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집_언행록 5_유편(類編)

바른 학문을 숭상함

 

선생은 이단(異端)을 마치 음탕한 소리나 아름다운 여자 얼굴과 같이 여겨서, 그것을 엄하게 끊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불경을 보고 사특하고 속이는 내용을 드러내 보고자 하였는데, 마치 물을 건너는 사람이 처음에는 그 얕고 깊은 것을 시험해 보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빠져 버리는 것과 같을까 두려웠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들은 다만 성현의 글을 읽어서 다 알게 되고 믿게 되어야 하고, 이단의 글 같은 것은 전연 몰라도 상관없다.”

하였다. -김성일-
《이학통론》을 찬술하여, 주자로부터 원(元)ㆍ명(明)에 이르기까지 도학(道學)을 한 선비들의 언행에 대해 여러 책에 흩어져 있는 것을 빠짐없이 다 모으고, 또 육씨의 지파에 대해서도 기록하여 학자들로 하여금 이단에 빠지지 않게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일찍이 말하기를,

“중국학자들은 모두 불교에 기미를 띠고 있다.”

하였다. 그래서 《백사시교(白沙詩敎)》에 발문(跋文)을 쓰고 《양명전습록(陽明傳習錄)》을 밝혀서 그것을 물리쳤다. ○ 조목(趙穆)이 말하기를, “백사와 양명은 그 말이 모두 정(程)ㆍ주(朱) 도문의 기상과 같지 않다. 선생이 힘써 분별함이 없었다면, 사람들을 의혹하게 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김성일-
덕홍이 묻기를,

“지금 세상에 학문을 한다고 할 수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쉽게 말할 수 없다.”

하였다. 말하기를,

“기고봉(奇高峰)ㆍ이구암(李龜巖) 이름은 정(楨), 자는 강이(剛而) 같은 이는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두텁고 무거워 인(仁)에 가깝다. 그리고 앞 사람의 지나간 자리를 따라서 지키니 필시 길을 잘못 들어 딴 곳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만 그들의 소견이 아직도 큰 강령을 확실하게 깨닫지 못했으니, 그것이 아쉽다. 대개 세상에는 자기의 근본 문제에 대하여 공부하는 사람이 없는데, 남명은 장자(莊子)의 학을 주창하고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는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의 의견을 지키니, 아주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 고봉이 백척간두에서 한 발 더 나아갈지 모르겠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육상산의 학문이 다만 중국에서만 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덕홍-
선생의 학문은 한결같이 주자를 목표로 삼아, 육상산을 높여 받드는 학자를 보면, 반드시 깊이 배척하고 통렬히 거절하였다. 그래서 노소재(盧蘇齋 노수신(盧守愼))가 〈곤지기(困知記)〉 명나라 선비 정암(整庵) 나흠순(羅欽順)이 지음 를 너무 지나치게 높여 받드는 것을 보고, 선생이 말하기를,

“정암의 학문은 스스로 이단을 피한다고 하지만, 겉으로는 배척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돕고 왼쪽으로 덮어 주는 척하면서 오른쪽으로는 막으니, 실로 정자와 주자의 죄인이다.”

하였다. 그래서 소재와 힘껏 싸워 끝내 옳지 않다고 하였다. 고봉 기대승만은 선생과 뜻이 맞아서 〈곤지기발〉을 지어 그 학문을 배척하였다. 선생이 그 글을 보고 말하기를,

“이 이론은 아주 명쾌하다. 참으로 쉽지 않은데……참으로 쉽지 않은데…….”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일찍이 말하기를,

“남명의 소견은 실로 장주(莊周)와 같다.”

하였다. 임훈(林薰) 호는 갈천(葛川) 이 선생에게 와서 말하기를,

“남명이 그 제자들을 시켜 음부(淫婦)의 집을 헐어 치우게 하였으니, 매우 온당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홀로 고사리를 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 말이 매우 옳다.”

하였다. -정유일-
일찍이 말하기를,

“화담의 문인들은 그 스승을 치켜 세우는 것이 너무 지나쳐서 심지어는 횡거(橫渠 장재(張載))에게까지 비교하기도 한다. 만일 그 저술이 없었다면, 참고할 수가 없어서 그가 어떤 사람인 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화담은 그 저술에 병통 없는 말이 하나도 없으니, 그 인간과 학문을 이로도 알 수 있다.”

하였다. -우성전-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종사(從祀)하는 전례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다. 저 최고운(崔孤雲) 같은 이는 문장만 숭상하고 또 부처에게 몹시 아첨했었다. 그의 문집 가운데 있는 〈불소(佛䟽)〉 따위의 작품을 볼 때마다 몹시 미워하면서 통렬해 끊어버리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그를 문묘에 두어 제사 지내니 어찌 선성(先聖)을 욕되게 함이 심하지 않는가.”

하였다. 또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사현(四賢)은 비록 공덕이 있다 하나, 문묘(文廟)에 종사하기까지 하는 것은 가볍게 의논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당시에 관학생들이 상소하여 종사를 청하였는데, 선생은 이 말을 듣고 끝내 옳게 여기지 않았다. -김성일-
선생은 의리(義理)를 풀이하여 말할 때에 명백하고 적확하여, 심오하거나 모호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정유일-
선생이 말하기를,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치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성현들은 오직 이치를 귀히 여기고, 운수를 귀히 여기지 않았으니, 오직 이치로써 하여야 할 일은 힘을 다해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만일 한갓 운수만 믿을 뿐이라면 화와 복이 오는 것을 모두 운수에만 맡겨 두어 착한 일을 하려는 마음은 없어질 것이니,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김부륜(金富倫)-
무당이나 점치는 일이나 기도하는 일은 일체 엄금해서 집 안에 들여놓지 않았다. -이덕홍-
일찍이 말하기를,

“황명(皇明 중국 명나라)의 학자들은 대체로 모두 불교의 기미를 가지고 있는데, 오직 설 문청(薛文淸 설선(薛瑄))은 참으로 성현의 근본 뜻을 얻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문청의 평생 공부는 오로지 경(敬) 자에 있었다.”

하였다. -김성일-
선생이 젊었을 때 청량산(淸凉山)에 노닐다가 〈백운암기(白雲菴記)〉를 지었는데, 그 절의 중이 그것을 새겨서 암자의 벽에 붙여 두었다. 선생은 만년에야 그 말을 듣고 곧 떼어버리라고 하였다. 또 산승이 와서 시를 청하면 비록 거절은 하지 않았지만 다만 자연의 경치만 적어 주고 한 자도 불교에 대한 것은 쓰지 않았다. 그리고 만년에는 그런 작품마저 적었다. -김성일-
묻기를,

“한 번 생각한 일을 마음에서 잊을 수가 없어 묵혀 두는 병통이 있는데, 그저 잊을 수만 있으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진실로 그렇다. 다만 잊을 수 있다는 것은 습관적으로 잊는 것과 비슷하여 잘못 들어가는 곳이 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어떻게 하면 잘못 들어가는 병통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능히 잊지도 않고 조장하지도 않는 공부에 얻는 것이 있으면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국필-

[주D-001]사현(四賢) :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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