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생문집 제12권_서(書) 1

백사위(白士偉) 인걸(仁傑) 에게 답하다

 

가을 하늘은 드높고 맑은데 근심을 벗어 버리고 돌아가는 소매가 날아갈 듯 가벼워 흥치를 따라잡을 수 없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황곡(黃鵠)에 대한 땅벌레의 탄식을 자아내게 하는지라 부러운 마음 금치 못하겠습니다. 제 경우에는 높은 자리에 발탁됨을 받을 만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 반년째 사양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나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도움도 되지 못하는 벼슬길에 갑자기 나섰는지 모르겠습니다. 돌아갈 계획을 세우자 마음은 더욱 간절해지는데 성상께서 들어주실 기약은 더욱 아득하기만 하니, 병든 몸으로 삼동(三冬)의 객지 생활이 어떻겠습니까. 사리 판단이 밝지 못한 것이 몹시 부끄럽습니다.
물이 천지가 생겨나는 근원이라는 설(說)에 대해서는 간밤에 만나 뵙고 충분히 논의하였는데, 공은 왜 의심이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지요? 이미 믿지 않고 계시므로 지금 여러 말을 하더라도 이해하실 리가 없을 듯하기에 옛말을 인용하여 설명하여 보겠습니다. 공께서도 말씀하신 소자(邵子)의 이른바, “일양이 처음으로 생겨나는 곳이요 만물이 아직 채 나지 않은 때라네. 물맛은 바야흐로 담박하고 천지의 소리 들리지 않네.[一陽初動處, 萬物未生時, 玄酒味方淡, 太音聲正希]”라는 시를 어떻게 보셨는지요? 이것이 비록 1년의 동지(冬至)를 가리켜 말한 것이지만 일원(一元)의 자회(子會) 첫머리에도 이러한 묘처(妙處)가 없겠습니까. 만일 이러한 묘처가 없다고 한다면 이러한 이치를 말할 수가 없겠지만, 이러한 묘처가 있다고 한다면 이때에 천지가 먼저 있겠습니까? 아마도 천지에 앞서 물이 먼저 있을 것입니다. 시에서 이미 “만물이 아직 생기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어찌 이른바 천지라 해서 물보다 먼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1년의 동지로만 본다면 천지가 있은 뒤에 이러한 묘처가 있다고 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일원의 시발점으로 본다면 이때에는 수기(水氣)만이 아득하고 망연하여 형상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처음으로 생겨나고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자(孔子)의 이른바, “천일(天一)이 물을 낳는다.” 한 것은 이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따라서 천지도 이 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공은 여기에 대하여 깊이 궁리하지 않고 다만 이미 형성된 천지를 근거로 하여 말하니, 어떻게 조화와 변화의 무궁한 묘리를 통달할 수 있겠습니까.

[주D-001]황곡(黃鵠)에 …… 탄식 : 황곡은 높이 날고 땅벌레는 더러운 흙 속에 있으니,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는 고상(高尙)한 사람을 보는 것이 마치 땅벌레가 황곡을 바라봄과 같다는 뜻이다.
[주D-002]소자(邵子) : 송나라 소옹(邵雍 : 1011~1077)을 말한다. 자는 요부(堯夫), 호는 강절(康節)이며, 저서로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가 있다.
[주D-003]일원(一元)의 자회(子會) : 소옹의 《황극경세서》에서는 일원을 천지 순환의 큰 주기로 삼고, 이를 12회(會)로 나누었는데, 자회는 그 시초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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