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은 늘 신하 중에 쓸 만한 인재가 없는 것을 근심하고, 신하는 늘 임금이 인재를 충분하게 등용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한다. 그 때문에 군신(君臣)이 서로 제회(際會)하는 것은 옛날부터 어려웠고, 지치(至治)의 성대함은 역대로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대개 10집만 사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는 법이거늘, 드넓은 천하에 어찌 인재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현자(賢者)는 자신을 추천하기를 꺼리고, 임금과 재상은 인재를 알아보는 총명함이 없다는 것에 있다. 한(漢)나라의 소하(蕭何), 조참(曹參)과 당(唐)나라의 방현령(房玄齡), 두여회(杜如晦)는 곧 진(秦)나라, 수(隋)나라에서 버려졌던 인재들인데도, 마침내 흥왕(興王)의 치적을 이루게 하지 않았던가? 또 그 당시의 인재가 어찌 다만 이 몇 사람에 그칠 뿐이겠는가? 깊은 산, 큰 못 속에 자신의 광채를 감춘 채 세상을 개탄하여 길게 읊조리면서, 불우하게 죽어간 자가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예를 들어 이좌거(李左車)의 계책이 조(趙)나라에서 채택되었다면, 정형(井陘)의 대첩(大捷)1)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뒤에 한신(韓信)이 제(齊)나라와 전쟁을 할 때도 혹자가 용저(龍且)에게 유세한 것이 또한 매우 기책(奇策)이었는데, 그것이 채택되지 못했기 때문에 한신이 제나라를 평정하고 초(楚)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당시에 전쟁에서 승리하고 공을 이룰 재주를 지닌 자가 한신 이외에는 마땅히 없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도, 오히려 이 정도로 대단한 계책이 있었으니, 은거한 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인재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았고, 그들 중에서 세상에 나와 큰일을 한 자는 다만 백에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현명한 군주는 현인을 구하는 것에 급급해 하면서, 오직 자신의 총명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는지, 성의가 부족한 바가 있는지 두려워할 뿐이요, 더러 좌우의 측근 무리들이 총명을 가리는 경우가 많더라도 천하에 인재가 없다고 단정하여 현인을 좋아하는 마음이 해이해 진 적은 없었다. 삼대(三代) 이후로 인재의 왕성함이 송(宋)나라 때보다 더한 시대는 없었다. 예를 들어 두 정씨(程氏)2)나 염계(濂溪)3)와 같은 이들은 모두 왕을 보필할 인재이자 경륜(經綸)의 솜씨를 지닌 사람들인데도, 신종(神宗)은 대부분 초야에서 한가로이 노닐도록 내버려두었다. 아침저녁으로 촘촘한 양탄자 위에서 더불어 논의하고 자문한 자들은 왕안석(王安石)의 잔당인 포종맹(蒲宗孟), 왕규(王珪), 채확(蔡確)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 나이가 노년에 접어들어, 조정은 날마다 어지러워지고, 사업의 성취는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묶으려는 것처럼 허무하게 된 뒤에야 마침내 돌이켜보고 망연자실하면서 조회에 임하여 탄식을 발하였다. 그러나 그때에도 정작 그렇게 된 연유를 돌이켜 찾을 줄은 모르고, 마침내 말하기를, “천하에 인재가 없다.”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한자(韓子)4)가 이른바 '정말 천리마(千里馬)가 없는 것이냐? 아니면 천리마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냐?'라는 경우이다. 하늘이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리고자 하지 않아서인가? 어찌 그리 미혹됨이 심한 것인가? 『중용(中庸)』의 아홉 가지 큰 법[九經]에서는 수신(修身)을 첫 번째로 삼고, 현자를 높이는 것을 그 다음에 놓았다. 수신이라는 것은 현인을 등용하는 근본이다. 현자를 높이는 절목은 네 가지를 두었으니, ‘참소하는 자를 제거하는 것’, ‘여색을 멀리하는 것’, ‘재화를 가벼이 보는 것’, ‘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신종(神宗)은 현인의 등용에 뜻이 있었으면서도 참소하는 자를 제거하지 못하였고, 좋아했던 자들은 참소하거나 면전에서 아첨하는 무리들뿐이었으니, 그 실덕(實德)이 지극하지 못했던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1)정형(井陘)의 대첩 : 한(漢)나라 한신(韓信)이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험한 요새인 정형구(井陘口)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싸워 조(趙)나라에 대승을 거두었던 고사를 가리킨다『史記 卷92 淮陰侯列傳』 2)두 정씨(程氏) : 송나라 때의 대학자로 중국 성리 철학의 새 지평을 열었던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7) 형제를 가리킨다.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 1017~1073)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주자(朱子)의 학문과 병칭하여 정주학(程朱學)이라고 한다. 『이정전서(二程全書)』가 전한다. 3)염계(濂溪) : 송나라 때의 대학자이자, 신유학의 비조(鼻祖)였던 주돈이(周敦頤)의 호이다. 저술에는 「태극도설(太極圖說)」, 『통서(通書)』가 있으며, 인품이 고결하고 흉금이 탁 틔어, 당시 사람들이 비가 그친 뒤의 맑은 하늘의 모습[光風霽月]과 같다고 칭송하였다. 4)한자(韓子) : 당(唐)나라의 문인으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한유(韓愈, 768~824)를 가리킨다. 자(字)는 퇴지(退之)이고, 시호(諡號)는 문공(文公)이다.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고문운동을 주도, 변려문(騈儷文) 위주의 기교적인 산문을 타파하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 전한다.
人君常患人臣無可用之才, 人臣常患人君用才之不盡. 惟其如是, 故君臣相遇, 自古爲難, 而至治之盛, 累世而不見, 豈不悲哉? 夫以十室之邑, 必有忠信, 天下之大, 豈曰無人? 所患, 賢者難於自進, 而君相無知人之明也. 漢之蕭·曹, 唐之房·杜, 乃秦·隋之棄才也, 而卒成興王之業. 且其時之人才, 豈但此數人而止哉? 其埋光鏟彩於深山大澤之中, 撫世長嘯, 不遇而死者, 何限? 如李左車見用於趙, 則井陘之績不成. 其後韓信與齊戰, 或者之說龍且, 亦甚奇策, 以其不用, 故信得以平齊滅楚. 當時戰勝攻取之才, 韓信之外, 意若無人, 而猶有此等計策. 是知人才之隱而不見於世者, 盖不可數計, 其出而有爲者, 特百中一耳. 是故, 明君汲汲於求賢, 惟恐吾之聰明有所不逮, 誠意有所不足, 左右近習之輩, 壅蔽者或多, 未嘗必天下以無才而倦於好賢之心也. 三代以後, 人才之盛, 莫過於宋. 如兩程濂溪, 皆王佐之才而經綸之手, 神宗率多置之於草澤閒散之中, 朝夕所與論議咨問於細氊之上者, 不過安石之餘黨蒲宗孟,王珪,蔡確而止耳. 及其春秋遲暮, 朝廷日亂, 事業之成, 如捕風係影. 然後乃始反顧惘然, 臨朝發歎, 猶不知反求其所以然之故, 而乃曰:“天下無人才.” 正韓子所謂‘其眞無馬耶? 其眞不知馬也.’ 豈天未欲平治天下, 何其惑之甚耶? 『中庸』九經, 修身爲上, 尊賢次之. 修身者, 用賢之本也, 而尊賢之目有四焉, 去讒也, 遠色也, 賤貨也, 貴德也. 神宗有志於用賢, 而未能去讒, 所好者讒諂面諛之徒, 宜其實德之不至也.
-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서애선생문집(西厓先生文集)』권13, 「독사여측(讀史蠡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