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열산성(沙熱山城) 지금의 청풍군(淸風郡)
동사강목(東史綱目) > 동사강목 제4하
계유년 문무왕 13년(당 고종 함형 4, 673)
춘정월 황룡사(黃龍寺)에 별이 떨어졌다.
○ 임강수(任强首)를 사찬(沙飡)으로 삼았다.
왕이 말하였다.
“강수는 능히 문사(文辭)로써 뜻을 중국에 전하였으니,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무공(武功)이라고 하나 문사의 도움도 있었다. 강수의 공을 어찌 소홀히 하랴! 이 직(職)을 제수하고 세봉(歲俸)으로 조(租) 2백 석을 더한다.”
2월 서형산성(西兄山城)을 증축(增築)하였다. 지금의 경주부(慶州府) 서쪽 칠 리(七里)에 있다. 지금은 선도산(仙桃山)이라 일컫는다.
윤5월 당나라 장수 이근행이 고구려의 남은 무리를 호로하(瓠瀘河) 서쪽에서 깨뜨렸다. 지금의 마전(麻田) 징파도(澄波渡) 하류에 호로하가 있는데, 그 남쪽이 곧 옛날 칠중성(七重城)이다.
수천 인이 포로로 잡혔으며 나머지는 모두 도망하여 왔다. 근행의 아내 유씨(劉氏)는 벌노성(伐奴城)에 머물러 있었다. 고구려가 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오자, 유씨가 갑옷을 입고 무리를 거느리고 성을 지켰는데, 오랜 뒤에 군사가 물러갔다. 황제가 연국부인(燕國夫人)으로 봉하였다.
6월 호랑이가 대궁(大宮)의 뜰에 들어왔다.
추7월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 김유신이 졸(卒)하였다.
이에 앞서, 큰 별이 황룡사에 떨어지니 바로 성의 중간이다. 왕이 근심하니 유신이,
“액(厄)은 노신(老臣)에게 있으니, 국가의 재앙은 아닙니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
하자, 왕이 ‘그렇다면 과인의 근심이 더욱 심하오.’ 하고, 이에 유사(有司)에게 기도하라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유신의 병이 위중하매, 왕이 친히 가서 묻기를,
“과인에 있어서의 경(卿)은 고기가 물에 있는 것과 같소. 혹시 경이 죽는다면 사직은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니, 유신이 대답하기를,
“신이 어리석고 불초하였으나 다행히 성상(聖上)께서는 의심치 않고 등용하시고 한결같이 신임하셨기 때문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약간의 공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삼한은 한집안이 되었고, 백성은 두 마음이 없으므로, 태평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소강(小康)이라 할 만합니다. 신이 예로부터 선대(先代)의 유업을 계승한 임금을 보건대, 누구나 처음은 있으나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둔 이는 드물었습니다. 여러 세대의 공적이 하루아침에 폐하여질까 심히 두렵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성공이 쉽지 아니함을 아시고 수성(守成)이 또한 어려움을 생각하시어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 함으로써 위로는 조정을 화합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케 하신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하니, 왕이 감읍(感泣)하였다. 졸(卒)하매 나이 79세였다. 채색 비단 1천 필과 조(租) 2천 석을 부의(賻儀)하고 고취(鼓吹) 1백 인을 주어 금산원(金山原)지금의 경주부 서악리(西岳里)에 있다 에 장사지냈으며, 유사(有司)에게 비(碑)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게 하였다. 처 지소 부인(智炤夫人)은 태종의 셋째 딸이다.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삼광(三光)은 이찬(伊餐), 원술(元述)은 소판(蘇判), 원정(元貞)은 해간(海干)이고, 장이(長耳)ㆍ원망(元望)은 모두 대아찬이며, 서자 군승(軍勝)은 아찬이었다. 유신이 졸하였을 적에 원술이 어머니 뵙기를 청하자, 어머니가 말하기를,
“부인(婦人)은 삼종(三從 시집가기 전에는 부모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어서는 아들을 따른다는 말)의 의(義)가 있으므로 이제는 마땅히 아들을 따라야 하겠으나, 네가 이미 선군(先君)에게 아들노릇을 못하였으니 내가 어떻게 네 어미가 되겠느냐?”
하고, 끝내 만나지 않았다. 원술이 통곡하면서 ‘담릉의 잘못으로 이에까지 이르게 되었구나!’ 하고 드디어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뒷날 당병이 와서 매소천성(買蘇川城)미상 을 치므로, 원술이 전날의 부끄러움을 씻고자 힘써 싸워 공을 세웠으나, 부모에게 용서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김씨는 이르기를,
“《서경(書經)》에, ‘현신(賢臣)에게 맡겼으면 두 마음을 갖지 말며, 간사한 자를 버릴 때는 의심하지 말라.’ 하였다. 신라가 유신을 대우한 것을 보건대, 친근히 하여 간격이 없었고 맡기고는 의심을 하지 아니하여, 모책(謀策)은 시행하고 말은 들어 주어서, 원망하지 않게 하였다. 유신은 그의 뜻을 행할 수 있어서 공명 속에서 평생을 마치었다. 을지 문덕(乙支文德)의 지략과 장보고(張保皐)의 의용은 중국의 사서(史書)가 아니라면 묻혀 버려서 알 수 없었겠지만, 유신은 고을 사람들의 칭송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아, 초동(椎童)ㆍ목수(牧竪)에 이르기까지 이를 알고 있으니 그 사람됨이 반드시 보통 사람과 다름이 있는 것이다.”
하였고, 최씨는 이르기를,
“삼국(三國)이 정립(鼎立)하여 대치(對峙)하고 있을 때에 서로 침벌하여 물고 뜯고 함이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인심이 난리를 싫어하매 하늘이 무열왕을 내어 널리 창생(蒼生)을 구제하였다. 유신이 이때를 맞추어 태어나서 조우(遭遇)의 특이함이 고기가 물에 있음과 같았다. 그는 충분(忠憤)한 마음과 영위(英偉)한 지략을 기울여서 통일의 공을 이루었으며, 위(位)가 장상(將相)을 겸하여 몸소 국가의 안위(安危)를 도맡아, 20여 년 동안 우뚝이 국가의 장성(長城)이 되었으니, 이른바 뛰어난 재주로 그 훌륭한 임금과 적당한 때를 얻어서 그 큰 공을 이룬 자이다! 하물며 죽을 때의 말이, 임금에게 고(告)하는 대신(大臣)의 체통을 살리었음에랴! 어려움을 두루 겪으면서 국사를 위하여 몸을 바쳐 공명과 충절을 종시(終始)토록 아울러 보전하였으니, 유신 같은 사람이야말로 비길 만한 데가 드물 것이다. 아! 어질다.”
하였다.
○ 아찬 대토(大吐)가 모반하여 복주(伏誅)되었다.
모반하여 당에 붙은 일이 누설되어 복주되었다. 처자는 천민을 만들었다.
○ 천광(天光)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9월 장수를 보내어 서해(西海)를 진압하였다.
대아찬 철천(徹川)을 보내어, 병선(兵船) 1백 척을 거느리고 진압케 하였다.
○ 당병이 말갈ㆍ거란과 함께 내침하매 군사를 보내어 아홉 번 싸웠는데 모두 이겼다.
2천 급을 베었다. 당병이 호로(瓠濾)ㆍ왕봉(王逢) 두 하수에 빠져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왕봉현(王逢縣)은 지금의 고양(高陽) 덕양현(德陽縣)이다.
○ 여러 성을 수축하였다.
사열산성(沙熱山城) 지금의 청풍군(淸風郡) 및 국성(國城)인 고란장성(古薍長城) 지금의 충주(忠州)ㆍ북형산성(北兄山城) 경주 안강현(安康縣) 동쪽 21리에 있는데 지금은 형산(兄山)이라 한다ㆍ소문성(召文城) 지금의 의성현(義城縣)ㆍ이산성(耳山城)ㆍ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 지금의 춘천(春川) 서쪽 경계의 땅인 듯하다ㆍ달함군(達含郡)의 주잠성(主岑城)ㆍ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ㆍ삽량주(歃良州)의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증축하였다.
겨울 당이 고구려의 우잠성(牛岑城) 지금의 우봉현(牛峯縣) 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
○ 비로소 외사정(外司正)을 두었다.
모두 33인인데 주(州)에는 2인, 군(郡)에는 1인을 두었다.
○ 항복한 백제 사람들에게 직위를 주었다.
그 위차(位次)는, 본국의 관함(官銜)에 견주었는데, 대내마(大奈麻)는 본래의 달솔(達率), 내마(奈麻)는 본래의 은솔(恩率), 대사(大舍)는 본래의 덕솔(德率), 사지(舍知)는 본래의 한솔(扞率), 당(幢)은 본래의 내솔(奈率), 대오(大烏)는 본래의 장덕(將德), 외관귀간(外官貴干)은 본래의 달솔(達率), 선간(選干)은 본래의 은솔(恩率), 상간(上干)은 본래의 덕솔(德率), 간(干)은 본래의 한솔(扞率), 일벌(一伐)은 본래의 내솔(奈率), 일척(一尺)은 본래의 장덕(將德)으로 하였다.
○ 백제의 수병(戍兵)을 다시 두었다.
처음에 태종왕(太宗王)이 백제를 멸하고서 수병을 파(罷)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백제의 남은 무리가 반역을 그치지 않아서 왕이 다시 수병을 둔 것이다.
'청풍광의리 > 고전 청풍'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풍 태수(淸風太守) 오사충(吳思忠)의 도계 서목(到界書目) 후미에 쓰다. (0) | 2011.05.12 |
---|---|
명재유고(明齋遺稿) > 명재유고 제38권 > 묘갈명(墓碣銘) (0) | 2011.05.12 |
유원고려국 조계종 자씨산 영원사 보감국사비명 병서 (0) | 2011.05.12 |
청풍군수 (0) | 2011.05.12 |
청풍군수 (0) | 2011.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