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헌선생속집 제6권_ 잡저(雜著)_ 구설(究說)
우주(宇宙)가 우주가 된 것은 항상 기운[氣]이 승강(昇降)하는 가운데에 있을 뿐인데, 합하여 말하면 한 기운이요 나누어 말하면 음(陰)과 양(陽) 두 기운이다. 똑같이 한 이치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말하면 한 기운이라고 이르는 것도 가(可)하고, 혹 음이 되고 혹 양이 되는 것을 가지고 말하면 두 기운이라고 이르는 것도 가하니, 대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 이것이다.
오직 그 승강함에 크고 작음과 오래고 가까움의 차이가 있으므로 큰 승강의 가운데에 반드시 작은 승강이 있고, 오랜 승강의 가운데에 반드시 가까운 승강이 있다. 일원(一元) 가운데의 승강은 승강 중에 큰 것이며, 원(元)이 나뉘어 회(會)가 되면 자연 회 가운데의 승강이 있고, 회가 나뉘어 운(運)이 되면또 운 가운데의 승강이 있으며, 운이 나뉘어 세(世)가 되고, 세가 나뉘어 해[歲]가 되고, 해가 나뉘어 월(月)이 되고, 월이 나뉘어 일(日)이 되고, 일이 나뉘어 신(辰 시(時))이 됨에 이르러서도 모두 스스로 그 가운데의 승강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또 작게는 신(辰) 이하 분(分)·이(釐)·호(毫)·사(絲)의 나눌 수 없는 즈음에 이르고, 또 미루어 올라가서 일원(一元) 이상의 다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또한 어찌 일찍이 그 사이에 승강함이 없겠는가. 이는 바로 기운이 승강함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운에는 또 체(體)와 용(用)이 있으니, 오르고 내리고 가고 와서 한시도 정체(停滯)하거나 쉼이 없는 것은 체이니 곧 경기(經氣 일정한 기운)이며, 그 사이에 모이고 흩어지고 왕성하고 쇠하여 혹 밝기도 하고 혹 어둡기도 한 것은 용이니 곧 유기(游氣 떠돌아 다니는 기운)이다. 낮과 밤, 추위와 더위로 고금(古今)에 바뀌지 않는 것은 경기의 체(體)가 아니겠는가. 때에는 막히고 통함이 있고 물건에는 정(精)하고 거耔이 있는 것은 유기의 용(用)이 아니겠는가.
체는 일정함[常]이 있으나 용은 일정함이 없고, 체는 반드시 하나인데 용은 하나가 아니니, 이것은 또한 모두 자연의 떳떳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일정함이 없다고 이를 수 없고 또한 하나가 아니라고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기의 가운데에 또한 일정함과 변함이 있고 유기의 가운데에 또한 일정함과 변함이 있으니, 모두 한 가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소이연(所以然)은 어찌 모두 자연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유기가 되는 것도 별도로 한 가지의 기운이 있는 것이 아니요, 이 또한 경기 가운데에 변화한 것이다. 만약 경기가 오르고 내리는 가운데에 체(體)가 되어 있지 않다면 유기가 어디로부터 나와서 변화(變化)의 용(用)이 될 수 있겠는가.
내 일찍이 생각해 보니, 천지(天地)가 처음 개벽(開闢)하여 당초 사람과 물건이 없었을 때에는 자연 기화(氣化)한 사람과 물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녀(男女)와 빈모(牝牡)를 이룬 뒤에 인하여 번식해서 천만(千萬) 가지 물종과 억조(億兆)나 되는 족류(族類)가 된 것이니, 이 어찌 하늘은 아버지의 도(道)가 되고 땅은 어머니의 도가 되며, 팔괘(八卦)의 세 양(陽)은 남(男)이 되고 세 음(陰)은 여(女)가 되어서,서로 동요시키고 서로 맺어 마침내 잉태(孕胎)하여 낳는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경위(經緯)와 체용(體用)의 기운이 실로 조화의 기틀이 아니겠는가.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지와 만물의 이치가 겉과 속, 정(精)한 것과 거친 것의 묘함이 실로 모두 우리 인간의 한 몸 가운데에 갖추어져 있다. 우주가 우주가 된 이유가 모두 이치와 기운에서 나왔는데, 이미 우주가 되었으면 또 이치와 기운을 담고 실을 수 있게 마련이다.
우주가 처음에 어찌 일찍이 우주라는 명목(名目)이 있었겠는가. 이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우러러 천문(天文)을 관찰하고 굽어 지리(地理)를 살펴서 이와 기의 자연스러움을 알고는 상하(上下) 사방(四方)과 고왕(古往) 금래(今來)의 원래의 틀을 지목하여 우주라고 명칭한 것이다. 그 사이에 은미하고 드러남과 크고 작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작위(作爲)하는 것을 일[事]이라 하며, 크고 작음과 귀하고 천한 것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형기(形氣)가 있는 것을 물(物)이라 하며, 피차(彼此)와 내외(內外)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구역이 된 것을 경(境)이라 하며, 선후(先後)와 구근(久近)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만난 것을 때[時]라 한다.
그렇다면 지극히 은미함으로부터 지극히 드러남에 이르고 지극히 큼으로부터 지극히 작음에 이르기까지 그 일이 됨을 어찌 다 계산할 수 있겠는가. 지극히 거대함으로부터 지극히 세세함에 이르고 지극히 귀함으로부터 지극히 천함에 이르기까지 그 물건이 됨을 어찌 다 낱낱이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무 저기[彼]에서 아무여기[此]에 이르고 아무 안[內]으로부터 아무 밖[外]에 이르기까지 그 구역[境]이 됨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가장 먼저[先]로부터 가장 뒤[後]에 이르고 가장 오램[久]으로부터 가장 가까움[近]에 이르기까지 그 때가 됨을 어찌 다 계산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수(數)라는 것은 본래 물건의 변화를 다하고 많고 적음을 계산하는 것이나 수 또한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일의 앞에 또 일이 있고 물건의 앞에 또 물건이 있으며 환경의 앞에 또 환경이 있고 때의 앞에 또 때가 있으니, 무릇 몇 우주가 이미 지나가서 바야흐로 이 우주가 있는 것인가? 일의 뒤에 또 일이 있고 물건의 뒤에 또 물건이 있고 환경의 뒤에 또 환경이 있고 때의 뒤에 또 때가 있으니, 그렇다면 지금의 이 우주 뒤에 또다시 몇 우주가 장래에 있을 것인가? 이것이 이른바 생생(生生)의 역(易)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도리(道理)가 됨은 똑같은 이 도리가 하는 것이니, 어찌 이 도리가 변함에 따라 구별됨이 있겠는가.
우리 인간은 만물(萬物)과 함께 하늘과 땅 둘 사이에 사는바, 의거하여 편안함으로 삼는 것은 땅의 실어 줌이요 우러러 의지함으로 삼는 것은 하늘의 덮어 줌이다. 살기 좋은 땅을 골라 거주하고 언덕과 습지(隰地)를 경작하여 옷과 밥을 장만하고, 물과 육지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취하여 온갖 씀을 구비하며, 해와 달의 빛을 힘입어 낮과 밤을 구분하고, 별의 멂을 보아 사시(四時)와 일년(一年)을 정한다.
차례에 따라 순서를 정하는 것은 친소(親疎)의 족류(族類)이고, 도덕(道德)으로 삼는 것은 부여(賦與)받은 성명(性命)이고, 사업(事業)으로 여기는 것은 인간이 당연히 해야 하는 직분(職分)이니, 이로써 집안과 마을과 고을과 나라에 이르고 이렇게 하여 낳고 자라고 늙고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우리 인간이 되어서 대(代)를 이어가는 것들은 모두가 하늘과 땅 사이에 붙어 살면서 덮어 주고 실어 주는 교화(敎化)의 덕(德)을 받는 것이다.
옛날에 신성(神聖)한 분은, 그 말씀이 높음은 조화(造化)와 귀신(鬼神)의 묘함에서 벗어나지 않고 진실함은 인간의 일상 생활하는 떳떳한 일에 지나지 않았으니, 성인(聖人)의 뜻에 생각하기를 “사람은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는 사이에 살면서 하늘과 땅 사이의 도리를 다하면 그 사업이 스스로 다하게 된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반드시 보통 사람들의 사려(思慮)가 미칠 수 있는 바와 보통 사람들의 총명(聰明)이 이를 수 있는 것을 들어서 말씀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인간의 사려가 미칠 수 있는 바와 총명이 이를 수 있는 바를 스스로 다하여 분명히 보고 실제로 실천함이 있다면, 사려가 미치지 못하는 바와 총명이 이르지 못하는 것도 그 이치가 자연 이 당연한 떳떳한 도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이것이 성인이 사람을 가르치는 법이다.
이단(異端)의 학문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고원(高遠)하고 광절(曠絶)한 의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저들은 바로 이 도(道)의 밖에 한 가지의 뿌리와 맥(脈)을 거짓으로 만들어 내고 한 마당의 세계(世界)를 별도로 설정하여 말하니, 저들은 이치와 기운의 실제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요, 곧 이 도와 이 이치의 밖에 나아가서 그 허무(虛無)하고 활원(闊遠)함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법(禮法)을 떠나고 윤리(倫理)를 버리면서 스스로 이것을 도덕(道德)이라고 이르고 스스로 이것을 세계(世界)라 이르니, 그렇다면 이것은 바로 태극(太極)의 떳떳한 이치를 벗어난 것이다. 태극의 떳떳한 이치를 벗어나 과연 도와 이치가 있으며, 과연 세계가 있겠는가.
간(干)은 양(陽)에서 나왔는데 그 수(數)가 열이니 양의 수가 열이기 때문이요, 지(支)는 음(陰)에서 나왔는데 그 수가 열 둘이니 음의 수가 열 둘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양과 외로운 음은 모두 공(功)을 이루지 못하므로, 간(干)과 지(支)에는 음과 양이 있지 않음이 없다.
그리고 간지의 납음(納音)의 오행(五行)도 또한 음양이 아울러 행해지니, 이른바 서로 맞음이 형제(兄弟)와 같고 화합함이 부부(夫婦)와 같다는 묘함이 간지의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태극(太極)의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고 존재하지 않는 때가 없으므로 음양과 오행이 실로 태극의 큰 쓰임이 되는 것인데, 간지는 곧 음양과 오행이 유행하고 변화하는 절서(節序)의 중요한 기관(機關)이다.
알봉(閼逢)·전몽(旃蒙)·유조(柔兆)·강어(强圉)·저옹(著雍)·도유(屠維)·상장(上章)·중광(重光)·현익(玄黓)·소양(昭陽)의 열 가지는 곧 간(干)의 처음 이름이요, 곤돈(困敦)·적분약(赤奮若)·섭제격(攝提格)·단알(單閼)·집서(執徐)·대황락(大荒落)·돈장(敦牂)·협흡(協洽)·군탄(涒灘)·작악(作噩)·엄무(閹茂)·대연헌(大淵獻)의 열두 가지는 곧 지(支)의 처음 이름이니, 이러한 명칭을 붙인 것은 모두 이치와 기운이 변화하는 자연(自然)의 실제(實際)를 따라 명칭한 것이다.
그리고 간(干)을 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계(癸)로 구별하고, 지(支)를 자(子)·축(丑)·인(寅)·묘(卯)·진(辰)·사(巳)·오(午)·미(未)·신(申)·유(酉)·술(戌)·해(亥)로 다르게 말한 것은 곧 간과 지가 서로 사귀고 올라타는 간략한 조목(條目)을 합한 것이다.
그렇다면 간과 지가 반드시 아울러 행하고 서로 올라타는 것은 애당초 성인(聖人)이 자신의 뜻을 가지고 억지로 만들어 배열한 것이 아니요, 다만 이치와 기운의 묘함이 변화가 없을 수 없고 상생(相生)과 상극(相剋)이 없을 수 없으므로 다만 이것을 구별하여 칭호와 명목을 세웠을 뿐이다. 이는 진실로 음양과 오행이 간(干)이 되고 지(支)가 된 것이 자연 서로 문란하거나 섞이지 않고 떨어지거나 나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간(干)이 없는 지(支)가 없으니, 또 어찌 지가 없는 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작게는 일(日)·신(辰)과 크게는 세(歲)·월(月)이 모두 간과 지가 아울러 행해지는데, 다만 크고 작고 멀고 가까움의 각기 다른 규칙이 있어서 윤회(輪回)함에 더디고 빠른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신(辰)의 간지(干支)로 말하면 5일에 한 바퀴를 다 돌기 때문에 한 달 안에 모두 여섯 번을 돌고, 일(日)의 간지는 60일에 한 바퀴를 다 돌기 때문에 두 달이면 한 바퀴를 돌며, 월(月)의 간지는 5년에 다 돌고 세(歲)의 간지는 두 대(代 60년)에 다 도니, 이는 똑같은 방식이다. 이로써 미루어 나가면 원(元)·회(會)·운(運)·세(世)의 간지도 마땅히 이 이치와 이 기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원(元)은 12회(會)가 있고 회는 30운(運)이 있고 운은 12세(世)가 있는바, 운(運)의 수는 360이고 세(世)의 수는 4320이니, 그렇다면 간(干)과 지(支)를 결합하여 아무 간과 아무 지에서 시작하여 아무 간과 아무 지에서 끝나는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회(會)는 그 수가 12에 그치니, 이 원(元)의 가운데 태어나 사는 우리 인간은 이미 앞 일원(一元)의 자회(子會)가 어느 간(干)에서 시작되고 해회(亥會)가 어느 간에서 끝나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원(元) 가운데의 회(會) 중에 자회가 또한 어느 간에서 시작되고 해회가 또한 어느 간에서 끝나는지를 어찌 알 것이며, 또 다음 원(元)이 자회로부터 해회에 이르기까지 가(加)하는 바의 간이 어느 간이 되는지를 어찌 알겠는가. 이는 반드시 아울러 행하고 서로 계승함이 있을 것이나 이 원(元)의 가운데에 사는 우리 인간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비단 회(會)의 간지뿐만 아니라 원(元) 또한 이 이치와 이 기운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그렇다면 어찌 음양과 오행의 간지가 큰 순환(循環)이 되지 않겠는가. 이 또한 이 원(元)의 가운데에 사는 우리 인간이 상고하여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 이치와 기운의 무궁함은 또한 이것으로써 인식할 수 있다. 아, 참으로 무궁하며 참으로 무궁하다.
첫번째는 알봉(閼逢)인데 알(閼)은 기운이 처음 발하여 통하지 못한 것이요 봉(逢)은 때를 잃지 않은 것이니, 이 기운이 비록 미미하나 때는 잃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두번째는 전몽(旃蒙)인데 전(旃)은 기운이 조금 드러난 것이요 몽(蒙)은 밝지 못한 것이니, 이 기운이 조금 드러났으나 아직 밝음에 미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세번째는 유조(柔兆)인데 유(柔)는 기운이 견고하게 정해지지 못한 것이요 조(兆)는 처음 징험하여 가리켜 말할 수 있는 것이니, 이 기운이 비록 견고하게 정해지지는 못하나 조짐을 보아 징험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네번째는 강어(强圉)인데 강(强)은 기운이 비로소 견고하게 정해진 것이요 어(圉)는 이미 범위가 있는 것이니, 이 기운이 이미 견고하게 정해져서 바야흐로 역량(力量)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다섯번째는 저옹(著雍)인데 저(著)는 기운이 근기(根基)가 있는 것이요 옹(雍)은 충후(充厚)함이니, 이 기운이 이미 완고(完固)함에 이르러 바야흐로 장차 충후해짐을 말한 것이다.
여섯번째는 도유(屠維)인데 도(屠)는 기운이 비로소 꽉 찬 것이요 유(維)는 사방(四方)의 귀퉁이이니, 기운이 바야흐로 꽉 차서 사방의 귀퉁이에 두루 가득해짐을 말한 것이다.
일곱번째는 상장(上章)인데 상(上)은 성함이 지극한 뜻이요 장(章)은 공(功)이 이루어져 밝은 것이니, 이 기운이 성하고 지극해서 공이 이루어지고 교화가 이루어짐을 말한 것이다.
여덟번째는 중광(重光)인데 중(重)은 미루어 지극히 하는 뜻이요 광(光)은 밝음이 더욱 드러난 것이니, 이 기운이 단지 밝을 뿐만 아니라 또 더욱 발양(發揚)됨을 말한 것이다.
아홉번째는 현익(玄黓)인데 현(玄)은 기운이 십분(十分)에 이른 것이요 익(黓)은 어둠이니, 기운이 극도로 가득 차서 빛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열번째는 소양(昭陽)인데 소(昭)는 밝음이 나타나는 뜻이요 양(陽)은 자라나는 양이니, 이미 회복한 양이 이에 이르러 더욱 밝아짐을 말한 것이다.
첫번째는 곤돈(困敦)인데 곤(困)은 궁핍한 뜻이요 돈(敦)은 소생(蘇生)함으로 향하는 기틀이니, 옛 운(運)이 이미 다하고 새 기틀이 다시 일어남을 말한 것이다.
두번째는 적분약(赤奮若)인데 적(赤)은 양(陽)의 색깔이요 분약(奮若)은 떨쳐 일어남이니, 양이 동하는 기틀이 이에 이르러 더욱 분발함을 말한 것이다.
세번째는 섭제격(攝提格)인데 지지(地支)가 세번째에 이르러 형세와 지위가 이미 커져서 마땅히 십이지(十二支)의 추기(樞機)가 될 것이니, 마침내 섭제(攝提)라는 별이 북두(北斗)의 앞에 있어서 12방위(方位)의 중요함을 관장함과 같기 때문에 섭제격이라고 칭한 것이다.
네번째는 단알(單閼)인데 단(單)은 쇠하고 박(薄)한 뜻이요 알(閼)은 아직 통하지 못한 양기(陽氣)이니, 이때에 이르면 남은 음(陰)이 쇠하고 적어지므로 통하지 못하던 양(陽)이 통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섯번째는 집서(執徐)인데 집(執)은 견고하고 치밀한 뜻이요 서(徐)는 이끌어 통창(通暢)하게 하는 상(象)이니, 기세가 성하고 자라남을 말한 것이다.
여섯번째는 대황락(大荒落)인데 대황(大荒)은 변경(邊境)이요 낙(落)은 이름이니, 기세가 장성(壯盛)하여 교화가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일곱번째는 돈장(敦牂)인데 돈(敦)은 성대함이요 장(牂)은 해침이니, 모든 기세가 이미 성대함에 이르면 반드시 해치고 줄어드는 기미가 있는바, 이 때가 바로 그러한 때인 것이다.
여덟번째는 협흡(協洽)인데 협(協)은 화하고 고름이요 흡(洽)은 충족함이니, 노양(老陽)이 바야흐로 창성하고 작은 음이 숨어 있어서 온갖 구역이 화합하여 대화(大和)가 흡족한 시절임을 말한 것이다.
아홉번째는 군탄(涒灘)인데 군(涒)은 물이 깊고 넓은 것이요 탄(灘)은 물이 그치지 않는 것이다. 십이지가 협화(協和)함에 이르고 또 금(金)으로써 이으니, 마치 물이 이미 깊고 넓은데 또다시 쉬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열번째는 작악(作噩)인데 작(作)은 성취함이요 악(噩)은 엄하고 긴(緊)함이니, 물건이 모두 견고하고 진실해서 각각 성명(性命)을 정함을 말한 것이다.
열한번째는 엄무(閹茂)인데 엄(閹)은 거두어 닫음이요 무(茂)는 번화(繁華)함이니, 번화한 것이 탈락되어 물건의 빛이 어두워짐을 말한 것이다.
열두번째는 대연헌(大淵獻)인데 대연(大淵)은 물이 모인 것이요 헌(獻)은 받들어 올림이니, 금(金)이 반드시 물을 낳아서 한 해의 공을 마침을 말한 것이다.
첫번째는 갑(甲)이니 갑은 기운이 시작함이요, 두번째는 을(乙)이니 을은 기운이 아직 발하지 못한 것이요, 세번째는 병(丙)이니 병은 더욱 밝아짐이요, 네번째는 정(丁)이니 정은 형통하여 장성함이요, 다섯번째는 무(戊)이니 무는 깊고 후함이요, 여섯번째는 기(己)이니 기는 완전하고 진실함이요, 일곱번째는 경(庚)이니 경은 이로움을 이룬 것이요, 여덟번째는 신(辛)이니 신은 정(精)함을 지극히 한 것이요, 아홉번째는 임(壬)이니 임은 그쳐 묶음이요, 열번째는 계(癸)이니 계는 마침을 이루는 것이다.이상은 기(氣)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첫번째는 자(子)이니 자는 형체가 시작됨이요, 두번째는 축(丑)이니 축은 기름이요, 세번째는 인(寅)이니 인은 동작함이요, 네번째는 묘(卯)이니 묘는 밖으로 나오는 것이요, 다섯번째는 진(辰)이니 진은 떨쳐 일어남이요, 여섯번째는 사(巳)이니 사는 일이 성립됨이요, 일곱번째는 오(午)이니 오는 바야흐로 성함이요, 여덟번째는 미(未)이니 미는 도탑게 기름이요, 아홉번째는 신(申)이니 신은 거듭함을 지극히 함이요, 열번째는 유(酉)이니 유는 거둠이요, 열한번째는 술(戌)이니 술은 감추어 은밀하게 함이요, 열두번째는 해(亥)이니 해는 고요함이 지극한 것이다.이상은 형체(形體)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갑(甲)은 씨앗이 터져 싹이 나옴이요, 을(乙)은 싹이 굽은 채로 아직 나오지 못한 것이요, 병(丙)은 처음 나와 드러남이요, 정(丁)은 줄기가 생겨 자람이요, 무(戊)는 가지와 잎이 빽빽함이요, 기(己)는 줄기가 견고하고 가지가 정해짐이요, 경(庚)은 물건이 견고해져 열매로 향하는 것이요, 신(辛)은 열매가 이루어져 맛이 생기는 것이요, 임(壬)은 낟알이 나누어져 씨가 생기는 것이요, 계(癸)는 물이 다하여 나무가 되는 것이다.이상은 식물의 낳고 자람에 비유한 것이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子)는 새로운 뜻이요, 축(丑)은 자양(滋養)하여 보전함이요, 인(寅)은 새벽이요, 묘(卯)는 문을 여는 것이요, 진(辰)은 변화함이요, 사(巳)는 일에 종사함이요, 오(午)는 일이 많음이요, 미(未)는 진실함을 지극히 함이요, 신(申)은 더욱 힘씀이요, 유(酉)는 문을 닫음이요, 술(戌)은 계엄(戒嚴)함이요, 해(亥)는 견고히 감추는 것이다.이상은 인가(人家)의 아침과 저녁에 비유한 것이다.
간지(干支)의 조목은 어느 시대 어느 성인(聖人)에게서 나왔는지 알 수 없으나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의 도(道)에 합함은 실로 묘(妙)함을 얻었다. 나누기를 더욱 세밀히 하여도 그 차례가 문란하지 않고 쌓기를 더욱 오래하여도 그 기운이 어그러지지 않으니, 이는 참으로 음양과 오행의 실정이라 할 것이다. 음과 양이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조화(造化)의 추기(樞機)가 될 수 없고 오행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귀신(鬼神)의 공용(功用)을 펼 수 없으니, 이는 간지의 떳떳한 경도(經道)이다.
무릇 간(干)과 지(支)가 서로 배합함은 양간(陽干)의 다섯이 양지(陽支)의 여섯과 사귀어 30이 되고, 음간(陰干)의 다섯이 음지(陰支)의 여섯과 사귀어 30이 되어서 모두 합하여 60이 된다.해[歲]에 있으면 60년에 한 번 돌고 달에 있으면 5년에 한 번 돌며, 날짜에 있는 것은 해에 있는 숫자와 같고 시[辰]에 있는 것은 달에 있는 숫자와 같다.
기후(氣候)가 유행하는 것은 무릇 해와 달과 날짜와 시에 있어서 매번 돌아감이 반드시 같으나 서로 같을 수 없는 것이 있음은 어째서인가? 세(歲) 이상으로 세(世)·운(運)·회(會)·원(元)에 이르고, 신(辰) 이하로 각(刻)·분(分)·이(釐)·호(毫)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속한 간지가 있어서 큰 운(運)과 작은 운이 화하지 못함이 항상 많다. 그러므로 유행하는 기후가 서로 같은 경우가 반드시 적으니, 이는 간지 중에 위기(緯氣)인바, 이것을 또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음양의 두 기운과 오행이 모두 시종(始終)과 성쇠(盛衰)가 있음으로 인하여 서로 같을 수가 없고 서로 화(和)할 수가 없으니, 이는 형세의 자연함이다. 오직 서로 같을 수가 없고 서로 화할 수가 없기 때문에 상생(相生)하고 상극(相剋)하는 도(道)가 이에 나와서 서로 운행하고 서로 구제하여 조화의 공이 이에 이루어진다. 더구나 상생하는 것이 서로 왕성(旺盛)함에 이르지 않고 상극하는 것이 끊김에 이르지 아니하니, 이것이 바로 낳고 낳아 변화하는 묘리이다.
천지(天地)에 참여하여 화육(化育)을 돕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일이다. 우리 인간은 이미 스스로 삼재(三才)에 참여한 책임이 있으니, 그렇다면 화(和)하지 못한 것을 끝내 반드시 화함에 돌아가게 하고 같지 않은 것을 끝내 반드시 같음에 합하게 하는 것이 어찌 재성(裁成)하고 보상(輔相)하는 책무가 아니겠는가. 예컨대 해와 달이 마땅히 먹혀야 할 때에 먹히지 않고, 재앙이 마땅히 일어나야 할 때에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은 모두 성인(聖人)이 할 수 있는 일이니, 윗자리에 있는 자가 어찌 스스로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허(虛)와 실(實)은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무릇 형질(形質)이 된 것은 곧 이른바 형이하란 것이고, 무릇 도리(道理)가 된 것은 곧 이른바 형이상이란 것이며, 무릇 기후(氣候)가 된 것은 항상 형이상과 형이하의 중간(中間)에 있다. 도리의 입장에서 기후를 보면 기후는 형이하가 되고 형질의 입장에서 기후를 보면 기후는 형이상이 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기후는 항상 형이상과 형이하의 중간에 있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형질은 분명 실(實)이고 도리는 분명 허(虛)이며, 기후는 허와 실의 중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허한 가운데에도 실이 있고 실한 가운데에도 허가 있어서 허와 실이 일찍이 서로 떨어져서 허와 실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형질이 비록 실이 됨을 주장하나 또한 자연 형질 가운데에 허와 실이 있으며, 도리가 비록 허가 됨을 주장하나 또한 자연 도리 가운데에 허와 실이 있는 것이다. 기운은 허와 실의 중간에 있으니, 또 어찌 자연 허와 실이 있지 않겠는가.
형질이 된 것은 반드시 강(剛)과 유(柔), 동(動)과 식(植), 대(大)와 소(小), 정(精)과 조(粗)의 일정함이 있으니, 이는 실(實)이다. 그러나 형(形)은 단지 형만이 아니고 질(質)은 단지 질만이 아니어서, 모두 각기 태극(太極)의 한 이치를 받아 형질의 떳떳한 법(法)이 되며 인하여 낳고 화(化)하는 떳떳한 도가 되었으니, 그렇다면 형질이란 것은 바로 이치를 받아들이는 껍질이고 도(道)를 싣는 배와 수레가 되는 것이니, 이는 허(虛)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형질이 있는 것은 모두 사방(四方)과 상하(上下)의 빈 공간이 있은 뒤에야 나의 실체(實體)의 완전한 장소가 되는 것이니, 그렇다면 실이 어찌 허가 없이 스스로 설 수 있겠는가. 이는 형질의 허와 실이다.
그리고 기후(氣候)가 기(氣)가 되고 후(候)가 된 것으로 말하면, 항상 충만한 전체가 있으나 일찍이 충만함의 모상(模象)을 볼 수 없으며, 항상 운행하는 큰 쓰임이 있으나 일찍이 운행하는 종적(蹤跡)을 볼 수 없으니, 이는 허(虛)이다. 그러나 정(精)이 모이고 영(英)이 모여서 낳고 낳고 화(化)하고 화함이 다하지 않는 것이 어찌 실(實)이 아니겠는가.
이치에 이르러서는 형모(形貌)와 성색(聲色)을 볼 수 없고 방소(方所)와 한계(限界)를 찾을 수 없으니, 그 허(虛)가 무엇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다만 우주 사이에 기후가 된 것은 이 이치가 없으면 근저(根柢)가 될 수 없고, 우주 사이에 형질이 있는 것은 이 이치가 없으면 틀[模範]이 될 수 없으니, 근저가 되고 틀을 내는 것으로 보자면 그 어떤 실(實)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그렇다면 허(虛)와 실(實) 두 가지는 일찍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는 것이니, 허를 버리고 실을 말하는 것도 불가하며 실을 버리고 허를 말하는 것도 불가하다. 오직 허를 말하면서도 실이 허의 가운데에 있고 실을 말하면서도 허가 실의 가운데에 있게 한 뒤에야 말이 편벽되지 아니하여 도(道)가 반드시 떳떳함이 있을 것이다.
아, 오직 도를 아는 자만이 허와 실의 올바름을 알 수 있으며, 허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허하고 실할 때를 당하면 반드시 실하게 해서, 허와 실의 도리를 체행하는 자만이 자연의 묘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혹시라도 허와 실이 서로 쓰임이 되지 못하여, 한갓 허만 하고 허가 실에서 나온 줄을 알지 못하며, 한갓 실만하고 실이 허에서 나온 줄을 알지 못하여, 허한 자는 허만 지키고 실한 자는 실만 지킬 뿐이라면 필경 어떻게 평상(平常)한 도리가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허와 실 두 글자는 하늘과 땅과 사람과 물건의 실정(實情)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을 가지고 말하면 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마음이요, 또 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도이다. 마음이 허하지 않으면 천하의 도리를 다할 수 없고 도가 실하지 않으면 천하의 사물을 다할 수 없으니, 이것이 허와 실 가운데의 큰 단서가 아니겠는가. 아, 마음의 밖에 따로 도가 없고 도의 밖에 따로 마음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허와 실의 진경(眞境)일 것이다.
도리(道理)의 묘함은 진실로 무궁하다. 그러나 반드시 허관(虛寬 비고 넓음)한 여분의 수(數)가 있어야 하니, 허관의 수는 끝내 쓰지 않는 수가 되며 실수(實數)는 바로 쓰이게 되는 수이다. 그러나 실수가 쓰이게 되는 것은 모름지기 허수가 갖추어진 뒤에야 마침내 쓰이게 되는 실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니, 이 또한 도리가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 가만히 조화(造化)의 도(道)를 보니 징험할 만한 것이 매우 많았다. 하늘과 땅을 가지고 말하면, 해와 달과 별이 나오고 들어가는 한계와 낮과 밤과 추위와 더위의 구분과 바람과 우레와 비와 이슬이 때로 행하는 것은 진실로 하늘이 조화를 베푸는 구역(區域)인데, 그 나머지 상하(上下)와 사방(四方)의 밖이 얼마만한 지역이 되는지 알 수 없다. 구주(九州)와 오복(五服)의 안에 배와 수레가 이르고 사람의 힘이 통할 수 있는 곳은 진실로 사람과 물건이 거주(居住)하고 생육(生育)하는 곳인데, 그 나머지 팔황(八荒)과 사해(四海)의 밖에 불모지(不毛地)와 물건이 없는 지역이 그 얼마만한 지역이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여러 물건의 가운데에 있어서는 사람이 가장 귀중하여 도가 삼재(三才)에 참여된다. 그리하여 사(士)·농(農)·공(工)·상(商)의 각기 다른 직업이 있고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장유(長幼)·붕우(朋友)의 큰 윤리가 있으니, 이는 진실로 단 하루도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나머지 깃이 달린 조류(鳥類)와 털이 있는 짐승과 비늘이 있는 물고기와 껍데기가 있는 개충(介蟲) 중에는 기린(麒麟)과 봉황(鳳凰)과 거북과 용(龍)이 상서로운 물건이 되고 소와 말과 닭과 개와 양과 돼지가 육축(六畜)이 되니, 이 또한 진실로 없을 수 없는 물건이다. 그리고 이 밖의 각 종류에 반드시 모두 359개가 있어서 하늘과 땅 사이에 번식하여 꽉 찬 것이 또한 어쩌면 그리도 번잡한가.
하늘에 상(象)을 드리우고 있는 것으로는 위(緯)가 되는 해와 달과 오성(五星)이 있고 경(經)이 되는 이십팔수(二十八宿)가 있으며,그 나머지 1520개의 이름 있는 별 이외에 수만 개의 이름 없는 별이 큰 공중(空中)에 가득히 찬란한 것은 어째서인가?
산은 오악(五嶽)과 이름 있는 산과 큰 고개가 있는 이외에 허다한 구릉(丘陵)이 높이 솟아 있음은 어째서인가? 물은 사독(四瀆)과 사해(四海)가 있는 것 이외에 그 나머지는 호수와 늪과 시내와 샘물과 도랑으로 혹 물이 담겨 있고 혹 흐르기도 하여 대지(大地)에 종횡(縱橫)으로 모여드는 것은 어째서인가?
사람은 위에 있는 자로는 천자(天子)와 제후(諸侯)로부터 크고 작은 통서(統緖)가 각기 계승함이 있어 공경(公卿)·보필(輔弼)과 내외(內外)의 수많은 관원(官員)들이 반드시 천위(天位)를 함께하는 이외에 그 나머지 칭호를 참칭(僭稱)하고 지역을 할거(割據)하여 명칭을 도둑질하고 지위를 훔쳐서 거짓된 관직과 잘못된 직책을 이루 다 셀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리고 성인(聖人)과 현인(賢人)과 재주 있는 자와 덕(德) 있는 자와 정직한 자와 군자(君子)로서 한 세상의 사표(師表)가 되어서 우리 인간의 귀와 눈이 되는 자들은 하늘이 낳지 않으면 안 되니, 진실로 없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인(仁)을 해치고 의(義)를 무너뜨리고 사람을 상하게 하고 물건을 해쳐서 별종(別種)과 특이한 종류가 되는 자들이 또한 우리 인간 가운데에 태어나서 윤리를 무너뜨려 기탄(忌憚)함이 없게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여러 가지 곡식과 채소로서 우리 인간의 낳고 기르는 도구가 되는 것들은 진실로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나, 산과 들에 널려 있는 식물은 어쩌면 그리도 번성한가. 백 가지 과일과 천 가지 열매로서 세상 사이의 크고 작은 쓰임이 되는 것들은 진실로 모두 조화가 낳고 이룬 기이한 공인바 가지와 줄기와 꽃과 잎이 성하게 자라니, 이것들은 하루 아침과 하루 저녁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해를 마치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열매를 얻는 것이 있음은 어째서인가?
천지가 만든 물건 가운데에 이러한 종류를 다 열거할 수 없는데, 이 가운데 쓰이는 것은 많지 않고 쓰이지 않는 것이 많음은 어째서인가? 이는 모두 도리가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쓰이는 실수(實數) 이외에 반드시 모름지기 허관(虛寬)한 여분의 수가 있는 이유이다. 쓰이지 않는 것들은 항상 쓰이는 것의 의뢰하는 바가 되어서 없어도 될 듯하나 끝내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의 도와 주는 바가 되니, 이는 작은 지혜와 얕은 생각으로 측량하여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한 원(元)에는 12회(會)가 있고 한 회에는 30운(運)이 있고 한 운에는 12대[世]가 있고 한 대에는 30해[歲]가 있고 한 해에는 12달[月]이 있고 한 달에는 30일(日)이 있고 하루에는 12시[辰]가 있으니, 하나는 수에 있어 강령(綱領) 중의 강령이 된다.
하나가 나뉘어 12가 되고 12가 나뉘어 30이 되고 30이 또 나뉘어 12가 되었다. 이로부터 이후로 나뉘고 또 나뉘어서 나뉠 수 없는 수에 이르는데, 이것은 모두 12와 30이 서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중에 가장 첫번째인 하나가 강령 중의 강령이 되어서 그 나뉨이 12가 되고, 이 12의 하나가 다음의 강령이 되어서 그 나뉨이 30이 되며, 그 아래는 점차로 강령이 되어 나뉘면 나뉠수록 더욱 작아져서 12와 30이 전전하여 서로 낳는 것이 일찍이 문란하거나 어그러진 적이 없다.
12는 음(陰)의 수이고 30은 양(陽)의 수이니, 음은 항상 양을 낳고 양은 항상 음을 낳는다. 그러므로 본수(本數)가 12이면 반드시 30을 낳고 본수가 30이면 반드시 12를 낳는 것이다. 음양이 서로 행해지기 때문에 수(數)가 다함이 없어서, 가는 것은 지나가고 오는 것이 계속되어 우주(宇宙)의 낳고 낳는 조화가 잠시도 쉼이 없는 것이다. 12와 30이 반드시 모두 본수 가운데의 하나가 된 뒤에야 비로소 나뉘어지는 수가 되니, 강령이 되고 조목(條目)으로 나누어지는 순서 또한 자연의 형세이다.
그렇다면 12와 30이 음양의 수(數)에 기강이 되어, 신(辰)의 아래에 있는 것이 이미 작아서 나눌 수 없음에 이른다면 한 원(元)의 위에 있는 것을 또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비록 작아서 나눌 수 없고 커서 다할 수 없더라도 그 수는 없다고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이것을 알더라도 쓸 데가 없을 뿐이다.
우리 인간은 한 원(元)의 때를 만나 이 태어난 우주의 안에 살면서 오직 나의 지각(知覺)이 미쳐 알 수 있는 바를 따라 알고 나의 능력이 다하여 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할 뿐이니, 어찌 알 수 없는 것에 정신을 헛되이 허비하여 생각을 다하고, 행하여 다할 수 없는 것에 헛되이 심력(心力)을 써서 효험을 바라겠는가.
오직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도리(道理)의 무궁함일 뿐이다. 만약 나의 지각과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 하여 도리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매우 옳지 않으니, 이 의리는 우리 인간이 또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내 일찍이 무궁설(無窮說)을 지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치는 진실로 무궁한데 이치에서 나온 기운 역시 따라서 무궁하다. 구역(區域)이 된 것이 어찌 이치와 기운이 없는 지역이 있겠는가. 때가 된 것이 어찌 이치와 기운이 없는 때가 있겠는가. 하늘과 땅이 비록 크나 덮어 주고 실어 주는 것은 다만 하늘과 땅 둘 사이의 만물(萬物)이 있을 뿐이며, 통하고 꿰뚫는 것은 다만 하늘과 땅 둘 사이의 고금(古今)이 있을 뿐이니, 그렇다면 하늘과 땅 역시 스스로 한 물건의 큰 것이 될 뿐이다.
이치는 진실로 무궁한데 기운 또한 따라서 무궁하니, 이치와 기운이 상하(上下)와 사방(四方)을 통하고 고왕(古往)과 금래(今來)에 통하는 것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이것을 가지고 논한다면 상하와 사방을 하늘과 땅 사이에서 말하고 고왕과 금래를 하늘과 땅의 안에서 말하는 자들은 이치와 기운의 실제를 안다고 할 수 없다.
형상(形象)이 있고 체질(體質)이 있는 것은 반드시 다하는 곳이 있고 반드시 다할 때가 있으므로 모두 무궁할 수가 없으나, 이치로 말하면 형상이 없고 체질이 없으니, 어찌 다하는 곳이 있고 어찌 다할 때가 있겠는가. 이는 진실로 무궁함이 되는 것이다. 기운은 마침내 어둡고 밝음과 통하고 막힘이 있으니, 그렇다면 형상이 없다고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이미 형상이 있다면 또 체질이 없다고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다하는 곳이 없으며 다할 때가 없겠는가. 이것은 이치와 함께 무궁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기운에는 또한 통체(統體)의 기운과 쓰이는 기운의 차이가 있다. 통체의 기운은 형상과 체질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오직 이 이치를 받들 뿐이어서 반드시 이 이치를 따르는 것을 떳떳한 분수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는데 기운 또한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이치가 있지 않은 때가 없는데 기운 또한 있지 않은 때가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통체의 기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통체 가운데에 쓰이는 기운으로 말하면, 이미 구분(區分)과 피차(彼此)가 없을 수 없고 또 시종(始終)과 구속(久速)이 없을 수 없으니, 이 또한 이치의 큰 쓰임에 기준하여 구분이 되고 시종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궁한 것은 이 이치의 전체(全體)와 이 기운의 통체(統體)가 아니겠는가.
사람의 지각(知覺)과 사려(思慮)는 언제나 만나는 바의 때와 처한 바의 위치와 듣는 바의 일과 보는 바의 사물에 국한되게 마련이므로 달관(達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이 네 가지 한계를 벗어난 뒤에야 이치와 기운의 무궁함을 달관할 수 있을 것이다.
무궁한 태허(太虛)의 가운데에 크게 모이고 흩어짐이 있는 것이 바로 하늘과 땅의 닫히고 열림이다. 크게 모이고 흩어지는 것도 자연 운수가 그 사이에 있으니, 예컨대 낮과 밤이 서로 교대하고 추위와 더위가 서로 교대함과 같은 것이다. 뒤 천지가 장차 모이게 되고 앞 천지가 크게 흩어짐이 이미 오래되면 옛 운수가 이미 다하고 새 운수가 마땅히 계승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쁜 운이 물러가고 통태(通泰)한 운이 장차 회복되어 원기가 쌓인 것이 이미 축적됨에 폐색(閉塞)의 큰 한계가 이미 지나간다. 이에 정(精)이 모이고 영(英)이 모여서 첫번째로 나오는 하나의 큰 물건이 되어 조화(造化)의 터전과 생물(生物)의 부고(府庫)가 되니, 이것이 이른바 하늘과 땅이라는 것이다.
오직 하늘의 형체는 떠 있으면서도 실(實)하고 동(動)하면서도 떳떳하고 가벼우면서도 확고(確固)하고 맑으면서도 완전하고 둥글게 돌아가면서도 회전함이 매우 신속한데, 남(南)과 북(北)이 종(縱)이 되고 동(東)과 서(西)가 위(緯)가 되니, 이는 큰 기운이 꽉 묶인 것이다. 둥글고 후한 것의 쌓임과 혼합(渾合)의 온전함이 모두 몇만 겹이 되는지 알 수 없는데, 높이 솟은 가운데 비어 있는 공간에 상하와 사방이 또한 몇만 리가 되는지 알 수 없으니, 이것은 억측으로 헤아리고 숫자로 용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높고 깊음과 멀고 큼을 한결같이 이치와 기운의 자연에 맡길 뿐이니, 이치와 기운의 자연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오직 강건(剛健)하고 중정(中正)하여 실제로 이치와 기운의 당연함을 얻었으니, 이치와 기운의 당연함이 어찌 간격이 있겠는가. 하늘이 하늘이 된 이유가 이것이다.
대기(大氣)가 돌고 그치지 아니하여 고리처럼 끝이 없다면 그 가운데가 반드시 비었을 것이니, 빈 것도 또한 떠돌아다니는 기운[游氣]이 모인 것이다. 떠돌아다니는 기운이 오랫동안 쌓이면 젖어서 물을 이루니, 물이 쌓여 기(氣)가 올라가서 뜨거워져 불이 되며, 물과 불이 이미 사귀어서 찌꺼기가 되어 흙을 이루면 정(精)이 가운데에 맺혀 금철(金鐵)이 되고 영(英)이 밖에 나타나 초목(草木)이 된다. 이는 바로 오행(五行)의 질(質)이 서로 구비하고 합하여 모여서 마침내 기가 쌓인 가운데에 대지(大地)가 되어서 하늘과 더불어 짝이 되는 것이다.
하늘은 상하와 사방을 싸고 있고 땅은 하늘의 가운데에 있어서 하늘과 땅이 이미 이루어져 자리를 나누고 있으면, 태양(太陽)의 정(精)이 해가 되어 낮을 맡고 태음(太陰)의 정(精)이 달이 되어 밤을 맡는다. 이십팔수(二十八宿)가 구주(九州)에 나뉘어 배열되어 도수(度數)를 점치고 오성(五星)과 해와 달이 앞뒤로 번갈아 다녀서 하늘의 정사(政事)가 되며, 오악(五嶽)이 중원(中原)에 나열하여 솟아 있고 사독(四瀆)이 구주(九州)에서 경위(經緯)가 된다. 이에 이기(二氣)와 오행(五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아울러 행하고 서로 차례가 되어서 조화가 행해지고 만물이 생산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늘과 땅에 참여하니 만물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우주 사이의 사업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 자이다. 삼황(三皇)이 삼황의 사업을 하고 오제(五帝)가 오제의 사업을 하고 삼왕(三王)이 삼왕의 사업을 한 것도 모두 자신의 임무를 다한 것이다. 공자(孔子)가 옛 경서(經書)를 설명하고 《춘추(春秋)》를 편수(編修)한 것도 그 사업이 실제는 모두 이 이치와 기운의 유행함에 나아가서 그 정종(正宗)을 밝힌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내가 상고설(上古說)을 지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고 시대에 문자[書契]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임금과 신하의 나옴과 국도(國都)와 연대(年代)를 어떻게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였겠는가. 이제 외기(外紀)에 이른바 반고씨(盤古氏)·천황씨(天皇氏)·지황씨(地皇氏)·인황씨(人皇氏)의 칭호가 있는데, 이 또한 반드시 모두 문자가 이미 만들어진 뒤에 전고(前古)에 서로 전하는 말을 채집하여 추후에 이름 붙인 것일 것이다.
상상해 보건대 이 때에 태어난 인물은 반드시 총명(聰明)하고 예지(叡智)하여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신성(神聖)이 많았을 것이니, 그렇다면 자연 상(象)을 근거하여 이치를 알고 색깔을 보면 마음을 알고 목소리를 들으면 뜻을 알고 물건을 대하면 성질을 알고 일을 만나면 의리(義理)를 밝혀서, 날마다 밝아지는 바가 있고 달마다 변(變)하는 바가 있고 해마다 화(化)하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천황씨의 세대가 반고씨의 세대보다 밝고 지황씨의 세대가 천황씨의 세대보다 밝았을 것이요, 인황씨로부터 이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가르쳐지고 법이 없어도 순종하여 각자 본성(本性)을 그대로 간직하고 도(道)를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문자가 있기 이전부터 전할 만한 실제가 있어서 마침내 그 말을 근거하여 주군(主君)의 명칭을 붙였을 것이다.
혹자는 하늘은 자회(子會)에서 열리고[開] 땅은 축회(丑會)에서 열리고[闢] 사람은 인회(寅會)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근거하여, 천황씨를 자회의 군주라 하고 지황씨를 축회의 군주라 하고 인황씨를 인회의 군주라 한다.
그러나 이제 이치를 가지고 추구해 보면 하늘이 비록 자회에서 열렸다 하더라도 단지 하늘만 있고 땅이 없으니 어떻게 조화가 있을 것이며, 땅이 비록 축회에서 열렸다 하더라도 개벽(開闢)함이 자회와 축회, 두 회(會)의 사업이 될 뿐이니 어떻게 사람과 물건을 조화할 수 있겠는가.
황(皇)은 크다는 뜻이니, 군장(君長)이 나옴은 반드시 사람이 많고 물건이 많음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형세가 만약 군주가 되어 통솔하는 자가 없으면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고 물건이 물건다운 물건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처음으로 군장이 있어서 통솔한 것이니, 이는 천지 가운데에 자연한 이치와 형세가 아니겠는가. 이미 사람과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군장이 있어서 억조(億兆)의 원수(元首)가 되어야 할 것이니, 이는 신하와 백성들이 모의(模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황(皇)이라고 명칭한 것이니, 이것이 천하에 군주 노릇한 자의 첫번째 칭호일 것이다.
천황씨라고 칭한 것은 처음 천도(天道)를 밝혀서 사람들을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닷새가 후(候)가 되고 세 후가 기(氣)가 되고 여섯 기가 한 철이 되고 네 철이 한 해가 됨을 알아서, 때에 따라 사무에 응하는 도가 이로부터 섰을 것이니, 천황씨가 이 도를 밝혀 가르쳤기 때문에 천황씨라고 칭했을 것이다.
지황씨는 지리(地理)를 밝혀 법을 드리운 자일 것이다. 예컨대 동·서·남·북의 기후가 똑같지 않고 교야(郊野)와 원습(原隰)은 높고 낮은 지세(地勢)가 다르게 마련이니, 거주할 곳을 선택하는 방법과 거두어 채집하고 취하고 버리는 방식을 구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천하를 나누어 아홉 주(州)로 만들고 온 세계를 구획하여 만 개로 만들어서 각기 거주하는 곳이 있고 모두 이익을 얻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이 때문에 낳고 낳게 된 것이니, 이 때에 지황씨가 이 이치를 밝혀서 가르쳤기 때문에 지황씨라고 칭했을 것이다.
그리고 인황씨의 세대로 말하면 천도(天道)와 지리(地理)가 이미 모두 밝혀졌으니,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은 어찌 인도(人道)가 아니겠는가. 사람은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다섯 가지 떳떳한 성(性)이 있어 천하의 큰 근본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중(中)을 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희(喜)·노(怒)·애(哀)·낙(樂)·애(愛)·오(惡)·욕(欲)의 일곱 가지 정(情)이 천하의 달도(達道)가 되었으니, 그렇다면 화(和)를 지극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부자간(父子間)의 친함과 군신간(君臣間)의 의리와 부부간(夫婦間)의 분별과 장유간(長幼間)의 차례와 붕우간(朋友間)의 신의는 곧 천하의 대경 대법(大經大法)이니, 이것을 경륜(經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황씨가 이 도를 밝혀서 가르쳤기 때문에 인황씨라고 칭했을 것이다.
삼황(三皇)의 세대에는 비록 문자(文字)의 유행과 법제(法制)의 구비함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천도(天道)를 밝게 알지 못하면 사람들이 해가 나오고 들어감과 더위와 추위가 반드시 제때에 옴을 알지 못했을 것이요, 지리(地理)를 밝게 알지 못하면 사람들이 거주하고 왕래함의 마땅함을 알지 못했을 것이요, 인도(人道)를 밝게 알지 못하면 사람들이 성(性)과 정(情)이 마음속에 있고 직분이 자기 몸에 있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삼황의 사업은 삼재(三才)의 도(道)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문자를 만든 뒤에 각기 먼저 밝힌 것을 가지고 차례로 이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삼황은 각기 첫번째로 나온 군주가 되어서 한 세상을 통솔했던 자일 것이요, 이른바 형제(兄弟)라는 자들은 각기 보좌하는 직책이 있었는지, 아니면 각기 나누어 다스리는 임무가 있었는지 이는 모두 알 수 없다.
그 뒤에 유소씨(有巢氏)는 나무를 얽어 집을 만든 것을 가지고 칭호하였고, 수인씨(燧人氏)는 사람들에게 화식(火食)을 가르친 것을 가지고 칭호하였으니, 그렇다면 삼황의 칭호 역시 실제의 공적(功績)이 전해지는 바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아, 삼분(三墳)과 구구(九丘)의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으니, 어찌 우주 사이에 하나의 큰 흠이 아니겠는가.
무릇 허(虛)는 실(實)의 근본이니, 허가 없으면 어찌 실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허는 이 이치의 본체(本體)이니, 이 이치가 일찍이 온갖 실의 본체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른바 실이라는 것은 기(氣)와 질(質)과 형(形)이니, 만물은 모두 기가 있은 뒤에 질이 있고 질이 있은 뒤에 형이 있게 마련이다.
기는 동정(動靜)과 후박(厚薄)이 있고 질은 강유(剛柔)와 미악(美惡)이 있고 형은 대소(大小)와 귀천(貴賤)이 있으니, 만약 하나의 허(虛)함이 본체가 되어 있지 않다면 온갖 실(實)함을 누가 그렇게 만들었겠는가. 허함이 이 이치의 본체가 되기 때문에 이에 기가 되지 않을 수 없고 질이 되지 않을 수 없고 형체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그러한 뒤에야 허함의 사업은 기·질·형의 온갖 실함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늘과 땅으로부터 이하로 무릇 기(氣)가 되고 질(質)이 되고 형(形)이 된 것은 모두 허한 가운데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 인간은 단지 실함이 사람이 되고 물건이 되고 동함이 되고 그침이 됨을 보고는, 사람은 스스로 사람이요 물건은 스스로 물건이요 동함은 스스로 동함이요 그침은 스스로 그치는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하늘이 되고 땅이 되고 사람이 되고 물건이 되고 동함이 되고 그침이 됨이, 그 실제는 모두 하나의 허함을 따라 본체가 되었기 때문에 이 실함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는 허와 실이 한 근원이 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 가운데에는 자연 하늘과 땅 가운데의 태허(太虛)가 있고 사람과 물건에 이르러서도 모두 각기 그 가운데의 태허가 있으니, 사람을 가지고 말한다면, 자사(子思)의 이른바 ‘희(喜)·노(怒)·애(哀)·낙(樂)이 발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한 것이 이 경계(境界)가 아니겠는가. 우리 인간은 마땅히 이 마음의 태허가 일찍이 천지의 태허와 동일한 경계가 아닌 것이 아니며, 희·노·애·낙이 밖으로부터 이르는 것이 곧 내 마음의 태허 가운데에 왕래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과연 허함을 허하게 하고 실함을 실하게 하면 천지가 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길러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허와 실의 묘리이다. 이제 내가 이 말을 하는 것도 모두 내 마음의 태허 가운데에서 나온 것이다. 마침 새 아침에 일이 없고 좌우에 붓을 잡을 만한 사람이 있으므로, 마침내 생각이 미치는 것을 불러 주어 쓰게 하는 바이다.
[주D-002]기화(氣化) : 형화(形化)와 대칭되는 말로 천지 자연의 기운에 의하여 물건이 저절로 태어남을 이르며, 형화는 수컷과 암컷이 교접하여 생겨남을 이른다.
[주D-003]팔괘(八卦)의……되어서 : 《주역》의 팔괘 중 건(乾)은 아버지이고 곤(坤)은 어머니이며, 진(震)은 장남(長男)이고 감(坎)은 중남(中男)이고 간(艮)은 소남(少男)이며, 손(巽)은 장녀(長女)이고 이(離)는 중녀(中女)이고 태(兌)는 소녀(少女)이니, 세 양(陽)은 곧 진·감·간의 세 괘를 이르고, 세 음(陰)은 손·이·태의 세 괘를 이른다.
[주D-004]상하(上下)……원래의 틀 : 상하는 하늘과 땅이며 고왕(古往)은 지나간 옛날이고 금래(今來)는 지금 또는 미래를 이르는데, 상하와 사방을 우(宇)라 하고 고왕과 금래를 주(宙)라 하므로 말한 것이다.
[주D-005]생생(生生)의 역(易) : 생생은 낳고 낳는 것으로 상생(相生)하여 끊이지 않는 역리(易理)를 이르는 것이니,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낳고 낳음을 역이라 한다.[生生之謂易]” 하였다.
[주D-006]납음(納音)의 오행(五行) : 납음은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오음(五音)과 십이율(十二律)에 맞추는 것으로, 갑자(甲子)를 황종(黃鐘)의 상(商)이라 하고 을축(乙丑)을 대려(大呂)의 상이라 하며, 상은 금(金)에 속하므로 갑자·을축을 바닷속의 금[海中金]이라 하는 따위를 이른다.
[주D-007]금(金)이……마침 : 한 해의 공이란 봄에 낳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열매를 맺고 겨울에 수확하여 감춤을 이른다. 오행상생설(五行相生說)에 의하면 나무가 불을 낳고 불이 흙을 낳고 흙이 금을 낳고 금이 물을 낳고 물이 나무를 낳으니, 봄은 나무에 해당하고 여름은 불에 해당하고 가을은 금에 해당하고 겨울은 물에 해당하며 여름의 끝달인 6월은 흙에 해당하므로 말한 것이다.
[주D-008]양간(陽干)의……된다 : 간(干)과 지(支)의 양(陽)과 음(陰)은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를 홀수는 양, 짝수는 음으로 구분하는데, 양간의 다섯이란 갑(甲)·병(丙)·무(戊)·경(庚)·임(壬)을 이르고, 양지(陽支)의 여섯이란 자(子)·인(寅)·진(辰)·오(午)·신(申)·술(戌)을 이르며, 음간(陰干)의 다섯이란 을(乙)·정(丁)·기(己)·신(辛)·계(癸)를 이르고, 음지(陰支)의 여섯이란 축(丑)·묘(卯)·사(巳)·미(未)·유(酉)·해(亥)를 이른다. 양간과 양지가 차례로 사귀고 음간과 음지가 차례로 사귀어 육십갑자가 되었다.
[주D-009]상생(相生)하고 상극(相剋)하는 도(道) : 상생은 서로 낳는 것으로 나무는 불을 낳고 불은 흙을 낳고 흙은 금을 낳고 금은 물을 낳고 물은 나무를 낳는 것[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 水生木]이며, 상극(相剋)은 서로 이기는 것으로 금은 나무를 이기고 나무는 흙을 이기고 흙은 물을 이기고 물은 불을 이기고 불은 금을 이기는 것[金剋木 木剋土 土剋水 水剋火 火剋金]을 이른다.
[주D-010]재성(裁成)하고……책무 : 《주역(周易)》 태괘(泰卦) 상전(象傳)에 “하늘과 땅이 사귐이 태(泰)이니, 군주가 이것을 보고서 하늘과 땅의 도를 재성하고 하늘과 땅의 마땅함을 보상하여 백성을 도와 준다.” 하였다. 재성은 재성(財成)으로 쓰기도 하는데, 지나친 것을 억제함을 이르고, 보상은 부족한 것을 보태 줌을 이른다.
[주D-011]구주(九州)와 오복(五服) : 구주는 옛날 중국의 아홉 주(州)로 기주(冀州)·연주(兗州)·청주(靑州)·서주(徐州)·양주(揚州)·형주(荊州)·예주(豫州)·양주(梁州)·옹주(雍州)를 가리키며, 오복은 전복(甸服)·후복(侯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으로 천자가 직접 통치하는 기내(畿內)를 전복이라 하고, 500리씩 점점 멀어져 황복에 이르면 2500리가 되는바, 구주와 오복은 중국 천하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주D-012]팔황(八荒)과 사해(四海) : 팔황은 팔방(八方)의 먼 곳이며, 사해는 동해(東海)·서해(西海)·남해(南海)·북해(北海)로 온 세계를 의미한다.
[주D-013]위(緯)가……있으며 : 오성(五星)은 금성(金星) 목성(木星) 수성(水星) 화성(火星) 토성(土星)의 다섯 별인데 이들 별은 한곳에 붙어 있지 않고 떠돌아다닌다. 이십팔수(二十八宿)는 각(角)·항(亢)·저(氐)·방(房)·심(心)·미(尾)·기(箕)·두(斗)·우(牛)·여(女)·허(虛)·위(危)·실(室)·벽(壁)·규(奎)·누(婁)·위(胃)·묘(昴)·필(畢)·자(觜)·삼(參)·정(井)·귀(鬼)·유(柳)·성(星)·장(張)·익(翼)·진(軫)의 스물여덟 별인데 이들 별은 한곳에 붙어 있어 일정하다. 경(經)은 날줄이고 위(緯)는 씨줄이니, 경은 변치 않는 것을 이르고 위는 변함을 이른다. 그리하여 돌아다니는 해와 달과 오성을 위라 하고, 붙박이로 한곳에 붙어 있는 이십팔수를 경이라 한 것이다.
[주D-014]오악(五嶽) : 오악은 중국의 다섯 개의 큰 산으로 동악(東嶽)인 태산(泰山), 서악(西嶽)인 화산(華山), 남악(南嶽)인 곽산(霍山), 북악(北嶽)인 항산(恒山), 중악(中嶽)인 숭산(崇山)을 이른다.
[주D-015]사독(四瀆) : 사독은 네 개의 큰 물로 양자강(揚子江)·황하(黃河)·회수(淮水) 제수(濟水)를 이른다.
[주D-016]생이지지(生而知之)의 신성(神聖) : 생이지지는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의 도리를 아는 것이며 신성은 성인(聖人)의 교화가 신묘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중용》에 “혹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혹 배워서 알고 혹 쉽게 알지 못하여 애를 태운 뒤에 알기도 하나 그 앎에 미쳐서는 똑같다.[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也 一也]” 하였으니,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것은 성인만이 가능하다 한다.
[주D-017]하늘은……태어났다 : 강절(康節) 소옹(邵雍)의 운회설(運會說)에 입각한 것이다. 1원(元)은 하늘과 땅이 한 번 개벽하여 끝나는 기간으로 12회(會)가 있으며, 1회는 1만 800년이어서 총 12만 9600년이 되는바, 하늘은 자회(子會)에서 열리고 땅은 축회(丑會)에서 열리고 사람은 인회(寅會)에서 태어났다 한다. 즉 처음에는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고 먼지로 덮여 있다가 1만 800년이 지난 뒤에 하늘이 생기고, 다시 1만 800년이 지난 뒤에 땅이 생기고, 그 후 또다시 1만 800년이 지난 뒤에 사람과 물건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주D-018]삼황(三皇) : 일반적으로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천황씨(天皇氏)와 지황씨(地皇氏)와 인황씨(人皇氏)를 가리킨다.
[주D-019]이른바 형제(兄弟)라는 자들 : 《십구사략(十九史略)》의 첫번째인 태고(太古)에 “천황씨는 목덕(木德)으로 왕 노릇 하였으니,……형제 12명이 각각 1만 8000년을 하였으며, 지황씨는 화덕(火德)으로 왕 노릇 하였으니 형제 11명이 또한 각각 1만 8000년을 하였으며, 인황씨는 형제 9명이 나누어 구주(九州)를 다스렸으니 무릇 150세(世)로 도합 4만 5600년을 하였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말한 것이다.
[주D-020]삼분(三墳)과 구구(九丘) : 모두 상고 시대의 서적으로 삼분은 삼황(三皇)의 일을 기록한 책이고, 구구는 중국 구주(九州)의 내용을 기록한 책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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