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집_언행록3_유편(類編)

출처(出處)

 

무자년(1528, 중종23) 봄에 사마(司馬) 복시(覆試)를 치르고는 출방(出榜)을 기다리지도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한강을 건너기 전에 합격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으나, 남쪽을 향해 가면서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길을 떠났는 데다 혹 급히 돌아가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방을 기다리지 않은 것이다. -김성일-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 용기 있게 결단해서, 명예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 일면이 여기에서도 드러났다. 본주(本註)이다.
일찍이 이르기를,

“젊어서부터 병이 많아, 사마시에 합격한 뒤부터는 특히 벼슬에 나아가려는 뜻이 없고, 오직 부모를 받들고 몸을 보살필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중형(仲兄)의 간절한 권고 때문에, 다시 반궁(泮宮)에 유학하며 과거를 볼 계획을 세우고 여러 달을 힘써 보았으나, 걸리는 일이 많았고 시끄럽고 분주한 속에 지내자니 정신이 어지러워서, 밤중에 생각해 보면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과거에 합격되었으므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 과거를 꾀했을 것이나, 견뎌내지 못했을 것임에 분명하였다.”

하였다. -김성일-
을사년(1545, 명종1)의 사화에 선생은 이미 죄인 명부에 들어 있었다. 이원록(李元祿) 이기(李芑)의 조카요, 이행(李荇)의 아들 이 구원해 내고자 극력 힘썼으므로, 이기가 도리어 죄를 청하면서 풀어 주었다. 선생은 그 행실이 단정하고 깨끗하여 아무 흠이 없었기 때문에, 소인들이 아무리 죄를 얽어 보려 하여도 할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하늘이 이분을 낸 것은 필시 우연이 아닐 것인데, 어떻게 중상하는 적(賊)들이 해칠 수 있었겠는가. -김성일- 정유일(鄭惟一)의 기록에 의하면, 을사사화에 선생이 이담(李湛) 등 네 사람과 함께 파직되었다. 세상 여론이 선생을 파직함은 옳지 못하다고 떠들었고 또한 이기에게 구원을 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기가 죄를 청하면서 임금께 아뢰기를, “이황은 죄가 없는데 신이 잘못 들었나이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복직을 명령하였다. 이로부터 선생은 더욱 벼슬에 뜻이 적어, 힘써 지방의 작은 벼슬을 구해서 단양 군수로 갔다가, 풍기로 옮겨 한 해가 지나서는 그것도 버리고 돌아왔다.
정미년(1547, 명종2) 가을에 선생은 병으로 물러 나와 고향에 있다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되었다.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다가 배가 양근(楊根)에 이르러, 비로소 양재(良才)의 벽서(壁書)의 변이 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성에 들어가기 전에 당리(堂吏)가 조보(朝報)를 가져와 보여 주었는데, 큰 화가 이미 일어나서 당시의 이름 난 사람들이 혹은 죽고 혹은 귀양 간다고 하였다. 선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힘써 맡은 일을 다 하면서 외직(外職)을 청하려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 얼마 안 되어 또 봉성군(鳳城君)의 옥사가 일어났다. 선생은 그것을 구하지 못할 줄을 알고 얼마 후에 병을 핑계하고 곧 단양 군수로 나와 버렸다. -김성일- 광해군(光海君) 신해년(1611, 광해군3) 4월에, 정인홍(鄭仁弘)이 선생을 헐뜯으며 정미년(1547)에 봉성군을 죄주기를 청하는 논의에 동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등 여러 사람들이 정부에 있으면서 임금에게 차자를 올려 변명하기를, “신들이 듣건대 고(故) 원로 이황은, 정미년(1547)에 홍문관 응교로 임명되던 날, 삼사(三司)에서 갑자기 봉성을 죄주자는 의논을 꺼냈는데, 이황은 지방에서 처음으로 돌아왔으므로 논의의 경위를 알지 못했습니다. 동참한 뒤, 그 이튿날 임금의 자리 앞에서 대신 이하가 모두 자리를 떠나면서 봉성의 죄를 청할 때, 비록 곧은 신하 안명세(安名世) 같은 사람도 또한 감히 이의를 말하지 못했으나, 이황은 홀로 자리를 뜨지 않았고, 물러가서는 본직을 그만두게 된 것이옵니다. 아홉 번 죽고 길머리에서 쇠를 끊는 용기를 내어, 만마(萬馬)가 달리는 가운데서 능히 발길을 멈추는 힘을 가졌사옵니다. 이런 난처한 일에 처신하기란, 논의에 참여하지 않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온데, 이황은 그것을 능히 한 것이옵니다. 그러하온데 이제 정인홍은 이것으로써 흠을 잡으려고 하니 너무 심하지 않사옵니까.” 운운(云云)한 것이 병암(甁庵) 남책(南)의 잡부(雜裒)에 나온다.
임자년(1552, 명종7) 가을에 선생이 당상관으로 승진되어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선생은 선비들의 버릇이 더욱 교활하여 교화하기 어려움을 보고 얼마 안 되어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을묘년(1555) 봄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허락도 받지 않고 대궐문을 나왔다. 항상 왕래하던 조정의 친구들도 아무도 몰랐다. -정유일-
무오년(1558)에 임금의 부르심을 받고 나아갔다.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한창이어서, 조정이 몹시 흐리고 어지러운 때였다. 어떤 사관(史官)은 선생의 출처(出處)를 나무랐으나, 그는 선생의 심사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명종(明宗)의 부르심이 여러 번 내렸으나 굳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은 것은, 나아갈 때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부르심은 더욱 엄해져서,

“나를 더불어 일하기에 부족한 사람으로 여긴다.”

운운하는 교서까지 나오게 되었다. 선생이 이 말씀을 듣고 송구스러워 억지로 대궐에 나아갔지만 그 본심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대사성에다 공조 참판의 벼슬을 내렸지만 직무를 수행할 생각을 한 적이 없었고, 도합 다섯 달을 서울에 있었으나 대부분 산질(散秩)에 있었다. -김성일-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겨우 내 앓아누워 있었으니, 파출을 안 당한 것만으로 족한데, 도리어 이렇게 분에 넘는 일이 생겼으니, 그 난처함을 입으로 다 말할 수가 없다. 다시 고쳐 바로잡아 주시기를 빌었으나, 모든 여론이 사은하기도 전에 사면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하여 할 수 없이 병을 참고 억지로 나아가 사은하였다. 또다시 사퇴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시니, 형세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고향 여러분이 염려하는 것도 마땅한 일이나, 나도 또한 번번이 사퇴하는 것이 옳지 못한 것을 알지만, 육조의 아경(亞卿 참판(參判))은 그 일이 가벼운 것이 아니니, 어떻게 나처럼 병을 앓는 사람이 있을 자리이겠느냐. 2월 중으로는 기필코 청하여 물러나고자 한다.”

하였다. -집안 편지-
기미년(1559, 명종14) 봄에 분황(焚黃)을 이유로 휴가를 얻어 돌아왔다. 다시 소명을 받았으나 끝내 나가지 않자, 체차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제수하였다. 이로부터 갑자년(1564)까지 무려 6년 동안 동지의 직명을 띠고 있었다. 선생은 몇 번이나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끝내 허락받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선생에게 말하기를,

“왜 자꾸 청해서 기어코 허락을 얻고 말지 않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양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생각 밖의 칭찬하는 말씀을 들으니 감히 더 사양할 수 없다.”

하였다. 을축년(1565) 봄에 비로소 청한 대로 되니, 선생은 기뻐하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이제 비로소 산인(山人)이 되었다.”

하였다. -정유일-
선생이 시골에 있으면서 조정의 벼슬을 가지고 있는 것을 편안치 않게 여겨, 글을 올려 여러 해 동안 사퇴해 왔었다. 그러다가 을축년(1565)에 명종(明宗)이 비로소 허락하시니, 선생은 임금의 은혜를 못내 기껍게 여기어 기쁜 빛을 얼굴에 나타내며 여러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 이제야 비로소 하늘이 놓아준 몸이 되었다.”

하고, 시 8장을 지어 그 기쁨을 나타내었다. -김성일-
을축년(1565) 12월에 임금이 중추부사에 제수하였는데, 유지(有旨)에 이르기를,

“내 불민한 탓으로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부족해서, 이전부터 여러 번 불렀으나 매번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하니, 내 마음이 매우 편하지 못하다. 경은 나의 이 지극한 마음을 알아주어 곧 올라오라.”

하였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도에 뜻을 두었고 늙어서는 더욱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살이를 즐기지 않아 예안(禮安)에 물러가 살았다. 당시 사람들은 선생을 마치 태산이나 북두성(北斗星)처럼 우러러보았다. 이때에 윤원형은 이미 죽었으므로 사람들은 좋은 정치와 교화를 바라던 참이었는데, 마침 선생을 부르는 소명이 내리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뛰며 기뻐하였다. -이이(李珥)-
병인년(1566, 명종21) 4월에 선생이 병으로 사퇴하고 돌아간 뒤 다시 오지 않았다. 임금이 그리워함이 매우 중하였고, 비록 소 먹이는 아이나 심부름꾼이라도 모두 그 이름을 사모하여 그 얼굴을 한번 보고자 했다. 그러나 선생이 끝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식자(識者)들은 모두 걱정하고 있었다. -이이-
나라에서 벼슬을 내리는 명령이 있을 때마다 선생은 으레 민망한 빛으로 배우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내 평생 헛된 이름에 얽매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내가 누구를 속이겠나, 하늘을 속이겠는가?”

하였다. -김성일-
정묘년(1567)에 선생이 여러 번 소명을 받아 부득이 길을 나섰다. 6월 13일에 용수사(龍壽寺)에서 묵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치사(致仕)하는 것은 옛날부터 있는 일인데 우리 동방에서는 으레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것은 신하로서 매우 난처한 일이다.”

하였다. 김부륜이 말하기를,

“임금이 일을 맡겨 오래 부리다가 갑자기 사퇴함을 들어준다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하지 못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 송(宋)나라 조정에서는 억지로 벼슬을 그만두게 했으니, 이도 또한 신하를 후하게 대접하는 길이 아닌가 합니다.”

하였더니, 선생은 다시 말하기를,

“박한 듯하나 반드시 치사하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대는 생각해 보라.”

하였다. -김부륜-
정묘년(1567, 명종22) 7월에 이 선생이 예조 판서가 되었다. 선생이 산야(山野)에서 도를 지키고 있을 때, 사람들의 우러러 바람이 날로 무거웠다. 명종(明宗)이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말년에 이르러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벼슬로 부르니 비로소 조정에 나왔다. 미처 임명도 받기 전에 명종이 승하하였으므로 선생이 조정에 머물면서 명종의 행장(行狀)을 찬술하였다. 임금이 종백(宗伯 예조 판서)에 임명하자, 선생은 병을 이유로 사양했다. 상(上)이 이르기를,

“내 그대의 어진 덕을 들은 지 오래이다. 이처럼 새로 정사를 하는 때에 그대가 만일 벼슬하지 않으면 어찌 내 마음에 편하겠는가.”

하였다. 이이(李珥)가 선생을 뵙고 말하기를,

“어린 임금이 처음으로 대위(大位)에 올라 나랏일에 어려움이 많으니, 선생은 물러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도리로서는 물러가서 안 되겠지만, 내 몸으로 볼 때는 물러나지 않을 수 없다. 몸이 원래 병이 많은 데다가 재주도 또한 감당할 수 없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만일 경연 석상에 계시기만 해도 매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벼슬이란 남을 위하는 것이지 어찌 자기를 위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벼슬하는 사람은 원래 남을 위하는 것이지만, 만일 남에게는 이롭게 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우환만 돌아온다면,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니, 이이가 말하기를,

“선생이 조정에 있으면서 설사 아무것도 하시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상께서 마음으로 의지하여 든든히 생각하고 사람들의 정이 즐거이 따른다면, 이 또한 이익이 남에게 미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으나, 선생은 벼슬하려 하지 않았다. -이이-
금상(今上) 곧 선조(宣祖) 초년에 선생은 예조 판서를 시키는 것을 사양하고는, 정고(呈告)하지도 않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사람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것은, 기고봉(奇高峰 기대승(奇大升)) 등 여러 어진 사람들이 조정에 많이 모였는데 연석(筵席)에서, 선생의 도덕과 행의(行義)는 정자와 주자에 못지않으니 급히 불러 써서 도를 행하고 세상을 구해야 한다고 극력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이 말을 듣고 좋아하지 않았다. 하루는 문인이 와서 고하기를,

“고봉과 여러 사람의 생각은 모두 선생님이 정승으로 들어오셔야 우리의 도가 행해질 수 있다 하여, 임금에게 직접 면대를 청하고 글을 올려야겠다고 합니다.”

하였다. 선생이 놀라서 친구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훌쩍 남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김성일-
무진년(1568, 선조1) 봄에 유응현(柳應見)이 이덕홍에게 말하기를,

“선생의 뜻은 원래 우리들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시사(時事)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이 없으니, 외부 사람들은 모두 물에 빠진 것을 보고도 건져 주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지금은 새 임금이 새로 정치를 하는 때라, 무슨 일을 함직한 징조가 있음에 있어서랴. 자네는 나를 위해 이 뜻을 여쭈어 볼 수 없겠는가?”

하였다. 이덕홍이 이 말을 하였더니, 선생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나는 본래 일도 모르고 병폐한 사람일 뿐이니, 무슨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은 바로 대인(大人)의 할 일이지, 어찌 나로서 감당할 수 있겠는가. 가령 대인의 재주와 덕이 있더라도, 만일 때를 헤아리지 않고 움직이면 국가에는 아무 이익도 없이 자기 분수에 손실이 있을 뿐이다. 세상에는 혹 말은 쓰이지 않고, 그저 높은 자리에만 등용되는 사람이 있으니, 이는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전에 회재(晦齋) 선생이 열 가지 조목의 글을 임금께 올림으로써 특히 가선대부에 올랐지만, 그 글 가운데의 한 가지 일도 채용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선생의 본의이었겠는가. 이것이 오늘날의 밝은 거울로 삼을 만한 일이다. 내 본래 고루하고 산야에 숨어 사는 사람이라, 취할 만한 조그만 선(善)도 없고 기록할 만한 한마디 말도 없는데, 도리어 헛된 이름 때문에 알려져서 벼슬의 임명이 잦았으니, 부끄럽고 두려움을 견딜 수 없다. 하물며 다시 말을 해서 잘못을 거듭할 수 있겠는가. 옛날 개자추(介子推)는 그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말이란 것은 몸의 문채입니다. 몸이 장차 숨으려는데 어찌 문채를 들어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곧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 말이 참으로 깊은 맛이 있다.”

하였다. -이덕홍-
무진년(1568, 선조2) 7월 25일 사정전(思政殿)에서 조강(朝講)이 있었다. 이황(李滉)이 처음으로 경연(經筵)에 들어와 임금에게 아뢰기를,

“옛날부터 제 분수에 넘는 벼슬을 염치를 무릅쓰고 받은 사람도 혹 없지는 않았사옵니다. 그러나 조정에 있으면서 점점 벼슬이 올라가는 것은 사리에 무방하지만, 소신은 늙고 병들어 쓸 데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아 물러가려 하옵니다. 한 번 올려주는 관작을 감당할 수 없어서 물러가면, 그로 인하여 또 더 벼슬이 오르게 되었사옵니다. 선조(先祖) 때부터 힘써 사양하고 물러났는데, 오늘 또 이렇게 올려 주셨습니다. 옛날부터 은사(隱士)로서 헛된 이름을 가진 사람을 한때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잘못 쓴 일이 있기는 하나, 소신은 벼슬길에 나온 지 이미 10여 년이고, 벼슬은 3품에 이르렀습니다. 신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신의 둔한 자질을 모르겠습니까. 신은 이미 자기를 알고 스스로 물러가던 것이며, 이제 갑자기 어진 사람으로 변해질 리도 만무합니다. 성주(聖主)께서 신의 청원을 들어 주시어 어리석은 분수에 맞추어 그 뜻을 행할 수 있게 하시고, 자급을 한 단계 낮추어 주시면, 이제 물러가려 하옵니다.”

하였다. 우상(右相) 홍섬(洪暹)이 아뢰기를,

“이황의 말은 한갓 겸양만이 아니오라, 실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말입니다. 다만 물러가는 것은 매우 사리에 타당하지 않으니, 성상의 유지에 이르신 바 ‘지극한 정성으로 서로 대하면 참소와 이간이 어디서 들어오겠느냐?’라고 하신 말씀이 참으로 지당합니다.”

하였다. 이황은 다시 아뢰기를,

“과연 인재를 얻어 지성으로 대하시면 되겠지만, 소신과 같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옵니다. 헛된 이름이 잘못 전해져서, 어진 이를 좋아하시고 착한 일을 즐기시는 성상의 정성만 공허한 데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못내 황공스럽습니다. 이와 같은 성의를 더 적합한 사람에게 옮겨 쓰시면 종사(宗社)의 복이 어찌 이보다 더 크겠습니까.”

하였다. -《당후일기(堂后日記)》-
무진년(1568, 선조1) 8월에 판중추부사로서 경연(經筵)의 직명을 겸하였다. 고사(故事)에 지경연(知經筵)은 조강에만 참석하고 주강과 석강에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조정의 여론이, 경연에는 선생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여, 모두 참석하게 하였다. 선생은, 임금으로서 인(仁)의 본체를 모르면 자신의 몸 이외가 다 초(楚)나 월(越)처럼 먼먼 남남이라고 하여 김성일이 이에 대하여 또 기록하기를, “임금으로서 인의 체단(體段)을 모르기 때문에 천지 만물이 나와 아무 상관없게 되어 자신의 몸 이외가 모두 초나 월처럼 먼먼 남남이 된다.” 하였다. 〈서명(西銘)〉을 진강(進講)할 것을 청하고 육조소(六條疏)를 올리니, 임금이 받아들였다. -김성일-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는 군액(軍額)이 많이 빠져나간 것을 걱정하여 장정들을 색출하여 군적(軍籍)을 고치려고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금년은 홍수와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어 죽게 되었사오니, 마땅히 조금 늦추었다가 풍년들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을까 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라를 다스리면서 어찌 경의 말을 듣지 않겠는가.”

하고는, 곧 멈추었다. 당시에 대신 이준경(李浚慶)과 권철(權轍) 등이 그 의논을 힘껏 주장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선생의 아룀으로 중지되게 되니, 모두들 그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민기문(閔起文)이 그들의 뜻을 받아서 경연 석상에서 아뢰기를,

“나랏일을 이미 대신들과 의논해 결정하여 놓았는데, 곧바로 그것을 한 사람의 말로 인해서 고치는 것은, 길 가에 집 짓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뒤에 권철이 또 아뢰기를,

“그 당시 만일 한 달만 중지하지 않으셨다면 그 일은 이미 시작되었을 것인데, 남의 말에 흔들려 못하게 되었사오니,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하였다. 문소전에 대한 의논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참에 태조의 신위(神位)가 동쪽을 향하도록 바로잡고 소(昭)와 목(穆)이 남북으로 마주 보도록 차례를 정하자고 하여, 도형을 그리고 설명을 붙여 올렸다. 임금이 특별히 소대(召對)를 명하였고, 이에 그것을 논의하게 하였으나 대신과 예관들이 불가하다고 하여 그만두었다. -김성일-
무진년(1568, 선조1) 겨울에 선생은 서울에 있었으나 돌아갈 뜻은 이미 정하였다. 성전이 여쭙기를,

“사군자(士君子)가 세상에 나서 어찌 다만 물러가는 한 가지 일만 지키고 있겠사옵니까. 오직 그때가 어떠함을 보아서 해야 할 것인데, 지금 주상께서는 잘 다스리고자 생각하고 있으니 떠나가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자, 선생이 이르기를,

“그대도 그런 말을 하는가? 나 같은 사람이 여기에 있어서 무엇한단 말인가. 서로 안다는 그대까지도 내 마음을 몰라주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 거취에 대해 확고하여 구차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우성전-
선생은 공명과 벼슬에 생각을 끊었었지만, 김안로(金安老)가 물러 나자,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중종(中宗) 말년에 말미를 얻어 하직하고 돌아가니, 그때부터 아주 물러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명이 자주 내리자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장(狀)을 올리기도 하고, 소를 올리기도 하여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명분이 다하고 형세에 몰려 할 수 없이 조정에 나아갔다. -우성전-
선생이 무진년(1568)에 나가 벼슬한 것은, 전혀 그 뜻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때는 노련한 무리들이, 일에는 아무 마음이 없이 그저 세월만 보내고서 이록(利祿)만 탐내면서 꽉 차 있었다. 선생의 하고자 하는 바는 모두 저들의 꺼리는 바라, 혹 의견을 아뢰어도 제지를 받아 행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지목을 해서 조그마한 것도 저들과 서로 충돌이 되어 한 가지도 시행할 수 없었으니, 일은 하지 않고 작록(爵祿)만 먹는 것이 어찌 선생의 마음이었겠는가. 선생이 남에게 준 편지에 말하기를,

“이곳에 있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일이 날로 삼실처럼 어지러워지니, 어떻게 돌아갈 계획을 급히 서두르지 않겠는가.”

한 것에서 그 뜻을 알 수 있다. -우성전-
무진년(1568, 선조1) 겨울에 고봉(高峰)과 함께 선생을 모시고 있었다. 고봉이 성전에게 경계해 말하기를,

“학문을 하거든 반드시 성현이 되기를 기약하고, 벼슬을 하거든 반드시 직책을 다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고, 다시 이르기를,

“무릇 사람은 일을 피할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선생이 이르기를,

“이 말은 매우 좋은 말이니 마땅히 제각기 힘써야 할 것이다. 다만 ‘일을 피한다.’라는 말은 단정하여 할 말이 아니다. 내가 요사이 벼슬을 받으면 반드시 사양하고, 일을 만나면 반드시 움츠러드는 것이, 꼭 일을 피하려는 생각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재야에 있는 사람이 조정의 일을 알지 못하면서, 일을 피한다는 비방을 면하기 위해서 일마다 나서서 그것을 담당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그 직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뿐 아니라 반드시 함부로 일을 저지르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우성전-
기사년(1569, 선조2) 봄에 글을 올려 치사할 것을 청할 때 차자를 네 번이나 올리고도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붙들어 둘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편전에 불러서 하고 싶은 말을 묻고는 역마(驛馬)를 타고 가게 명하여 돌려보냈다. 사림들이 모두 선생이 떠나는 것을 아까워하여, 눈물을 흘려 슬퍼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우상(右相) 홍섬(洪暹)이,

넓은 물결 만 리 길에 날아가는 갈매기 / 白鷗波浩蕩
누가 저를 붙잡아 길들일 수 있을까 / 萬里誰能馴

라는 두보의 시구를 써 보냈더니, 선생은 같은 시의

아직도 종남산(終南山)을 그리워하여 / 尙憐終南山
머리 돌려 맑은 위수(渭水) 바라보네 / 回首淸渭濱

라는 시로 답하였다. 강가의 절에서 이틀 밤을 지내고 떠났다. -김성일-
기사년(1569, 선조2)에 벼슬에서 물러난 뒤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서울 있을 때, 병은 갈수록 더하고 날씨는 몹시 추웠다. 그럴 때마다 전화은묵(田畫隱墨)의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다가 한질(寒疾)에 걸려 땀도 내지 못하고 닷새 만에 죽었다.’라는 말을 생각하고는, 항상 성 안에서 죽을까 걱정하여 하루도 편안히 잠자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서울 성문을 나서게 되자 ‘지금부터는 비록 길에서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는가.’ 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다.”

하였다. -이덕홍-
선생은 일찍이 이르기를,

“나의 진퇴(進退)가 그간 달랐던 것 같다. 전에는 임금의 명을 들으면 곧 달려갔는데 나중에는 부름이 있으면 반드시 사양하였고, 가더라도 구태여 머무르지 않았다. 이는 자리가 낮으면 책임이 가벼우므로 한번 나가 볼 수도 있지만, 벼슬이 높으면 책임이 크게 마련이어서이니, 어찌 가벼이 나아갈 수 있겠는가. 옛날 어떤 사람은 이름은 잊었다. 벼슬을 받으면 그때마다 가면서 ‘임금의 은혜가 지극히 중한데 어찌 물러가겠는가.’라고 하였다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만약 나아가고 물러나는 대의(大義)를 돌아보지 않고, 한갓 임금의 총애만을 중하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김을 예의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작록(爵祿)으로써 하는 것이니, 그래서 되겠는가.”

하였다. -김성일-
하루는 《논어》의 ‘위태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는다.’라는 장을 강의하다가, 소주(小註)에서 주자의 말에 ‘도가 있으면 반드시 완전히 태평해지기를 기다려서 나아갈 것이 아니요, 도가 없으면 또한 반드시 완전히 어지러워지기를 기다려서 숨을 것이 아니다. 도가 있다 함은 마치 하늘이 곧 새벽이 되려는 것과 같아서, 비록 아주 밝지는 않았어도 지금부터 밝음을 향해 가는 것이니,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도가 없다 함은 마치 하늘이 곧 밤이 되려는 것과 같아서, 비록 아주 어둡지는 않았어도 지금부터 어두움을 향해 가는 것이니, 모름지기 기미를 보아서 행동해야 한다.’라는 대목에 이르렀다. 성전이 묻기를,

“밝음으로 향하고 어두움을 향한다고 한 것은, 다만 임금이 어진지를 보아서 나아가고 물러난다는 뜻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선생이 답하기를,

“그것은 오직 임금의 어짊만을 보는 것은 아니다. 임금이 비록 어질더라도, 만일 그 나라를 맡은 대신들이 방해하고 어지럽히는 일이 있어서, 자신이 할 일을 행할 수 없다면, 벼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가 효종(孝宗)의 지우(知遇)를 받았을 때, 효종은 바탕이 아름다워 삼대 이후로 보기 드문 임금일 뿐 아니라, 매우 정성스러이 불렀으므로 섬길 만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뒤 재상들의 불평하는 말을 듣자 곧 버리고 물러갔던 것이다.”

하였다. 성전이 묻기를,

“그러면 임금은 비록 효종만 못하더라도 조정에 그러한 나쁜 사람만 없다면 벼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답하기를,

“그렇다. 영종(寧宗)은 효종만 못하지만 그가 즉위한 처음에 주자가 그의 부름을 받고 나아갔다. 그러나 그 뒤 한탁주(韓侂冑)를 신임하게 되자 물러났던 것이다.”

하였다. -우성전- 위의 한 절은 을축년(1565, 명종20)에 들은 것인데, 이 말에서 선생의 평소 출처(出處)에 대한 대강의 뜻을 볼 수 있다.
성전이 언젠가 선생에게 묻기를,

“만일 주자가 기묘년(1519, 중종14)에 임금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면 주자는 나아갔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반드시 나아갔으리라. 그러나 기묘년(1519) 사람들은 끝에 가서 너무 지나쳤다는 잘못을 했다. 정암(靜菴)이 그 잘못을 고치려 했으나 젊은 무리들이 따르지 않았다. 주자가 이런 때를 당하였다면, 틀림없이 하루도 조정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우성전-
묻기를,

“벼슬하는 사람이, 의리에 있어 마땅히 물러나야 할 경우에는 임금이 비록 만류하더라도 소장만 올리고는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떠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옛날 두범(杜範)이 이종(理宗) 때 참정(參政)이 되었는데, 자기 말을 써 주지 않는다고 해서 항의하는 소를 올리고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간절히 만류했으나 두범은 오히려 더욱 청하여 마지않자, 황제가 명령을 내려 성문을 닫아 두범이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두범이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또 범순인(范純仁)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도중에 휘종(徽宗)이 사신을 보내어 불렀다. 범순인은 늙고 병들었다 하여 사양하고 바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또 오징(吳澄)은 나라를 버리고 떠나가는 날, 청하지도 않고 바로 가 버리니,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좇았으나 미치지 못했다. 이를 본다면 옛날 사람도 또한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가 버리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이 일찍이 배우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옛날에 치사(致仕)하는 예가 있게 된 것은 염치를 숭상하고 절의를 장려하기 위해서였다. 송(宋)나라 때에는, 비록 치사할 나이가 되지 않았어도 편안히 물러가기를 허락해서 그 뜻을 이루게 하였으니, 그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예절이 있었다 하겠다. 후세에 와서는 이 길이 막히어, 한번 명분의 굴레를 쓰게 되면 다시는 물러가는 허락을 받을 기회가 없으니, 너무나 한탄스럽다.”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선비가 비록 가난 때문에 벼슬에 나간다 하더라도, 천거하는 사람이 바람직한 사람이 아니라면 벼슬하러 나가야 옳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나가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국필(李國弼)-

[주D-001]양재(良才)의 벽서(壁書)의 변 : 윤원형(尹元衡)ㆍ이기(李芑) 등이 대윤(大尹)의 잔당 등 반대파를 일소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정미년(1547, 명조2) 9월 18일 양재역에서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아래서 간신 이기가 농간을 부리니, 나라가 망할 때가 가까운 징조다.’라는 말이 적힌 벽서가 발견되어, 이를 구실로 송인수(宋麟壽)ㆍ이약빙(李若氷)을 죽이고, 이언적(李彦迪)ㆍ노수신(盧守愼)ㆍ권벌(權橃) 등 10여 명을 귀양 보낸 뒤, 또다시 봉성군(鳳城君)을 죽였다. 이를 정미사화(丁未士禍)라 한다.
[주D-002]분황(焚黃) : 나라에서 죽은 이에게 증직(贈職)을 내리면, 그 자손들이 조정에서 내린 고명(誥命 임명장(任命狀))을 누른 종이에 베껴 써서 무덤에서 사르는 것을 말한다.
[주D-003]임금의 …… 일 : 맹자(孟子)의 말에, “대인(大人)은 그 임금의 그른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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