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조선왕조실록 > 정조 18년 갑인(1794,건륭 59) > 8월30일 (갑신) > 최종기사
승지 이익운이 영남에 사신으로 갔다가 《대학연의》·《근사록》 등 고가의 문적을 찾아 보고하다
이보다 앞서 승지 이익운(李益運)이 영남(嶺南)에 사명(使命)을 받든 적이 있었는데, 명을 받들고 고가(古家)의 문적(文籍)을 찾아 바치면서 상에게 아뢰기를,
“인종 대왕(仁宗大王)이 세자로 계실 때 선정(先正)신(臣)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에게 하사하신 어찰(御札) 한 본이 옥산(玉山)의 계정(溪亭)에 받들어 간직되어 있는데 계정은 선정이 학문을 익히던 곳으로 지금은 그 서손(庶孫)이 주관하고 있습니다. 《대학연의(大學衍義)》는 고 참판 김륵(金玏)이 황조(皇朝)에 사신으로 갔을 때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선사하신 것으로 첫 권에는 흠문(欽文)의 도장이 찍혀 있고, 기타 각 권에는 광운(廣運)의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붉은 인주 자국이 지금까지 완연하여 매우 희귀한 것인데, 선조(先朝) 병인년에 연신(筵臣)의 진주(陳奏)로 인하여 그 자손으로 하여금 가져오게 하여 읽으시고는 상본(常本) 《대학연의》 한 부를 선사하시면서 첫 권에는 특지(特旨)를 쓰고 각 권에는 어보(御寶)를 찍고 또 춘궁(春宮) 두 글자를 찍으셨습니다.
《근사록(近思錄)》은 곧 고 찬성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이 소매 속에 간직하고 있던 것입니다. 가정(嘉靖) 경자년에 중묘(中廟)가 경회루(慶會樓)의 연회에 납시어 재추(宰樞)들과 꽃을 구경하면서 각각 마음껏 즐기게 하고는 파하였는데, 액정서(掖庭署)에서 《근사록》의 작은 본을 습득하자 중묘께서 전교하기를 ‘권벌의 소매 속에서 떨어졌다.’고 하고는 돌려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선조 병인년에 김륵(金玏)의 집안에서 간직하고 있던 《대학연의》와 함께 가져다 보시고는 상본 《근사록》 한 본을 선사하면서 첫 권에 특지를 쓰고 각 권에는 어보를 찍고 또 춘궁 두 글자를 찍기를 《대학연의》와 똑같이 하셨는데 일이 매우 희귀하였습니다.
또 삼가 듣건대, 선묘조(宣廟朝)에 중조(中朝)에서 난삼(襴衫) 두 벌과 복두(幞頭) 두 개를 본조(本朝)에 선사하였는데, 한 벌은 태학(太學)에 두라고 명하고 한 벌은 안동(安東) 향교에 보내주셨습니다. 태학에 간직하고 있던 것은 임진년에 불에 탔고 안동에 간직하고 있던 것은 아직까지 탈이 없습니다. 선조 병인년에 향교 유생으로 하여금 가져오게 하여 어람(御覽)하시고 심지어 어시(御詩)까지 내리셨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보배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서적과는 다르기 때문에 신이 감히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중조의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및 동쪽으로 정벌하러 온 여러 사람들이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과 왕래한 편지 및 문충의 후손 유종춘(柳宗春)의 집에 있던 편면(便面)의 시화(詩畫) 세 첩과 안동(安東) 역동 서원(易東書院)에 있는 고려 좨주(祭酒) 우탁(禹倬)의 홍패(紅牌)를 함께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과거 조엄(趙曮)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영남의 조(趙)라는 성을 가지고 따라 갔던 자가 일본의 태학사 도국흥(陶國興)의 편지 한 본을 얻어서 돌아왔는데, 그 편지는 곧 국가의 비사(祕史)로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이 봉사(奉使)할 때의 일이 매우 상세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 전래된 문적(文蹟)과는 부계(符契)를 합한 듯하였는데 일이 기이하므로 역시 가지고 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건의 문적에 대해서 그 연기(緣起)와 내력(來歷)을 차기(箚記)하여 내각(內閣)에 들여보내면 서문을 지어 내려보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승지 서영보(徐榮輔)에게 이르기를,
“승지 이익운(李益運)이 사명을 받들어 영남에 내려갔을 때 고적(古蹟)을 가져온 것이 많았는데 서문을 써서 돌려 주려 한다. 그중에 효릉(孝陵)의 어찰(御札)은 곧 선정(先正)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으로서 계정(溪亭)의 주인이 된 자가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나는 선정의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의 첫 권에 이미 어제(御製) 서문을 내렸으니 다시 글을 쓸 필요는 없겠다. 어찰을 받들어 온 원본은 전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으로 하여금 계정 주인이 된 선정의 후손에게 내어주도록 하여 분쟁의 폐단이 있게 하지 말고, 이 연석에서 한 말들을 여러 집으로 하여금 알게 하라.
증 판서 김륵(金玏) 집안의 《대학연의(大學衍義)》는 만력(萬曆) 임인년에 황조(皇朝)에서 선사(宣賜)한 것인데, 선조(先朝) 때 취하여 보시고 어시(御詩)와 어제(御製) 및 상본(常本) 《연의》를 하사하신 것이 선조 병인년의 일이었고, 내가 가져다 본 것은 올해 갑인년의 일이다. 나는 《연의》 원본이 곧 《대학》 일서(一書)라고 생각하여 새로 찍은 《대학》을 특별히 하사했다. 우리 조정에서 글자를 주조한 것은 세종조(世宗朝) 갑인년에 이루어졌고 내가 갑인자본(甲寅字本)으로 거듭 주조하여 올해 삼경과 사서를 찍었는데, 이번에 반포한 《대학》이 이것이다. 그렇다면 4개의 인(寅)자가 서로 부합되니 어찌 희귀하지 않은가. 서문은 이미 지어 내렸으니 영중추부사와 대제학으로 하여금 써서 바치게 하라.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 집의 《근사록》에 대해서도 지어 내린 서문이 있다.
내가 춘저(春邸)에 있을 때 선정(先正) 이황(李滉)에게 《수증심경(手贈心經)》의 수진본(袖珍本)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궁료(宮僚)로 있던 선정의 후손에게 구해 보았다. 지금 또 충정의 《근사록》을 보고는 충정의 집에 《심경》 한 부를 특별히 하사하여 《근사록》과 같이 간수하도록 하니, 이는 대체로 두 책이 서로 안팎이 될 뿐 아니라 두 현인의 사적도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서문은 영중추부사와 그대가 써서 바쳐라. 유 문충(柳文忠) 집안에 있는 중국 장수의 서화첩(書畫帖)에 대해서도 서문이 있으니 영중추부사가 써서 바치고 또 그로 하여금 발문도 짓게 하여 각각 한 첩씩 만들어라.”
하고, 상이 이르기를,
“권(權)·김(金) 두 집안의 자손 중에 필시 과거로 인해 올라온 자가 있을 터이니 포마(鋪馬)를 줘서 가져가게 하라. 만일 이미 내려갔다면 올라오기를 기다려 부쳐 보내라. 우탁(禹倬)의 홍패(紅牌)와 도국흥(都國興)의 서첩(書帖)도 이미 어람(御覽)했으니 영중추부사에게 전하여 돌려 보내고, 유문충 집안에 내려 보낼 것은 초계 문신(抄啓文臣) 유태좌(柳台佐)를 불러들여서 부쳐 보내라.”
하니, 영보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국조보감(國朝寶鑑)》 안에서 선조(先朝)께서 김륵(金玏) 집안의 《대학연의》를 취하여 보신 일을 삼가 본 적이 있는데, 이번의 이 일은 앞뒤가 일치하니 일이 간책(簡策)에 빛날 것입니다. 이루 다 삼가 칭송하지를 못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 가져다 본 영남의 여러 고적(古蹟)과 선사(宣賜)한 어제(御製)·어시(御詩)와 《대학》·《심경》 등에 대한 일의 시말을 《일성록(日省錄)》과 《기거주(起居注)》에 상세히 기재토록 하라.”
하고, 이어 김륵·권벌의 후손을 등용하라고 명하였다.
【원전】 46 집 502 면
【분류】 *왕실(王室) / *사상(思想) / *인사(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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