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문집 제10권_
발(跋)_
신송계(申松溪)계성(季誠)의 여표 비명(閭表碑銘) 뒤에 쓰다.
남명(南冥) 조 선생(曺先生)은 기상(氣像)과 법도(法度)가 준엄하여 사람들을 허여함이 적었으나 마침내 공을 막역지교(莫逆之交)로 여겨 서로 왕래하고 종유(從遊)하였으며, 심성(心性)을 논하고 의리를 강론할 적에 일찍이 존중함을 지극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또한 별세한 뒤에는 감히 잊지 못하고 묘표(墓表)를 지어 후세에 전하는 글을 만들었다. 낙천(洛川) 배신(裵紳) 역시 높은 학자인데 마침내 그 행실을 기록하여 전하니, 그 말씀은 과연 모두 착실하여 빈 말이 아니었다.
그 뒤에 부사(府使) 김극일(金克一)이 부(府)를 맡았을 적에 처음으로 선생의 덕의(德義)를 들었으며, 조남명의 갈문(碣文)과 배낙천의 행장(行狀)을 보고는 더욱 믿고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돌을 세워 표장(表章)할 것을 원하는 지방 사람들의 요청을 따라 마침내 글을 지어 새겼으나 이 비(碑)가 왜란(倭亂) 중에 부서져 없어짐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또다시 옛글을 새겨 복구하였다.
아! 아름다운 덕과 올바른 행실이 어찌 오랑캐의 침략과 병화(兵火)로 없어질 수 있겠는가. 병이(秉彛)의 천성(天性)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으니, 부의 선비로서 후생(後生)이 된 자가 각자 스스로 돌이켜 찾아서 자신을 위하는 옛 사람의 학문을 닦는 것이 어찌 이번 일로 인하여 진작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신 선생(申先生)의 남은 가르침이 영원한 세대에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부의 선비들은 또 우졸재(迂拙齋 박한주(朴漢柱)의 호)가 지은 새 비를 새겨 세우고 장차 서원(書院)을 새로 마련한 지역으로 옮겨 건립하려 하니 이는 선비들의 숙원(宿願)인바, 실로 모두 부백(府伯)이 현자(賢者)를 높이고 문교(文敎)를 숭상하는 특이한 업적에서 나온 것이다. 어찌 다만 한 부와 한때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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