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전서 제101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8 ○ 역(易) 1 계묘년(1783, 정조7)에 선발된 이현도(李顯道)ㆍ조제로(趙濟魯)ㆍ이면긍(李勉兢)ㆍ김계락(金啓洛)ㆍ김희조(金煕朝)ㆍ이곤수(李崑秀)ㆍ윤행임(尹行恁)ㆍ성종인(成種仁)ㆍ이청(李晴)ㆍ이익진(李翼晉)ㆍ심진현(沈晉賢)ㆍ신복(申馥)ㆍ강세륜(姜世綸) 등이 답변한 것이다
[무망괘(无妄卦)]
육이(六二)의 ‘불경확 불치여(不耕穫 不菑畬)’에 대해서 주석의 설명이 비록 많으나 결국 명백하지 않다. 이는 “씨 뿌리지 않아도 수확하게 되며 새 밭을 일구지 않아도 좋은 밭이 된다.”고 한 말인가, 아니면 “수확을 전제로 씨 뿌리는 것이 아니며 좋은 밭을 전제로 일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말인가, 아니면 “씨 뿌리지도 않고 수확을 바라며 새 밭을 일구지도 않고 좋은 밭이 되기를 바란다.”고 한 것인가. 아니면 “전혀 씨 뿌리고 갈거나 수확하지도 않고 새 밭을 일구거나 좋은 밭으로 가꾸지도 않는다.”고 한 것인가? 《본의(本義)》에서 “미리 의도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의도적으로 바라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과 《정전(程傳)》에서 “처음부터 어떤 일을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리(事理)의 당연한 것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과연 어떤 뜻인가?
육이의 ‘불경확 불치여’의 뜻은 《정전》의 대의(大義)로 말하면 “씨 뿌리지 않아도 수확하게 되며 새 밭을 일구지 않아도 좋은 밭이 된다.”고 한 것입니다. 무릇 씨 뿌리지 않으면 수확이 있을 수 없고 새 밭을 일구지 않으면 좋은 밭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전》의 뜻이야 어찌 사람들이 씨 뿌리지도 않고 새 밭을 일구지도 않고서 그 수확과 좋은 밭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갈지 않고도 수확하며 일구지 않고 좋은 밭이 된다.”고 한 것은 곧 “사람이 씨 뿌리지 않아도 저절로 수확하게 되며 새 밭을 일구지 않아도 저절로 좋은 밭이 된다.”고 한 것으로, 거기에는 인위적인 노력을 개입시켜서 계산적인 생각을 먼저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어떤 일을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리의 당연함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한 것인데, 이러한 곳에는 말의 표현으로 인해 본뜻을 해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전》의 해석은 말뜻이 얽히고설켜서 마침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주자처럼 ‘전혀 씨 뿌리고 갈거나 수확하지도 않고 새 밭을 일구거나 좋은 밭으로 가꾸지도 않는 것’으로 풀이는 하되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을 마음에 두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으로 말한 것만 못합니다.
주자(朱子)가 《중용(中庸)》의 성(誠) 자를 풀이하면서 “진실하여 허망함이 없는 것이다.[眞實无妄]”라고 하였고 여기에서는 “진실한 이치의 자연스러움이다.[實理自然]”라고 하였는데, 그 차이를 말해 줄 수 있겠는가? 이른바 “허망함이 없다.[无妄]”고 한 것은 기대함이 없다는 뜻도 있다. 구부국(丘富國)이 “오직 그 허망함이 없기 때문에 기대함도 없다.”고 한 것과 호병문(胡炳文)이 “자연(自然)이란 두 글자는 이미 ‘기대함이 없다.[无望]’는 뜻을 겸하였다.”고 하는 것은 과연 주자의 뜻에 부합하는가?
“허망함이 없다.[无妄]”를 《정전》에서는 ‘지극한 성(誠)’으로 풀이하였고 주자는 ‘진실한 이치의 자연스러움’으로 풀이하였습니다. 《정전》에서 말한 성은 곧 《중용》에서 말한 성과 같고 《본의》에서 진실한 이치라고 한 것은 곧 《중용》에서 진실(眞實)이라고 한 실(實)과 같은데, 이는 서로 밝혀 준 것으로서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기(史記)》에서 망(妄)을 망(望)으로 보는 것은 그 뜻이 통하기는 하지만, 《본의》에서 말한 자연(自然)이란 두 글자는 과연 기대함이 없다는 뜻을 겸하고 있는 것이니 만약 일설(一說)을 갖춘다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무망(无望)’이라고 할 때의 망(望)은 ‘고망(顧望)’이라고 할 때의 망(望)과 같은 것이지 ‘성망(誠妄)’이라고 할 때의 망(妄)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허망함이 없다.[无妄]”고 할 때에는 망(望) 자의 뜻은 얕고 망(妄) 자의 뜻이 깊으니, 만약 ‘무망(无望)’이라고 할 때의 망(望)을 자연의 뜻으로만 풀이한다면 아마도 주자의 본뜻을 천명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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