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 의로운 선비 정시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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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옥천(沃川)’은 전라북도 순창의 옛 이름이다. 그리고 원문에서 ‘옷소매를 떨친다’라는 뜻을 지닌 ‘투몌(投袂)’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14년 기사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시대에 초(楚)나라 장왕(莊王)의 사신 신주(申舟)가 제(齊)나라를 예방하러 가는 길에 송(宋)나라를 지나면서, 길을 빌린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이에 송나라 사람들이 신주를 죽였는데, 장왕이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한 나머지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달려가느라, 신발은 궁전 앞 토방에서 신고, 칼은 침문(寢門) 밖에서 허리에 차고, 수레는 포서(蒲胥)라는 시가지에서 올라탔다.[投袂而起, 屨及於窒皇, 劍及於寢門之外, 車及於蒲胥之市.]”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투몌’는 원수에게 반드시 복수하고자 하는 그 분연한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윗글은 강천수(姜天秀, 1863~1951)의 찬(撰)으로『일광집』의 부록에 실려 있다. 강천수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중민(仲民), 호는 거산(巨山)이다.
▶ 정시해
공은 1899년 1월 어머니 신씨(愼氏)의 상을, 1901년 11월 아버지 송담공(松潭公)의 상을 연달아 당했다. 공은 양친을 위해 6년이란 세월 동안 시묘(侍墓)하면서 일기를 남겼다. 문집에 실려 있는 「여묘일기(廬墓日記)」가 그것이다.
그 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국권을 빼앗기자, 현실을 개탄하던 공은 곧장 면암을 찾아갔다. 당시 토적소(討賊疏)를 올리다가 지쳤던 면암은 공에게 영남의 지사들을 규합하여 봉기(蜂起)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이 무렵부터 공은 나라를 잃은 미친 백성이란 뜻에서 ‘실국광민(失國狂民)’이라고 자칭하는 한편, 자호(自號)를 ‘일광(一狂)’으로 삼았다.
다음은 「나라의 변고가 이 지경에 이르렀기에 의병을 일으키려고 한천정사(寒泉精舍)에서 서로 의논하다가 절구(絶句) 2수로 평소의 뜻을 조금 드러내다[國變至此欲擧義 相議於寒泉精舍 以二節語微示素意」라는 제목의 시 2편이다. 각각 5언과 7언이다.
공이 죽고 난 뒤, 나머지 열세 사람은 모두 살아남았다. 면암은 휘하의 유종규(柳鍾奎)에게 관을 구해오라 하고, 나기덕(羅基德)에게는 관 위에 ‘대한의 의로운 선비 정시해의 널[大韓義士鄭時海之柩]’이라고 쓰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은 만시(輓詩) 한 편을 남겼다. 일광의 나이 33살 때의 일이다.
일광기념관은 고창 읍성[모양성(牟陽城)]에서 아주 가깝다. 주소는 고창읍 중앙로 264. 관장은 일광 선생의 증손자 정만기 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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