내려 시행한다면 단지 경용(經用)에 보탬이 될 뿐 아니라 실로 고통에 빠진 백성을 소생시키는 일단의 조처가 될 것입니다.
어렵다.
우리 동방 3백 60주(州) 그 어디인들 부세를 독촉하는 관리가 없는 곳이 있겠습니까만, 그중에 혹 차마 잔인하게 하지 못하는 어진 정사를 베푸는 자가 있어 세금 봉납(捧納)의 기한을 조금 늦추면 어김없이 하등의 실적 평가를 받고 맙니다. 이런 까닭에 오늘날 이른바 성적(聲績)이 있는 수령이란 자들은 당대의 당중우(唐仲友)가 아님이 없습니다. 게다가 상세(常稅) 외에도 전대(前代)에는 없던 환곡(還穀)의 폐단이 있어 고을마다 관리들의 포흠(逋欠)이 곧 크나큰 민폐(民弊)를 이루어, 수납을 독촉하는 연말(年末)이면 매질이 낭자한 실정입니다. 게다가 곡식이 많고 백성이 적은 곳에는 환곡을 나누어 주는 수량이 배로 많은 까닭에 납부할 방도가 더욱 어려운 형편이라, 불가불 한 차례 정리하거나 탕감하여 실제 수량만 남겨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곡총(穀總)이 민호보다 많은 곳에는 그 곡식 수량을 견감하여 백성은 많고 곡식은 적은 고을로 옮겨서 획급(劃給)함으로써 상호 적당하게 나누어 지급하면 거의 백성의 병폐를 구하는 일단의 조처가 될 것입니다.
그러하다.
주자의 이 편지를 읽고서 겸연쩍게 자신을 나무라는 생각이 없다면 이는 신하의 마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책임은 단지 신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무신년 봉사[戊申封事]에, “절의(節義)를 지키다 죽는 선비는 평안한 세상에서는 반드시 능히 작록을 가벼이 보고 능히 시비(是非)를 따져 보지 않고 함부로 남을 따르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벼슬길에 비상(飛翔)하여 세무(世務)를 맡은 자들은 모두 자신과 집안을 보전할 마음만 품고서, 민사(民事)를 말하면 “몇 해 동안 풍년이 들었으니 근심할 것 없다.” 하고, 의리를 논하면 “제방(堤防)을 이미 엄중히 점검하였으니, 염려할 것 없다.” 하는데, 진실로 그 근원을 궁구해 보면 모두 작록을 탐내고 자신을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자신이고 나라는 나라여서, 국가와 행복과 불행을 함께할 뜻을 가진 자가 보이지 않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인재 등용을 신중히 하소서.
역시 그러하다.
일신(一身)의 정신은 유한하고 천하의 일은 무궁하니, 유한한 정신으로 무궁한 일을 다 하자면 비록 성인(聖人)이라 할지라도 능력이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적이 보건대, 성상(聖上)께서는 몸소 서무(庶務)를 처리하심에 부서(簿書)의 일이 역시 성상께 노고를 끼치고, 친히 저술을 하심에 서책의 번다함에 정신을 쏟고 계시는 실정입니다. 대저 기무(機務)는 친히 처리하시지 않을 수 없겠지만 자질구레하고 번다한 업무는 유사(有司)가 처리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저술도 하지 않으실 수는 없겠지만 문장에 박흡(博洽)한 공부는 제왕의 급선무가 아닙니다. 주자의 당시의 말씀을, 원컨대 우리 전하를 위해 외워 드리고자 합니다.
그도 좋은 말이다.
주자(周子)가 이 태극도(太極圖)를 손수 그려 정자(程子)에게 주었으나 정자는 문도(門徒)들에게 이를 말해 준 적이 없고 주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도(圖)에 의거하여 풀이하고 설(說)에 따라 주석(註釋)을 달았습니다. 대저 “본체와 작용이 근원이 하나이고 현저함과 은미함이 사이가 없다.[體用一源 顯微無間]”는 것은 태극(太極)의 고요한 본체요 움직이는 작용인데, 오직 움직임과 고요함에 단서가 없음이 곧 이른바 ‘근원이 하나[一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자(周子)의 도(圖)는 그 이치가 은미한데 주자(朱子)의 설(說)은 그 이치가 현저한 것에 이르러서는, 마치 전후로 서로 같지 않음이 있는 듯한 것은 또 무슨 까닭입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음양(陰陽)의 조화는 하학(下學)의 일이 아니니, 이것이 주자(周子)와 정자(程子)가 이치를 드러내어 밝히지 않은 까닭이고, 주자(朱子)의 시대에는 세상이 더욱 쇠미하고 도(道)가 더욱 강등하였기에 이 태극도가 없어져 버릴까 두려워 주해(註解)를 내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는 대개 공자는 성(性)을 말하지 않았으나 맹자 때에는 반드시 성선(性善)을 일컬었던 것과 같으니, 삼가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잘 보았다.
정통(正統)의 설은 예로부터 이견이 분분하여, 구양수(歐陽脩)는 “정이란 바르지 못함을 바루는 것이고, 통이란 하나가 아님을 합치는 것이다.[正者正不正 統者合不一]”라는 설을 내었고, 혹자는 또 “정하되 통이 아니고 통이되 정하지 않다.[正而不統 統而不正]”는 말을 하였은즉 이는 정(正)과 통(統)을 나누어 두 항목의 설로 만든 것입니다. 주자는 “천하가 통일됨에 제후들이 조근(朝覲)하고 송사(訟事)와 옥사(獄事)가 모두 귀일하면, 바로 정통을 얻은 것이다.” 하여, 위 항목에서 정(正)과 통(統)을 나누어 둘로 만든 뜻과는 매우 같지 않은 점이 있으며, 명(明) 나라 유학자 방효유(方孝孺)의 논(論)에서는, 진(晉), 송(宋), 제(齊), 양(梁)은 나라를 취하기를 바름[正]으로써 하지 않았고 진(秦)과 수(隋)는 나라를 지키기를 인의(仁義)로써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정(正)이 될 수 없는 증거로 삼았으니, 이는 ‘통이되 정하지 않다[統而不正]’는 설과 매우 비슷합니다. 이러한 전후 여러 학자들의 설을 만약 주자에게 질정한다면, 주자가 혹 그 사이에서 취택(取擇)하고 허여함이 있겠습니까?
물러나 다시 궁구(窮究)하라.
주자의 전후의 소장과 주차(奏箚)는 성의(誠意)를 힘써 쌓은 가운데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는데도 오히려 자세히 살펴본 다음 시행하라고 지성스레 우러러 간청하였으니, 그 뜻이 더욱 절실하다 하겠습니다. 신 등의 오늘날 문서로 진달한 글은 비록 소차(疏箚)의 체제와는 다르지만 도리어 실사(實事)의 쓰임이 되는데, 우리 성상(聖上)께서 조목조목 친히 열람하시고 혹 명쾌히 깨우쳐 주시기까지 하시니, 이는 이미 세상에 드문 은택이라 하겠습니다. 진언(進言)이 채택할 만하면 채택하고 진언이 채택할 만하지 않으면 버린다면, 취사(取捨)의 사이에 공교함과 졸렬함이 절로 구분될 것입니다. 우선 찌에 적어 고찰하는 법[考栍法]을 버리고 의당 실용의 이익에 치중함으로써 명실(名實)이 상부하는 도로 삼으소서.
찌에 적지 않으면 어떻게 우열을 알 수 있겠는가.
송(宋) 나라의 대제(待制)는 곧 우리나라의 관직(館職)이니, 논사(論思)의 자리에 그 책임의 중함이 분명코 이와 같습니다. 근래 옥서(玉署)에 직분에 걸맞은 사람이 없어 패초(牌招)를 청하여 직려(直廬)에 나아감에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남들을 따라 빈대(賓對)에 참여하여 그저 침묵만 지키는 것이 관습이 되었으니, 경연관(經筵官)을 신중히 선임한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정녕코 오늘부터 입직(入直)할 때는 독서를 일과로 하고 출직(出直)할 때는 고사(故事)를 진달케 한다면 아마도 명칭에 따라 실질을 독책하는 조처의 일단이 될 것입니다.
너희들 중에도 옥서(玉署)에 출입하는 자가 있다.
풍년이 비록 백성들의 다행이긴 하지만 그 실정을 돌아보면 도리어 흉년만 못합니다. 근년의 일로 보면, 몇 해 동안의 흉년에 조정의 백성을 구휼하는 조처가 매양 상례(常例)를 훨씬 벗어난 은혜로운 것이었기에 백성들로 하여금 굶주림을 잊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올해에는 농사가 풍년이 들어 공적인 세금과 사적인 부채를 장차 일시에 아울러 독촉하게 될 터인데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민사(民事)를 풍년에다 부쳐 버리고 다시 근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풍년의 백성이 더욱 가련하다.” 하는 것이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더욱 진념(軫念)하소서.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마음을 졸여, 풍년의 백성 걱정이 흉년과 다름없는 까닭이다.
임금 된 이가 허물이 없을 때 간언(諫言)을 구해야 하니, 그러한 뒤에야 절로 허물이 있는 데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임금의 직분에 궐실(闕失)이 없다는 이유로 간언이 절로 드물어졌다고 생각한다면 종국(終局)에는 반드시 거만한 자세로 사람을 오지 못하게 막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성덕(聖德)에 허물이 없음은 참으로 송 태조(宋太祖)가 한 말과 같고 인재를 포용하는 도량은 당 태종에 비할 바가 아니니, 그렇다면 의당 과감히 직언하는 선비가 더욱 면려하시라는 경계를 바쳐야 할 터이거늘 어찌하여 백간(白簡)의 풍간(風諫)과 단의(丹扆)의 잠언(箴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까. 송(宋) 나라 제도에, 간관(諫官)이 대각(臺閣)에 들어가 진언하지 않으면 대각을 욕되게 한 데 대한 법률이 적용되었습니다. 오늘날 언관(言官)은 진실로 이러한 법률을 적용하기에 합당하지만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성상(聖上)께서 간언을 구함이 정성스럽지 못하셨기 때문이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더욱더 면려하소서.
간언을 구함이 정성스럽지 못함은 내가 마땅히 더욱 면려해야 할 바이거니와, 대각을 욕되게 한 데 대한 법률 또한 참으로 아름다운 법규이다.
주자의 공거(貢擧)에 관한 논의는 비록 일일이 다 곧바로 실행하기는 어렵지만 그 요점은 ‘과거를 너무 자주 실시하지 않음으로써 공과(工課)의 힘을 넉넉하게 하고, 장옥(場屋)을 해이하게 하지 않음으로써 잡란(雜亂)의 폐단을 금지하며, 강독(講讀) 시험의 규정은 음석(音釋)에 구애되지 말고 문의(文義)에 치중하자’는, 이러한 취지일 뿐입니다. 이 몇 가지 폐단을 고치는 것은 오직 임시(臨時)에 어떻게 바로잡는가에 달려 있으니, 따라서 만약 과장(科場)을 엄히 단속하는 한 조항을 단연코 이번 알성시(謁聖試)부터 거듭 금칙(禁飭)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찌하여 선비들의 습속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단지 과장을 엄히 단속해야 한다고만 말하는가. 엄히 단속한다고 해서 바로잡힐 수 있겠느냐.
독서의 방법은 무엇보다도 차서(次序)에 따라 읽는 것이 중요하니, 그러므로 주자의 가르침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주서(朱書)》 한 부(部)는 역시 하나의 경전(經傳)이니, 신은 삼가 생각건대 응당 《주자대전》을 가지고 경서를 참정(參訂)하여, 《대학》과 《중용》을 강독할 경우엔 《주자대전》의 《대학》과 《중용》을 논한 곳에 나아가 참정하고, 《논어》와 《맹자》를 읽을 경우엔 《주자대전》의 《논어》와 《맹자》를 논한 곳에 나아가 참정하되 다른 경서들에서도 모두 그렇게 하지 않음이 없으면 피차간에 상호 뜻을 발명(發明)하는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자대전》중에도 필시 선후의 차서가 있어, 서독(書牘)에서는 의리(義理)의 근원을 보였고 소차(疏箚)에서는 치평(治平)의 요체를 다하였으며, 성정(性情)의 선함은 시문(詩文)에 나타나고 사물의 변화는 잡저(雜著)에 갖추어져 있으니, 어느 것을 우선해야 엽등(躐等)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감히 이로써 질문을 올립니다.
《주자대전》으로 경서를 참정한다는 것은 너의 말이 옳다. 경서를 차서에 따라 읽어야 한다면 《주서》를 읽음에 있어서도 역시 절로 차서에 따라 읽어야 할 것이다.
주자가 《역경(易經)》에 있어, 오직 상수(象數)와 괘효(卦爻)로써 길흉(吉凶)과 회린(悔吝)에 대해 지성스레 말하여, 오로지 의리의 관점에서 말한 정전(程傳)과 한결같이 다른 것은 어째서입니까? 신은 삼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정자(程子)의 의도는 사람들이 상학(象學)을 의리에 우선할까 염려했던 것이니, 그러기에 오로지 의리의 관점에서 말했던 것입니다. 주자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괘획(卦劃)과 효사(爻辭)의 본뜻을 모두 잃을까 또 염려하였으니, 그러기에 이미 발명(發明)해 놓은 의리(義理)에 관해서는 다시 불필요하게 덧붙이지 않고 강론하지 않은 복서(卜筮)에 대해 훈고(訓詁)를 지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 선생의 입언(立言)은 비록 서로 다르지만 그 의도는 기실 같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삼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자가 본의(本義)를 지음에 반드시 정자가 이미 의리를 발명(發明)해 놓았으니 불필요하게 덧붙여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것은 아니니, 네가 이른바 ‘입언은 비록 서로 다르지만 그 의도는 기실 같다’는 것은 역시 개괄적으로 짐작해서 하는 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주자가 일찍이 육군자화상찬(六君子畫像贊)을 지었는데, 예컨대 주염계(周濂溪)의 광제(光霽)와 정명도(程明道)의 금옥(金玉) 및 저 승준(繩準)의 준엄함과 풍정(風霆)의 호탕함은 저마다 그 기상(氣象)을 따라 말한 것이니, 기상이 군자의 원부(元符)가 됨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장씨(張氏)가 기상을 중시하지 않고 준엄히 배척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신은 일찍이 듣건대, 정자(程子)는 공자의 온량공검양(溫良恭儉讓)을 도덕의 광휘의 기상이라 하였은즉, 기상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은 곧 안에 존양(存養)의 공부가 갖추어졌기 때문입니다. 학자가 만약 혹 오로지 용모 사이에서만 본받을 점을 관찰하고 조존(操存)의 실질을 살피지 않는다면 도리어 가식(假飾)으로 꾸미는 것을 기상인 줄로 잘못 인식하고 말 것이니, 어찌하면 성인의 기상을 잘 관찰할 수 있겠습니까?
가식으로 꾸미는 것과 도덕의 광휘와는 하늘과 땅처럼 현격히 서로 다른 것이니, 만약 혹시라도 잘못 인식한다면 저 학문이란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기에, ‘잘 관찰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세도(世道)가 쇠미한가 융성한가는 문체(文體)가 삿된가 바른가에서 징험할 수 있는데, 무릇 오늘날의 공령문(功令文)이나 소장(疏章), 주차(奏箚) 등은 모두 부려(浮麗)한 투를 그대로 답습하여 전혀 순고(淳古)한 맛이 없으니, 어찌하여 성명(聖明)의 세상에 막연히 치세(治世)의 문풍(文風)이 없는 것입니까. 이런 까닭에 우리 성상(聖上)께서 한 부(部) 《주서》로 세속을 도야(陶冶)하는 도구로 삼으시는 한편 연경(燕京)의 저잣거리를 왕래하는 행인들로 하여금 중국 본(本)을 가져오지 못하게 금하시어, 거의 문풍이 크게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잡서(雜書) 보기를 좋아하는 병폐가 이미 사람들의 고황(膏肓)에 들어가 박혀 있으니, 만약 발본색원(拔本塞源)하지 않는다면 말류(末流)의 폐단이 또 장차 예전 그대로이게 될 것입니다. 무릇 패관류(稗官類)의 책들을 수거하여 불사르라고 속히 명하시어, 의리를 담은 글만 오로지 공부하게 하소서.
좋은 곡식이 잘 자라면 잡초가 그 싹을 해치지 못하고, 대음(大音)이 울리면 정풍(鄭風)과 위풍(衞風)이 감히 귀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마련이다. 너는 우선 머리를 숙이고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를 읽을 것이요, 저 묶어서 시렁에 올려 둔 몇 부(部)의 잡서를 상관하지 말라.
주자가 특별히 밤에 숙직할 때 임금께 권강(勸講)하라고 장남헌(張南軒)에게 말해 준 것은 어찌 부질없이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야기(夜氣)가 청명(淸明)할 때를 틈타 조용히 토론하는 자리에서는 서로의 주고받는 대화가 마치 메아리처럼 잘 호응하여 임금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기가 반드시 쉬울 터이니, 이것이 임금의 마음이 계오(契悟)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언제나 삼여(三餘)로 경서를 돌아가며 독송하기를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았으니, 시시로 학문에 민첩한 공부가 언제고 근면하지 않겠습니까만, 대개 밤이 길 때는 더욱 공부하기에 좋습니다. 또한 우리 원자궁(元子宮)께서 강학(講學)의 공부가 날이 갈수록 진척을 보이고 있으니, 어찌 다시 우러러 권면하길 기다리시겠습니까만, 생각건대 촌음(寸陰)을 아끼는 근면함으로 말하자면 긴 겨울밤이 실로 아까운 시간이니, 의당 요속(僚屬)의 벼슬아치들로 하여금 날마다 돌아가며 입직하여 질문에 우러러 대답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원자궁의 학문에 더욱 유익할 것입니다.
야기(夜氣)가 청명할 때는 가장 감응하기 좋으니, 바로 주연(胄筵)에서 수용하기에 합당하다.
정령(政令)이 공정하지 못하면 명기가 무겁지 않고 명기가 무겁지 않으면 조정이 높지 못하니, 조정이 명기에 있어서는 도리어 중히 여기고 또 아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근래에 격식을 벗어난 상(賞)을 매양 공이 없는 사람에게 주고 갑작스런 승진의 영광이 항상 당사자의 명망과 실질을 훨씬 벗어나며, 게다가 잡다한 갈래의 관직들이 조정의 반열에 두루 찼으니, 명기(名器)를 함부로 사용함이 끝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기강이 따라서 퇴폐(頹廢)하였으니, 전하께서 진실로 조정을 높이고 기강을 세우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정령(政令)이 공정한가에 진념(軫念)하여 명기를 신중히 아끼는 뜻을 지키소서.
옳다.
소 강절은 세상을 덮는 영매(英邁)한 자품과 내성외왕(內聖外王)의 학문으로 이미 창주정사에 배향되었는데, 유독 《연원록(淵源錄)》에 끼이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주자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은미한 의도가 있는 것입니까?
소 강절의 내성외왕의 학문에 대해서는 정자 때부터 이미 약간의 이의(異意)가 있었으며, 그 연원(淵源)을 따진다면 역시 절로 분계가 있다.
진준경(陳俊卿)이 평소 조정에 서서 항언(抗言)한 절개는 진실로 기록할 만한 것이 많은데 굳이 뇌물을 받은 관리를 논핵(論劾)한 내용을 덕(德)을 형용하는 행장의 첫머리에 게재한 것은, 주자의 의도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국가는 본디 뇌물을 받은 관리에 대한 형률(刑律)을 엄중히 함으로써 청렴결백한 기풍을 권면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근래 세속이 점차 경박해지면서 모두 다 잇속만을 추구하는 실정이니, 백성의 고혈을 짜서 집을 높이고 전답을 넓히는 자들은 그 이름은 비록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사람들이 반드시 지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단지 인후(仁厚)한 풍속이 없어진 지 오래되고 팽아(烹阿)의 법으로 징계할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뇌물을 먹은 자를 처벌하는 법을 거듭 밝히는 것은 그만두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유태좌(柳台佐)도 이러한 말을 하였다. 그러나 참으로 크게 청렴하고 크게 탐학한 자가 있다는 말이 들리지 않으니, 선(善)을 표창하고 악(惡)을 징계하는 법을 장차 어디에 시행하겠는가. 이러하구나, 우맹(優孟)의 노래여.
[주D-002]돈미(遯尾)의 상(象) : 《주역(周易)》 돈괘(遯卦) 초육(初六)에, “초육은 도망함에 꼬리라, 위태하니 가는 바를 두지 말아야 한다.” 한 것을 이른다.
[주D-003]백리해(百里奚)는 …… 지혜로웠고 : 백리해는 본래 우(虞) 나라 사람이었는데 진(晉) 나라가 괵(虢)을 치러 간다고 하면서 우 나라에 길을 빌려 달라고 하자, 우공(虞公)이 간(諫)해도 안 될 인물인 줄 알고 진(秦) 나라로 떠나가서 재상이 되어 그 임금을 천하에 드러나게 하였다 한다. 《孟子 萬章上》
[주D-004]봉덕이(封德彝)는 …… 충성스러웠으니 : 봉덕이는 본래 수(隋) 나라의 신하였으나 수 나라가 망하자 당 태종(唐太宗)을 섬겼던 인물이다.
[주D-005]강절(康節)의 염려 : 소 강절(邵康節)이 천거를 받고 가우(嘉祐) 연간에 장작감 주부(將作監主簿) 벼슬을 받았다가 결국 취임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마음에 내키지 않은 벼슬을 받은 것은 벼슬을 받지 않으면 명성이 더욱 높아지고 관작이 더욱 이어질 것을 염려해서라 한다. 《朱子大全 卷25》
[주D-006]전날 …… 옳다 : 진진(陳臻)이 맹자에게 묻기를, “예전에 제(齊) 나라에서는 왕이 좋은 금 1백 일(鎰)을 주자 받지 않으시고, 송(宋) 나라에서는 70일을 주자 받으시고, 설(薛) 나라에서는 50일을 주자 받으셨으니, 예전에 받지 않은 것이 옳다면 오늘날 받은 것이 옳지 않고 오늘날 받은 것이 옳다면 예전에 받은 것은 옳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맹자가 이르기를, “송 나라에 있을 때는 내가 장차 먼 길을 떠나야 할 처지였다. 길 떠나는 자에게는 반드시 노자를 주는 법이니, ‘노자를 준다.’ 하고서 주었으니, 내 어찌 받지 않으리오. 설 나라에 있을 때는 나를 해치려는 자들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경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병비(兵備)를 위해 준다.’ 하고서 주었으니, 내 어찌 받지 않으리요. 제 나라에서는 아무런 해당 사항이 없었으니, 아무런 해당 사항이 없이 준다면 이는 뇌물이다. 어찌 군자로서 재물에 농락되는 자가 있겠는가.” 하였다. 《孟子 公孫丑下》
[주D-007]칠월편(七月篇)과 권아편(卷阿篇) : 칠월편은 주공(周公)이 농사의 어려움을 모르는 성왕(成王)을 경계하기 위해서 지은 시이고, 권아편은 소강공(召康公)이 어진 인재를 등용하도록 성왕(成王)을 경계한 시이다.
[주D-008]좌우(座右)의 …… 첩(帖) : 임금이 늘 곁에 두고 반성할 내용의 글을 뜻한다.
[주D-009]여 성공(呂成公) : 주자의 벗인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을 말한다. 주자가 맏아들 숙(塾)을 여조겸에게 맡겨 공부하게 하였다.
[주D-010]이천석(二千石) : 한(漢) 나라 때 군수(郡守)의 녹봉이 이천 석이었던 데서 생긴 말로, 일반적으로 군수를 지칭한다.
[주D-011]전경(專經)과 초계(抄啓) : 전경은 조선 시대 임금이 문무(文武) 당하관(堂下官)에게 매년 사맹삭(四孟朔)마다 오로지 경서(經書)만을 강(講)하게 하던 시험이다. 초계는 조선조 정조(正祖) 때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37세 이하의 당하 문신(堂下文臣)을 뽑아서 규장각(奎章閣)에 소속시켜 공부하게 하는 한편 매달 강경(講經)과 제술(製述)로 시험 보이던 일을 가리키는데, 여기에 소속된 신하를 초계문신(抄啓文臣)이라 한다.
[주D-012]의(義) : 의리에 근거하여 문제를 풀어 가는 문체(文體)의 일종이다.
[주D-013]《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 : 당(唐) 나라 충신 육지(陸贄)의 상소를 모아 만든 책으로, 이 책을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 하였다.
[주D-014]너는 …… 아낀다 : 자공(子貢)이 초하룻날 사당(祠堂)에 고유(告由)하면서 바치던 희생 양을 폐지하고자 하자 공자가 한 말로, 명칭이나 형식이라도 남아 있으면 훗날 그 실상을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論語 八佾》
[주D-015]통의(通擬) : 관원을 뽑을 때 물망에 오른 사람의 명단을 한곳에 모아 놓고 뽑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의논하여 적임자를 뽑는 일을 말한다.
[주D-016]배의(排擬) : 벼슬아치의 후보를 뽑기 위해 그 명단을 차례로 적어 놓고 의논하는 일을 말한다.
[주D-017]정견(丁絹) : 장정의 수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여 명주로 납부하게 하던 제도이다.
[주D-018]육군자화상찬(六君子畫像贊) : 원래 명칭은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畫像贊)으로, 북송(北宋)의 여섯 거유(巨儒)인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 명도(明道) 정호(程顥), 이천(伊川) 정이(程頤), 강절(康節) 소옹(邵雍), 횡거(橫渠) 장재(張載), 속수(涑水) 사마광(司馬光)의 화상에 찬(贊)을 붙인 것이다.
[주D-019]주염계(周濂溪)의 광제(光霽) : 주염계의 씻은 듯이 깨끗한 인품을 묘사한 말로, 황정견(黃庭堅)이 “주무숙(周茂叔)은 가슴속이 쇄락(灑落)하여 마치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0]정명도(程明道)의 금옥(金玉) : 정명도의 인품을 묘사한 말로, 그 아우 정이천이 지은 명도선생행장(明道先生行狀)에, “순수하기는 정제된 금과 같고 온윤(溫潤)하기는 좋은 옥과 같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21]승준(繩準)의 준엄함 : 이천 선생(伊川先生) 화상찬에 “규는 둥글고 구는 방정하니 승은 곧고 준은 고르다.[規圓矩方 繩直準平]” 한 대목에서 온 말로 근엄하여 법도에 맞는 정이의 인품을 묘사하고 있다.
[주D-022]풍정(風霆)의 호탕함 : 속수 선생(涑水先生) 화상찬에 “바람을 타고 우레를 채찍질하니, 가없는 세계를 두루 보도다.[駕風鞭霆 歷覽無際]” 한 대목에서 온 말로, 천품이 탁월한 소옹의 풍모를 묘사하고 있다.
[주D-023]온량공검양(溫良恭儉讓) : 자공(子貢)이 공자의 인품을 묘사한 말로, 온화하고 평이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함을 이른다. 《論語 學而》
[주D-024]삼여(三餘) : 독서하기 좋은 여가를 이르는 말로, 겨울은 한 해의 여가이고 밤은 하루의 여가이고, 장마철은 시절의 여가라는 것이다.
[주D-025]팽아(烹阿)의 법 : 춘추 시대 제(齊) 나라 위왕(威王)이 자기 측근에게 뇌물을 써서 좋은 평판을 하게 하고 전야(田野)를 개간하지 않고 백성을 보살피지 않은 아대부(阿大夫) 및 아대부를 칭찬했던 측근들을 삶아 죽인 고사를 두고 한 말이다. 《通鑑節要 卷1》
[주D-026]우맹(優孟)의 노래 : 남의 언행을 잘 모방함을 이르는 말이다. 전국(戰國) 시대 초(楚) 나라의 재상 손숙오(孫叔敖)가 죽고 그 아들이 생계를 꾸리지 못하자 우맹이 손숙오의 옷을 걸치고 그의 동작을 모방하여 초왕(楚王)의 앞에서 노래하자 드디어 그 아들을 불러들였다 한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자료 :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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