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전서 제104권

경사강의(經史講義) 41 ○ 역(易) 4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12장]

 

‘험함’과 ‘막힘’이라는 말은 인사(人事)의 측면에서 말해야 하는가, 건곤(乾坤)의 측면에서 말해야 하는가? 주자는 “굳건한 것은 높은 데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것과 같아서 그 험한 것을 알고, 순한 것은 아래에서 위로 나아가는 것과 같아 그 막힌 것을 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인사로써 말한 것이고, 장식(張栻)은 음(陰)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써 험함을 안다고 풀었고, 양(陽)에 막히지 않는 것으로써 막힌 것을 안다고 해석하여 곧장 건곤의 측면에서 설명하였다. 장씨의 설이 비교적 명백한 것 같은데, 《본의(本義)》에서 혹 제대로 참조하지 않은 것인가?

[윤행임이 대답하였다.]
대체로 역은 바로 변역(變易)이 무궁하고 조화(造化)를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대 학자들은 “만약 하나의 효가 하나의 인사(人事)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384효는 384개의 인사에 불과하다.”고 한 것이니, 그렇다면 어찌하여 건곤(乾坤)의 측면에서 말하는 것과 인사의 측면에서 말하는 구분이 있겠습니까. 굳건하면서 험함을 아는 것은 바로 건(乾)의 굳건한 것으로 군자가 그것을 본받고, 간략하면서 막힘을 아는 것은 곧 곤(坤)의 순함으로 군자가 그것을 본받는 것이니, 건과 곤의 건순(健順)은 사람이 본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험하고 막힌 것을 알아 건순을 따르는 것에 대해서는 비록 건과 곤에서 취한 것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역 가운데에서는 반드시 길흉(吉凶)을 상대로 들어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유독 길(吉)만을 말하고 흉(凶)을 말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미워하면 서로 공격하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사랑하면서 서로 공격할 수 있는 것인가?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길(吉)이 있으면 흉(凶)이 있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것이므로, 64괘에서 길흉을 말할 때 대립시켜 말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길흉을 말할 때에는 길을 먼저 말하고 흉을 뒤에 말하며, 선악(善惡)을 말할 때에는 선을 먼저 말하고 악을 뒤에 말합니다. 강유(剛柔)와 정회(貞悔)에 있어서도 다 그러하니, 성인이 붙들어 주고 억누르는 은미한 뜻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章)에서 유독 길사(吉事)만 말한 것은 오로지 ‘사람을 길한 것으로써 인도한다’는 뜻 때문이니, 선대 학자들이 “역은 군자를 위해 도모한 것이다.”라고 한 말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사랑과 미움은 정(情)에서 나오는 것인데 서로 공격하는 것은 그 처한 위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까우면 비록 사랑할 만한 위치이긴 하지만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공격하는 것이고, 멀면 사랑할 만한 정이 있는데도 서로 친하지 않기 때문에 공격하는 것입니다. 미워하여 서로 공격하는 것은 동인괘(同人卦)의 구삼(九三)이 군사를 매복시켜 그 구오(九五)를 미워하는 것과 같고, 사랑하면서 서로 공격하는 것은 겸괘(謙卦)의 육오(六五)가 침벌(侵伐)하여 그 구삼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서기(徐幾) 등 여러 학자들의 주장도 다 근거로 삼은 것이 있습니다.


 

이상은 계사전 하(繫辭傳下) 제12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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