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수기(修己) 중(中)

 

제5장 성실(誠實)

신이 생각건대, 궁리(窮理)가 분명해진 뒤에 궁행(躬行)할 수가 있고, 반드시 마음이 진실하여야만 비로소 실제 공부에 착수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성실(誠實)은 궁행의 근본이 됩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충(忠)과 신(信)을 주(主)로 하라.” 하였다. 《논어》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스스로 양심(良心)에 충실한 것을 충(忠)이라 하고, 진실한 것을 신(信)이라 한다. 충은 진실한 마음이고 신은 진실한 일이다. 사람이 충하고 신하지 못하다면 매사에 모두 실상이 없을 것이다. 악을 행하기는 쉽고 선을 행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이 충과 신을 위주로 해야 한다.” 하였다.


자장(子張)이, 행실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이 충하고 신하며, 행동이 돈독하고 경건하면, 비록 오랑캐[蠻貊] 같은 야만국이라도 뜻대로 행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이 충실하거나 성실하지 못하여, 행동이 돈독하거나 경건하지 못하다면, 비록 자기가 사는 향리(鄕里)에선들 뜻대로 행할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자장의 뜻은 밖으로 행실이 알려지는 데 있기 때문에 공자는 자기 몸에서 돌이키도록 말한 것이다. 독(篤)은 도탑다는 뜻이다.” 하였다. ○ 남헌 장씨(南軒張氏 장식(張栻))가 말하기를, “독경(篤敬)은 경(敬)을 돈독히 하는 것이다.” 하였다.


서 있을 때[其] 앞에 끼어드는 것을 보고, 수레에 있을 때 그 멍에[衡]에 의지한 것을 보아야 하니, 그런 뒤에야 갈 수 있다 하였다. 자장(子張)은 이 말을 잊지 않으려고 큰 띠[紳]에 써 두었다.

주자가 말하기를, “그[其]란 충(忠)ㆍ신(信)ㆍ독(篤)ㆍ경(敬)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참(參)은 읽기를 ‘가서 참여하지 말라.[毋徃參]’의 참(參)과 같이 읽는다. 〈곡례(曲禮)〉에 보면,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거나 서 있을 때에 내가 가서 끼어 셋이 되지 말라.” 하였다. 나에게 끼어드는 것을 말한다. 형(衡)은 멍에이다. 그 말의 뜻은 충ㆍ신ㆍ독ㆍ경을 항상 마음속에 잊지 않게 두고, 내가 있는 곳에 따라 늘 보이는 것처럼 하여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말은 반드시 충(忠)ㆍ신(信)하게 하고자 하고, 행동은 반드시 독(篤)ㆍ경(敬)하게 하고자 하여, 그것을 항상 마음속에 두고 잊지 않아 마음에서나 눈앞에서나 나타나게 할 뿐이다.” 하였다. 아주 잠깐 동안이라도 떠나려 해도 떠날 수 없게 된 뒤에야,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자연히 충ㆍ신ㆍ독ㆍ경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고, 그리하여 오랑캐의 야만국에서도 뜻대로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紳)은 큰 띠를 드리운 것인데, 띠에 기록한다는 것은 그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큰 임무를 맡으려면 모름지기 독실하여야 한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옛날 배우는 자는 자기 때문에 하였는데, 오늘날 배우는 자는 남 때문에 한다.” 하였다. 《논어》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자기 때문에 한다는 것은 자기에게서 터득하고자 하는 것이요, 남 때문에 한다는 것은 남에게 알려지고자 한다는 것이다. 옛날 배우는 자는 자신에게서 터득하는 학문을 하였어도 결국엔 남까지 이루어 주는데 이르렀으나, 오늘날 배우는 자는 남을 의식해 공부하여 결국엔 자기 자신마저 상실하는 데 이르렀다.” 하였다. ○ 또, “명예를 추구하는 데 뜻을 두면 큰 근본을 잃게 되니, 다시 배운들 무엇 하겠는가. 명예를 좋아하는 것과 이익(利益)을 좋아하는 것이 비록 청(淸)ㆍ탁(濁)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 마음이 이익을 추구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였다. ○ 경원 보씨(慶源輔氏 보광(輔廣))가 말하기를, “나 때문에 하는 공부와 남 때문에 하는 공부 사이에는 털끝만 한 차이가 날 뿐이다. 그러나 자기에게서 터득하고자 한다면 남에게 알려질 필요가 없고, 남에게 알려지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자기에게서 터득할 필요가 없다. 자신에게서 터득하고자 하는 자는 마음을 잘 수렴하고 행동을 독실(篤實)히 하고, 남에게 알려지고자 하는 자는 가볍고 들떠서 천박하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배우는 자의 마음가짐의 득실(得失)에 대해 성현이 논한 설이 많다. 그러나 이 말처럼 간절하고 요약된 것은 없다. 이것을 명료하게 분변하여 날마다 반성한다면, 따라야 할 바에 어둡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뜻을 성실(誠實)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毋自欺]는 것이다. 악취(惡臭)를 싫어하듯 하며, 예쁜 여자[好色]를 좋아하듯 하는 것인데, 이것을 자겸(自謙) 흡족함[慊]이란 뜻이다. 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獨] 있을 때를 삼간다. 《대학(大學)》

주자가 말하기를, “그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은 자신을 수양하는 데 으뜸가는 일이다. 무(毋)는 금한다는 말이요. 스스로 속인다[自欺]는 것은 선(善)을 행하고 악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발할 때 참되지 못한 게 있는 것이다. 겸(謙)은 유쾌하고 만족스러운 것이다. 독(獨)은 남은 알지 못하고, 나만이 아는 곳이다. 그 말은, 스스로 수양하고자 하는 자가 선을 행해야 하고 악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마땅히 그 힘을 다하여 스스로를 속이지 않아서 악을 미워하기를 마치 악취를 미워하듯 하고, 선을 좋아하기를 예쁜 여자를 좋아하듯 하여, 버릴 것은 모두 시원스레 버리도록 힘쓰고, 얻을 것은 반드시 얻어서 스스로 자기 마음에 흔쾌하고 만족스러워 해야지 괜히 구차하게 겉으로만 남을 위하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참되고 참되지 않은 것은 남이 알 수가 없는 바요, 나만이 홀로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나만이 아는 바에서 삼가서 그 기미(幾微)를 살펴야 한다.” 하였다. ○ 또, “오훼(烏喙 독초(毒草)의 이름)를 먹을 수 없고, 물과 불[水火]은 밟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스스로 먹지도 밟지도 않는 것과 같으며, 추우면 옷을 더 입고자 하고, 배고프면 밥을 더 먹고자 하는 것과 같으니 절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과연 배고플 때 밥 먹고 싶듯이 추울 때 옷을 입으려 하듯이 선을 보고, 오훼를 먹어서는 안 되고 물과 불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듯이 악을 본다면, 이는 뜻이 스스로 성실한 것이다.” 하였다. ○ 또, “스스로를 속이는 자는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마땅히 선을 행해야 할 것을 알면서도 도리어 충분히 선을 행하는 데 이르지 못한다거나, 악을 행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리어 또 자기 스스로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하였다. ○ 또, “만일 9분(分)은 의리(義理)가 있다 하더라도 1분의 사사로운 뜻이 섞여 있다면, 이것은 곧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하였다. ○ 또, “선을 십분 다하였다 하더라도 1분이라도 좋지 않은 뜻이 그 사이에 잠재해 있다가 발동해서 나쁜 길을 따라 이런 뜻이 자라나게 되면, 그것은 실로 전면(前面)에는 선한 뜻이 있는 것 같으나, 실은 거짓된 것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학문은 어두운 방에서도 속이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하였다. ○ 유 충정공(劉忠定公)이 사마온공(司馬溫公)에게 묻기를, “평생을 두고 마음을 다하여 실천에 힘쓸 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니, 사마온공이 말하기를, “성실이다.” 하였다. 또, “행하는 데는 무엇을 우선으로 해야 합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망녕되이 말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하라.” 하였다. 유 충정공이 당초엔 이것을 매우 쉽게 여겼으나, 행동이 말과 일치하는지를 맞추어 보니 서로 모순되는 점이 많았다. 그 뒤 7년을 힘써 노력한 뒤에야 성공하여, 이때부터는 언행(言行)이 일치되고 표리(表裏)가 서로 맞았으며, 일을 당해도 마음이 평탄하고, 늘 여유가 있었다. ○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없는 자이다. 다만 평생 행한 일 가운데 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없을 뿐이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경(經)에 이르기를, ‘그 뜻을 성실하게 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 지식을 투철히 해야 한다.’ 하였고, 또 ‘지식이 투철해진 뒤에 뜻이 성실해진다.’ 하였다. 대개 마음의 본체에 대해 조금이라도 밝지 않은 바가 있으면 마음이 발할 적에 반드시 그 힘을 실제로 사용할 수 없어서 구차하게 스스로 속이는 일이 있게 된다. 혹 밝은 것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여기서 근신하지 않으면 그 밝은 것이 자기 것이 되지 못하여 덕으로 나아가는 터전이 될 수 없다. 그 순서를 어길 수 없고, 노력을 쉴 수 없음이 이와 같다.” 하였다.


정성[誠]은 사물의 처음이요 끝이므로, 정성스럽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정성을 귀하게 여긴다. 《중용(中庸)》

주자가 말하기를, “‘정성이 없으면 이루어질 것 없다.’는 말은 사람의 관점에서 말한 것으로 이 정성이 없으면 이 사물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보는 데 밝지 못하면 이 사물을 볼 수 없고, 듣는 데 밝지 못하면 이 사물을 들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효도를 하되 정성이 없으면 효가 없고, 공경[弟]을 하되 정성이 없으면 공경이 없는 것이니, 이렇게 유추해 구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배우는 자는 정성스럽지 않을 수 없으니 정성스럽지 않으면 선(善)해질 수 없고, 정성스럽지 않으면 군자가 될 수도 없다. 학문을 닦는 데 정성스럽게 하지 않으면 학문이 잡되고, 일을 하는 데 정성스럽게 하지 않으면 일이 망가진다. 자기를 위하여 일하는 데 정성스럽게 하지 않으면, 이는 자기의 마음을 속이고 그 충심을 버리는 것이며, 다른 사람과 사귈 때에 정성스럽게 하지 않으면 이는 자기의 덕을 잃어버리고 남의 원망을 늘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작은 도[小道]나 이단(異端)의 가르침도 반드시 정성스러워야만 얻을 수 있다. 그러니 군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 때문에 ‘배우는 자는 정성스럽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한 것이다. 그렇지만 정성은 도의 근본을 알아서 정성되게 하는 데 있을 뿐이다.” 하였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정성은 천도(天道)요, 정성스럽기를 생각하는 것[思誠]은 인도(人道)이다.” 하였다. 《맹자》

주자가 말하기를, “정성이란 나에게 있는 이치가 모두 진실하고 거짓이 없는 것이니 천도(天道)의 본연(本然)이요, 정성되기를 생각하는 것은 나에게 있는 이 이치가 모두 진실하고 거짓이 없는 것이니, 인도(人道)로서 마땅히 그래야 함이다.” 하였다. ○ 묻기를, “하늘에는 본래 진실한 이치가 있고, 사람에게는 응당 진실의 공력이 있습니다. 성인은 생각지 않고 힘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도에 합치되어, 참다운 이치가 행해지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것은 성인이 하늘과 일체가 되기 때문으로, 곧 천도(天道)인 것입니다.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는 반드시 선을 택한 뒤에 선을 밝힐 수 있고, 반드시 그것을 굳게 잡은 뒤에 이 선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사(人事)의 당연한 것으로, 곧 인도입니다.” 하니, 주자가 “좋은 말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하늘에는 진실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기화(氣化)가 쉬지 아니하고 유행(流行)하며, 사람에게는 진실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공부가 틈이 없이 환히 밝아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진실한 마음이 없으면 하늘의 이치와 어긋나게 됩니다. 어버이를 모시는 사람으로서 효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지만 효도하는 자는 드물고, 형을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으면서도 공경하는 자는 적으며, 입으로는 부부(夫婦)간에 서로 공경해야 한다고 하지만 집안을 가지런히 한 공효를 거두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장유(長幼)와 붕우(朋友)의 경우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어진 이를 보면 좋아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색(色)을 좋아하는 데로 옮아가고, 사악(邪惡)한 자를 보면 미워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첨을 받아들이기를 사사로이 좋아합니다. 벼슬자리에 있는 자로서 청렴과 정의를 말하면서도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청렴하거나 정의롭지 못하며, 백성을 다스리는 자로서 백성을 기르고 가르칠 것을 말하면서도 정치를 하는데 있어서는 기르거나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또 억지로 인의(仁義)에 힘써서 겉으로는 볼만할 듯하나,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것은 인의에 있지 않습니다. 속이는 것은 오래가기가 어려워서 처음에는 재빠르게 설치다가도 나중에 가서는 게을러지니, 이와 같이 되는 것은 모두 참다운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참되지 못하면 만사가 모두 거짓이 되니, 어디를 간들 행할 수 있겠으며, 마음이 실로 진실하다면, 만사가 모두 진실할 것이니 무엇을 한들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가 말하기를, “성실이란 성인의 근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점에 유념하시기를 바라옵니다. ○ 신이 또 생각건대,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근본입니다. 지금 비록 따로 한 장(章)을 만들어 그 대개를 진술하였습니다마는 성실하게 한다는 뜻은 실로 상하의 모든 장을 꿰뚫고 있습니다. 만일 뜻이 성실하지 않으면 확립되지 못하고, 이치[理]가 성실하지 못하면 끝까지 알지 못하며, 기질(氣質)이 성실하지 못하면 변화될 수가 없으니, 다른 것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제6장 교기질(矯氣質)

신이 생각건대, 이미 학문을 성실히 하였다면 반드시 편벽된 기질을 고쳐서, 본연(本然)의 성(性)으로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 때문에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학문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기질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하였으니, 이것이 기질을 고치는 것을 성실 다음에 둔 이유입니다.


 

기질 차이에 따라 교정하는 방법에 대하여


강선(剛善)은 의(義)롭고, 곧고[直], 결단[斷] 있고, 엄하고 굳세며[嚴毅], 줄기가 굳은[榦固] 것이요, 강악(剛惡)은 사납고[猛], 비좁으며[隘], 강경한[强梁] 것이며, 유선(柔善)은 자애롭고[慈], 순(順)하고, 부드러운[巽] 것이며, 유악(柔惡)은 나약(懦弱)하고 결단이 없는 것이며, 간사하고 아첨하는[邪佞] 것이다. 주자(周子)의 《통서(通書)》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기품(氣稟)의 강유(剛柔)는 진실로 음양(陰陽)으로 크게 나뉘는 것인데, 그 가운데 또 각각 선과 악의 구분이 있다. 악은 실로 바르지 않은 것이거니와 선도 모두 중(中)을 얻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목(木)의 기운을 많이 받고 타고나면 굳세고 강한 것이 적고, 금(金)의 기운을 많이 받고 타고나면 자애롭고 상서로운 것이[慈祥] 적은 것인데, 다른 것들도 모두 그렇다.” 하였다.


중(中)이란 것은 성인의 일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이는 성품이 올바르게 된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그 때문에, 성인이 가르침을 세울 때,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 악을 바꾸고, 스스로 그 중(中)에 이르게까지 하는 것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그 악을 바꾸면, 강유(剛柔)가 모두 선해져서, 엄하고 굳세며 자애롭고 순한 덕(德)이 있어, 강경하거나 나약한 병통이 없게 된다. 그리고 그 중에 이르면, 엄하고 굳세게 되거나 자애롭고 순하게 되며, 또 모두 절조에 맞아 지나치거나 못 미치는 치우침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강하고 사나운 자는 억제하여야 하고, 두려워서 위축된 자는 기운을 충분히 길러야 한다. 옛사람이 부들부들한 가죽을 차고[佩韋] 다니거나, 활시위를 차고 다니면서[佩弦] 스스로를 경계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굳센 자는 억제하기가 쉽다. 자로(子路) 같은 이는 처음에는 성인까지도 그에게 업신여겨질 정도였으나, 그 뒤에 학문을 배우고는 문득 그 굳센 성품을 고쳐 아주 쉽게 자기를 극복하였다. 그러나 두려워서 위축된 자는 기(氣)가 본래 유약(柔弱)하기 때문에, 반드시 힘껏 노력해야 한다.” 하였다.


삼덕(三德)이란 첫째는 정직(正直)한 것이요. 둘째는 강경한 수단으로써 극복하는[剛克] 것이며, 셋째는 부드러운 수단으로써 극복하는[柔克] 것이다. 안정되고 건전한 자는 정직한 것으로 다스리고, 가라앉아 있고 숨어드는 자는 강경한 수단으로써 다스리며, 고명(高明)한 자는 부드러운 수단으로써 다스린다. 〈주서(周書) 홍범(洪範)〉

채씨(蔡氏)가 말하기를, “침잠(沈潛)한 자는 가라앉아 있고 숨어 있어 중(中)에 미치지 못하는 자요, 고명(高明)한 자는 지나치게 높고 밝아 중에서 지나친 자이다. 안정되고 건전한 자는 정직한 것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고치고 버리기를 일삼을 것이 없다는 것이요, 가라앉아 있고 숨어드는 자에게는 강한 수단으로써 다스린다는 것은 굳센 것으로써 부드러운 것을 다스린다는 것이요, 고명한 자는 부드러운 수단으로써 다스린다는 것은 부드러운 것으로써 굳센 것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하였다. ○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극(克)은 다스린다는 뜻이다. 자질(資質)이 가라앉아 있고 숨어드는 자는 마땅히 굳센 것으로써 다스려야 하고, 자질이 고명한 자는 마땅히 부드러운 것으로써 다스려야 한다.” 하였다. ○ 황씨(黃氏)가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데는 모름지기 그 기질(氣質)에 따라서 그 편벽된 것과 미진한 것을 살피되, 가장 절실한 것을 택하여 자기의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약(藥)을 쓰는 것에 비유해 보자면, 옛사람의 약방문(藥方文)에도 또한 그 대법(大法)만을 말해 놓았을 뿐이어서, 병의 증세가 여러 가지로 나타날 때에는 증세에 맞게 신중하게 처방을 선택하여야 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성품은 서로 비슷하나, 습관은 서로 멀다.” 하였다. 《논어(論語)》

주자가 말하기를, “기질의 성[氣質之性]은 진실로 아름답거나 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처음으로 말한다면, 모두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다만 착한 습관을 들이면 착해지고, 악한 습관을 들이면 악해지는 데서 서로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하였다.

이상은 기질이 같지 않아 그것을 교정하는 데도 각각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기질을 바로잡는 방법은 극기(克己)에 있음에 대하여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하여 물었더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극복하여 예법을 돌이키는 것[克己復禮]을 인이라 하는데, 하루 동안 자기를 극복하여 예법을 돌이키면 천하가 인에 귀의할 것이다. 인을 하는 것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논어》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인이란 본심의 온전한 덕[全德]이다. 경원 보씨(慶源輔氏)가 말하기를,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가 모두 마음의 덕이나 인이 의ㆍ예ㆍ지를 포괄하기 때문에 본심의 온전한 덕이라 하는 것이다.” 하였다. 극(克)은 이긴다는 뜻이요, 기(己)는 자기 일신의 사욕(私欲)을 말하는 것이며, 복(復)은 돌이킨다는 뜻이다. 예(禮)는 천리(天理)의 예절 규정[節文]이다. 인을 행하는 것은 그 마음의 덕을 온전히 할 수 있는 방법이다. 대개 마음의 온전한 덕은 하늘의 이치가 아닌 것이 없으나, 또한 인욕(人欲)에 의하여 파괴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인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사욕을 이겨 예법을 돌이켜야 한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일이 천리에 맞고 본심의 덕이 다시 나에게 온전히 갖추어지게 된다. 귀(歸)는 함께한다는 것과 같다. 또 하루 동안 극기복례(克己復禮)하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 인(仁)과 함께한다는 것은 그 효과가 매우 빠르고 지극히 크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또한 인을 하는 것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그 동기가 나에게 있어서 어려울 게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날마다 그것을 극복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않게 된다면, 사사로운 욕심이 말끔히 다 사라져서 천리가 유행(流行)하게 되어 인을 이루 다 쓸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예가 아닌 것은 곧 사사로운 뜻이다. 이미 사사로운 뜻이라면 어떻게 인을 터득할 수 있겠는가. 나의 사사로운 것을 다 극복하여 모든 것이 예와 함께 되어야 비로소 인인 것이다.” 하였다. ○ 사씨(謝氏)가 말하기를, “극기(克己)는 성질이 편벽되어 이기기 어려운 곳으로부터 그것을 이겨 나가야 한다.” 하였다. 이 말은 사람이 색욕(色欲)이 지나치면 먼저 그 색을 절제하고, 이욕(利欲)이 지나치면 먼저 그 이를 끊어 버리는 것과 같은 종류이니, 이것이 용맹스럽게 극기(克己)하는 요법(要法)이다. ○ 주자가 말하기를, “나의 사사로운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성질의 편벽된 것이요. 둘째는 귀ㆍ눈ㆍ입ㆍ코의 욕망이요, 셋째는 남과 나 사이에 시기하거나 이기려 하는 사욕이다. 이것을 자세히 체득하여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사사로운 뜻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곧 그것을 이겨 나가야 한다.” 하였다. 설씨(薛氏)가 말하기를, “사사로운 것은 크건 작건 그것을 깨달으면 이겨 내야 한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예란 자기 스스로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돌이킨다[復]고 한 것으로, 나의 사사로운 것을 극복하고 나서 예를 돌이키는 데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저 일 푼[一分]의 인욕(人欲)을 극복한다면 바로 일 푼의 천리를 희복하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 누가 묻기를, “보통 일에는 이것은 천리이고, 저것은 인욕인 것을 알 수는 있으나, 실제로 행하는 데 있어서는 인욕에 이끌려 가게 되고, 일이 지난 뒤에 후회하게 되니, 이는 어찌된 일입니까?”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사욕을 극복하는 공부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에 알맞게 아주 잘 수습해야만 쭉 뻗은 큰길을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다. 또 한 갈래의 작은 길[小路]이 있을 때, 분명히 큰길로 가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작은 길 앞에 자기를 끌어당기는 것이 있어서 자기도 모르는 새 작은 길로 따라가다가 눈앞에 가시덤불과 잡풀더미를 만나게 되면 도리어 후회하게 되니, 이것이 곧 천리와 인욕이 교전(交戰)하는 갈림길이다. 일을 당하였을 때 바로 그것을 이겨 내야지, 구차하게 지나쳐서는 안 된다.” 하였다.


안연(顔淵)이,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조목을 여쭙겠습니다.” 하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 말 것이요,[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 것이며,[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 것이요,[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 하였다. 안연은 “제가 불민하오나 이 말을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목(目)은 조건(條件)이다. 안연은 선생의 말을 듣고 천리와 인욕의 구분이 판연(判然)해졌다. 그 때문에, 더 이상 의문스러운 것이 없어 곧바로 그 조목을 물은 것이다. 예가 아니라는 것은 나의 사사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요, 물(勿)은 금지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인심이 주(主)가 되어서 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가는 기틀이 된다는 것이다. 사욕을 이기면 행동하며 일을 처리하는 가운데 예에 맞지 않는 것이 없고, 일상생활하는 사이에 천리의 유행이 아닌 것이 없다. 안연은 그 이치를 묵묵히 마음속에 기억하고, 또 자기의 능력이 사욕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곧바로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은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라는 것은 그 밖으로부터 들어와서 안에서 작용하는 것을 막는 것이요.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는 것은 안으로부터 나아가서 밖에서 접촉하는 것을 삼가는 것이다. 안팎을 서로서로 닦아 나아가면 인을 하는 공부에 온 힘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성인의 말을 깊이 음미하고, 안자(顔子)가 힘쓴 것을 탐구해 보면, 관건은 다만 예가 아닌 것을 그만두느냐 그만두지 않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이를 돌이켜 찾는다면 천리가 되고, 이를 흘려버린다면 인욕이 되며, 이를 잘 생각하면 성인(聖人)이 되고, 이를 생각지 않으면 광인(狂人)이 되는 것이니, 다만 털끝만 한 데서 차이가 생겨날 뿐이다. 배우는 자가 그 몸가짐을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어떤 이가 묻기를, “보아서는 안 됨을 분명히 아는데도 눈앞에 보이고, 들어서는 안 됨을 분명히 아는데도 귀에 와서 들리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하니, 주자가 말하기를, “예가 아닌 모습이 눈을 스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보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고 예가 아닌 소리가 비록 귀를 스친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들으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 네 가지는 몸의 작용인데, 속에서 나와서 밖으로 응하는 것이다. 밖을 제어한다는 것은 중심을 기르는 방법이다. 안연이 이 말을 받들었으므로 성인의 경지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후대에 성인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명심하고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하기에 잠언(箴言)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한다. 〈시잠(視箴)〉에 이르기를, ‘마음은 본래 공허(空虛)한 것이어서 사물에 응하여도 자취가 없네. 마음을 잡는 데는 요령이 있으니, 보는 것이 기준이 되네 사물이 눈앞에서 가리고 있으면 마음도 그쪽으로 옮겨가게 되니, 밖에서 제어하여 마음속을 편하게 해야 한다. 자기를 극복하여 예를 돌이키는 것을 오래하다 보면 정성스러워질 것이다.’ 하였다. 섭씨(葉氏)가 말하기를, “눈이란 사람의 밝은 거울이요, 오행(五行)의 정화(精華)가 모인 것이다. 마음과는 더욱 밀접하여 눈이 움직이면 마음이 반드시 따르고 마음이 움직이면 눈이 반드시 그곳에 쏠린다. 허령(虛靈)한 마음은 온갖 변화와 조화를 이루는데 그것을 단속하고자 한다면 먼저 보는 것으로 표준을 세워야 한다.” 하였다. 〈청잠(聽箴)〉에, ‘사람에게는 떳떳한 도리를 지키는 양심이 있는데, 이는 타고난 천성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앎[知]이 외물에 끄들려 동화되어 버리면 마침내 그 올바른 것을 잃어버린다. 뛰어난 저 선각자(先覺者)들은 머물 곳을 알아 확고하게 안정되었으니, 사심(邪心)을 막고 정성을 보존하여 예가 아니면 듣지 않았다 한다.’ 하였다. 앎이 외물에 끄들려 동화된다는 것은 마음이 외물에 유혹되어 동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마음의 본체는 본래 바른 것이나 외물에 유혹되어 동화되기 때문에 결국 그 바른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언잠(言箴)〉에, ‘사람 마음의 움직임은 말을 통해 드러나니, 말을 하는 데 조급하거나 망녕되게 하지 않아야 마음속은 조용해지고 전일해진다. 하물며 말이란 추기(樞機 중요한 기틀)라서 싸움을 일으키거나 우호(友好)를 맺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니, 길(吉)하고 흉(凶)하고 영예롭고 욕된 것을 오직 이 말이 불러들인다. 너무 쉽게 하면 실없는 말이 되고, 번거롭게 하면 지엽적인 말이 된다. 내가 함부로 말하면 상대가 엇나가게 되고, 가는 말이 맞지 않으면 오는 말도 어긋나니, 법도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이 가르침을 잘 받들라.’ 하였다. 진씨(陳氏)가 말하기를, “지(支)는 나뭇가지와 같아서 몸에서 곁가지로 뻗어나간 것이다. 마음을 번거롭게 하는 잘못이다.” 하였다. 〈동잠(動箴)〉에, ‘철인(哲人)은 일의 기미(幾微)를 먼저 알아 생각을 성실하게 하며, 지사(志士)는 행동을 가다듬어 도리에 맞게 행한다. 이(理)에 순종하면 마음이 여유롭지만, 사욕에 따라 행동하면 위태로워지니, 잠시라도 잘 생각하여, 늘 두려워하고 조심하면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그리하여 습관이 성품으로 굳어지면, 성현과 함께하게 된다.’ 하였다.” 하였다. 주자가 말하기를, “사려(思慮)란 행동의 기미이고, 행위는 움직임으로 나타난 것이며, 사려는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요, 행위는 밖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하였다. ○ 신이 생각건대, 오랜 습관이 성품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습관을 오래 쌓아 그것이 성공하면 마치 천성(天性)에서 우러나오는 것과 같아지는 것을 이르는 것이며, 어려서 이루어진 것은 천성과 같다 한 것은 습관이 자연스러워진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천성이란 애당초 품수(稟受)받고 태어난 기질의 성[氣質之性]을 말하는 것이지, 본연의 성[本然之性]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 주자가 말하기를, “이 장(章)의 문답은 심법(心法)을 전수(傳授)하는 데 절실한 말이다. 지극히 밝지 않으면 그 기미를 살필 수 없고, 지극히 굳세지 않으면 그 결단을 내리는 데 이를 수가 없다. 정자(程子)의 잠(箴)은 뜻을 친절히 밝혀 놓았으니 학자들은 더욱 깊이 음미하여야 한다.” 하였다. 극기(克己)는 자기 몸에 절실한 공부요, 기질(氣質)을 변화시키는 요법입니다. 그러므로 정주(程朱)의 말이 이와 같습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산(山) 아래에 못[澤]이 있으면 손괘(損卦)가 된다. 군자는 이것을 보고서 분(忿)을 눌러 가라앉히고 욕심을 억제한다.” 하였다. 〈손괘(損卦) 상전(象傳)〉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몸을 수양하는 도리에서 마땅히 버려야 할 것이 분노[忿]와 욕심[慾]이다. 그러므로 그 분노를 눌러 가라앉히고, 그 욕심을 막는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사람의 정(精) 중에 발하기는 쉬워도 제어하기가 어려운 것으로는 노여움이 가장 그러하다. 노하였을 때 문득 그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도리의 옳고 그른 것을 차차 볼 수 있으면 잡아끄는 것이 미워할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도의 수준이 중간 이상인 것이다.” 하였다. ○ 또, “분노를 다스리기 어렵고, 두려움 또한 극복하기 어렵지만 극기(克己)를 통해 분노를 다스릴 수 있고, 이치를 밝히는 것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하였다. ○ 또, “《논어》에, ‘정(棖)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니 어찌 굳세다 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욕심이 사람을 해침이 심하구나. 사람이 불선(不善)을 행하는 것은 욕심이 유혹하기 때문이다. 유혹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면 천리(天理)를 없애 버리고도 되돌아올 줄 모르는 데 이른다. 그러므로 눈으로는 아름다운 색(色)을 욕심내고, 귀로는 좋은 소리[聲]를 욕심낸다. 코로는 향기를, 입으로는 맛을, 사지(四肢)는 편안한 것을 욕심내는 것들이 모두 그러하니, 이 모두가 욕심이 그렇게 시켜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그 욕심을 막아 버릴 수 있겠는가. 사려(思慮)뿐이다. 오직 사려를 통해서만이 능히 욕심을 막아 낼 수 있으니, 증자(曾子)의 일일삼성(一日三省)이 욕심을 막는 방법이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산의 상(象)을 보고 분노를 가라앉히고, 못[澤]의 상을 보고 욕심을 막아 낸다. 그러므로 욕심을 막기를 구덩이[壑]를 메우듯 하고, 분을 가라앉히기를 산을 꺾[摧]듯 한다.” 하였다.

이상은 기질을 바로잡는 법은 극기에 달려 있다는 내용을 말한 것입니다. 자기에게서 이겨 내기 어려운 것이 분노와 욕심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드러냈습니다.


 

기질을 바로잡는 공부는 면강(勉强)에 있음에 대하여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명석하게 분변하며, 독실하게 행한다. 《중용》 아래도 이와 같다.

정자가 말하기를, “이 다섯 가지에서 한 가지라도 폐(廢)하면 학문이 아니다.”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학문이란 기질을 능히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책을 읽어 궁리하거나 공경을 주로 삼아 본심을 보존하지 않고, 그저 어제의 잘못과 오늘의 바른 것[昨非今是]만 따지고 비교하는 데 급급하다면, 또한 수고롭기만 하고, 아무런 보탬도 없을 것이다.” 하였다.


배우지 않으려면 몰라도 배울 바에는 능치 못한 것을 두어서는 안 되고, 묻지 않으려면 몰라도 물을 바에는 알지 못하는 것을 두어서는 안 되고, 생각하지 않으려면 몰라도 생각할 바에는 터득하지 못하는 것을 두어서는 안 되고, 분변하지 않으려면 몰라도 분변할 바에는 분명하지 않은 것을 두어서는 안 되며, 행동하지 않으려면 몰라도 행동할 바에는 독실하지 않은 것을 두어서는 안 된다. 남이 한 번에 할 수 있는 일이라도 나는 할 수 있을 때까지 백 번이라도 해야 하고 남이 열 번에 할 수 있는 일이라도 나는 할 수 있을 때까지 천 번이라도 해야 한다.

주자가 말하기를, “군자의 학문을 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할 바에는 반드시 완성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늘 남보다 백 배의 공을 들여야 한다.” 하였다. ○ 동씨(董氏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학문에 힘쓰면 견문이 넓어지고, 지식은 더욱 밝아지며, 도를 행하는 데 힘쓰면 덕(德)이 날로 일어나 큰 공효가 있게 된다. 증자(曾子)는, ‘그 듣는 바를 존중하면 고명(高明)해지고, 그 아는 바를 행하면 광대(光大)해진다.’ 하였는데, 고명해지고 광대해지는 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뜻을 두는 데 있을 뿐이다.” 하였다.


과연 이 도(道)를 능히 행한다면 우매한 자라도 반드시 명석해질 것이요, 유약한 자라도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

여씨(呂氏)가 말하기를, “군자가 학문을 하는 까닭은 기질을 변화시키기 위함이다. 덕(德)이 기질을 눌러 이기면 우매한 자도 명석해질 수 있고, 유약한 자도 강해질 수가 있을 것이나, 덕이 기질을 이기지 못하면, 학문에 뜻을 두고 있다 하더라도 우매한 자는 명석해질 수가 없고, 유약한 자는 바로 설 수가 없다. 대개 고루 선하여 약해지지 않는 것은 본성이므로 사람마다 같은 것이지만, 어둡고 밝고 강하고 약한 타고난 차이는 재주[才]이므로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성실하게 하면 그 같은 것으로 돌아가 다른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아름답지 못한 자질로서 그것을 변화시켜 아름답게 하고자 한다면 백 배로 공을 들이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제 노무멸렬(鹵莽滅裂) 노무(鹵莽)는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요, 멸렬(滅裂)은 공부를 경박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한 학문으로서 했다가 말았다가 하면서 그 우수하지 못한 기질을 변화시키려다가 변화시킬 수 없게 되면, ‘타고난 기질이 우수하지 못해 배운다고 해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포기[自棄]하는 결과로 나아가는 것이니, 몹시도 인(仁)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 오씨(吳氏)가 말하기를, “학문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학문을 하는가. 세상에는 실로 자기의 의지를 이끌어 공을 세우고 업을 이루는 자도 있으나, 또한 자기의 정(情)이 이끄는 대로 절제 없이 따라가 나라를 패망케 하고 백성들을 죽게 하는 자도 있다. 그런 사람은 굳세거나 유약하거나 선(善)하거나 악(惡)하거나 그 기질 여하에 그대로 내맡겨, 다시 그것을 바로잡거나 이겨 내어 인격을 완성하지 못한다. 배우는 자는 이와 같지 않아서 어리석은 것을 변화시켜 명석하게 할 수 있고, 약한 것을 변화시켜 강하게 할 수 있으며, 탐욕을 변화시켜 청렴하게 할 수 있고, 참는 것을 변화시켜 자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니, 학문의 공효가 큰 것이다. 기질이 아름답지 못한 것도 모두 변화시켜 아름답게 할 수 있으니, 하물며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주자가 말하기를, “전에 여백공(呂伯恭)을 만났는데, 그가 젊었을 적에는 성품과 기질이 거칠고 사나워서 음식이 마음에 안 들면 바로 가사(家事) 가사는 접시나 그릇을 말한다. 를 때려 부쉈는데, 후일 병을 오래 앓을 때 《논어(論語)》한 책을 가지고 아침저녁으로 한가한 틈에 읽다가 ‘자신을 책하는 것은 무겁게 하고 남을 책하는 것은 가볍게 한다.[躬自厚而薄責於人]’라는 대목에 이르러 홀연히 깨달은 바 있어서, 뜻이 일시에 평안해져 드디어는 종신토록 사납게 노하는 일이 없었다고 하니, 이것이 기질을 변화시키는 법이 될 수 있다.” 하였다.

이상은 기질을 변화시키는 공이 힘쓰는 데 있음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신이 생각건대, 일기(一氣)의 근원은 담연(湛然 맑은 모양)ㆍ청허(淸虛)하여, 오직 그 양(陽)이 동(動)하고 음(陰)이 정(靜)한 것이 상승하기도 하고, 하강하기도 하다가, 어지럽게 흩날리다 합쳐져 질(質)을 이루어서, 드디어 고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물은 치우치거나 막히게 되면 다시 이것을 변화시킬 방법이 없으나, 사람만은 청탁(淸濁)과 수박(粹駁 순수하고 박잡함)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마음이 텅 비어 밝아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마다 모두 요순(堯舜)이 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허언(虛言)이겠습니까. 기(氣)가 맑고 바탕이 순수한 사람은 지(知)와 행(行)을 힘쓰지 않고도 능하게 되어 더할 것이 없습니다. 기는 맑으나 바탕이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알 수는 있어도 행할 수는 없는데 만일 궁행(躬行)에 힘써서 반드시 성실해지고 독실해지면, 행실이 바로 서서 유약한 사람도 강해질 수 있습니다. 기질은 순수하나 기가 탁한 사람은 행동할 수는 있으나 잘 알 수는 없는데, 만일 묻고 배우는 데 힘써서, 반드시 성실하고 정밀하게 하면 지식에도 통달하여 우매한 자라도 명석해질 수 있습니다. 또 세상의 모든 기예(技藝)에 대해 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시험 삼아 음악을 배우는 일 한 가지를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린 사내아이나 계집아이가 처음에 거문고와 비파를 익히면서 손가락을 놀려 소리를 낼 때는 듣는 사람이 귀를 막고 안 들으려 하지마는, 쉬지 않고 노력하여 점점 그 아름다운 음률을 이루고 그 지극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그 소리가 맑고 조화로우며 막힘이 없어 정묘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저 어린 사내아이와 계집아이가 어찌 음악을 나면서부터 잘 했겠습니까. 오직 실제로 노력하고 학습한 것이 쌓여 익숙해졌을 뿐입니다. 모든 기예가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학문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아, 그런데 절묘(絶妙)한 세상에 기예를 가진 백공(百工)은 있으나 학문을 하는 사람 중에 그 기질을 변화시킨 자를 보지는 못하였으니, 이는 다만 그 지식을 넓히고 언론에만 힘을 쏟는 데서 온 결과입니다. 그리하여 너무 굳센 자는 끝내 부드러운 선을 갖지 못하고, 부드러운 자는 끝내 강한 선을 갖지 못하여, 탐욕한 자가 청렴해지고, 참는 자가 자애로워지고 경박한 자가 신중해지는 것을 아직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실제 노력하는 일이 백공의 기예에만 있을 뿐이오, 학문에는 없다는 것이 되니, 얼마나 탄식할 노릇입니까. 이 점을 유념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제7장 양기(養氣)

신이 생각건대, 기질을 바로잡아 자신을 다스리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하고, 기운을 보존하고 기르는 데 치밀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바른 기운을 보존하고 기르는 것이 곧 객기(客氣)를 고쳐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이는 실로 두 가지 일이 아니지만 그 말에 있어 각각 주안을 두는 점이 있기 때문에 나누어 두 장(章)을 설정하였습니다.


 

지기(志氣)를 기르는 것에 대하여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본심을 기르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그 사람됨이 욕심이 적으면 본심을 보존하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적을 것이요, 그 사람이 욕심이 많으면 본심을 보존하는 뜻이 있다고 치더라도 그것이 적을 것이다.” 하였다. 《맹자》 아래도 이와 같다.

주자가 말하기를, “욕심이란 귀[耳]ㆍ눈[目]ㆍ입[口]ㆍ코[鼻]나 사지(四肢)의 욕구와 같은 것이다. 사람에게 이것이 없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욕심이 불어나도 절제하지 않는다면 그 본심을 잃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배우는 이가 깊이 경계하여야 할 바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욕심이란 꼭 탐닉하는 것만은 아니다 솔깃한 마음이 있으면 그것이 바로 욕심이다.” 하였다. ○ 《예기》 〈악기(樂記)〉에 이르기를, “군자는 그 도를 즐기고, 소인은 그 욕심을 즐긴다. 도로서 욕구를 제어하면 즐겁고 어지럽지 아니하며, 욕심 때문에 도를 잊으면 의혹되어 즐겁지 않게 된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천리(天理)에 어두운 것은 다만 기욕(嗜欲)이 그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저 장자(莊子)는, ‘기욕이 깊은 자는 천기(天機)가 얕다.’ 하였는데, 이 말이 가장 옳다.” 하였다. ○ 〈오자지가(五子之歌)〉에 이르기를, “안으로 여색(女色)에 빠지고 밖으로 사냥에 미치거나, 좋은 술 마시고 아름다운 음악을 즐기거나, 높은 집을 짓고 화려하게 꾸미는 일 중에 한 가지만 하더라도 망하지 않는 자가 없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즐기고 좋아하는 일은 모두 사람의 올바른 뜻을 빼앗는다. 서찰(書札)은 유자(儒者)가 아주 가까이하고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결같이 이 일만을 좋아하다 보면 스스로 뜻을 잃어버린다. 왕희지(王羲之)ㆍ우세남(虞世南)ㆍ안진경(顔眞卿)ㆍ유공권(柳公權) 같은 무리를 진실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은 있으나, 일찍이 글씨 잘 쓰는 사람으로서 도를 아는 사람을 본 일이 있는가. 평생의 정력을 오로지 이 일에만 쏟았으니, 이는 시일만 헛되이 보냈을 뿐 아니라, 도에도 방해되는 바가 있는 것이니, 그것이 뜻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위 장(章)에서는 극기(克己)를 말하였기 때문에 질욕(窒慾)이라 하였고, 이 장에서는 양심(養心)을 말하였기 때문에 과욕(寡欲)이라 한 것입니다. 질욕이라 할 때의 욕(慾)은 오로지 사욕(私欲)을 가리켜 말한 것이나, 과욕이라 할 때의 욕은 마음의 욕심내는 바를 통틀어 다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사람에게 없을 수는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이 불어나는데도 절제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사욕입니다.


우산(牛山)의 나무들이 아름다웠었는데 큰 나라 교외에 있음으로해서 도끼에 남벌되고 말았다. 그러니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이것은 밤낮으로 길러 주고 우로(雨露)가 적셔 주니 싹이 돋아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 우양(牛羊)을 몰고 가서 마구 먹였기 때문에, 저와 같이 벌거숭이산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벌거숭이산을 보고 그곳에는 본래 나무가 없었다고 여긴다. 이것이 어찌 산의 본성이겠는가.

주자가 말하기를, “밤낮으로 자란다는 것은 쉴 사이 없이 기(氣)가 변화하고 유행(流行)하여 밤낮으로 만물이 모두 자라남이 있다.” 하였다.


사람에게도 어찌 인(仁)과 의(義)의 마음이 없겠는가. 사람이 양심을 잃어버리는 일 또한 도끼가 나무를 쳐내는 것과 같다. 날마다 찍어 낸다면 아름다워질 수 있겠는가. 밤사이 양심이 자라난 새벽의 기운에도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남들 같지 않다면 이는 낮에 저지른 소행이 양심을 속박[梏]해서 없어지게 해서이다. 이런 양심의 속박이 반복(反覆)되면 밤중에 자라나는 청명한 기[夜氣]가 보존되지 못하고, 밤중에 자라는 청명한 기가 보존되지 못하면 금수(禽獸)와 다를 것이 없어진다. 사람들이 그 금수와 같은 자를 보고서 그 사람은 본래 재질(才質)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이 어찌 사람의 본 성정(性情)이겠는가. 그러므로 진실로 보양(保養)을 잘하면 생장하지 않는 것이 없고, 진실로 보양을 잘못하면 소멸되지 않는 것이 없다.

주자가 말하기를, “양심이란 인간 본래의 착한 마음이니, 곧 인의(仁義)의 마음이다. 평단(平旦)의 기(氣)란 외물과 접촉하기 전의 청명한 기이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 비슷하다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같은 마음을 얻은 것을 말한다. 곡(梏)은 속박하는 수갑이오, 반복(反覆)은 전전(展轉)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이미 양심을 잃었다고 해도 밤낮으로 반드시 자라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날 샐 즈음 외물과 접촉하기 이전 기가 청명할 때에는 그래도 양심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발견되는 양심이 지극히 미약한 데다 낮에 저지른 착하지 못한 소행이 또 뒤따라, 그 양심을 속박하여 소멸시킨다. 이는 마치 산의 나무를 베어 버려도 싹이 돋아나기는 하는데 그것마저도 우양(牛羊)을 방목하여 없애 버리는 것과 같다. 낮의 행동이 밤사이에 생장한 기를 해치고, 밤사이에 생장한 양심이 또 낮의 소행을 이겨 내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해치는 일이 악순환된다. 이렇게 해서 야기(夜氣)의 생장이 날로 엷어지고, 인의(仁義)의 양심을 보존할 수 없게 되면 아침의 청명한 기도 맑아질 수 없게 되어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마음과 거리를 두게 된다. 산의 나무와 사람의 마음[人心]이 그 이치는 한 가지이다.” 하였다.


나는 나의 호연(浩然)한 기(氣)를 잘 기른다. 그 기라는 것은 지극히 크고 굳세어, 이것을 바른 도리로서 길러 해치지 않으면 천지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

주자가 말하기를, “호연(浩然)이란 성대하게 유행하는 모양이요, 지극히 크다는 것은 처음부터 한량이 없는 것이오, 지극히 굳세다는 것은 굽히지 않는 것이다. 대개 천지의 바른 기운을 사람이 타고나는 그 모습이 본래 이러하다. 오직 스스로 반성하여 곧으면 잘 기를 수 있고, 또 일부러 그것을 해치지 않으면 본체가 이지러지지 않고 천지간에 가득히 찰 것이다.” 하였다.


그 기(氣)는 의(義)와 도(道)에 배(配)되는 것으로서, 이것이 없으면 위축된다.

주자가 말하기를, “배(配)는 합하여 도움이 된다는 뜻이오, 의(義)란 사람의 마음을 재제(裁制)하는 것이며, 도(道)란 천리(天理) 그대로인[自然] 것이다. 뇌(餒)란 주리고 결핍하여 기(氣)가 몸에 충만하지 못한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이 그 기를 기를 수 있으면, 그 기가 도의에 배합하여 그것을 행하는 데 도움이 되어 그 행동하는 데 있어서 용기 있게 결단을 내려, 주저하거나 꺼리는 바가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또 만일 이 기가 없으면 일시의 행동이 도의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몸에 충만하지 않은 게 있으면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면치 못하여 무언가를 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마음속의 의(義)를 모아서 생기는 것이지 밖에서 의가 엄습해[襲] 와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행동 가운데 마음에 차지 않는 게 있으면 기는 위축되고 만다.

주자가 말하기를, “의(義)를 모은다는 것은 선을 쌓는다는 말인데, 대개 일마다 의에 합당하게 한다는 것이다. 습(襲)은 갑자기 취해진다는 것이다. 그 말은 기(氣)가 비록 도의에 배합된다 하더라도 그 기를 기르기 시작할 때에 곧 모두 의에 합당하게 일을 하고, 스스로 반성하여 늘 곧기 때문에 부끄러울 바가 없다. 그리하여 이 기도 자연히 그 가운데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의 일을 행한 것이 우연히 도의에 합치된다 해서 문득 밖에서 엄습해 와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동에 조금이라도 의에 합치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도 스스로 반성하여 곧아지지 못하면 마음이 흡족하지 못하게 되고, 그 몸에도 채워지지 않는 게 있게 된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그 뜻을 견지하고 그 기를 상하게 하지 않으면 안팎으로 서로 길러진다.” 하였다. 섭씨(葉氏)가 말하기를, “그 뜻을 견지한다는 것은 마음속에 굳게 지키는 바가 있다는 것이요, 그 기를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밖으로 쏠리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지키는 바가 있으면 기가 스스로 완전하고, 밖으로 쏠리지 않으면 뜻이 더욱 굳어지는 까닭에 서로 길러진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지기(志氣)를 기르는 것에 대해서만 말씀드렸습니다.


 

혈기(血氣)를 기르는 것에 대하여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에게는 경계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는데, 젊었을 때에는 혈기(血氣)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색(色)을 경계해야 하고, 장년이 되어서는 혈기가 한창 왕성하니 싸움을 경계해야 하며, 늙어서는 혈기가 쇠약해졌으니, 이득을 탐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하였다. 《논어》

주자가 말하기를, “혈기는 그것을 통해 형체가 생겨나게 하는 것인데, 혈(血)은 음이오 기(氣)는 양이다. 득(得)은 이득을 탐내는 것이다. 때에 맞게 경계할 줄 알아서 이치로써 그것을 이겨 내면 혈기에 부림을 받게 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 범씨(范氏)가 말하기를, “군자는 그 뜻과 기를 기르기 때문에 혈기에 의해 움직이는 바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이가 더욱 높아질수록 덕도 더욱 높아진다.” 하였다.


《주역(周易)》에, “언어를 조심하고 음식을 절제하라.” 하였다. 〈이괘(頤卦) 상사(象辭)〉

정자가 말하기를, “말을 조심하여 그 덕을 기르고, 음식을 절제하여 그 몸을 기른다. 지극히 가까운 일로서 그 지극히 큰 것과 관계된 것으로 말과 음식만 한 것이 없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진원(眞元)의 기는 외기(外氣)와 서로 섞이는 것이 아니요, 다만 외기로서 함양할 따름이다. 이는 마치 물에 사는 물고기의 생명을 물이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물로써 길러 주어야 물고기가 살 수 있는 것과 같다. 사람이 천지의 기 가운데 있는 것이 물고기가 살 수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음식으로 보양하는 것도 모두 이 외기로 함양하는 방법이다.” 하였다. ○ 또, “동식(動息)ㆍ절선(節宣 철에 따라 몸을 조심하는 것)을 통해 생명을 기르고[養生], 음식ㆍ의복을 통해 몸을 기르고[養形], 위의(威儀)와 바른 행실로 덕을 기르고[養德], 나를 미루어 상대에까지 미루어 아는 것을 통해 사람을 기른다.[養人]” 하였다. ○ 형서(邢恕)가 말하기를, “우리는 항상 정력(精力)을 애호하고 함양하지만, 정력이 조금만 부족해도 권태로워져서, 일에 임해 힘을 쓰기는 하나 정성스러운 뜻이 없다. 손님을 접대하고 말을 하는 데에서도 볼 수 있으니, 하물며 큰일에 임해서야 어떻겠는가.” 하였다.


공자께서 삼간 것은 재계(齋戒)하는 것과 전쟁하는 것과 질병이었다. 《논어》

주자가 말하기를, “재(齋)의 말뜻은 바르게 한다는 것인데, 제사 지내기에 앞서 그 생각 가운데 바르지 못한 것을 바르게 하며 신명(神明)과 접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성이 지극한가 지극하지 못한가. 신이 제사를 흠향하는가 안하는가는 모두 여기에 달려 있다. 전쟁은 백성의 생사와 나라의 존망(存亡)이 걸려 있는 것이요, 질병은 또 내 몸이 죽느냐 사느냐, 존재하느냐 없어지느냐가 달려 있는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병중에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기 때문에, 모든 생각을 다 내려놓고 오로지 본심을 보존하고 기를 기르는 것에만 힘써야 한다.” 하였다. ○ 정자가 장사숙(張思叔)에게 말하기를, “나는 기를 매우 약하게 타고났는데, 30에 차차 성해지고, 4, 50 이후에 완전하여 졌다. 지금 나이 72세인데 한창 때와 근골(筋骨)을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다.” 하였다. 사숙(思叔)이 청하여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아마도 기를 약하게 타고나셨기 때문에 생명을 잘 지키신 것이지요?” 하니, 정자는 가만히 말하기를, “나는 생을 잊고, 욕심을 따르는 것을 깊은 수치로 여겼다.” 하였다. 장남헌(張南軒)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양생(養生)은 건강을 탐하는 것이니, 이는 다만 이익을 추구하는 데 지나지 않으나, 이천(伊川)이 말한 것은 순전히 천리(天理)이다.” 하였다. 또 부주(涪州)에서 돌아왔을 때 용모나 기색이나 수염이 모두 그전보다 월등하게 나아 보였다. 문인이 묻기를, “어떻게 하여 이와 같이 건강하실 수 있습니까.” 하니, 말하기를, “학문의 힘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인의(仁義)의 마음은 사람마다 똑같이 받았으나 자품(資稟)에는 트인 것[開]과 가린 것[蔽]이 있으며, 진원(眞元)의 기는 사람마다 같이 가지고 있으나 혈기에 허(虛)와 실(實)이 있습니다. 인의의 마음을 잘 기르면 가린 것이 열릴 수 있어서 그 천부의 본심을 온전히 할 수 있게 되고, 진원의 기를 잘 기르면 허가 실이 될 수 있어서 그 하늘로부터 받은 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을 기르는 방법도 밖에서 타물(他物)에 가탁(假託)하는 것이 아니오, 다만 흔들리거나 손상되지 않게 할 따름입니다. 천지의 기화(氣化)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생겨나 잠깐 동안이라도 정지하지 않는데, 사람의 기도 천지와 서로 상통합니다. 그러므로 양심과 진기(眞氣)도 천지의 기와 함께 생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 갈래로 상(傷)하고 해(害)가 되어 생장이 소멸하는 것을 이겨 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리저리 굴러서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마음은 금수(禽獸)가 되고, 기(氣)는 일찍 시들어 버리게 되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양심을 해치는 것은 귀ㆍ눈ㆍ입ㆍ코와 사지(四肢)의 욕망이고, 진기를 해치는 것도 이 욕망으로 인한 것입니다. 대개 귀와 눈이 성색(聲色)을 좋아하는 것이 진실로 마음에 해로운 것이로되, 음란한 소리와 아름다운 색은 뼈를 부수는 도끼와 톱이요, 입으로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 진실로 마음에 해로운 것이로되, 입에 딱 맞는 맛은 반드시 오장(五臟)을 상하게 합니다. 한가하고 안일한 것은 근육과 맥(脈)을 늘어지게 하여 드디어 행동과 휴식이 올바른 도리에서 어긋나게 합니다. 희(喜)와 노(怒)는 그 중용의 도리를 잃어버리고, 마음은 날로 방자해지고, 기는 날로 방탕하게 되어, 마침내는 일기(一氣)의 관통(貫通)이 끊어지고, 백해(百骸)의 유대가 풀어지게 되는 것이니, 장차 어떻게 천명대로 바로서서 세상에 오래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마음을 기르는 것과 기를 기르는 것은 실로 한 가지 일입니다. 양심이 날로 생장하면서 상하거나 해되는 것이 없어서 마침내 그 가리고 있던 것을 모조리 다 없애 버리는 데에 이르면 호연(浩然)의 기가 성대하게 흐르고 통하여, 장차 천지와 한몸이 됩니다. 죽고 사는 것과 길고 짧은 것은 비록 정해진 분수[定數]가 있다 하더라도, 나에게 있는 도리는 다할 수가 있으니, 어찌 스스로 마음에 만족스럽지 않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유념하시옵소서.


제8장 정심(正心)

신이 생각건대, 위 두 장(章)의 공부는 정심(正心) 아닌 것이 없으나, 각각 주장하는 바가 있으므로, 따로 정심을 주로 한 선현의 훈계[前訓]를 편집하여 함양과 성찰의 뜻을 상세히 논하였습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경(敬)은 성문(聖門)의 제일의(第一義)이므로 철두철미하게 하여야지 잠시 그치거나 끊어짐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대요는 경(敬)을 주로 삼았습니다. 제3장의 수렴(收斂)은 경의 처음이요, 이 장은 경의 끝입니다.


 

함양(涵養)에 대하여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마음을 두어서[存] 그 성(性)을 기른다[養]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소이(所以)이다.” 하였다. 《맹자》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존(存)은 잡고 놓지 않는 것을 말하고, 기른다[養]는 것은 순하여 해(害)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며, 섬긴다[事]는 것은 받들어 어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심성(心性)은 하늘이 나에게 준 것으로, 존양(存養)할 수 없어서 이를 잃어버린다면, 하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다만 하나의 천리(天理)가 있는 것인데, 만일 보존하여 얻지 못한다면 다시 무슨 사람이 되겠느냐.”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만약 존양(存養)할 수 없다면 다만 말뿐인 것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맹자(孟子)가 이른바 존양은 동(動)과 정(靜)을 다 통하게 말한 것으로, 성의와 정심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현들이 정(靜)한 때의 공부를 논할 적에 흔히 존양과 함양을 말하므로, 그 긴요한 말을 가려내어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함양하면 곧 청명(淸明)하고 고원(高遠)한 데에 이른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희로애락(喜怒愛樂)이 발하기 전을 동(動)이라 해야 합니까, 정(靜)이라 해야 합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정이라 하는 게 옳다. 그러나 고요한 가운데서 물(物)이 얻어지는 것이니, 여기가 바로 어려운 곳이다. 배우는 사람은 먼저 경(敬)을 이해해야 하니, 경(敬)을 할 수 있으면 이를 절로 알 수 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정좌(靜坐)할 때에 물(物)이 앞을 지나가면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일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만약 제사(祭祀)와 같이 큰일이라면 술[旒]을 드리워 눈을 가리고, 주광(黈纊)으로 귀[耳]를 막으니, 앞을 지나가는 어떤 사물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겠지만, 일이 없을 때라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것이다.” 하였다. ○ 소병(蘇昞)이 묻기를, “희로애락이 발현하기 전에 중(中)을 구한다는 것이 맞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옳지 않다.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에 구한다고 하면, 또 바로 이는 생각한 것이니, 생각한 것은 바로 이미 발한 것이다. 발했다 하면 화(和)라 이르며 중(中)이라 이르지 않는다.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았을 때에 존양을 말하는 것은 옳으나,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에 중을 구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하였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정자(程子)께서 ‘생각했다 하면 이미 발한 것이다.’라고 한 일구(一句)에서, 자사(子思)의 말 너머에 있는 뜻을 발명할 수 있다.” 하였다. 대개 희로애락이 발하기까지가 아니라 다만 생각하는 바라도 있으면, 이것은 이미 발한 것이다. 이 뜻은 정미(精微)하여 발하기 이전에 대해 더할 수 없이 충분히 다 이야기하였습니다. ○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을 때가 바로 희로애락이 발하기 이전이니, 항상 이 마음을 일깨워 여기서 미연에 방지하여야 한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계신(戒愼)ㆍ공구(恐懼)를 너무 심각하게 이야기할 것은 없다. 다만 수습(收拾)해 가다 보면 바로 이 가운데 있는 것이니, 이것이 이천(伊川)이 말한 공경이다.” 하였다. ○ 서산 진씨(西山眞氏)가 말하기를, “계신ㆍ공구는 다만 사물이 형성되지 않을 때에, 항상 경(敬)을 지켜 혼매(昏昧)해지지 않게 할 따름이다. 생각이 형성되기 전에 지각(知覺)이 어둡지 않으면 성(性)의 체재(體裁)는 스스로 가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정자(程子)가 이른바 ‘정(靜)한 가운데에 물(物)이 있다.’고 한 것을 배우는 사람들이 깊이 음미하여 실천해 보면, 응당 스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로지 말로만 구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발하기 이전에는 마음이 고요하여 진실로 털끝만 한 생각도 없지마는, 다만 적연한 가운데서도 지각이 불매(不昧)하여, 충막무짐(沖漠無朕)한 듯하면서도 만상(萬象)이 삼연(森然)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 경지는 극히 이해하기 어렵지마는, 이 마음을 공경으로 지키어 오래도록 함양하면, 절로 힘을 얻게 됩니다. 이른바 공경으로 함양한다는 것은 다른 방법이 있는 게 아닙니다. 다만 고요하게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정신이 깨어 있으면서 조금도 혼매(昏昧)함이 없게 할 뿐입니다. ○ 어떤 사람이 발하기 전에도 견문(見聞)이 있느냐고 물어서 신은 대답하기를, “만약 물(物)을 보기도 하고 소리를 듣기도 할 때에 생각도 따라 발현하면, 이는 진실로 이발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물이 지나가는 것을 눈으로 볼 뿐, 이것을 보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거나, 귀에 지나는 것을 듣기만 할 뿐, 이것을 듣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 보고 듣는 것은 있더라도 사유(思惟)를 하지 않았다면, 곧 그것이 미발이 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눈으로는 보아야 하고 귀로는 들어야 한다.” 하였고,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만약 반드시 보고 듣는 것이 없는 것을 미발처라고 하면, 이는 다만 일종의 의식(意識)이 혼매한 사람이 잠이 부족할 때에, 누군가가 깨우게 되면, 잠깐 동안 때와 장소를 인식하지 못할 적에 이런 기상(氣象)이 있는 것이다. 성현의 마음은 맑고 고요하며 총명하고 통철(洞徹)하므로, 결코 이와 같지 않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미발시에도 보고 듣는 것이 있습니다. ○ 또, “보통 사람[常人]의 마음도, 발하기 이전이 있을 터인데, 그 중(中)의 본체도 성현의 발하기 이전 마음과 분별이 없는가.” 묻기에, 신은 대답하기를, “보통 사람은 함양과 성찰의 공부가 없으므로, 그 마음이 어둡지 않으면 어지러워져서 중의 본체도 서지 않지마는, 다행히 잠시 동안이라도 혼란(昏亂)하지 않게 되면 그 발하기 이전의 중(中)도 성현과 분별이 없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혹시 흐트러지고 방자해지기도 하고, 시끄럽고 요란해지기도 하여, 바로 그 본체를 잃게 된다. 그러니 삽시간의 중(中)으로 어찌 온종일의 혼란을 구제하여 큰 근본을 세울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 또, “연평(延平) 선생은 정(靜)한 가운데서 희로애락이 발하기 이전을 중(中)이라 함을 본다고 하였는데, 발하기 이전은 어떤 기상(氣象)이 되는 것인가. 주자(朱子)는, ‘이 선생(李先生)은 고요한 가운데서 큰 근본을 체인(體認)하였다.’ 하였는데, 이 설은 어떤가?” 묻기에, 신은 대답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바로 이미 발한 것이니, 이미 체인이라고 하였으면 이는 성찰 공부요, 발하기 이전의 기상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는 만년(晩年)의 정론(定論)에서 체인(體認)한다는 글자를 신중하게 썼으니, 이것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학자가 정좌(靜坐)하고 있을 때에 이 공부를 하여, 발하기 이전의 기상을 가볍게 살펴보면, 학문에 나아가고 마음을 기를 적에 반드시 유익할 것이니, 이 또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발하기 전(前)은 찾을 수 없으며, 느낌이 인 뒤에는 알맞게 손쓸 수가 없다. 그러나 평소에 장경(莊敬), 함양 공부가 지극하여,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으로 어지럽히지 않는다면, 발하기 이전은 밝은 거울이나 흔들리지 않는 물과 같고, 발하고 나서는 중절(中節)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일상에서 본령(本領)의 공부로, 일에 따라 성찰하고 물에 나아가 미루어 밝힐 때에도 반드시 이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여태껏 사색(思索)을 강론하는 데 있어서 마음을 이미 발한 것으로만 보고, 일상의 공부도 다만 일의 본말 시종[端倪]을 살펴 아는 것만을 최초로 공부할 바로 삼았다. 그러므로 평소 함양하는 분야의 공부를 빠뜨려, 사람의 가슴속이 들뜨게 하고, 깊이 잠기고 순수한 맛이 없게 만들어, 말하고 일하는 사이에도 드러나는 것이 항상 급박하고 들떠서 다시 마음에 화락하고 온화하며 심후(深厚)한 기풍이 없게 된다. 대개 소견이 한 번 어긋나면 그 해로움이 이와 같은 데 이르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상은 함양(涵養)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성찰(省察)에 대하여


성(誠)은 무위(無爲)요, 기(幾)는 선악(善惡)이다. 주자(周子)의 《통서(通書)》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진리는 자연스러운 것이니, 어찌 인위적인 것이 있겠느냐. 미발(未發)일 때이다. 기(幾)라는 것은 움직임이 미미한 것이요, 선악이 그로부터 나뉘는 것이다.” 하였다. ○ 조치도(趙致道)가 말하기를, “이는 사람의 마음에서 미발의 체(體)를 밝히고, 이발의 단서(端緖)를 가리킨 것이다. 대개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물이 맨 처음 움직이는 미미한 것에서부터 살펴 나가, 결단하고 선택할 바를 알아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여 본심의 체를 잃지 않게 할 뿐이다. 선과 악은 비록 상대가 되지만, 마땅히 손[賓]과 주인[主]을 갈라야 하며, 천리와 인욕은 비록 분파(分派)되지만, 본줄기[宗]와 곁가지[孼]를 살펴야 한다. 정성이 동(動)하여 선(善)으로 나가는 것은, 나무가 뿌리로부터 줄기로 통하고 줄기로부터 잎[末]으로 통하여 상하(上下)가 서로 통하는 것과 같으니, 천리의 유행은 마음의 근본[本主]이요, 성정(性情)의 정통을 이은 본줄기[正宗]인 것이다. 혹시 곁가지가 잘되고 옆으로 뻗어 가 혹이나 군더더기가 기생(寄生)하는 것과 같은 것은 비록 정성이 움직인 것이라도 사욕의 유행이기 때문에, 이른바 악이요, 마음의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이는 손[賓]으로서 더부살이하는 것이지 정성의 본줄기는 아니다. 이는 곁가지로, 실로 일찍이 변별(辨別)하지 않거나 세밀히 가려내지 않는다면, 손[客]이 주인[主]을 타고[乘] 곁가지[孼]가 본줄기를[宗子]를 대신할 수도 있다. 배우는 사람은 사물이 처음 움직이는 기미에서부터 그 발하는 선악의 향배(向背)를 살펴본다면, 곧게 나가는 것은 천리(天理)가 되고, 곁으로 나가는 것은 인욕(人欲)이 되는 것이니, 곧게 나가는 것은 잘 인도하고, 옆으로 나가는 것은 막고 끊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공력에 이른다면 마음이 발하는 것이 자연히 하나의 도리에서 나와 천명(天命)을 보전할 수가 있다.” 하였다. ○ 범양 장씨(范陽張氏 장구성(張九成))가 말하기를, “한 생각 선하게 한 데에 하늘의 신, 땅의 신, 상서로운 바람, 화평한 기운이 모두 있고, 한 생각 악하게 한 데에 별ㆍ여귀(厲鬼)ㆍ흉년ㆍ악질의 전염병이 모두 있기 때문에, 군자는 혼자 있을 때를 삼간다.” 하였다.


성인이라도 생각지 아니하면 미치광이가 되고, 미치광이라도 잘 생각하면 성인이 된다. 《서경(書經)》 〈주서(周書) 다방(多方)〉

채씨(蔡氏)가 말하기를, “성(聖)은 본래부터 하기 어려운 것인데, 광(狂)이라도 능히 생각하면 성의 공부가 되어, 그 향하는 곳을 알 것이다. 성은 본래부터 이른바 망념(罔念)이 없지만, 조금이라도 어긋난 생각이 있으면, 비록 광에는 이르지 않았더라도 광이 되는 이치가 또한 거기에 있는 것이다.” 하였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잡으면[操] 있고 놓으면[舍] 없으며, 나가고 들어가는 데 때가 없어서 향할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은 마음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하였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마음을 잡는다[操]는 말은, 여기에 있는 것이요, 놓는다[舍]는 것은 잃어버린다는 말이다. 그 나가고 들어가는 데 정(定)한 때가 없고 정한 곳도 없어 움직임이 위태로우니 편안하기가 이와 같이 어려움이 있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출(出)과 입(入)의 두 글자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기 때문에, 모두 다 놓아서 없어진 데에서 오는 바라고 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이것은 마음의 체(體)ㆍ용(用)을 가리키는데, 두루 흘러 변화하여 헤아릴 수 없는 신명의 묘(妙)를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어떤 이가 “불자(佛者)에는 관심(觀心)의 설(說)이 있다는데, 그렇습니까?” 묻기에, 대답하기를, “마음은 몸의 주(主)가 되는 것이므로 하나이지 둘은 아닌 것이다. 이제 다시 어떤 물건이 도리어 마음을 관찰한다면, 이것은 이 마음 외에 다시 한 마음이 있어서, 이 마음을 주관(主管)하는 것이 되므로, 이 말은 틀리다.” 하였다. 묻기를, “‘아직 발하기 전에 다만 공경으로써 마음을 간직하고 길러야 하고 이미 발한 뒤에는 마땅히 공경으로써 살펴야 한다. 그러나 이미 발한 정(情)은 마음의 용(用)이어서, 여기에서 자세히 관찰하면 마음으로써 마음을 보는[以心觀心] 병통을 면치 못한다.’ 하는데, 어떠한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이미 발한 곳에서 마음의 본체의 권도(權度 권(權)은 저울, 도(度)는 자[尺])로 마음이 발하는 바를 살핀다면 경중(輕重)ㆍ장단(長短)의 차이 정도가 있겠지만, 만약 발하는 바의 마음을 가지고 따로 마음의 본체를 구하려고 한다면 그렇게 될 리가 없는 것이다. 대저 잡으면 있다는 것은, 저것으로서 이것을 잡아 두는 것이 아니며, 놓으면 없다는 것은 저것으로서 이것을 놓아서 잃어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스스로 잡으면 없던 것이 있게 되고, 놓아두고 잡지 않으면 있던 것도 없어진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사람은 꿈꾸는 사이에도 자기가 배운 바의 얕고 깊은 것을 점칠 수 있는데, 자리가 어수선한 것은 심지(心志)가 안정되지 않았거나, 잡아 두는 것이 확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묻기를, “사람의 마음에 걸려 있는 일이 과연 착하더라도 꿈에 나타나는 것은 해롭습니까?” 하기에, 대답하기를, “착한 일이라 하더라도 마음은 역시 동(動)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조짐(兆朕)이 있으니 꿈을 꾼다 하여 해로울 것은 없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모두 망동(妄動)이다.”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마음은 맑을 때가 적고, 어지러울 때가 많다. 마음이 맑을 때는, 보는 것이 밝고 듣는 것이 총명하여 사체(四體)를 구속하지 않아도 자연히 공손하고 삼가게 된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이와 반대인데, 이는 무엇 때문인가. 이는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미숙(未熟)하여,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고, 평상심(平常心)이 적기 때문이요, 세속의 마음을 없애지 않아서 실심(實心)이 완성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 주자(朱子)가 주차(奏箚)에서 이르기를, “사대부(士大夫)로서 의견을 아뢰는 자들이, 폐하의 입장에 근본 하지 못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일에만 애쓸 뿐이오니, 신(臣)은 그 정치가 나오는 근본을 반듯하게 하지 못하고, 사물에 응하는 근원을 맑게 하지 못하여 폐하의 정대하고 굉원(宏遠)하신 의도를 도와서 천하의 일을 폐하가 바라시는 뜻대로 하지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신이 바라옵건대, 폐하께서 마음이 한 번 싹트는 데도 반드시 이것이 천리(天理)인지 인욕(人欲)인지를 삼가 살피시어 천리이면 공경으로써 확충하시어 조금이라도 막히지 않게 하시며, 인욕이라면 공경으로써 극복하시어 조금이라도 엉기고 막히지 않게 하시어 언어와 동작으로부터 사람을 쓰고 일을 처리하는 데까지도, 모두 이것을 미루어 결재하시어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아시면 행하시는 데 힘이 부족하지 않을까 두렵게 여기시고, 그것이 그르다는 것을 아시면 버리시는 데 과감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신다면 성심(聖心)이 환하게 트여서 안팎이 서로 투철하여, 털끝만 한 사욕도 그 사이에 끼일 수 없게 되고, 천하의 일은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대로 아니 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몸에, 분(忿)하고 노여워하는[懥] 바가 있으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하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하고, 근심하고 걱정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한다. 《대학》 전(傳) 7장. 아래도 이와 같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몸에 있다고[身有]’ 할 때의 몸[身]은 마음[心]이 되어야 한다.” 하였다. ○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분치(忿懥)는 노(怒)한다는 것인데, 대개 이 네 가지는 모두 마음의 작용이므로, 사람에게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마음에 지니고 있으면서 살피지 못한다면, 욕망이 일고, 감정을 가누지 못해 그 작용하여 행하는 바가 바른 것을 잃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 또, “이 네 가지는 무심한 상태에서 표현되도록 해야지 먼저 마음속에 깔려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노여워할 대상이 있을 때 그 사람이 지은 죄를 놓고 때려 주고는 마음이 이내 편안해진다면 이는 마음에 앙금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이 항상 편치 않다면 바로 이런 마음이 있게 된다.” 하였다. ○ 또, “마음이 조금이라도 물(物)에 얽히면 즉시 동(動)하게 된다. 물에 얽히는 까닭은 세 가지가 있다. 미래(未來)에 기대하는 마음을 가진 것, 일이 다 끝났는데도 아직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하는 것, 일에 응할 때에 치우친 뜻이 있는 것이다. 이 모두가 물에 결박하여 매여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는데 다른 일이 면전(面前)에 오게 되면 응하는 것이 바로 어긋나니, 어찌하면 마음이 바른 것을 얻겠는가. 성인의 마음은 맑아 텅 비어 밝아서 사물을 볼 때에 크건 작건 4방 8면으로 물에 따라 응하지 않는 것이 없어, 이 마음에 처음부터 그런 일을 둔 적이 없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단주(澶州)에서 다리를 수리할 때, 긴 들보 하나가 부족하여 널리 민간에 구하였는데, 그 뒤에는 나들이하다가도 숲의 좋은 나무를 보게 되면, 꼭 계산하여 재어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다. 그 일로 인해 배우는 사람들에게 경계하기를, “마음에는 한 가지 일[事]도 두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자기 자신을 탓하고 나무라는 마음이 없을 수 없으나, 너무 오래 가슴속에 두고 후회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마음이 있지 아니하면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마음이 없다면 곧 주재하는 것이 없어서 그 몸을 검속할 수 없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이 마음의 신령한[靈] 것은 한 몸의 주(主)가 되는 것이므로, 진실로 그 바른 것을 얻어서 여기에 있게 되면 귀ㆍ눈ㆍ코ㆍ입과 사지백해(四肢百骸)가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이 없이 그 일에 이바지하고, 동정(動靜)ㆍ어묵(語默)ㆍ출입(出入)ㆍ기거(起居)가 오직 내가 하라는 대로 하게 되어서 이(理)에 맞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저기로 팔려서 육신을 통제하는 것이 없어서, ‘머리를 들어 새를 보다가 머리를 돌려 다른 사람에게 딴소리한다.’는 자가 되지 않음이 드물다.” 하였다. ○ 또, “오늘의 배우는 자들이 크게 진보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마음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하건대, 내가 소년 시절 동안(同安 지명(地名))에서 살았는데, 밤에 종소리가 울리면 한 번 종 친 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이 마음은 이미 달리기 시작했다. 이것을 두고 경계하고 반성하였으며, 그제서야 학문을 하는 것은 모름지기 치지(致志)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마음은 반드시 내 몸속[腔子裏]에 있어야 한다.” 하였다. 강자(腔子)는 몸뚱이[軀殼]와 같은 말이다. ○ 남헌 장씨(南軒張氏)가 말하기를, “마음이 거기에 있다는 것은 공경을 말한다.” 하였다. 교봉 방씨(蛟峯方氏 방봉신(方逢辰))가 말하기를, “위에서는 마음을 두는 것의 병폐를 말하였고, 여기서는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의 병폐를 말하였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이는 비록 마음을 두느냐 마음을 두지 않느냐 구별이 있지마는, 그 실상은 마음에 편벽되게 얽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주재(主宰)를 세울 수가 없어서 마음이 있지 않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심과 무심은 두 가지 병폐가 아닌 것입니다.

이상은 성찰(省察)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함양(涵養)과 성찰(省察)에 대한 통론


○ 이윤(伊尹)이 말하기를, “이[諟] 하늘의 밝은 명령[明命]을 돌아본다.[顧]” 하였다. 《서경(書經)》 〈상서(商書) 태갑(太甲)〉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고(顧)는 어디에 항상 눈[目]을 두는 것을 말한다. 시(諟)는 이[此]와 같은 말이다. 하늘의 밝은 명령은 곧 하늘이 나에게 준 것으로 내가 덕(德)으로 삼는 것이니, 항상 눈에 둔다면 밝지 않은 때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다만 체득한 도리가 오래도록 눈앞에 있어 사물에 가리거나 막히지 않았다는 것이지 따로 한 물건이 있어 그 형상(形象)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 쌍봉 요씨(雙峯饒氏 요로(饒魯))가 말하기를, “고요할 때 마음을 보존하는 일과 움직일 때 살피는 일 모두가 돌아보는 일[顧]이다. 고요할 때에는 보이지 않는 데서 삼가고 들리지 않는 데서도 두려워하며, 움직일 때에는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보고[卽物觀理] 일에 따라 마땅한 것을 헤아리는 것, 이것을 항상 거기에 눈을 둔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 호계수(胡季隨)가 말하기를, “아직 발하기 전은 반드시 함양(涵養)할 것이요, 발했다 하면 반드시 성찰(省察) 공부를 해야 하니, 함양하는 것이 익숙할수록 성찰도 더욱 정(精)하여진다.” 하였다.


불경(不敬)하지 말고[毋] 의젓하게 생각하고, 말을 안정되게 하면 백성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예기(禮記)》

진씨(陳氏)가 말하기를, “무(毋)는 금지하는 말이다.” 하였다. ○ 범씨(范氏)가 말하기를, “경례(經禮) 삼백(三百)과 곡례(曲禮) 삼천(三千)을 한마디로 말하게 되면, 불경(不敬)한 것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불경(不敬)하지 않으면 상제(上帝)라도 대할 수 있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마음이 안정된 사람은 그 말이 편안하고 조용하며, 안정되지 못한 사람은 그 말이 가볍고 빠르다.” 하였다. 이상의 네 가지는 경의(經意)를 해석한 것이다. ○ 또 말하기를,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하는 것[主一]을 공경이라 하고, 잡념을 가지지 않는 것[無適]을 일(一)이라 한다.” 하였다. 주일무적(主一無適)을 물으니,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다만 치달리지 않는 것인데, 예를 들면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한 가지 일[一事]을 끝내기도 전에 또 다른 일을 하려고 하여,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뉘는 것과 같다. 학문은 다만 전일(專一)해야 한다.” 하였다. ○ 설씨(薛氏)가 말하기를, “첫 걸음을 가면 마음이 첫 걸음에 있고, 두 걸음을 가면 마음도 두 걸음 위에 있는 것을 공경[敬]이라 한다. 만일 첫 걸음을 걸으면서 마음을 두세 걸음 밖에 두고, 두 번째 걸음을 걸으면서 마음이 대여섯 걸음 밖에 있으면 공경이 아니다. 글을 쓴다든가 처사(處事)하는 것 같은 일도 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니, 첫 글자를 쓰면 마음이 첫 글자에 있고, 첫 일을 할 때는 마음도 첫 일에 있어서 일마다 전일하면 이것이 바로 공경[敬]이다.” 하였다. ○ 각헌 채씨(覺軒蔡氏 채모(蔡模))가 말하기를 “주일(主一)이란 것은 동정(動靜)을 모두 포함하는 것인데,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이 담연(湛然)하게 항상 보존되는 것은 고요하면서 주일한 것이요, 일이 있을 때는 마음이 이 일에 응하여 다시 다른 일이 섞이지 않는 것은 움직이면서 주일한 것이다.” 하였다. ○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일이 없을 때는 공경[敬]이 이면(裏面)에 있고, 마음속을 이르는 것이다. 일이 있을 때는 공경이 일 위에 있어서, 일이 있든 없든 나는 공경이 끊어지는 적이 없다. 그러므로 정자(程子)는, ‘배움은 전일(專一)한 데에 이르러야 좋게 된다.’ 하였는데, 대개 전일하면 일이 있든지 없든지 모두 이와 같은 것이다.” 하였다. ○ 정자가 말하기를, “정제(整齊)하고 엄숙(嚴肅)하면 마음이 절로 전일해지는 것인데, 전일하면 그르거나 편벽된 것이 침범하지 않는다. 엄격하고 위엄 있는 것과 공경하고 조심하는 것이 공경의 도가 아니지만, 공경에 이르려면 모름지기 이를 통해 들어가야 한다.” 하였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이천(伊川)의 정제엄숙(整齊嚴肅)의 한마디는 사람들에게 간절하고 지극한 공부를 말해 준 것이다.” 하였다. ○ 상채 사씨(上蔡謝氏 사양좌(謝良佐))가 말하기를, “공경은 항상 깨어 있는 방법이다.” 하였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성성(惺惺)이란 곧 마음이 혼매(昏昧)하지 않은 것을 말하고, 공경은 정제엄숙한 것을 말한다. 실로 이렇지만 마음이 만약 혼매하여 이치를 밝히는 데에 밝지 않다면, 비록 억지로 붙잡으려 한들 어찌 공경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화정 윤씨(和靖尹氏 윤돈(尹焞))가 말하기를, “공경이란 것은 그 마음을 거두어들여서 일물(一物)도 용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였다. 윤씨(尹氏)가 말하기를, “공경에 무슨 형(形)과 영(影)이 있겠는가. 다만 심신(心身)을 수렴하면 곧 주일(主一)이다. 예컨대 사람들이 신을 모신 사당[神祠]에 가서 공경을 다할 때에 그 마음을 수렴하고 다시 털끝만 한 잡념도 들러붙지 않게 한다면, 그것은 주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 어떤 사람이, 세 선생의 정자(程子)와 사씨(謝氏)와 윤씨(尹氏)이다. 공경[敬]에 대한 말이 다른 것을 물었더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비유하자면 이 방[室]으로 사방에서 다 들어올 수 있지만, 한쪽으로부터 여기까지 들어왔다면, 나머지 세 쪽[三方]에서 들어오는 곳도 다 그 가운데 있는 것과 같다.” 하였다. ○ 요자회(廖子晦 요덕명(廖德明))가 말하기를, “정자(程子)는 ‘주(主)가 있으면 실(實)해진다.’ 하였고, 정자(程子)가 주가 있으면 실해진다는 것은 외환(外患)이 들어올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또, ‘주가 있으면 허(虛)해진다.’고 하였는데, 정자가 주가 있으면 허해진다고 한 것은 간사한 것이 들어갈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 허(虛)와 실(實) 두 설(說)이 비록 같지 않지만, 모두 공경을 위주(爲主)로 하여 말한 것이다.” 하였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자회(子晦)의 말은 매우 좋으니, 공경하면 곧 마음의 욕심이 싹트지 못하고, 외부의 유혹이 들어오지 못한다. 마음의 욕심이 싹트지 못한다는 것으로 말하면 허(虛)요, 외부의 유혹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으로 말하면 실(實)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일시적인 것이다.” 하였다. 이상의 여덟 가지는 공경의 뜻을 논한 것이다. ○ 정자(程子)는, 《예기》 〈표기(表記)〉의 “군자가 장중하고 공경하면 날로 강해지고, 안일하고 방자하면 날로 구차해진다.”는 말을 몹시 좋아했다. 대개 보통 사람의 정(情)은 거리끼는 바가 없게 되면 날로 방탕해지고, 스스로 검속(檢束)하면 날로 규구(規矩)를 이룬다. ○ 정자가 말하기를, “공경은 백사(百邪)를 이긴다.” 하였다. ○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공경은 사람을 붙들어 주는 도리이다. 사람이 방자하고 게으를 때에 공경이 바로 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붙들어 준다. 항상 이와 같이 하면 아무 거리낌 없이 제 마음대로 행동하고 간사하고 사치하는 뜻이 조금 있더라도 저절로 물러나게 된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공경은 인욕(人欲)을 대적(對敵)하는 것이니, 사람이 항상 공경하면 천리(天理)가 스스로 밝아져서 인욕이 올라오지 못하게 된다.” 하였다. 이상의 네 가지는 공경이 인욕을 이긴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 주자가 말하기를, “정(靜)한 가운데 사사로운 뜻이 넘쳐 나오게 되는 것이 배우는 사람들의 공통된 근심거리이다. 마땅히 경(敬)을 위주로 하여 사사로운 뜻이 싹트는 것이 대부분 어떠한 일인지를 깊이 살피고, 그 중요한 곳에 나아가 더 통렬히 억누르며 오래하다 보면 온전히 익혀 절로 효력을 볼 것이다.” 하였다. ○ 또, “사람이 하나의 바른 생각을 지니면 저절로 분명해진다. 또 곁에서 따로 생겨난 작은 생각 하나가 점차 널리 퍼져 가는 것이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 묻기를, “평소에 지경(持敬)하는 것이 정(靜)한 때가 가장 좋으나, 일에 임하면 하기 싫고 게을러진다든가, 일에 임하여 힘을 쓰면 마음이 부산해지는 것을 깨닫는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공경을 지니고 있다가도 갑자기 사념(思念)에 끌려가 버리게 되니, 이 세 가지를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오늘날 사람들이 공경을 따로 하나의 일로 간주하기 때문에, 염증이나 권태를 느끼고 생각에 끌려다니는 것이다. 공경은 다만 자기의 한마음이 항상 깨어 있는 것이요, 그것으로 따로 한 가지 일을 삼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 선생이 묻기를, “백우(伯羽)는 어떻게 공부하였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정좌(靜坐)를 배우고 생각을 철저히 억눌렀다.” 하고, 말하기를, “억눌러도 안 되니, 다만 물리치는[放退] 것이 옳다. 물리친다는 것은 다만 염려(念慮)되는 바에 끌려 함께 가지 말라는 것이다. 전혀 사려(思慮)가 없어서는 안되니, 단지 간사한 생각이 없을 뿐이다.” 하였다. ○ 묻기를, “줄곧 마음을 잡고 있다가 놓아 버리면 바로 해이해져 흩어지는 것을 느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것은 그렇게 꽉 잡아 두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잡고 있는 마음을 놓아 버리면 또 하나의 마음을 더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만약 마음을 놓아 버리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다잡으면 이것이 바로 공경[敬] 공부이다.” 하였다. 묻기를, “오래 정좌(靜坐)하다 보면 한 생각이 싹트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어떻게 하여야 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 생각이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인지를 보아야 한다. 만약 그것이 좋은 일이라면 마땅히 그대로 진행해야 할 것이요, 혹시 이 일에 대해 생각이 투철하지 못하다면 더 생각을 해 볼 것이며, 만약 좋지 못한 것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신이 이와 같음을 깨닫기만 하면 이 공경 공부는 곧 그 속에 있는 것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공경하는 마음이 있으면 몸가짐이 자연히 수렴(收斂)되고 일부러 조절하려고 하지 않아도 온몸이 저절로 안정되어진다. 만약 너무 힘써 몸을 조절하려 하면 오래하기가 어렵고 병통이 생긴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정돈하여 수렴하면 너무 힘쓰게 되고 조용히 마음을 놓으면 또 해이해지는 데 떨어지게 되니, 이것이 바로 배우는 자의 공통된 근심이다. 그러나 정자(程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역시 반드시 이로부터 나가야 하니, 덕이 더해진 뒤에는 자연히 이리저리 학문의 근원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지금은 역시 우선 정돈하여 수렴하는 데 힘쓰되, 다만 안배하거나 기다려서는 안 되니, 그렇게 되면 병통이 될 뿐이다.’ 하였다.” 하였다. 위의 7조목은 병통을 살펴 다스리는 것을 말한 것이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처음 마음을 바르게 할 적에는 마땅히 자기의 마음을 엄한 스승[嚴師]으로 삼아서, 모든 동작(動作)을 하게 되면, 두려운 바를 알게 되니, 이렇게 1, 2년 동안 굳세게 지켜 가면 자연히 마음이 바르게 된다.” 하였다. ○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공경이란 송연(竦然)히 두려워하는 바가 있는 듯하다는 뜻인데, 항상 두려워하게 되면 감히 자기의 마음을 속일 수 없어 성(誠)에 나아갈 수 있다.” 하였다. ○ 면재 황씨(勉齋黃氏 황간(黃榦))가 말하기를, “공경은 주일무적(主一無適)을 말한다고 정자(程子)는 말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설은 또 경(敬) 자를 ‘오직 두려워한다.’는 뜻에 가깝게 보았다. 공경은 이 마음이 숙연(肅然)하여 두려워하는 바가 있는 것을 말하니, 두려워하면 마음이 하나[一]로 모아져서 마치 종묘(宗廟)에 들어가 군부(君父)를 뵈올 때와 같이 저절로 잡념이 없어지고, 한가하게 거하고 제멋대로 행동할 때에는 생각이 어수선하여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설은 서로 표리(表裏)가 되니, 배우는 자가 체험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각헌 채씨(覺軒蔡氏 채모(蔡模))가 말하기를, “사람의 한 마음은 허령(虛靈)한 가운데 지각(知覺)을 하되, 항상 숙연(肅然)하여 어지럽지 않고, 형연(炯然)하여 어둡지 않으니, 곧 고요한 가운데 이(理)의 본체가 있지 않음이 없고 감응하는 가운데 이(理)의 작용이 행해지지 않음이 없다. 대개 허령한 가운데 지각하는 것은 욕심에 움직이지 않는 바가 없으므로, 곧 이 마음의 체용(體用)도 따라 어두워지고 어지러워진다. 이 때문에 공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진실로 두려운 마음으로 항상 귀신이나 부모ㆍ스승이 위에 임한 듯이 하고, 아래로는 깊은 못 위나 얇은 살얼음이 발 밑에 있는 듯이 할 수 있다면, 허령한 가운데 지각하는 것이 스스로 어둡거나 어지러운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공경의 뜻이니, 오직 두려워하는 바가 거기에 가까울 것이다.” 하였다. 이상의 4조목은 두려움을 가지고 공경[敬]의 뜻을 풀이한 것이다. ○ 남헌 장씨(南軒張氏 장식(張栻))가 말하기를, “이계수(李季修)가 묻기를, ‘이른바 공경에 대해 마땅히 힘써야 하고 진실로 게을러서는 아니 되니, 해가 져 쉴 때에도 마땅히 때에 따라 힘써야 합니까.’ 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해가 지면 휴식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공경인 것이니, 해가 지면 쉬는 것이 게으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공경의 이치를 논할 수 있다.” 하였다. 이것은 공경이 있지 않을 때가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대개 주야(晝夜)의 동정(動靜)에 끊임이 없어야 할 것이니, 만약 밤이 되어 휴식하는 것을 공경이 아니라고 한다면, 공경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 설씨(薛氏)가 말하기를, “공경은 덕(德)이 모인[聚] 것이라고 한 옛말이 있는데, 이 말은 아주 깊이 체득(體得)해야 한다. 대개 도(道)의 묘한 것은 헤아릴 수가 없고 정(定)한 바가 없으나, 오직 공경하면 엉겨 모여서 이 이치가 항상 있게 된다. 마음이 경건하면 엉겨 모여서 덕이 마음에 있게 되며, 용모[貌]가 경건하면 엉겨 모여서 덕이 용모에 있게 된다. 귀ㆍ눈ㆍ입ㆍ코와 같은 종류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공경하지 않으면 마음이 멋대로 흩어지고 온몸이 해이해져 비록 사람의 형체는 갖추었다 해도, 그 실상은 한 덩어리 혈기로 이루어진 몸뚱이일 뿐이요, 물건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 경(敬)이란 한 글자가 곧 덕을 모으는 근본으로, 천형진성(踐形盡性)하는 요령이다.” 하였다. 이것은 공경으로써 덕을 모은다는 말이다.


군자는 공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리[義]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 공경과 의리가 서게 되면 덕(德)이 고립되지 않는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공경을 주로 하여 그 안을 곧게 하고 의리를 지켜서 그 밖을 방정하게 한다. 공경이 서서 안이 곧게 되고 의리가 나타나 밖이 방정하게 되는 것인데, 의리가 밖에 나타난다는 것은 밖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공경과 의리가 서 있으면 그 덕이 성할 것이요, 또 덕이 고립되지 않는다.” 하였다. ○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본령(本領)은 마땅히 공경을 주로 삼고 더욱 의리를 모으는 노력을 하여 이익과 욕망이 가리는 것을 물리치면, 공경에 더욱 도움이 된다. 다만 분발시키고 경계하도록 격려하는 한 가지 일은 동정(動靜)을 관통(貫通)하니, 단지 일이 없을 때에는 한결같이 유지해 기르면 되지만 일이 있으면 시비(是非)와 취사(取舍)를 가려야 하므로, 안을 곧게 하고 밖을 방정하게 하는 구별이 있게 되는 것이지, 동정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존양(存養)을 익숙하게 하고 나서, 태연하게 행해 나가면, 진보가 있게 된다.” 하였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공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는 데만 힘쓰고, 밖을 방정하게 하는 데는 힘쓰지 아니한다면 어떠합니까?” 하니, 정자가 말하기를, “안[中]에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나타나니, 오직 안이 곧지 않은 것을 걱정할 뿐이다. 안이 바르면 밖도 반드시 방정해진다.” 하였다. ○ 오봉 호씨(五峯胡氏 호굉(胡宏))가 말하기를, “공경에 거하는 것은 의리를 정밀하게 하는 방법이다.” 하였다. ○ 공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리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는 것에 대해 물으니,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말을 그렇게 하였지만, 모름지기 스스로가 공부에 착수해야 이러한 것을 볼 수 있다. 공경으로써 안을 곧게 한다는 것[敬以直內]은 조금도 사사로운 뜻이 없고 가슴속에 통연(洞然)하며, 위로도 통하고 아래로도 통해 표리(表裏)가 한결같은 것이요, 의리로써 밖을 방정히 한다는 것[義以方外]은 바른 곳을 보면 그렇게 결정하고, 바르지 않은 곳을 보면 그렇지 않게 결정하여, 확실하고 방정하게 하여서, 반드시 스스로 공부해 나아가야 한다.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배운 사람들은 한 구절에 대해 물어 성인이 그에게 한 구절을 답해 주면 곧 깨달아 실제로 행하려고 하였다. 지금은 말만 많이 하고 실행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만약 실제로 공부를 해 보려면, 단지 ‘경이직내(敬以直內)’와 ‘의이방외(義以方外)’ 여덟 자를 일생 동안 쓰더라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공경[敬]이 게으른 것을 이기는 이는 길(吉)하고 게으른 것이 공경을 이기는 이는 멸망하며, 의리가 욕심을 이기는 이는 순탄하고 욕심이 의리를 이기는 이는 흉(凶)하다. 《대대례(大戴禮)》 〈무왕천조(武王踐阼)〉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공경하면 설 수 있고, 게으르면 쓰러지는 것이다. 이치로써 일에 따르는 것은 의리요. 이치로써 일에 따르지 않는 것은 욕심이다. 공경과 의리는 체(體)와 용(用)이다.” 하였다. ○ 진씨(眞氏)가 말하기를, “공경하면 만 가지 선(善)이 함께 서고, 게으르면 만 가지 선이 함께 폐해진다. 의(義)로우면 이(理)가 주재하게 되고 욕심스러우면 사물이 주재하여, 길흉(吉凶)과 존망(存亡)이 나누어지게 되는 것인데, 상고(上古) 시대의 성인들은 이것을 조심하였다.” 하였다. 이 단락의 말은 《단서(丹書)》에서 나온 것이다. 《단서》에는 황제(黃帝)ㆍ전제(顓帝)의 도(道)가 실려 있으므로 상고 시대의 성인들이라 한 것이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공경과 의리를 겸비[夾持]하면, 이것으로부터 곧 천덕(天德)에 상달(上達)한다.” 하였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협지(夾持)의 두 자(字)를 둔 것이 좋다. 경(敬)이 안[中]에서 주재하고, 의리는 밖에서 막아, 둘이 서로 버티고 있으니, 놓아두려고 해도 안 되고, 조금도 달아나 없어짐이 없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아래에서는 물욕(物欲)에 물들지 않고, 다만 천덕에 상달할 것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공경[敬]은 체(體)요, 의리[義]는 용(用)이라 하겠습니다. 비록 내외(內外)로 나눈다 하더라도 그 실은 공경이 의리를 겸비하고 있습니다. 대개 안을 곧게 하는 경은 공경으로써 존심(存心)하는 것이요, 밖을 방정하게 한다는 의리는 공경으로써 일에 응하는 것입니다.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에 발명이 친절하므로 삼가 다음에 기록합니다.

잠(箴)에 이르기를,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높이 바라보며, 마음을 정(靜)하게 하여, 상제(上帝)를 대한다. 이는 정(靜)할 때 어김이 없다는 말이다. 발의 움직임은 무겁게 해야 하고, 손의 움직임은 공순해야 하며, 땅을 가려서 밟고, 개미둑[蟻封]은 돌아가라. 의봉(蟻封)은 개미둑이다. 조그마한 곳이라도 돌아서 간다는 말이다. 이것은 움직임에 어김이 없는 것을 말한다. 문(門)을 나서면 손님을 대하듯 하며, 일을 할 적에는 제사 받들듯이 하여, 전전긍긍(戰戰兢兢)하여 감히 혹시라도 쉽게 하지 마라. 이것은 겉[表]이 바른 것을 말한다. 병(甁)을 막듯이 입을 조심하고 성(城)을 지키듯이 뜻을 지켜 공손하고 전일하게 하여 가볍게 하지 말라. 이것은 속[裏]이 바른 것을 말한다. 동으로 간다 하고는 서로 가지 말 것이며, 남으로 간다 하고 북으로 가지 말라. 일을 당하면 거기에만 마음을 두고 다른 데로 흩뜨리지 말라. 이것은 바른 마음이 일로 통하는 것을 말한다. 둘로 셋으로 나누지 말아 오직 마음을 전일하게 하면 만 가지 변화를 볼 것이다. 이것은 일에 집중하고 마음에 근본을 둠을 말한다. 마음이 여기에 종사하는 것을 지경(持敬)이라 하는데, 동정(動靜)에 어김이 없게 하고 표리(表裏)를 서로 바르게 하라. 이것은 윗글의 뜻을 다 맺는 것이다. 잠시라도 틈이 있으면 사욕이 만 갈래로 일어나서, 불을 놓지 않아도 뜨거우며, 얼음을 얼리지 않아도 차진다. 수유(須臾)는 때를 말한다. 이것은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가는 병폐가 없을 수 없음을 말한다. 조금[毫釐]이라도 어긋나는 것이 있게 되면, 천지(天地)의 위치가 바뀌어, 삼강(三綱)이 이미 문란해지고, 구법(九法 홍범구주(洪範九疇))도 무너질 것이다. 호리(毫釐)는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주일(主一)할 수 없는 병통을 말한다. 아아, 너희들은 생각해야 하고 공경해야 할 것이다. 묵경(墨卿)에게 이 경계를 맡겨서 감히 영대(靈臺 마음)에 고(告)한다.” 하였다. 이 일편(一篇)은 총괄하여 맺는 것이다. ○ 서산 진씨(西山眞氏)가 말하기를, “공경의 뜻은 여기에 이르러 더 남은 것이 없으니, 성학(聖學)에 뜻을 둔 이는 마땅히 익히고 반복해야 한다.” 하였다. ○ 주자(朱子)의 집 양쪽에는 좁은 방이 있었는데, 한가할 적에 그 안에 조용히 앉아 독서하였는데, 왼쪽은 ‘경재(敬齋)’라 이름하고, 오른쪽은 ‘의재(義齋)’라 이름하고, 다음과 같이 기문을 지었다. “《주역(周易)》을 읽고 얻은 두 가지 말은, ‘경이직내(敬以直內)’와 ‘의이방외(義以方外)’이다. 학문하는 큰 요체로 이와 바꿀 것은 없다고 여겼지만, 힘쓸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하다가 《중용》을 읽고 거기에서 논한 수도(修道)를 가르침이라 한다는 것에서 반드시 계신공구(戒愼恐懼)를 처음으로 삼아야만 지경(持敬)하는 근본을 얻는다는 것을 알았다. 또 《대학》을 읽고 거기에서 논한 덕을 밝히는 차례에서 반드시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먼저 하여야만 의를 밝히는 단서(端緖)를 터득할 수 있음을 알았다. 얼마 있다가 이 두 가지의 공효는 일동일정(一動一靜)이 서로 용(用)으로 되는 것이며, 또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의 태극(太極)의 이론에 합치되는 것을 본 뒤에 천하의 이(理)가 어둡건 밝건, 크건 작건, 멀건 가깝건, 얕건 깊건 하나로 꿰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완미(玩味)하고 즐기면 종신토록 하여도 싫증나지 않을 것이니, 어느 겨를에 바깥의 것을 사모하겠는가.” 하였다.

이상은 함양과 성찰을 통틀어 논한 것입니다.


 

존성(存誠)을 반복하여 정심(正心)의 의(義)를 다하는 것과 함양(涵養)과 성찰(省察)에 대하여


○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간사한 것[邪]을 막고 성실함을 보존한다.” 하였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간사한 것을 막으면 성실은 저절로 있게 되니, 사람이 집에서 담을 고치지 않으면 도둑을 막지 못하는 것과 같다. 동쪽에서 들어오는 도둑을 쫓으면 다시 서쪽에서 들어오고, 한 도둑을 쫓으면 다른 도둑이 들어오니, 담을 고쳐서 도둑이 자연히 이르지 않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러므로 간사한 것을 막고자 한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공경은 간사한 것을 막는 도(道)요, 간사한 것을 막는 것은 정성을 보존하는 것이니, 한 가지 일이다. 선(善)을 버리면 곧 악(惡)이요. 악을 버리면 곧 선이니, 비유하자면 문을 나가지 아니하면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 “생각[思慮]은 비록 많아도 바른 데서 나온 것이라면, 역시 해가 없지 않습니까.” 하니, 말하기를, “이것이 종묘(宗廟)에서는 공경을 주로 하고, 조정에서는 씩씩한 것을 주로 하며, 군려(軍旅)에서는 엄숙한 것을 주로 하는 것이 좋으나, 만약 때가 아닌데도 분발하여 어지러이 절도가 없다면 비록 바른 것이라도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이 선생(李先生)이, 사람 마음 가운데 있는 커다란 악념(惡念)은 바로 제압하기 쉽지만,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이해(利害)를 따지느라 왔다 갔다 하는 염려 이것은 부념(浮念)이다. 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은 몰아내어 없애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였는데, 이제 보니 사실 그렇다.” 하였다. ○ 임천 오씨(臨川吳氏 오징(吳澄))가 말하기를, “범인(凡人)들도 이것이 이(理)가 되고 선(善)이 되고, 저것이 욕(欲)이 되고 악(惡)이 되는 것을 잘 알지만, 뜻이 기(氣)를 이기지 못하여, 한가히 홀로 처하는 사이에 간사한 생각이 일어난다. 조금이라도 간사한 생각이 있게 되면 곧 막고 누르는 것이 바로 스스로 속이지 않는 정성이다. 간사한 생각이 없다면 생각하는 바가 다 이(理)요, 선(善)이다. 그러나 한 생각이 일어나자 마자 또 한 생각이 싹트거나, 한 생각이 그치기도 전에 여러 생각[諸念]이 서로 이어진다면 이것은 둘로 갈라진 것이며 잡된 것이다. 욕(欲)이나 악(惡)이 아니라도 간사한 것이라 한다. 대개 먼저 사욕과 악념의 간사한 것을 끊어 버릴 수 있어야 둘로 갈라지는 것이나 잡된 것의 사사로움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니,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차례를 어찌 뛰어넘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시경(詩經)》 삼백편(三百篇)의 뜻을 한마디로 말하면, “생각[思]에 간사한 것[邪]이 없다.”라고 할 수 있다. 《논어》 ○ 역시 공자(孔子)의 말씀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선한 것은 사람의 착한 마음을 감동시켜 일으킬 수 있고, 악한 것은 사람의 방탕한 뜻을 징계하고 벌줄 수 있어, 그 작용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정성(情性)의 바름을 얻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러나 그 말은 은미하고 완곡하며 또 각각 한 가지 일로 인하여 일어난 것도 있다. 그 전체를 곧바로 가리킨 것을 찾아보면 이렇게 명백하고도 곡진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공자[夫子]가 시 삼백편을 말하면서 오직 이 한마디로써 그 뜻을 충분히 덮을 수 있다 한 것이니, 대개 그 사람에게 보인 뜻이 깊고 간절하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공자의 이 말은 시를 논하기 위하여 말한 것이지만 사무사(思無邪)가 바로 정성이므로, 정심장(正心章)에 실었습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사무사(思無邪)와 무불경(毋不敬)의 이 두 구절을 따라 행하면 어찌 어긋남이 있겠는가. 어긋남이 있는 것은 모두 불경(不敬)과 부정(不正)에 말미암은 것이다.” 하였다. ○ 소자(邵子)가 말하기를, “입으로 말하는 것은 몸으로 행하는 것보다 못하고, 몸으로 행하는 것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것만 못하다. 입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이 들을 수 있고, 몸으로 행하는 것은 사람이 볼 수 있으며,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것은 신(神)이 알 수 있다. 사람의 총명한 것도 속일 수가 없는데, 하물며 신의 총명한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입에 부끄럽지 않은 것은 몸에 부끄럽지 않은 것만 못하고, 몸에 부끄럽지 않은 것은 마음에 부끄럽지 않은 것만 못하다. 입의 허물은 없애기 쉬워도 몸의 허물은 없애기가 어렵고, 몸의 허물은 없애기 쉬워도 마음의 허물은 없애기가 어렵다.” 하였다. ○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생각에 간사한 것이 없다[思無邪]는 것은 정성이다.” 하였다. ○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생각은 말과 실천보다 먼저 있으므로, 생각에 간사한 것이 없으면 말과 행동에도 다 간사함이 없는 것이다. 실천에 간사한 것이 없다 해서 정성스러운 것은 아니며 생각에 간사한 것이 없어야 정성이 될 수 있다. 이는 표리(表裏)에 다 간사함이 없는 것이니, 철저히 털끝만 한 바르지 않음도 없는 것이다.”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정성이란 것은 하늘의 실리(實理)요, 마음의 본체입니다. 사람이 그 본심을 회복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적인 욕심과 바르지 않은 것[私邪]에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공경을 주로 삼아 사사를 없애면 본체가 완전해지니, 공경은 공부를 하는 요체요, 정성[誠]은 공을 거두는 땅으로, 공경을 통해 정성에 이르릅니다.

이상은 존성(存誠)을 반복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는 의리를 다함을 말하였고, 함양과 성찰을 겸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마음의 본체는 담연(湛然)히 비고 밝아서 빈 거울과 같고, 평평한 저울대와도 같아, 물(物)에 감응되어 동하면 칠정(七情)이 거기에 응하는 것이니, 이것이 마음의 작용입니다. 다만 기질이 마음을 얽어매고 욕심이 가려서 본체가 능히 설 수 없으므로 그 작용이 그 바름을 잃기도 하는 것이니, 그 병통은 어둡고 어지러운 것에 있을 따름입니다. 어두움[昏]의 병통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지혼(智昏)이란 것으로 이는 궁리를 못하여 시비에 몽매(蒙昧)한 것을 말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기혼(氣昏)이란 것으로 게으르고 방일(放逸)하여 잠잘 생각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지러운[亂] 병통도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나쁜 생각[惡念]이란 것으로, 외물(外物)에 유혹되어 따지고 재는 개인적인 욕망이고, 또 하나는 쓸데없는 생각[浮念]이란 것으로, 도거(掉擧)하고 산란(散亂)하게 도거(掉擧)는 생각이 일어나는 모양입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생각은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므로 부념(浮念)이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은 두 가지 병통에 곤란해져서 물에 감응되기 전에는 어둡지 않으면 어지러워서 미발(未發)의 중을 잃고, 물에 감응되었을 때에는 지나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하니, 어찌 그 이발(已發)이 화(和)할 수 있겠습니까. 군자는 이 때문에 근심합니다. 그러므로 궁리하여 선(善)을 밝히고, 돈독한 뜻으로 기(氣)를 거느리며, 함양하여 정성을 보존하고, 성찰하여 거짓을 버려, 이로써 그 혼란(昏亂)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 뒤에야 아직 감동되기 전에는 귀신도 그 끝을 엿볼 수 없을 지극히 텅 비고 지극히 고요하여 거울처럼 맑고 저울처럼 공평한 체(體)를 갖게 될 것이요, 감동됨에 미쳐서는 절(節)에 맞지 않는 것이 없어서 거울처럼 맑고 저울처럼 공평한 작용이 유행하여 머물지 않아 정대하고 광명해져 천지(天地)와 고락(苦樂)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배우는 사람이 힘을 써도 가장 효과를 얻기 어려운 것이 쓸데없는 생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대개 악념(惡念)은 실(實)하더라도 성실하게 선을 행하는 데에 뜻을 둔다면 고치기도 쉽습니다. 쓸데없는 생각은 일이 없을 때에 문득 일어났다가 문득 없어져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온공(溫公)처럼 성실한 뜻을 지니고도 오히려 어수선한 것을 근심하였으니, 하물며 처음 배우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군실(君實 사마광(司馬光))이 사려(思慮)가 어수선한 때를 근심하여, 때로는 밤중에 일어나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은 적도 있으니 참으로 고생을 사서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다른 날 또 말하기를, “군실이 근년에 와서 그런 병을 점차 놓아둘 수 있게 되었다.” 하였습니다. ○ 신이 생각건대, 배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방심하여 생각나는 대로 맡겨 둡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쓸데없는 생각인 줄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배우는 사람은 정좌(靜坐)하여 마음을 수습한 뒤에야 쓸데없는 생각이 요란한 것을 알게 됩니다.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항상 공경을 주로 하여 잠시라도 잊지 말아야 하고, 일을 당하면 하나로 주관하여 마땅히 머물러야 할 데에 각각 머무르게 하고, 일이 없이 정좌하고 있을 때에는 생각이 일어나면 반드시 바로 알아채 무슨 일이든지 악한 생각일 것 같으면 곧 용맹하게 단절시켜, 털끝만큼도 싹을 남겨 두지 말 것이요, 만약 선한 생각이면서 생각해야 할 일이라면, 이것은 선한 생각이 때에 맞는 것입니다. 그 이치를 궁구하여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아 이 이치를 미리 밝혀야 합니다. 만약 이해(利害)와 상관없는 생각으로 착한 생각이라 하더라도 적당한 때가 아니라면 이것은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쓸데없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일부러 싫어하면 더욱 어지럽게 되고, 이 싫어하는 마음 역시 쓸데없는 생각이니 쓸데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에야 가볍게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붙들어서 그것과 함께 가지 말게 하면 그런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다시 그칠 것입니다. 염려가 어지러울 때에, 이 마음으로 살펴 깨달아 그것이 쓸데없는 생각인 줄 알고, 끌려서 함께 가지 않으면 차츰 스스로가 그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힘을 써서 아침저녁으로 힘쓰면서 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말고 게으른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힘을 얻지 못하여 가슴이 답답하거나 우울한 생각이 들 때에는, 역시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속을 정결하게 하여 일념(一念)도 없게 하고, 기상(氣象)을 맑고 온화하게 하여, 오랫동안 순수하게 익혀서 엉겨서 정해지면, 항상 이 마음이 우뚝하게 서서, 사물에 끌려다니지 않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여 뜻과 같지 않은 것이 없게 되고, 본체의 밝은 것이 가려지는 바가 없어서, 밝은 지혜가 비출 적에 기준에 잘못됨이 없을 것입니다.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정(定)한 연후에 광명(光明)이 있는 것이니, 만약 늘 바뀌고 옮아가 안정되지 않으면, 어떻게 빛이 나겠느냐.” 하였습니다. 급하게 조석(朝夕)으로 효과가 나타나기를 바라다가 효과가 없으면 곧 타락(墮落)하는 생각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정심(正心)은 평생을 두고 할 사업으로, 그 중요한 것은 방씨(方氏)가 이른바 “마음이 비어 있으면서도 주재(主宰)가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유념(留念)하시옵소서.


제9장 검신(檢身)

신이 생각건대, 정심(正心)은 안을 다스리는 것이요, 검신(檢身)은 밖을 다스리는 것이지만, 이것은 사실 동시에 하는 일이요, 오늘 정심을 하고 내일 검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공부에 안과 밖의 구별이 있기 때문에 두 장으로 나눈 것입니다.


 

몸을 공경하고 예법을 삼가는 공부에 대하여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공경하지 않음이 없지만 몸을 공경하는 것이 큰일이 된다. 몸이라는 것은 아버지의 가지이니, 감히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몸을 공경하지 못하면 이것은 어버이를 상하게 하는 것이요, 그 어버이를 상하게 하는 것은 그 뿌리를 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 뿌리를 상하게 하면 가지도 따라서 죽는다.” 하였다. 《예기(禮記)》 아래도 이와 같다. ○ 공자의 말씀은 여기까지이다.

장락 유씨(長樂劉氏 유이(劉彛))가 말하기를, “몸은 비록 내게 있는 것이지만 그 기운은 어버이로부터 받았고 선조로부터 전해진 것이니, 자기가 가볍게 생각하여 욕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군자는 음탕한 소리와 어지러운 미색(美色)을 듣고 보는 데 머무르지 않고, 음란한 풍악과 사특한 예절에 마음을 쓰지 않으며, 태만하고 간사하고 편벽한 기운을 몸에 두지 않아서, 귀ㆍ눈ㆍ코ㆍ입ㆍ마음ㆍ앎[知] 등의 모든 것이, 모두 순하고 바름을 말미암아 그 의(義)를 행한다.

서산 진씨(西山眞氏)가 말하기를, “군자가 스스로 수양하는 것은 다른 것이 없다. 안팎으로 노력을 다하는 것뿐이다.” 하였다.


예법과 음악은 잠시도 몸에서 떠날 수 없는 것이니 중심이 잠시라도 화평하지 않고, 즐겁지 않으면 야비하고 간사한 마음이 들어오며, 외모가 잠시라도 장엄하지 않고, 경건하지 않으면 태만한 마음이 들어온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들어온다[入]는 한 글자에서 외부의 유혹을 받아 그렇게 되는 것이요, 본심에 실로 이런 나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본래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안을 차지하여 주인이 될 수 있다면, 이것이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사람은 예법이 있으면 편안하고 예법이 없으면 위험하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법이 없으면 손발을 둘 데가 없고, 귀와 눈을 더할 데가 없어서, 진퇴(進退)하고 읍양(揖讓)하는 데에 규칙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거처하는 데는 어른과 어린이가 그 분별을 잃으며, 집안에서는 삼족(三族)이 그 화목을 잃으며, 조정에서는 관작(官爵)이 그 차례를 잃으며, 사냥하고 무예를 닦는 일이 그 계책을 잃으며, 군중(軍中)에서는 무공(武功)이 그 법칙을 잃으며, 궁실이 그 절도를 잃으며, 양정(量鼎)은 그 원모습을 잃으며, 맛이 그때를 잃으며, 음악이 그 절차를 잃으며, 수레가 그 식(式 수레 위에 설치한 가로댄 나무)을 잃으며, 귀신이 그 흠향함을 잃고, 상사(喪事)에 그 슬픔을 잃으며, 변명하며 연설해도 당(黨) 당은 유사(類似)함이다.을 잃으며, 벼슬이 그 체모를 잃고, 정사가 그 시책(施策)을 잃으며, 몸에 지니고 앞에 두는 모든 행동이 그 마땅함을 잃는다.” 하였다. ○ 〈관의(冠義)〉에서 말하기를, “사람이 사람 된 까닭은 예의(禮義)가 있어서이다. 예의의 시초는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안색을 가다듬고, 말씨를 순하게 함에 있다. 몸가짐이 바르고, 안색이 차분하고, 말씨가 순해진 뒤에 예의가 갖추어져서 군신 관계가 바로 서고, 부자간에 친해지며, 장유(長幼) 간에 화목해진다. 군신 관계가 바로 서고, 부자간에 친해지고, 장유 간에 화목해진 뒤에 예의가 서는 것이다.” 하였다. ○ 장자(張子)가 말하기를, “공부하는 이가 예의를 버린다면 배불리 먹고 종일토록 아무것도 생각하고 일하는 것이 없어 하민(下民)들과 똑같이 되고, 하는 일이라고 해야 옷 입고 밥 먹는 것과 잔치를 벌이고 노는 즐거움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 어떤 이가 정숙(正叔) 선생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4, 50년간이나 예법대로 삼가셨으니, 매우 수고롭고 괴롭겠습니다.”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날마다 편안한 곳으로만 다니는데 무엇이 괴롭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날마다 위태로운 곳으로 다니니 그것이 수고롭고 괴로운 일이다.” 하였다.

이상은 몸가짐을 경건하게 하고 예대로 삼가는 공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위의(威儀) 용지(容止)의 법칙에 대하여


○ 《시경》에 이르기를, “주밀한[抑抑] 위의(威儀)는 반듯한 덕이로다. 공경하고 조심하는 위의는 백성의 법칙이로다.” 하였다. 《시경》 〈대아(大雅) 억지(抑之)〉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억억(抑抑)은 주밀한 것이요, 우(隅)는 가장자리 모가 난 곳[廉角]이다.” 하였다. ○ 정씨(鄭氏)가 말하기를, “위의에 주밀하고 자세한 사람은 그 덕이 반드시 엄격하고 바르다. 그러므로 옛날 어진 이는 도를 행하고 마음을 평정하고 밖을 보고도 안을 알 수 있었으니, 궁실(宮室)의 제도에서 안에 먹줄을 쳐 곧게 하면 밖에서도 가장자리의 모가 반듯한 것과 같다.” 하였다.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군자가 도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용모를 움직일 때에는 사나움과 거만함을 멀리하고, 안색을 바르게 하여 믿음을 가까이하며, 말을 하는 데에는 비루하고 이치에 어긋난 것을 멀리함이다. 제기[籩豆] 같은 것에 관한 일은 담당자가 따로 있는 것이다.” 하였다.《논어》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귀하다는 것은 소중하다는 것과 같다. 용모는 온몸을 들어 말한 것이다. 사나움[暴]은 거칠고 사나움이요, 거만한 것[慢]은 버릇없는 것이다. 믿음[信]은 충실한 것이니, 안색을 바르게 하는 데에 믿음을 가까이한다 함은 얼굴빛으로만 장엄함이 아니다. 사(辭)는 언어요, 기(氣)는 성기(聲氣)요, 비루한 것은 평범하고 누추한 것[凡陋]이다. 어긋남[倍]은 배(背)와 같으니 이치에 어긋남을 말하는 것이다. 변(籩)은 대그릇이요, 두(豆)는 나무 그릇이다. 이 글의 뜻은, 도(道)는 어디고 있지 않은 곳이 없지만 군자가 중히 여겨야 하는 것은 이 세 가지 일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몸을 닦는 요점이요, 정사를 하는 근본이니 공부하는 이가 마땅히 잘 보존하고 보살펴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어길 수 없는 것이다. 변두에 관한 일 같은 것은 그릇과 관련한 작은 제도로, 도 전체로 보면 함께하지[該然] 않는 것이 없지만 거기에 대한 소관은 맡은 이가 할 일이요, 군자가 중히 여길 바가 아니다.” 하였다. ○ 또 말하기를, “용모와 사기(辭氣)는 이것이 바로 덕의 표시[符]이다.” 하였다. ○ 여형공(呂滎公 여희철(呂希哲))이 항상 말하기를, “후학(後學)들은 모름지기 기상(氣象)을 잘 알아야 하니, 기상이 좋을 때는 모든 일이 다 잘된다. 기상이라는 것은 말과 태도의 경솔하고 진중함과 빨리하고 천천히 하는 것에서 넉넉히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군자와 소인을 분별할 뿐만 아니라, 귀하고 천하며 오래 살고 일찍 죽음도 이에 의하여 정해진다.” 하였다.


앉을 때에는 시동(尸童)같이 하며 서 있을 때에는 재계하는 것과 같이 한다. 《예기》 아래도 이와 같다.

정씨(鄭氏)가 말하기를, “시동이 신의 자리[神位]에 있는데, 앉을 때에 반드시 의젓하게 앉아 있어야 하니, 앉는 법이 반드시 시동이 앉아 있는 것처럼 해야 한다. 사람이 기대어 서 있으면 거만하고 공손하지 못함이 많으니, 재계하지 않을 때라도 마땅히 제사 지내기 전에 재계할 때와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 사씨(謝氏)가 말하기를, “명도(明道) 선생이 종일 단정히 앉아 있기를 흙으로 빚은 사람[泥塑人]처럼 있다가도 사람을 대할 때면 온화한 기운으로 한덩어리가 되었으니, 이른바 바라보면 장엄[儼然]하다가도 곧 온화하다는 것이다.” 하였다. 정자(程子)가 공부하는 이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나[顥 정자의 이름]를 이렇게 보지만 나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다.” 하였다.


시선이 낯으로 올라가면 거만한 것이요. 띠[帶]로 내려가면 근심하는 것이요, 옆으로 가면 간사하다.

여씨(呂氏)가 말하기를, “얼굴보다 높게 보는 자는 기운이 교만하니 그가 남들에게 겸손한 태도로 대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띠보다 낮게 내려가는 자는 그 정신이 나간 것이니 마음속에 근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눈길이 가면 고개가 돌아가니 반드시 부정한 마음이 가슴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군자로서 삼가야 할 일이다.” 하였다.


썰어 놓은 것이 반듯하지 않으면 먹지 않으며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으셨다. 《논어》 ○ 공자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잠시도 바른 데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 사씨(謝氏)가 말하기를, “성인은 마음이 바른 데에 자리 잡았으므로 바르지 못한 자리에는 조금이라도 있을 수 없다.” 하였다.


옛날 군자는 반드시 옥을 차는데, 오른쪽에는 치(徵)와 각(角)으로 하고 왼쪽에는 궁(宮)과 우(羽)로 하였다. 《예기》 아래도 이와 같다.

진씨(陳氏)가 말하기를, “치ㆍ각ㆍ궁ㆍ우는 옥소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말한 것이다. 치는 일[事]이 되고 각은 백성이 되기 때문에 오른쪽에 있으며, 오른쪽은 동작하는 방위가 되는 것이다. 궁은 임금이 되고, 우는 물건이 되는데, 임금의 도는 고요하여야 하고 물건의 도는 쌓여야 하기 때문에 왼쪽에 있으며, 왼쪽은 역시 일이 없는 방위이다. 상(商)을 말하지 않은 것은 혹 그것이 서녘의 쌀쌀한 가을 소리[肅殺之音]이기 때문에 버린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나아가는[趨] 데에는 채제(采齊)의 시로 하고 행하는 데에는 사하(肆夏)의 시로 하여 빙 도는 것 도는 것을 말한다.은 규(規)에 맞고, 꺾여 도는 것은 구(矩)에 맞아, 나아갈 때면 읍하고 물러나서는 날린[揚] 연후에야 옥 소리가 울린다. 그러므로 군자가 수레에 있으면 방울 소리[鸞和之聲]를 듣고, 걸어갈 때는 패옥을 울린다. 그러므로 그르고 치우친 마음이 들어갈 곳이 없다.

진씨(陳氏)가 말하기를, “나갈 때에는 채제(采齊)의 시를 노래하여 절차로 삼고, 행할 때에는 사하(肆夏)의 시를 노래하여 절차로 삼는다. 규에 맞는 것은 둥근[圓] 것이요, 구에 맞는 것은 모난[方] 것이다. 앞으로 나가면 그 몸이 약간 굽어 읍하는 것 같고, 뒤로 물러나면 그 몸이 조금 들리기 때문에 날린다고 하는 것이다. 나가고 물러나고, 구부리고, 쳐드는 것이 모두 절차에 맞기 때문에 패옥 울리는 소리가 쟁쟁하여 들을 만한 것이다.” 하였다. ○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몸가짐과 일 처리[動容周旋]가 모두 예법에 맞는 것은 지극히 성대한 것이다.” 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훌륭한 군자는 그 예의가 어긋나지[忒] 않도다. 그 예의가 어긋나지 않으니 사방을 바르게 하리.” 하였다. 《시경》 〈조풍(曹風) 시구(鳲鳩)〉

주자가 말하기를, “특(忒)은 어긋나는 것이니, 일정한 법도가 있고 그 마음이 한결같기 때문에 예의가 어긋나지 않으며, 예의가 어긋나지 않으니, 사방을 바룰 수 있다.” 하였다. ○ 북궁문자(北宮文子)가 말하기를, “위엄이 있어 두려울 만한 것을 위(威)라 하고, 법도가 있어 본받을 만한 것을 의(儀)라 한다. 임금이 임금의 위의가 있으면 그 신하가 두려워 사모하고, 모범을 삼아 본받기 때문에 그 국가를 소유하고 어진 소문이 오래도록 갈 수 있는 것이며, 신하가 신하로서 위의가 있으면 그 아랫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사모하기 때문에 그 벼슬자리를 지키고 종족을 보전하며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하도 모두 이와 같다. 그러므로 위아래가 서로 굳건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위(衛)나라 시에, ‘위의가 점잖으니[棣棣] 골라낼 것이 없다.’ 하였는데, 이것은 군신ㆍ상하ㆍ부자ㆍ형제ㆍ내외ㆍ대소가 모두 위의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주(周)나라 시에 이르기를, ‘벗들이 행동을 추스르는데 위의로써 한다.’ 하였으니, 친구의 도는 반드시 서로 위의로 교훈 삼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지위에 있으면 두려워할 만하고 은혜를 베푸는 것은 사랑받을 만하고, 나가고 물러가는 것은 법도가 될 만하며, 주선하는 것은 본받을 만하고, 용모와 거동은 볼만하고, 하는 일은 모범이 될 만하고 덕행은 본받을 만하고, 성기(聲氣)는 즐길 만하며 동작에 문채가 있고, 언어에 빛이 있어 아랫사람에게 이르니, 이래서 위의가 있다 하는 것이다.” 하였다. 진씨(眞氏)가 말하기를, “예로부터 위의를 논한 것 중에 문자(文子)처럼 갖춘 경우는 없다. 대개 위(威)란 일이 엄하고 사나운 것이 아니요,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높이 두어 의젓한 모습을 사람들이 보고서 경외(敬畏)하는 것이니, 이것이 위(威)라는 것이다. 의(儀)란 일이 수식함이 아니요, 몸가짐과 일 처리가 예법에 맞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위의(威儀)와 행동거지의 법칙에 대해 말씀드린 것입니다.


 

경계하고 신칙함에 게으름이 없는 뜻에 대하여


○ 소공(召公)이 무왕(武王)에게 고하기를, “아, 밝은 임금은 덕을 삼가니, 덕이 성하면 남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군자를 업신여기면 마음을 다하지 않을 것이고 소신을 업신여기면 그 힘을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주서(周書) 여오(旅獒)〉 아래도 이와 같다.

채씨(蔡氏)가 말하기를, “덕이 성하면, 몸가짐과 행동이 모두 예법에 맞은 뒤에 업신여기는 마음이 없을 수 있으니, 덕을 삼가는 것은 그 지극한 데까지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덕이 지극하지 않으면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음을 면하지 못한다. 군자를 업신여기면 군자는 안색을 보고 떠날 것이다. 그들은 분명 고상하게 멀리로 떠나가 버릴 것이니, 어찌 그 마음을 다할 수 있겠는가. 소인을 업신여기면 비록 미천하고 위엄을 무서워하여 부리기 쉬울 것 같지만,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도 신명이 있을 것이니, 또한 어찌 능히 그 힘을 다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귀ㆍ눈의 부림을 받지 않아 모든 법도가 바르게[貞] 하라.

채씨가 말하기를, “정(貞)은 바른 것이다. 귀와 눈이 좋아하는 것에 부림을 받지 않으면 모든 일이 바를 뿐이다.” 하였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혹시라도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다. 조그마한 행실에도 긍지(矜持)를 지니지 않으면 끝내는 큰 덕에 누(累)가 되는 것이니 아홉 길의 산을 만드는 데 한 삼태기 흙이 모자라 공이 무너진다.

채씨(蔡氏)가 말하기를, “혹시[或]는 만일이라는 말과 같다. 긍(矜)은 긍지의 긍이다.” 하였다. ○ 여씨(呂氏)가 말하기를, “이것이 곧 덕을 삼가는 공부이다. 혹(或)이라는 한 글자가 가장 의미가 있으니 잠시라도 쉬면 이것은 덕을 조심함이 아니다.” 하였다. ○ 채씨(蔡氏)가 말하기를, “임금의 한 몸은 모든 변화[萬化]의 근원이니, 진실로 이치에 있어 털끝만큼이라도 다하지 못함이 있으면 이것은 곧 생민(生民)에게 무궁한 해를 끼치는 것으로서 창업 수통(創業垂統)을 잇는 길이 아니다. 무왕 같은 성인도 소공이 이렇게 경계하였으니, 후대의 임금으로서 깊이 생각하고 더욱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신이 생각건대, 마음은 몸의 주인이 되고 몸은 마음의 그릇이 되는데, 주인이 바르면 그릇도 당연히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자연히 바르게 되도록 맡겨 두고 단속하고 관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대학》의 차례에서 수신(修身)이 정심(正心)의 뒤에 있는 것입니다. 그 힘쓰는 방법은 용모와 시청(視聽)과 언어와 위의가 한결같이 천리를 따를 뿐입니다. 형상과 빛깔은 천성(天性)이니, 몸에서 움직이고 고요한 것 어느 하나 천칙(天則) 아닌 게 있겠습니까.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는 이 법칙을 밝히는 것이요, 성의ㆍ정심ㆍ수신은 이 법칙을 따르는 것이니, 두 가지가 모두 갖추어져야만 몸소 행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 중에는, 혹 얼굴과 겉모습을 꾸며 아주 볼만하게 하면서도 안에는 착한 마음을 지키고 보존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데, 이것은 참으로 좀도둑[穿窬]에 비할 것이니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만일 그가 타고난 바탕이 욕심이 적어서 물욕의 유인을 받지 않고 마음 편하게 스스로 즐기며, 다만 안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기만 하면 되지, 꼭 외모에 연연할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 역시 도에는 들어갈 수 없으니, 끝내 세속에서 사람 좋은 사람이 되고 말 뿐입니다. 더구나 외모도 장중하지 못하고 마음도 게으르다면 방탕한 데로 흘러 들어가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 마음을 바로 하고서도 또 그 몸을 단속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몸을 단속하지 않는 것은 마음이 반드시 바름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나 바르기를 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어찌 자기의 몸으로 부정한 데서 편안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몸을 닦지 않음이야말로 마음이 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밝은 생각으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주D-001]공자(孔子)께서 …… 하였다 : 《논어》 〈학이(學而)〉에 보인다.
[주D-002]자장(子張)이 …… 하였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보인다.
[주D-003]서 …… 두었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보인다.
[주D-004]두 …… 말라 : 《예기(禮記)》 〈곡례(曲禮)〉의 원문(原文)은 ‘離坐離立 毋往參焉’이라 되어 있다. 이(離)는 양(兩)의 뜻으로,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거나 나란히 서 있을 때에는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그 옆에 가서 말참견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다.
[주D-005]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 〈헌문(憲文)〉에 보인다.
[주D-006]뜻을 …… 삼간다 : 《대학장구》 전(傳) 6장에 보인다.
[주D-007]정성[誠]은 …… 여긴다 : 《중용장구》 제25장에 보인다.
[주D-008]맹자(孟子)께서 …… 하였다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보인다.
[주D-009]강선(剛善)은 …… 것이다 : 《통서술해(通書述解)》 〈성 상(誠上)〉에 보인다.
[주D-010]부들부들한 가죽을 차고 : 패위(佩韋)는 성질이 급한 것을 늦추는 것을 말하는데, 위(韋)는 부들부들하게 다룬 가죽이다. 이것을 지니면서 자기의 성급(性急)한 것을 고치려 하였다는 서문표(西門豹)의 이야기가 있다. 《韓非子 觀行》
[주D-011]활시위를 차고 다니면서 : 패현(佩弦)은 마음의 해이한 것을 고치는 것을 말한다. 현(弦)은 활시위로서 긴장(緊張)을 뜻한다. 이것을 몸에 차고 다니면서 느슨한 마음을 고치려고 했다는 동안우(董安于)의 이야기가 있다. 《韓非子 觀行》
[주D-012]삼덕(三德)이란 …… 다스린다 :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洪範)〉에 보인다.
[주D-013]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 〈양화(陽貨)〉에 보인다.
[주D-014]안연(顔淵)이 …… 하였다 : 《논어》 〈안연(顔淵)〉에 보인다.
[주D-015]사씨(謝氏) : 이름은 양좌(良佐)요, 자(字)는 현도(顯道)이다. 송(宋)나라의 상채(上蔡) 사람으로, 보통 사상채(謝上蔡)라고 부른다.
[주D-016]주역(周易)에 …… 하였다 : 《주역(周易)》 〈손괘(損卦) 상(象)〉에 보인다.
[주D-017]정(棖)은 …… 있겠는가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일찍이 뜻이 굳센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대답하기를, “신정(申棖)이 굳센 사람입니다.” 하였다. 이 말은 이에 대한 공자의 비평이다. 《論語 公冶長》
[주D-018]일일삼성(一日三省) : 증자(曾子)가 “나는 하루에 세 가지 일로써 나 자신을 반성한다. 다른 사람과 일을 도모하면서 충성스럽게 않았던가, 친구와 사귀면서 미덥지 못하였던가, 배운 것을 익히지 못하였던가?”라고 말했다. 여기서는 증자의 반성하는 태도를 욕심을 막는 본보기로 제시하였다.
[주D-019]널리 …… 행한다 : 《중용장구》 제20장에 보인다.
[주D-020]자신을 …… 한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보인다.
[주D-021]기욕이 …… 얕다 :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보인다.
[주D-022]공자께서 …… 하였다 : 《논어》 〈계씨(季氏)〉에 보인다.
[주D-023]성(誠)은 …… 선악(善惡)이다 : 《통서해(通書解)》 〈성기덕(誠幾德)〉에 보인다.
[주D-024]여귀(厲鬼) : 수한(水旱)과 질역(疾疫)을 맡은 귀신이다.
[주D-025]불경(不敬)하지 …… 것이다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보인다.
[주D-026]천형진성(踐形盡性) : 사람이 타고난 품성을 실천하고 본성(本性)을 지극히 함을 말한다.
[주D-027]시경(詩經) …… 있다 : 《논어》 〈위정(爲政)〉에 보인다.
[주D-028]공자께서 …… 하였다 : 《예기(禮記)》 〈애공문(哀公問)〉에 보인다.
[주D-029]군자는 …… 행한다 : 《예기》 〈악기(樂記)〉에 보인다.
[주D-030]사람은 …… 위험하다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보인다.
[주D-031]관의(冠義) : 《예기(禮記)》의 편명이다.
[주D-032]증자(曾子)가 …… 하였다 : 《논어》 〈태백(泰伯)〉에 보인다.
[주D-033]앉을 …… 한다 : 이 내용은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보인다. 시동(尸童)은 예전에는 제사 지낼 때에 7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제사상 위에 앉히고 그 아이로 조상의 신(神)을 상징하였다.
[주D-034]썰어 …… 않으셨다 : 《논어》 〈향당(鄕黨)〉에 보인다.
[주D-035]옛날 …… 하였다 : 《예기》 〈옥조(玉藻)〉에 보인다.
[주D-036]북궁문자(北宮文子) : 춘추 시대 위(衛)나라의 대부이다. 이름은 타(佗)이다.
[주D-037]주(周)나라 시 : 《시경》 〈대아(大雅) 기취(旣醉)〉를 말한다.
[주D-038]창업 수통(創業垂統) : 어느 왕조를 처음으로 창건한 것을 창업이라 하고 그 후대에 물려준 것을 수통(垂統)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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