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집_언행록3_유편(類編)
출처(出處)
무자년(1528, 중종23) 봄에 사마(司馬) 복시(覆試)를 치르고는 출방(出榜)을 기다리지도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한강을 건너기 전에 합격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으나, 남쪽을 향해 가면서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길을 떠났는 데다 혹 급히 돌아가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방을 기다리지 않은 것이다. -김성일-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 용기 있게 결단해서, 명예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 일면이 여기에서도 드러났다. 본주(本註)이다.
일찍이 이르기를,
하였다. -김성일-
을사년(1545, 명종1)의 사화에 선생은 이미 죄인 명부에 들어 있었다. 이원록(李元祿) 이기(李芑)의 조카요, 이행(李荇)의 아들 이 구원해 내고자 극력 힘썼으므로, 이기가 도리어 죄를 청하면서 풀어 주었다. 선생은 그 행실이 단정하고 깨끗하여 아무 흠이 없었기 때문에, 소인들이 아무리 죄를 얽어 보려 하여도 할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하늘이 이분을 낸 것은 필시 우연이 아닐 것인데, 어떻게 중상하는 적(賊)들이 해칠 수 있었겠는가. -김성일- 정유일(鄭惟一)의 기록에 의하면, 을사사화에 선생이 이담(李湛) 등 네 사람과 함께 파직되었다. 세상 여론이 선생을 파직함은 옳지 못하다고 떠들었고 또한 이기에게 구원을 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기가 죄를 청하면서 임금께 아뢰기를, “이황은 죄가 없는데 신이 잘못 들었나이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복직을 명령하였다. 이로부터 선생은 더욱 벼슬에 뜻이 적어, 힘써 지방의 작은 벼슬을 구해서 단양 군수로 갔다가, 풍기로 옮겨 한 해가 지나서는 그것도 버리고 돌아왔다.
정미년(1547, 명종2) 가을에 선생은 병으로 물러 나와 고향에 있다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되었다.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다가 배가 양근(楊根)에 이르러, 비로소 양재(良才)의 벽서(壁書)의 변이 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성에 들어가기 전에 당리(堂吏)가 조보(朝報)를 가져와 보여 주었는데, 큰 화가 이미 일어나서 당시의 이름 난 사람들이 혹은 죽고 혹은 귀양 간다고 하였다. 선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힘써 맡은 일을 다 하면서 외직(外職)을 청하려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 얼마 안 되어 또 봉성군(鳳城君)의 옥사가 일어났다. 선생은 그것을 구하지 못할 줄을 알고 얼마 후에 병을 핑계하고 곧 단양 군수로 나와 버렸다. -김성일- 광해군(光海君) 신해년(1611, 광해군3) 4월에, 정인홍(鄭仁弘)이 선생을 헐뜯으며 정미년(1547)에 봉성군을 죄주기를 청하는 논의에 동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등 여러 사람들이 정부에 있으면서 임금에게 차자를 올려 변명하기를, “신들이 듣건대 고(故) 원로 이황은, 정미년(1547)에 홍문관 응교로 임명되던 날, 삼사(三司)에서 갑자기 봉성을 죄주자는 의논을 꺼냈는데, 이황은 지방에서 처음으로 돌아왔으므로 논의의 경위를 알지 못했습니다. 동참한 뒤, 그 이튿날 임금의 자리 앞에서 대신 이하가 모두 자리를 떠나면서 봉성의 죄를 청할 때, 비록 곧은 신하 안명세(安名世) 같은 사람도 또한 감히 이의를 말하지 못했으나, 이황은 홀로 자리를 뜨지 않았고, 물러가서는 본직을 그만두게 된 것이옵니다. 아홉 번 죽고 길머리에서 쇠를 끊는 용기를 내어, 만마(萬馬)가 달리는 가운데서 능히 발길을 멈추는 힘을 가졌사옵니다. 이런 난처한 일에 처신하기란, 논의에 참여하지 않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온데, 이황은 그것을 능히 한 것이옵니다. 그러하온데 이제 정인홍은 이것으로써 흠을 잡으려고 하니 너무 심하지 않사옵니까.” 운운(云云)한 것이 병암(甁庵) 남책(南)의 잡부(雜裒)에 나온다.
임자년(1552, 명종7) 가을에 선생이 당상관으로 승진되어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선생은 선비들의 버릇이 더욱 교활하여 교화하기 어려움을 보고 얼마 안 되어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을묘년(1555) 봄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허락도 받지 않고 대궐문을 나왔다. 항상 왕래하던 조정의 친구들도 아무도 몰랐다. -정유일-
무오년(1558)에 임금의 부르심을 받고 나아갔다.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한창이어서, 조정이 몹시 흐리고 어지러운 때였다. 어떤 사관(史官)은 선생의 출처(出處)를 나무랐으나, 그는 선생의 심사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명종(明宗)의 부르심이 여러 번 내렸으나 굳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은 것은, 나아갈 때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부르심은 더욱 엄해져서,
운운하는 교서까지 나오게 되었다. 선생이 이 말씀을 듣고 송구스러워 억지로 대궐에 나아갔지만 그 본심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대사성에다 공조 참판의 벼슬을 내렸지만 직무를 수행할 생각을 한 적이 없었고, 도합 다섯 달을 서울에 있었으나 대부분 산질(散秩)에 있었다. -김성일-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하였다. -집안 편지-
기미년(1559, 명종14) 봄에 분황(焚黃)을 이유로 휴가를 얻어 돌아왔다. 다시 소명을 받았으나 끝내 나가지 않자, 체차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제수하였다. 이로부터 갑자년(1564)까지 무려 6년 동안 동지의 직명을 띠고 있었다. 선생은 몇 번이나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끝내 허락받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선생에게 말하기를,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하였다. 을축년(1565) 봄에 비로소 청한 대로 되니, 선생은 기뻐하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하였다. -정유일-
선생이 시골에 있으면서 조정의 벼슬을 가지고 있는 것을 편안치 않게 여겨, 글을 올려 여러 해 동안 사퇴해 왔었다. 그러다가 을축년(1565)에 명종(明宗)이 비로소 허락하시니, 선생은 임금의 은혜를 못내 기껍게 여기어 기쁜 빛을 얼굴에 나타내며 여러 사람에게 이르기를,
하고, 시 8장을 지어 그 기쁨을 나타내었다. -김성일-
을축년(1565) 12월에 임금이 중추부사에 제수하였는데, 유지(有旨)에 이르기를,
하였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도에 뜻을 두었고 늙어서는 더욱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살이를 즐기지 않아 예안(禮安)에 물러가 살았다. 당시 사람들은 선생을 마치 태산이나 북두성(北斗星)처럼 우러러보았다. 이때에 윤원형은 이미 죽었으므로 사람들은 좋은 정치와 교화를 바라던 참이었는데, 마침 선생을 부르는 소명이 내리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뛰며 기뻐하였다. -이이(李珥)-
병인년(1566, 명종21) 4월에 선생이 병으로 사퇴하고 돌아간 뒤 다시 오지 않았다. 임금이 그리워함이 매우 중하였고, 비록 소 먹이는 아이나 심부름꾼이라도 모두 그 이름을 사모하여 그 얼굴을 한번 보고자 했다. 그러나 선생이 끝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식자(識者)들은 모두 걱정하고 있었다. -이이-
나라에서 벼슬을 내리는 명령이 있을 때마다 선생은 으레 민망한 빛으로 배우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하였다. -김성일-
정묘년(1567)에 선생이 여러 번 소명을 받아 부득이 길을 나섰다. 6월 13일에 용수사(龍壽寺)에서 묵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하였다. 김부륜이 말하기를,
하였더니, 선생은 다시 말하기를,
하였다. -김부륜-
정묘년(1567, 명종22) 7월에 이 선생이 예조 판서가 되었다. 선생이 산야(山野)에서 도를 지키고 있을 때, 사람들의 우러러 바람이 날로 무거웠다. 명종(明宗)이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말년에 이르러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벼슬로 부르니 비로소 조정에 나왔다. 미처 임명도 받기 전에 명종이 승하하였으므로 선생이 조정에 머물면서 명종의 행장(行狀)을 찬술하였다. 임금이 종백(宗伯 예조 판서)에 임명하자, 선생은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상(上)이 이르기를,
하였다. 이이(李珥)가 선생을 뵙고 말하기를,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하였으나, 선생은 벼슬하려 하지 않았다. -이이-
금상(今上) 곧 선조(宣祖) 초년에 선생은 예조 판서를 시키는 것을 사양하고는, 정고(呈告)하지도 않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사람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것은, 기고봉(奇高峰 기대승(奇大升)) 등 여러 어진 사람들이 조정에 많이 모였는데 연석(筵席)에서, 선생의 도덕과 행의(行義)는 정자와 주자에 못지않으니 급히 불러 써서 도를 행하고 세상을 구해야 한다고 극력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이 말을 듣고 좋아하지 않았다. 하루는 문인이 와서 고하기를,
하였다. 선생이 놀라서 친구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훌쩍 남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김성일-
무진년(1568, 선조1) 봄에 유응현(柳應見)이 이덕홍에게 말하기를,
하였다. 이덕홍이 이 말을 하였더니, 선생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하였다. -이덕홍-
무진년(1568, 선조2) 7월 25일 사정전(思政殿)에서 조강(朝講)이 있었다. 이황(李滉)이 처음으로 경연(經筵)에 들어와 임금에게 아뢰기를,
하였다. 우상(右相) 홍섬(洪暹)이 아뢰기를,
하였다. 이황은 다시 아뢰기를,
하였다. -《당후일기(堂后日記)》-
무진년(1568, 선조1) 8월에 판중추부사로서 경연(經筵)의 직명을 겸하였다. 고사(故事)에 지경연(知經筵)은 조강에만 참석하고 주강과 석강에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조정의 여론이, 경연에는 선생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여, 모두 참석하게 하였다. 선생은, 임금으로서 인(仁)의 본체를 모르면 자신의 몸 이외가 다 초(楚)나 월(越)처럼 먼먼 남남이라고 하여 김성일이 이에 대하여 또 기록하기를, “임금으로서 인의 체단(體段)을 모르기 때문에 천지 만물이 나와 아무 상관없게 되어 자신의 몸 이외가 모두 초나 월처럼 먼먼 남남이 된다.” 하였다. 〈서명(西銘)〉을 진강(進講)할 것을 청하고 육조소(六條疏)를 올리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김성일-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는 군액(軍額)이 많이 빠져나간 것을 걱정하여 장정들을 색출하여 군적(軍籍)을 고치려고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하고는, 곧 멈추었다. 당시에 대신 이준경(李浚慶)과 권철(權轍) 등이 그 의논을 힘껏 주장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선생의 아룀으로 중지되게 되니, 모두들 그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민기문(閔起文)이 그들의 뜻을 받아서 경연 석상에서 아뢰기를,
하였다. 뒤에 권철이 또 아뢰기를,
하였다. 문소전에 대한 의논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참에 태조의 신위(神位)가 동쪽을 향하도록 바로잡고 소(昭)와 목(穆)이 남북으로 마주 보도록 차례를 정하자고 하여, 도형을 그리고 설명을 붙여 올렸다. 임금이 특별히 소대(召對)를 명하였고, 이에 그것을 논의하게 하였으나 대신과 예관들이 불가하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김성일-
무진년(1568, 선조1) 겨울에 선생은 서울에 있었으나 돌아갈 뜻은 이미 정하였다. 성전이 여쭙기를,
하자, 선생이 이르기를,
하였다. 그 거취에 대해 확고하여 구차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우성전-
선생은 공명과 벼슬에 생각을 끊었었지만, 김안로(金安老)가 물러 나자,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중종(中宗) 말년에 말미를 얻어 하직하고 돌아가니, 그때부터 아주 물러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명이 자주 내리자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장(狀)을 올리기도 하고, 소를 올리기도 하여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명분이 다하고 형세에 몰려 할 수 없이 조정에 나아갔다. -우성전-
선생이 무진년(1568)에 나가 벼슬한 것은, 전혀 그 뜻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때는 노련한 무리들이, 일에는 아무 마음이 없이 그저 세월만 보내고서 이록(利祿)만 탐내면서 꽉 차 있었다. 선생의 하고자 하는 바는 모두 저들의 꺼리는 바라, 혹 의견을 아뢰어도 제지를 받아 행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지목을 해서 조그마한 것도 저들과 서로 충돌이 되어 한 가지도 시행할 수 없었으니, 일은 하지 않고 작록(爵祿)만 먹는 것이 어찌 선생의 마음이었겠는가. 선생이 남에게 준 편지에 말하기를,
한 것에서 그 뜻을 알 수 있다. -우성전-
무진년(1568, 선조1) 겨울에 고봉(高峰)과 함께 선생을 모시고 있었다. 고봉이 성전에게 경계해 말하기를,
하고, 다시 이르기를,
하였다. 선생이 이르기를,
하였다. -우성전-
기사년(1569, 선조2) 봄에 글을 올려 치사할 것을 청할 때 차자를 네 번이나 올리고도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붙들어 둘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편전에 불러서 하고 싶은 말을 묻고는 역마(驛馬)를 타고 가게 명하여 돌려보냈다. 사림들이 모두 선생이 떠나는 것을 아까워하여, 눈물을 흘려 슬퍼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우상(右相) 홍섬(洪暹)이,
누가 저를 붙잡아 길들일 수 있을까 / 萬里誰能馴
라는 두보의 시구를 써 보냈더니, 선생은 같은 시의
머리 돌려 맑은 위수(渭水) 바라보네 / 回首淸渭濱
라는 시로 답하였다. 강가의 절에서 이틀 밤을 지내고 떠났다. -김성일-
기사년(1569, 선조2)에 벼슬에서 물러난 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하였다. -이덕홍-
선생은 일찍이 이르기를,
하였다. -김성일-
하루는 《논어》의 ‘위태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라는 장을 강의하다가, 소주(小註)에서 주자의 말에 ‘도가 있으면 반드시 완전히 태평해지기를 기다려서 나아갈 것이 아니요, 도가 없으면 또한 반드시 완전히 어지러워지기를 기다려서 숨을 것이 아니다. 도가 있다 함은 마치 하늘이 곧 새벽이 되려는 것과 같아서, 비록 아주 밝지는 않았어도 지금부터 밝음을 향해 가는 것이니,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도가 없다 함은 마치 하늘이 곧 밤이 되려는 것과 같아서, 비록 아주 어둡지는 않았어도 지금부터 어두움을 향해 가는 것이니, 모름지기 기미를 보아서 행동해야 한다.’라는 대목에 이르렀다. 성전이 묻기를,
하고 물었더니, 선생이 답하기를,
하였다. 성전이 묻기를,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하였다. -우성전- 위의 한 절은 을축년(1565, 명종20)에 들은 것인데, 이 말에서 선생의 평소 출처(出處)에 대한 대강의 뜻을 볼 수 있다.
성전이 언젠가 선생에게 묻기를,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하였다. -우성전-
묻기를,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하였다. -김성일-
선생이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하였다. -이국필(李國弼)-
[주D-002]분황(焚黃) : 나라에서 죽은 이에게 증직(贈職)을 내리면, 그 자손들이 조정에서 내린 고명(誥命 임명장(任命狀))을 누른 종이에 베껴 써서 무덤에서 사르는 것을 말한다.
[주D-003]임금의 …… 일 : 맹자(孟子)의 말에, “대인(大人)은 그 임금의 그른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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