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 위정(爲政) 상(上)

신이 생각건대, 국가[國]란 것은 가정[家]을 미룬 것으로, 가정을 바르게 하여야만 국가를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정(爲政)을 정가(正家) 다음에 두었습니다.


제1장 총론 위정(總論爲政)

신이 생각건대, 정치를 하는 데는 근본이 있고, 규모가 있으며, 절목(節目)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제 이것을 합하여 한 장(章)을 만들어 첫머리에 두었습니다.


 

정치의 근본에 대하여


천지는 만물의 부모요, 사람은 만물 가운데서 신령스러운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총명한 이가 원후(元后 임금)가 되고, 원후는 백성의 부모가 된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태서(泰誓)〉

채씨(蔡氏)가 말하기를, “단(亶)은 성실하고 거짓이 없는 것을 말하니, 총명함이 천성에서 나온 것을 말한다. 위대하도다, 하늘의 근원[乾元]이여, 만물이 이를 바탕으로 시작한다. 지극하도다, 땅의 근원[坤元]이여, 만물이 이를 바탕으로 생성된다. 그러므로 천지는 만물의 부모이다. 만물이 생겨날 때 오직 사람이 그 뛰어남을 얻어 신령스러워 사단(四端)을 갖추고, 만선(萬善)을 구비한다. 지각(知覺)이 유독 다른 존재와는 다른데, 그중에도 성인은 가장 뛰어나고 가장 신령스러운 사람으로서 천성이 총명하여, 힘쓰지 않고도 남보다 앞서 알고, 남보다 앞서 깨달아 다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하의 큰 임금이 되며, 천하의 지치고 병든 이들이 그 삶을 얻고, 환(鰥)ㆍ과(寡)ㆍ고(孤)ㆍ독(獨)이 보호되어서 만백성 가운데 제자리를 얻지 못한 이가 하나도 없는 것이니, 이는 임금이 또 백성의 부모가 되기 때문이다. 천지가 만물을 낳으면서 사람에게 후하게 하고, 천지가 사람을 낳으면서 성인에게 후하게 하니, 성인에게 후하게 하는 까닭은 역시 성인이 백성의 군장(君長)이 되어, 백성에게 천지와 부모 같은 마음을 미루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하늘이 백성을 위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임금의 책임을 맡은 이가 백성의 부모 된 그 의의(意義)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시경(詩經)》에 ‘도를 즐기는 군자여, 백성의 부모로다.’ 하였는데, 백성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이것을 백성의 부모라 한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천지는 만물의 부모요, 임금은 백성의 부모”라는 이 말은 매우 적절합니다. 장자(張子 장횡거(張橫渠)) 〈서명(西銘)〉에는 천지를 부모로 삼고, 임금을 종자(宗子)로 삼았는데, 그 설이 더욱 상세하게 구비되었기 때문에 삼가 다음에 기록합니다.

〈서명(西銘)〉에 이르기를, “건(乾)은 부(父)를 일컫고, 곤(坤)은 모(母)를 일컫는데, 내 이 조그마한 몸이 혼연(混然)히 그 가운데 처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조그만 존재로 혼연히 섞여 구분이 없이 그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하였다. 그러므로 천지에 충만한 기운은 내 몸이 되었고, 천지의 거느리는 것은 내 성(性)이 되었다. 주자가 말하기를, “건(乾)은 양(陽)이요, 곤(坤)은 음(陰)이니, 이것은 천지의 기운이 천지 사이에 가득 찬 것인데, 인물(人物)은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몸을 이루었다. 그리고 또 건의 건(健)과 곤의 순(順)은 이것이 천지의 뜻이 기(氣)를 거느리게 되어 인물이 이것을 얻어 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 깊이 관찰해 보면 건(乾)을 부로 하고 곤(坤)을 모로 하여 내가 혼연히 그 가운데 처해 있는 실상을 알 수 있다.” 하였다. 백성은 나의 동포요, 만물은 나와 함께하는 것이며, 대군(大君)은 내 부모의 종자(宗子)요, 대신(大臣)은 종자의 가상(家相)이다. 나이 많은 이를 높이는 것은 자기의 어른을 높이는 것이요, 고독하고 유약한 이를 자애롭게 대하는 것은 자기의 아이처럼 여기는 것이다. 성인은 천지의 덕이 합한 이요, 현인은 무리 가운데서 뛰어난 사람이다. 천하의 지치고 병든 사람과 환ㆍ과ㆍ고ㆍ독이 모두 내 형제로서,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어도 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들이다. ‘어느 때나 천명을 잘 보존한다.[于時保之]’는 것은 아들로서 공경하는 것이요, ‘천명을 즐거워하고 근심하지 않는 것[樂且不憂]’은 순수하게 효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리를 어기는 것을 패덕(悖德)이라 하고, 인을 해치는 것을 적(賊)이라고 한다. 악(惡)을 행하는 자는 부재(不才)한 자식이요, 타고난 모습대로 실천해 가는 이는 부모를 닮은 사람이다. 천지조화를 아는 이는 부모의 사업을 잘 기술[述]하는 이요, 신묘한 이치를 궁구하는 이는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는 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화(化)라는 것은 기(氣)인데 그 흔적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사(事)라 하고, 신(神)이라는 것은 곧 이(理)인데 그 형체를 엿볼 수 없는 까닭에 지(志)라고 했다.” 하였다. 사람이 방구석[屋漏]에서도 마음에 부끄러울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부모에게 누가 안 되는 것이요, 심성(心性)을 존양(存養)하는 것이 효도에 게으르지 않은 것이다. 맛 좋은 술을 싫어했던 이는 숭백(崇伯)의 아들 우(禹)가 부모 봉양을 잘한 일이요, 영재(英才)를 기르는 것은 영(頴) 땅에 봉해진 영고숙(穎考叔)이 효자의 집에 효자가 이어지도록 한 일이다. 괴로움을 무릅쓰고 부모가 즐겁도록 한 것은 순(舜)의 공덕이요, 도망하지 아니하고 죽음을 기다린 것은 신생(申生)의 공손함이다.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그대로 보존하여 돌아간 자는 증삼(曾參)이요, 순종하여 명을 따르는 일에 용감했던 자는 백기(伯奇)이다. 부귀와 복택은 내 삶을 넉넉히 해 주겠지만, 빈천과 근심 걱정은 옥을 다듬듯 나를 완성해 준다. 살아서는 천리에 순응하여 일을 행하고 죽어서는 마음이 편안할 수 있다.” 하였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정완(訂頑) 일편의 뜻이 극히 완비되어 있으니, 이것이 인(仁)의 체(體)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서명〉은 학자가 인(仁)을 실천하는 공부로, 임금의 일만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이 장(章)에 기재한 것은 임금이 하늘을 아버지로 섬기고, 땅을 어머니로 섬기며, 백성을 형제로 삼고, 만물을 동류로 삼아서, 인심(仁心)을 충만하게 하여야만 그 직임을 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편은 임금에게 더욱 절실한 것입니다. 천지가 만물을 낳음에는 인위적인 일이 없으며, 백성과 만물은 천명을 받았으나 스스로 설 수 없습니다. 위로는 하늘의 일을 대신하고 아래로는 만물을 다스려서, 천지 만물로 하여금 제자리를 얻게 하는 것은 임금에게 있지 않겠습니까.


위대한 우(禹)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 임금의 도리를 어렵게[艱] 여기며, 신하가 신하의 도리를 어렵게 여겨야만 정사(政事)가 겨우 다스려져서 백성이 속히 덕에 감화된다.” 하였다. 《서경(書經)》 〈우서(虞書) 대우모(大禹謀)〉 아래도 이와 같다.

채씨(蔡氏)가 말하기를, “간(艱)은 어렵다는 뜻이요, 내(乃)는 어렵다는 말이며, 민(敏)은 빠르다는 말이다. 우가 말하기를, ‘임금이 그 임금 된 도리를 감히 쉽게 여기지 않고, 신하가 그 신하 된 직분을 감히 쉽게 여기지 아니하며,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되 각각 당연히 해야 할 것에 최선을 다해 힘써야만, 그 정사가 잘 다스려져서 사특(邪慝)한 것이 없고, 백성들이 또 자연히 보고 느껴서 선에 교화됨이 빠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였다.” 하였다.


순(舜)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하면 아름다운[嘉] 말이 숨어드는 일이 없을 것이며, 어진 이가 초야에 묻혀 있는 경우가 없어서 만방(萬邦)이 다 편안할 것이니, 뭇사람에게 귀 기울이고 자기의 소견을 버리고 타인을 좇으며, 무고한 이를 학대하지 않고, 곤궁한 이를 저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요(堯) 임금이 이렇게 할 수 있었다.” 하였다.

채씨가 말하기를, “가(嘉)는 선이요, 유(攸)는 바[所]라는 뜻이다. 순 임금이 우 임금의 말을 옳다고 여기고, 이어서 진실로 이와 같이 하면 널리 중론을 청취하고 어진 이들을 다 맞이하여 천하의 백성이 모두 그 혜택을 입을 것이다. 그러나 사사로움을 잊고 이(理)를 따르며, 백성을 사랑하고 선비를 좋아하는 일을 지극히 하지 않으면 여기에 미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오직 요 임금만이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대개 순이 겸사를 하여 자기는 감히 꼭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니, 순이 임금의 도리를 어렵게 여기는 것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자기를 버리고 남을 좇는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소견이라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아무리 철저히 버리더라도 자기를 지키는 것이 견고하고 남을 따르는 것이 소홀할까 괜히 두렵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인정상 하지 못하는 것을 하라고 요구하면 그래도 힘써 좇을 수 있지마는, 만일 잘하고 있는 이에게 또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면 반드시 번민하면서 알아주지 않는 것을 탓하게 됩니다. 어려움을 이겨 내는 방법은 아름다운 말이 숨어서 묻히지 않게 하고,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는 데 있으니, 순 임금이 성인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린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우 임금이 순 임금이 잘한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닌데도 오히려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고 거듭 경계하자, 순 임금도 자기가 잘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감히 감당하지 못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우(虞)나라 조정의 군신이 서로 그 도를 극진히 한 것이요, 성인이 더욱 성스럽게 된 이유입니다.


정공(定公)이 묻기를, “한마디로 나라가 흥할 수 있다고 하니, 그런 말이 있습니까?” 하니,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말을 그렇게 기필[幾]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금 노릇 하기도 어렵고 신하 노릇 하기도 쉽지 않다.’ 하니, 만일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면 한마디로 나라를 잘되게 한다는 말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논어(論語)》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기(幾)는 기필한다는 뜻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한마디로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하니 그런 말도 있습니까?” 하니,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말을 그렇게 기필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임금 노릇 하는 데서는 즐거움이 없고, 다만 내가 말을 하면 내 말을 어기지 못하는 것이 즐거움이다.’ 하니, 만일에 좋은 말을 어기는 이가 없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렇지 않고 좋지 않은 말을 어기는 이가 없다면 한마디로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말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사씨(謝氏)가 말하기를, “임금 노릇 하기 어려움을 알면 반드시 공경하고 조심해서 일해야 한다. 오직 내 말을 어기지 말라고만 하면 아첨하는 간신들이 모일 것이니, 나라가 갑자기 흥하고 망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흥하고 망하는 근원은 여기서 나누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기미를 아는 군자가 아니면 어찌 이런 것을 알겠는가.” 하였다.


중훼(仲虺)가 고(誥)를 지어 아뢰기를, “덕이 날로 새로우면 만방의 민심이 돌아오고, 자만(自滿)하는 뜻이 있으면 구족(九族)이 떠날 것이니, 임금은 힘써 대덕(大德)을 밝히어 백성에게 중도(中道)를 세우소서. 의(義)로써 일을 제단(制斷)하고, 예(禮)로써 마음을 절제해야 후손에 끼치는 덕이 넉넉할 것입니다. 듣건대, ‘스스로 스승을 얻는 이는 임금이 되고, 남이 자기만 못하다고 하는 이는 망한다.’ 하였는데, 묻기를 좋아하면 넉넉해지고, 제 마음대로 하면 작아질 것입니다.” 하였다. 《서경(書經)》 〈상서(商書) 중훼지고(仲虺之誥)〉 ○ 이 글은 중훼(仲虺)가 성(成)ㆍ탕(湯)에게 아뢴 말이다.

채씨(蔡氏)가 말하기를, “중(中)이라는 것은 천하가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이 중을 세우지 않으면 백성이 스스로 중을 세울 수 없다. 예(禮)와 의(義)라는 것은 중을 세우는 것인데, 의(義)는 마음의 재제(裁制)요, 예는 이(理)의 절문(節文)이다. 의로써 일을 제단하면 일이 마땅해지고, 예로써 마음을 절제하면 마음이 바르게 되어 안팎의 덕이 합하여 중도(中道)가 서게 된다. 이와 같이 하면 당세의 백성에게만 중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후세의 자손에게도 드리워져서 넉넉히 여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도는 반드시 배운 뒤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 고인의 말을 들어서 스승을 높이고 묻기를 좋아하면, 덕이 높아지고 업(業)이 넓어지지만 스스로 어질다 하여 제 마음대로 하면 이와 반대가 된다. 스스로 스승을 얻는다는 것은 진실로 자기가 부족하고 남이 여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서, 허심탄회하게 듣고 순종하여 거슬림이 없는 것을 말한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탕(湯)은 이윤(伊尹)한테서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힘들이지 아니하고 왕 노릇 할 수 있었다.’ 하였으니, 이것이 탕이 스스로 스승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후세에는 옛날만 못하여, 특히 세도(世道)가 퇴락했을 뿐만 아니라, 사도(師道)도 밝지 못하였다. 중훼(仲虺)의 의논은 그 지극히 중요한 것을 요약하여, ‘스스로 스승을 얻어야 한다.’는 말 한마디에 귀결시켰으니, 이것은 실로 제왕의 대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기자(箕子)가 말하기를, “임금[皇]은 극(極)을 세워야[建] 할 것이다.” 하였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洪範)〉

채씨가 말하기를, “황(皇)은 임금이요, 건(建)은 세움이요, 극(極)은 북극의 극과 같으니, 지극하다는 뜻이며 표준이라는 말로, 중립(中立)해서 사방에서 바른 것을 취하는 것이다. 임금은 마땅히 지극한 인륜을 다해야 할 것이니, 부자(父子)간에는 극진히 친(親)하여 천하의 부자(父子)가 여기에서 그 준칙을 취하고, 부부간에는 극진히 분별하여 천하의 부부(夫婦)가 여기에서 그 준칙을 취하게 한다. 그리하여 한 가지 사물(事物)을 접촉하고, 한 가지 언동(言動)을 발할 때도 그 의리의 당연한 것을 극진히 하여 조금이라도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차이가 없게 한다면 극이 서게 될 것이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치[政]를 하는 데 덕으로 하는 것은 마치 북극성(北極星)이 제자리에 있고, 뭇별들이 그것을 향[共]하여 도는 것과 같다.” 하였다. 공(共) 자는 공(拱) 자로도 쓴다. ○ 《논어》

주자가 말하기를, “정(政)이라고 하는 것은 바른 것이니, 사람의 바르지 못한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요, 덕이라는 것은 얻는다는 말인데, 도를 행하여 마음에 얻는 것이 있는 것이요, 북신(北辰)은 북극성을 말하는 것인데 하늘의 도리[樞]요,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요, 공(共)이라는 것은 향한다는 뜻이니, 뭇별들이 사면으로 둘러싸서 모두 북극성을 향한다는 말이다. 정치를 하는 데 덕으로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교화되어 천하 사람들이 귀복(歸服)하는 그 모습이 마치 이와 같다.” 하였다. ○ 어떤 이가 묻기를, “이 말은 덕으로써 정치를 한다는 말입니까.” 하니, 주자가 말하기를, “덕을 가지고 가서 정치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 이(以)라는 글자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 다만 정치를 하는 데 덕이 있다는 말과 비슷하다.” 하였다. ○ 범씨(范氏)가 말하기를, “정치를 하는 데 덕으로써 하면, 움직이지 않아도 화하고 말하지 않아도 믿으며,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어도 이루어져서, 지키는 것이 지극히 간략해도 번거로운 것을 막아 낼 수 있고, 처하는 것이 지극히 고요하여도 움직이는 것을 제어할 수 있으며, 힘쓰는 것이 지극히 적어도 대중이 잘 복종하게 할 수 있다.” 하였다. ○ 계강자(季康子)가 정치에 대하여 공자에게 물으니,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정치라는 것은 바르게 하는 것이다. 그대가 바르게 거느리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아니하겠는가.” 하였으며, 또 계강자가 도둑을 근심하여 공자에게 물으니,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진실로 그대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탐욕이라는 말이다. 비록 그들에게 상을 주더라도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순자(荀子)》 순황(荀況)이 지었다. 에 말하기를, “몸을 닦는다는 말은 들었으나 나라를 닦는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다. 임금은 소반[槃]이니, 소반이 둥글면 물[水]이 둥글다. 임금은 사발이니, 사발이 모나면 물이 모나다. 임금은 근원이니, 근원이 맑으면 흐르는 것이 맑고, 근원이 흐리면 흐르는 것이 탁하다.” 하였다. ○ 동씨(董氏)가 말하기를, “임금이 된 이는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루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을 바루며, 백관을 바르게 하여 만민을 바루고, 만민을 바르게 하여 사방을 바룰 것이니, 사방이 바르면 원근(遠近)이 다 한결같이 바르지 아니한 것이 없어서 사기(邪氣)가 그 틈에 침범하지[奸] 범한다[犯]는 것이다.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음양이 화(和)하고 풍우가 때에 알맞아서 뭇 생명이 조화로워지고 만민이 고르게 불어난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천하의 일은 변화가 무궁하여 그 단서(端緖)가 끝이 없으되 하나도 임금의 마음에 근본 하지 않을 것이 없으니, 이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임금의 마음이 바르면 천하의 일이 하나도 바르지 않은 데서 나오는 것이 없고,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천하의 일이 하나도 바른 데서 나올 수가 없다. 그러므로 임금이 작은 몸으로 깊은 궁중에 거하기 때문에 그 마음의 사(邪)와 정(正)을 엿볼 수 없을 것 같지만 그 겉으로 드러나는 징험이 항상 열눈[十目]으로 보는 것 같으며, 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 같아서 숨길 수 없다. 이 때문에 순(舜)은 오직 정밀하게 하고 오직 한결같이 하라고 경계하였고, 공자는 사욕을 이기고 예절을 좇으라고 훈계한 것이니, 모두 나의 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천하의 모든 일에 근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마음이 이미 바르게 되면 보고 듣는 것이 총명하여 주선하는 것이 예(禮)와 맞아서, 몸에 바르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소행에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중(中)을 잡을 것이니, 천하가 아무리 넓다 해도 한 사람도 나의 인(仁)에 귀화(歸化)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邪)와 정(正)의 징험이 끝으로 드러나는 것은 내 집사람에게 가장 먼저 드러나고, 다음에는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드러나며, 그다음에는 조정에까지 달하여 천하에 미치게 되는데, 만약 궁중 안이 단정하고, 장엄하고 가지런하고 엄숙하여 왕후에게 관저(關雎)의 덕이 있고, 후궁 중에 미색(美色)이 많다는 기롱을 받는 일이 없으며, 질서가 정연하여 감히 사은(私恩)을 믿고 전상(典常)을 문란하게 하거나 뇌물을 바쳐 청탁을 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으면 집안이 바른 것이다. 조정에서 물러난 뒤 조용히 쉴 때에, 좌우에 모시고 앉은 귀척(貴戚)ㆍ근신(近臣)ㆍ노복(奴僕)ㆍ환관[奄尹]들이 각각 그 직분을 착실히 수행하여, 한 사람이라도 내외를 오가며 위세나 복록을 훔치거나 권력을 꾀하거나 총애(寵愛)를 사서 조정의 정사를 문란하는 이가 없다면 이것은 좌우가 바른 것이다. 안으로 금성(禁省 궁내)으로부터 밖으로 조정에 이르기까지 이 두 가지 사이에 조금이라도 사사(私邪)로운 것이 끼어들지 않고 탁 트여 있어야만 호령을 발했을 때 듣는 이가 모두 의심하지 아니할 것이며, 어진 이를 발탁하고 간사한 자를 물리치는 데 뭇사람들이 다 열복(悅服)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강(紀綱)이 진작되어 침략을 입어 어지러워지는 환란이 없고, 정사가 잘 닦아져서 아부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니, 이것은 조정ㆍ백관과 육군(六軍)ㆍ만민이 감히 바르지 않을 수 없어 치도(治道)가 완성되는 이유이다. 마음이 조금이라도 바르지 않으면 이 몇 가지가 진실로 그 바름을 얻을 방도가 없을 것이니, 이 몇 가지 중에 하나라도 바르지 못한 것이 있는데 마음이 바르다고 한다면,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임금이 덕을 닦는 것은 정치의 근본입니다. 먼저 임금의 직분이 백성의 부모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안 뒤에 중(中)을 세우고 극(極)을 세워서 표준을 삼게 되면, 그 효과가 마치 뭇별들이 북극성을 향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순(舜)과 우(禹)ㆍ공자(孔子)ㆍ중훼(仲虺)의 설은 중을 세우고 극을 세우는 요령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여기에 실었습니다. 아, 부모로서 자식을 사랑하는 이는 많지마는, 임금으로서 백성에게 인(仁)을 행하는 이는 적으니, 천지가 부여한 직책을 생각하지 않음이 심한 것입니다.

이상은 정치를 하는 근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위정(爲政)의 규모에 대하여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승(千乘)의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매사에 조심하여 신용 있게[敬事而信]하며,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백성을 부리되 때[時]에 맞게 해야 한다.” 하였다. 《논어》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도(道)는 다스린다는 뜻이요, 경사이신(敬事而信)은 그 일을 조심하여 백성에게 신용 있게 한다는 것이며, 시(時)는 농한기(農閑期)를 말한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이 말은 지극히 평범한 말이지만 당시 제후가 정말 여기에 능하면 나라를 잘 다스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성인의 말은 지극히 평범하지만 상하에 모두 통한다. 이 세 가지 말을 만약 그 극진한 데까지 미루어 보면 요순의 정치도 역시 이 말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보통 사람의 말 같으면 쉬우면 천근(淺近)할 뿐이다.” 하였다. ○ 양씨(楊氏)가 말하기를, “위에 있는 사람이 불경(不敬)하면 아래에 있는 사람이 태만하고, 위에 있는 사람이 신용이 없으면 아래에 있는 사람이 의심을 한다. 아래에 있는 사람이 태만하고 의심을 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일을 조심해서 해 나가 신용 있게 한다는 것은 몸소 솔선수범한다는 것이다. 사치스럽게 쓰면 재물이 손상되고, 재물이 손상되면 반드시 백성을 해치게 되기 때문에 백성을 사랑하려면 반드시 재용(財用)을 절약해야 한다. 그러나 백성을 농한기에 부역(賦役)시키지 않으면 농사짓는 이들이 농사에 진력하지 못할 것이니, 비록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백성은 그 은택을 입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위정자의 마음가짐을 논하였을 뿐이며, 정사하는 데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진실로 이 마음이 없으면 비록 정사를 하더라도 정치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다.” 하였다. ○ 호씨(胡氏)가 말하기를, “대개 여기에서 말한 이 여러 가지는 또 모두 공경을 주(主)로 삼은 것이다.” 하였다.


공자께서 위(衛)나라에 있을 때 염유(冉有)가 수레를 몰고[僕] 가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성이 많구나.[庶]”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복(僕)은 수레를 모는 것이다. 서(庶)는 무리가 많다는 뜻이다.” 하였다.


염유가 말하기를, “이미 백성이 많으면 무엇에 더 힘써야 합니까?”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성을 부유하게 해 주어야 한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백성이 많은데 부유하지 않으면 백성의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전법(井田法)을 제정하고 부세를 적게 거두어 백성을 부유하게 해 주어야 한다.” 하였다.


또 “이미 부유하면 또 무엇에 더 힘써야 합니까?”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르쳐야 한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백성이 부유하더라도 가르치지 않으면 금수(禽獸)에 가까워지므로, 반드시 학교를 세우고 예의를 밝혀서 백성을 가르쳐야 한다.” 하였다. ○ 호씨(胡氏)가 말하기를, “하늘이 백성을 낳으면서 사목(司牧 임금)을 세워서 삼사(三事 서(庶)와 부(富)와 교(敎)를 말함)로써 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삼대 이후로는 이 직분을 행한 자가 백에 한둘도 없었다. 한(漢)나라의 문제(文帝)ㆍ명제(明帝), 당(唐)나라의 태종(太宗)은 또한 백성을 많게 하고 부유하게 했다고 하겠으나, 서경(西京)의 가르침은 들은 바가 없었고, 명제는 사부(師傅)를 존중하고 옹(雍 태학)에 가서 삼로(三老)에게 절을 올렸고, 그 종척(宗戚)의 자제(子弟)들도 학업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 당 태종은 명유(名儒)들을 크게 불러서 생원(生員)의 수를 늘렸으니, 그 가르침이 또한 지극하다 하겠으나 그 가르치는 방법은 알지 못하였다. 삼대의 가르침을 천자와 공경(公卿)이 몸소 위에서 실행하여 그 언행과 정사가 다 사법(師法)이 될 만하였다. 그런데 저 두 임금이야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자공(子貢)이 정치에 대해서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고, 병력을 충족시키면 백성이 신임할 것이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창고가 가득 차고 무력이 완비된 연후에 교화가 행해져서 백성이 나를 신임하여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자공이 말하기를, “부득이하여 버릴 수밖에 없다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 먼저 버려야 합니까?”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병력을 버려야 한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먹을 것이 족하고 신임이 넉넉하면 병력은 없어도 지키는 것이 견고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자공이 말하기를, “부득이하여 버릴 수밖에 없다면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하니, 공자는, “먹을 것을 버려야 한다. 옛날부터 죽음이란 다 있는 것이지만 백성의 신임을 잃는다면 서지를 못할 것이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백성이 먹을 것이 없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러나 죽는 것은 사람이 면할 수 없는 것이지마는, 신임이 없으면 비록 산다 하더라도 자립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죽는 것만 못하다. 그러므로 차라리 죽을지언정 백성에게 신임을 잃지 않아야 하며, 백성도 죽게 되더라도 나에 대한 신임을 잃지 않게 해야 한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공문(孔門)의 제자가 묻기를 철저히 하였다. 이 같은 장(章)은 자공이 아니면 묻지 못했을 것이요, 성인이 아니면 이렇게 대답할 수도 없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인정으로 말하면 병력과 식량이 족해야만 백성이 나를 신임할 것이지만, 백성의 덕으로써 말한다면 신임은 사람마다 본래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병력과 식량이 이에 앞설 수 없다. 그러므로 위정자는 마땅히 몸소 그 백성을 거느리고 목숨 걸고 지켜야 하며, 위급하다 해서 버릴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지킨다는 것은 신임을 지키는 것이요, 버린다는 것은 신임을 버리는 것이다.


 

이상은 정치의 규모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위정(爲政)의 절목(節目)과 정치의 근본을 미루어야[推] 함에 대하여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대개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아홉 가지 원칙[九經]이 있는데, 몸을 닦는 것[修身], 현자를 존경하는 것[尊賢], 친족을 친애하는 것[親親], 대신을 공경하는 것[敬大臣], 군신을 체찰하는 것[體羣臣], 서민을 사랑하는 것[子庶民], 백공을 오게 하는 것[來百工], 먼 데서 온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柔遠人], 제후들을 포용하는 것[懷諸侯] 등이다.” 하였다. 《중용(中庸)》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경(經)은 떳떳한 도라는 뜻이요, 체(體)는 그 처지에 처하여 그 마음을 살피는 것을 말한다. 자(子)는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백성을 사랑한다는 뜻이요, 유원인(柔遠人)은 손님과 나그네를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손님과 나그네란 사신이나 상인처럼 먼 곳에서 온 사람 같은 이를 말한다. 이 대목은 구경(九經)의 조목을 열거한 것이다.” 하였다. ○ 여씨(呂氏)가 말하기를, “천하 국가의 근본이 몸에 있기 때문에 수신이 구경의 근본이 된다. 그러나 반드시 스승과 친하고 벗을 취한 뒤에야 수신의 도가 나아가므로 어진 이를 존경하는 것을 다음에 두었다. 도가 행해짐은 가정보다 우선 하는 곳이 없으므로, 친족을 친애하는 것이 그다음이요, 가정으로부터 조정에 미치기 때문에 대신을 공경하고 군신을 체찰하는 것이 그다음이며, 조정으로부터 나라에 미치기 때문에 서민을 사랑하고 백공을 오게 하는 것이 그다음이고, 나라로부터 천하에 미치기 때문에 먼 데서 온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제후를 포용하는 것이 그다음이 되니, 이것이 구경의 차례이다. 군신을 보기를 내 몸과 같이하고, 백성을 보기를 내 자식과 같이하는 것은 곧 신하를 대하는 것과 백성을 보는 것을 구별한 것이다.” 하였다.


몸을 닦으면 도가 서게 되고, 어진 이를 존경하면 의혹이 없어지며, 친족을 친애하면 제부(諸父)와 형제들이 원망하지 않게 되고, 대신을 공경하면 현혹되지 않게 되며, 군신을 체찰하면 그들이 예(禮)로 무겁게 보답하게 되고, 서민을 자식처럼 사랑하면 백성이 서로 권면(勸勉)하게 되며, 백공을 오게 하면 재용(財用)이 풍족하게 되고, 먼 데서 온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면 사방이 모두 귀순해 오게 되며, 제후를 포용하면 천하가 모두 두려워하게 된다.

주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구경의 효과를 말한 것이다. 도가 선다는 것은 도가 몸에 이루어져서 백성의 표준이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 이른바 ‘임금이 그 극(極)을 세운다.’는 것이 이것이다. 의혹이 없다는 것은 이치에 의심이 없게 된다는 말이요, 현혹되지 않게 된다는 것은 일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신을 공경하면 전적으로 신임하기 때문에 소인들이 이간하지 못하므로 일을 당해도 현혹되지 않는다. 백공을 오게 하면 서로 기술을 나누고 일을 바꾸어서 농업과 상업이 서로 돕기 때문에 재용이 풍족해지고, 먼 곳에서 온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하면 천하의 나그네가 다 기뻐하여 그 나라에 와서 다니기를 원하기 때문에 사방이 모두 귀순해 오게 되며, 제후를 포용하면 그 덕이 널리 베풀어져서 그 위엄으로 널리 제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하가 모두 두려워하게 된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몸과 마음을 전일하게[齊明]하고 의복을 정숙하게[盛服]하여 예(禮)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 한 것은 몸을 닦는 것이요, 참소를 버리고 여색을 멀리하며, 재화를 천하게 여기고 덕을 귀중히 여기는 것은 어진 이를 권장(勸獎)하는 것이요, 그 지위를 높여 주고 녹(祿)을 무겁게 해 주며, 좋아하고 미워함을 함께 하는 것은 친족끼리 서로 친애하는 것을 권장하는 일이며, 관속(官屬)을 많이 두어서 부릴 수 있게 하는 것[官盛任使]은 대신을 권장하는 것이요, 성심으로 대하고 신임하며 봉록(俸祿)을 후하게 주는 것[忠信重祿]은 관리를 권장하는 것이며, 농한기에 부리고 세금을 가볍게 하는 것은 백성을 권장하는 것이요, 날로 살피고 달로 시험하여 일의 성과에 맞게 급여를 주는 것[旣稟稱事] 기(旣)는 허(許)와 기(氣)의 반절음 ‘희’로 읽는다. 稟의 음은 름(廩)이다. 은 백공을 권장하는 것이며, 가는 이를 환송하고 오는 이를 환영하며, 착한 이를 훌륭하게 여기고 부족한 이를 가엾게 여기는 것은 먼 곳에서 온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하는 것이요, 끊어진 세대를 이어 주고 폐한 나라를 일으켜 주며, 난(亂)을 다스려 주고 위급한 것을 구원해 주며, 조빙(朝聘)을 정기적으로 하고 후하게 보내 주고, 박하게 받는 것은 제후를 포용하는 것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구경의 일을 말한 것이다. 관성임사(官盛任使)라는 것은 관속을 많이 두고 성하게 하여 부릴 만하게 하는 것이다. 대개 대신이 사소한 일까지 직접 할 수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우대하는 것이다. 충신중록(忠信重祿)이라는 것은 성의껏 대우하고 봉록을 후하게 주는 것이다. 이는 몸소 체찰하여 윗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을 아는 것이다. 기(旣) 자는 희(餼) 자로 읽는데, 희름(餼廩)은 초식(稍食 관리의 봉급)이다. 초(稍)는 물건을 조금씩 내주는 것을 말한다. 칭사(稱事)는 《주례(周禮)》 〈고인직(槀人職)〉에, ‘그 활을 만드는 성과를 살펴서 그 급여를 올리고 내린다.’는 것이 이것이다. 갈 때는 절(節)을 주어서 보내고, 올 때는 대우를 잘하여 위자[委積]로 맞이한다는 것이다. 조(朝)는 제후가 천자를 뵙는 것을 말하고, 빙(聘)은 제후가 대부를 시켜 천자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해마다 한 번씩 소빙(小聘)을 하고 3년 만에 한 번씩 대빙(大聘)을 하며, 5년 만에 한 번씩 조(朝)를 한다.’ 하였다. 후하게 보내 주고 박하게 받는 것은 선물을 주는 것은 후하게 하고, 공물(貢物)을 받는 것은 박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대개 천하의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아홉 가지 원칙[九經]이 있는데, 이것을 행하게 하는 것은 하나다.

주자가 말하기를, “하나라는 것은 성(誠)이다. 아홉 가운데 한 가지라도 성실하지 않으면 이 아홉 가지가 모두 빈말이 되고 만다. 이것이 구경의 내용이다.” 하였다. ○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진 이를 존중하고 유능한 이에게 일을 시켜 재주가 뛰어난 인물이 벼슬자리에 있으면 천하의 선비들이 다 기뻐하여 그 나라의 조정에 서기를 원할 것이다. 시장에서는 점포세(店鋪稅)만 징수하고 물품세는 징수하지 않거나, 전(廛)은 시장의 점포이다. 그 점포세만 받고 그 물품세는 받지 않는 것이다. 또는 시장의 불법만을 다스리고 점포세도 받지 않으면 시관(市官)이 법으로 다스리고 점포세를 받지 않는 것이다. 천하의 상인들이 다 기뻐하여, 그 나라의 시장에 상품을 두기를 원할 것이다. 관문(關門)에서는 이상한 일이 없는가 살피기만 하고 관세(關稅)를 징수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을 기찰하고 세금을 받지 않는 것이다. 천하의 나그네들이 모두 기뻐하여 그 나라의 도로에 다니기를 원할 것이다. 농사짓는 자에게는 공전(公田)의 경작을 돕게 하고, 사전(私田)의 세를 받지 않으면 힘을 내어 공전을 경작하는 일을 돕게 하고, 그 사전에 세금을 징수하지 않는 것이다. 천하의 농민들이 다 기뻐하여 그 나라의 들에서 농사짓기를 원할 것이다. 거주지에 인구세(人口稅)와 가옥세가 없으면 《주례(周禮)》에, “집 주위에 나무를 심지 않는 자는 가옥세를 물고, 백성 중에 직업이 없는 자는 인구세를 문다.” 하였다. 전국 시대에는 평민이라도 모두 이것을 다 받았다. 천하의 백성이 다 기뻐하여 그 나라의 백성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진실로 이 다섯 가지를 실시하면 이웃 나라의 백성이 그 나라의 임금을 부모같이 우러러보게 될 것이다. 그 자제들이 떼를 지어 그들의 부모를 공격하는 일은 세상에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있었던 적이 없다. 만약 이와 같이 된다면 천하에 대적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천하에 적이 없는 이는 천리(天吏)이다. 그렇게 되고서도 왕 노릇 하지 못한 이는 없다.” 하였다. ○ 또 말씀하시기를, “어진 이는 신임하지 아니하면 나라가 공허(空虛)하고, 비록 백관(百官)과 유사(有司)가 있다 하더라도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사람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금(金)나라 사람이 하수(河水)를 건너가서 말하기를, “남송(南宋)은 사람이 없다고 하겠구나. 만약에 1, 2천 명으로 하수를 지켰다면 내가 어찌 건널 수 있었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이 공허한 그 한 가지 예이다. 예의가 없으면 상하가 문란하며, 정사가 없으면 재용이 부족하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정치하는 요령은 대개는 이 장에 다 실려 있는데, 다음 글에서 의미를 더 부연하여 설명하였으니, 건중(建中)과 건극(建極)은 정치하는 근본이요, 백성이 많고 부유한 뒤에 가르치는 것은 정치하는 규모(規模)이며, 구경(九經)의 일은 정치하는 절목입니다. 그러나 구경은 본말(本末)을 통하여 말한 것이니, 이른바 수신(修身)이란 바로 건중과 건극을 말한 것이요, 소위 하나라는 것은 또 건중과 건극의 근본이니, 전하께서는 이것을 깊이 생각하시옵소서.


제2장 용현(用賢)

신이 생각건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치는 인재를 얻는 데 달려 있으니, 어진 이를 기용하지 않고 정치를 잘하는 이는 없다.” 하였습니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만나야 정치를 잘할 수 있기 때문에 임금의 직책은 오직 어진 이를 알아 잘 맡기는 것을 선무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을 먼저 놓고 장 내에서 특별히 상세히 의논하였습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방법에 대하여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惟] 어진 사람이라야 능히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논어》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오직이란 말은 유독(惟獨)이라는 뜻이다. 대개 사람은 사심이 없어야만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니, 정자(程子)가 말한, ‘그 공정한 것을 얻는다.’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 유씨(游氏)가 말하기를,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은 천하 사람들의 같은 정상(情狀)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늘 그 바른 것을 잃는 것은 마음이 사정에 얽매여 스스로를 극복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오직 어진 사람은 사심이 없기 때문에 제대로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그 사람의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지 못한다.

경원 보씨(慶源輔氏 보광(輔廣))가 말하기를, “말은 마음의 소리다. 말의 득실(得失)로 인하여 그 사람의 사(邪)와 정(正)을 알 수 있으니, 오직 격물(格物)하고 궁리하는 군자라야 이것을 능히 한다.” 하였다. 이 두 절은 몸을 닦아 마음이 공정하고 이치가 밝아진 뒤에야 사람을 잘 알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 하는[以] 것을 보고[視],

주자가 말하기를, “이(以)는 한다는 말이다. 착한 일을 하는 이는 군자가 되고 악한 일을 하는 이는 소인이 된다.” 하였다.


그 하는 연유(綠由)를 살펴보고[觀],

주자가 말하기를, “관(觀)은 본다[視]는 것보다 상세하게 보는 것이요, 유(由)는 소종래(所從來)란 뜻이다. 일은 비록 착하나 뜻의 소종래가 착하지 못하면 역시 군자가 되지 못한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소행이 비록 착할지라도 만약 명예를 좋아하고 벼슬을 좋아하는 생각이 마음에 있다면 그 하는 일의 소종래가 착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편안하게[安] 여기는 것을 관찰하면,

주자가 말하기를, “찰(察) 자는 관(觀) 자보다 더욱 상세하게 본다는 뜻이요, 안(安)은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 하는 일의 소종래가 비록 착하다 하더라도 마음에 즐거워하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으면 역시 거짓일 것이니, 어찌 오래도록 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소위(所爲)는 보기 쉽지마는 소유(所由)와 소락(所樂) 같은 것은 이치를 궁구하고 말을 아는 이가 아니면 분명히 알 수 없다.


사람이 어찌[焉] 숨길[廋] 수 있겠는가. 사람이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주자가 말하기를, “언(焉)이란 ‘어찌’라는 뜻이요, 수(廋)는 숨긴다는 뜻이다. 거듭 되풀이하여 깊이 밝힌 것이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내 자신이 말을 알고 이치를 궁리하면 이 소위(所爲)와 소유(所由)와 소안(所安)으로써 사람을 살피기를 성인(聖人)과 같이 할 수 있다.” 하였다.


남이 자기를 속일[詐] 것이라고 미리 방비하지[逆] 말고, 남이 자기를 불신(不信)할 것이라고 미리 억측[億]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속이고 불신하는 일에 대하여 먼저 알아채는 자라야 현명한 사람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역(逆)은 이르지 않았는데 맞이하는 것이요 억(億)은 보이지 않는데 짐작하는 것이며, 사(詐)는 남이 자기를 속이는 것을 말하고, 불신(不信)은 남이 자기를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억(抑)은 반어사(反語辭)이다. 비록 자기를 속이리라든가 불신하리라는 데 대하여 미리 방비하고, 억측하지 않을지라도 남의 실정과 허위에 대하여 자연히 선각(先覺)을 하여야만 현명한 이가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양씨(楊氏)가 말하기를, “군자는 성(誠)을 한결같이 해야 한다. 그러나 성(誠)하면서 밝지 못한 이가 없기 때문에 비록 남이 자기를 속일 것이라고 미리 방비하지 아니하고 남이 자기를 불신할 것이라고 미리 억측하지 않더라도 항상 먼저 깨닫는다. 만약 미리 방비하거나 억측하지 않다가 마침내 소인에게 속게 되면 이 또한 보잘것없어지고 말뿐이다.” 하였다. ○ 신안 진씨(新安陳氏 진력(陳櫟))가 말하기를, “미리 방비하고 미리 억측한다는 것은 사견이 분요(紛擾)한 것이요, 먼저 깨닫는다는 것은 진견(眞見)이 철저히 밝은 것이다. 진실로 일에 앞서 소인의 간사한 것을 예측할 것은 아니지마는, 역시 일을 당하여 소인의 간사한 술수에 빠지지 않아야 성명(誠明)한 군자가 된다.” 하였다.


뭇사람이 미워해도 반드시 살펴야 하며, 뭇사람이 좋아해도 반드시 살펴야 한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주위에서 모두 어질다고 해도 아직 수용해선 안 되며, 모든 대부들이 다 어질다고 해도 아직 수용해선 안 된다. 나라 사람들이 다 어질다고 한 뒤에 살펴서 그 어진 것을 본 뒤에 기용해야 한다. 주위에서 다 옳지 못하다 해도 듣지 말고, 모든 대부들이 다 옳지 못하다 해도 듣지 말 것이며, 나라 사람들이 다 옳지 못하다고 한 뒤에야 이것을 살펴서 그 옳지 못한 것을 본 뒤에 버릴 것이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사람은 시속(時俗)과 함께 하여서 대중에게 기쁨을 사는 자가 있고, 또 우뚝 서다 보니 세속의 미움을 받는 자도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스로 깊이 살펴서 그 어질고 어질지 못한 실상을 발견한 연후에 기용하든지 제거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어진 이에 대해서 아는 것이 깊어지고 그에게 맡기는 책임이 무거워 재주 없는 자가 요행히 진용(進用)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사람을 관찰하는 기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군자(君子)의 행실에 대하여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하지 않는 일이 있은 뒤에 무언가를 할 수 있다.” 하였다. 《맹자(孟子)》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은 선택할 줄 안다는 것이다. 하지 않는 일이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할 수 있다. 하지 않는 일이 없는 자가 어찌 무언가를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불인(不仁)을 하지 않는 자라야 인(仁)을 할 수 있고, 불의(不義)를 하지 않는 자라야 인(仁)을 할 수 있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대개 선비가 도에 깊이 들어가기는 어려우나, 다만 그 마음에 있는 것이 달라서 선악을 분별하고 염치를 안다면, 이러한 사람은 대부분 점점 좋아질 것이다.” 하였다.


《주역》에 이르기를, “군자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하였다. 《주역(周易)》 〈규괘(睽卦) 상사(象辭)〉

정자가 말하기를, “성현의 처세는 일상적인 인간의 도리에 있어서는 세속에서 다 같은 바와 크게 다를 것은 없고 때때로 홀로 다른 점은 있다. 크게 같이 하지 못하는 자는 윤상(倫常)을 문란하게 하고 이치를 어기는 자이며, 홀로 다르게 하지 못하는 세속을 따라 그른 것을 익히는 자이다. 요컨대 같으면서도 다를 수 있어야 한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군자는 이륜(彛倫)의 행위에 있어서는 세속과 대부분 같지마는, 그 가운데 다른 것이 있습니다.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은 같지마는 부모를 도리로서 깨닫게 하고,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효도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속인과 다르고, 임금을 존경하는 것은 같지마는 임금을 도리에 맞도록 인도하다가 합하지 않으면 떠나가는 것이 속인과 다르며, 처를 사랑하는 것은 같지마는 서로 손님같이 존경하여 정욕에 빠지지 않는 것이 속인과 다르고, 형에게 순종하는 것은 같지마는 화락한 마음으로 서로 힘써서 학행을 연마하는 것이 속인과 다르며, 친구끼리 사귀어 노는 것은 같지마는 오래도록 존경하고 서로 보살펴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속인과 다릅니다. 제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고, 제 임금을 존경하지 않고, 부부끼리 눈 흘기고, 형제끼리 불화하며, 친구끼리 서로 해치는 것은, 본래 상도를 어지럽히고 풍속을 망치는 사람이니 말할 것도 못 됩니다마는, 세속에 행실이 있다는 사람들도 군자의 도를 모르기 때문에, 다만 몸만을 봉양하다가 부모를 죄과에 빠뜨리면서도, 도리어 군자가 어버이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을 불효가 아닌가 생각하고, 임금에게 뜻을 얻지 못하면 이에 마음이 초조[熱中]하여 나가기만 하고 그칠 줄을 모르면서 도리어 군자가 세상에 나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서기를 쉽게 하는 것을 불경이 아닌가 생각하며, 정욕(情欲)으로 예를 무너뜨려 지나치게 애정에 빠져 도리어 군자가 낮에는 내실에 있지 않는 것을 매정한 게 아닌가 생각하고, 형제끼리 서로 모여 놀고 술과 음식을 즐기면서 도리어 군자가 갈고 닦으며 학문에 힘쓰는 것을 우애를 상하게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친구끼리 화합하여 어깨를 치고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서로 희롱하면서 도리어 군자가 위의(威儀)를 지키는 것을 우정이 친밀치 못한 게 아닌가 생각하니, 고질적인 속견(俗見)이 오래되었습니다. 만일 윗자리에 있는 이로서 먼저 도리를 알아서 밝게 보는 이가 아니라면, 세속과 다른 것을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가 드물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군자가 속인과 다른 까닭은 풍속이 옛 도(道)를 회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덕화가 행해져 풍속이 아름다워지고 이 도(道)가 밝아져서 크게 행해지면 속인들이 모두 군자일 것이니, 바로 홀로 다르게 하려고 한들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훌륭한 신하는 도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옳지 못하면 그만둔다.” 하였다. 《논어》

주자가 말하기를, “옳지 못하면 그만둔다는 것은 마음이 합하지 않으면 그만두고 가는 것을 말한다.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이는 임금의 욕심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요, 옳지 못하면 그만둔다는 것은 반드시 자기의 뜻을 행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주자의 본주(本註)이다.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임금을 섬기되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임금의 허물을 고쳐 주기를 생각한다. 그래서 그 임금의 아름다운 것은 순하게 따르고 그 악한 것은 바로잡아 구원을 하기 때문에 위와 아래가 서로 친하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진씨(眞氏)가 말하기를, “나아간다는 말은 들어가서 그 임금을 보는 것을 말한 것이요, 물러간다는 것은 나와서 자기 집[私室]으로 감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려운 것을 임금에게 하라고 책임지우는 것을 공(恭)이라고 하고, 선을 베풀고 간사한 것을 막는 것을 경(敬)이라고 하며, 우리 임금이 무능하다고 하는 것을 적(賊)이라고 한다.” 하였고, “나는 요순의 도가 아니면 감히 임금 앞에 의견을 올리지 않는데, 제(齊)나라 사람들은 나만큼 임금을 공경하는 이가 없다.” 하였다. 범씨(范氏)가 말하기를, “신하가 어려운 일로써 임금에게 책임 지워서 그 임금으로 하여금 요순 같은 임금이 되게 하는 것은 크게 임금을 높이는 것이며, 착한 도를 베풀고 임금의 사심을 막아서 임금이 혹시나 허물 있는 지경에 빠질까 하고 염려하는 것은 임금을 공경하는 것이 지극한 것이며, 그 임금이 도를 행할 능력이 없다고 하면서 서로 고하지 않는 것은 그 임금을 해롭게 하는 바가 심한 것이다.” 하였다. ○ 이상 두 조목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을 말한 것이다. ○ 또, “벼슬을 하는 자로서 그 직분대로 할 수 없으면 가고, 간관(諫官)들은 그 간하는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간다.” 하였다. ○ 송(宋)나라 신종(神宗)이 사마광(司馬光)을 등용하고자 불러서 허주 영(許州令)을 맡기고는, 대궐을 지나가는 길에 임금을 만나도록 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릴 적에 정호(程顥)에게, “내가 사마광을 부르는데 경의 생각에는 사마광이 올 것 같은가?” 하니, 정호가 대답하기를, “폐하가 그의 말을 능히 받아들이면 그가 반드시 올 것이요,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가 반드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신종이 말하기를, “말이야 받아들이든지 안 받아들이든지 사마광 같은 이가 항상 좌우에 있게 되면 임금에게 저절로 허물이 없어지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사마광이 과연 소명을 사양하였다. 신종이 사마광이 어진 것을 알면서 그의 말은 받아들이지 않고 다만 소명으로 부르려고만 하였으니, 어진 이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 이상의 두 조목은 옳지 못하면 그만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임금을 섬기되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는 것은 쉽게 여기면 관위(官位)에 질서가 있고, 어진 사람이 쓰이고, 어질지 못한 사람이 부림을 당하면 지위에 질서가 있다. 나아가기를 쉽게 여기고 물러가기를 어렵게 여기면 관위가 문란하다. 문란하다는 것은 어진 것과 어질지 못한 것이 전도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가 세 번 읍하여 사양하다가 나아가고 한 번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은 난을 멀리하는 것이다.” 하였다. 여씨(呂氏)가 말하기를, “세 번 읍(揖)하는 것은 세 번 사양한다는 것이다. 만약 주인의 공경함이 지극하지 않은데 구태여 나아가거나, 주인의 마음이 태만한데 사양하지 않으면 빈주(賓主)의 분수가 문란하다. 벼슬할 만하면 하고, 그만둘 만하면 그만두며, 만날 만하면 만나고, 사양할 만하면 사양하여, 진퇴의 의리가 한결같아야 한다.” 하였다. ○ 여씨(呂氏)가 말하기를, “임금이 나를 믿어서 스승으로 삼을 만하더라도 내게 배운 뒤에 나를 신하로 삼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나아가지 아니하며, 나를 믿어서 국정을 잡을 만하더라도 계손씨와 맹손씨처럼 대우하면 역시 나아가지 아니하며, 번육(膰肉 제사 지낸 고기)이 이르지 아니하면 곧 가 버리며, 영공(靈公)처럼 진(陳) 치는 것을 물으면 곧 가 버린다. 군자의 도는 임금을 바르게 할 따름이니, 자기를 굽히는 자로서 남을 바르게 하는 이는 없다.” 하였다. 이상의 두 조목은 진퇴하는 도리를 통틀어서 논한 것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선비는 곤궁해도 의(義)를 잃지 않고, 출세해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기 때문에 선비는 자신을 잃지 않고[得己], 영달해도 도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백성이 실망하지 않는다.” 하였다. 《맹자》

주자가 말하기를, “득기(得己)라는 것은 스스로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요, 그 자신을 잃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백성이 실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본래 그 도를 일으키고 다스림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는데, 지금 과연 소망대로 되었다는 뜻이다.” 하였다. ○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사람은 뜻을 얻으면 은택을 백성에게 가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몸을 닦아 세상에 그 이름을 나타내며, 궁할 적엔 홀로 그 몸을 착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를 다 같이 착하게 한다.” 하였다.


《주역》에 이르기를,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그 일을 높이 숭상한다.” 하였다. 《주역(周易)》 〈고괘(蠱卦) 상구(上九)〉

정자가 말하기를, “선비가 스스로 높이 숭상하는 길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길이 있다. 도덕을 품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해 고결하게 스스로를 지키는 이도 있고, 이윤(伊尹)과 태공(太公)이 세상에 나오기 전 같은 때이다. 또 지족(止足)의 도를 알아서 물러가 스스로 몸을 보존하는 이도 있으며, 장량(張良)과 소광(疏廣) 같은 유이다. 또 자기 재능과 분수를 헤아려서 편안한 마음으로 남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 이도 있고, 서치(徐穉)와 신도반(申屠蟠)의 유이다. 또 청렴하게 스스로 절개를 지켜서 천하의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홀로 그 몸을 깨끗이 하는 이도 있으니, 접여(接輿)와 하궤(荷簣)의 무리이다. 이들은 처사에 비록 득실(得失)과 대소(大小)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다 스스로 자기의 일을 높이 숭상하는 사람들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선비가 벼슬하지 않는 것은 본래 그 단서가 한 가지가 아니니, 대개는 정자(程子)가 논한 네 가지에 불과합니다. 이른바 득(得)이란 것은 위의 세 가지이고, 실(失)이란 것은 아래의 한 가지이며, 대(大)란 것은 위의 한 가지이고, 소(小)란 것은 아래의 세 가지입니다. 대개 임금이 경(敬)을 극진히 하고 예(禮)를 다하지 않으면 도덕을 갖춘 선비를 만날 수 없으며, 간(諫)하는 것을 실행하거나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신하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니, 임금은 마땅히 정성껏 위임하고 시종 의심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칠 줄을 알고 분수를 헤아릴 줄 아는 선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만일 위란의 기미를 알고 먼저 물러가면 임금은 마땅히 느끼고 깨달아 허물을 고쳐 화근을 끊어 없애며, 정성을 다하여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화의 기미를 본 것은 아니나 편안하기를 구하여 물러가면 임금은 마땅히 그 뜻을 빼앗지 말고 그 절조를 가상히 여겨 염치를 장려하는 자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혼자 제 몸만 결백하게 하는 사람은 비록 중(中)에 지나치고 정(正)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이욕(利欲)을 벗어난 사람으로, 성명(性命)의 정(情)을 잃어버리고 부귀를 탐내는 사람에 비하면 청탁(淸濁)의 구별은 현격하니, 임금 역시 마땅히 포장(襃獎)하는 뜻을 보여 은일(隱逸)이란 명칭을 이루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후세의 임금들은 어진 이를 좋아할 줄은 알면서도 그를 좋아하는 도리를 알지 못하여 작록(爵祿)으로 붙잡아 놓기만 하고 그 말을 채용하지 아니하며, 그로 하여금 진퇴를 곤란하게 하는 임금도 있으며, 《시경(詩經)》에 이른바, “나를 붙잡기를 원수잡듯 해 놓고 나를 등용함에 힘쓰지 않는구나.[執我仇仇 亦不我力]”라는 유와 같습니다. 다만 그 이름만 좋아하고 그 실상을 구하지 않아 하지 못할 일을 억지로 맡겨서 그로 하여금 일을 그르치고 자기를 잃어버리게 하는 임금도 있으니, 진(晉)이 은호(殷浩)를 쓴 것과 같은 유입니다. 다 참으로 어진 이를 좋아하는 임금이 아닙니다. 반드시 사람을 아는 데는 그 총명을 극진히 하여야 하고, 사람을 기용(起用)하는 데는 반드시 그 재능에 적합하게 하여야 하며, 신임하는 데는 반드시 그 정성을 극진히 하여야만 참으로 어진 이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은 군자의 행실을 분별함에 대한 것입니다.


 

소인(小人)의 간사함을 분별하는 것에 대하여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비부(鄙夫)와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與)는 평성(平聲)이다. ○ 《논어》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비부는 용렬하고 악하며, 비루하고 졸렬한 사람을 칭한다.” 하였다.


그 벼슬을 얻지 못하였을 때에는 얻으려고 근심하고, 얻고 나서는 잃을까 근심한다.

하씨(何氏)가 말하기를, “얻으려고 근심한다는 것은 얻지 못할까 근심한다는 것이다.” 하였다. ○ 신안 진씨(新安陳氏 진력(陳櫟))가 말하기를, “얻는다는 것은 부귀 권리를 얻는다는 말이다.” 하였다.


정말 잃을까 근심하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작게는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아 주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아비와 임금을 죽이는 것까지 다 잃을까 근심하는 데서 나온 말이다.” 하였다. ○ 호씨(胡氏)가 말하기를, “허창(許昌)의 근재지(靳裁之)란 사람이 말하기를, 선비의 품위(品位)에는 대개 세 가지가 있는데, 도덕에 뜻을 둔 이는 공명(功名)으로써 그 마음을 더럽힐 수 없고, 공명에 뜻을 둔 이는 부귀로써 그 마음을 더럽힐 수 없다. 부귀에만 뜻이 있을 뿐이라면 하지 않는 일이 없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부귀에만 뜻이 있다는 것이 곧 공자께서 말씀하신 비부이다.” 하였다.


말을 교묘[巧]하게 하거나 외모(外貌)를 잘 꾸미는 사람 중에 인인(仁人)이 드물다.

주자가 말하기를, “교(巧)는 잘한다는 것이요, 영(令)은 좋게 꾸미는 것이다. 말을 잘하거나 외모를 좋게 꾸며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힘쓰게 되면, 사람의 욕심이 방자해져서 본심의 덕이 없어진다. 성인은 말을 박절하게 하지 않기 때문에 드물다라고 한 것이니,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용모와 말씨는 바로 배우는 이가 힘써 길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을 교묘하게 하거나 외모를 잘 꾸며서[巧言令色] 사람의 보고 듣는 것을 즐겁게 하려 하면 마음이 밖으로 달려서 인(仁)한 이가 드물다. 만일에 이 용모와 말씨에서 잘 수양해서, 말을 할 때는 조급하지 않게 하고, 행동할 때는 반드시 온화하고 공손하게 하여, 다만 내심을 곧게 하고 외면을 방정하게 하는 실상에 꼭 맞도록 하게 되면 이것은 자신의 인격을 위하는 공부와 인(仁)을 구하는 요체가 될 것이니, 다시 무엇이 병될 것이 있겠는가. 소인은 남의 결점을 들추어내는 것을 정직한 것으로 여기고, 겉으로는 엄한 체하나 안으로는 나약하니, 말을 교묘하게 하거나 외모를 좋게 꾸미는 자와는 다르나 그 감정을 숨기고 거짓을 꾸미는 마음을 살펴보면 실상은 교언영색하는 자보다 더한 사람이니, 성인이 이들을 미워한다.” 하였다.


자색(紫色)이 주색(朱色)을 빼앗는 것을 미워하며, 정성(鄭聲)이 아악(雅樂)을 문란하게 하는 것을 미워하며, 말을 교묘하게 하는 입[利口]이 나라를 전복[覆]시키는 것을 미워한다.

주자가 말하기를, “주색(朱色)은 정색(正色)이요, 자색은 간색(間色)이다. 아(雅)는 바른 것이요, 이구(利口)는 말이 빠르고 넉넉한 것이요, 복(覆)은 기울어져 무너지는 것이다.” 하였다. ○ 범씨(范氏)가 말하기를, “천하의 일은 대개는 바르게 하여 이기는 사람이 적고, 바르지 못하게 하여 이기는 사람이 많다. 성인이 이 때문에 이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말 잘하는 사람은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며, 어진 이를 불초하다고 하고, 불초한 이를 어질다고 하는데, 임금이 진실로 그 말을 믿으면 국가의 전복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향원(鄕原)은 덕의 적(賊)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원(原) 자는 원(愿) 자와 그 뜻이 같으니,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을 말한다. 공자는, ‘그것이 덕인 듯하나 덕이 아니다. 그러므로 덕의 적(賊)이다.’ 하였다. ○ 만장(萬章)이 “한 고을 사람들이 모두 원인(原人 근엄하고 후덕한 사람)이라고 일컫는다면 어디를 가더라도 원인이 아닐 수 없는데, 공자가 덕의 적(賊)이라고 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를 비난하려 해도 이렇다 할 비난거리가 없고, 그를 공격하려 들더라도 이렇다 할 공격거리가 없다. 세속과 동조하고 더러운 세상과 합류하여, 들어앉아 있을 때는 충직하고 선의가 있는 듯하며, 나아가 행동할 때는 청렴하고 결백한 듯해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좋아하고 스스로도 옳다고 여기지만 그러한 사람과는 요순의 도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덕의 적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탐오(貪汚)하고 아첨하는 것은 소인의 한결같은 태도로 어리석고 어두운 임금이 아니라면 이것을 분변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직 옳은 듯하나 그른 자에 대해서는 비록 밝은 왕이라도 분변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군자는 낯빛을 바르게 하여 곧은 말을 하는데, 소인 중에 외형은 엄격하게 하고 들추어내는 것을 정직한 것으로 여기는 자가 그와 비슷합니다. 또 군자는 행실이 완전하여 결점이 없는데, 소인 중에 삼가고 조심하여 비난하려 해도 비난할 거리가 없는 자가 그와 비슷합니다. 성현이 깊이 경계하심이 당연합니다. 대개 향원은 마음을 감추고 세상에 잘 보여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며, 세속과 부화뇌동하여 고식적이고 비루한 데 처하는 것을 편안히 여기고, 도를 행하는 선비를 억압하고 학문하는 길을 끊어 버리니, 그 해되는 것이 이단(異端)이 세상을 현혹시키는 것보다 더욱 심합니다. 후세의 선비가 만일 향원이라 지목하면 누군들 부끄러워하고 또 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행위를 살펴보면, 이리저리 재고 몸을 사리면서 녹이나 받아먹다가 옛것을 회복하자는 설을 듣든가 도에 뜻을 둔 선비를 보든가 하면 문득 우활(迂闊)하여 이루기 어렵다고 비웃고, 다만 구습(舊習)을 지키고 미봉하는 것을 일삼으니, 이들 모두가 향원을 본받는 사람들입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상도(常道)를 돌이킬 뿐이다. 상도가 바르면 서민이 흥기한다.” 하였습니다. 상도를 돌이키는 책무를 전하께 깊이 바랍니다.

이상은 소인의 간사함을 분별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군자와 소인에 대한 통론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언론(言論)이 독실한 사람을 이에 친히 한다면 군자(君子)다운 자인가. 얼굴만 엄장(嚴莊)한 자인가.” 하였다. 《논어》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다만 그 언론이 독실하다고 하여 그를 친히 한다면 군자(君子)다운 자인가, 얼굴만 엄장(嚴莊)한 자인가 알지 못하겠다고 말씀한 것이다. 이는 말과 외모(外貌)로 사람을 취해서는 안 됨을 말씀한 것이다.” 하였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을 잘하지만,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 해서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진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으나,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 해서 반드시 어진 것은 아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화순(和順)하여 밖으로 영화가 발하거니와 말을 잘하는 이는 말만 잘할 뿐이다. 어진 이는 마음에 사사로이 얽매이는 것이 없어서 옳은 것을 보면 반드시 행하지만 용기가 있는 사람은 혈기만 강할 뿐이다.” 하였다.


군자는 작은 것은 알 수 없어도 큰 것은 받을 수 있고, 소인은 큰 것은 받을 수 없어도 작은 것은 알 수 있다.

주자가 말하기를, “안다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이요, 받는 것은 상대로부터 받는 것이다. 대개 군자는 작은 일에는 볼만한 것이 없어도 그 재능과 덕망이 족히 두터운 것을 맡을 수 있고, 소인은 비록 도량이 얕고 좁지만 한 가지 장점도 취할 게 없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군자는 의(義)를 깨닫고[喩], 소인은 이(利)를 깨닫는다.

주자가 말하기를, “유(喩)는 깨닫는다는 말과 같다. 의(義)는 천리의 마땅한 것을 말하고, 이(利)는 인정이 하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의를 대하는 태도는 소인의 이(利)를 대하는 태도와 같다. 오직 깊이 깨닫기 때문에 독실하게 좋아하는 것이다.” 하였다. ○ 양씨(楊氏)가 말하기를, “군자는 생(生)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 이(利)로써 말하면 사람의 하고 싶은 것에 생보다 더 심한 것이 없고, 미워하는 것에 죽음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누가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는가. 그런데도 군자가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는 것은 깨닫는 것이 오직 의뿐이기 때문에 이(利)가 이로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인은 이와 반대이다.” 하였다. ○ 상산 육씨(象山陸氏 육구연(陸九淵))가 말하기를, “이 장은 의(義)와 이(利)로써 군자와 소인을 판별한 것인데,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여기에서 그 뜻을 분변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깨닫는 것은 그 습성에 말미암은 것이요, 그 습성은 그 뜻하는 바에 말미암은 것이니, 뜻하는 바가 의(義)에 있으면 익히는 것도 반드시 의에 있게 되어 곧 의를 깨닫고, 뜻하는 바가 이(利)에 있으면 익히는 것이 반드시 이에 있게 되어 곧 이를 깨닫는다.” 하였다. ○ 남헌 장씨(南軒張氏 장식(張栻))가 말하기를, “배우는 사람은 의와 이를 분변하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으니, 의라는 것은 일부러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대개 일부러 해서 되는 것은 다 인욕(人欲)의 사사로운 것이요, 천리(天理)의 공(公)이 아니니, 이것이 의와 이의 구분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의가 일부러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는 말은 앞 성인들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였다. 대개 성인의 학문은 일부러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끝남이 없는 천명이요, 편벽되지 않은 본성이며, 무궁한 가르침이다. 스스로 우뚝이 의와 이가 천양의 딴판[霄壤之判]이라는 것을 살펴서 생각을 가다듬고 힘써 행해서 밤낮을 쉬지 않으면 참으로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 하는 일이 비록 착하다 하더라도 교제를 맺고 명예를 구하여 비난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생각이 혹시라도 마음에 싹튼다면 이것 역시 이(利)일 따름이다.” 하였다.


군자는 화(和)하면서 동(同)하지 않고, 소인은 동하면서 화하지 않는다.

주자가 말하기를, “화(和)라는 것은 어그러진[乖戾] 마음이 없는 것이요, 동(同)은 아부하여 편당을 든다는 뜻이다.” 하였다. ○ 윤씨(尹氏)가 말하기를, “군자는 의를 숭상하기 때문에 편당 짓지 않으나, 소인은 이(利)를 숭상하니, 어찌 화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제 경공(齊景公)이 사냥을 갔다가 돌아왔을 때, 안자(晏子)가 모시고 있었는데, 자유(子猶) 양구거(梁丘據)의 자(字)이다. 가 달려오니, 공이 말하기를, ‘오직 자유가 나와 조화를 이룬다.’ 하였다. 안자가 대답하기를, ‘자유는 동조하는 것이니, 어찌 조화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화와 동이 다른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다릅니다. 화는 국을 끓이는 것과 같습니다. 불 위에 물을 올려놓고 식초ㆍ젓갈ㆍ소금ㆍ매실[梅]을 넣어 어육(魚肉)을 삶을 적에 섶[薪]으로써 불을 때고[燀] 전(燀)의 음은 전(戰)이다. 불태운다는 것이다. 요리사가 간을 맞추어 지나친 것을 없게 없앤다는 것은 그 맛이 지나친 것을 덜어서 없앤다는 것이다. 하는데, 군자는 이것을 먹고 그 마음을 화평하게 합니다. 임금과 신하도 역시 그러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는 것에 옳지 못한 것이 있으면 신하가 그 옳지 못한 것을 말하여 옳은 것을 이루게 하고, 임금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에 옳은 것이 있으면 신하가 그 옳은 것을 말하여 그른 것은 버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경》에 이르기를, 「국맛을 고르게 하듯 경계하며 공평하게 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자유는 그렇지 못하여, 임금이 옳다고 하는 것에 대해 자유도 옳다고 하고, 임금이 그르다고 하는 것에 대해 자유 역시 그르다고 합니다. 물에 물을 탄 것과 같으니, 누가 먹겠으며, 거문고와 비파 소리가 똑같다면 누가 듣겠습니까. 동조함[同]의 옳지 못함이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하였다.


군자는 두루 사귀고[周] 편당 짓지 않으며, 소인은 편당 짓고 두루 사귀지 않는다.

주자가 말하기를, “주(周)는 보편적인 것이요, 비(比)는 편당 짓는 것입니다. 둘 다 다른 사람과 친하다는 뜻입니다만 주(周)는 공적인 것이고, 비(比)는 사적인 것입니다.” 하였다. ○ 주자가 승상(丞相) 유정(留正)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기를, “붕당(朋黨)의 화는 진신(縉紳 고관대작)에만 그치는 것인데, 옛날에 붕당(朋黨)을 미워하여 없애고자 하는 자가 왕왕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이르렀습니다. 이는 그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과 충성스럽고 간사한 것을 살피지 않고 오직 당만 없애려고 힘쓰면, 저 소인들은 반드시 교묘한 꾀로 자취를 덮으려 하는 데, 군자는 그 공심(公心)과 바른 도만 믿고 말과 일을 공정하게만 해 나가고 그럴 듯하게 둘러대지 못하다가 이따금 도리어 소인에게 밀려서 편당이라고 지목을 받게 되니, 한(漢) 당고(黨錮)의 화이다.ㆍ당(唐) 청류(淸流)의 화이다.ㆍ송(宋)의 소성(紹聖) 원우당(元祐黨)의 화이다. 의 일들이 먼 옛날의 일이 아닙니다. 승상께서 붕당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나는 승상께서 혹시나 깊이 천하의 현(賢)ㆍ부(否)와 충(忠)ㆍ사(邪)를 살피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대개 문을 닫고 들어 앉아 자신을 지켜 고립되어 붕당 짓지 않는 것은 한 개인의 행실이요, 어질고 능한 이를 맞아들이고 간사하고 음험한 자를 물리쳐서 천하 사람들의 뜻을 합하여 천하의 일을 구제하는 것은 재상의 직책입니다. 어찌 반드시 당이 없는 것만을 옳다고 하고, 당이 있는 것만을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대개 승상의 오늘의 처지를 보면 당이 없다고 하면 없다고 할 수 있지마는, 소인의 도(道)는 날로 늘어가고 군자의 도는 날로 사라져, 천하의 걱정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면 승상이 어찌 그 책임을 피하겠습니까. 저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근심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승상께서는 먼저 어진 자와 어질지 못한 사람, 충성스런 사람과 간사한 사람을 분별하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아서, 과연 어질고 충성스러운 사람이면 드러내어 등용하되, 오직 그 당이 많지 않아 같이 천하의 일을 도모하지 못할까 두려워할 것이고, 과연 간사한 사람이면 드러내어 물리치되, 오직 그들을 다 제거하지 못하여 내가 어진 이를 등용하는 공효를 해칠까를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군자들이 당을 짓는 것을 미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당을 짓는 것도 꺼리지 말 것이요, 내가 당을 짓는 것을 꺼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앞으로 임금을 인도하여 당을 짓게 하는 것도 꺼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천하의 일이 거의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신하의 악(惡)은 사당(私黨)보다 더 심한 것이 없고, 임금이 몹시 미워하는 것도 붕당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인이 군자를 모함하는 데는 반드시 이것을 효시(嚆矢)로 삼으니, 그저 임금이 이것을 살피지 못할까 염려될 뿐입니다. 진실로 이것을 살핀다면 공(公)과 사(私), 충(忠)과 녕(佞 아첨하는 것)을 분변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이른바 살핀다는 것은 다만 그 마음을 살피는 것뿐이니, 그 마음이 임금을 바르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는가, 몸을 영화롭게 하고 권세를 굳히는 데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임금을 바르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선비는 도를 함께 하는 사람들과 붕당을 짓기 때문에 일심으로 임금을 사랑하고 일심으로 나라에 충성하여, 당이 성할수록 임금도 더욱 성(聖)해지고, 나라도 더욱 편안해집니다. 임금은 오히려 그러한 당이 적을까 염려할지언정 어찌 그 무리 지어 모여드는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몸을 영화롭게 하고 권세를 굳게 하는 선비는 이(利)를 같이 함으로써 벗을 삼는 자이니, 이들은 사(私)를 도모하고 공(公)을 무시하며, 임금을 뒤로 하고 부모를 버리니, 그 당은 비록 적더라도 족히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망하게 할 것입니다. 임금은 마땅히 불이 처음 붙을 때에 끄듯이 해야 하니, 어찌 그것이 번성하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그러나 소인의 마음은 다만 이(利)만 구할 뿐이요, 임금과 부모는 돌보지 않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체결된 붕당은 이익이 다 되면 교제가 소원해지고, 형세가 궁박해지면 서로 도모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붕당은 잠깐 합해진[假合] 것일 뿐이어서 군자의 도의에 입각한 붕당과 같이 시종여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구양수(歐陽脩)가 말하기를, ‘소인은 벗이 없고 오직 군자만이 벗이 있다.’ 하였으니, 이 말이 옳습니다. 아, 상(商)나라 신하는 억만(億萬)이었으나, 그 마음도 억만이었으니 당이 없어서 주(紂)가 망하였다고 할 수 있고, 주(周)나라 신하는 3천이로되 그 마음은 하나였으니 일대의 큰 당이 되어 무왕(武王)이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만 그 마음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임금이 먼저 이(理)를 밝히지 않고 예측과 억측으로 살핀다면, 공(公)을 사(私)라고 하고 녕(佞)을 충(忠)이라 하지 않는 이가 드물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학문은 이(理)를 밝히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과실에는 각각 유형이 있다. 과실만 보아도 그 사람의 어짊을 알 수 있다.

주자가 말하기를, “당(黨)은 유(類)이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사람의 과실은 유마다 다르다. 군자는 항상 후한 데서 실수하고, 소인은 항상 야박한 데서 실수한다. 군자는 사랑하는 데서 지나치고 소인은 지나치게 잔인하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지나치게 청렴하고, 소인은 지나치게 탐(貪)하며, 군자는 절개를 지키는 데서 지나치며 소인은 누구라도 다 알고 지내려는 데서 지나친 것이 모두 이런 유이다. 그러나 또한 이에만 그치지 않는다. 다만 이런 것에 나아가 보면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않은 것을 볼 수 있고 인의 기상을 또한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로써 그 사람의 어진 것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은 또 사람이 비록 과실이 있다 하더라도, 그 과실의 유에 따라서 그 사람이 후한 사람인가 박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요, 반드시 허물이 있는 것을 기다린 뒤에야 그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 진씨(眞氏)가 말하기를, “임금은 신하에게 과실이 있으면 그 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만일 임금을 사랑해서 극진히 간(諫)한다면 지나치게 파헤치는 과실이 없지 않지만, 요컨대 그 용심(用心)은 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어진 것은 취하고 과실은 너그럽게 봐 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임금을 사랑해서 임금의 명령을 어기게 되면 지나치게 바로잡는 과실이 없지 않지마는, 요컨대 그 용심은 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그 어진 것은 취하고 그 과실은 용서해 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간사한 신하들은 덮어서 가리기를 잘하기 때문에 꼭 지적할 만한 과실은 없다. 그러나 그 마음은 어떠한가. 대개 이것은 다 사람을 관찰하는 한 가지 단서인데, 이를 유추하여 구해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였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임금을 잘 섬기기만 하는 자는, 임금을 섬기게 되면 임금에게 잘 보여 임금을 즐겁게 하는 자다.” 하였다. 《맹자》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아첨해서 잘 보이려 하고 임금의 뜻에 맞추어서 즐겁게 하는 것은 비부(鄙夫)의 일이요, 첩부(妾婦)의 도이다.” 하였다.


사직(社稷)을 편하게 한다는 신하는 사직을 편하게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대신이 사직을 편하게 하는 것을 꾀하는 것은 마치 소인이 그 임금을 즐겁게 하는 데 힘쓰는 것과 같아서, 여기에 항상 마음을 쓰고 잊지 않는다.” 하였다.


천민(天民)이란 것은 천하에 행할 수 있은 뒤에야 행하는 사람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백성이란 지위가 없는 자를 일컫는다. 그가 천리(天理)를 온전히 다하는 하늘의 백성이기 때문에 천민(天民)이라고 한다. 반드시 그 도를 천하에 행할 수 있은 뒤에야 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더라도, 그 도를 조금 써서 남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하였다. ○ 장씨(張氏)가 말하기를, “반드시 공이 이 백성을 덮을 만한 뒤에 나가는 것이니, 이윤(伊尹)과 여상(呂尙) 같은 이가 그러하다.” 하였다.


대인(大人)은 자기 몸을 바르게 하여서 남도 바르게 하는 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대인은 덕이 성하여 위아래가 화(化)해지는 것이니, 이른바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見龍在田] 천하가 문명(文明)해진다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사람의 인품이 같지 않으나 대략 네 등급이 있다. 마음에 들려고 아첨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사직을 편하게 하는 이는 충성스럽긴 하나 아직 일국의 선비이다. 천민(天民)은 일국의 선비는 아니지만 오히려 포부를 지닌 이다. 뜻도 없고 기필하는 것도 없지만 오직 그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물(物)이 화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오직 성인이라야 그렇게 할 수 있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사람을 알기가 어렵다는 것에 대해서 요순도 병통으로 여겼으며, 공자도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행실까지 보아야 한다.’고 경계한 바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이것은 다만 소인을 두고 한 말이다. 만일 모두가 군자라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대개 천지간에는 자연의 이치가 있다. 양(陽)은 반드시 강(剛)하고 강하면 반드시 밝고, 밝으면 알기가 쉽다. 음(陰)은 반드시 유(柔)하며 유하면 반드시 어둡고, 어두우면 헤아리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성인이 《주역(周易)》을 지을 때에, 양을 군자로 삼고, 음을 소인으로 삼았다. 그 유(幽)와 명(明)의 소이연에 통하고, 만물의 정에 따라 분류한 것은, 비록 백세(百世)가 되더라도 바꿀 수 없다. 일찍이 역설(易說)을 미루어 천하 사람들을 살펴보니, 대체로 광명정대하고 널리 통달하여,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고, 높은 산이나 큰 냇물 같으며, 뇌정(雷霆)의 위엄 같고, 우로(雨露)의 윤택 같으며, 용호(龍虎)의 용맹 같고 인봉(麟鳳)의 상서(祥瑞)와 같아 도량이 넓고 깨끗하여 추호도 의심스러운 것이 없는 이는 분명 군자이다. 알랑거리고 혼탁하며, 그럴듯하게 둘러대고 숨고 감추어 주어 뱀이나 지렁이처럼 서로 얽히고, 서캐와 이[蟣蝨]처럼 좀스럽고, 귀신과 물여우처럼 홀리고, 도적처럼 저주하고, 재빠르고 교활한 것을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자는 분명 소인이다. 군자와 소인의 기준이 마음속에 정해지면, 세세한 말씨나 행동으로 겉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니 더구나 사업이나 문장에서야 찬연히 드러나지 않겠는가. 소인을 알아내기가 어렵다고 하나, 이렇게 본다면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주자의 이 말이 군자와 소인의 정상(情狀)을 다 갖추었으니, 전하께서 이것으로 사람을 관찰한다면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군자와 소인은 음양이나 주야(晝夜)와 같아서 매양 서로 반대되나, 큰 요체는 임금을 사랑하는 사람은 군자요, 작록을 사랑하는 사람은 소인입니다. 대개 소인은 그 임금이 명철하건 어리석건 헤아리지 않고 다만 작록에만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만약 자기를 이롭게만 하면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군부(君父)를 속이고, 국맥(國脈)을 손상하게 한다 할지라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작록의 권리가 임금에게 있으면 임금에게 아첨하고, 권신과 행신(幸臣)에게 있으면 권신과 행신에게 붙으며, 외척에게 있으면 외척과 결탁하고, 심지어는 적국과도 몰래 내통하여 마치 개가 주인에게 짖고 물어뜯듯이 하는 것까지도 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작록이니 어느 겨를에 임금을 사랑하겠습니까. 군자는 그렇지 아니하여 사직(社稷)을 마음에 두고 생민을 생각하니, 진실로 임금을 바르게 할 수만 있다면 다른 것에는 애착이 없습니다. 의(義)가 직분을 지키는 데 있으면 군명(君命)이라도 따르지 않을 때가 있고, 의가 말을 다하는 데 있으면 임금의 위엄도 피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의리를 밝히고 가리고 미혹하는 것을 막아 임금을 인도하되 도에 합당하도록 해서, 임금으로 하여금 과오가 없는 처지에 서도록 합니다. 만일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거나 간언(諫言)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서 녹만 먹고 나라에 보탬이 되는 것이 없다면, 몸을 받들어 물러가는 것 또한 그만둘 수 없을 것입니다. 초야에 묻혀 살면서 밥 먹는 사이에도 잊지 않고 임금이 느껴 깨닫기를 바라나니 물러났다 하여 벼슬할 때와 마음을 달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임금이니, 어느 겨를에 작록을 탐내겠습니까. 말속(末俗)이 넘실대고 도학이 밝지 않아, 신하는 이미 임금을 바르게 할 뜻이 없고, 임금 역시 사람들이 순종하는 것만 좋아하여, 작록을 탐하는 자를 임금을 아끼는 자라고 여기고, 임금을 아끼는 자를 임금을 원망하는 자라고 여기니, 아, 탄식할 만한 일입니다.

이상은 군자와 소인을 통틀어 논한 것입니다.


 

용사(用捨)의 편의(便宜)에 대하여


애공(哀公)이 묻기를,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하겠는가.” 하니,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곧은 이를 들어 쓰고 모든 굽은 이들[諸]을 버리면[錯] 백성이 복종하고, 굽은 이를 들어 쓰고 곧은 이들을 버리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논어》

주자가 말하기를, “조(錯)는 버려둔다는 뜻이요, 제(諸)는 무리[衆]라는 뜻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기용하고 버리는 것을 옳게 하면 인심이 복종할 것이다.” 하였다. ○ 사씨(謝氏)가 말하기를, “곧은 것을 좋아하고 굽은 것을 미워하는 것이 천하의 지정(至情)이니, 이 지정에 순하면 백성이 복종하고, 만약 이에 거스르면 떠나 버리는 것은 필연의 이치이다. 그러나 혹시 곧은 것과 굽은 것을 관찰할 만한 도가 없다면, 곧은 것을 굽었다 하고, 굽은 것을 곧다 하는 이가 많을 것이다. 이러므로 군자는 거경(居敬)을 크게 여기고 궁리(窮理)를 귀하게 여긴다.” 하였다.


어진 이를 보고도 들어 쓰지 못하며, 들어 쓰되 일찍이 하지 못하는 것은 태만[命]한 것이요, 선하지 않은 이를 보고도 물리치지 못하며, 물리치되 멀리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다. 《대학》

주자가 말하기를, “정씨(鄭氏 정현(鄭玄))는, ‘명(命)은 마땅히 만(慢)이라 하여야 한다.’ 하였다. 이러한 사람은 사랑하고 미워할 줄은 알지마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도에 극진하지 못한 자이니, 대개 군자이면서 어질지 못한 사람이다.” 하였다. ○ 호씨(胡氏)가 말하기를, “제 환공(齊桓公)이 곽(郭)나라에 가서 부로(父老)에게 묻기를, ‘곽은 어째서 망하였는가?’ 하니, 부로들이 말하기를, ‘착한 이를 착하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그러니까 공이, ‘자네들 말과 같으면 곧 어진 임금인데 어찌 망하는 데까지 이르렀는가.’ 하니, 말하기를, ‘곽나라 임금은 착한 이를 착하게 여겼으나 능히 쓰지를 못하였고, 악한 이를 미워했으나 능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하였다. 대개 착한 이를 착하게 여기되 능히 쓰지 못하면 그 착한 사람을 아는 것만으로 귀한 것이 될 수 없고, 악한 이를 미워하되 능히 버리지 못하면 그 악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만으로 귀한 것이 될 수 없다. 선악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그래도 오히려 바라볼 여지가 있지마는, 이미 알고도 그 아는 것을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군자는 행동을 고상하게 하여 멀리 가 버리고, 소인은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한다. 그러니 곽나라를 망하게 한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곽나라 임금이 스스로 망친 것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임금이 비록 군자를 좋아하고 소인을 미워할 줄을 알면서도, 들어 쓰거나 내칠 때에 그 좋아하고 미워하는 실상대로 결행하지 못한다면 치란(治亂)에 있어서 유익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곧은 이를 들어 쓰고 굽은 이를 버리는 일을 알맞게 하는 것을 귀히 여깁니다. 비록 그러하나 저 곧은 이를 들어 쓰고 굽은 이를 버리는 데 의(義)를 다하지 않는 이는 실로 아직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 대한 올바른 견해를 얻지 못한 것입니다. 참으로 선을 좋아하기를 색(色)을 좋아하듯이 하고,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싫어하듯이 한다면, 어찌 그런 사람을 먼저 들어 쓰지 못하고, 그런 사람을 멀리 물리치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겉으로는 어진 이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좋아하지 않는 것이며, 겉으로는 악을 미워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미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진 이와 어질지 못한 이가 전도(顚倒)되어 혼란이 일어나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자가 논한 절의(節義)를 위하여 죽는다는 설은 말이 상당히 격하고 절실하여 임금이 알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삼가 다음에 기록합니다.

주자의 〈봉사(封事)〉에 말하기를, “어떤 이가 무리 가운데서 말하기를, ‘폐하께서 일찍이 이르시기를, 「오늘날 천하에는 다행히 사변이 없다. 그러니 정의를 위하여 죽는다는 선비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 말이 한 번 전파되자 크게 식자들 간에 근심이 되었습니다. 신은 그것이 꼭 폐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대개 절의를 위하여 죽는 선비는 평상시 무사할 때에는 참으로 아무 소용이 없는 듯하나, 옛날 임금이 반드시 급급하게 이런 사람을 구한 까닭은 대개 이런 사람은 환난에 임하여 능히 사생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반드시 작록을 가벼이 여길 것이고, 환난에 임하여서는 능히 충절을 다할 수 있을 것이며, 또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반드시 바른길이 아니면 따르지 않을 것이니, 평화롭고 사건이 없을 때 이런 사람을 등용하게 되면, 임금의 마음이 위에서 바르게 되고 풍속이 아래에서 아름다워져서, 간악한 싹을 꺾고 재화의 근원을 몰래 없앨 수 있으며, 자연히 절의를 위하여 죽는 일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후일에 변고가 있을 것을 알고 이런 사람을 미리 육성해 두어 거기에 대비하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오직 평상시에 스스로 편안하다고 믿고 바로 이런 인재는 필요가 없다고 하여, 다만 일종의 도리도 없고 학식도 없어서 작록을 중히 여기고 명의(名義)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을 채용하여, 과격한 데 힘쓰지 않는다 여겨 그런 사람을 존중하고 총애한다면 이로써 기강(紀綱)이 날로 무너지고 풍속이 날로 각박하여져서, 예상치 못한 화(禍)가 모르는 사이에 잠복하여 있다가 하루아침에 생각지도 못한 변이 발생하면 평소에 쓸모 있던 사람이 팔이 묶인 채 항복하고, 한 사람도 환난을 같이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한 뒤에야 전일에 버림을 받고 떠돌던 사람이 비로소 다시 불행히도 그 충절(忠節)을 나타내게 됩니다. 천보(天寶)의 난으로 이런 것을 관찰해 보면, 그 장상(將相)ㆍ귀척ㆍ가까운 행신(幸臣)은 이미 다 적정(賊庭)에 나아가 이마를 조아리고 항복하였습니다. 그런데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가 마침내 자신이 죽고 친족까지 몰락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장순(張巡)ㆍ허원(許遠)ㆍ안고경(安杲卿)과 같은 이들로, 그들은 멀리 하읍(下邑)에 있어서 임금도 그 면목을 모르던 사람들입니다. 명황(明皇 당 현종(唐玄宗))으로 하여금 일찍이 장순과 같은 사람을 얻어서 등용하게 하였다면 어찌 우환이 싹트기 전에 이것을 방지할 수가 없었겠으며, 장순과 같은 사람이 일찍이 명황(明皇)에게 등용이 되었더라면 어찌 참으로 절의를 위하여 죽는 일이 있게 되었겠습니까. ‘상(商)나라의 귀감(龜鑑)이 멀지 않다. 하후(夏后)의 세(世)에 있다.’ 하는데 이는 식자(識者)가 어떤 이의 말을 깊이 우려하는 것입니다. 비록 신은 폐하께서 성학(聖學)이 고명하고 식견이 심원하시어 결단코 이런 말이 나오는 데 이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지마는, 매양 소인이 감히 임금의 훈계를 칭탁하여 자기의 간악함을 덮어서, 그 해독이 천하의 충신과 의사(義士)의 기개를 깊이 저해할 것을 생각하면 또한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리지 않을 수 없으니, 감히 식자들의 우려가 지나친 걱정이라고는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주자의 설은 명백하고 통쾌하여 단번에 사론(邪論)을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봅니다. 옛날 송(宋)나라 효종(孝宗)이 절의를 위하여 죽는 선비를 얻기 어렵다고 탄식하니, 장남헌(張南軒)이 말하기를, “절의를 위하여 죽는 선비는 마땅히 임금 앞에서 과감히 간(諫)하는 사람 중에서 구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간략하고도 적절하니, 임금께서는 알아 두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이상은 용사의 마땅함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현인(賢人)을 구하는 도(道)에 대하여


《주역》에 이르기를, “비룡(飛龍)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大人)을 보는 것이 이(利)롭다.” 하였다. 《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오(九五)〉

정자가 말하기를, “성인이 이미 천위(天位)를 얻었으면 아래로 큰 덕(德)이 있는 사람을 만나 보고서 같이 천하의 일을 이루는 것이 이롭다.” 하였다.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은 서로 구하니, 물은 젖은 데로 흐르고 불은 마른 데로 번져 가며,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 하였다.


또 《주역》에 이르기를, “기(杞)로써 오이[爪]를 쌌으니, 장(章 아름다운 문채)을 머금으면 하늘에서부터 떨어지는 것이 있으리라.” 하였다. 《주역(周易)》 〈후괘(姤卦) 구오(九五)〉

정자가 말하기를, “기(杞)는 높은 나무로서 잎이 큰 것이다. 높은 데서 물건을 쌀 만한 것은 기(杞)이고, 아름다운 열매로서 아래에 있는 것은 오이이다. 아름답고 아래에 있는 것은 미천(微賤)한 데 있는 어진 이의 형상이다. 높이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아래에 있는 어진 이를 구하는 것은 지극히 높은 것으로써 지극히 낮은 것을 구하는 것이니, 기(杞)의 잎으로써 오이를 싸는 것과 같다. 임금이 비록 몸을 굽혀서 어진 이를 구할지라도, 만일 그 덕이 바르지 않으면 어진 이가 즐거워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아름다운 것을 함축해서 안으로 지성(至誠)을 쌓으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을 반드시 얻을 것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옛날부터 임금이 지성으로 자기를 굽혀 중정(中正)한 도로써 천하의 어진 이를 구하면 만나지 못할 리가 없다. 고종(高宗 은(殷)나라 임금)은 자다가 꿈에서 부열(傅說)을 얻고, 문왕(文王 주(周)나라 임금)은 낚시터에서 강태공(姜太公)을 만난 것이 모두 도(道)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천지가 서로 만나지 못하면 만물이 생겨나지 못하고, 군신이 서로 만나지 못하면 정치가 흥하지 못하며, 성현이 서로 만나지 못하면 도덕이 형통(亨通)하지 못하고, 사물이 서로 만나지 못하면 공용(功用)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였다.


중궁(仲弓)이 어진 이를 기용하는 방법을 묻기를, “어떻게 해야 어진 이를 알아내 기용하겠습니까.”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아는 이를 기용한다면 모르는 이를 남들이 그냥 두겠는가.” 하였다. 《논어》

정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각각 그 친한 이를 친히 하고 난 뒤에는 그 친히 하는 이만 친히 하는 것이 아니다. 중궁이 ‘어떻게 어진 이를 알아 기용하겠습니까.’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아는 어진 이를 기용한다면 그대가 모르는 어진 이를 남들이 그냥 두겠는가.’ 하였으니, 곧 중궁과 성인의 마음 쓰는 것이 크고 작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뜻으로 미룬다면 마음 하나로 나라를 일으킬 수도 있고 나라를 망칠 수도 있으니, 이것은 다만 공(公)과 사(私)에 있을 뿐이다.” 하였다. ○ 명도(明道) 선생이 신종(神宗)을 만나서 인재를 의논할 때, 신종이 말하기를, “나는 아직 인재를 보지 못하였다.” 하니, 명도 선생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어찌 천하의 선비를 경시하십니까.” 하자, 신종은 용연(聳然)히 놀라면서 말하기를, “나는 앞으로는 감히 그런 말을 하지 않겠다. 나는 앞으로는 감히 그런 말을 하지 않겠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천지가 한 세상 사람들을 낳았으니 이들은 족히 그 세상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탄스러운 것은 그 세상 인재를 다 기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세상을 크게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요(堯)는 순(舜)을 얻지 못하는 것을 자기의 근심거리로 삼았고, 순은 우(禹)와 고요(臯陶)를 얻지 못하는 것을 자기의 근심거리로 삼았다. 남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은 혜(惠)라 하고, 남에게 선을 가르쳐 주는 것은 충(忠)이라 하며, 천하를 위하여 인재를 얻는 것을 인(仁)이라 한다. 그러므로 천하를 남에게 주는 것은 쉬워도 천하를 위하여 인재를 얻는 것은 어렵다.” 하였다. 《맹자》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요순이 백성을 근심한 것은 일마다 근심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할 일을 급하게 하였을 뿐이다. 사람들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은 조그마한 은혜일뿐이고, 사람들에게 선을 가르쳐 주는 것은 비록 백성을 사랑하는 진심은 있으나, 그 미치는 바에 한정이 있어서 오래가기가 어렵다. 오직 요가 순을 얻은 것과 순이 우와 고요를 얻은 것같이 하여야만, 소위 천하를 위해 사람을 얻는 것이라 할 수 있고, 그 은혜가 광대하고 그 교화가 무궁할 것이니, 이것이 인(仁)인 것이다.” 하였다.


옛날의 어진 임금들은 선을 좋아하고, 권세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옛날의 어진 선비들이 유독 그렇지 않았겠는가. 자기의 도를 즐기고 남의 권세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왕공이라고 경의(敬意)를 표하고, 예를 다하지 아니하면 그들을 자주 만날 수 없었다. 만나는 것조차 자주 할 수 없었으니, 하물며 그들을 얻어서 신하로 삼는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주자가 말하기를, “임금은 마땅히 자신을 굽혀서 어진 이에게 자신을 낮추어야 할 것이며, 선비는 도를 굽혀서 이(利)를 구하지 말아야 한다. 이 두 가지는 형세가 서로 상반되는 것 같으나, 실은 서로 이루어 주는 것이므로 역시 각각 그 도를 다할 뿐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옛날 임금으로서 천하에 뜻이 있던 이는 천하의 어진 이를 기용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어진 이 구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은 까닭은, 어진 이로 하여금 문장을 쓰게 하여 임금의 공덕을 자랑해서 일시에 보고 듣는 것을 아름답게 하려고 해서만이 아니다. 대개 그 임금의 견문이 미치지 못한 것과 사려의 이르지 못한 것을 넓히고, 또 처신(處身)하고 접물(接物)하는 사이에 혹시나 조금이라도 선하지 못한 것이 있을까 염려해서, 어진 이들이 바루어 주기를 원해서이다. 그러므로 그 구하는 것을 넓게 하지 않을 수 없고, 예(禮) 베푸는 것을 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 대접하는 것을 정성스럽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려면 반드시 천하의 어진 이 중에 본래 아는 이나 모르는 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내 앞에 오게 하여 내 허물을 보완해 주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내 덕업(德業)은 은미(隱微)한 데서도 부끄러움이 없어 점점 광대(光大)한 것으로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어진 이들은 밝은 것이 사리의 미묘한 곳까지 환해지고, 지키는 것이 성현의 궤도를 따르게 되면 그 스스로 처하는 것이 반드시 고결하여, 유속과 같이하거나 혼탁한 데에 합류하여 명예를 구하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 자기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두터워서 말을 떠벌리거나 꾸며서 자기를 소개하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의 믿음이 독실해서 남의 의견을 무조건 추종하거나 말을 고분고분 대답하면서 구차하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왕공 대인이 비록 어진 이를 좋아하고 착한 것을 즐기는 정성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사람의 성명을 듣고 그 사람의 면목을 알고 그 사람의 심지(心志)를 다 알지는 못할 것이다. 하물며 처음부터 이런 뜻이 없이 취하는 것이 단지 문자나 언어 사이에 있어서이겠는가.” 하였다.


그러므로 앞으로 크게 다스릴 수 있는 임금은 반드시 부르지 못하는 신하가 있다. 모의할 일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나아간다. 그 덕을 높이고 도를 즐기는 것을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함께 큰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크게 다스릴 수 있는 임금이란 크게 비상한 것을 해내는 임금이란 말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옛날 사람이 반드시 임금이 경의를 표하고 예를 극진히 한 뒤에 나아간 이유는 스스로 자기를 존대(尊大)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임금과 같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선을 좋아하면 천하를 다스리는 데도 넉넉[優]하다. 진실로 선을 좋아하면 사해(四海) 안의 사람들이 다 천 리를 멀다 여기지 않고 모여들어서 선을 말해 줄 것이요, 진실로 선을 좋아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차 말하기를, ‘저 임금은 똑똑한 체[訑訑]하는 것을 나는 벌써 알고 있다.’고 할 것이다. 똑똑한 척하는 소리나 기색은 사람들을 천 리 밖에서 막는 것이다. 선비들이 천 리 밖에 머물러 있게 되면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될 것이다. 만약에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게 된다면 나라가 다스려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주자가 말하기를, “넉넉하다[優]는 것은 여유가 있다는 것으로, 비록 천하를 다스린다 해도 오히려 여력이 있다는 말이다. 경(輕)은 쉽다는 것인데, 천 리를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이(訑訑)는 스스로 그 지혜를 만족하게 여겨서 선한 말을 즐기지 않는 모양이다. 군자와 소인은 번갈아 소장(消長)하므로, 곧고 믿음직하고 들은 것이 많은 선비가 멀어지면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이 곁에 모이는 것은 이치와 형세가 그런 것이다. 이 글은 정치하는 것은 자기 한 사람의 장처(長處)를 쓰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천하의 선을 오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어진 이를 구하는 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임용(任用)의 도에 대하여


《주역》에 이르기를, “성인은 어진 이를 길러서 만민에게 혜택이 미치게 한다.” 하였다. 《주역(周易)》 〈이괘(頤卦) 단사(彖辭)〉

정자가 말하기를, “성인은 어진 이를 길러서 높은 벼슬을 주고, 그로 하여금 천록(天祿)을 먹게 하며, 혜택을 천하에 베풀게 하여서 어진 이를 길러 만민에게 미치게 한다.” 하였다. ○ 정자가 어진 이를 기르는 것을 논한 차자[論養賢箚子]에서 말하기를, “신이 가만히 살피건대, 당대를 의논하는 이들은 모두 어진 이를 얻으면 천하가 다스려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되 어진 이를 오게 하는 도는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비록 중론(衆論)이 분분하여 그 요령을 가려내지 못해서 그렇다고 하지마는, 조정에서도 행하기가 어렵다 해서 실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대에 어진 이를 기른 것은 반드시 학문에 근본 하였기 때문에 덕화가 행해지고 치도가 나왔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는 당(唐)나라의 옛 법을 이어받아서 관각(館閣)의 청선(淸選)도 다만 명목상의 직책에 그치고 명실(名實)이 바르지 아니하니, 어진 이를 부르고 인재를 길러서, 시국을 돕고 교화를 도우려고 하지마는, 앞으로 무엇을 좇아서 이것을 이루게 되겠습니까. 옛날의 명철한 임금은 마음을 비우고 다스림을 구하였으니, 어찌 일찍이 천하의 인재를 다 구해서 자기의 덕을 이루지 아니하였겠습니까. 신은 지금 원하건대, 조정은 연영원(延英院)을 설치하여 사방의 어진 이를 대접하고, 공론(公論)을 거쳐 추천받은 사람이나 숨어 있는 어진 이를 반드시 불러서 우대하고, 자품을 보아 봉급을 주되 갑자기 관직은 주지 않고 다만 응조(應詔)라고 명명(命名)해서, 무릇 정사가 있으면 그들에게 맡겨서 상세히 계획을 정하게 하고, 전례(典禮)가 있으면 그들로 하여금 토론하고 계획해서 진술해 올리게 하면 치란(治亂)의 원인을 강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들로 하여금 여럿이 모여 절차탁마하여 날마다 그 재능을 다 발휘하게 하고, 정부와 근신으로 하여금 서로 접촉하게 하고 때로 불러서 치도(治道)를 묻는다면, 그 재능과 역량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해를 살펴보면 인품이 더욱 뚜렷해질 것이니, 그런 뒤에 어진 이는 위(位)에 나아가게 하고, 재능이 있는 이에겐 직책을 맡기되, 군현(郡縣)의 원을 맡기기도 하고, 선비의 사표(師表)를 삼기도 하며 덕업이 더욱 특이한 사람에게는 수신(帥臣 큰 신하를 말함)과 직사(職司)의 직임에 점점 나아가게 한다면, 보필도 될 수 있고, 공경도 될 수 있어서, 어디에 베풀어도 걸맞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동류(同類)를 끌고 같이 나아가게 되어, 초야에 남아 있는 어진 이가 없을 것이니, 폐하의 어진 이를 높이고 선비를 대우하는 마음이 이 천하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이를 것입니다.” 하였다.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수족이 구비되어야 사람이며, 어진 신하가 보필해야 임금이 성스럽다.” 하였다. 《상서(商書)》 〈열명(說命)〉 아래도 이와 같다.

채씨(蔡氏)가 말하기를, “수족이 구비되어야 사람이 이루어지고, 어진 신하가 보필해야 임금이 성스러워진다.” 하였다.


옛 선정(先正)인 보형(保衡 이윤(伊尹)의 벼슬)은 우리 선왕을 흥기시켰는데[作] 그가 말하기를, “내가 임금을 요순처럼 되게 하지 못하면 마음의 부끄러움이 거리에서 종아리 맞는 것과 같으며,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이것은 나의 허물이다.”라고 하면서 우리 열조(烈祖)를 도와서 황천(皇天)에 이르게 하였으니, 너도 나를 밝게 도와서[保] 아형(阿衡)으로 하여금 상(商)나라의 칭송을 독차지하게 하지 말라.

채씨가 말하기를, “선정(先正)은 선세의 장관을 한 신하요, 보(保)는 편하게 한다는 뜻이니, 보형(保衡)은 아형(阿衡)이란 말과 같다. 작(作)은 흥기시키는 것이요, 거리에서 종아리를 맞는다는 것은 매우 부끄럽다는 것이요, 얻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있을 곳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글은 고종(高宗)이 이윤의 말을 들어서 부열에게 이윤과 같이 해 주기를 바라는 말이다.” 하였다.


“임금은 어진 이가 아니면 다스리지 못하고, 어진 이는 임금이 아니면 녹을 먹지 못하는 것이니, 너는 너의 임금이 선왕을 잇게 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하니, 열(說)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감히 천자의 아름다운 명을 그대로 선양(宣揚)하겠습니다.” 하였다.

채씨가 말하기를, “이 말은 군신이 서로 잘 만나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 고종은 스스로 성탕(成湯)이 되기를 기약하고, 부열은 이윤(伊尹)으로써 자임(自任)하여, 군신이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였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임금은 정승의 기용을 의논하는 것을 직분으로 삼고, 재상은 임금을 바르게 하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서, 양자가 각각 그 직분을 다한 뒤에야 체통이 바로 서고, 조정의 권위가 높아져서, 천하의 정사가 반드시 한군데서 나오고 여러 군데서 나오는 폐단이 없게 될 것입니다. 재상을 의논하는 이가 자신과 잘 맞는 이만 구하고, 그 자신을 바르게 해 주는 이를 구하지 않거나, 그가 아끼는 이만 취하고 그가 두려워할 만한 이를 취하지 않는다면, 이는 임금이 그 직분을 잃은 것입니다. 임금을 바르게 해야 할 이가 옳은 말을 드리고 그른 것을 버리게 하는 것을 일삼지 않고 임금의 말에 맞장구 치고 뜻을 따르는 것을 능사로 삼는다거나, 세상을 경영하고 일을 맡아보는 것을 마음으로 삼지 아니하고 자신을 인정받고 총애를 튼튼히 하는 것을 계책으로 삼는다면 이는 재상이 그 직분을 잃은 것입니다. 양자가 모두 그 직분을 잃은 것이니, 체통이 바로 서지 않고 기강(紀綱)이 서지 아니한다면, 좌우의 근신들이 모두 위세(威勢)를 훔치고 멋대로 휘둘러, 정체(政體)가 날로 어지러워지고, 국세(國勢)가 날로 약해질 것이니, 예기치 못한 화가 모르는 가운데 잠복해 있어도 위에서는 안일하게 여기고, 아래에서는 즐길 줄만 알아 아무도 이것을 염려할 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어찌 그 소이연(所以然)을 살펴 돌이켜 보아 이미 쓰였던 사람을 도태시키거나, 앞으로 쓸 사람을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을 능히 바르게 해 주고 두려워할 만한 이를 발탁한다면 반드시 자기 자신을 소중히 지킬 줄 아는 선비를 얻을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 사람에게 책임 지우는 것이 무겁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그 사람에게 책임 지우는 것이 무거우면, 그 사람은 옳은 말은 드리고 그른 것은 버리는 뜻을 다할 것이며, 뜻을 다해서 세상을 경영하고 일을 처리하는 마음을 실행할 것입니다. 또 천하의 곧고 믿음직하고, 용감하게 소신껏 말할 수 있는 선비를 발탁하여 대간(臺諫)과 급사(給舍)로 삼고, 그 의논을 참작하되 마음가짐이나 보고 듣는 것을 항상 어진 사대부(士大夫)에만 두고 뭇 소인들에게 두지 않는다면, 선악을 상벌하는 권리는 항상 조정에 있을 것이고 사문(私門)에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도 임금의 위엄이 서지 않아서 국세가 강하지 않거나, 강유(綱維 삼강(三綱)과 사유(四維))가 서지 않아서 형정(刑政)이 맑지 않거나, 민력이 넉넉하지 않아서 군정(軍政)이 닦이지 않는다는 것은 신은 믿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주자의 〈봉사(封事)〉 가운데 있는 말이기 때문에 신이라고 일컬었다.


맹자께서 제 선왕(齊宣王)을 만나서 말씀하시기를, “거실(巨室)을 지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공사(工師)를 시켜서 큰 나무를 구해 오게 할 것이고, 공사가 큰 나무를 얻으면 왕께서는 기뻐하면서 그 임무를 잘 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장인(匠人)이 그 나무를 깎아서 작게 만들면 왕께서는 성을 내고 그 나무가 제구실을 해내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해서 행하려고 하는 것인데, 왕께서 ‘네가 배운 것은 우선 버려두고 나를 따르라.’고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맹자》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거실(巨室)은 큰 집이요, 공사(工師)는 장인(匠人)의 우두머리이다. 장인은 뭇 목수요, 고(姑)는 우선이란 뜻이다. 이 글은 어진 이가 배운 것이 큰데 왕이 이를 작게 하고자 한다는 말이다.” 하였다.


지금 여기에 박옥(璞玉)이 있다면 그것이 만일(萬鎰)이 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옥인(玉人)을 시켜서 다듬게 할 것이다. 국가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네가 배운 것은 우선 버려두고 나를 따르라.” 한다면, 옥 다루는 사람에게 옥 다듬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주자가 말하기를, “박(璞)은 돌 속에 들어 있는 옥이요, 일(鎰)은 스무 냥이다. 옥의 값이 1만 일이란 말이다. 옥인(玉人)은 옥을 다듬는 공인(工人)이다. 옥을 감히 스스로 다듬지 못하고 잘 다듬는 이에게 부탁하는 것은 옥을 매우 아껴서 그런 것이다. 국가를 다스리면서 사욕을 따르고 어진 이에게 맡기지 않는다면, 이것은 국가를 아끼는 것이 옥을 아끼는 것만 못한 것이다.” 하였다. ○ 범씨(范氏)가 말하기를, “옛날의 어진 이는 항상 임금이 배운 대로 시행하지 않을까 걱정하였고, 세상의 용렬한 임금은 또 항상 어진 이가 그 임금의 좋아하는 대로 따라 주지 못할까 걱정한다. 그러므로 군신이 서로 만나는 것은 옛날부터 어렵게 여겼다. 공자와 맹자가 종신토록 임금을 만나지 못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하였다.


그 사람의 지혜는 쓰되 그 거짓된 것은 버리며, 그 사람의 용맹은 쓰되 그 성내는 것은 버리며, 그 사람의 어진 것은 쓰되 탐(貪)내는 것은 버린다. 《예기(禮記)》

진씨(陳氏)가 말하기를, “임금이 사람을 쓸 때에는 그 장점을 취하고 단점은 버려야 한다. 대개 중인(中人)의 재능은 장점이 있으면 반드시 단점도 있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이 말은 여러 관리를 다 온전한 인재로 얻을 수 없으니, 마땅히 그 장점만을 취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어진 재상(宰相)을 신중히 선발하여 책임을 맡겨 완수할 것을 요구할 때에, 백관과 유사(有司) 한 사람이 다 구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재상은 잘 발탁하지 못하면 정권이 적임자가 아닌 사람에게 맡겨져 조정이 혼란스러워질 것이고, 유사에게 반드시 재주를 구비할 것을 요구한다면 사람을 채용하는 길이 좁아서 여러 직책이 비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오늘날 사대부 중에서는 어진 이를 못 보겠다.” 하니, 정자가 말하기를, “사대부가 어질지 못하다고 해서는 안 되고, 조정에서 사람 쓸 적에 어진 이를 쓰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천하의 선비는 뜻이 조정에 있으나 재주가 부족한 이도 있고, 재주는 쓸 만하나 성의가 부족한 이도 있는데, 오늘날은 재주와 성의가 갖추어져야 사업을 이룰 수 있다.” 하였다.

이상은 임용의 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예경친신(禮敬親信)의 도에 대하여


정공(定公)이 묻기를,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 데 예로써 하면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도 충(忠)으로써 할 것입니다.” 하였다. 《논어(論語)》

주자가 말하기를, “두 가지는 다 이치상 당연한 것이니, 각자가 스스로 극진히 하려고 할 따름이다.” 하였다. ○ 여씨(呂氏)가 말하기를, “신하를 부릴 적에는 그가 불충(不忠)할 것을 걱정하지 말고, 그에게 예를 다하지 못할까 걱정할 것이며, 임금을 섬길 적에는 임금이 무례(無禮)할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나의 충성이 부족할까를 걱정해야 한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의 위에 있는 이는 사람들이 바라보면 알 정도가 되어야 하고, 남의 아래에 있는 이는 자기의 한 일을 칭찬하여 기록할 만할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임금은 신하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것이요, 신하는 임금에 대해 의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윤(伊尹)이 말하기를, ‘오직 내가 탕(湯)과 함께 일덕(一德)이 있었다.’고 하였다.” 하였다. 《예기》

진씨(陳氏)가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를 대할 때에 겉과 속이 한결같기 때문에 바라보면 알고, 신하는 임금을 섬길 때에 한결같이 충성을 다하기 때문에, 그 직분과 공업을 다 칭찬하여 기록할 만하니, 이것이 위와 아래에 의심도 없고, 의혹도 없는 이유이다.” 하였다.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날카롭기가 금(金)도 끊으며,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냄새가 난초 향기 같다. 《주역》 〈계사(繫辭)〉

주자가 말하기를, “이 말은 누구도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하지 못하고 그 말에 맛[味]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 성재 양씨(誠齋楊氏 양만리(楊萬里))가 말하기를, “금석(金石)은 지극히 굳은 물건이나 마음보다는 굳지 못하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돌도 깨뜨릴 수 있고 금도 꺾을 수 있다. 보통 사람이 마음을 같이해도 금석을 뚫는데, 군신이 마음을 같이하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훈(薰 좋은 냄새 나는 풀)과 유(蕕 악한 냄새 나는 풀)가 같은 그릇에 있으면 어린아이라도 그 냄새를 분별할 수 있으니, 이것은 그 냄새가 같지 않기 때문이요, 남산의 난초를 가져다 북산의 난초와 섞으면, 열 사람의 황제(黃帝)도 그 냄새를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니, 이것은 그 냄새가 같기 때문이다.” 하였다.


《시경》에 이르기를, “유유(呦呦)한 사슴의 울음소리여, 들에서 풀을 뜯어 먹는구나. 내게 아름다운 손님이 왔으니 비파를 퉁기고 피리를 부노라. 피리와 새황[簧] 불어 폐백 담은 바구니[筐]를 받들고[承] 손님께 드리오니[將], 손님은 나를 좋아하여 큰 도[周行]를 보여 주네.” 하였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녹명(鹿鳴)〉

주자가 말하기를, “유유(呦呦)는 화평한 소리를 형언한 것이요, 승(承)은 받드는 것이요, 광(筐)은 폐백을 담는 그릇이요, 장(將)은 행한다는 것이니, 광주리를 받들고 폐백을 올리는데 술을 마시면 손님에게 술을 권하여 보내고 음식을 먹으면 손님에게 배불리 먹도록 음식을 권하는 것이다. 주행(周行)은 큰 도이다. 이 시는 빈객을 영접하여 연회하는 시이다. 빈객은 본국의 신하이거나 제후의 사신이다. 대개 군신의 분수는 엄(嚴)한 것을 주로 하고, 조정의 예는 공경하는 것을 주로 한다. 그러나 엄숙하고 경건한 것만 한결같이 하고 정이 통하지 못하면 충고하는 도움을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선왕이 먹고 마시는 일로 모일 적에 연회의 예를 만들어 상하의 정을 통하게 하였는데, 그때 〈녹명(鹿鳴)〉을 불러 흥을 일으켰다. 그 예의의 두터움이 이와 같으니, 아마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여 나에게 대도(大道)를 보여 준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예기》에 이르기를, ‘사사로운 은혜는 덕이 될 수 없으므로, 군자는 사사로운 은혜에 머물지 않는다.’ 하였으니, 대개 임금이 군신과 빈객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자기에게 대도를 보여 주는 것이요, 사사로운 은혜를 덕으로 삼지 않는다. 아, 이것이 화락하면서도 음란하지 않는 소이(所以)일 것이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신이 친근하지 못하면 백성이 편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충(忠)과 경(敬)이 부족하고, 부귀가 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신이 다스려 주지 않으면 가까운 신하가 편당을 만들 것이다. 대신은 공경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백성의 사표이기 때문이며, 가까운 신하는 삼가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백성의 길[道]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예기(禮記)》

진씨(陳氏)가 말하기를, “대신이 친애와 신임을 받지 못하면 백성이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편안하지 못하다. 대개 이것은 임금에 대한 신하의 충성이 부족하거나, 신하에 대한 임금의 공경이 부족한 것인데, 이는 다만 부귀가 너무 지나쳐서 그럴 뿐이다. 이 때문에 가까운 신하들이 서로 편당을 짓고 대신의 권리를 빼앗아 그 일을 다스리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공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백성이 바라는 의표(儀表)가 되기 때문이요, 가까운 신하가 삼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임금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이들에게 달려 있어서, 바로 백성이 그것을 따라 도로 삼기 때문이다.” 하였다. ○ 대신을 신임하되 그 사이에 아무 틈이 없으면 일을 당해도 현혹되지 않는다는 어떤 이의 말이 있는데, “대신이 어질면 모르겠으나 만약에 불행히도 조고(趙高)ㆍ주이(朱异)ㆍ우세기(虞世基)ㆍ이임보(李林甫) 같은 무리가 있다면, 추양(鄒陽)이 이른바, ‘편벽되게 듣는 데서 간사한 것이 생기고, 한 사람에게 맡기는 데서 난이 일어난다.’는 말과, 범저(范雎)가 이른바, ‘어진 이를 질투하고 재사(才士)를 미워하여 아래를 막고 위를 가려서, 사사로운 짓을 하더라도 임금은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 또 어찌 염려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주자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몸을 닦으면 보는 것이 밝아지고 듣는 것이 또렷해져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에서 속지 않으며, 어진 이를 존경하면 대신의 자리에 두는 자에 반드시 이와 같은 자가 섞이지 않을 것이다. 불행히도 혹시 실수가 있다면 속히 좋은 사람을 구해서 바꾸면 될 뿐이다. 어찌 그가 간악한 짓을 해서 나라를 패망하게 할 줄 알면서, 대신의 지위에 그대로 두어서 문서를 처리하는 직책을 맡게 하겠으며, 또 소신(小臣)들이 살피는 것만 믿고 이런 일을 막을 수 있겠는가. 대개 어진 이를 구하기는 힘들어도 얻으면 편안한 것이니, 맡긴다면 의심하지 말고 의심이 나면 맡기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옛 성군(聖君) 현상(賢相)들이 서로 성의를 합해서 양자가 그 도를 서로 다하여 광명정대한 업을 이룬 소이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위에서 꺼리고 막고 두려워하고 방비하는 것이 더욱 치밀해질수록, 그 현혹됨이 더욱 심해질 것이요, 아래에서 속이고 가리는 것이 더욱 교묘해질수록 해됨이 더욱 심할 것이다. 불행히 간악한 신하의 모책이 이루어지면 그 화는 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음이 있을 것이다. 다행히 임금의 위엄이 우세하면 소위 편벽되게 듣고 한 사람에게만 맡겨 아래를 막고 위를 가리는 간악한 자가 대신 가운데에는 없겠지만 좌우의 근신 가운데에는 있을 것이니, 그 나라의 화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 위태로운 일이로다.” 하였다.

이상은 예경친신(禮敬親新)의 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소인(小人)을 멀리하는 도에 대하여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서리를 밟으면 굳은 얼음이 이른다.” 하였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초륙(初六)〉

정자가 말하기를, “음(陰)이 처음 엉기어 서리가 되는데, 서리를 밟으면 음이 차츰 성하여 굳은 얼음에 이를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말은 소인이 처음에는 비록 미약하다 할지라도 자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자라면 성해지기 때문이다.” 하였다.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餘慶]가 있을 것이요, 불선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남은 재앙[餘殃]이 있을 것이니, 신하가 그 임금을 죽이거나 자식이 그 아비를 죽이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원인이 생긴 것이 아니다. 종전부터 점차적으로 내려왔는데, 일찍 분변하지 못해서이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성(鄭聲)을 내쫓고[放] 영인(佞人)을 멀리할 것이니 정성은 음탕하고 영인은 위태롭기[殆] 때문이다.” 하였다. 《논어(論語)》

주자가 말하기를, “방(放)은 금절(禁絶)한다는 것이요, 영인(佞人)은 비굴하고 아첨하여 말만 잘하는 사람이며, 태(殆)는 위태롭다는 뜻이다.” 하였다. ○ 장씨(張氏)가 말하기를, “정성과 영인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지킬 바를 잃게 하는 까닭에, 내쫓고 멀리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 범씨(范氏)가 말하기를, “영인이란 그저 아첨하고 순종할 뿐인데 가까이하면 반드시 위태롭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영인은 의(義)가 있는 곳을 모르고 이욕(利欲)만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교묘한 말로 아첨하며 꼭 패역(悖逆)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지위를 잃을까 근심하는 데 이르러서는 무슨 짓이라도 못할 짓이 없어서, 마침내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이른다. 이런 자도 모두 처음에는 아첨하여 잘 보이고 순종하던 자들이다.” 하였다. ○ 장씨(張氏)가 말하기를, “소인으로서 국가에 화를 주는 사람으로는 부드럽게 악한 이가 더욱 두렵다. 강하게 악한 이는 사납고 교활하고 강포하기 때문에, 재주가 평범한 임금이라도 오히려 두려워하고 멀리하여 해가 그래도 적지마는, 부드럽고 간사한 자는 아첨해서 잘 보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뻐하고 사랑하여 가까이하게 하니, 총명한 임금도 오히려 미혹되어 나라가 망하여도 끝내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공자께서 아첨하는 자를 들어서 말한 것은 소인 중에서도 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일찍이 금중(禁中)의 나무를 구경하다가 말하기를, “아름다운 나무로구나.” 하니,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인 우문사급(宇文士及)도 곁에서 그 나무를 찬탄해 마지않았다. 그러자 태종이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위징(魏徵)이 전에 나에게 영인을 멀리하라고 권했었는데, 영인이 누군지 몰랐는데, 이제야 참으로 알았구나.” 하였다. 그러자 사급(士及)이 사과하여 말하기를, “남아(南衙)의 군신들은 폐하를 면접하여서도 반박하고 조정에서도 언쟁을 하여 폐하께서 꼼짝을 못하셨습니다. 지금 신이 다행히 좌우에 있으면서 조금이나마 폐하의 마음에 맞춰 드리지 않는다면 귀하기가 천자가 되었다 한들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의 뜻이 풀렸다. 사신(史臣)이 이 말에 대해 평하기를, “태종은 사급이 아첨하는 것을 알고도 물리치지 못하였다. 재주가 평범한 임금은 아첨에 의혹되지 않으려 해도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진씨(眞氏)가 말하기를, “사급의 말이 임금에게는 짐독(鴆毒)과 같은 것이다. 대개 성스럽고 밝은 세상에는 충성스럽고 바른말하는 이가 조정에 가득 차서 임금의 언동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즉시 경계하는 말을 하니, 천자라는 귀한 지위에서 무료할 것 같지만 매양 몸을 지극히 편안하고 영화스러운 곳에 두게 된다. 반대로 혼란스러운 세상에는 아첨하는 말이 귀에 차서 사치를 다하고 욕심껏 하되, 아랫사람으로 감히 간하는 이가 없으니, 천자라는 귀한 지위에서 만족스러울 것 같지마는, 매양 몸을 지극히 위태롭고 어려운 가운데 두게 된다. 그러면 임금으로서는 어느 것을 택해야 하겠는가. 사급 같은 이는 망한 수(隋)나라의 잔챙이니, 심하게 책망할 것도 없거니와, 참으로 애석한 것은 태종이 그 아첨하는 것을 알고도 버리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잠계(箴戒)가 많은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이는, 특히 안으로는 욕망이 많으면서 밖으로는 인의(仁義)를 베푸는 체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몸을 닦아서 학문을 좋아하고 선한 것을 즐긴다면, 잠계가 귀를 기쁘게 하는 것은 추환(芻豢) 풀을 먹는 마소나 곡물을 먹는 개나 돼지 이 입을 기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무료하다 생각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안으로는 수기(修己)의 실상이 없으면서 거짓으로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이는 잠계가 오면 억지로 따르는 척하지만, 마음으로는 실로 즐거워하지 않으니, 어찌 오래도록 변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당 현종(唐玄宗)이 한휴(韓休)를 써서 나라가 피폐해지고 마침내 천보(天寶)의 난을 불러들인 까닭입니다.


목왕(穆王)이 백경(伯冏)에게 명하기를, “간사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시종의 관직[耳目之官]에 두거나, 선왕의 법이 아닌 것으로써 임금을 인도하지 말라.” 하였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경명(冏命)〉

채씨(蔡氏)가 말하기를, “이 글은 대개 목왕이 스스로 그 덕이 견고하지 못한 것을 알아서 좌우의 사람들이 곁에서 이단(異端)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방탕하게 할까 두려워서 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마음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는, 조보(造父)로 하여금 말을 몰게 하여 천하를 두루 유랑(流浪)하였다. 미리 경계할 바를 알아 근심과 생각이 깊고 길었는데도, 오히려 자신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사람 마음이 잡으면 있고 놓으면 사라지는 그 무상함이 두렵도다.” 하였다.


자장(子張)이 명철(明哲)한 것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차츰차츰 스며 들어오는[浸潤] 참소[譖]와 절박한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명철하다고 말할 수 있고, 차츰차츰 스며 들어오는 참소와 절박한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보는 것이 원대하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논어(論語)》

주자가 말하기를, “침윤(浸潤)이란 물이 차츰차츰 스며 들어오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점점 젖어 들어 갑작스럽지 않은 것이요, 참(譖)은 남의 행실을 헐뜯는 것이요, 부수(膚受)란 살과 살갗에 닿는 것으로 이해(利害)가 몸에 절실한 것을 말한 것이다. 소(愬)는 자기의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것이다. 남을 헐뜯는 말이 갑작스럽지 않게 차츰차츰 젖어 들어오면, 듣는 이가 그 들어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깊이 믿으며, 원통한 것을 하소연하는 자가 절박하게 하면, 듣는 이가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갑자기 동정심을 발하게 된다. 이 두 가지는 살피기가 어려운데 이것을 잘 살피면, 그 마음이 밝아 가까운 데 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혼란이 처음 생겨나는 것은 불신의 실마리를 받아들일[涵] 때요, 난이 또 생겨나는 것은 군자가 참언을 믿을 때이다. 군자가 참언에 진노하면 난이 빨리[遄] 그칠[沮] 것이고, 군자가 어진 이의 말에 기뻐하면 난이 빨리 그칠 것이다.” 하였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교언(巧言)〉

주자가 말하기를, “참시(僭始)란 것은 불신(不信)의 발단이요, 함(涵)이란 것은 용납한다는 것이며, 군자는 왕을 가리키는 것이요, 천(遄)은 빠른 것이요, 저(沮)는 그치는 것이요, 지(祉)는 기뻐한다는 말이다. 난이 일어나는 까닭은 참언하는 자의 믿을 수 없는 말이 처음 들어갔는데, 왕이 용납하고 그 진위(眞僞)를 살피지 않기 때문이요, 난이 또 일어나는 것은 그 참언을 믿고 그것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군자가 참언하는 자의 말을 듣고 만일 노하여 그를 책하면, 난은 빨리 그칠 것이요, 어진 이의 말을 듣고 기뻐하여 그 말은 용납하여도 난이 빨리 그칠 것이다. 그런데 용납하는 데 결단이 없어서 참언과 신언(信言)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참언하는 자는 더욱 기세등등해지고, 군자는 더욱 병들게 된다.” 하였다. ○ 소씨(蘇氏)가 말하기를, “소인이 그 임금에게 참소할 적에는 반드시 차츰차츰 그 말이 스며 들어가게 하는데, 처음에는 진언(進言)을 하여 시험을 해보아 임금이 용납하고 물리치지 않으면 그 말을 꺼리지 않는 줄을 알고 다시 참언을 하는데, 이렇게 하여 임금이 믿게 되면 난이 일어난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임금이 진실로 어진 이를 쓰려고 하면 반드시 소인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런 뒤라야 군신의 사이가 시종 간격이 없어서 치도(治道)를 이룰 수 있습니다. 만일 악을 엄격히 미워하지 아니하여, 소인으로 하여금 참설(讒舌)을 놀리게 한다면 군자가 어찌 편안히 조정에 서겠습니까. 대개 참언하는 자는 남의 거동을 잘 살피고 갖가지로 태도를 바꾸어 양(陽)을 돕고 음(陰)을 누르기도 하고, 처음에는 칭찬을 하다가도 나중에는 훼방을 하며, 겉으로 번지르르하게 꾸미고 교묘하게 명목을 세우며, 독실하게 행하는 이를 가리켜 위선(僞善)이라고 하고, 도를 지키는 자를 가리켜 위학(僞學)이라고 하며, 은거하여 뜻을 숭상하는 사람을 가리켜 세상을 업신여긴다고 하고,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 나가기를 쉽게 하는 사람을 가리켜 임금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짓이라고 하며, 조정에서 바른말 하는 사람을 가리켜 곧은 것을 판다[賣]고 하고, 국사에 마음을 다하는 사람을 가리켜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른다고 하며, 어진 이에게 협력하는 사람을 가리켜 붕당(朋黨)이라고 하고, 묵은 폐단을 개혁하는 사람을 가리켜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하니, 선량한 사람을 모함하는 방법을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임금으로서 만일 깊이 미워하여 이것을 통렬히 끊어 버리지 않고, 함께 수용하여 같이 기르는 계책을 쓴다면, 점점 그 꾀에 빠져 마침내 뭇 소인들은 떼 지어 모여들고 군자는 멀어질 것입니다. 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상은 소인을 멀리하는 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윤(伊尹)이 유신(有莘)의 들에서 밭을 갈고 살면서 요순의 도를 즐거워하여, 의가 아니고 도가 아니면 녹으로 천하를 다 준다 하더라도 돌아다보지 않았고, 말 천 사(千駟 수레 하나에 말 4마리가 달린 것을 1사(駟)라 함)를 매어 놓고 기다린다 하여도 보지 않았으며, 의가 아니고 도가 아니면 한 오라기의 풀도 남에게 주지 않고 한 오라기의 풀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 탕왕(湯王)이 사람을 시켜 폐백을 보내 그를 초빙하니, 태연하게 말하기를 태연하다고 함은 욕심 없이 만족하는 모양이다. “내가 어떻게 탕왕의 초빙하는 폐백을 받겠는가. 내가 어찌 밭 가운데 살면서 요순의 도를 즐거워하는 것과 같겠는가.” 하였다. 탕왕이 세 번째로 사람을 시켜 초빙하러 가니, 그제서야 태도를 확 바꾸어 말하기를, “내가 밭 가운데 살면서 이렇게 요순의 도를 즐거워하는 것이 어찌 이 임금이 요순의 임금이 되게 하는 것만 같겠으며, 이 백성이 요순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만 같겠는가. 내가 어찌 몸소 직접 만나는 것만 같겠는가. 하늘이 이 백성을 낳을 적에 선지자(先知者)로 하여금 후지자를 일깨워 주게 하고, 선각자(先覺者)로 하여금 후각자를 일깨워 주게 하였다. 그러나 나는 천민(天民) 중에 선각자이다. 나는 앞으로 이 도로써 이 백성을 일깨워 주려 한다. 내가 그들을 일깨워 주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하였다. 그는 천하 백성들 중 필부필부(匹夫匹婦)까지도 요순의 덕택을 입지 않으면 마치 자기가 그들을 웅덩이 속으로 밀어 넣는 것같이 생각하였으니, 그가 천하의 중책을 자임(自任)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탕왕을 도와 천하에 왕 노릇하게 하였는데 탕왕이 붕(崩)하자 태정(太丁)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고, 탕의 태자인데 임금이 되지 못하고 죽었다. 외병(外丙)은 2년을 왕위에 있었고, 중임(仲任)은 4년을 왕위에 있었으며, 외병과 중임은 다 태정의 아우이다. 그 뒤가 태갑(太甲)인데, 태정의 아들로 왕위를 이었다. 탕왕의 전형(典刑)을 전복하자 이윤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추방하였다. 그러자 3년 만에 태갑은 허물을 회개하여 스스로 원망하고 스스로를 다스려서[艾], 인(仁)에 처하고 의(義)에 옮기어 이윤의 교훈을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박(亳 은나라 서울)으로 돌아왔다. 이윤은 정권을 태갑에게 돌리고 나서, 벼슬을 그만두고 떠나려 할 적에 태갑의 덕이 순일하지 못하여 비인(非人)을 임용할까 염려하여 〈함유일덕(咸有一德)〉 《서경(書經)》의 편명이다. 을 지어 훈계하였다. ○ 낭야(琅邪) 땅의 제갈량(諸葛亮)은 양양(襄陽)의 융중(隆中)에 우거하면서 늘 스스로 관중(管仲)과 악의(樂毅 중국 전국 시대의 명장)에게 비교하였으나, 당시 사람들이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았다. 소열제(昭烈帝 중국 삼국 시대의 유비)가 형주(荆州)에 있을 때에 양양의 사마휘(司馬徽)에게 선비를 물으니, 사마휘가 말하기를, “유생(儒生)이나 속사(俗士)가 어찌 시무(時務)를 알겠습니까. 시무를 아는 것은 준걸(俊傑)이어야 하는데 이 부근에 복룡(伏龍)과 봉추(鳳雛)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였다. 소열이 묻기를, “그게 누구인가?” 하니, 그는 말하기를, “제갈공명(諸葛孔明 제갈량)과 방사원(龐士元 사원은 방통(龐統)의 자(字)임)입니다.” 하였다. 서서(徐庶)가 소열제에게 말하기를, “제갈공명은 와룡(臥龍)인데 장군은 어찌 그를 만나 보지 않으십니까?” 하니, 소열제가 말하기를, “그대가 같이 데리고 오시오.” 하였다. 서서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아가서 보아야지 굽히고 오게 할 수 없습니다. 장군이 마땅히 찾아가셔서 보아야 합니다.” 하였다. 소열제는 이에 제갈량에게 나아가기를 무려 세 번이나 하여 비로소 만나 보고는, 적을 토벌하고 나라를 부흥시키는 계책을 물어 훌륭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제갈량과 좋은 관계를 갖고 날로 친밀해졌다. 제갈량은 소열제를 도와서 익주(益州)를 취하여 다스렸고, 소열제가 즉위하자 양을 승상(丞相)으로 삼았다. 소열제가 임붕(臨崩)할 때, 제갈량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재능이 조비(曹丕)보다 10배는 뛰어나니, 반드시 국가를 편안하게 하여 마침내 대사를 정할 것이다. 사자(嗣子)를 도울 만하거든 돕고, 만일 그가 임금 노릇을 못하겠거든 그대가 스스로 취하여 임금을 해도 좋다.” 하였다. 그러자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신은 감히 고굉(股肱 가장 믿어주는 신하)의 힘을 다하고 충정(忠貞)의 절개를 본받아 죽음으로써 그 뜻을 이어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제갈량이 후제(後帝)에게 표(表)를 올려 말하기를, “신은 본래 서민(庶民)으로 몸소 남양(南陽)에서 밭을 갈고 살며 난세에 구차히 성명(性命)을 보존하면서 제후에게서 영달을 구하지 않았는데, 선제(先帝)께서 신을 비천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되게도 스스로 몸을 굽혀, 세 번이나 신의 초려(草廬)로 방문하여 신에게 당세의 일을 물으셨습니다. 이에 감격하여 선제를 위해 힘쓰기로 허락하였습니다. 선제께서 신이 근신하는 것을 아시고 임붕할 때에 대사를 부탁하셨는데, 명을 받은 후로 밤낮으로 걱정하면서 부탁하신 일에 대해 효과가 없어 현명한 선제께 폐가 될까 두렵습니다. 이제 마땅히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북으로 중원(中原)을 평정하여 한실(漢室)을 부흥시키고, 옛 도읍에 돌아와야 하니, 이것이 신이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하는 직분입니다. 신은 죽도록까지 몸과 마음을 다하겠사오나, 성패(成敗)와 이둔(利鈍)은 신이 미리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하고는, 군사를 내어 위(魏)나라를 치다가 군중에서 죽었다.

신이 생각건대, 어진 이는 국가의 기용(器用)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면서 어진 이를 구하지 않는 것은 노[楫]를 버리고 하천을 건너려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이윤과 제갈량에 대한 출처의 사적을 위에서 열거하였는데, 이것으로도 그 나머지는 알 수 있습니다. 이윤이 유신(有莘)의 들에 있을 때에 몸소 밭 갈고 도를 즐거워하여 당세에 뜻이 없는 것 같았고, 성탕이 재차 초빙하러 올 때까지도 뜻이 확고했었는데, 매우 간절하게 청하고 그 정성이 더욱 드러난 뒤에야 마음을 확 돌려 부르는 데 응하였습니다. 그래서 뜻을 같이하고 덕이 합쳐져서 하늘까지 감동시켰습니다. 수대에 걸쳐 재상을 역임하고 임금을 추방하기까지 하였으나 혐의를 받지 않았고, 진실한 덕을 끝까지 다하고 벼슬을 그만두게 되어서도 오히려 간절하게 훈계하여,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습니다. 제갈량은 융중(隆中) 땅에 있을 때는 무릎을 안고[抱膝] 길게 휘파람을 불면서 우주에 눈을 높이 두고 생을 마칠 생각이었으므로, 소열제가 두 번째 찾아가도 오히려 은둔(隱遁)할 생각이 견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를 좋아하여 세 번이나 찾아가기를 게을리하지 않은 뒤에야 마음을 돌리고 몸을 바쳤습니다. 계책이 서로 부합하자 재능을 다하고 정성을 극진히 함으로써 나라가 회복하기를 기약하였습니다. 어린 임금[幼主 후제인 유선(劉禪)]을 도우면서부터는 정책이 자기에게서 나왔는데 누구도 이간하는 말이 없었고, 강대한 위나라도 겁을 내었으며, 거의 예악(禮樂)의 교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두 사람은 비록 도에는 정조(精粗)의 차이가 있고 덕에는 대소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임금을 믿어 충성을 다한 것은 한가지이니 후세사람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어찌 두 사람의 현명한 것만으로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실은 임금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건대, 탕왕이 이윤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마침내 으뜸가는 성인을 찾아 그와 함께 온 힘을 다했다.” 하였으니, 지극히 감복한 것입니다. 소열제가 제갈량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 하였으니, 그가 매우 즐거워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신이 이렇게 서로 마음이 맞으니 두 사람이 어찌 독실하게 서로 돕지 않았겠습니까. 후세의 임금은 성탕이나 소열제처럼 어진 이를 좋아하는 이가 없기 때문에, 성현의 학자와 호걸의 재사(才士)가 흔히 자기 집에서 늙어 버리게 되고, 시국을 엿보고 세력을 알아서 구차하게 아부하여 용납되기를 바라는 이가 도도(滔滔)하게 뜻을 얻게 되면, 세상을 다스리고자 한들 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임금은 반드시 먼저 궁리(窮理)와 지언(知言)을 하여 권도(權度)가 틀리지 않은 뒤에 어진 이를 알아볼 수 있고, 아는 것이 아주 밝아서 폐부(肺腑)까지 통찰한 뒤에 서로 믿을 수 있으며, 믿음이 아주 돈독하여 부절(符節)처럼 합해져야만 서로 기뻐할 수 있고, 아주 친밀하게 기쁨을 나누고 은혜가 부자(父子)같이 되어야만 위임할 수 있으며, 그에게 아주 전적으로 위임하여 딴 마음을 먹지 않게 하여야만 도를 행하고 다스림을 지극히 하는 일을 하고 싶은 뜻대로 하여 한 시대를 훈도(薰陶 임금이 백성을 교화함)하고 만세에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군신이 서로 만나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오제삼왕(五帝三王)도 모두 이 도를 말미암았으니 후왕은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후세에 어느 정도의 평화를 이룬 임금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쓰지 않고 혼자서 다스린 이는 없었습니다. 다만 임금이 선왕의 성덕에 미치지 못하고, 신하가 고인의 현명한 것만 못하기 때문에, 공렬(功烈)이 비열해지는 것을 면하지 못할 뿐입니다. 이와 반대인 경우는 수기(修己)의 공부가 없는 데다 사람을 알아보는 통찰력이 어두워, 허명(虛名)을 취하기도 하고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기도 해서, 좋아하더라도 끝까지 하지 못하고, 맡기면서도 의심을 하며, 의논이 시대에 맞지 않는데도 작록으로 붙들어 매두고, 받드는 것이 임금을 그릇되게 하여도 충량(忠良)하다고 하며, 국사가 날로 그릇되어도 상하가 모두 근심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이것을 징계하는 사람을 의심하고 꺼려, 자기 마음대로 하고 남에게 맡기지 않으며, 널리 밝게 보고 듣지 못하고 세세한 일까지도 다 간섭하여 제 직분을 다할 수 없게 하고, 정치를 망치고 온갖 업무를 내버려 두니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망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임금이 마땅히 깊이 경계하여야 할 것이니,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잘 살피시옵소서.



 

[주D-001]대학(大學) : 이 내용은 《대학》 전(傳) 10장에 보인다.
[주D-002]서명(西銘) : 《장자전서(張子全書)》에 실려 있다.
[주D-003]정공(定公)이 …… 하였다 :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보인다.
[주D-004]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 〈위정(爲政)〉에 보인다.
[주D-005]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論語)》 〈학이(學而)〉에 보인다.
[주D-006]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보인다.
[주D-007]서경(西京) : 한 문제(漢文帝)가 서경(西京)에 도읍을 정했으므로 그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주D-008]자공(子貢)이 …… 하였다 :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보인다.
[주D-009]공자께서 …… 하였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에 보인다.
[주D-010]집 …… 문다 : 《주례(周禮)》 〈지관사도 하(地官司徒下)〉에 보인다.
[주D-011]또 …… 하였다 : 《맹자(孟子)》 〈진심 하(盡心下)〉에 보인다.
[주D-012]정치는 …… 없다 : 《공자가어(孔子家語)》 〈애공문정(哀公問政)〉에 보인다.
[주D-013]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보인다.
[주D-014]그 …… 못한다 : 《논어(論語)》 〈요왈(堯曰)〉에 보인다.
[주D-015]그 …… 있겠는가 :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보인다.
[주D-016]남이 …… 사람이다 :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보인다.
[주D-017]뭇사람이 …… 한다 :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보인다.
[주D-018]주위에서 …… 것이다 :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보인다.
[주D-019]맹자께서 …… 하였다 :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보인다.
[주D-020]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보인다.
[주D-021]공자께서 …… 하였다 : 《효경(孝經)》 〈사군장(事君章)〉에 보인다.
[주D-022]맹자께서 …… 하였고 :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보인다.
[주D-023]나는 …… 없다 :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보인다.
[주D-024]공자께서 …… 하였다 : 《예기(禮記)》 〈표기(表記)〉에 보인다.
[주D-025]맹자께서 …… 하였다 :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보인다.
[주D-026]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論語)》 〈양화(陽化)〉에 보인다.
[주D-027]말을 …… 드물다 : 《논어(論語)》 〈학이(學而)〉에 보인다.
[주D-028]자색(紫色)이 …… 미워한다 : 《논어(論語)》 〈양화(陽化)〉에 보인다.
[주D-029]만장(萬章)이 …… 하였다 : 《맹자(孟子)》 〈진심 하(盡心下)〉에 보인다.
[주D-030]맹자께서 …… 하였습니다 : 《맹자(孟子)》 〈진심 하(盡心下)〉에 보인다.
[주D-031]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보인다.
[주D-032]덕이 …… 아니다 :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보인다.
[주D-033]군자는 …… 있다 :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보인다.
[주D-034]주자가 …… 편지에서 : 《회암집(晦庵集)》 〈여승상유정서(與丞相留正書)〉를 가리킨다.
[주D-035]사람의 …… 있다 :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보인다.
[주D-036]나타난 …… 것이다 :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보인다.
[주D-037]애공(哀公)이 …… 하였다 :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보인다.
[주D-038]어진 …… 잘못이다 : 《대학(大學)》 전(傳) 10장(章)에 보인다.
[주D-039]봉사(封事) : 《회암집(晦庵集)》 〈무신봉사(戊申封事)〉에 보인다.
[주D-040]천보(天寶)의 난 : 당나라 중기인 755년에서 763년 사이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 등이 주동하여 일으킨 난을 가리킨다.
[주D-041]상(商)나라의 …… 있다 : 《시경(詩經)》 〈대아(大雅) 탕(蕩)〉에 보인다.
[주D-042]공자께서 …… 하였다 :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보인다.
[주D-043]중궁(仲弓)이 …… 하였다 :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보인다.
[주D-044]맹자께서 …… 하였다 :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보인다.
[주D-045]선을 …… 있겠는가 :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보인다.
[주D-046]맹자께서 …… 하였다 :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보인다.
[주D-047]그 …… 버린다 :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보인다.
[주D-048]정공(定公)이 …… 하였다 : 《논어(論語)》 〈팔일(八佾)〉에 보인다.
[주D-049]공자께서 …… 하였다 : 《예기(禮記)》 〈치의(緇衣)〉에 보인다.
[주D-050]공자께서 …… 하였다 :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보인다.
[주D-051]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 보인다.
[주D-052]당(唐)나라 태종(太宗)이 : 이 내용은 《대학연의(大學衍義)》 〈격물치지지요(格物致知之要) 2 변인재(辨人材)〉에 보인다.
[주D-053]자장(子張)이 …… 하였다 :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보인다.
[주D-054]이윤(伊尹)이 …… 같았다 :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보인다.
[주D-055]탕왕을 …… 돌아왔다 :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보인다.
[주D-056]이윤은 …… 훈계하였다 : 《서경(書經)》 〈 함유일덕(咸有一德)〉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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