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전서 제103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0 ○ 역(易) 3 |
[간괘(艮卦)] |
진(震)은 움직이는 것이고 간(艮)은 그치는 것이니 이는 두 괘(卦)의 동(動)과 정(靜)이고, “그 등에 그치고 그 뜰에 행한다.”고 한 것은 간괘(艮卦) 중의 동과 정이다. 동에는 동하는 그침이 있고 정에는 정하는 그침이 있으니, 이는 또 동과 정 중에 각각 동과 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이라고 하여 공적(空寂)의 세계로 빠지는 것이 아니며, 그친다고 하여 괴이함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행하여야 할 것을 행하고 당연히 그쳐야 할 곳에 그치고자 할 뿐이니, 이것이 어찌 우리 유학의 도(道)와 이단(異端)이 나누어지게 된 단서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등에 그치고 그 뜰에 행한다.”고 한 것은 마땅히 상대적인 말로 보아야 할 것 같은데, 주자는 문득 그렇지 않다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그친다’고 할 때의 지(止) 자의 뜻은 아주 큽니다. 정(靜)한 중에도 그침이 있고 동(動)한 중에도 그침이 있는 것인데, 그 동한 중에 그침과 정한 중에 그침이 어찌 성명(性命)의 본연(本然)의 체(體)와 이륜(彝倫)의 일용(日用) 중에서 벗어난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도(道)에서 정한 중에서도 제자리에 그치고 동한 중에서도 제자리에 그치면서 심지어 중화(中和)와 위육(位育)의 공까지 이루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저 불교의 종지(宗旨)는 공적의 세계로 빠져 들고 환멸(幻滅)의 지역으로 달려가면서, 벽을 마주 대하고 앉아 마음을 본다고 하니 정한 중에서 그침이 어디에 있으며, 갑자기 돈오(頓悟)한다고 하니 동한 중에서 그침이 어떤 일입니까. 불교에서 상대와 나를 다 잊고 사욕(私慾)을 깨끗이 다 씻어 낸다는 것은 “그 몸을 얻지 못하며 그 사람을 보지 못한다.”고 한 것과 비슷하지만, 그 마땅히 그쳐야 하고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것은 한결같지가 않아서 부자(父子)ㆍ군신(君臣)ㆍ부부(夫婦)의 도를 위배하니 그 밖의 것은 더불어 논할 것이 없으며, 옳고 그름과 붉은색 자주색이 여기에서 판별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칠 데에 안주(安住)하지 못하고 그칠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은 욕심에 가려지고 사심(私心)에 끌려서 그러한 것입니다. “그 등에 그친다.”는 그 한 구는 오로지 사욕을 제거하는 도를 말한 것입니다. 사욕이 이미 제거되면 저절로 나도 잊고 상대도 잊게 되어 그 몸을 얻지 못하고 사람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등에 그친다.”고 한 아래의 세 구는 곧 그 등에 그치는 효과를 말한 것이고 “그 뜰에 행한다.”고 한 것은 그냥 가볍게 말한 것입니다. 만약에 “그 등에 그친다.”고 한 것과 “그 뜰에 행한다.”고 한 것을 상대로 본다면 아마도 효과에 대한 경중(輕重)의 구분을 잃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주자의 견해가 어찌 그만한 까닭이 없겠습니까.
유공도(劉公度)가 묻기를, “노자(老子)가, 하고 싶은 것을 보지 말아야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된다고 한 불견(不見)이 《주역》에서 불견이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까?” 하니, 주자가 답하기를, “노자의 뜻은 사람으로 하여금 보지 않게 하고자 함이다. 그래서 사마 온공(司馬溫公 사마광(司馬光))이 이 한 단락을 풀이한 것은 노자의 본뜻을 터득한 것이니, 노자가 그 마음을 비우라고 한 것은 사람이 생각도 하지 말고 욕심도 부리지 말게 하고자 함이고, 그 배[腹]를 채우라는 것은 사람이 배부르게 양을 채우게 하고자 함이고, 그 뜻을 약하게 하라는 것은 사람이 다투지 않게 하고자 함이고, 그 뼈를 강하게 하라는 것은 사람이 노력을 하게 하고자 함이라고 하였는데, 후세의 사람은 너무 고차원으로 해석한다.”고 하였다. 이 몇 구에서 노자는 자기 사의(私意)로 말한 것이어서 공자(孔子)와는 같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천하를 위하지 못한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니, 이렇게 본다면 결국 어떻게 이 상사(象辭)를 연구하여야 하겠는가?
여기에서 말한 ‘불견(不見)’이란 두 글자는 사실상 노자의 말과 가깝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는 것은 같아도 보지 않는 까닭은 같지 않습니다. 노자는 아예 사물을 접하지 않고서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고, 《주역》에서는 안으로 중심을 지키며 외물(外物)에 동요되지 않게 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예(禮)가 아닌 것은 보지 말고 그칠 데에 그친다’는 것으로 지극히 공정하여 아집(我執)이 없는 상(象)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자가 이른바 ‘곡신(谷神)’이니 ‘현빈(玄牝)’이니 하여 그 도(道)를 칩복(蟄伏)해 있는 용사(龍蛇)로 본 것은 자사(自私)ㆍ자리(自利)의 뜻이 아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도의 가장 정밀함을 얻는 자는 비록 청정(淸靜)하고 간략(簡略)함을 자부하지만 그가 천하를 위하여 하는 것은 형명(刑名)과 법률(法律)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하며 거기서 한 등급 내려오면 상군(商君)이 나무를 세운 것과 진대(晉代)의 청담(淸談)으로 흐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른바 결국이라는 것도 이와 같을 뿐인데, 그 무슨 상(象)을 연구한다고 말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주D-002]상군(商君)이 …… 세운 것 : 전국(戰國) 시대에 진(秦)의 상앙(商鞅)이 효공(孝公)을 도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도모하기 위한 변법(變法)을 반포할 때 백성이 믿어 주지 않을까 염려하여 신용을 보이기 위해서 세 길이 되는 나무를 국도(國都)의 남문(南門)에 세워 두고 백성들에게 이를 옮기면 상(賞)으로 10금(十金)을 준다고 하였으나 모두 괴이하게 여기고 옮기는 사람이 없으므로 다시 50금(五十金)을 준다고 하니 어떤 사람이 옮기므로 즉시 이를 주어 거짓이 아님을 보여 준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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