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집_언행록 5_유편(類編)

잡기(雜記)

 

선생은 이마가 두툼하고 넓었으므로, 송재(松齋 숙부인 이우(李堣))가 매우 아껴서 항상 ‘광상(廣顙)’이라고 부르고,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 선생의 어릴 때 이름은 서홍(瑞鴻)이었다. -이안도-
선생은 일찍부터 자리의 한쪽 벽 위에 백낙천(白樂天)의 시구를 써 붙여 두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번거로움 면하려면 고요가 제일이요 / 捄煩莫如靜
졸렬함 면하려면, 근면이 제일이다 / 捄拙莫如勤

하였다. -김부륜-
선생은 점치는 일에 있어서, 그 학설은 알지만 즐겨 하지는 않았다. -이덕홍-
선생은 언어나 문장에 있어서도 일찍이 희롱이나 잡된 말을 하는 일이 없었다. 어떤 이가, 태진(太眞 양 귀비(楊貴妃))이 임공도사(臨邛道士)를 보내어 당나라 천자에게 돌아가 알린 시를 가지고 과제를 삼고자 하였다. 선생이 그것을 비평하여 말하기를,

“태진의 일은 백낙천이 처음 본보기를 만들었고, 어무적(魚無迹)이 이를 더욱 퍼뜨렸다. 대장부의 입에서 어찌 음탕하고 추한 말을 그려 내겠느냐.”

하였다. -김성일-
선생은 성품이 트이고 맑은 것을 좋아하고, 막히고 덮인 것을 미워하였다. 그래서 나무 따위 같은 것도 반드시 성기게 쳐내어 앞을 가리지 않도록 하였다. -김성일-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말은 뜻을 전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학자는 문장을 이해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면, 비록 글자를 약간 안다 해도 그 뜻을 말에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덕홍-
선생의 시는 맑고 엄하며 간결하고 담박하였다. 젊어서는 두보의 시를 배웠고, 늙어서는 회암(晦菴)의 시를 좋아하였는데, 가끔 그 격조가 꼭 한손에서 나온 것 같았다. -정유일-
선생의 필법은 단정하고 굳세며, 고상하고 중후했다. 그 대자(大字)도 방정하고 엄하며 가지런하여, 이름 난 다른 사람들이 괴이하고 기이한 것만을 숭상하는 것과는 달랐다. 경복궁이 화재를 당해 다시 수리할 때에 궁전의 액자나 문의 제자(題字)는 모두 선생의 글씨였고, 상량문 또한 선생이 지은 것이다. -정유일-
선생은 비록 글자 한 자를 우연히 쓰더라도 점이나 획은 반드시 정돈하였고, 글자 체는 방정하고 중후했다. 그리고 시 한 수를 우연히 읊더라도 한 글귀 한 글자를 반드시 깊이 생각하고 고쳐서 함부로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이덕홍-
묻기를,

“천지나 일월(日月)의 모양은 하나인데 사해(四海)와 팔황(八荒)의 나라는 제각기 다르니,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재변도 각각 그 나라의 일로서 오직 한곳에서만 나타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한 나라에 변이 있으면 천하에 다 나타나는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재변은 원래 그 나라의 일로서 그 나라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인들 어찌 두려워하여 스스로 돌아보고 살피지 않겠는가. 그것은 마치 부모가 화를 내어 한 자식을 꾸짖는 것과 같으니, 다른 자식인들 어찌 자기가 꾸지람을 받지 않는다 하여 안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두려워하여 자기를 단속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였다. -김부륜-
묻기를,

“잠저(潛邸 임금이 되기 전에 사저(私邸)에 있음) 때의 옛 이름도 기휘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예(禮)에 ‘옛 이름은 기휘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이국필-
선생이 말하기를,

“천곡서원(川谷書院)의 이천(伊川) 선생 제문에 ‘혁훤(赫喧)’이라는 두 자는 온당하지 못하니, ‘정대(正大)’로 고치는 것이 옳다. 대개 화상찬(畵像讚)에는 ‘전야대성(展也大成)’이라 하였고, 시호는 ‘정공(正公)’이라 하였으니, ‘정대’로 쓰는 것이 온당하다.”

하였다. -김성일-
묻기를,

“화담이 일찍이 말하기를, ‘날마다 꿈에 정자를 본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날마다’라는 말을 알 수 없다.”

하였다. -우성전-
묻기를,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시켜 회암(晦菴)의 모습을 족자에 그려서 가끔 내어 벽에 걸어 두고 그것을 보며 스스로 경계하고 공경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이런 일이야 물을 것이 무엇인가.”

하였다. -이국필-
선생이 말하기를,

“어른 앞에서 ‘나’라고 일컫는 것은 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이다. 옛날 오(吳)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항상 자기를 ‘나’라고 일컬었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은 그를 불러 ‘오나[吳我]’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은 벼슬이 높은 사람 앞에서는 자기를 소인이라고 일컬었는데, 그것도 아주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나는 평생에 소인이라고 일컫는 일이 없다.”

하였다. 덕홍이 묻기를,

“그러면 자기를 일컬을 때에는 무어라고 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옛날 사람은 자기를 일컬을 때에는 반드시 그 이름을 들었는데 이것을 본받으면 된다.”

하였다. -이덕홍-
선생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병인년(1566, 명종21)에 예천(醴泉)에 갔더니 어떤 먼 일가의 과부가 여종을 보내어 말하기를, ‘구차하게 산 지 여러 해에 아무 데도 의뢰할 곳이 없습니다. 집이 이웃과 송사를 다투어 오다가 지금 판결이 났는데, 제게 베 30여 필을 바치라고 합니다. 관사(官使)가 집에 와서 독촉이 성화 같지만, 집에는 단 한 자의 여축한 베도 없습니다. 바라건대, 은혜로운 말을 베풀어 이 궁한 일가를 구원하소서.’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에 매우 슬프고 가여웠으나, 평소에 사로써 공을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두세 번 물리쳤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그는 내게 있어 비록 먼 일가라 하지만 선조로 보자면 꼭 같은 자손이니, 내 어찌 길 가는 사람 보듯 하랴 생각하고, 그 사실을 태수에게 말하니 태수가 마침내 베 바치는 일을 전부 면제해 주었는데, 내가 한 일이 의(義)에 있어서 어떠한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덕홍-
한번은 말하기를,

“대개 자기를 너무 높이거나 다른 사람을 망녕되이 추어올리는 것은 다 진실한 소득이 없는 것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실지 소득이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되었겠는가.”

하였다. -우성전-
무진년(1568, 선조1) 가을에 선생은 임금의 부르심을 받고 서울서 겨울을 지낼 때, 그 형의 아들 굉(宏)이 항상 곁에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항상 고향으로 내려가라고 꾸짖기만 하고, 한 번도 굉을 위하여 남에게 한마디도 청탁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신미년(1571) 7월에 굉에게 기린 찰방(麒麟察訪)이라는 벼슬이 내렸다. 이는 전형을 맡은 사람이 선생을 추념하여 그 자제에게 벼슬을 주었던 것이다. -구봉령(具鳳齡)-
병인년(1566, 명종21) 10월에 선생이 계당(溪堂)에 계시면서, 〈기몽(記夢)〉 시를 지어 손수 써서 덕홍에게 주었다. 그 시에,

내 꿈에 그윽한 곳을 찾아 동천(洞天)에 들었노라 / 我夢尋幽入洞天
천 절벽 만 골짝 구름 속에 열려 있고 / 千巖萬壑凌雲煙
한 줄기 맑은 냇물 쪽처럼 푸르고 / 中有玉溪靑如藍
물 거슬러 표연히 올라가는 돛배 한 척 / 泝洄一棹神飄然
우러르니 산허리에 도사 집 하나 / 仰看山腰道人居
걸음걸음 산 기운 헤쳐 가니 허공에 오르는 듯 / 行穿紫翠如登虛
사립 열고 들어가니 정갈한 방 하나 / 迎人開戶一室淸
나와 맞는 여윈 신선 안개 자락 끌었다 / 臞仙出揖曳霞裾
어느 핸가 내 와서 놀던 곳 방불하이 / 髣髴何年吾所遊
벽에 쓴 옛 글씨는 있을 터에 어이 없나 / 壁上舊題留不留
집을 두른 흠대에는 찬 물방울 날리는데 / 屋邊刳木飛寒泉
이슬 맺힌 계수나무 가지 서로 얽히었다 / 團團桂樹枝相樛
뒤따르던 두 젊은이 서로 보고 감탄하면 / 同來二子顧且歎
따라서 집을 지어 영영 세상일 잊으렷다 / 結棲永擬遺塵絆
문득 한 번 하품하고 기지개 켜고 나니 / 忽然欠伸形蘧蘧
닭소리에 지는 달빛 남창에 들어오네 / 雞呼月在南窓半

하였다. 이 꿈을 꾸고 난 며칠 뒤에 선생이 갑자기 월란(月瀾)으로 떠나니, 그날은 24일이었다. 덕홍은 금제순(琴悌筍)과 함께 먼저 가서 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덕홍이 조용히 선생에게 묻기를,

“전날에 선생은 덕홍에게 ‘먼저 주재(主宰)를 세우라.’ 하고 또, ‘오직 경(敬)이라야 주재를 세울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경을 말함에는 갈래가 많은데 어떻게 하면 망조병(忘助病)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우선 정제(整齊)하고 엄숙하게 공부를 해 나가되, 찾아보려고도 하지 말고 안배하려고도 하지 말며, 오직 의리 속에 마음을 가라앉혀서 오래오래 하면 저절로 깨달아지고 자연히 한 물(物)도 허용하지 않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잊지도 않고 조장하지도 않아서 참동계(參同契)의 화법(火法)으로 증험한다 하니, 그 학설은 어떠합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참동계의 연단(練丹) 화후(火候)에는 다 묘한 법이 있지만 그것은 우리들이 공부하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주 선생이 맹자의 양기법(養氣法)을 빌려 설명하였으나 도가에서는 단(丹)을 기르고, 우리는 마음을 기르는 것이니, 묘한 법은 비록 같지만 그 실속은 다른 것이다.”

하였다. 이튿날 낭영대(朗詠臺)에 올라가 중을 시켜 돌을 져다가 섬돌을 쌓고, 손수 어린 소나무를 만져서 못쓸 가지는 꺾어 내었다. 그리고 밤에는 〈칠대(七臺)〉 시 이 시는 문집에 보인다. 를 지었다. 이튿날 아침에 덕홍이 또 《심경》 〈악기(樂記)〉의 예악불가사수거신장(禮樂不可斯須去身章 예와 악은 잠깐 동안도 몸에서 버릴 수 없음을 설명한 장)에 대하여 질문하다가, 부주(附註)의 언충신행독경(言忠信行篤敬 말은 충성스럽고 미더우며 행실은 독실하고 공경함)이란 말에 이르러 묻기를,

“심학은 마음 가운데 한 물건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충신(忠信)과 독경(篤敬)에 있어서는 도리어 생각마다 잊지 말아서 마치 무엇이 앞에 보이는 것 같고, 난간에 기대어 있는 것같이 하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한쪽에 치우쳐 얽매이지 않습니까?”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래서 옛 선비들은 힘을 들여도 안 되고, 또 힘을 안 들여도 안 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하였다. 이튿날 선생이 또 덕홍에게 말하기를,

“어제 말한 힘을 들여도 안 되고 힘을 안 들여도 안 된다는 말은 이천(伊川)이 말한 ‘뜻을 붙이는 것도 아니요 뜻을 붙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 더욱 온당한 것만 못하다.”

하였다. 다음 날 선생이 또 말하기를,

“지금 부형들은 항상 《심경》과 《근사록》을 강하는 것은 그르다고 하여 자제를 꾸짖고, 배우는 자들도 세상 여론을 두려워하여 이 학문을 강론하는 사람이 적은데, 나는 심경을 강하고 있으니 미안한 생각이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이 학문을 버리고 다른 책을 강론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하였다. 이날 선생이 돌아오려고 지팡이를 짚고 동네로 내려올 때에 덕홍 등이 뒤를 따랐다. 선생이 말을 타고 돌아보면서,

“무엇하러 꼭 내려와야 하는 것인가.”

하니, 이것이 〈기몽〉 시의 징험이었다. -이덕홍-

[주D-001]망조병(忘助病) : 아주 잊어버리는 것과 서두르는 병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