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선생전서 제32권

어록(語錄) 하(下)

 

선생이 하신 말씀이 여러 사람들의 글에 흩어져 있는 것을 수집하여 이 편을 만들었다. ○ 김우옹(金宇顒)의 《경연강의(經筵講義)》에 선생이 상(上)에게 아뢴 말이 많이 실려 있다. 비록 이른바 말이 지나치게 통쾌하고 강력했으며 건의나 조처를 함에 성급하였다는 등의 말로 선생을 흠잡은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 문제자(門弟子)들이 미처 몰랐던 선생의 치택(治澤)의 뜻과 충간(忠諫)의 정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정씨외서(程氏外書)》에 공문중(孔文仲)의 상소를 실은 예에 의거하여 그 몇 가지 조항을 채택하여 끝에 부록으로 붙였다.


10년 전에 율곡이 나를 찾아왔다가 계려(溪廬)에서 잤다. 때마침 중추(仲秋)라서 창밖에 귀뚜라미 소리가 요란하였는데, 열 마리인지 백 마리인지 무리 지어 다투어 울고 서로 노래하여 잠시도 쉬지 않았다. 새벽종이 칠 때가 되니 그 소리가 더욱 요란하여 제 낙을 제가 즐겨 수고와 고생을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내가 탄식하기를, “미물도 오히려 제 직분 다하기를 이렇게까지 한다.” 하니, 율곡도 탄식하기를, “지각이 많은 자는 이해에 대해 생각을 깊이 하여 이익을 택하고 편안함을 취하여 게으르게 그날 그날을 보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고난 천성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저 천기(天機)가 자연히 움직여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도 타고난 직분을 다하는 것을 미물에서 보았다.”고 하였다. 내가 그 탁월한 소견을 기뻐하여 잊은 적이 없다. -《우계집(牛溪集)》에서 나왔다.-
숙헌(叔獻 율곡의 자)이 이르기를, “선유(先儒)가 《춘추(春秋)》에 기린을 얻은 것은, 지(志)가 한결같아 기(氣)를 움직인 것이요, 또 질병이 오는 데는 성현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병이 나서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 것은 기가 지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설명이 잘된 것 같다. 대저 지를 움직이고 기를 움직이는 것은 모두 선과 악을 겸해 말해야 되는 것이다. 맹자의 말은 평범한 사례를 범범하게 말한 것뿐이니, 어찌 병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것인가.” 하였다.
숙헌이 평일에 내게 말하기를, “여식(汝式)이 몸소 실천하고 힘써 행하는 것을 위주로 하지만 소견은 장점이 아니다. 그러나 일을 논하기를 좋아하고 일을 보는 눈이 소루함을 생각하지 않으니 이래서 염려된다.”고 하였다.
이경진(李景震)이, 색욕(色慾)이 자주 발동하여 억제하기 어려우니, 어떻게 하면 이 생각을 없앨 수 있겠는가 물으니, 율곡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별다른 공부가 없다. 다만 마음이 일정한 주견이 있어서 글을 읽으면 이치를 연구하는 데에 전심하고, 일에 당하면 실천하는 데에 전심하며, 일이 없을 때에는 고요한 가운데에 수양을 쌓아 항상 이 마음으로 잊을 때가 없게 한다면, 색념(色念)이 자연 발동하지 못하게 되며 발동하더라도 반드시 살펴 깨닫게 될 것이니, 살펴 깨닫는다면 색념은 자연 물러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마음을 놓아 소홀히 하고서 색념과 싸우려 한다면 힘을 많이 들이더라도 흙으로 풀을 덮는 것 같아서 덮을수록 더 나오게 될 것이다.” 하였다. -우계일기(牛溪日記) 이하 같다.-
숙헌이 말하기를, 조형(趙兄) 대남(大男)이 착한 종을 얻기 어려움을 탄식하자 토정(土亭)이 말하기를, “착한 선비도 쉽게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종들이야 말할 것 있는가. 착한 종을 얻는 집은 만에 하나나 있을 수 있는 다행일 것이다. 반드시 착한 종을 구하려고 한다면 마음만 수고롭고 소용이 없을 것이다. 착하게 부리는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지 착한 종을 구해서는 안 된다. 종이 착한 주인의 종이 되게 할 것이니, 어찌 반드시 착한 종의 주인이 되려고 할 것인가.” 하였다. 이 말이 매우 좋으니 자신을 책망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의사가 있다.
율곡이 우계 선생에게 묻기를, “국상(國喪)의 졸곡(卒哭) 전에 초하루 보름 참배하는 것은 제례(祭禮)가 아니니, 평상시대로 행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평상시대로 찬을 갖추는 것도 미안할 것 같으니, 대략 술과 과실을 갖추고 참알(參謁)을 행할 따름이니, 내 소견은 이렇소.” 하였다. -우계언행록(牛溪言行錄)에서 나왔다.-
기사년(1569, 선조2) 7월 28일 석강(夕講)에 《근사록(近思錄)》을 강(講)하였다. 이이(李珥)가 “경전을 해석하는 것이 같지 않아도 해가 없다.”는 것을 가지고 말하기를, “대개 국사를 의논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제 조강(朝講)에서 말한 청대(請對)를 해야 할 것인가 하지 않아야 할 것인가 하는 말도 모두 이와 같습니다. 다만 임금을 요순에 이르게 하고, 세상을 당우(唐虞) 삼대(三代)로 만들려 한다는 것이 정론(正論)이고 옛날의 높은 정치를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사설(邪說)입니다.”고 하였다.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의 일록(日錄)에서 나왔다. 이하 같다.-
갑술년(1574) 1월 21일, 비현합(丕顯閤)에서 신하를 인견(引見)하였다. 희춘(希春)이, 변언(辯言)이 옛 정사를 어지럽게 하였다는 대목을 강론하면서 상앙(商鞅)ㆍ장탕(張湯)ㆍ조우(趙禹)ㆍ채경(蔡京) 등의 사실을 들어가며 설명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왕안석(王安石)은 옳은 것 같으면서도 그른 말로 신종(神宗)을 현혹시켜 법을 변경하여 천하를 어지럽혔으니, 이것이 이른바 변언으로 정사를 어지럽힌 것입니다. 기타 소인의 말이야 어찌 변언으로 정사를 어지럽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희춘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변언으로 정사를 어지럽힌다는 것은 부정한 사람이 임금의 나쁜 짓에 대해서 아첨하여 예전의 법을 변란하는 것을 범범하게 말한 것이지 반드시 왕안석 같은 사람만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2월 1일, 주강이 있었다. 이어 역대 제왕의 사적을 논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호치당(胡致堂)이 당(唐)나라 태종(太宗)을 조조(曹操)에 비견하였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희춘도, “조조의 성질은 음흉하고 험악하여 어질고 유능한 이를 시기하였으니, 결코 태종처럼 어진 이에게 맡기고, 유능한 사람을 써서 정관(貞觀)의 정치를 이룰 수 없다.” 하였는데, 주상께서 이르기를, “나는 호씨의 의논이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태종이 형제를 죽이고 그 자손까지 멸족하며 제수를 아내로 삼아 천륜을 어지럽힌 것을 보고는 그만 통분하여 책을 덮고 차마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신 등이 말하기를, “태종이 저지른 인륜상의 잘못은 참으로 성상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구양수(歐陽脩)가 태종을 찬양하여, ‘수(隋)나라의 어지러움을 제거한 것은 그 행적이 탕(湯)ㆍ무(武)에 비견되며, 정치의 아름다움을 이룩한 것은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에 가깝다. 한(漢)나라 이래로 공과 덕이 함께 높은 것이 태종 이전에 일찍이 없었다.’ 하였는데, 주자(朱子)는, ‘이 두 가지는 모두 공이지 덕이 아니다. 이것은 구양공 무리들이 근본이 되는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대개 태종은 재주가 많았지만 덕이 부족하였고 공은 있었지만 덕이 없는 사람이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신이 또 말하기를, “한 문제(漢文帝)와 금 세종(金世宗)이 가장 어집니다.” 하니, 주상께서 이르기를, “삼대(三代) 이하로는 한 문제 같은 이가 없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금 세종은 어질고 조용하며 절약하고 검소하면서 어진 이를 좋아하고 간하는 말을 받아들였으니 어찌 문제보다 못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이이가 말하기를, “금 세종이 어질기는 하지만, 항상 자제들에게 여진(女眞)의 옛 풍속을 고치지 말라고 주의시켰으니 이것은 그 뜻이 원대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태종에게서 취할 것이 없다 하셨으니 그렇다면 한 문제에게서도 본받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삼대의 성왕(聖王)으로 본보기를 삼아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강론을 마친 다음 이이가 말하기를, “먼저, 백성을 구제하고 폐단을 개혁하는 정치를 시행한 후에 향약(鄕約)을 시행하소서.” 하니, 주상께서 이르기를, “나는 애초 어렵다고 생각하니 대신들에게 물어보아야 하겠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백성들의 시급한 폐단을 구제하려면 옛 법을 경장(更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개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공통된 걱정거리입니다. 더구나 공안(貢案)은 폐왕조(廢王朝 연산군(燕山君))에 제정된 것이니 홍치(弘治) 신유년(1501, 연산군7)에 법도를 지키지 않고 포학하게 취하던 임금이 한 짓이라 참으로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옛 법규를 그대로 지키고 경장하려 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좋은 정치를 할 희망이 없습니다.” 하니, 주상이 이르기를, “사람은 자신을 알지는 못한다. 그대가 나를 보건대 좋은 정치를 할 것 같은가 그렇지 않는가.” 하니, 이이가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영명(英明)하시니 어찌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희춘이 나아가서 말하기를, “전하께서 청명하고 바르시니 참으로 일을 크게 하실 수 있는 자질입니다. 다만 성질이 고집스러워 탁 트이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김희원(金希元)이 묻기를, “도심(道心)은 은미하다는 데에 대하여 주자가 말하기를, ‘미묘하여 보기 어려운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니, 율곡이 이르기를, “오직 이(理)는 소리나 냄새가 있다고 말할 수 없어 은미하여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은미하다고 한 것이다. 비유하여 말하면, 여기 먼 산이 있는데, 원래는 은미하여 보기 어렵다. 그런데 눈이 어두운 사람이 보면 은미한 것이 더욱 은미하지만, 눈이 밝은 이가 보면 은미한 것이 뚜렷해지는 것과 같다.” 하였다. -구봉간첩(龜峰簡帖)에서 나왔다. 이하 같다.-
김희원이 또 묻기를, “‘도심과 인심 두 가지가 한마음 가운데에 섞여 있다.’ 하였는데,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혹은 형기(形氣)로 인하여 발생할 때가 있으며 혹은 성명(性命)으로 인하여 발생할 때가 있는데 어느 것이나 발생하는 것은 모두 마음속에서 나오기 때문에 섞인다고 하는가 봅니다.” 하니, 율곡이 이르기를, “인심이나 도심은 모두 활용하는 것을 가리켜 하는 말인데, 위의 말대로 한다면 아직 발생하기 전의 경지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된다. 두 가지의 발생하는 것이 모두 한 가지 일에 있으니, 인심에서 발생하여 도심이 되는 경우도 있으며 도심에서 발생하여 인심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였다.
상중의 묘제(墓祭)에 대해, 여성(礪城)과 숙헌은 “한 잔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성 적성(成積城)과 김 이정(金而精)은, “시속을 따라 석 잔을 드리는 것이 정리에 흡족할 것 같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묘제는 새로 상사를 당한 동안의 일을 말하는 것 같다. ○ 송강 정철(鄭澈)의 일기에서 나왔다. 이하 같다.-
적성(積城)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삭망(朔望) 참례(參禮)에 대하여 상사를 만났을 경우를 두고서 숙헌과 의논하여 결정하였는데, 신주를 내어 모시고 먼저 참신(參神)하고서 술을 부어 놓고 재배하며 사신(辭神)하고 재배하여, 사당에서의 참례와 다르게 하였다.” 하였다. 숙헌이 말하기를, “내 어버이가 당상에 있는데 어찌 참례하지 않고 먼저 강신(降神)을 하겠는가.” 하였다.
적성의 서신에, “손위 누님이 와서 궤연(几筵)에 인사를 드렸는데, 신혼(晨昏)에 곡배(哭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상제(祥祭) 때에는 주부(主婦)가 없다면 한 분 만으로 배제(陪祭)하는 것은 미안한 것 같다.”고 하였는데, 숙헌의 말도 그러하였다.
연제(練祭) 후의 심의(深衣)와 띠에 대해, 숙헌이 말하기를, “역시 대략 강등(降等)이 있어야 할 것이요 옛날 것을 그대로 입을 수는 없다.” 하였다.
적성이 여러 가지 말을 하는 중에 또 이 정랑(李正郞) 숙헌이 송사련(宋祀連 송익필(宋翼弼) 아버지)을 회장(會葬)한 것이 온당치 않다는 의견으로 말하였다. 일찍이 숙헌에게 묻기를, “송가 집의 신주를 쓴 사람이 누구냐.”고 하니,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상인들이 초토(草土)에서 호읍(號泣)하는 중에 부탁을 매우 간절히 하였기 때문에 내가 매우 난처하여 부득이 썼다.” 하였다.
이 정랑 숙헌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방심(放心)을 거둬들이는 것으로는 《소학(小學)》만 한 책이 없다. 《심경(心經)》같은 책들도 수신에 절실한 점은 있지만 《소학》처럼 구비하지는 못하였다. 글을 읽는 데는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만일 기억하여 외우는 데에 유의한다면 오래지 않아서 싫어지고 또 의미가 없어질 것이니, 잘 생각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연구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송군(宋君)이 이른바 궤연(几筵)에 참신(參神)이 없다는 말이 옳은 것 같다. 또 연제 후에는 이미 공최(功衰)를 한다 하였으니 다시 참최(斬衰) 제도를 쓰는 것은 부당한 것 같고, 삼띠에 베를 사용한다[絞帶用布]는 말도 불가한 것 같다. 포혜[脯醢] 3품이라 한 것은 포혜 중의 세 가지라는 뜻이지 포 세 가지, 혜 세 가지로 모두 여섯 가지를 말한 것은 아니다.” 하였다. 갑자기, 자강(子强)이 논박을 입게 될 일을 말하다가 매우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럭저럭 이렇게 날만 보내고 있으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만약 어진 사람이 대신이 된다면 화패(禍敗)가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였다.
연제 후에 상식(上食)에 곡하는 일에 대하여, 송운장(宋雲長 송익필(宋翼弼))의 형제가 “만일 상식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이미 시속을 따라 상식을 드린다면 역시 곡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하자 성(成)ㆍ이(李) 두 친구도 모두 그렇다고 하였다.
청주 목사(淸州牧使) 숙헌(叔獻)이 파평(坡平)에서 와서, 근래의 일들을 물으므로, 사실대로 대답하니, 놀라는 모습으로 한참 있다가 강남(江南)으로 떠나면서 “담제사는 서자(庶子)가 있으니 거행할 수 있다.” 하였다.
숙헌이 두 번째 지나면서 백립(白粒) 서 말을 두고 갔다. 군수가 자신이 가져오기가 어려워 숙헌을 통하여 전달하려 한 것이었다. 물리치고 서과(西苽 수박)만을 두었더니 숙헌이 후에 서신 중에서, “군수가 보낸 것을 일체 받지 않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 하였다.
진일(辰日) 제사에 대하여 의논이 같지 않아서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와 이암(頤菴 송인(宋寅)) 같은 이들은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다. 후에 와서 이숙헌에게 의논하니 이숙헌이, “삭망에도 두루 전을 드리는데, 이것 또한 무엇이 도리에 해롭겠느냐.”고 하였기 때문에 여러 신위에 편전(遍奠)을 드렸다. 지금 호원(浩源)의 말을 들으니, “예법(禮法)을 따를 수 없다면 차라리 중국 별제(別祭)의 제도를 따르는 것이 낫겠다.” 하였다.
협제(祫祭) 드리기 전에 삭망에 두루 전(奠)을 드리는 데에 대해 숙헌이 말하기를, “만일 아직 협제를 드리지 않았다고 하여 미안히 여긴다면 다 폐지하는 것만 못하고 처음 상례(祥禮) 후에 삭제(朔祭)를 거행했다면 협제 전이라 하더라도 두루 전을 드리는 것이 무방할 것 같다. 다른 곳에서 별제를 드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하였다.
허봉(許篈)이 율곡을 논죄하여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그의 뜻이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하였다. 그 후에 이발(李潑)이 심의겸(沈義謙)의 당파에 누락되었다고 하여 이이ㆍ성혼(成渾)을 더 넣어서 왕께 아뢰었다. 평시에 율곡이 구봉(龜峰)에게 이르기를, “지금 내가 죄를 입으면 저 무리들이 공신이 되고자 할 것이다.” 하였는데, 구봉이, “어떻게 알았소.”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그 형적(形跡)이 벌써 나타났다. 반드시 이준경(李浚慶)으로 원두(原頭)를 삼으려 하는 모양인데, 그 의논하는 말에서 기축(機軸)이 환히 드러났으니 속일 수 없다.” 하였다. -송강유사(松江遺事)에서 나왔다.-
정송강(鄭松江)이 말하기를, “구용(九容)은 이(理)요 기(氣)가 아니다.” 하니, 율곡이, “구용은 이가 아니다. 발동하는 것이니 바로 기이다.” 하여 변론이 한참 계속되었으나 결론을 보지 못하였다. 율곡과 송강의 설이 각각 주견이 있다고 생각하니 융통성 있게 보아야 한다. -《소학(小學)》 글귀에 대한 것이다. ○ 문인(門人)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경서변의(經書辨疑)》에서 나왔다. 이하 같다.-
습관이 천성과 함께 이루어지면 성현이 된다 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습관이 성품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은 오래도록 쌓인 습관이 성공하면 천성에서 나오는 것 같은 것이다. 이른바 소년 시절의 습성이 천성처럼 되어 습관이 자연처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성(天性)은 당초에 타고난 기질(氣質)의 성품을 말함이요, 본연(本然)의 착한 성품을 말함이 아니다.” 하였는데, 송구봉이 말하기를, “습관이 성품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성(性)은 바로 본연의 성품이다.” 하고, 주자가 “횡거(橫渠)가 말한 예를 알면 성품을 이룬다.”는 것을 논하기를, “습관이 성품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뜻과 같은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性)이라는 것은 내가 하늘에서 얻은 도의이니,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함께 따라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율곡이 답하기를, “그 글이 나온 곳을 찾아보아야 한다. 이천(伊川)의 이 말은 실은 이윤(伊尹)의 이른바 ‘이 불의(不義)는 습관이 천성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글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도 본연의 성품이라고 할 것인가.” 하였다.
‘함양(涵養)하는 것이 심생(甚生)한 기질을 이룬다.’는 것에 대해 집설(集說)에서는 “함양이 이루어지면 좋은 기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고, 《근사록(近思錄)》의 섭씨(葉氏)의 주석에서는, “심생은 비상(非常)이라는 말과 같다.” 하였는데, 율곡은 섭씨의 설명이 옳다고 하였다.
율곡이 말하기를, “《대학집주(大學集註)》의 이른바 ‘지(志)가 정향(定向)이 있다.’는 것은, 시비(是非)를 명백히 하여 선을 향하고 악을 등진다는 뜻이다. ‘정(靜)은 마음이 망녕되이 움직이지 않음을 말함이다.’는 것은 옳고 그름이 이미 정해져서 다른 갈림길에 동요되지 않고 마음이 항상 안정된다는 뜻이다. ‘안(安)은 어느 곳에서나 편안함이다.’는 것은 나의 저울을 바르게 하여 사물을 응접하므로 어느 때나 어느 곳이나 태연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여(慮)는 일을 처리하는 데에 정밀하고 자세하다.’는 것은 사물이 닥쳐올 때에 다시 그 기미를 연구하여 살펴 처리한다는 뜻이요 ‘득(得)은 그 그칠 바를 아는 것’은 실행하는 데에 있어서 지극한 선(善)에 그친다는 뜻이다.” 하였다. -《대학(大學)》-
일찍이 율곡 선생에게 묻기를, “물격(物格)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가 극처(極處)에 이르는 것입니까. 나의 지식이 극처에 이르는 것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사물의 이치가 극처에 이르는 것이다. 만일 나의 지식이 극처에 이르는 것이라면 이것은 지식이 이르는 것이지 사물의 이치가 이르는 것이 아니다. 물격과 지지(知至)는 다만 한 가지의 일인데 사물의 이치로 말한다면 물격이라 하고 내 마음으로 말한다면 지지라 하는 것이니, 실은 두 가지 일이 아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사물의 이치는 원래 극처에 있는 것인데, 어찌 반드시 사람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한 후에야 극처에 이르는 것입니까.” 하니, 말하기를, “이 물음은 당연하다. 비유하자면, 어두운 방 안에서 책은 시렁 위에 있고 옷은 횃대 위에 있으며 상자는 벽 아래 있는데 어둠 때문에 물건을 볼 수 없으면 책이나 옷, 상자가 어느 곳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 비추어 보면 책ㆍ옷ㆍ상자가 각기 그곳에 있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런 후에야 책은 시렁에 있고 옷은 횃대에 있으며 상자는 벽 아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치는 원래 극처에 있으니 격물을 기다려야만 극처에 이르는 것이 아니며, 이치가 스스로 이해되어 극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지식이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함이 있기 때문에 이치가 이르고 이르지 않음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격물의 격은 궁리한다는 의미가 많고, 물격의 격은 이른다는 의미가 많다.” 하였다.
수신(修身) 이상은 명덕을 밝히는 일이요, 제가(齊家) 이하는 신민(新民)하는 일이다. 이것은, 옛날에, ‘명덕을 밝히려고 하면’이라는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그 본절(本節) 중의 문자를 써서 수신이니 제가니 한 것이다. “사물이 격(格)하고 지식이 이른다면 그칠 바를 알게 되고 의성(意誠) 이하는 모두 그칠 바를 얻는 순서이다.”고 한 이 말은 사물이 격한 후에 지식이 이른다는 한 구절을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그 본절 중의 문자를 써서 물격이니 지지니 의성이니 한 것이다. 율곡이 말하기를, “이것은 상하의 두 구절을 서로 통하여 연결한 것이니 반드시 조목을 나누어 해석할 것이 없다.” 하였는데, 구봉(龜峰)의 의사도 그러하였다.
전(傳) 5장 소주(小註)에서, 옥계 노씨(玉溪盧氏)가 말하기를, “표(表)와 추[粗]는 이치의 용(用)이요, 이(裏)와 정(精)은 이치의 체(體)이다.”고 하였는데, 선생이 반박하여 말하기를, “금수와 분양(糞壤)의 이치라면 표가 추[粗]도 되고, 이가 추도 되지만 모든 물건을 표ㆍ리ㆍ정ㆍ추로 체와 용을 나누어 둘로 할 수는 없다.” 하였다.
율곡 선생에게 묻기를,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 무엇이 다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성의라는 것은 참으로 선을 행하고 실지로 악을 제거함을 이름이요, 정심이라는 것은 마음이 치우치거나 기대하거나 정체(停滯)하는 일이 없으며, 또 부질없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함이다. 그중에서도 정심이 제일 어려우니, 사마온공(司馬溫公)과 같은 이도 성의는 하였지만 언제나 생각은 흔들렸으니 이것은 정심이 되지 못한 까닭이다. 비록 그렇지만 참으로 성의를 한다면 정심과의 거리가 멀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참으로 성의를 한다는 것은 격물치지를 하여 이치가 밝고 마음이 열려서 그 뜻을 진실하게 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온공은 치지 공부가 정밀하지 못하여 참다운 성의의 경계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일찍이 《화담행록(花潭行錄)》을 보니, 제자가 ‘선생의 공부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습니까?’ 하고 물으니 화담이 말하기를, ‘성의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화담이 참다운 성의의 경지에 이르렀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스스로 ‘지식이 십분 극진한 곳에 이르렀다.’ 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참으로 알지 못한 것이다. 만일 참으로 알았다면 도리가 무궁한 것인데 어찌 자신의 지식이 십분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자처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알지 못하면 참다운 성의에 이르기가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욕(欲)이 동하고 정(情)이 이겨 그 용(用)의 행함이 혹 바름을 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제 생각으로는, 용이 동하고 정이 이기면 그 행함이 바름을 잃을 것이 분명한데 주(註)에 혹(或)이라는 글자를 쓴 뜻을 알 수 없습니다.” 하니, 율곡 선생 역시 말하기를, “혹 자는 과연 의심스럽다.” 하였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心不在焉]’이라는 주에 ‘반드시 이것을 살펴야 한다[必察乎此]’라고 하였는데, 퇴계(退溪)는, “차(此) 자는 마음이 있지 않은 병통처를 가리킨 것이다.” 하였고, 율곡은, “차 자는 마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하였다.
‘갓난아이처럼 보호해야 한다[如保赤子]’에 대한 소주(小註)의 여러 설명 중에서 율곡은 신안 진씨(新案陳氏)의 설명이 옳다고 하였다.
‘몸에 간직한 바가 용서하지 않는다[所藏乎身不恕]’라는 대목에 대하여, 선생이 말하기를, “여기의 서(恕) 자는 실은 충(忠) 자를 가리킨 것이니, 이것은 서(恕)가 몸에 간직된 것으로써 서 자를 빌어서 충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이것을 치국(治國)이라 한다’는 소주의 인산 김씨(仁山金氏) 설명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인산의 미루어 변화한다는 설명이 역시 근사하다. 다만 주자가 이 장(章)을 논하여 말하기를, ‘또 다만 동화(動化)가 근본이 되는 것만을 설명하고 미루어 올라가는 것까지는 설명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이렇다면 10장은 미루어 나가는 것을 설명한 것이요, 9장은 다만 몸소 실현하여 아랫사람을 감화시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하였다.
‘반드시 그 동일한 것을 따라야 한다’는 대목에 대해 율곡이 말하기를, “동일한 것은 마음이니 이것이, 곧 법이다.” 하였다.
‘재물이 있으면 이에 용(用)이 있다[有財此有用]’는 대목에 대하여,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은, “용은 기용(器用)이다.”라고 하였는데 율곡은, “그 말은 옳지 않다.” 하였다.
《혹문(或問)》에 보이는 반명(盤銘) 조(條)의 ‘성경(聖敬)이 날로 진취된다’는 대목에 대한 주에, “성인이 그 덕을 공경하여 날로 높고 밝은 데로 올라가는 것이다.” 한 것에 대하여 물으니, 율곡이 말하기를, “이 성(聖) 자는 성인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다. 성은 통명(通明)과 같은 것이니, 성경(聖敬)의 덕이 날마다 높고 밝은 데로 진취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 인(仁)을 행하는 근본[其爲仁之本]’이라는 주에, “어찌 일찍이 효제(孝悌)가 있을 것인가.[曷嘗有孝悌來]” 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래(來) 자는 어조사이다. 《장자(莊子)》의 유이어아래(有以語我來)라는 것과 같다.” 하였다. -《논어(論語)》이다.-
“병이 없을 것인데 운명인가 보다[亡之命矣夫]의 망(亡)은 사망한다는 망이다. 대개 이 사람에게 이 병이 있을 수 없다는 일단(一段)은 이것이 명의부(命矣夫)를 해설한 것이요, 망지(亡之) 두 글자를 해석한 것이 아니다.” 하니, 율곡 선생도 역시 존망(存亡)의 망으로 보았다.
‘여는 3년의 사랑이 부모에게 있었느냐[予也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는 대목에 대하여 율곡은 삼년상(三年喪)이라는 뜻으로 말하였으나, 지금 직해(直解)를 상고하니, “3년의 사랑은 품어 기른 기간을 말한 것이라.” 하여 나의 소견과 서로 맞는데 아직 옳은지 그른지를 모르겠다.
‘벌벌 떨면서 죄 없이 죽을 곳으로 나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不忍其觳觫若無罪而就死地]’는 대목에 대하여, 율곡은 곡속약(觳觫若)으로 구절을 띄었다. -《맹자(孟子)》이다.-
‘수세(數歲)의 중을 비교한다[校數歲之中]’는 대목에 대하여 율곡은 수년간을 비교하여 풍년도 아니고 흉년도 아닌 중년(中年)이라고 해석하였는데, 나의 생각에는, 수년간에 걸친 수확한 수량을 통계하여 그것으로 일정한 규정을 삼는 것이라 하겠다.
‘다 넓혀 채울 줄 안다[知皆擴而充之]’는 대목에 대해 퇴계는, “알아서 확충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생각하면, 지(知) 자는 충지(充之) 아래에서 해석해야 한다. 율곡이 이르기를, “퇴계의 해석은 그른 것 같다. 이것은 아는 것뿐이요, 때가 아직 확충되지 않은 것이다. 알기만 한다면 불이 처음 피어오르는 것 같고, 샘이 처음 나오는 것 같으니 그 아래에 이르러 참으로 확충한 연후에야 비로소 확충한 때인 것이다. 만약 퇴계의 설명 같다면 이것은 이미 확충된 것이니, 불이 처음 피어오르고, 샘이 처음 나오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니다.” 하였다.
《맹자(孟子)》 7편 중에 공명의(公明儀)가 네 번 보이는데 첫째는, ‘문왕(文王)은 나의 스승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3개월 동안 임금이 없으면 위문한다.’는 것이고, 셋째는, ‘푸줏간에 살찐 고기가 있다.’는 것이며, 넷째는, ‘마땅히 죄가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율곡이 말하기를, “공명의는 옛날 어진 사람으로, 맹자와 동시대 사람이 아니었다. 이른바 마땅히 죄가 없을 것 같다는 것은 역시 옛날 공명의의 말을 맹자가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공명의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맹자와 동시대 사람일 것이다.” 하였다.
순(舜)ㆍ우(禹)ㆍ익(益)이 서로 거리가 구원(久遠)하였다는 대목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원(遠)은 속(速) 자의 잘못인 것 같다.” 하였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율곡의 의사가 순과 우 사이의 거리는 멀고, 우와 익 사이의 거리는 가깝다고 여긴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뜻이 매우 평탄하고 순순하다.
학문하는 길은 다른 것이 없다. 그 방심(放心)을 구제할 뿐이라 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그 방심을 구하는 것은 바로 배우는 자의 공부의 궁극처이다.” 하였다.
독법(讀法)의 주에서 서산 진씨(西山眞氏)가 말하기를, “반드시 독실하고 공손한 후에라야 무성무취(無聲無臭)한 경지에 나갈 수 있다.” 하였다. 생각건대, 원주에서는 무성무취로 독실하고 온공한 묘(妙)를 형용하였는데, 지금 여기서는, “독실하고 공손한 연후에야 무성무취한 경지에 나갈 수 있다.” 하였으니, 원주의 뜻을 상실한 것 같다. 율곡도 일찍이 여기에 대하여 의심하였다. -《중용(中庸)》이다.-
수장(首章) 소주(小註)에서, 운봉 호씨(雲峰胡氏)가 말하기를, “일음 일양(一陰一陽)이 도라 하였는데, 이 도(道) 자는 한 태극(太極)을 모두 가진 것이요, 성(性)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 하였는데, 이 도(道) 자는 각기 한 태극을 갖춘 것이다.” 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일음 일양의 도가 곧 성을 따르는 도로서 두 도(道) 자는 하나인 것이다. 호씨가 이것을 나누어 둘로 하였는데 옳지 않다. 율곡 선생도 나의 소견을 옳다고 하였다. 대개 일음 일양을 도라 하는 것은, 선(善)을 이어 천성을 이룬다는 것과 상대하여 선후의 분별이 있는 것이지만, 통체(統體)의 태극은 각기 갖춘 것과는 선후를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군자의 도는 비(費)하고 은(隱)하다는 대목에 대하여, 비는 기(氣)요, 은은 이(理)냐고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옛날에도 그대와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소주(小註)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형이하(形而下)라는 것이 비가 되고, 형이상(形而上)이라는 것이 은이 된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형이하의 것은 매우 넓은데 형이상의 것이 사실 그 사이에 행하여 물건마다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며 가는 데마다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비라 하는 것이요, 그 가운데서 형이상이라는 것이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은이라 한다.’ 하였다. 주자의 설명이 이렇게 십분 분명한데, 전일에 허공(許公) 엽(曄)이 역시 비가 기(氣)라는 설을 주장하므로, 퇴계와 율곡이 반복하여 논변하였지만 끝내 고치지 않았다.” 하였다.
촬(撮) 자는 《운회(韻會)》에서, “두 손가락으로 집는 것이다.” 하였는데, 율곡은 “한 손으로 움키는 것이다.” 하였다.
‘개왈문왕지소이위문야순역불이(蓋曰文王之所以爲文也純亦不已)’에 대하여 율곡은 왈(曰) 자를 불이(不已) 아래에서 해석하였는데, 나는 문야(文也) 아래서 해석하고자 한다. 율곡은 이미 순수하고 또 쉬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는데, 나는 역(亦) 자는 문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늘이 쉬지 않으니 문왕도 쉬지 않는 것이라 여겨진다.
순전(舜典)의 ‘내언저가적(乃言底可績)’ 주에서, “행동이 미더운 데에 이르면 공적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율곡은, “네 말이 장차 공적이 있는 데에 이를 것이다.”고 해석하여, 채씨(蔡氏)의 주와 같지 않다. 그러나 율곡의 해석은 본경(本經)에 있어서 문리가 매우 순하니 옳을 것 같다. -《서전(書傳)》이다.-
‘중정인의(中正仁義)로 정한다’는 대목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중전인의는 스스로 동정(動靜)이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중정인의를 말한 것으로 태극도의 주(註)와는 같지 않다. -사계(沙溪)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에 나온다. 이하 같다.-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한다[與天地合其德]’는 대목에 대하여 묻기를, “이 글 중에 네 개의 기(其) 자가 있는데, 그것은 성인을 가리킨 것입니까, 천지ㆍ일월ㆍ사시ㆍ귀신을 가리킨 것입니까?” 하니, 율곡이 대답하기를, “성인이 천지와 합한다면 글 뜻이 순하고, 천지가 성인과 합한다면 글 뜻이 순하지 못하다.” 하였다.
제비(除非)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시비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하였는데, 구봉(龜峰)은, “주자의 시의, ‘제시인간 별유천(除是人間別有天)’이라 한 것이 역시 이런 뜻이다.” 하였다.
채절재(蔡節齋)가 ‘역에 태극(太極)이 있다’고 한 것을, 무극(無極)이면서 태극이다[無極而太極]는 것과 비하여 같이 본 것은 좀 온당하지 않다. 율곡도 일찍이 절재의 견해를 그르게 여겼다.
‘심향상거(尋向上去)’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향상은 어느 곳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율곡이 또 이르기를, “상중(喪中)의 조석 제사 때가 여름철이라면 청주가 맛이 변하니 소주가 매우 좋다.” 하였다. -사계의 《의례문해(疑禮問解)》에 나온다. 이하 같다.-
율곡이 말하기를, “아버지 사당에 제사 드리는 것은 친근함에 지나칠까 염려된다.” 하였다.
기일에 부모를 함께 제사 드리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선현들이 일찍부터 행하였는데, 율곡 역시 말하기를, “양위(兩位)에게 제사 드리는 것이 마음에 편안하다.” 하였다.
물격(物格)에 대한 설명은 율곡의 의논이 제일 훤하게 꿰뚫고 깨끗하다. 율곡의 말에 “물격이라고 한 것은, 사물의 이치가 모두 밝아서 더 남은 것이 없는 것이니, 이것은 사물의 이치가 극처(極處)에 이른 것으로, 사물을 위주로 하여 말한 것이다. 지지(知至)라는 것은 사물의 이치가 모두 밝아서 나머지가 없는 후에야 나의 지식도 극처에 이르는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지식을 위주로 말한 것이다. 어떻게 주자의 설명에 근거한 것인 줄 알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보망장(補亡章)에 이르기를, ‘모든 물건의 표리와 정추[精粗]가 이르지 않음이 없다.’ 하였는데, 이것은 사물을 가지고 말한 것이며 또 말하기를, ‘내 마음의 전체와 대용(大用)이 밝지 않음이 없다.’ 하였는데, “이것은 지식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혹문(或問)》에는, “이치가 사물에 있는 것이 이미 그 극치에 이르러 나머지가 없다면 내게 있는 지식도, 그 나가는 데에 따라 다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계어록(沙溪語錄)》에 나온다. 이하 같다.-
율곡이 항상 말하기를, “내가 다행히도 주자 후에 태어나서, 학문이 틀리지 않게 되었다.” 하였다.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대목에 대해서, 율곡의 해석이 제일 분명한데 그 의견은, 비록 그 극은 없지만 실은 큰 극이 있다고 말하였다.
율곡이 말하기를, “정(情)이라는 것은 부지불각 중에 저절로 발동하여 나오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평일에 함양(涵養)한 공부가 지극하면 정이 발동하여 나오는 것이 자연 사특함과 잘못이 없게 될 것이다. 의(意)라 하면 이것은 정이 발동하여 나옴으로써 계교(計較)하는 것이며, 지(志)라면 이것은 한 곳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쫓아가는 것이니, 의는 음(陰)이요 지는 양(陽)이다. 그렇다면 성(性)과 정은 심(心)에 통솔되고 지와 의는 또 정에 통솔되는 것이다.” 하였다.
율곡이 말하기를, “점철(點掇)은 원주에서, ‘첨철(拈掇)ㆍ첨철(沾綴)이라는 것 같다.’고 말하였는데, 첨철(拈綴)은 손가락으로 물건을 가져다가 여기저기에 놓는다는 뜻이고 첨철(沾掇)은 물방울을 땅 위에 적신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정명도(程明道)가 웅치(雄雉) 시를 설명하면서, ‘저 해와 달을 쳐다보니 나의 그리움 한이 없네. 길이 하도 멀다 하니 언제나 돌아오리.[瞻彼日月 悠悠我思 道之云遠 曷云能來]’라는 그 구절 아래에서 바로 ‘그리움이 간절한 것이다.’ 하였으며, ‘모든 군자들이여 덕행을 알지 못하네. 사납지 않고 탐하지 않으면 무엇을 한들 착하지 않겠는가.[百爾君子 不知德行 不忮不求 何用不臧]’라는 그 구절 아래에서는 바로 ‘바른 데로 돌아간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자기의 소견으로 간간히 본문 중의 의사에 대하여 말을 해 본 것이다.” 하였다.
율곡이 말하기를, “허노재(許魯齋)가 원(元)나라에 벼슬한 데 대하여 사람들이 많이 비방한다. 그러나 이것은 몸을 잃은 것이지 절개를 잃은 것은 아니다. 대개 노재는 원나라에 벼슬하는 것이 마땅하지는 않지만 원래 북방에서 생장하였으니 저 송나라 유민(遺民)들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축색(蓄色)한 일과 을사년(乙巳年) 일에 있어서 회재(晦齋)와 퇴계(退溪)가 같이 과실이 있었는데, 선생이 회재만을 허물하기에 무슨 까닭인가 물으니, 율곡이 한참 있다가 대답하기를, “대저 사람을 보는 도리는 덕을 이룬 뒤와 인격이 아직 덕을 이루기 전을 구별해야 한다. 퇴계의 실수는 연소한 시기에 있었지만 회재는 이미 늙고서 이 실수가 있었으니 이래서 구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청풍(淸風) 김권(金權)과 함께 율곡 선생의 문하에 있었다. 청풍이 그 할아버지 김대성(金大成)의 비문을 청하였는데, 선생이 대답하지 않으니, 청풍이 실망하는 모습으로 물러나와 나에게 가만히 말하기를, “허락하지 않는 이유를 선생께 물어보려 하였지만, 엄하여 감히 하지 못하였으니 그대가 틈을 타서 물어 주오.” 하였다. 내가 그 말대로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죽을 때를 당하여 처리한 의리가 매우 온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내가 그대로 청풍하게 말하니 후에는 끝내 다시 청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선생에게 묻기를, “선생께서는 어떤 일에나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장수(將帥)의 소임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군대를 거느리는 일을 맡는 것이라면 감히 자신하지 못하겠지만 장수의 스승은 될 수 있겠다.” 하였다.
“선생께서 국사를 담당하여 만일 매우 어려운 처지에 이르게 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물으니, 율곡이 말하기를, “죽을 때까지 해 볼 뿐이다. 학문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성공하느냐 성공하지 못하느냐는 아직 의논할 것이 아니고, 마땅히 몸과 마음을 다해 나랏일에 이바지하여 죽은 후에야 그만두는 것이 옳다.” 하였다.
“선생이 풍악(楓岳)에 계실 때에 일찍이 형용을 변하지 않았습니까?” 물으니, 율곡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미 산에 들어갔으니 형용을 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 그 마음이 빠진 데에 도움이 되겠는가. 이 일에 대해서는 물어볼 것이 없다.” 하였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말하기를, “칠정(七情)은 기(氣)의 발동이요, 사단(四端)은 이(理)의 발동이다.” 하였는데, 퇴계(退溪)가 평생 두고 주장하는 바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이가 발동하면 기가 따른다는 말을 하였다. 율곡은 “사단도 원래는 기를 따라 발동하는 것이지만 기에 가린 바가 되지 않고 바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의 발동이라 하는 것이며, 칠정도 원래는 이가 타서 되는 것이지만, 간혹 기에 가리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기의 발동이라 하는 것이니 융통성 있게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칠정 중에도 이를 위주로 하여 말할 것이 있으니 순(舜)의 기뻐함과 문왕(文王)의 노함은 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단 중에도 기를 위주로 하여 말한 것이 있으니 주자의 이른바, ‘사단 중의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한 것이 이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박문(博文)과 약례(約禮) 두 가지는 성인 문하의 학문에 있어서 수레의 두 바퀴 같고, 새의 두 날개와 같다고 하였는데, 율곡은 언제나 이것을 외워 가르쳤다.
율곡 선생이 일찍이 격치(格致)의 뜻을 논하기를, “정자와 주자 모두 격(格)은 지(至)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에 의거하여 논한다면, 격물(格物)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그 극진한 곳에 이르게 하는 것이요, 물격(物格)이라는 것은, 사물의 이치가 이미 극진한 곳에 이르러서 다시 더 연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이 설명이 훤하게 꿰뚫고 깨끗하여 십분 명백하다. 그런데 후에 분분한 설이 매우 많아 “사물의 이치가 와서 내 마음에 이르는 것이다.”는 설까지 있게 되었으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다[五行一陰陽]’의 주에, “정(精)ㆍ조(粗)ㆍ본(本)ㆍ말(末)이 피차가 없다.” 하였는데, 사계(沙溪)가 말하기를, “웅씨(熊氏)의 주에, ‘태극이 정이 되고 음양이 조가 되며 태극이 본이 되고 음양이 말이 된다.’ 하였는데, 이 주가 잘못된 것 같다.” 하였으며, 율곡은 일찍이, “정ㆍ조ㆍ본ㆍ말은 기(氣)를 가지고 말한 것이고 하나의 이치는 정도 없고 조도 없으며 본말과 피차도 없는 사이에 통하는 것이다.” 하였다. 후에 와서 주자의 글을 읽어 보니, “기의 정ㆍ조를 막론하고 이 이치를 가지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였다. 율곡의 설명이 사실 여기서 나온 것이니 웅씨의 설명을 좇을 수 없는 것이다. -문인 수몽(守夢) 정엽(鄭曄)의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에서 나왔다. 이하 같다.-
‘천지와 그 덕이 합한다.’는 말에서 ‘그 길흉이 합한다.’는 말까지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원문 가운데 네 개의 기(其) 자는 천지ㆍ일월ㆍ사시ㆍ귀신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귀신과 그 길흉을 합한다는 것은 성인이 일의 길흉 알기를 귀신의 밝음과 같이 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이와 기를 합하여 기질(氣質)을 이룬다.’는 말에 대하여, 율곡이 말하기를, “이와 기를 합한다는 이 말이 온당하지 않다. 기를 말하면 이는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하였다.
‘매일수구다소위익 지소망 개득소불선(每日須求多少爲益 知所亡 改得少不善)’에 대하여, 퇴계가 율곡에게 회답하기를, “이 부분의 글 뜻이 과연 명백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 대의는 다만 섭씨(葉氏) 주의 설명과 같다. 주에서는 부지(不知) 두 글자를 소무(所無) 자에 붙였는데, 이것은 《논어》의, ‘날마다 그 없는 바를 안다.’는 의미이다. ‘개득소불선’은 적은 불선이라도 바로 고치는 것을 말함이요, 다(多) 자 한 자가 빠진 것은 아니다.” 하였다. 율곡은 구(求) 자를 선(善) 자 아래에 붙여 해석하여 퇴계의 해석과 같지 않다.
‘불해심질(不害心疾)’에 대하여 퇴계가 말하기를, “심질의 해하는 바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해는 아마도 환(患) 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습여성성(習與性成)’의 성(性)에 대하여 섭씨의 주에서는 ‘성(性)을 본연의 성이다.’ 하였고, 신안 진씨(新安陳氏)는 ‘《서전(書傳)》의 이것이 바로 불의이니 습관이 천성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을 들어 기질의 성이다.’고 하였는데, 어느 것을 바르다고 할 것입니까.”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진씨의 설명이 낫다.”고 하였다.
선생이 이성춘(李成春)에게 이르기를, “너의 문리가 아직도 통달하지 못하였으니, 아직 《집요(輯要)》는 놓아두고, 《통감(通鑑)》을 읽는 것이 좋겠다.” 하자 대답하기를, “소생의 나이 30이 되는데 조금도 성취한 것이 없으니 지금부터 성리학(性理學)의 서적을 읽어도 따라가지 못할 듯한데 언제 다른 글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너의 말도 옳다. 그러나 학문을 하는 방도는 반드시 먼저 문리에 통달해야 하는 것이니 그런 뒤에 나의 지식이 날로 늘어나고 소견이 날로 밝아진다. 그래서 공부하기는 쉽고 소득도 반드시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글 뜻에 통달하지 못하고 먼저 도를 구하려 한다면 마음속이 꽉 막혀 식견이 어두워 도를 구하려 해도 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학문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종신 사업이니 어찌 그렇게 급급히 서둘 것이 있겠느냐. 공자께서, ‘속히 하려 하면 통달하지 못한다.’ 하였으며, 맹자는, ‘나가는 것이 빠른 사람은 물러가는 것도 빠르다.’ 하였다. 성현의 교훈이 분명하게 경전(經傳)에 있는데 네가 그것을 배우지 않았느냐.” 하였다. -《직월기(直月記)》에 나온다. 이하 같다.-
여러 학생이 모시고 앉았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여러 학생이 모여 있으면서 종일토록 마음을 쓰는 데가 없다면, 산당(山堂)에 고요히 앉아 그 마음을 기르는 것만 못하다.” 하면서 이어 훈계하기를, “요즈음 보면 여러 학생들이 그냥 놀기만 하면서 학업에 근면하지 않으니 이것이 무엇 때문인가. 내가 여러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나 여러 학생들이 나에게 배우는 것이 그 의미가 어찌 이와 같은 것이겠는가. 유념하고 또 유념해서 조금이라도 게을리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이유경(李有慶)이 묻기를, “초목(草木)과 금석에도 오행의 기(氣)가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있다. 구멍을 마찰시켜 불을 내는 것이 나무가 아닌가. 물로 인하여 자라나는 것이 나무가 아닌가. 부딪쳐서 불을 내는 것이 돌이요, 적시고 불려 물을 내는 것이 돌이다. 금도 역시 기가 있기 때문에 태양에 비치면 불이 나오고 달에 비치면 물이 나온다. 이것은 그 대계가 그렇다는 것이고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다.” 하였다.
선생이 이성춘(李成春)에게 이르기를, “네가 근자에 술에 취하여 노래를 부른다고 하는데 그러하냐.” 하니, “감히 노래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술이 곤하여 음성이 길었기 때문에 곁에서 보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노래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이미 긴 음성으로 불렀다면 노래라고 해도 옳지 않으냐. 또 네가 잘못하였다. 내가 들으니 전일에 너의 숙부가 노래를 부르라고 하였는데 네가 노래 부르지 않았고, 나도 노래를 하라고 하였는데 네가 역시 노래 부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술의 위엄이 도리어 어른의 명보다 중한 것이냐.”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정오산(鄭鰲山)에게서 들으니, ‘만일 노래를 잘 못한다면 부모의 명이 있더라도 감히 노래를 부를 수 없다.’ 하였다는데 그러하냐?” 하니, 대답하기를, “오산의 말이, ‘부모가 은근히 말한다면 그런대로 노래를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감히 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오산의 말이 이상하구나. 옛사람이 나이 70에도 때때옷을 입고 춤추며 어린아이의 놀이를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느냐. 진심으로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이다. 이렇기 때문에 효자는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있어 반드시 즐거운 얼굴빛을 가지며, 즐거운 얼굴빛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온화한 기색을 가진다. 그러므로 설령 옳지 않은 명령이 있더라도 힘써 순종하며, 수고로운 일에 종사하더라도 감히 원망하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노래 부르는 것은 그 본의가 원래 해가 없고 몸에 수고로울 것도 없으니,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라도 그 의사에 앞서 받들어 어버이를 기쁘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어찌 노래를 잘하고 못하는 것을 따질 것이 있겠는가. 아, 부모가 이미 돌아가셨다면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도 누구를 위해 기쁘게 해 드리겠는가. 부모가 계신데도 그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밤에 여러 학생들이 모두 절하고 물러가려 하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로 있으라. 내가 말할 것이 있다. 여러 학생이 정사(精舍)에 함께 있으면서 글을 읽으며 사색(思索)하기도 하고 조용히 앉아서 마음을 수양하기도 했는데 전일에 비하여 달라진 것이 있는가.” 하니 김의정(金義貞)이 대답하기를, “비록 용감하게 나아가는 공부는 없지만 어찌 전일보다 좀 다른 점이야 없겠습니까.” 하고 허극성(許克城)은, “소생은 근래 잡념이 더 커져서 글을 읽어도 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고 자려 해도 잠자리가 편안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어찌하여 그러하냐?” 하니, 허극성이 말하기를,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양친이 집에 계신데 집안 형편이 궁곤하기 이를 데 없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하니, “생각하여 잘 처리할 방도가 생긴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정신만 괴롭혀서 도리어 공부하는 데에 방해가 될 것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였다. 오결(吳潔)은 대답하기를, “서재나 집안에 있으면 스승과 친구, 부형이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일찍이 방심할 일이 없는데, 밖에 나가게 된다면 농지거리도 하고 웃어대기도 하여 자연 해이하게 됩니다. 때로 근심스러워서 생각해 보면 온몸이 오싹 떨려서 진정할 수 없게 됩니다.” 하니,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학문을 하는 길은 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하였다. 이유경(李有慶)은 대답하기를, “소자가 전번에 집에 돌아가 부모님을 뵈었는데 부모님의 마음은 소자가 오랫동안 선생님을 모셨으니 큰 소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성인(成人)처럼 대해 주셨습니다. 이런 부모님의 심정을 생각한다면 마음이 항상 조심스럽고 송구스러워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너의 마음이 착하구나. 이런 마음이 있다면 학문을 할 수 있으니 이 마음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하였다. 오결(吳潔)이 묻기를, “가령 날이 저문 산길을 도보로 가다가 갑자기 다리를 삐어 걸음을 걸을 수 없어 바위 밑으로 가려 했는데 또 호랑이와 표범이 많아 방황하여 답답할 때에, 마침 전에 알던 도적패가 말을 몰고 지나 가다가 그 죽게 된 형편을 동정하여 간곡히 말을 타고 가기를 청한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모두 하늘에 달린 것이니 내가 죽을 운명이라면 그 말을 타고 간다 해도 어찌 죽지 않을 줄 알겠는가. 내가 죽을 운명이 아니라면 노숙(露宿)을 한다 하여 어찌 살아나지 못하겠는가. 더구나 그 말을 타지 않는 것은 의(義)요 타는 것은 이(利)이다. 그 의를 생각지 않고 이만 취하려고 한다면 어찌 군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유경이 자리를 피하면서 말하기를, “소생의 의견으로는 저 사람이 도적이 되기는 했지만 이미 나와 아는 사이고, 또 다른 의사가 없는 것이라면 내가 우선 옷을 벗어 주고 말을 타고 가도 될 것 같은데 이 생각이 어떻습니까?” 하니, “이런 것은 반드시 그때 가서 형편을 보아서 처신할 것이지 미리 작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군자가 평일에 마음을 가지는 것은 반드시 의(義)로 이(利)를 삼아야만 천하의 일을 처리하는 데에 실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허극성(許克城)이 묻기를 “형제가 동거(同居)하는 것은 후한 인륜의 일입니다. 지금 여기에 형제 세 사람이 있는데, 한 형의 뜻은 나와 같고 한 형의 뜻은 나와 같지 않다면 뜻이 같은 형하고만 동거해도 됩니까?” 하니, 말하기를, “그렇게 하여도 된다. 그러나 뜻이 같지 않은 형도 반드시 감동시켜서 끝내는 동거하는 것이 더 좋다.” 하였다.
또 묻기를, “지금 여기에 한 선비가 있는데 전에는 빈천하여 그 부모를 박장(薄葬)하였으나 후에 부귀해져서 개장(改葬)하려는데 어떻습니까? 만일 개장하지 않으면 관곽(棺槨)이 썩고 백골이 드러나게 될 것이니 사람의 자식으로서 그지없는 슬픔을 어찌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빈천해서 박장한 것은 부득이한 형세였지만, 잘살게 되어서도 개장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자식으로서의 정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말하기를, “맹자는 후상(後喪)인 어머니 상을 전상(前喪)인 아버지 상보다 후하게 지냈으나 전상 때의 박장(薄葬)을 개장하지 않았다. 개장할 수 있는 예법이 있다면, 맹자 같은 현자(賢者)가 어찌 정리가 부족해서 개장하지 않았겠는가. 참으로 개장하는 예법이 없어서였다. 성현의 사실이 분명히 경전에 있는데, 그대는 그것을 아직도 보지 못하였는가. 다만 한 가지 일이 있으니 그것은 그 무덤의 흙을 보축하고 사초(莎草)를 무성하게 하며,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제사를 삼가 지낸다면 나의 정리는 다한 것이다. 억지로 개장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미욱한 짓이지 예법이 아니다.” 하였다.
이유경이 묻기를, “지금 여기 한 사람이 있는데 오래도록 같은 문하에서 놀면서 서로 교제를 하다가 어느 날 과실로 하여 친구들에게 쫓겨나게 되었다면 내가 그 사람에 대하여 전과 같이 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범범하게 대하여 그와 더 이상 교제하지 않아야 합니까?” 하니, 말하기를, “정말 그 사람에게서 크게 형편없는 일이 보인다면 이전의 친분이 있었더라도 그와 다시 교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때의 과실이 있다고 하여 동문(同門)의 친구를 끊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조용히 만나 간절하게 책망하여 허물이 없게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친구의 도리이다.” 하였다.
이유경이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의 사생(死生) 득실에 대하여 물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관중이 산 것은 권도(權道)요, 소홀이 죽은 것은 정직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옳다. 그러나 적자(嫡子)를 세우는 명분은 이것이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상법(常法)이니 그렇다면 관중의 한 일이 역시 소홀의 죽음보다 좀 낫지 않겠는가. 후에 신하로서 만일 이런 변고를 만난다면, 굳이 관중이나 소홀을 좇을 것이 아니라 먼저 큰 의리를 보고 처리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였다.
이유경이 묻기를, “양화(陽貨)는 대부가 아닌데 대부로 자처한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돼지를 보낸 것은 참람한 일인데도 성인이 가서 그 문에 절한 것은 어쩐 일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양화는 대부는 아니지만 당시의 정권이 모두 그에게로 돌아갔으니 그의 소임은 곧 대부의 소임이었다. 때문에 부자(夫子)께서도 대부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양화와 불요(弗擾)가 다 같은 반역자인데 부자께서 양화에게는 거절하면서 불요에게는 가려 하였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만일 천하에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어찌 양화만이 변화시킬 수 없는 자가 되겠습니까? 또 불요가 끝내 부자를 등용하였다면 부자께서는 과연 불요에게 가서 그를 따라 주(周)나라의 도를 일으켰겠습니까?” 하니, 말하기를, “양화는 전연 착한 의사가 없다는 것을 부자께서 이미 알았기 때문에 보려 하지 않은 것이다. 불요의 경우에는 그가 비(費)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반역의 무리들을 부르지 않고 공자를 불렀으니 그 의사가 앞으로 선을 행하고 과오를 뉘우치려고 한 것이니, 부자의 천지 만물을 생성시키는 마음으로 어찌 가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반드시 그가 과오를 고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역시 끝내 가지 않은 것이니, 그것이 양화를 대접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또 불요가 부자를 등용하더라도 부자께서 어찌 이 사람과 함께 지극한 정치를 이룩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그로 하여금 선을 행하고 과오를 고쳐 계씨(季氏)에게 순종하게 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인으로서 별도로 조치하는 일이 있었을지는 알 수 없는 점이 있다.” 하였다.
또 묻기를, “길을 가다가 충ㆍ효의 정문(旌門)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지나가야 합니까?” 하니, 말하기를, “만일 조상의 정문이라면 내려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만 식(式)에 기대고 공경만 할 뿐이니 나는 식에 기대고 공경만 하고 내리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또 묻기를, “소자가 전일 서울로 올라올 때에 서인(庶人)으로서 노직(老職) 당상관 세 사람이 우연히 길 가운데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을 탄 채로 지나려 하니 마음이 불안하기에 내려서 지나갔는데 이 생각이 어떠합니까?” 하니, 말하기를, “이미 그 연령이 있고 그 직위도 있으니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네가 내리기 잘하였다.” 하였다.
봉성민(奉聖民)이 묻기를, “선생이나 어른이 밖에서 들어오면 제자 된 사람은 뜰 가운데서 차례로 서서 맞아들이고 배알(拜謁)하는 것이 예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피하여 갔다가 선생이 당상으로 들어온 다음에 배알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니, 말하기를, “거기에 대한 예절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리로 본다면 맞아들여서 배알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선생이 이성춘(李成春)에게 이르기를, “요즘 들으니, 네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잘하라는 책망을 듣고 많이 수긍하지 않는 기색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이냐. 나를 책망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자신에 돌이켜 반성하여 나에게 참으로 책망할 만한 소행이 있다면 그 사람의 책망이 지나쳤더라도 마음속으로 책망하여 과오를 고치는 것을 꺼리지 않아야 할 것이니 어찌 나를 책망하는 사람을 그르다고 할 것인가.” 하니, 이성춘이 일어나 자리를 피하면서, “감히 가르침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무오년(1558, 명종13)에 도산(陶山)에 가서 보았을 때에 퇴계 선생이 선군자(先君子)에게 주일무적 수작만변(主一無適酬酢萬變)의 뜻을 물었으며, 또 말하기를, “주자는 다리 살을 베어 어버이의 병을 치료하는 일을 중(中)에 지나쳤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버이의 병환이 중하게 되면 사람의 자식으로서 급하고 간절한 마음에 못할 일이 없게 된다. 혹 다리 살을 베어 어버이 병을 치료하여 병이 낫게 된다면 이것은 이른바 지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다. 이야말로 자식으로서 어버이에 대한 지극히 선한 마음이니 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 살을 벨 때에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생각이 있다면 이것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주자는 이런 것을 분간하여 말하지 않고 다만 ‘중에 지나친다.’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는데, 선군자께서 대답하기를, “이것이 비록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이 감동할 때도 있지만, 사리로 따진다면 사실은 천하의 상도(常道)는 아닙니다. 더구나 다리 살을 벨 때에 그 사람의 마음속을 다른 사람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것이 과연 지극히 선한 중도가 된다면 증자 같은 효성으로도 어찌 다리 살을 베지 않았겠습니까. 부득이 그렇게 보자면 이런 경우가 있겠습니다. 세상에서 화타(華陀) 같은 신통한 의원이 나와서 말하기를, ‘이 병에는 반드시 다른 사람의 피를 취하여 보조해야만 나을 수 있다.’ 하여 그 아들이 곧 자기 살을 베어 피를 내어서 어버이의 피를 보조하고 낫게 되었다면 이것은 중을 얻은 것일 것 같습니다.” 하니, 퇴계 선생이 무릎을 치며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선생의 아들 이경림(李景臨)의 연보 초고(年譜草稾)에 나온다.-
우계 선생과 이기(理氣)를 논란하여 아홉 번이나 서신을 왕복하였는데, 우계가 선생의 설을 많이 좇았기 때문에 우계가 선생에 대한 제문(祭文)에 스승으로 섬기려 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선생이 다른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의리상(義理上)에 있어서 깨달아 아는 것은 우계보다 나아서 우계가 많이 내 설을 좇았지만 나는 성질이 해이하고 느려 알면서도 실천을 못하는데, 우계는 알면 곧바로 하나하나씩 실천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니, 이것이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 하였다. -《사실기(事實記)》에 나온다.-
내가 일찍이 우계정사(牛溪精舍)에 있었는데 우계 선생이 말하기를, “소인 한거장(小人閑居章)의 여견기폐간(如見其肺肝)이라는 말을 율곡공이 자네에게 가르쳐 무엇이라 하던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남이 나를 보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숙헌(叔獻)이 평생에 식견이 매우 높아 남보다 뛰어난 의사가 있어 언제나 문자 중에서는 특별한 이론을 만들어 내서 옛날 성인의 말한 본뜻을 크게 상실하였다. 이미, ‘남이 나 보기를 그 폐간을 보는 것같이 한다.’ 하였다면 이것은 소인의 몸을 가리킨 것으로 사람이 소인을 보는 것은 그 겉의 거짓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폐간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뜻이 이러하고 그 밖의 다른 의미는 없다.” 하였다. 때마침 이 선생이 대사간으로 있다가 하직하고 화석정(花石亭)으로 돌아와서 석담(石潭)으로 이사하려 할 때 와서 선생을 뵙고 작별하였다. 선생이 전에 나에게 했던 말을 하니 이 선생이 말하기를, “존형의 이론이 크게 들어맞지 않습니다. 대개 몰래 불선한 일을 하는 자는 비록 그 불선을 가리려고 해도 남들이 나의 불선 보기를 마치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폐간을 보는 것같이 할 것이니, 그렇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대의가 이 같아야 글이 순하고 이치가 바른 것입니다. 잘못 본 세속 학자들이 전의 말만 따라가 돌아올 줄 모르니 안타까운 일인데, 존형의 생각 역시 막힌 병통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여 반복해 가며 서로 논쟁하였으나 끝내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최후에 선생이 이 선생에게 이르기를, “형이 스스로 고명한 것을 믿고 남은 자기만 못하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깨우치는 날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니, 이 선생이 말하기를, “많이 말해 봐야 소득이 없으니, 아직은 각자의 소견을 가지고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한음(漢陰) 이 상국(李相國)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간 다음, 율곡 선생을 뵙고 문장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율곡이 말하기를, “마음이 도에 통한 후에야만 자연 문장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문장의 기운이 유창하지 못하는 것이니, 대개 도를 배우기를 반드시 문장을 배우는 것보다 앞서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신분(申濆)이 부평(富平) 여금산(餘金山)에 집을 짓고 살면서, 여러 명사에게 시를 구하였다. 시인 윤기리(尹紀理)의 시에 이르기를, “형문(荊門)에 날이 따스하니 복사꽃 잘도 피었구나. 무수한 벌 떼들 들락날락 날아드네. 낮잠을 깨자마자 동자가 하는 말이, 광주리에 가득 살찐 고사리 꺾어 왔어요.[荊門日暖桃花淨 無數晴蜂上下飛 午睡初醒童子語 折來山蕨滿筐肥]” 하니, 여러 사람이 더 쓰지 못하였다. 율곡이 그 시를 보고 감탄하기를, “이것이 어찌 보고 들은 소감만을 그린 것이겠느냐. 이야말로 저절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서포(西浦) 곽열(郭說)의 일록(日錄)에서 나왔다.-
율곡이 옛날 석담(石潭)에 있을 때 하루는 찾아가서 문안드렸는데 황혁(黃赫)에게 이르기를, “옛날 옥당(玉堂)의 글 친구 중에 신군망(辛郡望)은 앉아서도 글을 안 읽어 재주가 날마다 줄었는데, 주공(主公)은 외곬으로 학문을 즐겨 재주가 배나 증가하여 문장을 당할 수 없었다.” 하였다. 시인 백광훈(白光勲)과 국조(國朝) 이래의 시가(詩家)를 평가하면서 말하기를, “황 아무공의 시는 경술(經術)에서 출발하여 마음의 자득(自得)으로 이루어지니 의리의 글이다. 점필재(佔畢齋)와 더불어 이름을 떨친 것이요,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나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은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황혁(黃赫)이 지은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의 행장에서 나왔다.-
상께서 대신을 연방(延訪)하였을 때, 박순(朴淳)은 “이조(吏曹)에 연소한 사람을 등용해서 안 된다.” 하였으며, 대사헌 구봉령(具鳳鹷)은 “오늘날 유생들은 글 읽기를 일삼지 않고 고담(高談)과 대언(大言)만 한다.”고 하였다. 이때 율곡이 입시(入侍)하였다가 나아가 말하기를, “이조의 관원은 인재만을 택해야 하니, 나이가 젊더라도 쓸 만한 재주가 있다면 임용해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또 선비의 습관이 바르지 않으면 조정에서 어진 스승을 가려서 배치하여 교화를 밝혀서 중정(中正)한 데에도 돌아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동계(東溪) 우복룡(禹伏龍)의 잡록(雜錄)에서 나왔다.-
율곡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서얼(庶孼)을 벼슬길에 나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전번에 김 훈도(金訓導)나 이 훈도 같은 이가 있어도 쓰이지 못하고 죽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상께 아뢰기를, “옛날부터 선비는 시속의 관리들과 함께 일을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선비들이 ‘당우(唐虞)의 정치를 당장 이룰 수 있다.’ 하는데 시속 관리들은 ‘옛날의 도는 반드시 행하기 어렵다.’ 합니다. 그래서 시속 관리는 유학자(儒學者)를 비난하고 유학자는 또 시속 관리를 비난하는데, 공평하게 말한다면 양쪽 말이 모두 그른 것입니다. 정치를 하는 데는 삼대(三代)를 본받아야 하지만 일은 모름지기 점차 진취시켜야 합니다. 신이 삼대를 말하는 것은 한 발걸음에 바로 도달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한 가지 선한 정사를 하고 내일에도 한 가지 선한 정사를 시행하여 점차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자는 것입니다.” 하였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의 잡록(雜錄)에 나온다. 이하 같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맑은 물의 연꽃[淸水芙蓉]이요, 맑은 바람에 갠 달[光風霽月]이다. 벼슬하고 은거함의 바른 것을 공과 함께 비견할 사람이 없다. 율곡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하였다.
우계 선생이 말하기를, “율곡이 생전에 항상 말하기를, ‘대개 사람은 3, 40전에는 비록 광대나 배우의 놀이를 하더라도 해가 될 것이 없다.’ 하였다.” 이것은 그의 친구가 만년에 지조를 근신하지 않음을 미워해서 말한 것이다. 그때는 나도 그것이 세상을 분개해서 하는 과격한 말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와서는 율로(栗老)의 말이 과격한 것이 아니고 사실 우리 측 친구들의 거울로 삼아 주의해야 할 일인 줄 절실히 알았다. -《우산언행록(牛山言行錄)》에 나온다.-
윤월정(尹月汀)이 조용히 말하다가 하서 선생에 이르러서는 일어나서 말하기를, “숙헌이 생시에 매양 하서의 출처가 바른 것은 우리나라에서 그와 비할 이가 없다고 칭찬하였다.” 하였다. -오희길(吳希吉)이 기록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행적(行蹟)에 나온다.-
율곡 선생이 화담(花潭)을 논평하기를, “기(氣)를 이(理)로 인정하는 병통은 있었지만 《대학》 소주(小註)에 나오는 진북계(陳北溪)의 설에 대한 말에 대해서는 반박하여 말하기를, ‘이와 기가 원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나 혼합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였다. 또 들으니 일찍이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의논하면서 ‘묘하게 합쳐져 엉긴다[妙合而凝]’는 말이 주자의 ‘한데 뭉쳐서 틈이 없다[渾融無閒]’는 말만 못하다. 후세에는 반드시 그 해석을 알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기암(畸菴) 정홍명(鄭弘溟)의 잡록(雜錄)에 나온다.-
이숙헌을 방문하였는데 숙헌이 먼저 시사에 대하여 말하면서 탄식하고, 그다음에 이와 기는 일본(一本)이라는 것, 마음이 성정(性情)을 통솔한다는 것, 명덕(明德)은 본심이고 양지(良知)는 천리(天理)가 아니라는 것 및 《곤지기(困知記)》를 가볍게 볼 수 없다는 등의 설명을 하였는데 매우 온당하고 흡족하였다. -허봉(許篈)의 《조천록(朝天錄)》에 나온다.-
계유년(1573, 선조6) 9월 21일에 이이가 직제학으로 부름을 받아 입시하였다가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의 병으로 오랫동안 물러가 있다가 오늘 옥음(玉音)을 엎드려 들으니 음성이 매우 잘 통하지 못하니 어찌하여 그러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들으니 전하께서 여색을 경계하라는 말을 잘 들으려 하시지 않는다 하는데, 이러시는 성상의 생각이 계신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생각건대 반드시 성상께서 자질이 원래 청명하고 욕심이 적어 다른 사람이 말해 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남들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바로 알지 못하고 망녕된 말을 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인가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없다면 더욱 힘써야 되고 그런 말을 듣기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上)께서 이르기를, “그대가 일찍이 상소할 때에도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다. 사람의 말소리란 본래 서로 같지 않은 것으로 나의 말소리는 원래 이러하니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에 신이 일찍이 모셨는데 그때는 옥음(玉音)이 낭랑하여 일찍이 이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이 감히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이가 보통 계사(啓辭)할 때에는 성상의 말씨가 매우 쾌활하고 정직하였는데 이때는 왕의 안색이 상당히 거슬리는 것으로 보였다. -김우옹(金宇顒)의 《경연강의(經筵講義)》에 나온다. 이하 같다.-
하루는 이이가 정제엄숙(整齊嚴肅)의 뜻을 논함으로 인하여 정사(政事)의 잘잘못에 대한 일을 아뢰기를, “경(敬)을 하여 안을 곧게 하고, 또 의(義)를 하여 밖의 행동을 방정하게 하여야 한다.” 하니, 김우옹(金宇顒)이 말하기를, “참으로 경을 하여 안을 바르게 한다면 의를 하여 밖의 행동을 방정하게 하는 것은 그 가운데 있다.” 하였다. 이이가 또 말하기를, “기묘년의 일은 여러 사람이 근본된 일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형식적인 말단에만 종사하였기 때문에 실패하게 된 것이다.” 하였다.
이이가 일을 하는 데에 급하여 모든 아뢰는 것이 대부분 일을 가지고 왕을 위해서 부연하여 주달하였으므로, 김우옹이 이이에게 말하기를, “사람에 비유한다면 어찌 음식이 신체와 생명에 관계됨을 알지 못하겠는가만, 비위(脾胃)가 상하고 약하여 음식을 목으로 넘기지 못하는 것과 같소. 그런데 지금 비위에 대하여 약을 써서 원기를 도와 음식이 생각나도록 하지 않고, 다만 밥이나 고기를 가져다 강권한다면 사리에 통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소.”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참으로 약을 써서 먼저 비위를 치료하는 것이 마땅하오. 그러나 음식이 신체와 생명에 관계되는 것을 전혀 모른다면 또한 약을 먹어 병을 치료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요.” 하였다.
10월 26일 조강(朝講)에 입시하여 유윤궁선견(惟尹躬先見)에서부터 사씨지언 충신유종지설(史氏之言忠信有終之說)까지 진강(進講)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옛날에는 임금과 신하 사이에 충과 신으로 서로 함께 하여 인정과 뜻이 서로 믿음직했기 때문에 나중까지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노수신(盧守愼)이 말하기를, “이이의 말은 별다른 해석이요, 《서경(書經)》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였다. 김우옹이 말하기를, “충(忠)과 신(信)이라는 것은 성(誠)입니다. 간직한 것이 다만 한 개의 성실한 마음이기 때문에 일마다 끝마침이 있는 것인데 그 중요한 것은 방구석에 혼자 있을 때 본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이의 말과 같이 군신이 서로 주고받는 충과 신 역시 이 가운데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요 두 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태갑(太甲)이 이윤(伊尹)을 믿고 마음대로 방종하였기 때문에 이윤이 이렇게 말한 것이니 그것은 태갑의 몸을 바루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태갑이 이윤을 믿고 마음대로 방종한 것은 원래 좋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윤이 믿을 만한 사람임을 알았으니, 역시 사람을 알아보는 밝은 식견이 있었고 그 밝은 식견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허물을 고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노진(盧稹)과 김성일(金誠一)이 이황(李滉)에게 시호를 하사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이이가 말하기를, “정몽주(鄭夢周)가 유학을 주창한 후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김굉필(金宏弼)ㆍ조광조(趙光祖) 같은 이가 도학(道學)의 인물이지만 역시 그 용공(用功)의 자세한 것을 몰랐으며, 그 밖에는 학문한다고 하는 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모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황 같은 이는, 그 언론의 풍지(風旨)를 들으면 참으로 옛사람의 학문을 아는 이로서 진실로 그에 비할 이가 없습니다. 다만 그의 천품과 정신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한 것 같으나 전하께서는 이것으로 하여 작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학문의 공부가 그 기질을 변화시키는 데에 이르고 옛사람의 학문에 마음을 기울여 시종 한결같이 공부를 꾸준히 계속하여 조예가 날로 깊어졌으니 그 점을 작게 여길 수 없을까 합니다.” 하였다. 김우옹이 군액(軍額)이 부족한 폐단에 대해 언급하자, 이이가 말하기를, “군액을 감하여 백성의 괴로움을 풀어 준다면 백성이 생업에 안정하여 번성할 길이 있을 것이오니, 백성이 점차 생업을 회복한 연후에 점점 다시 옛날 군액수를 회복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이때 군사를 소집하는 사자들이 위의 눈치를 살피고 뜻을 맞추어 각박하고 급속히 일을 진행하기에 힘쓰므로, 과장이 많아 지방이 소란하였기 때문에 언급하였다.- 이이 등이 계속하여 말하기를, “나라에서 사천(私賤)에 대하여 법을 만들 때에 유독 치우치게 하여,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고 또 아버지를 따르게 하니, 거기에 따르는 폐단으로 양민이 모두 사가(私家)에 들어가게 되고, 군인이 날로 적어졌습니다.”고 하니 상께서 이르기를, “이 법은 참으로 온당치 않으니 변통이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였다. 노수신이, 천재지변이 있음으로 인하여 관직을 해임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께서 이르기를, “경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오늘날 여러 신하 중에서 경보다 나은 이가 없다.” 하였다. 이이가 말하기를, “천재지변으로 삼정승을 해임시키는 것은 이치에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 임금이 재변을 만나면 죄를 자신에 돌려 책망하고 몸가짐을 조심하여 행실을 닦아야 합니다. 어찌 죄를 대신에게 돌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갑술년(1574, 선조7) 1월 27일 주강(晝講)에 김우옹이 말하기를, “크게 도가 없는 세상에는 재변이 없다고 한 것은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지 항상 그렇다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그 후 승지 이이가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여기에 대하여 또 물으니 이이가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 사이에는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음란한 사람에게 재앙을 주는 이치가 있을 뿐입니다. 크게 도가 없는 세상에는 재변이 없다는 것은 그 설이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2월 1일 주강에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이 말하기를, “‘훌륭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한 것은 물격 지지(物格知至)하였기 때문이요. ‘한결같다, 왕의 마음이여’한 것은 뜻이 성실하고 마음이 바르기 때문입니다.” 하니 김우옹이 이이와 함께 아뢰기를, “이 말이 옳지 않습니다. 격치 성정(格致誠正)의 공부가 있기 때문에 그 말이 크고, 그 말이 크기 때문에 그 마음의 한결같음을 아는 것이니, 말과 마음을 나누어 둘로 할 수 없습니다. 말은 마음의 소리로 마음이 한결같으면 말이 큰 것은 형상과 그림자가 서로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말에서 얻지 못하면 마음에 구하지 말라는 것은 불가합니다. 그것은 말에서 깨닫지 못함이 있는 것은 바로 마음에 밝지 못한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김우옹에게 이르기를, “나 같은 사람도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성상의 자질(資質)이 고명하고 초월하시니 마음먹고 뜻을 독실히 하신다면 어찌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이이가 아뢰기를, “우옹의 말이 사실이지만 말이 너무 지나칩니다. 전하께서 변함없이 덕을 지니고 계시니 훌륭한 정치를 할 만 한 자질이 있습니다. 만일 더욱 힘쓰신다면 어찌 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을해년(1575) 6월 24일 소대(召對) 때에 이이가 아뢰기를, “근래 대간(臺諫)이 말하는 것을 따르지 않으시니 인심이 상당히 풀어집니다.” 하였다. 상께서 이르기를, “이것은 내가 불민하기 때문이다. 다만 당우(唐虞) 시대에도 신하의 말을 어기는 일이 있었으니 어찌 모두 응낙만 하겠는가.”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이것은 원래 그렇습니다. 다만 따를 만한 일이라면 빨리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간의 말도 그릇된 것이 있다면 또한 반박하여 바로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황해도에 있을 때 대간이 최세해(崔世瀣)를 논박하여 여러 말을 한 것에 대해 말하고서 대간의 말이 언제나 그렇다고 하여 믿지 못할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이가 또 아뢰기를, “지평 민순(閔純)이 벼슬을 내놓고 전원으로 돌아갔습니다. 어진 이가 나라를 버리고 가니 이것은 주의하고 반성하여야 할 일입니다.” 하였다. 상께서 놀라며 이르기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하는 일이다. 어째서 갔느냐.”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세상 풍습이 도도(滔滔)하여 좀 처신을 곧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괴상한 무리들이 모여 욕질하여 그 몸을 용납받지 못하게 하니 이래서 민순이 떠나간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시속으로는 무엇을 해 볼 희망이 결코 없으니, 만일 전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여 하지 않는다면 어진 사람이 누구를 믿겠습니까. 또 지금 시속에 지성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사람이 극히 적으니 나라의 일은 곧 임금의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 혼자만 그 근심을 도맡아 할 수 없는 일이니, 어진 이를 얻어서 함께 근심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께서 이르기를, “흰 베로 의복과 갓을 만들어 착용한 일 또한 많은 이가 그릇된 일이라 말한다고 하니, 인심이 이러하니 무엇을 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이 한 가지 일만이 아니라 인심과 세상 풍습이 좋지 않은 지 오랩니다. 전하께서 만일 일을 하려고 한다면 인심이 반드시 기뻐하지 않고 저해하려는 자가 있을 것이니, 오직 상의 마음이 굳게 정해져 변하지 않는다면 어찌 성사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유능한 인물에 대한 초천(超遷)과 구임(久任)하는 법에 대해 아뢰고 또 말하기를, “지금 민생이 초췌하고 고혈(膏血)이 이미 고갈하였습니다. 조정에서 구원하려 해도 은택이 아래에 미치지 않고 항간에서 근심하는 소리가 전과 다름이 없으며, 서민들은 조정의 청명함을 알지 못합니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백성을 위해서인데, 민생이 이러하니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인심이 바르지 못하고 관리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법령이 행해지지 않으니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상께서, 성심으로 백성을 위하여 근본부터 바로잡아 기강을 세운 후에야만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우옹이 아뢰기를, “상께서 오직 왕도에 마음을 두고 백성을 생각한다면, 어질고 재주 있는 사람이 보좌하고 성덕(聖德)이 높아져서 기강을 세울 수 있고, 큰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이가 아뢰기를, “밝은 임금이 좋은 정치를 하려면, 당시의 제일가는 인사들을 근본되는 곳에 모으고, 평상시 규정에 구애할 것 없이 과거 출신이 아닌 민순(閔純) 같은 이들도 모두 한관(閒官)으로 경연관(經筵官)을 겸대하여 출입하여 논란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또 경연만이 아니라 수시로 불러 보아, 임금과 신하 사이를 집안사람이나 부자간처럼 되게 하여 정의가 서로 접해져야만 좋은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경연의 직임을 겸대하게 하는 데에 대하여는, 혹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없는 일이라 하여 어렵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비변사(備邊司)와 특진관(特進官)도 모두 《대전》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께서, “경연 이외에 어찌하면 자주 여러 신하들을 만나 볼 수 있겠는가?” 하시니, 이이가 아뢰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승지는 항상 들어와 일을 아뢰었으며, 시종하는 관원도 무시로 독대(獨對)하여 의심나는 일을 논란하였습니다. 성종조와 중종조에서 모두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께서, “대신과 옥당으로 입직하는 경우라면 내가 자주 불러 보겠지만, 승지가 일을 아뢰는 일은 어려울 것 같다.” 하였다. 상께서 이이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무슨 글을 읽었으며 제일 좋아하는 것은 무슨 글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과거를 준비할 때에 읽은 것은 안 읽은 것이나 같습니다. 학문에 뜻을 두면서 《소학》부터 읽어 《대학》ㆍ《논어》ㆍ《맹자》에 이르렀는데, 아직 《중용》까지는 못 읽었습니다. 다 읽고서 다시 시작하여 반복하였으나 아직도 통달하여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육경(六經)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께서 이르기를, “사서(四書) 중에 무슨 글을 제일 좋아하는가?” 하시니, 이이가 아뢰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없습니다. 여가가 있으면 《근사록(近思錄)》과 《심경(心經)》 등의 글도 읽었습니다. 다만 질병과 공무로 인하여 많이는 전심하여 읽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께서 이르기를, “소싯적에 글짓기도 연습하였는가. 그대의 문장을 보니 매우 좋은데 역시 일찍이 배웠던 것인가?”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신이 소싯적부터 문장을 배운 적은 없습니다. 소싯적에는 선학(禪學)을 상당히 좋아하여 여러 불경을 보았는데 착실한 곳이 없음을 깨닫고 다시 우리 유학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것도 문장을 하기 위하여 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문장을 짓는 데에 대강 문리를 이룬 것 역시 특별히 공부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찍이 한문(韓文)과 《고문진보(古文眞寶)》 및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의 대문(大文)을 읽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신사년(1581) 2월 10일 조강에 《춘추(春秋)》의 양공(襄公)이 함께 제(齊)나라를 포위한 대목부터 《좌전(左傳)》의 숙사위(夙沙衞)가 곽최(郭最)를 함몰시킨 대목까지 강하였다. 신이 말하기를, “위(衞)가 작은 원한으로 큰일을 그르쳤으니 참으로 소인입니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소인의 마음은 다만 사사로운 자기 몸만 있는 줄 알고, 국가가 있음을 알지 못하니 이래서 소인은 쓸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초나라 자경(子庚)이 정(鄭)나라를 친 대목에 이르러 이이가 말하기를, “공자 오(公子午)가 정나라를 치는 것이 불가함을 알고서도 애써 그 임금의 뜻을 좇아서 함부로 군사를 일으켜 많은 군사들을 죽였습니다. 대신으로서 이러하였으니 역시 나라를 저버린 것이 아닙니까?”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오(午)가 모른 것은 아니었지만 편안함만 생각한다는 혐의를 피하려고 군사를 출동하여 시험하였으니 이것은 자기 몸만을 생각하고 나라에 불충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이가 뒤이어 나아가 아뢰기를, “임금은 반드시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어 사람들에게 나아갈 바를 알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요순이 천하 사람을 인(仁)으로 거느리자 백성이 좇아갔으며, 걸주(桀紂)가 천하 사람을 포학함으로써 거느리자 백성이 좇아갔습니다. 지금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아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상의 뜻이 향하는 바를 모르게 하여 요순이 될지 걸주가 될지를 모르니, 이래서 정치의 효과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므로 신이 아뢰기를, “옛날에 이르기를, 선하여도 상 주지 않고, 악하여도 벌을 주지 않는다면 요순의 덕이 있더라도 천하를 다스리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솔하고 천박하여 겨우 일을 할 만하게 되면 바로 분분하게 경장(更張)하자는 의논을 일으키니 상의 생각에 소요(騷擾)가 있지 않을까 염려하여 일을 해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염려하여 마침내 정치를 잘해 보려는 마음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일 전하께서 사헌부에 대답하신 말씀이 잘못되어 아랫사람들이 모두 낙심하여 일을 해 보려던 마음이 다 달아났다고들 하기에 신이 웃으면서 ‘말이라는 것은 우연히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심이 이러하니 발언을 삼가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께서,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가.” 하시니, 이이가 아뢰기를, “박민헌(朴民獻)에 대하여 논계(論啓)할 때 상교(上敎)에, ‘대신의 비밀스런 사사로운 일을 파헤치겠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어찌 그대들이 오랫동안 논란한다고 하여 그만 고칠 줄 아느냐.’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이미 온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수령(守令)에 관한 일을 말하게 되자 김수(金睟)가 아뢰기를, “암행어사는 선문(先文)이 없으면 사체(事體)에 손상이 될까 합니다.” 하니, 이이가 아뢰기를, “수는 외방(外方)의 일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어사가 선문을 발송하고 순행한다면 불법을 살필 이치가 만무하니, 반드시 미행(微行)으로 민간에 출입해야 합니다.” 하였다.


[주D-001]공문중(孔文仲) : 촉당(蜀黨)의 한 사람으로 정자(程子)를 지적하여 위학(僞學)을 하는 간사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희령(熙寧) 초에 왕안석(王安石)의 이재(理財)와 훈병(訓兵) 법에 대하여 논하다가 파직당하였다.
[주D-002]여식(汝式) : 조헌(趙憲)의 자이다. 율곡 문하생인데,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켰다가 금산(錦山)에서 전사했다.
[주D-003]상앙(商鞅) …… 채경(蔡京) : 상앙은 전국 시대 위(衛)나라 사람으로, 형명학(刑名學)을 좋아하여 진 효공(秦孝公)을 도와 법령을 고쳐 정전법(井田法)을 없애고 부세법(賦稅法)을 개혁하였다. 장탕은 한(漢)나라 사람으로 무제(武帝) 때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어 모든 율령(律令)을 제정하였다. 조우도 한나라 사람으로, 무제 때 도필리(刀筆吏)에서 어사대부가 되어 장탕과 함께 율령을 논정하였다. 채경은 송(宋)나라 사람으로, 휘종(徽宗) 때 염철법(鹽鐵法)을 고쳤으며 원우제신(元祐諸臣)을 몰아내고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부활시켰다.
[주D-004]호치당(胡致堂) : 송나라 학자인 호인(胡寅)을 가리킨다. 양시(楊時)에게 종학(從學)하였다. 《宋史 卷435 胡寅傳》
[주D-005]홍치(弘治) :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이다.
[주D-006]여성(礪城) : 송익필(宋翼弼)을 가리킨다. 그의 본관이 여산인데 여성으로도 쓰기 때문에 그렇게 지칭한다.
[주D-007]성 적성(成積城)과 김 이정(金而精) : 성 적성은 적성 현감(積城縣監)을 지낸 성혼(成渾)이고, 이정은 퇴계의 문인인 김취려(金就礪)를 가리킨다.
[주D-008]궤연(几筵) : 죽은 사람의 영위(靈位)를 모시어 놓는 자리로 옛날의 제석(祭席)이다.
[주D-009]연제(練祭) : 소상(小祥)을 말한다. 소상에 상복을 빨아 입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D-010]초토(草土) : 거적자리와 흙 베개라는 뜻으로 거상(居喪) 중임을 이르는 말이다.
[주D-011]사실 : 백인걸(白仁傑)의 탄핵을 입은 일을 말한다.
[주D-012]허봉(許篈) : 선조(宣祖) 8년(1575)에 동서 분당이 생기자 동인(東人)의 선봉이 되었으며 뒤에 이이(李珥)를 탄핵하다가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주D-013]이발(李潑) : 선조(宣祖) 때 동인(東人)의 거두로서 이이(李珥)를 좋지 않게 보았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장살(杖殺)당하였다.
[주D-014]운회(韻會) : 《고금운회(古今韻會)》의 약칭이다. 송나라 황공소(黃公紹)가 편찬하였다.
[주D-015]채절재(蔡節齋) : 송나라 학자인 채연(蔡淵)을 가리킨다. 몸소 농사지으면서 벼슬하지 않았으며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다. 《宋元學案 卷62》
[주D-016]보망장(補亡章) : 《대학(大學)》에 ‘격물치지장(格物致知章)’이 없어졌다고 하여 주자가 보충하여 넣은 장(章)을 말한다.
[주D-017]웅치(雄雉) : 《시경(詩經)》 패풍(邶風)의 웅치장을 말한다. 그 내용은 부인이 부역에 나간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작품이다.
[주D-018]허노재(許魯齋) : 원나라 학자인 허형(許衡)을 가리킨다. 주자학자(朱子學者)로서 오징(吳澄)과 함께 원나라 시대의 이대가(二大家)로 손꼽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송시열(宋時烈)이 그가 호족(胡族)인 원나라에서 벼슬하였다고 하여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시켰다.
[주D-019]축색(蓄色) : 여색을 좋아하여 첩을 두는 것을 말한다.
[주D-020]을사년(乙巳年) 일 : 인종(仁宗)의 외숙인 대윤(大尹) 윤임 일파가 제거되고, 명종의 외숙인 소윤(小尹) 윤원형 일파가 득세하는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명종(明宗) 즉위 초에 회재 이언적(李彥迪)은 좌찬성으로 원상(院相)이 되어 국사(國事)를 관장한 공으로 위사 공신(衛社功臣)에 올랐고, 퇴계는 사옹원 정(司饔院正),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 등을 역임하였다. 성현의 출처 의리로 보면 이언적이나 이황의 출처가 모두 중용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주D-021]소인 한거장(小人閑居章) : 《대학(大學)》 성의장(誠意章)을 가리킨다. 성의장 중에 소인한거(小人閑居)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주D-022]주공(主公) : 남의 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로, 여기서는 황혁(黃赫)의 아버지 황정욱(黃廷彧)을 가리킨다.
[주D-023]곤지기(困知記) : 명나라 나흠순(羅欽順)이 지은 4권(卷)의 책으로, 그 내용은 대체적으로 주자학(朱子學)을 따르고 선학(禪學)을 배격하였으나 일원기론(一元氣論)을 주장하였다.
[주D-024]유윤궁선견(惟尹躬先見)에서부터 사씨지언 충신유종지설(史氏之言忠信有終之說) : 《서경(書經)》 태갑(太甲)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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