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전서 제102권

경사강의(經史講義) 39 ○ 역(易) 2

 

[대축괘(大畜卦)]

 

선대 학자의 말에 의하면 “축(畜)에는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온축(蘊畜)이라고 한 것은 덕(德)을 쌓는다는 말이고, 축양(畜養)이라고 한 것은 어진 이를 기른다는 말이고, 축지(畜止)라고 한 것은 강건(剛健)함을 중지시킨다는 말이다. 강건하고 독실함은 온축의 큰 것이고, 어진 이를 숭상함은 축양의 큰 것이고, 강건함을 중지시킴은 축지의 큰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단전(彖傳)을 고찰해 보면 그 뜻이 명백하다. 그러나 《정전(程傳)》과 《본의(本義)》의 여러 설명은 다만 온축과 축지의 측면으로만 주로 논의하였고 축양의 뜻에는 약간 소략한 것 같은데, 그것은 어째서인가? 그리고 여섯 효(爻)에서 보면 오로지 축지의 상(象)뿐이지 온축의 뜻은 없는데, 이것도 어찌 의심해야 할 한 가지가 아니겠는가?

[이익진(李翼晉)이 대답하였다.]
이 괘(卦)가 축(畜)이 된 의의는 상(象)으로 말하면 하늘이 산속에 있는 것이 되므로 지극히 큰 것을 축적하는 뜻이 되며, 덕(德)으로 말하면 지극히 강건(剛健)함을 중지시키는 것이니 지극히 올바름을 축적하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이를 나누어 말하면 축양(畜養)과 축지(畜止)와 온축(蘊畜)의 항목이 있으나, 합하여 말하면 “어진 이를 숭상한다.”고 하는 것과 “어진 이를 기른다.”고 하는 것도 모두 덕을 축적하는 일 중의 한 가지이며, 온덕(蘊德)이니 축덕(畜德)이니 하는 것도 축지(畜止) 가운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축(畜)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고 한 것은 정여해(鄭汝諧)의 주석에 나오는 말인데, 비록 단전(彖傳)을 조목별로 풀이하려는 뜻에 근본한 것이기는 하나 사실은 하나의 축(畜) 자의 뜻일 뿐입니다. 《정전(程傳)》이나 《본의(本義)》의 해석이 상세하기도 하고 소략하기도 한 것과 괘(卦)와 효(爻)의 개념이 때에 따라 의의(意義)가 성립된 까닭은 그 분명하고 비근한 것만을 취하여 지극히 크고 지극히 온축된 오묘함을 나타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역경》의 글 내용은 본래 일정한 규칙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인데, 어찌 그것으로 인하여 의심을 일으키는 발단을 삼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예로 미루어 보면 지축(止畜)은 축(畜)의 시기이고, 온축(蘊畜)은 축의 의의이고, 축양(畜養)은 축의 응용입니다. 효(爻)는 시기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여러 효사(爻辭)에서 모두 축지(畜止)의 상으로 말한 것은 어찌 축을 응용하는 시기가 아니겠습니까.


축(畜)에는 축지(畜止)를 받아들여 스스로 멈추는 것도 있고, 상대를 축지시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있고, 서로를 축지시키지 않고 함께 나아가는 것도 있는데, 이를 다 차근차근 지적하여 분명하게 말해 줄 수 있겠는가? 구이(九二)에서 “수레의 복토(伏兔 수레 상자와 굴대의 연결목)가 빠졌다.”고 한 것과 구삼(九三)에서 “좋은 말로 쫓아감이다.”라고 한 것과 육사(六四)에서 “송아지 뿔에 빗장 나무를 묶음이다.”라고 한 것과 육오(六五)에서 “불깐 돼지의 어금니이다.”라고 한 것의 상(象)에는 각각 뜻이 있고 그 뜻에는 각각 취한 것이 있을 것인데, 수레가 어찌하여 구이에 속하며 말이 어찌하여 구삼에 속하는가? 초기에 견제해야 하는 물건으로는 어찌 송아지만 그러하며, 악을 막는 것의 중요함을 어찌 반드시 불깐 돼지에 비유해야 하는가?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자 한다.

[윤행임(尹行恁)이 대답하였다.]
축지(畜止)를 받아들여 스스로 멈춘다는 것은 초구(初九)가 육사(六四)에 대해서 그러한 것이고, 상대를 축지시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육오(六五)가 구이(九二)에 대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서로를 축지시키지 않고 함께 나아간 것은 구삼(九三)이 상구(上九)에 대해서 그러한 것입니다. 대개 초구는 비록 육사와 상응(相應) 관계이기는 하지만 육사는 자기를 억제시키는 것이므로, 축지를 받아들여 스스로 멈춘다고 한 것은 초구를 가리킨 것입니다. 육오는 윗자리에 있으면서 구이를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므로, 상대를 축지시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고 한 것은 육오를 가리킨 것입니다. 구삼은 지극히 강한 자리에 있고 상구는 축(畜)의 마지막에 있으면서 서로를 축지시키지 않고 뜻을 같이하는 것이므로, 서로를 축지시키지 않고 함께 나아간다고 한 것은 구삼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를 종합하여 말하면 상괘(上卦)의 세 효(爻)는 간(艮)으로서 축지를 하게 하는 자이고 하괘(下卦)의 세 효는 건(乾)으로서 축지를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구이가 육오에게 축지를 당하여 나아갈 수 없으니 이는 마치 수레의 바퀴살이 벗겨져서 나아갈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고, 구삼은 상구의 구하는 바가 되어서 위로 나아가려고 하니 마치 말이 달려가는 것과 같아서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소의 강한 힘은 뿔에 있는데 송아지를 예로 든 이유는 아마 초구의 양(陽)은 기르기가 쉬움을 말한 때문일 것이고, 돼지의 맹렬한 힘은 어금니에 있는데 불깐 돼지를 예로 든 것은 아마 구이의 강함은 견제하기가 어려움을 말한 때문일 것입니다. 구이에서 수레의 상(象)을 취한 이유는 나무로 수레를 만들고 나무는 강한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양효(陽爻)에서 수레로 비유를 한 경우로는 소축괘(小畜卦)의 구삼에서 “수레의 바퀴통이 빠졌다.”고 한 것과 대유괘(大有卦)의 구이에서 “큰 수레에 싣는다.”고 한 것과 비괘(賁卦) 초구에서 “수레를 버리고 걸어간다.”고 한 것과 곤괘(困卦) 구사에서 “쇠 수레에 곤혹을 당함이다.”라고 한 것과 기제괘(旣濟卦)의 초구에서 “수레바퀴를 끌어당긴다.”고 한 것과 미제괘(未濟卦) 구이에서 “수레바퀴를 끌어당긴다.”고 한 것과 같은 예가 있습니다. 그러나 곤(坤)이 큰 수레에 배속되므로 음양(陰陽)이 상응(相應)되어야 반드시 수레라고 말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구삼에서 말을 상으로 취한 것은 건은 좋은 말의 상징이 되며 말은 굳건하게 가는 것이므로 반드시 말로써 비유를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송아지와 불깐 돼지로 비유를 취한 것은 이는 비록 음물(陰物)이기는 하나 뿔과 어금니가 강한 것이기 때문에 양의 비유로 취하였을 것입니다.


 

이상은 대축괘(大畜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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