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집_언행록 6_부록

제문(祭文) [이이(李珥)]

 

이이(李珥)

시귀(蓍龜)를 이미 잃고 부모는 이미 돌아갔도다. 용과 호랑이는 이에 죽고 큰 별은 빛을 숨겼도다. 곤의(袞衣 왕의 정복(正服))는 빛나고 아름답건만, 누가 그 터진 곳을 기우며, 어린 애가 걱정스럽건만 누가 그 허물을 구원할꼬. 변괴가 사방에서 일어나는데 누가 그 막을 도리를 마련하며, 어두운 밤이 길고 긴데 누가 있어 가을볕을 쬐어줄꼬.
아아, 공(公)이 나실 때 천지간의 정기가 공에게 모였도다. 부드럽고 따스하기가 옥과 같아서 그 얼굴은 순박하였고, 그 뜻은 밝은 해를 꿰뚫으며, 행실은 가을 물처럼 조촐하였도다. 착함을 즐기고 옳음을 좋아하니, 남과 나의 구별이 없었도다. 머리를 굽혀 하학(下學)에 힘쓰니, 깊이 생각하고 정밀하게 연구하며, 실 끝을 헤치고 털 끝을 가르니, 그윽하고 깊은 것을 환하게 보았도다. 여러 가지 말이 제각기 달라서 굵고 가는 것이 쓰임이 다르니, 그것을 절충하여 하나로 모으되 자양(紫陽 주자)을 그 스승으로 삼았도다.
급한 흐름에서 용감하게 물러나 같은 유(類)에서 뛰어나고, 무리에서 떨어져 산림에서 도를 지키니 부하고 귀함은 뜬구름 같도다. 나라에 있어서는 반드시 드러나고, 아름다운 이름이 하늘에 사무쳤도다. 임금은 겸허하게 가르침을 기다렸고, 총애의 부르심은 잇달아 이르렀도다. 그윽한 거처는 여덟 폭 그림으로 그리어져, 대궐 안 문짝에 높이 달았도다. 새 임금 들어서 곁자리에 모시기를 목마르듯 하였도다.
상서로운 봉황이 와서 위의를 드러내니, 경연에 아름다운 빛이 났도다. 《성학십도》로 임금에게 아뢰니, 숨은 것을 파내고 감춘 것을 드러냈도다. 여럿의 칭찬이 높아갈수록 더욱 겸손하고, 물러나서는 더욱 낮추었도다. 석 장 글로써 대궐을 하직하고, 크고 넓은 기상으로 즐거이 돌아가니, 그 나아가고 물러남은 나라의 안위에 연관이 있도다.
조용한 시골에 묻혀 있으니, 찾아와서 공경히 스승으로 모시는 학생들이 있도다. 미묘한 이치를 밝게 드러내니 임금의 덕이 길이 새로웠도다. 나아가 백성들에게 혜택을 못 미쳤으되, 물러나 뒷사람을 이끌어 주었도다. 소자(小子)가 공부할 길을 잃어 흐리멍덩하게 나아갈 길을 모를 때에, 사나운 말은 함부로 뛰어 달리고 가시밭길은 거친데, 수레를 돌려 바른길로 고친 것은 진실로 공의 깨우침에 힘입었도다. 처음은 있었으나 끝을 맺지 못하여, 지금껏 갈피를 못 잡음을 슬퍼하도다. 혼자 생각에 스승을 쫓아가 업을 마치기를 바랐었더니, 하늘이 붙들어 주지 않아 철인이 갑자기 쓰러졌도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