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승정원일기 > 고종 38년 신축(1901, 광무 5) > 12월27일 (기미, 양력 2월 5일) >

 

공자를 대성선사로 고쳐 쓸 것 등의 의견을 진달하는 봉상사 제조 김태제의 상소

 

○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김태제(金台濟)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지난번에 난잡한 글을 외람되이 올려 온화한 비답을 받았으므로 너무도 황송하고 감격하여 살아서는 목숨을 바치고 죽어서도 결초보은(結草報恩)하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선성(先聖)과 선현(先賢)의 위호(位號)를 바르게 하고 공자(孔子)와 기자(箕子)의 후손들을 봉하며 교경당(校經堂)을 창설하는 문제는, 어느 것이나 모두 종교(宗敎 유교(儒敎)를 가리킴)를 육성하고 확립하는 방도이니, 오직 가져다 시행하면 될 뿐이므로 지금 다시 아뢰어 성상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의 진언(進言)에 아직도 미진한 점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감히 추가해서 아룁니다.
삼가 《숙종보감(肅宗寶鑑)》을 상고해 보니, 우의정 이상진(李尙眞)이 현종(玄宗)이 공자에게 문선왕(文宣王)이라는 시호(諡號)를 준 잘못에 대해 논하기를, ‘스스로 황제라고 하면서 신자(臣子)로 봉한 사람에게 억지로 왕이라는 칭호를 준 것은 성인을 존중하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맨 처음에 주공(周公)을 선성(先聖)이라 부르고 공자를 선사(先師)라고 부른 것은 진실로 성인을 높이는 데에 마땅한 일이었고, 그 뒤에 공자를 선성이라 부르고 안자(顔子)를 선사라고 부른 것도 정도(正道)에 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당(唐) 나라 때에 옛것을 고쳐 왕으로 봉한 것은 후세의 시비를 면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니, 명(明) 나라 때에 왕이라는 칭호를 사(師)로 고친 것은 잘못을 단번에 바로잡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신의 소견에는 아주 좋기는 하나 완전히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대성문선(大成文宣)’이라는 칭호를 없앤 이상 ‘지성(至聖)’만을 남겨 두어서는 안 되니, 지금 만약 신주에 ‘대성선사(大聖先師)’ 또는 ‘대성종사(大聖宗師)’라는 네 글자로 특별히 고쳐 쓴다면 스승을 높이는 데에 부합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배향(配享)하는 네 분을 여전히 복성(復聖), 종성(宗聖), 술성(述聖), 아성(亞聖) 등의 칭호로 부르는 것은 사실 평가하는 말에서 나온 것인 만큼 공경심이 부족한 것 같으니, 모두 버리고 단지 선사(先師) 혹은 선성(先聖), 선철(先哲)로 통틀어 부르는 것이 올바를 것 같습니다. 십철(十哲)과 배향하는 신위(神位)에 이르러서는 명 나라 제도대로 단지 선현(先賢)과 선유(先儒)로 고치고, 우리나라 선정(先正)의 신위 또한 선생(先生)이나 선정(先正)으로 써야지 작호(爵號)와 시호(諡號)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을 참으로 나란히 놓아서는 안 되는데, 동무(東廡)의 54번째 신위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과 55번째 신위 선정신 김집(金集)이 부자간이어서 온당치 못한 듯하니 역시 의논하여 고쳐야 할 것입니다.
또 태학(太學)은, 공자의 사당이라는 견지에서 말하면 묘궁(廟宮)처럼 보아야 할 것이고 성균관(成均館)이라는 견지에서 말하면 다른 관각(館閣)처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참으로 하나의 관청으로 두어서 자립하게 해야 하는데, 지금은 학부(學部) 안에 소속되어 허다한 학교(學校)들과 뒤섞여 구별이 없으니, 바로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삼가 생각건대, 성인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그 도(道)를 연구하는 일은 남긴 경서(經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여기저기 흩어져서 《십삼경주소(十三經註疏)》와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아예 말할 것도 없고, 우선 통용되는 영락(永樂) 연간의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으로 말하더라도 각판(刻板)과 활판(活板)의 틀린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이른바 언해본(諺解本)은 오직 본조(本朝)에만 있는데 선정신 이황(李滉)이 편찬한 것으로 잘못 전해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으며, 그 해석이 모두 꼭 들어맞는 것이 아니어서 정자(程子)나 주자(朱子)의 본의와 차이나는 것이 없지 않고 잘못된 음과 뜻도 매우 많습니다. 또 사서는 일찍이 선정신 이이(李珥)의 언해본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습(傳習)되지 않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교경당(校經堂)은 한대(漢代)에 처음 만들어졌으니, 장안(長安)의 석거각(石渠閣)이나 낙양(洛陽)의 백호관(白虎觀)이 다 오경(五經)을 강론하여 결정하던 곳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은 교경당을 설치하자고 청하는 것입니다. 아, 근래에 학교가 날로 달로 늘어나서 거의 그 종교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는데, 다행히 성상의 조칙이 특별히 내려져 백성들의 뜻이 비로소 정해졌습니다. 이에 현자를 초치하는 일을 참으로 늦출 수 없으며, 배향할 만한 선유(先儒)를 이때에 배향하는 것이 또한 종교를 육성하고 확립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배향할 만한 선유를 거의 빠뜨리지 않고 배향하였는데 오직 명 나라 선유만 빠졌으니, 일찍이 ‘당당한 정통(正統)을 가지고 200년간 인재를 배양(培養)한 명 나라가 원(元) 나라만 못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에 출향(黜享)한 사람에 대해 비록 논의할 것이 없지는 않지만 크게 보면 모두 공자의 무리가 될 만하니, 전부 빼는 것은 부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고려조(高麗朝)의 문헌공(文憲公) 최충(崔冲)은 생전에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불렀고, 문희공(文僖公) 우탁(禹倬)은 온 나라 사람들이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조(我朝)의 선정신 정구(鄭逑)는 숙묘(肅廟)가 제문(祭文)에 처음으로 선정이라고 썼는데, 그후에 문묘(文廟)에 배향하기를 상소하여 청한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선정신 김상헌(金尙憲)은 정묘(正廟)가 전교하기를, ‘도학(道學)이 바르고 절의(節義)가 높은 데 대하여 우리나라 사람들만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청(淸) 나라 사람들까지도 공경하므로 나는 죽은 정승[故相]이라 하지 않고 선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정묘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그런데도 양무(兩廡)에 올려 제사 지내는 일을 질질 끌어 왔으니, 어찌 많은 사람들이 억울해하지 않겠습니까. 서기(徐起)와 송익필(宋翼弼)로 말하면 도학과 실제의 덕행이 모두 배향할 만한데도 단지 출신 때문에 애초에 논의되지 않았으니, 성학(聖學)에 있어서 어찌 문벌을 따지겠습니까.
그리고 인사를 취하는 것으로 논하건대, 향학(鄕學)에서 육덕(六德), 육행(六行), 육예(六藝) 세 종류를 가르쳐서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빈객의 예로 공경하고 왕에게 천거하던 것은 주(周) 나라의 좋은 제도이고, 시(詩)와 부(賦)를 가지고 과거를 보던 것은 수(隋) 나라에서 처음 만든 제도입니다. 지금 과거 제도를 폐지한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지만, 공거(貢擧)를 행하지 않는 것은 실로 미처 시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 신은 삼가 현량과(賢良科) 등의 제도를 회복하고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의 제도를 참작해서 우수한 사람을 뽑아 벼슬에 임명하는 것이 인재를 권장하는 데에 일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지금 전후에 아뢴 바대로 경서를 교정하고 유교를 육성하고 확립하면 기자와 공자의 도를 밝히고 성조(聖祖)의 뜻을 이어 나가는 것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배운 것은 없지만 종교에 대한 일념은 늙었어도 해이해지지 않은바, 다행히 문명(文明)한 때를 만나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미천한 사람의 말이라 하여 버리지 마시고 조정의 신료들에게 이 상소를 내려 의견을 수합하시어 가령 채택할 만하다고 하면 채택하여 시행해 주소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신이 비록 하루를 살다가 죽는다 하더라도 일 년을 더 산 것과 같을 것입니다. ……”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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